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86화 (86/309)

86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6)

“자, 한국시리즈 6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오늘 베어스는 임선우 선수를 선발로 내세우는 군요.”

“지금까지 불펜으로도 등판을 못했는데 여유가 있다 이건가요? 솔직히 좀 의외의 기용입니다.”

후반기 들어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임선우의 등판, 베어스는 지금 여유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임선우는 전성기 시절, 최고 98마일의 빠른 볼과 94마일 투심을 앞세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지만 이제 그만한 구위는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구위가 떨어지면서 커브, 체인지업 등을 익혔지만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는 게 단점, 하지만 의외로 투수 소모가 심했던 베어스는 임선우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을 버려야겠어.’

임선우는 이날 빠른 볼보다 다양한 변화구를 앞세웠다.

MLB를 경험했다고 KBO를 만만히 봤던 게 문제, 빠른 볼 위주의 투구가 초반에는 어느 정도 먹혔지만 시간이 지나자 농락당했다.

더 이상 구위로 먹고 살 수 없는 신세, 다행히 메이저리그 경력 말년에 익힌 커브는 어느 정도 쓸 만한 수준에 올라섰다.

문제는 커브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빠른 볼을 높게 던져야 한다는 것, 이 구위로 그런 투구를 할 수 있을까. 베어스의 양하경 투수 코치는 빠른 볼과 커브 모두 낮게 던지라고 조언했다.

‘구위는 좋다. 안 써서 문제지’

국내 투수와 외국 투수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의 구위가 더 좋을까.

한국 토종 투수들이 빠른 볼로 이끌어내는 헛스윙률은 대략 6%, 외국인 용병의 5.8%에 뒤질 게 없다.

그런데 왜 한국의 단장들은 용병 투수를 못 데려와서 안달일까?

그 이유는 커브에 있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커브만 따져봤을 때, 토종 투수들은 피장타율 0.502를 기록했지만 외국인 용병의 피장타율은 0.374로 떨어졌다. 커브는 던질 때 약간 위로 떠오르는 구종, 한때 메이저리그는 떠오르는 각이 적은 너클 커브나 파워 커브가 유행을 탔다.

커브의 떠오르는 각이 낮을수록 타자 눈을 속일 수 있기 때문에 헛스윙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 하지만 너클 커브도 이제는 유행이 지나서 슬라이더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KBO는 예외, 한국 타자들은 너클 커브나 고속 커브에 익숙하질 않다.

국내 지도자들이 전형적인 커브를 가르치는 게 원인, 메이저리그 진출에 실패해 한국으로 오긴 했지만 어쨌든 각 구단이 데려오는 용병은 마이너리그에서 꽤나 잘 나갔던 투수들, 당연히 너클 커브의 위력도 수준급이다.

임선우의 커브도 메이저리그에선 통할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패스트볼과 비슷한 릴리스 포인트에서 날아오는 커브는 떨어지는 슬라이더처럼 보일 정도, 이렇게 좋은 커브를 가지고 있는데 왜 빠른 볼을 고집하는 건가.

제대로만 던지면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런 공이 있었나?’

성운 라이온즈의 선두 타자 임완수는 헛스윙을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른데 생각보다 더 떨어지는 궤적, 히팅 포인트를 조금 앞으로 옮겼다.

따악~!

“아~ ”

너무 빨리 맞으면서 파울,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임완수는 자기 스윙을 못하고 범타로 물러났다.

‘뭔지 감 잡았어.’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빠른 커브를 던진다고 당황할 필요 없다. 왜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삼진을 당하면서도 당겨 치는 걸 고집하겠나.

아무리 변화구가 좋아도 빠른 볼이 받쳐주질 않으면 끝, 메이저리그 타자들이라고 밀어치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최근 이인영은 메이저리그 평균 구속이 150km를 돌파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만큼 투수들의 수준이 올라왔다는 뜻, 지금 한국에서 뛰는 투수 중 평균 150km를 던지는 투수가 있나?

정말 구위가 좋은 투수는 몸 쪽 빠른 볼을 밀어 넣는다.

배트가 돌아 나오는 거리도 좁고, 배트 스피드가 어지간히 빠르지 않으면 배트가 밀리기 때문, 전문가들도 현대야구에서 최고의 마구는 몸 쪽으로 붙이는 빠른 볼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커브는 결국 구위가 떨어진 노장의 생존 수단일 뿐, 이것도 못 때리면서 어떻게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겠다는 건가.

빠른 커브도 못 친다면 나는 그 정도 선수일 뿐, 겁먹지 않았다.

“떨어집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미동도 안 하네요. 임완수 선수가 타격하는 걸 봤을 테니, 대략 감이 왔을 겁니다.”

2구는 바깥쪽 빠른 볼, 투 볼 노 스트라이크가 되자 벤치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암호명은 커브, 임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아악~!!!!

“어?!!”

타격이 되는 순간 허탈한 미소가 임선우의 입가에 번졌다.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우월 솔로 홈런, 안다고 쉽게 칠 수 있는 공이 아닌데 어이가 없는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래서 피한 거다. 누가 뭐라고 하는 거야?’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인영 상대로 너무 도망 다니는 거 아니냐고 베어스 팬 중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본인들은 저 자식을 막을 계책이 있는 건가.

대책은 없으면서 나가서 싸우라고 하다니, 왜군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이순신 장군에게 일본의 본진이 있는 부산으로 쳐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린 조선 정권과 무슨 차이가 있나.

여론에 흔들린 내가 바보, 역시 저 자식은 피하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이인영 선수가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1대 0!! 성운 라이온즈가 기분 좋은 선취점을 올립니다.”

