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3)
‘역전도 아닌데 뭐’
홈런을 쳤지만 이인영은 덤덤한 얼굴로 홈을 밟았다.
평소 장난을 잘 거는 임완수도 별 말 없이 하이 파이브만 나누고 더그아웃으로 직행, 이성한 타격코치도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선수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We’re having problems with that XXXX kid again'
= 저 꼬맹이 때문에 또 문제군.
좌익수 페르난데스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렸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이인영의 장타, 사실 페르난데스는 정규시즌부터 이인영에게 사사건건 도발을 걸었다.
대구만큼 작은 경기장에서 뛰었으면 나도 50홈런을 쳤을 거라는 도발부터 유독 이인영에게 시비가 잦았다.
사실 이건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페르난데스의 작전, 페르난데스는 미국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상대가 자신보다 잘 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걸 간파하면 바로 시비를 걸었다.
난폭하게 행동해 상대의 기를 꺾거나 바깥쪽에 약한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 하지만 저 꼬맹이는 이런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내가 용병인데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지?’
페르난데스는 우람한 덩치와 달리 속은 연약했다.
자신이 상처를 입기 전에 내가 상대를 상처 입히겠다는 생각을 지녔고 이런 비뚤어진 성향 때문에 미국 시절부터 동료들부터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
한국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 30홈런을 넘긴 실력 덕분에 구단 내부에서 쉬쉬해주고 있지만 친화력은 낙제점을 받았다.
본인도 눈치는 있는지 다음 시즌 재계약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조급함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Do not roll up your trousers!! We're the one who'll have the last laugh!!"
= 너무 까불지 말라고!! 마지막에 이기는 건 우리니까!!
4회 말이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베어스 선수들, 그런데 페르난데스는 돌연 성운 라이온즈가 본진을 튼 3루 더그아웃으로 향하더니 도발을 날렸다.
뭐 저런 XX이 다 있는지, 영어가 짧은 선수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존 워커는 바로 반응했다.
외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이인영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 흥분해 뛰쳐나간 존 워커를 붙잡았다.
‘OK, 하나 걸려들었어.’
페르난데스는 계속 존 워커를 도발했다.
에이스라는 놈이 4회까지 3실점을 했으니 속이 좋지 않겠지, 여기서 더 흔들면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I do not care about you any more, you always do your team more harm than good!!”
= 난 너 따윈 전혀 신경 안 써, 넌 언제나 팀에 도움이 되는 놈이 아니니까!!
이때 이성한 코치가 페르난데스의 뺨을 후려 갈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행, 페르난데스는 해보자는 거냐며 달려들었지만 이성한 코치도 지지 않고 미친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나이가 들었다고 전혀 죽지 않은 성깔, 예상외의 저항에 부딪친 페르난데스는 후퇴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베어스의 코치로 있었던 사람, 말도 없이 조용히 있기에 만만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뺨이 제법 얼얼했다.
“저 미친 깜둥이 끌어내!! 당장!!”
한승규 감독도 미쳐 날뛰었다.
흥분한 선수들은 순식간에 페르난데스를 에워쌌고, 베어스 선수단도 뒤늦게 사건현장으로 달려와 난봉꾼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베어스의 캡틴 김동환은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성운 라이온즈 코치진에 거듭 용서를 구하며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퇴장!! 퇴장!!”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퇴장을 면하지 못했다. 상대팀 벤치에 시비를 건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수순, 중심타선의 핵을 잃어버린 이재학 감독은 넋이 빠진 얼굴로 주심과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선수가 퇴장을 당했으니 항의는 해야겠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
그 전에 위협구를 던졌다든가 문제가 될 상황도 아니었는데 상대팀에 시비를 걸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이 짓도 못해 먹겠다며 주심과 말장난을 나눴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계실 거예요?”
“나 감독이잖아요. 항의하는 모습은 보여줘야죠.”
“저 자식 한 짓거리 생각하면 시간 끌수록 감독님만 욕먹습니다. 얼른 들어가세요.”
결국 이재학 감독은 본전도 못 건지고 퇴장, 사방에서 쏟아지는 홈팬들의 야유도 감수해야 했다.
“자, 이제야 겨우 상황이 정리되는 것 같네요. UA 베어스의 5회 초 공격으로 경기가 재개 됩니다.”
“올 시즌에도 몇 번이나 구설수에 휘말렸는데 기어이 사고를 치네요. 앞으로 베어스는 용병을 선발할 때 인간성부터 따지길 바랍니다.”
박한우 위원의 사심이 담긴 말로 시작하는 중계,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건 페르난데스뿐만이 아니었다.
도발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한 존 워커도 문제, 평정심을 잃으면서 자신의 투구를 하지 못했다.
이인영이 투런 홈런으로 점수 차를 좁혀줬는데 1사 주자 1 - 2루 위기를 뒤로하고 강판, 바뀐 투수 김학겸이 실점을 하면서 스코어는 4대 2로 벌어졌다.
거기다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는 타선, 그렇게 별 소득 없이 경기는 6회 말에 접어들었다.
필승조를 투입해 빗장걸기에 나선 베어스, 7번 타자 노진혁이 타석이 들어섰다.
따악~!!
“자!! 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가는군요!! 선두 타자가 출루하는 성운 라이온즈입니다!!”
“일단 기회가 왔어요. 한 점을 따라가는 작전도 괜찮습니다.”
한승규 감독은 여기서 대타 조태경을 투입했다. 올 시즌 성적은 0.247, 6홈런으로 그저 그랬지만 가끔 일발 장타를 터뜨려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선수, 조태경은 그 기대에 부응하듯 거친 스윙을 휘둘렀다.
