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5)
따악~!!
“타격!! 3루수!! 좌익수!! 유격수가 모두 모여들지만!! 파울 라인 밖으로 떨어집니다!! 야~ 지금은 묘한 상황이 나오네요.”
“이러니까 사람은 다 똑같으면서 다 다르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지금 베어스 배터리는 승부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인영 선수가 그걸 몰랐을까요? 그런데 보란 듯이 배트가 나왔어요.”
타격이 되는 순간, 베어스 야수진은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타구에 달려들었다.
충돌을 의식했는지 서로 눈치만 보다 놓친 타구, 인플레이가 됐다면 3루 주자는 그대로 홈으로 뛰어들었다.
벤치에서 고의사구 지시가 내려왔지만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녀석, 베어스 내야진이 진영을 재정비하는 동안 이인영도 헬멧을 눌러 쓰며 가벼운 스윙으로 몸을 풀었다.
‘베이스에서 좀 더 떨어져라.’
이때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1루수 김동환에게 전진수비를 지시했다.
볼넷만 생각했지 타격이 됐을 때에 대비하지 않은 게 문제, 2루수 김환희는 우측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숨을 들이키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투수, 세트 포지션 자세가 이뤄지자 이인영도 타격할 준비를 마쳤다.
‘뭐야?“
이때 의외의 상황이 나왔다.
오른 발을 빼며 견제 동작을 하는 투수, 1 - 3루 상황에서 흉내만 내고 견제구를 던지지 않는 건 보크에 해당한다.
하지만 1루수 김동환은 전진 수비를 펼치고 있는 상황, 백업을 들어올 입장이 아니라 2루수 김환희가 1루로 백업을 들어왔다.
“보크!! 보크!!”
1루 주자 임완수는 양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견제를 하는 척 하다가 한 타이밍 쉬고 2루수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던진 견제구, 4심 판정은 2대 2로 갈렸다.
주심은 보크를 선언했지만 나머지 심판들은 견제를 인정, 눈치를 살피던 3루 주자 노진혁은 베이스 근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건 아니지!! 아니야!!”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심판규정에 따르면 바로 판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합의 판정을 할 수 있지만 이건 참고 사항일 뿐이다.
지금은 1루 견제를 했기 때문에 플레이가 일어난 1루심의 재량권이 인정되는 상황, 1루심이 견제를 인정했는데 왜 보크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의견, 심판진이 머리를 맞대면서 들끓었던 관중석 분위기는 잠잠해 졌다.
“자… 이제 판정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아~!! 1루 주자의 아웃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되면 2사에 주자는 3루에서 공격이 시작됩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저도 나름 프로야구 경력이 있는 편인데, 이런 상황은 처음 봅니다.”
판정이 내려지자 라이온즈 파크는 팬들의 원성으로 들끓었다.
벤치에서 뛰쳐나온 한승규 감독은 핏대를 세우고 주심과 말싸움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엎어진 물, 주심은 1루심의 재량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아~ ”
이인영은 허공을 향해 격한 탄식을 쏟아냈다.
애매한 상황이 나오긴 했는데 그렇다고 본인이 심판은 아니지 않은가. 보크를 따지기 전에 견제구가 날아왔다면 일단 귀루를 했어야지, 임완수의 플레이는 조금 아쉬웠다.
“이게 왜 아웃이냐고?!!! 왜?!!!”
임완수는 눈물까지 흘리며 1루심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는 상황, 코치의 위로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렇게 되면 베어스는 이인영을 상대할 이유가 없는 상황, 자리에서 일어난 오건무는 왼팔을 바깥쪽으로 뺐다.
이제 2사에 주자는 1 - 3루, 베어스는 후속 타자 김상규를 범타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베어스는 정규이닝 마지막 9회 초 공격에서 2점을 추가하며 도주, 이렇게 4차전은 베어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라이온즈 선수단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나 둘 그라운드에서 퇴장, 성난 홈팬들은 심판 진을 향해 욕설과 폭언을 쏟아냈다.
“다들 신경 쓸 것 없다. 내일 경기도 있으니까.”
한승규 감독은 라커룸에서 선수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으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선수 장악력, 이게 안 되면 작전이고 뭐고 없다. 선수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 듣기 싫었는지 임완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기자들이 지적했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이때 노진우 투수 코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하냐?”
“… ”
“너만 속상한 거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앉아”
그나마 민심을 얻고 있는 노진우 코치가 나서면서 수습된 분위기, 이인영은 그 사이에서 감독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너희들 눈엔 내가 감독으로 안 보이겠지… 그런데 이 말 한 마디만 하자, 내가 내일 옷을 벗는다고 해도 지금은 이 팀의 감독이다. 그러니까 좀 들어줘라.”
한승규 감독은 자존심을 굽혔다.
선수 시절의 행적 때문에 하수구에 처박힌 이미지, 그리고 지금까지 나 잘난 맛으로 살아온 게 사실이다.
감독이라는 지휘봉을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 감독이 된 것보다 박한우를 밀어낸 게 더 기쁘다는 말까지 하면서 오랜 친구였던 신명철 전(前) 수석코치까지 질리게 만들었다.
