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4)
“자, 이제 김상규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아직 안타가 없지만 그래도 한 방이 있는 선수입니다.”
“아, 여기서 투수를 교체하나요. 이화수 선수가 올라옵니다.”
위기에 몰린 베어스는 우완 이화수를 올렸다.
우타 상대 스페셜리스트, 던질 공은 뻔한 거 아닌가. 바깥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싱커, 골라내면서 베어스가 수세에 몰리게 됐다.
딱~!!
“아~ 진짜!!”
김상규는 2구를 때렸지만 타이밍이 약간 빨랐다.
파울이 되면서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타자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라이온즈 벤치는 작전 지시를 내렸다.
병살이든 삼진이든 좋으니 주눅 드는 타격을 하지 말라는 것, 팬들도 홈런을 연호할 뿐 누구도 어설픈 스윙을 원하지 않았다.
따악~!!
유격수 위를 넘어가는 타구,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이인영은 2루를 지나 3루로 내달렸다. 헬멧이 벗겨질 정도의 격렬한 질주, 퇴장당한 페르난데스를 대신해 좌익수로 기용된 하태수는 바로 3루로 송구했다.
“세이프!! 세이프!!”
“와아아~!!”
타오르는 관중석의 열기, 하지만 이인영은 몸에 뭍은 흙을 툭툭 털어낼 뿐 쓸데없는 행동은 자제했다.
“여기 있다.”
헬멧을 전달받아도 말없이 뒤집어 쓸 뿐, 3루 코치는 이인영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솔직히 3루 코치는 뛰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좌중간에 떨어진 타구, 스타트를 일찍 끊었다고 해도 결단을 내리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왜 그랬냐고 질책할 수도 없는 노릇, 다만 이 녀석이 얼마나 승리를 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면 안 된다. 절대 지면 안 된다.’
후속 타자 박한수도 그 열정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저럴까, 우리가 주역은 못 돼도 도움은 줘야겠지.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을 이 타석에 퍼붓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따악~!!
“다시 한 번!! 센터 쪽에 떨어지는 안타!! 3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일단 2루에 멈춰섭니다!! 스코어는 이제 4대 3!! 성운 라이온즈가 추격을 개시합니다!!”
“이화수 선수가 연속 안타를 맞는 경우는 본 적이 거의 없는데요. 거기다 지금 무사 주자 1 - 2루인데, 이렇게 되면 수세에 몰리는 건 베어스입니다.”
이재학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향했다.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화수에 대한 신뢰, 교체할 생각은 없지만 그 신뢰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전성기 시적의 이화수의 공은 누구도 치기 어려웠다.
데뷔 초만 해도 파워 피처였고 공격적인 피칭을 선보였는데, 시즌이 거듭되면서 점점 팔이 내려오더니 지금은 거의 사이드 암에 가깝게 팔이 많이 내려왔다.
구속이 떨어지는 선수의 전형적인 모습, 이것 때문에 이재학 감독은 팬들에게 이화수를 너무 혹사하는 거 아니냐는 질책을 받았다. 이화수가 흔들리면 본인도 욕을 먹는 상황, 그걸 떠나서 이런 상황에서 선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다.
“힘드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화수는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팬들은 혹사가 잦다고 하는데 솔직히 선수 입장에선 이런 상황에서 쓰임을 받는 것도 행운이다. 어떤 선수는 눈에 띄지도 못하고 사라지는데 그래도 나는 100번 나은 입장 아닌가.
그래서 감독의 등판 요구도 별 말 없이 받아들였던 편,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혹사 받는 투수가 돼 있었다.
‘관리’라는 기준은 보는 사람마다 제 각각, 솔직히 임화수는 자신이 혹사를 받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내 몸이 강속구를 견뎌내지 못했을 뿐, 떨어지는 구속에 대비해 투구 스타일을 바꿔 지금도 좋은 불펜으로 활약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감독의 신뢰를 받고 올라왔는데 힘드냐는 말을 듣는 것도 죄송한 일, 어떻게든 해 보겠다며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우리가 이긴다.’
물론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도 승리에 대한 열정은 베어스에 뒤지지 않았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다들 마찬가지, 막는 자와 뒤집으려는 자의 의지가 격한 대충돌을 일으켰다.
따악~!!
“자!! 이 타구가 유격수 정면!! 2루 송구!!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임화수 선수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아~ 이 찬스가 이렇게 넘어가나요. 라이온즈 입장에선 너무 뼈아픕니다.”
병살이 나오는 순간 양측의 희비가 엇갈렸다.
다행히 2루 주자 김상규가 3루까지 진출했지만 2아웃,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역전까지 노려봤던 팬들의 기대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자!! 여러분!!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힘을 내야합니다!!”
“와아아~!!”
성운 라이온즈 응원단장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격한 율동을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치어리더 군단, 한승규 감독은 이 타이밍에 대타를 기용했다.
이제 남은 대타 카드도 없는 상황, 타석에 들어선 오상민은 초구를 골라내며 신중한 타격을 이어갔다.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임화수 선수가 싱커를 던지다가 연속 안타를 허용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싱커가 떨어지질 않고 투심처럼 옆으로 휘고 있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베어스의 오건무 포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따라 말을 듣지 않는 싱커, 하지만 싱커 빼면 임화수에게 남는 게 뭐가 있는가. 던질 수밖에 없는 공, 그걸 노리고 있는 타자, 벤치에서는 승부를 하라는 사인이 났지만 승부를 걸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아.’
