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1)
딱~!!
“아~ 이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이렇게 물러납니다.”
“뭐… 매번 안타를 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거든요. 성운 라이온즈 입장에선 안타깝게 됐네요.”
높게 뜬 타구가 나오는 순간, 이인영은 배트를 거칠게 내던졌다.
사실 내야 땅볼보다 나쁜 게 내야 플라이다.
최소 병살은 막을 수 있는데 왜 내야 뜬공이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타구질을 따져보면 내야 뜬공은 주자가 진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외야 플라이는 그나마 진루 가능성이 있지만 내야 뜬 공은 공격 입장에서 삼진이나 다를 게 없는 최악의 결과, 타자 입장에선 쌍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못 지키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것도 없어.’
이인영은 굳은 얼굴로 감독 옆을 지나쳤다.
오늘 경기를 앞두고 감독 앞에서 홈런 하나치겠다고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팀 승리를 떠나서 프로선수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뭐야? 재경 선배 어디 갔어요?”
“어깨가 좀 아픈 것 같다. 방금 전 병원에 갔다.”
설상가상 동료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까지, 이게 사망 플래그라는 건가. 하지만 슈퍼스타는 이까짓 거 이겨내면 된다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자, 이제 베에서의 7회 초 공격으로 접어듭니다. 선두 타자는 페르난데스 오늘 안타 없이 삼진만 2번을 당했습니다.”
“성운 라이온즈는 권오환 투수를 올리네요. 당연한 기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맞대결은 조금 상성이 좋지 않네요. 권오환 선수가 좋은 구위에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갖추고 있지만 바깥쪽 제구는 물음표가 달렸거든요. 페르난데스 선수가 가운데와 몸 쪽은 강점이 있는데… 지금 성운 라이온즈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네요.”
추가점을 내지 못한 성운 라이온즈는 바로 투수를 교체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 페르난데스의 장단점을 알고 있는 배터리는 바깥쪽 승부를 걸었지만 제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원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시작하는 승부, 권오환은 자신의 구위를 믿고 빠른 공을 밀어 넣었다.
딱~!!
밀리면서 파울, 이 정도면 자신감을 가지고 승부해도 되지 않을까. 코치가 사인을 주자 배터리는 다시 빠른 볼을 택했다.
딱~!!
“다시 파울입니다. 145km, 권오환 선수의 구위가 오늘 나쁘지 않네요.”
“이제 유리한 카운트가 됐거든요. 체인지업을 던질 텐데, 볼이 되더라도 낮게 던져야 됩니다.”
배터리는 예정된 사인을 주고받았다.
우리도 알고 상대도 알고 던지는 공, 하지만 너무 낮게 떨어지면서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됐다.
‘침착하자. 아직 우리가 앞서고 있다.’
노진우 코치는 다시 한 번 배터리에 사인을 줬다.
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니 다시 한 번 바깥쪽 빠른 볼을 던져보라는 것,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권오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아악~!!
“자!! 밀어낸 타구가 우측 높게 날아!! 담장~ 밖으로~ 사라집니다!!!! 호세 페르난데스의 동점 솔로 홈런!! 베어스가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제가 오늘 페르난데스 선수가 바깥쪽 공에 약점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보란 듯이 넘겨버리네요. 이 한 방은 라이온즈 입장에선 뼈아픈데요.”
홈런이 나오는 순간, 권오환은 고개를 떨구며 양쪽 무릎을 움켜쥐었다.
지금은 절대 못 던진 공이 아니다. 의도했던 그 코스로 던졌는데 타자가 잘 친 것 뿐, 약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타자가 대책을 안 세워뒀을까. 우리가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원인이지만 지금은 페르난데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가 문제구나.’
다행히 추가 실점은 없었지만 한승규 감독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불펜에서 명백히 앞서고 있는 베어스, 장기전이 된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믿었던 이인영이 범타로 물러난 건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 하지만 저 녀석이라고 언제나 칠 순 없는 일 아닌가.
오늘 경기의 승패는 하늘에 맡겼다.
