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언젠가 다가갈 그 날 (9)
[한승규 감독, 민심 잃었나]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문제의 발원지는 프로야구의 뒷이야기나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주간 소식, 기자들은 한승규 감독이 오래 전부터 성운 라이온즈의 지도권을 잃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한승규 감독은 이미 감독으로서 식물인간 상태]
[작전은 이성한 타격 코치, 투수 교체는 노진우 투수 코치가 주도한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민심 잃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이런 기사를 내보내는 이유가 뭔가.
사실 이건 한승규 감독이 선수시절 쌓은 악행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박한우 전 감독과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팬 서비스나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프로감독 1년 차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니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닌가.
2차전 패배 이후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둘 터져 나오는 기사들, 차명석 단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릴 밟아 죽이겠다는 거냐?’
이인영은 이 소식을 접하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한승규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 굳이 이 타이밍에 기사를 내보내는 저의가 뭔가.
SNS에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다.
[프로야구에 FA 등급제를 적용하는 것처럼, 기자들에게도 등급을 매겨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기자들을 대놓고 저격하는 발언, 7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바라는 대구 팬들도 이 의견에 동참하고 나섰다.
누가 봐도 우리의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는 식으로 싸지른 기사, 발끈한 성운 그룹의 김태성 회장도 차명석 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승하면 돈 풀 테니까 그렇게 전해두게.”
“알겠습니다.”
지난 2014년, V5를 달성한 성운 라이온즈는 45억 원을 지급 받았다.
KBO에서 지급한 우승 배당금은 28억 정도에 그쳤지만, 김태성 회장이 우승 기념으로 17억을 따로 풀면서 포상금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번에 약속한 우승 기념 포상금은 대략 22억 원, 배당금까지 합치면 50억은 가볍게 넘길 거다. 그만큼 김태성 회장이 이번 사태에 격분했다는 뜻, 차명석 단장은 바로 이 사실을 선수단에 전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하지만 이인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우승하면 포상금은 당연히 지급받는 거고, 지금은 구단 차원에서 기자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던질 타이밍 아닌가.
일개 선수인 나도 SNS를 통해 입장을 전했는데, 구단은 단장의 해명 외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으니, 물론 내부 결속도 중요하겠지만 대외 선전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부터 솔선수범하자.’
이인영은 일단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독과의 악연은 전지훈련 때부터 시작됐고, 그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한승규 감독이다. 그래서 가끔 적대감을 표하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를 제공하고 말았다.
사람의 인성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우승을 위해 뭉쳐야 할 때 아닌가. 옛 감정은 잊어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일단 출근하자마자 감독에게 인사를 건넸다.
늘 하던 거지만 오늘은 좀 더 밝은 얼굴을 추가, 논란에 휩싸인 한승규 감독의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지만 일단 인사를 받아줬다.
“어제 술 한 잔 하셨어요?”
“아니, 왜?”
“얼굴 좀 펴세요.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한승규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은 지금 날 비꼬는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감독님은 오늘 제가 얼마나 해주길 바라세요?”
“왜?”
“제가 잘해야 감독님한테도 좋은 거잖아요. 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한승규 감독은 그제야 이 녀석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 같아선 만루 홈런 4개 치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무리,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봤다.
“다른 건 됐고 홈런 하나면 쳐 줘라.”
“알았어요. 노력 해 볼 게요.”
한때 서로 으르렁 거렸지만 지금은 우승을 위해 의기투합, 여기에 모기업이 대규모의 포상금을 약속한 덕분에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여느 때보다 열의를 보였다.
“자, 베어스의 1회 초 공격으로 한국시리즈 3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오늘 성운 라이온즈의 선발은 송필재 선수, 시즌 21경기 등판 9승 8패 평균자책점 4.66, 112이닝 동안 볼넷 38개, 탈삼진은 96개를 기록했습니다.”
“올 시즌 부상도 있었고,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거든요. 그래도 올 시즌 성운 라이온즈의 선발진을 책임져 준 선수라는 건 분명합니다.”
송필재는 앞으로 던질 공을 오늘 다 던지겠다는 각오로 마운드에 섰다.
딱히 포상금 때문이 아니라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를 잡겠나. 준 플레이오프부터 온갖 고생을 하며 올라온 한국시리즈,
팀이 2차전에서 패배한데다 여론의 논란에 휩싸였으니 마운드에 오르는 마음가짐은 평소와 분명 달랐다.