그 친구가 왜 내 곁을 떠났을까? 왜 팬들은 날 욕하는 걸까? 왜 선수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 건가?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힘든 상황이지만 어쨌든 시리즈가 끝난 건 아니다. 2대 2야, 그리고 내일도 홈에서 경기 치르지 않냐. 내일 경기 잡으면 된다. 너무 낙심하지 말고”
“예… ”
대답은 했지만 선수들의 태도는 건성에 가까웠고, 그건 이인영도 다를 게 없었다.
감독 마음에 안 든다고 그동안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나.
감독 전용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쌓여가는 홈런이 늘어날 때마다 내가 당신보다 낫다고 어깨를 들썩거린 것도 사실, 물론 한승규 감독이 원인 제공을 했지만 그렇다고 깨끗한 척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하고 팀이 이겨야 감독도 빛을 보는 거지.’
3차전을 앞두고 감독과 화해를 하긴 했지만 그건 승리를 위해 휴전 협정을 맺은 것 뿐.
나는 저 사람과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뻔뻔한 성격이지만 양심을 속이진 않았다.
“어렵다~ 어려워~ “
착잡한 마음으로 오른 퇴근 길, 아직 운전을 할 줄 몰라서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탔다. 사이가 어색한 것도 아닌데 말이 없는 부자(父子), 아들 이 먼저 침묵을 캤다.
“아빠도 선수 시절에 감독하고 마찰 있었어요?”
“왜?”
“지금 우리 팀 분위기가 그렇거든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이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과 선수 사이는 어떤 관계인가. 사제관계? 아니면 전장을 함께하는 전우? 이인호는 어느 쪽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남남 아니냐?”
“남남이라고요?”
“그래, 감독이 선수 휘어잡는 방법이 뭐가 있겠냐? 마음에 안 들면 빼 버리면 그만이지. 그 세계엔 인정이라는 거 없다. 인간관계를 너무 소홀히 해도 안 되지만 너무 신경 쓸 것도 없다.”
이인호는 선수시절을 되짚었다.
팀이 잘 나가고 본인도 잘 나갈 땐 서로 농담도 걸고 화기애애했던 관계, 그런데 부상을 입고 슬럼프에 빠지자 감독에게 잘려 나갔다.
조금만 더 지켜봐주면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제야 나는 감독이 부리는 장기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쉬우면 나 쓰겠지. 별 수 있겠어?’
이인호는 그 날부터 이를 악물고 부활에 전념했다.
쓸모가 있어지자 회복된 관계, 하지만 이인호는 예전처럼 감독을 인간적인 관계로 대하진 않았다.
내가 필요하니까 저 사람이 쓰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서로 볼 일 없는 관계,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간관계보다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솔직히 한승규 감독 입장도 이해는 된다.”
“뭐가요?”
“그 세계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정글이야. 내가 약해지면 잡아먹히는 거라고, 그런 경쟁이 반복되다보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냐? 물론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소홀히 해선 안 되지만… 어쨌든 거기가 그런 곳이다. 어렵지… 어려워… ”
아버지의 경험이 담긴 조언에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오늘 동료들이 감독의 지시를 무시했을 때 꽤 충격을 받았다. 그럼 나라도 그 사람 편을 들어줘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승규 감독은 끈 떨어진 가방 신세,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하면 단장에게 잘려나갈 입장이다.
이성한, 노진우 코치, 그것도 아니면 신명철 전 수석코치가 그 자리를 이어 받겠지.
쓸모가 없으면 버림받는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이야 슈퍼스타라고 띄워주고 있지만 실력이 떨어지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입지와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환영, 내가 잘 하면 팀도 이기고 분위기도 회복될 거 아닌가.
다음 경기 외엔 모두 잊어버렸다.
“아빠도 상처가 많은 분이었네요. 그때 많이 서운 하셨어요?”
아들의 위로에 이인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살다 살다 내가 이 녀석의 위로를 받을 날이 오다니, 하지만 아들이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증거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빠가 너한테 공부하라고 한 거다. 그 세계가 좀 냉정하거든”
“냉정한 게 그라운드뿐이겠어요? 그리고 전 공부는 재능 없었어요.”
“네가 안 했으니까 그런 거지 인마”
“아빠는 학창시절 공부 잘 하셨어요? 할머니한테 여쭤보면 다 나와요. 지금 조사 들어갑니다.”
본전도 못 찾은 아버지는 백기투항, 경기는 졌지만 이인영은 아버지와의 교감을 통해 지친 마음을 위로 받았다.
* * *
[베어스 5차전도 승리,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앞으로 1승]
다음 날 열린 5차전,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최선을 다했지만 준 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오면서 힘이 빠질 대로 빠진데다 4차전의 석연치 않은 판정까지 겹치면서 사기마저 떨어져 버렸다.
결과는 9대 2 대패, 투타 모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여론은 베어스의 우승으로 기울었다.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아버지의 조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 평소처럼 몸을 풀며 6차전에 대비했다.
“긴장 안 되냐?”
“전혀요.”
이성한 코치는 그런 슈퍼스타에게 농담을 건넸다.
오늘 지면 끝인데 정말 긴장이 안 되나? 이인영은 당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질 거라고 생각하고 경기를 하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시험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공부에 열을 올린 건 시험에 붙기 위한 준비과정 아니었나? 어떻게 해야 합격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야지,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야구도 마찬가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내가 홈런을 치고 득점을 하면 그만,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난 놈은 난 놈이다.’
이성한 코치는 그런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목소리만 큰 게 아니라 진짜 그걸 해내는 녀석, 그 대범함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