따악~!!
중견수 쪽으로 높이 가는 타구, 베어스의 2루수 김환희는 주자가 태그 업을 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베이스 커버를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달려오는 1루 주자 노진혁, 태그 업도 하지 않고 곧장 달려오는데 베어스 선수단도 이게 뭐지? 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차!! 이게 아니었지!!’
그제야 노진혁은 실책을 알아채고 1루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시 2루로 향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이렇게 어이없게 진루 기회가 날아갔다.
감독 입장에선 뚜껑이 열리는 상황, 한껏 달아올랐던 관중석 분위기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여유가 있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2루수가 커버를 들어오니까 자기도 모르게 급했던 것 같아요… 하아~ 이런 실수가 나오네요.”
박한우 위원은 자기 일인 것처럼 격한 한숨을 뿜어냈다.
아웃 카운트 하나도 낭비할 수 없는 이 중요한 상황에서 정신 나간 플레이를 보여주다니, 그야 사람이 너무 긴장하다보면 이럴 수도 있겠지만 실책을 저지른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노진혁도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 다음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눈밑의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자, 이제 임완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안타가 하나 있죠.”
“뒤에 이인영 선수거든요. 출루만 하면 어떻게든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초구를 노려봐도 될 것 같습니다. 베어스도 여기서 승부가 안 되면 어렵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이인호 위원은 초구 타격을 적극 권장했다.
하지만 그냥 지켜보는 임완수,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베어스 배터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투 스트라이크를 이끌어 냈다.
‘면목이 없다.’
임완수가 범타로 물러나면서 성운 라이온즈의 6회 말 공격은 소득 없이 끝났다.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서는 슈퍼스타, 선배들이 후배를 이끌어줘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업혀가고 있으니, 부끄러워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인영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얼굴로 필드로 향했고, 이리저리 몸을 틀며 스트레칭을 했다. 나도 인간인데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 평소보다 일찍 경기장에 나와 훈련을 한 것도 김장감을 풀기 위해서였다.
다른 선수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여기서 막고 한 점 따라가면 분위기도 달라지겠지, 눈앞에 보이는 것 외엔 전부 잊어버렸다.
“자, 이제 김동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3타수 무안타, 이번 시리즈에서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김동환 선수가 지난 2년 동안 무릎 부상에 신음하다가 올해 117경기를 출장했거든요. 본인이 부상으로 이탈해 있을 때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뒀기 때문에 의욕이 있을 텐데, 좀처럼 부진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네요.”
김동환은 올 시즌 타율 0.288, 홈런 12개를 치며 베어스의 하위 타선을 책임졌다.
홈런 20개를 가뿐히 넘기던 전성기는 지나갔지만 캡틴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량, 페르난데스가 난동을 부리고 쫓겨나면서 베어스의 상위 타선은 얄팍해 졌다.
하위타선이 그만큼 힘을 내줘야 하는 상황, 이재학 감독은 박수를 치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재학의 활약을 기원했다.
따악~!!
“됐어!! 됐어!!”
밀어 친 타구가 좌측으로 날아갔다.
장타를 예감한 베어스 선수단은 일제히 일어났지만 끝까지 타구를 쫒아간 이인영은 폴짝 뛰어오르며 타구를 낚아챘다.
펜스 위를 걷는 스카이 워크 세리머니는 덤, 최소 2루타가 될 타구를 도둑맞은 김동환은 격한 탄식을 뿜어냈다. 잊을 만 하면 나타나는 녀석, 백전노장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저 정도면 중견수도 잘 볼 것 같은데’
한편, 시라큐스 내셔널스의 스카우트 존 브릭스는 이인영의 외야 수비 능력에 주목했다.
타격에 가려져서 그렇지 수비 능력도 일품, 지금도 드라이브 타구가 나왔는데 귀신같이 낙구지점을 찾아냈다.
빠른 발과 타구 판단 능력 덕분에 수비 범위도 넓은 편, 한국에선 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이인영의 체형은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슬림한 편이다.
KBO 위원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인영의 올 시즌 몸무게는 95kg 정도다. 190에 가까운 키, 그것도 운동선수가 이 정도면 많이 가벼운 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몸매, 한 눈에 봐도 탄탄하고 날렵한 인상을 줬다. 그렇다고 파워가 부족한 건 아니고 유연성과 운동능력도 뛰어난 편, 다른 팀 스카우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존 브릭스는 수비 능력도 높은 평가를 내렸다.
호수비로 위기를 넘긴 성운 라이온즈는 7회 초를 넘겼고, 이인영은 선수 타자 자격으로 7회 말 공격을 이끌었다.
‘홈런이 좋지만 출루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일단 초구는 골라냈다.
풀 스윙을 돌렸던 앞 선 타석과는 전혀 다른 태도, 오건무 포수는 벤치 사인을 확인했다.
먼저 달려들지 말라는 지시, 일단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4볼넷 경기가 4번이나 있었고,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도 1번 있었거든요. 집중견제를 받는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칠 수 있는 공을 가려낼 줄 압니다. 그래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어요.”
따악~!!
“말씀 드리는 사이!! 이 타구는 우중간에 떨어집니다!! 오늘 경기도 멀티 히트!! 라이온즈에게 다시 기회를 안겨줍니다!!”
“보세요. 이 선구안도 이인영 선수를 보다 완벽한 타자로 만들어주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1루를 밟은 이인영은 벤치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일단 한 점 만회하고 가자는 뜻, 나이는 어리지만 가라앉은 벤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리더십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