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솔직한 사람 (2)
“야, 너 살아 있냐?”
[살아 있으니까 전화를 받았죠.]
“왜 이렇게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
2021년 1월 3일, 이인영은 팀 동료 임완수와 전화 통화를 주고받았다.
작년부터 가끔 술자리를 같이하며 친분을 쌓았는데 요즘 통 교류가 없는 사이, 연봉협상도 기분 좋게 끝났고 간만에 술 한 잔 하자는 유혹이 이어졌다.
[어… 그거 꼭 오늘 해야 되나요?]
“왜?”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 혹시 여자냐?”
[그렇다고 해두죠 뭐]
좀처럼 속을 알 수가 없는 대화, 선약이 있는데 어쩌겠나. 결국 임완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수들만 모아서 소소한 연회를 즐겼다.
“야, 그 자식 좀 바뀐 거 같지 않냐?”
“그런 것 같다. 예전엔 부르면 재깍 달려 왔잖아.”
이인영의 반기는 좋은 안주거리가 됐다.
하는 짓이 귀엽고 야구도 열심히 해서 좋게 봐줬는데, 이제 좀 컸다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그렇게 속이 시커먼 것 같진 않은데, 갑자기 변해버린 후배가 조금 어렵게 다가왔다.
“다음에는 무조건 나오라고 해야겠다. 안 나오면 우리한테 뭔가 감정이 있는 거야.”
“나올 여유나 있겠냐? 그 자식 대표 팀이잖아.”
“아… 그랬었지.”
이때 임완수가 변호에 나섰다.
우리야 개인 운동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지만 이인영은 다음 3월에 열리는 WBC 국가 대표 팀에 합류하게 됐다. 여자와 선약이 있다는 변명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겠지,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줬다.
“안녕하세요.”
“어머, 또 오셨어요?”
“누가 보면 제가 매일 오는 줄 알겠네요.”
한편, 오후 운동을 끝낸 이인영은 보육원을 방문했다. 일주일만의 재방문, 반신반의하고 있던 아이들은 돌아온 곰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형, 우리 축구해요.”
“아니야, 술래잡기”
놀아주긴 하는데 요구사항이 다 다른 게 문제, 결국 이날 놀이는 선생님의 뜻대로 슈링클스로 정해졌다.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 뒤 잘라내 오븐에 구우면 크기가 줄어들면서 플라스틱 액세서리로 변하는 신기한 놀이, 이런 걸 처음 접해보는 이인영은 아이들 틈에 끼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오빠 뭐 그려요?”
“꽃”
곰 옆에 자리를 잡은 혜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가 꽃을 그리다니, 좀 더 남자다운 걸 그리라며 핀잔을 줬다.
“이거 액세서리 할 거잖아. 당연히 귀여운 걸로 그려야지”
“오빠도 귀여운 거 좋아해요?”
“응, 너도 귀여우니까 좋아해보려고”
뜬금없는 고백에 어린 소녀는 레이저빔을 발사했다.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불안, 이러다 나중에 안 오는 거 아닐까. 이 오빠는 왜 우리에게 잘 해주는 건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림이 구워지는 동안은 자유시간, 몇 몇 아이들은 낮잠에 빠졌고 그 사이 혜진이는 본격적인 취조에 나섰다.
“오빠, 왜 우리한테 잘 해줘요?”
“글쎄… 넌 오빠의 친절에 이유를 붙이고 싶니?”
예상 못한 반격에 소녀는 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게 잘 해주는 건 당연, 부모의 사랑에 이유를 붙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부모님은 날 여기에 버려두고 돌아오지 않는 건가.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시련, 그래서 어른의 애정을 그리워했지만 한편으론 그 진심이 의심스러웠다.
이러다 정말 훌쩍 떠나면 속상한 일, 손가락 약속까지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이유가 궁금하면 말해줄 수도 있어.”
“그럼 말 해줘요.”
당신의 진심을 꼭 들어야겠다는 눈빛, 이인영은 씩 웃으며 나름대로 해명에 나섰다.
“솔직히 오빠 여기에 온 거 세 번째야.”
“두 번째 아니에요?”
“너희들 없을 때 몰래 왔다 갔어. 선생님이 너희들하고 만나지 말라고 했거든”
아무 준비도 없이 아이들과 접촉하면 오히려 상처를 줄 뿐이라는 조언대로 행동한 것 뿐, 하지만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이인영은 하루 종일 꺼림칙한 분위기에 시달렸다.
“그런데 너희들 안 보고 그냥 가니까 오빠가 마음이 편치가 않더라.”
“왜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도 답을 찾고 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걸 보면, 봉사에 나름대로 의미와 즐거움을 두고 있다는 뜻이겠지.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오빠가 어떤 이유로 여기에 있든 너희들한테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렇지?”
“뭐… 그건 그렇지만요.”
“그렇지? 그럼 그냥 고마워요~ 하면 되는 거야. 어려울 거 없잖아?”
혜진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진심이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마음을 열기엔 조금 이르지 않을까, 별 말없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오빠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요?”
“당분간 여기 못 올 것 같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소녀의 얼굴은 굳어졌다. 역시 이 사람도 마음만 남겨 놓고 떠나가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오해를 풀기 해명에 나섰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오빠 야구 선수라 잠깐 해외에 가 있어야 돼”
“얼마나 오래 있는데요?”
“글쎄… 3월 초… 아니, 계속 이기면 3월 말까지?”
“그럼 빨리 지면되잖아요.”
자비 없는 망언에 슈퍼스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에게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걸 보면 내가 마냥 싫진 않은 모양, 오빠가 다시 오면 좋겠냐며 고백을 유도했다.
