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2)
‘이 시간에 누구야?’
한국시리즈 4차전을 앞두고 조금 일찍 출근한 이성한 코치는 그라운드로 나갔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훈련에 대비해 구단관계자들이 장비를 제대로 설치했는지 확인하려 한 것, 그런데 장비는 벌써 설치 돼 있고 배트 박스에선 한 선수가 타격에 열중하고 있었다.
역시 그 녀석, 뭐 하러 이렇게 일찍 나왔냐며 말을 걸고 싶었지만, 훈련이 끝날 때 까지 참았다.
따악~!!
이인영은 프론트 플립 스윙을 반복했다.
왼 손으로 배트를 잡고 스윙을 하는 훈련, 좌타자 기준으로 오른 팔은 타구의 방향을 정하는 운전대 역할을 한다.
원하는 방향으로 타구가 가지 않는다는 건 타이밍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기술적인 부분도 체크해야 할 일, 이 작업이 끝나자 배트를 왼 손으로 잡고 휘둘렀다.
왼 팔로 힘을 실어주는 탑 핸드 스윙, 타격이란 이 두 가지 동작을 한꺼번에 해내는 거지만 실전에선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따로 따로 해보면서 감을 찾아 나가는 것, 어느 정도 됐다고 판단했는지 양손으로 배트를 잡고 공을 밀어냈다.
따아악~!!
오늘은 우중간으로 많이 가는 타구, 탑 핸드를 할 때 손이 빨리 꺾이는 선수들이 있는데 타구를 좀 더 힘 있게 민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인영도 그걸 알기 때문에 좌중간으로 타구를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스윙을 하는 편, 그런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힘 있는 스윙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 왼 팔이 제대로 힘을 실어주면서 타구는 펜스를 가볍게 넘어갔다.
‘취미가 없는 녀석인가?’
이성한 코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경기가 있는 날엔 야구에만 집중하는 게 당연하지만, 휴일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거나 자신만의 취미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런 것도 없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도 문을 열어 달라며 개인훈련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장면, 소문은 사실이었다.
대구는 큰 도시지만 저 녀석은 얼굴이 팔린 입장, 쉬는 날 어디서 뭘 했다면 벌써 여론에 노출됐을 거다. 한마디로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도 거의 없다는 뜻, 이성한 코치는 슈퍼스타의 뒷모습에서 투지의 탈을 쓴 광기를 보았다. 정말 야구 밖에 모르는 자식, 일단 모른 척 하고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되자 하나 둘 모여드는 선수들, 이성한 코치는 이인영을 타격 훈련에서 제외시켰다.
“오늘은 쉬어라.”
“왜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그렇게 일찍 나와 훈련을 했는데 입 싹 닿고 또 훈련을 하려고 하는 녀석, 열심히 하는 것도 좋은데 무리하다 다치면 큰일이라 빼버렸다.
“왜 안 시키는 건가?”
“저 녀석 일찍 나와서 훈련 했습니다. 제가 다 봤습니다.”
현장에 나와 있던 차명석 단장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라면 칭찬해 줘야 할 일, 하지만 왕따를 당한 슈퍼스타는 뚱한 얼굴로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 아픈가?’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박한우 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시리즈 4차전을 앞둔 선수가 타격 훈련에서 제외되다니, 친아버지를 통해 대략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그 녀석 오늘 12시에 집에서 나갔어요.”
“12시? 오늘 훈련 오후 2시부터라고 들었는데?”
“먼저 가서 연습한 거죠. 전부터 그랬어요.”
박한우 위원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성운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그런 소문은 듣질 못했다. 여론에선 천재라고 띄워주지만 사실은 안 보이는 곳에서도 훈련을 하고 있었다는 뜻, 올 시즌 거둔 성적이 우연일까.
올해 보다 내년, 내년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선수로 평가했다.
* * *
“자, 오늘 성운 라이온즈는 존 워커가 선발 투수로 나섭니다. 이번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6이닝 1실점, 좋은 투구를 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인호 위원님.”
“예.”
“이 선수가 등판했다는 건 한승규 감독이 승부를 띄웠다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시리즈가 길어질수록 준 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 성운 라이온즈에게 불리하거든요. 실제로 부상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혈투 끝에 3차전을 잡아냈기 때문에 이 기세를 살려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문제는 워커 선수의 체력이겠죠. 4일만의 등판이라 조금 무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워커는 김환희에게 안타를 내줬지만 나머지 타자들은 잘 처리하며 1회를 넘겼다.
미국 - 일본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포스트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피로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빈자리는 우리가 채우면 된다.’
이어지는 성운 라이온즈의 1회 말 공격, 타석에 들어선 임완수는 여느 때보다 의욕을 드러냈다.
홍현구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1번으로 승격됐고,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솔직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동료가 부상으로 이탈한다는 건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뜻, 내 몫도 해내면서 타인의 일까지 해내는 게 쉬운 일인가.
특히 베어스보다 선수층이 얄팍한 성운 라이온즈 입장에서 연 이은 부상은 뼈아팠다.
정규 시즌에서 20홈런 이상을 쳐 준 홍현구와 상위 타선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임재경의 이탈, 결국 그동안 잘 해줬던 선수들이 더 잘하는 수밖에 없다.
그만큼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냐며 자신을 다독였다.
딱~!
“아~ .”
하지만 첫 타석은 평범한 땅볼, 임완수가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사이 이인영은 특유의 느긋한 발걸음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우익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투 아웃, 지금은 의외로 초구부터 배트가 나왔네요.”
