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솔직한 사람 (1)
“가자~ 가야지 어쩌겠냐~ ”
시즌이 끝나고 열흘 후, 이인영은 집 근처의 아동복지 센터로 향했다.
시즌 중 한진 타이거스의 진상우와 주먹다짐을 한 사건 때문에 출장정지와 사회봉사활동, 벌금 처분까지 받았다.
그동안은 바빠서 미뤄왔지만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시간,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전문보육 교사를 만나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몇 가지만 기억해두세요.”
“예”
“일단 아이들과 개인적인 접촉은 최대한 피해주세요.”
전문가의 말에 슈퍼스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가는 건 아이들과 놀아주고 교감하기 위해서 아닌가? 하지만 보육 교사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며 입을 열었다.
“큰 아이들은 괜찮은데 아직 어린 아이들은 정이 많이 고파요. 그리고 인영 씨가 베푼 친절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독이라니요?”
“예를 들면… 나중에 다시 올게 이런 말이요.”
봉사하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아이들은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실제로 다시 온다는 약속을 믿고 계속 기다리다가 절망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건 양반이고 후원이나 재능기부를 하다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 아이는 말 그대로 멘붕에 빠진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돈이라고 해봤자 얼마 되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나 전공이 있으면 대부분 개인 후원을 받아야 가능하다.
당연히 지원이 끊겨버리면 아이는 손을 놔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나.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어’
지원을 하던 쪽도 사정이 있어서 그만 뒀겠지만 도중에 그만두면 안 하느니만 못 한 일이 된다.
오히려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뿐, 내가 이걸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잠시 얼굴만 비추고 보육원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이인영은 계속해서 조언을 구했다.
“그럼 제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솔직히 제가 연봉을 많이 받는 입장도 아니거든요.”
“호호~ 앞으로 많이 받으실 거잖아요?”
“그것도 줘야 받는 거죠. 월급쟁이하고 다를 게 없는 신세에요.”
솔직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육교사는 실질적인 조언을 줬다.
“청소라도 도와주고 오세요. 저희 쪽에서 사람을 파견하긴 하는데,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이인영은 교사의 조언대로 오전 10시 즈음에 보육원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간 틈을 노린 것, 교사의 부탁대로 이곳저곳을 쓸고 닦았다.
“인영 씨, 이것 좀 도와주실래요?”
“예에~ 갑니다~ ”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것도 척 척, 그렇게 한동안 돌쇠처럼 일만 하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정말 이곳에 아이들이 있긴 있는 걸까.’
할 일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곰 한 마리, 전문가의 조언대로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서 왔지만 그래도 역시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은 여기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내가 주는 관심과 친절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한 생각은 집어던졌다.
‘헉!!’
그런데 이때 한 아이가 선생님들이 있는 사무실에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여자 아이, 거대한 곰은 야생에서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굳어버렸다.
“엄마~ 엄마~ ”
“어머, 우리 소영이 못 기다리고 여기 왔어?”
교사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야구장에선 만인의 환호를 받는 슈퍼스타였지만 여기선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 분위기를 살피던 흑곰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제가 또 뭐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아니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교사는 초대 손님에게 봉사 시간을 채웠다는 증표를 건네줬다.
더는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증, 면죄부를 받은 슈퍼스타는 터벅터벅 건물 밖으로 향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았던 걸까.’
집으로 돌아왔지만 찝찝한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봉사를 하긴 했는데 왠지 아이들을 피해 도망쳐 온 기분, 하지만 내 주제에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자격이 있을까.
보육교사가 말했듯이 아이들을 대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보육원에 있는 아이라면 난이도는 급상승, 나 같은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오히려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나.
기분이 찝찝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 이후 이인영은 몸만들기에 열중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구단 사무실로 오세요]
시간은 흘러 12월 27일,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
프로선수라면 피할 수 없는 연봉협상, 성운 라이온즈는 이인영 - 홍현구 - 임완수 - 김상규, 이 네 사람을 협상 우선순위에 뒀다.
작년 시즌 뚜렷한 성과를 올린 베스트 라인, 그 중에서도 이인영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어지간한 선수는 통보로 끝내는 연봉협상, 대부분은 단장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없이 협상을 끝낸다.
2년차 선수가 구단 사무실로 부름을 받은 것도 대단한 일, 승리가 약속된 자리지만 이인영의 얼굴은 다소 굳어 있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차명석 단장은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준우승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닌지, 앞으로도 팀의 주축으로 활약할 선수라 은근 신경이 쓰였다. 이런 때는 돈이 최고, 시원하게 쏴버렸다.
“우리는 2억 8천 만 원 생각하고 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작년에 비교해 10배 이상 상승한 수치, 덥석 물 법도 한데 돌아온 답은 만만치 않았다.
“기왕 주시는 거 3억 채워주시죠. 작년엔 제가 양보했으니까요.”
“양보? 그게 무슨 소린가?”
