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0)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자.’
팀이 경기를 뒤집어주자 성운 라이온즈의 선발 송필재는 언제 흔들렸냐는 듯 호투를 이어갔다.
최대한 낮게 제구를 위지하면서 3회까지 2실점으로 버텼지만, 노진우 투수 코치는 심각한 얼굴로 감독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금 바꾸는 게 어떨까요.”
“잘 던지고 있지 않나?”
“그 이유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통산 114승을 거둔 전설이자 국가대표 코치까지 겸임했던 사람답게 노진우 코치는 송필재의 재능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저렇게 낮게 제구를 유지하는 투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구위가 위력적이지 못해 낮게 던질 수밖에 없는 투수와, 구위가 좋아 공이 싱커처럼 자연스럽게 깔리는 유형이 있다.
송필재는 전자의 경우, 아무리 제구가 낮게 되도 프로 타자라면 눈에 익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상대는 KBO 최강의 타선이라는 평가를 받는 베어스, 처음부터 노진우 투수 코치는 송필재를 오래 마운드에 둘 생각이 없었다. 3차전은 불펜을 총동원해서 막고, 4차전에 존 워커를 올리자는 게 노진우 코치의 생각, 물론 1차전에 6이닝을 소화한 존 워커를 4차전에 올리는 건 도박이자 무리수다.
투수력이 떨어지는 성운 라이온즈는 에이스 존 워커를 잘 활용해야 하는 입장, 노진우 코치는 계획대로만 된다면 한국시리즈 우승도 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야 약속된 일이긴 한데… ’
하지만 한승규 감독은 교체를 망설였다.
1회에 조금 흔들렸지만 송필재는 지금 잘 던지고 있다. 투구 수도 51개로 괜찮은 편, 내리는 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
한 이닝 더 지켜봐도 괜찮을 텐데, 잠시 고민하다 송필재가 첫 타자를 잡아내자 마운드로 향했다.
“벌써 내려가나요?”
“그래.”
송필재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기 교체는 사전에 통보된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빠르지 않은가.
단장 뜻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 감독이 독단을 내렸을 리는 없고 분명 노진우 투수 코치의 지시겠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공을 넘겨주고 벤치로 향했다.
“자, 여기서 투수가 교체되는 군요. 송필재 선수가 내려가고 조정호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최고 144km의 빠른 볼, 체인지업, 포크볼, 슬라이더를 던지는데요. 종으로 떨어지는 포크볼과 횡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를 모두 던질 수 있다는 게 강점입니다.”
“이 선수를 투입했다는 건 성운 라이온즈가 승부수를 던졌다는 건데요. 이게 독이 될지 신의 한수가 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초구를 던진 조정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회부터 벤치의 지시대로 몸을 풀고 있었지만 아직 몸이 덜 풀렸다. 필승조 중 한 명이라 이런 상황에서 자주 올라왔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매 경기 똑같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첫 타자 김재규에게 볼넷을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 4번 타자 페르난데스를 상대했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죠. 페르난데스 선수가 올 시즌 이 공에 고전을 했는데, 라이온즈 벤치가 이것도 고려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배트가 또 나올까요? 똑같은 패턴에 2번 당하는 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인호 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르난데스는 똑같은 코스에 헛스윙을 돌렸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페르난데스는 볼넷만 2개 골라냈을 뿐, 7타수 1안타에 그치고 있다.
똑같은 패턴에 계속 당하는 중, 아이큐가 떨어지거나 타석에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증거 아닐까. 라이온즈 배터리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또 슬라이더를 택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3구 역시 슬라이더!! 한숨 돌리는 성운 라이온즈입니다.”