7회 말과 8회는 양 팀 모두 별 다른 일 없이 넘어갔고, 성운 라이온즈는 9회 말 반격을 위해 만전을 기했다.
‘어림없다!!’
초구부터 강하게 날아오는 타구, 임완수는 빠져나가는 타구를 막고 1루로 송구하는 날렵한 수비를 선보였다.
“이거 나야!! 나!!”
다음은 중견수와 2루수 사이로 날아오는 타구, 중견수 임재경과 교체된 이재영은 아래로 내려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콜 플레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일어난 부상, 긴장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기본적인 것을 잊고 말았는데 코치의 지시대로 기본에 충실했다.
중견수가 처리하면서 순식간에 2아웃, 선수들이 집중력을 유지하는 만큼 팬들도 긴장감 속에 터져 나오는 환희에 몸을 맡겼다.
“자, 이제 성운 라이온즈의 9회 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8번 타자 이해진 선수부터 시작되는 공격, 오늘은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길게 가면 절대 좋을 게 없거든요. 이런 때일수록 좀 더 적극적인 스윙이 필요합니다.”
따악~!!
“말씀드리는 사이 초구 타격!! 유격수가 잡아서 던지지만!! 늦었다는 판정입니다!! 선두 타자 출루!! 성운 라이온즈가 경기를 뒤집을 찬스를 잡습니다!!”
“사실 지금은 던져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김동환 선수가 포구를 잘 해줬습니다.”
베어스의 1루수 김동환은 유격수를 향해 정신 차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베어스는 정규시즌 필딩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 들어 유독 떨어지는 선수들의 판단력, 경험이 많은 만큼 이런 상황에서 팀을 다독이는 능력을 발휘했다.
“환희!! 환희!!”
김동환은 2루수 김환희에게도 사인을 보냈다.
여기서 출루가 이뤄지면 성운 라이온즈는 임완수 - 이인영 - 김상규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득점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분명 병살을 막기 위해 밀어치는 스윙을 하거나 번트를 대겠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모두 대비를 해뒀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면승부다.’
한승규 감독은 9번 타자 이재영에게 강공을 지시했다.
밀어치는 타격에 대비해 우중간으로 물러난 2루수, 그리고 3루수와 유격수는 위치를 조금 앞당겼다.
덕분에 넓어진 센터 쪽 라인, 투수 쪽을 노리는 타격이 된다면 오늘 경기는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딱~!!
“파울입니다. 올 시즌 유독 파울이 늘어난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
“아닙니다. 올 시즌 파울 볼이 3만 9723개나 나왔거든요.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경기 시간도 그만큼 늘어났고요.”
“왜 이렇게 파울이 많이 나오는 겁니까? 박한우 위원님은 그 원인을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음… 제가 공부 좀 더 하고 오겠습니다.”
예상 못한 답변에 중계석은 폭소에 휩싸였다. 그냥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될 텐데, 가뜩이나 긴장된 상황에서 나온 말이라 더 웃겼다.
그래도 질문은 받았으니 어떻게든 답은 해야겠지, 박한우 위원은 못 다한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을 조금 덧붙인다면 올 시즌 파울 볼은 늘었지만 파울 뜬 공이 줄었습니다. 작년 시즌은 경기 당 2.14개 정도였는데, 올 시즌은 1.67개로 줄었거든요. 그리고 리그 평균 득점도 4.33점에서 5.02점으로 늘었습니다. 그만큼 타자들이 승부에서 끈질긴 모습을 보였다는 뜻이겠죠. 덕분에 경기 시간은 늘었지만 저는 올 시즌 중계를 하는 동안 지루하다는 느낌은 거의 못 느꼈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경기 시간을 줄이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말 투구가 경기 진행에 영향을 주는 걸까. 하지만 진짜 경기 시간과 연관이 있는 건 파울 타구다.
그런데 빨리 좀 던지라고 애먼 투수들만 괴롭히고 있는 KBO 위원회, 전문가 말은 안 듣고 본인들 입맛대로 야구를 해석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 붙였다.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카운트가 몰렸지만 이재영은 승부를 6구까지 끌고 갔다.