오건무는 벤치에 사인을 보냈다.
위기 상황을 넘기겠다는 임화수의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본인도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이재학 감독은 임화수를 믿었다.
“됐어!! 역시 임화수!!”
3루 땅볼로 마무리 된 7회 말, 위기를 넘긴 베어스 선수단은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믿음에 보답했지만 1실점을 내준 임화수의 표정은 밝지 않은 편, 투수코치에게 오늘 안 될 것 같다며 강판을 청했다.
한 선수가 흔들려도 다른 선수가 올라오는 베어스의 화수분 불펜, 그에 비해 라이온즈는 필승조를 이미 다 투입했다.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하면 패배, 이인영이 한 타석 더 들어설 기회가 있지만 다른 선수들이 보호를 해주지 못하면 어려웠다.
“공격적으로 해라 공격적으로, 볼만 거르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페르난데스와 주먹질을 나누느라 퇴장당한 이성한 코치를 대신해, 한승규 감독이 선수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단장의 총애를 받는 이성한 코치의 영향력 때문에 큰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가 통솔하는 팀, 잘릴 땐 잘리더라도 이번 시리즈는 잡고 가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이제야 좀 ··· ’
이인영은 그런 감독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 운영은 노진우 코치, 타격이나 작전은 이성한 코치, 주루 플레이나 교체 외엔 별 활약이 없던 한승규 감독, 그동안 유령처럼 선수단 사이를 떠돌았지만 이제야 조금 감독다워 보였다.
물론 선수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줄지는 의문, 평소 인덕을 못 쌓은 사람이라 선수들이 정말 그렇게 할지는 의문이었다.
‘안 듣네, 안 들어’
8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이인영은 냉정한 현실을 확인했다.
솔직히 그동안 라이온즈를 이끌어 온 건 이성한 코치라고 봐도 좋다.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기자들이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그게 지금 이 팀의 현실이다.
이성한 코치가 빠진 지금,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을까. 이인영은 차분하게 볼을 고르는 선수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칠 수 있으면 쳐 버려요!!”
꼭 내가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냉장고를 뒤적거리다 먹을 만한 게 보이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 야구라고 다를 거 없다. 내가 역전 홈런 칠 수 있으면 치는 거 아닌가.
주자를 쌓아두겠다는 생각이 나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공격적인 타격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따아악~!!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높게!! 좌측 담장을 직접 때립니다!! 노진혁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성운 라이온즈가 득점권 기회를 맞이합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경기!!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5회 말에 어설픈 주루 플레이로 아쉬움을 남겼는데 조금은 사죄가 되는 한방이네요.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2루에 안착한 노진혁은 벤치를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이제 타석에는 8번 조태경, 번트를 댈 상황도 아니고 적극적인 스윙으로 2루 주자를 3루로 보냈다.
‘내 앞에서 해결해 줬으면 좋겠는데’
대기 타석에 선 임완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다독였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했지만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지만 타인의 주목을 받는 게 아직은 어색하다.
그런 내가 여기서 주인공이 되도 되는 걸까? 솔직히 주인공이 안 되도 상관없다. 묻어가더라도 조력자로서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 하지만 한국시리즈는 임완수에게 영웅이 될 것을 강요했다.
“여기서 볼넷이 나오는 군요!! 무사 주자 1 - 3루에서 임완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다음이 이인영 선수 타석이거든요. 베어스는 무조건 승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임완수 선수가 정규시즌에서 초구 타격 비율이 높진 않았는데,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3루 코치의 사인을 확인한 임완수는 투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남이 들으면 좀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눈빛으로 상대의 기를 눌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베어스는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저기 산도 씹어 먹을 괴물이 있는데 누가 여기서 승부를 피하겠는가. 임완수를 잡아야 괴물도 피할 수 있는 법, 이인영은 무조건 피하는 쪽으로 볼 배합을 정했다.
따악~!!
“깊은 타구!! 유격수가 잡아!! 2루에!! 다시 1루에서!! 1루에서는 세이프입니다!! 이제 상황은 1사 주자 1 - 3루!! 여기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또 투수를 교체하네요. 이재학 감독은 오늘 머리 쓸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재학 감독은 땀에 얼룩진 캡을 바로 잡았다.
7년 째 감독을 하고 있지만, 타자 한 명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경험은 처음이다. 그만큼 이번 시즌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인영, 베어스 선수들도 서로 사인을 주고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 초구는 일단 바깥쪽으로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글쎄요. 투수를 교체했다는 건 이재학 감독도 여기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역시 쉽게는 못 들어갑니다.”
초구가 볼이 되자 베어스 배터리는 볼을 하나 더 뺐다.
초구에 반응하면 승부를 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르는 것도 방법, 하지만 오건무 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옆으로 빼진 않았다.
‘그럼 나도 칼을 거둘 순 없지.’
이인영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오늘 바깥쪽 공을 잡아당겨 홈런을 만들어 냈으니 어정쩡하게 들어오면 바로 응징할 생각, 마침 때릴 만한 공이 들어왔고, 뒷발을 쭉 빼면서 공을 걷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