“글쎄요. 평소의 이인영 선수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입니다.”
결과는 아웃이지만 성운 라이온즈의 이성한 코치는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오늘 연습타격에서도 저 녀석은 우중간으로 타구를 보내는 연습을 했다. 의도대로 나온 결과, 아웃은 됐지만 질책할 이유도 없었다.
‘저 자식 왜 이러지?’
베어스 배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시리즈에서 바깥쪽 공은 신중하게 골라 쳤던 이인영, 그런데 지금은 몸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로 몸을 틀며 바깥쪽 공을 잡아당겼다.
오늘은 파워 스윙에 집중하겠다는 건가. 딱히 말릴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야수들은 긴장해야 했다.
따악~!!
경기는 어느 덧 2회 초, 베어스는 존 워커를 두들겨 선취점을 냈다.
확실히 1차전보다는 떨어진 구위, 그래도 워커는 특유의 노련한 피칭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실점을 최소화 했다.
문제는 타선, 야수들의 부상이 잇따르며 성운 라이온즈의 타선은 분명 약해졌다. 거기다 준 플레이오프부터 미친 타격감을 보였던 이인영의 활약은 조금 가라앉은 상황, 이닝이 거듭될수록 홈 팬들의 불안감은 깊어졌다.
따악~!!
“아~ 여기서 다시 적시타가 나오는 군요. 김환희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2대 0이 됩니다.”
“역시 무리였나요. 최소 145km 이상은 나와 줘야 하는데, 이 정도 구위라면 제구가 되도 이겨내길 어렵습니다.”
4회 들어 잘 버티던 존 워커는 다시 흔들렸다.
불펜을 대기 시켜놨지만 조금 더 버텨줘야 하는 상황, 통역을 대동한 노진우 투수 코치는 조금 더 힘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하지만 베어스의 맹공은 매서웠고 4회 초는 3대 0이 되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후우~ 이 정도면 됐겠지.’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한숨을 골랐다.
상대 팀은 분명 좋은 경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힘을 비축한 베어스와 달리 혈전을 거치느라 힘이 떨어진 라이온즈의 전력, 올림픽 때문에 단축 시즌이 됐다고 쳐도 선수들이 체감하는 피로는 작년과 다를 게 없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겠지, 4차전을 잡아내고 시리즈 동률을 이루면 나머지 일정은 쉽게 흘러갈 거라고 판단했다.
따악~!!
하지만 그 기대는 바로 흔들렸다.
4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선두 타자로 나선 임완수가 팀의 첫 안타이자 첫 출루를 만들어 냈고, 홈팬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이인영 홈런을 연호했다.
앞 선 타석에서 날카로운 타구를 보여준 녀석, 오건무 포수는 긴장한 얼굴로 코치의 사인을 받았다.
‘승부’
베어스는 결단을 내렸다.
피해봤자 기세를 살려줄 뿐, 요즘 타격감이 아주 좋다고 할 순 없으니 이번 기회에 완전히 눌러버려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 또 쳐 봐라.’
오건무는 첫 승부와 똑같은 공을 요구했다.
바깥쪽 공을 무리하게 잡아당기는 걸 보니 녀석도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거겠지, 의욕이 너무 앞서면 조급함이 되는 법, 이번에도 잘 될 거라고 믿었다.
따악~!!
“다시 당긴 타구!! 파울입니다.”
“지금도 발목이 완전히 꺾일 정도의 풀스윙이거든요. 평소처럼 가볍게 쳐도 될 텐데 뭔가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음… 뭔가 다듬어지지 않는 야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네요.”
박한우 위원과 마찬가지로 이인호는 아들의 스윙에 의문을 표했다.
저렇게 치는 녀석이 아닌데, 그 이른 시간에 필드에 나가 도대체 무슨 연습을 한 건가. 큰 경기라고 긴장을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동안 보여준 활약이 너무 뛰어났다.
‘아니야.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래도 이인호는 아들을 믿었다.
친아버지인 내가 믿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저 아들을 믿어주겠나.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했다.
‘저렇게 크게 휘둘러도 쳐내네.’
계속 되는 도끼스윙에 베어스는 안도감과 위협을 동시에 느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이렇게 치면 백발백중 헛스윙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쫒아가는 배트, 볼 카운트에 여유도 있겠다 일단 하나를 뺐다.
‘겁나면 도망치시던가.’
물론 이인영은 낚이지 않았다. 거칠어진 건 스윙 뿐, 공을 보는 섬세함은 살아있었다.
다음 공도 골라내면서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배터리는 여기서 승부수를 던졌다.
따아악~!!!
“잡아당긴 타구!! 배트를 던졌습니다!!!! 모든 야수가 일시정지!!!! 멀어지는 타구를 바라볼 뿐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투런 홈런!!!!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3번 째 홈런이자 포스트 시즌 7번째 홈런입니다!!!! 스코어 3대 2!!!! 성운 라이온즈가 턱 밑까지 추격을 개시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네요. 방금 전 이인호 위원께서 뭔가 다듬어지지 않는 야수의 냄새가 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짐승이네요.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데 이런 말씀을… .”
“아니요. 솔직히 저도 그런 냄새가 납니다.”
배트에 맞는 순간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타구, 필드를 가로지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스탯 캐스트에 따르면 158m를 날아간 타구, 현장에 있던 스카우터들도 짜릿한 스릴에 휩싸였다.
기술적인 스윙을 하는 선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런 놀라운 파워를 숨기고 있었다니, 오늘에야 이인영이라는 선수의 진면목을 확인했다며 만족한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