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솔직한 사람 (3)
[이인영은 누구인가]
결전을 앞두고 대만 여론은 이인영을 집중 견제했다.
최근 대만은 한국 대표 팀을 상대로 선전을 거듭했다. 타이중, 도하 참사 그리고 지난 2013 WBC, 프리미어 12,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대만에게 패하며 체면을 구겼다.
“한국 왈 : 우리가 대만은 이긴다.”
“대만 왈 : 일본은 못 이겨도 한국은 이긴다.”
사실 양측은 그동안 이런 마음으로 경기를 치렀다.
국제대회에서 일본상대로 조금 잘 했다고 한국은 대만은 은근슬쩍 한 수 아래로 취급했고, 대만은 대만대로 한국을 무시했다.
1등 보다는 어중간한 지위가 무시를 당하기 마련, 한국이 일본 - 대만 양국에게 무시당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이인영은 일본의 수준급 투수들을 말 그대로 두들겨 팼다. 아시아 최강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그런 굴욕을 당할 줄이야, 대만 여론은 한국 대표 팀보다 이인영이라는 선수 한 명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한 건 당연, 훈련이 끝나자 통역을 대동한 이인영은 잠깐 시간을 냈다.
“대만을 꺾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 한 대만 기자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상하네요. 한국은 최근 대만과의 경기에서 지는 경기를 반복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한국을 떠나기 전 대만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얼핏 들으면 싸우자는 말투, 이인영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나름대로 해명에 나섰다.
“지난 2006 WBC였죠? 어느 일본 선수가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도록 느끼게 이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은 모두 발끈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겁니다. 그만한 각오로 경기에 임하는 건 선수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자세죠. 대만도 그런 자세로 그동안 한국과 경기를 치러왔을 겁니다. 그렇죠?”
대만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인영은 못 다한 말을 마무리 했다.
“하지만 한국 대표 팀은 그런 각오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잠깐의 성공에 취해 자만했고, 발전하지 못했죠. 그런 방심이 대만의 추격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대회에서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대만이 아직 한국을 넘긴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그런 인터뷰를 한 겁니다. 설명이 부족합니까?”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기분이랄까, 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어느 정도의 스코어를 예상하십니까?”
“그건 저도 모르죠. 다만, 실점을 최소화하고 싶다면 저는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대만 투수진으로는 절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거듭 되는 도발에 대만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대만은 언제나 투수 부족에 시달린다. 실제로 지난 2016년 이후, 대만은 용병 타자를 영입한 적이 없다.
투수가 부족하다는 뜻, 한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대만은 상황이 더 안 좋다. 그래서 대만은 국제대회가 열리면 일본으로 진출한 선수들을 소집해 구멍을 채울 수밖에 없다.
내가 인정하고 있는 단점이라도 남이 말하면 기분이 나쁜 법, 기자는 대만 투수들이 피하지 않는다면 어떤 공이든 쳐낼 자신이 있느냐며 되물었다.
“그렇게 하겠다면 저야 환영할 일이죠.”
“좋습니다. 지켜보겠습니다.”
기자들은 글씨 하나 빼놓지 않고 이인영의 도발을 기사화 했다.
벌떼같이 일어나는 대만 여론, 당장 저 건방진 놈의 주둥이를 막으라며 난리를 쳤다.
‘재미있네. 이런 거였구나.’
반면 주모자는 여유만만, 일본의 도발에 발끈했던 우리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쿨 하지 못했던 과거, 이번 대회는 도발을 당하더라도 냉정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너는 변한 게 없구나.”
“뭐가요?”
“건방진 거”
김환희(베어스 소속)는 그런 후배의 옆구리를 찔렀다.
지난 한국 시리즈에서 대놓고 ‘당신들이 떨어져’라고 했던 녀석, 시리즈는 베어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팬들은 찝찝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인영을 철저하게 피해서 얻은 승부, 그런데 피했다고 하기에도 뭣한 게 한국시리즈에서 베어스는 이인영에게 홈런을 4개나 헌납했다.
정확히 말하면 방어는 했는데 맞을 건 다 맞은 셈, 그런데 우리가 도망쳤다고 욕하면 어쩌라는 건가.
적일 때는 증오스러웠지만 아군이라면 든든한 녀석,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지지 마세요.”
“왜? 우리 같은 팀이잖아?”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이인영에게 베어스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잠시 같은 배에 탔다고 동료로 여기진 않았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2021 WBC 예선전이 열리는 대만 우커창 구장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이인호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우커창 구장이 최근에 지어진 야구장인데, 한국의 구장에 비하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교할 걸 비교하셔야죠.”
박한우 위원은 초반부터 강한 멘트를 날렸다.
대만에는 1만 석을 넘는 구장을 찾기도 어렵고 시설도 많이 낙후 되서 국제대회를 유치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그걸 알고 있는 대만 야구 협회는 최근 1만 5천 석 규모의 우커창 구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한국의 야구장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 우릴 따라잡겠다는 의지는 이해하겠는데 아직 멀었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인호 위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더는 묻지 마세요. 방송 그렇게 위험하게 하는 거 아닙니다.”
이인호는 알아서 발을 뺐다.
아들이 이미 대만에 도발을 걸었는데, 나까지 여기서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려서 좋을 게 뭐가 있나.
거기다 하고 싶은 말은 박한우 위원이 했으니 덧붙일 것도 없었다.
“어이쿠~ 이름은 확실히 알렸네.”
중계석으로 옮긴 자리, 박한우 위원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대만 팬들의 외침에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양아들을 두고 뭐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월드 스타 아닌가?
하지만 이인호는 씩 웃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이 친구야.”
“뭐가요?”
“말을 하면 받아줘야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가만히 있는데 왜 건드리세요? 어차피 제 아들 욕하는 거잖아요.”