“뭐… 싫지는 않아요.”
“확실하게 말해야지, 오빠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 그냥 빨리 와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녀석, 내가 너무 몰아세운 걸까. 슈퍼스타는 미안하다며 얼른 다독였다.
그 사이 완성된 액세서리, 생전 처음 만들어 본 액세서리가 신기했는지 아이들은 자기 것을 다른 아이와 비교해 보며 즐거워했다.
“오빠, 이거 줄게요.”
“정말 오빠 주는 거야?”
혜진이는 성의를 다 해 만든 작품을 오빠에게 선물했다. 다시 온다고 약속했지만 그래도 날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선물, 그걸 잘 알고 있는 이인영은 맞교환을 신청했다.
“오빠 앞으로 이거 꼭 가지고 다닐게. 너도 그거 보면서 오빠 떠올려야 된다?”
“네에~ ”
이제야 환히 웃어 보이는 녀석, 떠날 시간이 되자 이인영은 또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도돌이표,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 * *
[한국대표팀 오늘 출정식 올린다]
시간은 흘러 2월 14일, 한국대표팀은 서울 컨벤션 센터에서 2021 WBC 출사표를 던졌다.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이끈 김정길 감독은 공식 사퇴, 도쿄올림픽에서 수석코치로 활약한 신명철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성운 라이온즈의 한승규 감독이 사퇴하면서 친정 팀 복귀론에 힘이 실리고 있지만 그건 아직 협의 중인 일, 신명철 감독은 한국 야구의 위상을 회복할 때가 왔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지역 예선, 한국에서 안 한다]
대회 유치 과정에서 KBO는 이미 굴욕을 맛 봤다.
WBC 예선경치 유치를 두고 경쟁했지만 대만에게 참패, 사실 KBO는 예선전을 추진할 여력도 안 됐다.
지난 2017 WBC에서 한국 팀이 예선 탈락하고 여기에 흥행부진까지 이어지며 막대한 적자를 떠안은 게 원인, 거기다 대만은 2012년부터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 리그를 개최해 국제 대회를 추진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해 왔다.
그에 비해 KBO는 어떤가?
대만은 2011년부터 일본 국가대표팀과 꾸준히 A 매치 경기를 벌이면서 전력을 강화했고 이제는 누구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야구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KBO는 국내 흥행 외엔 별 관심이 없다.
당장 옆 나라 일본만 봐도 국가대표팀을 브랜드화해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그건 대만도 마찬가지, 그런데 KBO는 뭘 하고 있는 건가.
국가 대항전을 통해 국내야구 수준을 검토 할 생각은 있는 건지, 실제로 일본에서 지속적인 국가대항전을 하자고 권유한 했지만 KBO는 피해버렸다.
일본에게 졌을 때 국내 야구 흥행에 미치는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가라는 전문가들의 분석,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을 이겼다고 콧대를 세우고 있는데 그런 단기전으로 한일 야구 격차를 논하는 건 무리가 있다.
한국야구가 어떻게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는가.
부정하기 싫어도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그런데 이제 와서 문 닫고 쇄국정책하면 그만인가?
발전을 위해선 패배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법, 도쿄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이 오히려 한국 야구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진 건 당연했다.
“이인영 선수, 지난 올림픽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셨는데, 이번 대회에서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팬들의 관심은 이인영에게 집중됐다.
이 선수가 없었다면 대표 팀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까, 한 명이 툭 튀어나오면 은근슬쩍 무임승차하는 게 한국 스포츠,
띄워주다 못하면 선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우리는 문제없다고 둘러대는 건 전형적인 패턴 아닌가. 이인영은 마이크에 독설을 쏟아냈다.
“저한테 너무 많은 기대 하지 마세요. 지난 한국시리즈에서도 보셨겠지만, 한 선수가 잘 한다고 팀이 이기는 거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하고 발전하지 못하면 한국 야구에 미래는 없습니다. 감독님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 야구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나가서 좀 맞으면 어떤가.
깨져보고 구르면서 배우는 것,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그렇게 야구를 잘했나.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건 기껏해야 10여 년 전, 한국야구가 앞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선 위원회와 선수들 모두 겸손해 질 필요가 있다는 소신을 드러냈다.
“제가 작년 시즌 프로야구 최고의 선수였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대회에서 세계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제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데 의의를 둘 생각입니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 눈치를 살피던 기자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떤 점을 개선했으면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저기…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요.”
개선 방안은 윗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닌가.
그걸 나한테 묻는 건 넌센스, 나는 위원회 관계자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어쨌든 기자회견을 마친 선수단은 예선전이 열리는 대만으로 이동, 대만 2군 대표 팀을 상대로 몸 풀기 게임에 나섰다.
KBO, NPB의 2군 선수들과 교류를 나누며 실력을 키운 대만, 과연 그 진면목은 어느 정도일까. 이인영은 살짝 기대를 품고 타석에 섰다.
‘이게 뭐야?’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내가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1군 대표 팀에 비하면 당연히 수준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아줄 정도, 첫 타석부터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때려냈다.
따아악~!!
다음 타석은 우중간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투 런 홈런, 스코어가 9대 0으로 벌어지자 신명철 감독은 이인영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붙어보니 어떠냐?”
“쟤들 야구 못해요. 진짜 못해요.”
벤치는 폭소에 휩싸였다. 기자회견에서 대만 야구를 위협적으로 평가하더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어쩌나.
하지만 1군은 분명 차원이 다른 수준, 2군 상대로 좋은 경기를 한다고 우쭐할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