“작년에 연봉인상 포기했잖습니까.”
작년 시즌, 이인영은 구단의 3300만원 제의를 거부하고 2700만원으로 연봉을 동결했다.
찔끔 올려주고 나중에 생색낼 지도 모를 일, 올 시즌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기에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했다.
그리고 차명석 단장은 시즌 중에 그깟 3억 못 줄 이유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줄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말을 말 것이지, 여기서 2억 8천 만 원을 부르는 건 뭔가.
길게 끌어봤자 좋을 게 없는 협상,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3억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주세요.”
계속되는 압박에 차명석 단장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시즌 중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있다. 하지만 그건 분위기에 휩쓸려서 한 말,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자니 체면이 서질 않았다.
“이 정도면 우리도 성의는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
“… 3억 주세요.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후퇴가 없는 선수 입장,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차명석 단장은 백기를 들었다.
그깟 2천 만 원 때문에 내 자존심에 선수 심기까지 건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년에도 잘 하라고 주는 당근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뭐 할 건가?”
“뭘 할 거라니요?”
“자네는 이제 프로야구에서도 손꼽히는 억대 연봉자가 된 거야. 젊은 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 같은데… ”
“글쎄요. 일단 열심히 운동하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협상을 마친 이인영은 일단 이 기쁜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했다.
우리 아들이 연봉 3억이라니, 아버지는 잘 됐다며 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어머니는 우리 아들 출세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 사람이… 울긴 왜 울어?”
“눈물이 안 나오게 생겼어요? 난 우리 아들 출세하는 것만 바라고 살았다고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전지훈련이다 뭐다, 솔직히 아들을 가르치는 게 보통 힘든 일은 아니었다.
은퇴 후 남편의 수입이 일정치 않았으니, 어머니는 마트나 아파트 청소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림에 보탰다.
그걸 알고 있는 남편은 그저 미안할 뿐, 아들도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흘려버릴 할 과거의 일, 좋은 날이 왔으니 울적한 분위기는 치워버렸다.
‘그래도 뭔가 찝찝한데’
그런데 가슴 한쪽이 답답한 이유가 뭘까.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보육원이 원인, 난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아이들을 피했을까.
이제 돈도 많이 벌게 됐으니 무서울 게 없는 입장, 보육원에 2천 7백만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솔직히 돈이라면 예전부터 있었다. 성운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 준우승 상금으로 4억 9천 만 원을 수령, 이인영도 제법 많은 돈을 챙겼다.
그런데 연봉 2700만 원 짜리가 수 백 만원을 기부하려니 손이 벌벌 떨릴 지경, 이제는 그까짓 돈 기부금으로 낼 수 있는 입장이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이들에게 선물도 하는 게 좋겠지, 보육원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원하는 선물 리스트를 요구했다.
[정말 그렇게 해주실 거예요?]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저희야 감사하죠.]
교사는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솔직히 아이들은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말을 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정말 영악한 아이는 봉사 활동을 나온 사람의 동정심을 이용해 원하는 물건을 얻어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극소수다.
국가에서 주는 자금은 정해져 있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물건까지 챙겨줘야 하는 교사들은 언제나 가시방석, 이런 기부가 흔한 일도 아니라 한 숨을 골랐다.
‘이게 뭐지?’
‘크리스마스는 지났는데’
느닷없는 선물세례에 아이들은 어리둥절,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아이들을 마주했다.
“수경이가 누구니?”
“저요”
“자, 이거 네 거야.”
아이들은 반신반의 하는 얼굴로 선물 꾸러미를 풀어봤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신속 배달, 아이들의 환호와 미소가 늘어날수록 찝찝한 마음도 걷혔다.
“혜진이가 누구니?”
“저요.”
“으음… 너였구나.”
한 소녀를 마주한 이인영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의 소원은 부모님이 빨리 돌아오는 것, 그래서 교사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아이의 부모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봤다.
아이를 보러 올 입장이 안 된다면 편지라도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진실은 참혹했다.
“돌아가셨다고요?”
[네… ]
2년 전에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부모, 그럴 거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왜 한 건가.
이제 이 아이는 진실을 알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부모를 기다리며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일,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이를 마주했다.
“엄마 아빠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
“네… ”
“오빠가 알아 봤는데 엄마 아빠가 당장은 못 오실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슈퍼스타는 자주 이곳에 와서 너희들과 놀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부모를 잃은 것보다 기다릴 사람이 없다는 게 아이들에게 더 힘든 일 아닐까?
내가 이 아이들의 핏줄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라고 생각했다.
“정말 또 올 거예요?”
“거짓말 하면 지옥에 떨어져. 오빠는 지옥 가기 싫거든. 자, 손가락 걸고 약속”
망설이던 어린 소녀는 약속을 받아줬다.
이제 도망치면 나는 이 아이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 봉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여유가 있고 당당해야 할 수 있는 것,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이인영은 앞으로도 더 위대한 선수가 돼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