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91화 (91/309)

91화. 솔직한 사람 (5)

[그가 왔다]

3월 19일, 예선전을 3승 무패로 통과한 한국 대표 팀은 일본에 입성했다. 일본 여론은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특히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을 침몰시켰던 이인영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도쿄 호텔에 짐을 푼 한국 대표 팀은 토야마 구장에서 공식 일정에 나섰고, 선수들은 코치의 지도하에 단체 훈련에 열중했다.

[로컬 룰, 경기에 어떤 변수 줄까]

얼마 전 한국 기자들은 도쿄 돔의 특이한 구조와 룰이 경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기사를 냈다.

도쿄 돔은 돔구장답게 그에 맞는 로컬 룰이 적용된다.

공이 천장에 맞아도 인 플레이가 인정되고 야수가 천장에 맞고 떨어진 공을 잡으면 아웃 처리, 하지만 스피커나 조명 시설을 맞추면 홈런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이번 일본 시리즈에서 요코하마 웨일스의 용병 피트 벤자민이 조명 시설을 때리는 타구를 날려 157m홈런을 인정받았는데, 이게 요코하마의 재팬 시리즈 우승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도쿄 돔은 이런 저런 이유로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 이번 대회도 홈런으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 대표 팀은 홈런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신명철 감독은 한 방보다 타선의 조직력을 중시하는 스타일, 한국은 국제대회에서 결정적인 홈런으로 일본을 몰아붙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매번 그런 극적인 드라마를 쓰는 건 어려운 일, 언제까지 한 선수의 한 방에 의지하는 야구를 할 건가.

선수들에게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공격을 주문했다.

‘이하동문’

감독의 요구대로 이인영은 정확한 타격에 집중했다.

작년 시즌 55홈런을 치긴 했지만 타구 질만 보면 중장거리에 가까운 편, 본인도 홈런은 안타를 치다 보면 나온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으니 무리하게 타구를 띄우진 않았다.

‘왜 저렇게 치지?’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기자들은 어린 아이처럼 홈런을 보챘다.

이인영은 WBC 예선전에서 2루타만 3개를 때렸을 뿐, 아직 홈런이 없다. 한국은 물론 일본도 언제 한방이 터질지 주목하고 있는 상황, 훈련이 끝난 후 기자들은 이런 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도쿄 돔은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한데요. 다음 경기에서 호쾌한 한 방 기대해도 될까요?”

“이상한 거에 목숨 걸지 마세요.”

공부 못하는 애들은 꼭 시험에 안 나오는 내용에 집착한다.

로컬 룰이니 뭐니 천장이 어떻다느니, 그런데 그게 경기 중 잘 나오는 상황인가?

아무리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이라도 제일 많이 나오는 건 안타다.

지금 기자들은 이상한데에 집착을 하는데 이게 시험에 안 나오는 내용에 집착하는 학생들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이인영은 타격의 기본은 안타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다들 홈런이 뭐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다들 학창 시절에 공부 못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한 방 먹은 기자는 묘한 웃음을 지었고, 이때 한 기자가 화제를 돌렸다.

“이인영 선수는 학창시절에 공부 잘 하셨나요?”

“묵비권 행사하겠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기자들은 웃음 만발, 이때 한 기자가 틈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인영 선수, 제가 정보를 하나 입수했는데 보육원에 2천 7백만 원을 기부한 게 사실입니까?”

금시초문인 기자들은 귀를 쫑긋 세웠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인영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내용 기사로 보내지 마세요.”

“왜죠?”

“그 아이들은 어른의 애정에 굶주려 있지만 어설픈 호의가 오히려 상처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잠깐 관심 주는 척 하면서 기사만 쓰고 돌아설 생각이시라면 기사 쓰지 마세요. 부탁드릴 게요.”

심각한 얼굴에 기자는 당황했다.

이렇게 좋은 기삿거리를 포기하라니, 하지만 이인영은 딱히 누구의 칭찬을 받기 위해 한 일도 아니고 아이들을 이용해 유명세를 탈 생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시작된 언론 통제, 슈퍼스타는 앞으로도 아이들에 대한 발언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래도 말 안 듣는 기자들은 없는 내용을 긁어모아 기사를 냈고, 이 소식을 접한 임완수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왜 술자리에 안 나오나 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나도 선배로서 뭔가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전지훈련 중,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주워 먹어야지”

대신 성운 라이온즈의 차명석 단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년 시즌, 차명석 단장은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팬들의 민심을 얻어 내외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이인영이 봉사활동으로 좋은 이미지를 형성했으니 우리가 바통을 이어 받으면 구단 이미지도 좋아지지 않을까. 일단 3천 만 원의 기부금을 보육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구단 직원들을 파견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 하지만 아이들은 면식이 없는 외부인을 진심으로 받아주진 않았다.

“선생님, 이 아저씨들은 누구에요?”

“으응~ 인영이 형이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형은 왜 안 왔어요?”

“그래요. 오빠는 왜 안 왔어요?”

역시 찾는 건 곰돌이 형, 그제야 성운 라이온즈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 물품은 전달해야겠지, 이번에 성운 그룹에서 출시한 대형 TV를 보육원에 설치해줬다.

이걸로 보면 오빠 얼굴이 더 잘 보인다는데 정말일까, 아이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

“우와~ 잘 나온다!!”

“역시 큰 게 좋네!!”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TV 앞에 모여들었다.