“이번 한국 시리즈에서 4번째 홈런이죠. 결과에 상관없이 이인영 선수에게 MVP 줘야 합니다. 이 정도 활약을 하는 선수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인호는 박한우 위원의 주장에 입을 다물었다.

그야 아들이 상을 받길 바라지만, 한국시리즈 MVP는 승자 팀에서 뽑는 게 원칙, 일단 성운 라이온즈가 6차전을 잡길 기대했다.

따악~!!

하지만 경기는 베어스의 우세로 흘러갔다.

투타 모두 우위에 있는 전력,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그 격차는 확실히 드러났다.

3회에만 집중 5안타를 퍼부으며 스코어는 어느새 6대 1, 그나마 살아 있던 응원단의 목소리도 잠잠해 졌다.

‘어떻게 좀 해 줘요.’

4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원정 팬들의 시선은 이인영에게 집중됐다.

4차전부터 죽어 버린 타선의 유일한 희망, 하지만 이재학 감독은 철저히 승부를 피했다. 계집애라는 욕을 먹어도 마지막까지 수비에 집중해 촉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사마의, 비겁해도 이기면 그만 아닌가.

지금 쏟아지는 야유는 마지막에 움켜쥘 승리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1루에 들어선 이인영은 벤치를 살폈다.

패배감에 젖어든 분위기, 이렇게 끝내려고 준 플레이오프부터 악을 쓰며 올라온 건가.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도 못할 짓,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따악~!!

“좌중간으로 향하는 타구!! 좌익수가 몸을 날리지만 잡지 못합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여기서 일단 멈춰서는 군요!!”

“아~ 이건 아니죠!! 박한수 선수 지금 뭐하는 겁니까?!!”

흥분한 박한우 위원은 들고 있던 펜을 집어던졌다.

좌중간으로 향한 타구, 홈으로 뛰라고 팔을 돌린 3루 코치, 그럼 주자는 무조건 홈으로 달려들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선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선수가 배트를 집어 던지고 홈 플레이트 우측으로 이동해야 한다.

타구와 주자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명당, 그런데 대기 타석에 서 있던 박한수는 그 역할을 망각했다.

내가 감독으로 있을 때 몇 번이나 가르쳐줬던 건데, 그냥 가만히 있었을 줄이야. 박한우 위원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주자가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고개 한 번 돌릴 여유가 있으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뛰는 게 낫다.

주루 코치가 돌라는 사인을 줬지만 그래도 우리 선수가 홈 플레이트에서 한 번 더 판단을 내려주는 게 안전, 그런데 박한수가 멍 하니 있으면서 이인영은 3루에서 멈춰 섰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빠르게 이뤄진 베어스의 중계 플레이, 주루 코치의 사인만 보고 돌았으면 그대로 아웃 당할 뻔 했다.

‘마음 놓고 뛸 수도 없네.’

어차피 홈으로 들어올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인영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승할 자격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기본이 안 됐는데 무슨 우승? 우리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걸 여기서 깨달았다.

‘내가 잘못 한 거야?’

박한수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경기도 지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실책까지 저지른 입장, 그나마 이인영이 3루에서 멈춰선 게 다행이다.

적시타라도 때려내야 속죄가 되겠지,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이 타이밍에 임선우를 내리고 필승조를 투입했다.

딱~!!

“아~ 유격수가 잡아서 2루에서 아웃!!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그 사이 이인영 선수는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6대 2, 성운 라이온즈가 추격을 개시합니다.”

캐스터가 입을 열었지만 박한우 위원은 침묵을 지켰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실망만 안겨준 라이온즈 선수단, 그동안 욕을 먹으면서도 편파해설을 주도해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지쳤다.

“와아아~!!”

이날 경기는 베어스의 7대 2 승리로 끝났다.

통산 6번 째 한국시리즈 우승, 베어스 선수단이 한데 뭉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이인영은 벤치에서 조용히 장비를 정리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면 아직 정상에 서기엔 부족했다는 뜻, 겸허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인터뷰는 승자들의 몫, 패잔병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형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요.”

마침 눈물을 훔치고 있던 임완수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막지 못한 패배,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슬픔을 함께 했다.

“감사합니다!!”

1루 파울라인에 늘어선 라이온즈 선수단은 마지막까지 경기를 지켜봐 준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물만은 피하려고 했는데 찔끔 새어나오는 부끄러운 흔적, 슈퍼스타는 캡을 눌러 쓰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패배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여기서 무너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오늘의 치욕을 곱씹으며 시즌을 마무리 했다.

‘인터뷰 요청하는 건 너무 무례한 행동인가.’

한편, 방송국 PD는 중계차 앞에서 관계자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베어스의 우승으로 끝났지만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이인영이 보여준 활약은 말 그대로 독보적이었다.

때려낸 홈런만 8개, 정말 위대한 2인자였다.

소감이라도 듣고 싶은데 본인들이 생각해도 너무 눈치 없는 행동, 마침 이 자리에 있던 이인호를 방패막이로 앞세웠다.

“고생했다.”

이인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한 눈에 봐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아들의 속마음, 그래도 다음이 있으니 실망하지 말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뒤를 잇는 박한우 위원의 위로, 이인영은 패배자에게 더 이상의 위로는 필요 없다며 씩씩하게 대응했다.

“아니요. 솔직히 우승하기엔 많이 부족했죠.”

“정말 그렇게 생각 하냐?”

“행운이 자기 발로 찾아오진 않잖아요, 잡으려고 노력을 해야죠. 도망가면 쫒아가서라도 잡아올 테니까,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요.”

박한우 위원은 대견하다며 양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 정도 각오를 지닌 녀석인데 언젠가는 우승을 하지 않겠나? 우승이 도망가도 따라가서 잡아낼 녀석, 앞으로가 더 기대될 선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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