“페르난데스 선수가 이게 문제에요. 뭐… 경력은 많지 않지만 메이저리그 기록을 보면 아웃 존 스윙 비율이 25% 정도 됐는데, 이건 MLB 평균을 따져봤을 때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닙니다. 문제는 컨택률인데요. 바깥쪽 공 컨택률이 66%, 메이저리그 평균치인 77%보다 무려 10% 이상 낮았습니다. 결국 바깥쪽 공을 공략하지 못해서 메이저리그에 연착하지 못했는데,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박한우 위원님은 현역 시절 바깥쪽 공을 누구보다 잘 치지 않으셨습니까? 뭔가 비결이 있었나요?”
“비결이라기보다는 공을 잘 봐야 합니다. 바깥쪽 공은 모든 선수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거든요. 바깥쪽 공을 못 치는 선수가 프로에서 살아남는다? 저는 본 적 없습니다.”
조정호는 후속타자까지 잘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빠른 볼 구속이 생각만큼 올라오지 않아 걱정이 됐는데, 페르난데스가 슬라이더에 속아주면서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문제는 지금부터, 지금 구위로 다음 이닝도 책임질 수 있을까? 노진우 코치와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던지다보면 풀리지 않겠냐?”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몸 좀 더 풀어 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최소 다음 이닝까지는 버텨줘야 하는 선수,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조정호는 쉴 틈도 없이 파울 라인 밖의 간이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그 사이 성운 라이온즈는 3회 말 반격에 나섰고, 선두 타자 임재경이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임재경은 신상욱의 4구를 받아쳐 내야를 빠져나가는 안타를 날렸다.
베어스 벤치도 여기서 선발 투수를 교체, 불펜 싸움이 시작되면서 긴장감은 한껏 드높아졌다.
“자, 이제 임완수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첫 타석에서 안타, 가을야구에서 10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강공으로 가야죠. 경기가 후반도 아니고 한 점 보다는 점수를 더 내겠다는 생각으로 가야 됩니다.”
임완수는 2구를 때렸지만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있는 힘껏 내달렸지만 6 - 4 - 3으로 이어지는 병살 플레이, 여기저기서 홈팬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팬들은 홈런을 연호했지만 베어스 배터리는 여기서 무리하게 승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이 자료를 베어스 코치진이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이인영 선수는 컨디션이 나쁠 때도 컨택률은 좋았습니다. 이러니까 들어가질 못하는 거죠.”
“무슨 자료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제가 이인영 선수의 올 시즌 월별 타율을 정리해 봤는데요. 6월 중순에 잠깐 타격감이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투수들은 몸 쪽 승부 를 들어갔겠죠?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글쎄요. 숨기지 말고 얼른 얘기 좀 해 보시죠.”
“하하~ 예, 6월 10일부터, 6월 18일까지, 이인영 선수가 115개의 볼을 상대했는데, 그 중 41개가 몸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38개를 컨택 해 냈어요. 결과에 상관없이 말이죠.”
“컨디션이 나빠도 어떻게든 맞춘다는 거군요.”
“예. 제가 방금 전, 페르난데스 선수가 바깥쪽 볼에 약점을 보이면서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인영 선수는 상대가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코스도 어떻게든 쳐냈다는 겁니다. 컨디션이 나쁠 때도 이랬는데, 최고조인 지금은 말 할 것도 없죠.”
“그런 자료는 어디서 가져오시는 겁니까?”
이인호는 박한우 위원의 정보 수집력에 경악했다.
본인도 아들의 경기는 매번 챙겨봤지만 이렇게까지 세부적으로 파고들진 않았다. 양아들이라고 자처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아들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우~ 우~ .”
그 사이 이인영은 볼넷을 얻어내고 1루로 향했다.
오늘 두 타석 모두 볼넷, 짜증이 난 관중들은 야유를 퍼주었지만 슈퍼스타는 냉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나는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이인영은 배터리의 경계가 느슨해져 있다는 걸 간파했다.
하긴, 2아웃이니 타자와의 승부에만 집중하고 싶겠지, 사인은 없었지만 단독 도루를 감행했다.