이제야 TV의 가치를 알아보는 녀석들, 보육 교사들은 한껏 들뜬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도 잘 보이네. 좋다~ ♡’

평소 곰돌이 오빠를 누구보다 잘 따랐던 혜진이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전에 있던 TV는 조금 작아서 어깨경쟁을 해야 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봐도 훤히 보이는 화면,

오빠는 언제 나올까? 입술을 꾹 다문 채 TV에 집중했다.

“박한우 위원님 멕시코 팀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예, 멕시코 하면 많은 팬 여러분들이 축구를 떠올리시는데, 사실 야구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한국이 통산 멕시코를 상대로 5전 전승을 거뒀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명한 캐스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멕시코도 만만치 않다고 띄워줬는데 마지막에 우리가 5연승을 했다는 말은 왜 붙인 건가. 결국 ‘우리 대표 팀이 최고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한국 대표팀이 WBC 2라운드에 진출한 건 2009년 이후 무려 12년만의 경사, 국내 팬들도 설마 한국이 질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투타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1라운드를 통과한 한국,

이번만큼은 뭔가 일을 내지 않을까. 자리를 채운 한국 팬과 휘날리는 태극기가 대표 팀을 향한 기대를 드러냈다.

오늘 한국의 선발 투수는 ST 위너스의 에이스 김성현, 김성현은 특유의 구위를 앞세워 멕시코 타자들은 삼자 범퇴 처리했다.

‘모든 게 완벽해’

신명철 감독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지난 올림픽에서도 수석코치로 참여했지만, 그때에 비해 선수들의 감각이나 몸 상태는 확실히 좋다.

방망이가 조금 일찍 터져준다면 오늘도 쉽게 끝낼 수 있겠지, 이어지는 타선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전인규 선수의 안타!! 선두 타자가 출루합니다.”

“전인규 선수는 이렇게 되면 이번 대회에서 타율 0.538이네요. 이런 큰 대회에서는 미쳐 주는 선수가 있어야 되는데, 제대로 미쳐주고 있습니다.”

다음 타자 김환희는 안타를 치지 못했지만 타구를 2루로 보내면서 주자를 2루로 보냈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곰돌이 오빠의 등장에 혜진이는 큰 눈을 깜빡거렸다.

얼른 끝내고 왔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오빠가 날 미워할 수도 있겠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주기로 했다.

“에이~ 또 안타네.”

“왜 홈런 안 나오지?”

적시타가 나왔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작년에 홈런왕을 먹었다는 곰돌이 형, 그런데 왜 홈런을 못 치는 건가. 이번이 벌써 4번째 경기 관람, 기다림이 길어지는 만큼 초조함은 더해졌다.

"됐어!!“

“오늘도 편안하게 가자고”

한편, 선취점을 낸 한국 벤치는 환희에 휩싸였다.

본인들이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잘 풀리는 대회, 이대로 일본까지 격파하고 본선무대로 진출하는 장밋빛 미래를 꿈꿨지만 인생은 그렇게 마냥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 이게?’

3회 초, 김성현은 2사 주자 1 - 2루에서 호르헤 칼로에게 좌중간을 넘어가는 쓰리 런 홈런을 허용했다.

일반적인 구장이라면 펜스 근처에서 잡혔을 타구, 하지만 도쿄돔은 다른 구장과 달리 외야 펜스가 부채꼴 모양이 아니라 마름모에 가깝다.

당연히 외야 펜스가 그만큼 짧은 편, 일격을 당한 한국 벤치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런 때 홈런이 터져줘야 하는데, 한국 대표 팀은 이번 대회에서 누구도 홈런을 쳐내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인영 - 박혁에게 쏠리는 책임, 하지만 중심타선은 5회까지 이인영의 적시타 외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지면 안 되는데,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혜진이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해외 출장을 간다는 오빠에게 얼른 지고 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이대로 패배하면 삐친 오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됐다.

[따악~!!]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김환희 선수의 안타!! 2사에서 한국이 귀중한 안타를 추가 합니다!!”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이거든요. 제발 한 방만 쳐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7회 말, 김환희가 한국의 11타석 연속 무안타를 깨면서 살아난 분위기,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팬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건 한국 벤치도 마찬가지, 멕시코는 승부를 택했고 이인영은 초구 타격으로 답했다.

따악~!!

“아~ 조금 빨랐나요. 파울 라인을 벗어납니다.”

“밀당은 사양하겠습니다. 이인영 선수라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공이거든요. 괜히 드라마 쓸 필요 없습니다.”

생각보다 안 풀리는 경기에 박한우 위원의 입술은 바짝 메말랐다.

양아버지의 말을 들었는지 슈퍼스타는 2구를 흘려보내 긴장감을 끌어올렸고, 팬들의 아우성은 그만큼 높아졌다.

‘멀리 칠 필요 없지.’

3구를 앞두고 이인영은 외야를 향해 방망이를 겨눴다.

천장을 꿰뚫을 듯 날아가는 홈런이나 펜스를 살짝 넘기는 홈런이나 결과는 마찬가지,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스윙에 장식을 덧붙이진 않았다.

[따아악~!!]

“어?!! 어?!!”

“나왔다~ 아!!!!”

그렇게 모두가 그렇게 기다렸던 한방이 터져 나왔다.

경기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었지만, 혜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쁜 아니라 오빠가 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홈런, 마음을 옥죄던 죄책감도 조금은 씻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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