확실히 눈에 띄게 늘어난 파울 타구, 한정된 시간에 투구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게 됐으니 투구 간격이 빨라진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고민할 틈이 없으니 배터리나 투수 코치는 경기 전부터 볼 배합을 짜고 나올 수밖에 없다.
그만큼 단조로워진 볼 배합, 파울 타구의 급증은 이런 배경도 무관하지 않았다.
딱~!!
“자!! 이 타구는!! 중견수!! 2루수!! 그 사이에 떨어집니다!!!! 행운의 안타!!! 갈피를 못 잡던 승리의 여신이 이제 마음을 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빗맞았는데 행운이 따르네요. 역시 내야 플라이보다는 외야 뜬공이 낫습니다. 이런 변수가 따라주잖아요.”
안 풀리는 경기에 베어스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르난데스의 동점 홈런이 나왔을 때만 해도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상하게 흐르는 경기, 무사 주자 1 - 2루에서 임완수를 상대해야 했다.
‘네가 끝내라.’
임완수는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무사 주자 만루에서 타석에는 이인영, 6회 말 결정적인 찬스에서 내야 플라이로 물러난 죄인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외야 플라이만 쳐도 경기 종료, 끝내기 볼넷도 상관없다며 마음을 비웠다.
동굴에 들어갔다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곰과 마주친 기분이 이런 걸까. 퇴로는 열려 있지만 도망쳤다간 바로 물려 죽는 상황,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이재학 감독은 정면 승부를 지시했다.
따악~!!
“밀어낸 타구가!! 외야로 날아갑니다!! 3루 주자가 홈으로!! 홈으로!! 들어오면서 3차전이 막을 내립니다!! 최종 스코어 4대 3!! 성운 라이온즈가 2차전의 패배를 딛고 다시 앞서 나갑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해주네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영웅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슈퍼스타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은 편, 심지어 수훈선수 인터뷰까지 거부했다.
PD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전개, 겨우 설득해서 카메라 앞에 세웠다.
“오늘 결승타를 기록한 이인영 선수의 소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인영 선수.”
“예.”
“수훈 선수 인터뷰를 거부하셨는데. 이유가 뭔가요?”
“그게… 제가 창피해서 그랬습니다.”
“뭐가 그렇게 창피하신데요?”
“오늘 야구를 놀부처럼 했거든요.”
이인영은 6회 말, 도망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야 플라이로 물러난 걸 아직도 가슴에 담아뒀다.
그때 쳤으면 팀이 편하게 경기를 마무리 했을 텐데, 9회에 안타를 쳤다고 그 죄가 사라지나? 제비 다리 부러뜨리고 나중에 고쳐준 놀부와 다를 게 없었다.
‘풉, 놀부래’
리포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억눌렀다.
웃고 싶지만 그건 프로 정신에 위배되는 일, 어쨌든 영웅이 됐으니 좀 더 가슴을 펴도 되지 않느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요. 오늘 경기는 제가 납득을 못하겠습니다. 내일은 좀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만 할 게요.”
이인영은 더 이상 인터뷰를 이어가지 못했다.
별로 잘 한 것도 없는데 여기서 잘난 척 하는 것도 웃긴 일, 하지만 솔직한 발언은 오히려 팬들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이런 놀부라면 칭찬 받을 만 하지. 장하다 이인영!!]
-> 놀부면 어때, 어쨌든 끝내기 안타 쳤잖아.
-> 여기까지 팀 멱살 잡고 올라온 것도 대단한 거다. 평소처럼 자신 있게 야구 했으면 좋겠다.
[이제야 진짜 슈퍼스타가 나타난 것 같다. 이런 선수 있으면 야구 볼 맛나지.]
놀부처럼 야구를 했지만 그래도 칭찬해주는 팬들, 댓글을 확인한 이인영은 앞으로도 팬들이 만족할 수 있는 야구를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