“스타는 원래 욕먹는 거야. 이 친구는 그걸 모르네.”
박한우는 반응이 없는 후배를 툭툭 건드렸다.
나도 칭찬을 하는데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는 사이 PD가 중계 시작 사인을 줬다.
애국가 제창과 선수 소개로 스타트를 끊은 중계, 1회 초 대만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의 선발 투수는 창원 레이더스의 선발 이홍기,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는 스타일이라 대만 타자들과는 상성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여론에서도 염려를 표했지만, 신명철 감독은 보란 듯이 이홍기를 앞세웠다.
‘이홍기면 괜찮아.’
이홍기는 묵직한 빠른 볼과 체인지업이 주무기, KBO 투수들의 구위는 트리플 A 투수들과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커브와 체인지업 구사력, 이홍기는 올 시즌 체인지업 피안타율이 0.223에 그쳤다. 피장타율은 겨우 0.389, 구위만큼은 특급 용병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뭣보다 대만 타선에 거품이 끼었다는 건 사실, 일례로 대만에서 2년 연속 4할 30홈런을 치고 일본으로 건너간 천즈웨이는 2019년에 타율 0.245, 홈런 9개에 그쳤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25에 홈런 3개, 부상까지 당하며 규정타석도 못 채웠다.
수준급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들이 넘쳐나는 일본에서 한계를 드러낸 것, 대만 타자들이 이홍기의 체인지업을 건드릴 수 있을까?
카운트만 유리하게 끌어간다면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145km, 오늘 이홍기 선수의 구위 어떻게 보십니까?“
“괜찮네요. 지금 구위만 유지하면 됩니다.”
이홍기는 체인지업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했다.
체인지업과 직구의 회전이 거의 비슷해 구별하기 어려운 편, 빠른 볼 구위가 떨어지면 흔들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오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끝난 대만의 1회 초 공격, 한국이 1회 말 공격에 나섰다.
“자, 타석에는 전인규 선수가 들어섭니다. 작년 시즌 타율 0.334, 홈런 7개, 47타점을 기록했습니다.”
“2년 차 징크스라는 말이 무색한 시즌을 보냈죠. 이인영 선수가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이 선수도 한국 야구를 이끌 기둥 중 하나입니다.”
오늘 대만의 선발은 좌완 장쩌웨이, 대만에선 보기 힘든 좌완 투수다.
18살에 일본 프로 팀에 스카우트 됐지만 기대만큼 성장은 못한 편, 그래도 지난 5년 동안 1군에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작년 시즌 성적은 승리 없이 2패, 평균자책점 3.53, 47이닝 동안 삼진 43개를 잡아내며 불펜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좌투수가 부족한 건 한국도 마찬가지, 좌타자에 힘이 떨어지는 전인규가 삼유간을 노리는 건 당연했다.
‘나한테도 관심 있었나?’
초구를 지켜본 전인규는 대만의 내야진을 살폈다.
친구가 너무 눈에 띄어서 나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대만 대표팀은 국내 프로팀들이 전인규를 상대로 쓰던 시프트를 그대로 들고 나왔다.
한눈에 봐도 좌측으로 편중된 그물망, 전인규는 아마추어에서나 나올 법한 잔재주를 꺼내들었다.
딱~!
“어? 이건 뭔가요?!! 2루수가 잡았지만 던지지 못합니다!! 전인규 선수의 내야 안타!! 선두 타자가 출루하는 대한민국 대표 팀입니다!!”
“지금은 슬랩 번트가 나왔네요.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번트는 보통 타구 속도를 죽이는데 초점을 두기 마련, 하지만 슬랩 번트는 조금 다르다.
번트 자세를 잡은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기 위해 배트를 짧게 휘두르는데, 공을 후려치는 것처럼 보여 슬랩(Slap)이라는 말이 붙었다.
야수진의 수비 능력이 떨어지는 아마야구에서나 나올 플레이, 그런데 이 기술을 국가대표 경기에서 볼 줄이야, 제대로 농락당한 대만 대표 팀은 인상을 구겼다.
‘나도 한 번 대 볼까?’
다음 타자 김환희도 번트 자세를 잡았다.
KBO 최강 팀 베어스의 리드오프를 책임질 정도로 재주가 많은 선수다.
거기다 좌완에게도 강한 편, 강공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페이크 번트로 대만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음 타자는 3번 이인영, 마음에 안 든다고 날 맞출 건가?
겁이 날 게 없는 김환희는 시선에서 멀어지는 초구를 지켜봤다. 장쩌웨이의 빠른 볼 평균 구속은 140km 정도, 이 정도면 충분히 공략가능 했다.
따악~!!
“2구 타격!!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전인규 선수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 갑니다!! 무사 주자 1 - 3루!! 여기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국내 최고의 테이블 세터가 최고의 밥상을 차려줬네요. 이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홈 팬들의 야유, 하지만 그 목소리엔 상대를 향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숨어있었다.
‘내가 말 했지? 30년 동안 덤벼들 생각이 못 들도록 밟아주겠다고’
이인영은 초구를 잔뜩 노리고 들어갔다.
길 게 끌 것 없이 여기서 한 방 날리면 끝 아닌가. 하지만 1 - 2구는 모두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다.
“승부해!!”
“승부 하라고!!”
야유에서 질책으로 바뀐 팬들의 원성, 절벽에 몰린 장쩌웨이는 다시 빠른 볼을 던졌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완전히 벗어났다.
‘겁나면 피하던가.’
씩 웃던 이인영은 핼멧을 고쳐 쓰며 자세를 잡았다.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실점을 최소화 하고 싶다면 날 거르라고 도발하지 않았나.
대만 입장에선 맞아도 치욕 걸러도 치욕, 이쪽은 손해 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