깜짝 놀란 오건무 포수는 바로 2루로 송구, 하지만 주자의 손이 먼저 베이스를 찍었다. 안타 하나만 나오면 바로 추가 득점, 하지만 성운 라이온즈 벤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상 위험이 높았던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다른 선수도 아니고 저 녀석이 다치면 팀은 어떻게 될까.
이닝이 끝나자 이성한 코치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충고를 줬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득점권 만들었잖아요.”
“그게 아니라 헤드 퍼스트는 좀 위험하지 않냐?”
“어차피 할 도루라면 그게 낫죠.”
이인영은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벤트 레그 슬라이딩이 헤드 퍼스트보다 부상확률이 낮다? 어느 쪽이든 부상 위험은 있고 어차피 도루는 부상을 각오하고 하는 플레이다.
어차피 해야 할 도루라면 성공률이 높은 헤드 퍼스트가 낫겠지, 나이는 어려도 자기만의 야구관은 확고했다.
‘건강 따질 거면 라면을 왜 먹어? 도루도 그거랑 똑같지.’
지금 내가 여기서 몸을 사릴 입장인가.
최고의 무대에 섰으니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모두 하는 게 당연, 똑같은 상황이 와도 도루를 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파울 라인 밖에서 몸을 풀던 조정호는 베어스의 4회 말 공격을 막기 위해 마운드에 등판, 초구부터 142km 빠른 볼을 던졌다.
덜 풀렸던 어깨는 어느 정도 달아오른 편, 하지만 상대가 상대라 긴장감을 늦출 순 없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좌중간으로 가는 데요!! 좌익수!! 중견수!! 좌익수가 잡아냅니다!! 이인영 선수가 좋은 수비를 보여주는 군요.”
“아~ 약간 접촉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일단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워낙 빨랐던 타구라 서로 콜을 하지 못했던 게 원인, 어깨가 약간 뻐근했지만 이인영은 문제없다는 사인을 보냈다.
시즌을 거치다보면 몸은 타박상이나 긁힌 상처로 뒤덮인다.
이 정도에 얼굴을 찡그리는 건 엄살, 뭣보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탓에 통증 따윈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좀 아픈데’
반면 임재경은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190이 넘는 덩치와 충돌했으니 몸이 온전하다면 거짓말, 하지만 아픈 척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 확실히 아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재경은 타석에서 어깨 쪽에 불편함을 느꼈다. 말을 하자니 팀 분위기에 해가 될 것 같고, 그냥 가자니 내 몸이 걱정.
6회 말 공격에서 타석에 서긴 했는데, 결국 어설픈 스윙으로 3번 째 타석을 마무리 했다.
아직까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부상, 그렇게 경기는 계속 흘러갔다.
따악~!!
“자!! 여기서 안타가 나오는 군요!! 임완수 선수는 오늘도 멀티 히트 게임입니다.”
“앞 선 타석에서 때린 병살타를 제외하면 오늘도 만점 활약이네요. 성운 라이온즈는 여기서 득점을 내야 됩니다.”
이어지는 그 분의 등장,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다행히 어깨 쪽 통증은 사라진 상황, 평소처럼 배트를 투수 쪽으로 뻗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이런 때일수록 과감해야지.’
이인영은 초구를 노리고 들어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베어스의 중심타선을 맞이해야 하는 불펜, 잘 버티고 있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 아닌가.
점수 차가 있어야 투수도 마음 놓고 투구를 하겠지, 마침 원하던 공이 들어왔고 있는 힘껏 스윙을 돌렸다.
딱~!!
“아~ .”
파울라인을 벗어나면서 파울,
이인영이 자세를 고쳐 잡는 사이, 임재경은 심각한 얼굴로 이성한 코치와 얼굴을 마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통증,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고백을 해버렸다.
홍현구도 부상으로 이탈했는데 이번엔 임재경이라니, 좋은 기회를 맞이했지만 성운 라이온즈 벤치는 침묵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