따악~!!
하지만 경기는 의지만으로 안 되는 법, 선두타자 김환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후속 타자가 진루타를 굴려주며 1사 주자 2루, 3번 타자 김재규가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군요.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베어스의 선취 득점!! 3차전도 베어스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뭐,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도망치다가 볼넷을 내주느니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게 낫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한우 위원은 타들어 가는 목을 생수로 다스렸다.
인생의 애증이 녹아 있는 성운 라이온즈, 그 팀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겠나.
이인호도 그 옆에서 잠시 망설이다 한 마디를 던졌다.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이 성운 라이온즈 팀 분위기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곤 할 수 없겠죠. 사실 관계를 떠나서 경기 전에 그런 기사를 내보내는 건 경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가 앞으로도 해설위원 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까짓 거 문제가 된다면 물러나면 그만, 따지고 보면 나는 PD가 편파해설 하라고 데려다 놓은 사람 아닌가, 거기다 아들이 몸 담은 소속 팀을 뒤흔든 기자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어쨌든 성운 라이온즈는 1회에 2점을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 선수들은 1회 말 반격을 위해 분위기를 다독였다.
‘우리가 우승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어.’
선두 타자 임완수는 초구부터 의욕 넘치는 스윙을 돌렸다.
실력으로 까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왜 소문으로 팀을 흔드는 건가. 아니, 그걸 떠나서 그런 자세한 내막을 외부인이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 언질을 줬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설마 박한우 전 감독? 하지만 임완수가 아는 박한우 감독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조금 답답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이나 팀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해설위원으로 전직한 뒤에도 성운 라이온즈를 은근 밀어주는 해설을 했던 사람,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
어쨌든 우리가 이기길 원치 않는 인간의 소행이라는 건 사실, 보란 듯이 우승으로 갚아주고 싶었다.
따악~!!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안타!! 임완수 선수는 오늘도 안타를 기록합니다!!”
“포스트 시즌 전 경기 안타 기록을 이어가네요. 이번 시리즈에서 확실히 타격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지난 1~ 2차전에서 홈런을 맞은 베어스 배터리는 볼넷을 가장한 고의 사구를 택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야유와 원성, 반면 이인영은 보호구를 풀어내며 1루로 걸어갔다.
이제 타석에는 김상규, 2차전에서 별 다른 활약이 없던 김상규는 초구부터 달려들었다.
“스윙!! 김상규 선수가 초구부터 크게 돌려봅니다.”
“성운 라이온즈 입장에선 홍현구 선수가 그리워지겠네요. 올 시즌 홍현구 선수가 베어스를 상대로 타율 0.323, 홈런도 3개를 기록할 정도로 강점을 보였거든요. 특히 오늘 등판한 신상욱 선수에게 7타수 3안타로 강했습니다.”
홍현구가 빠지면서 가벼워진 타선의 무게, 다른 선수들의 활약으로 빈자리를 채우고 있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야 하는 일, 김상규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가!! 가!! 얼른 가!!”
이때 폭투가 나왔다.
때 아닌 횡재에 흥분한 김상규는 주자들에게 진루를 독촉, 순식간에 무사 주자 2 - 3루가 되면서 관중석은 환호로 들끓었다.
‘하아~ 저 자식 진짜…’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은 인상을 찌푸렸다.
1차전에서도 블로킹을 제대로 못하면서 위기를 자초하더니 오늘도 똑같은 모습, 저게 올림픽 우승을 이끈 국가대표 포수의 모습인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병살 위험이 낮아졌으니 타자 입장에선 좀 더 편하게 스윙을 할 수 있는 상황, 반면 폭투가 나온 베어스는 변화구 승부를 하지 못했다.
따악~!!
“외야로 뻗어 나가는 타구!! 중견수가 뒷걸음질 치며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까지 3루!! 아!! 여기서 송구 실책이 나오는 군요!!!! 이인영 선수까지 홈으로 들어갑니다!! 스코어 2대 2 동점!! 성운 라이온즈가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어 냅니다!!”
“베어스가 올 시즌 팀 수비율이 0.991이었는데 이번 시리즈 들어 그런 모습이 전혀 안 보이네요. 1차전도 실책이 패배로 이어졌는데, 오늘도 그런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라이온즈 쪽으로 돌아온 분위기, 더그아웃의 선수들도 박수를 치고 목소리를 높이며 동점 무드를 형성했다.
반면 아쉬운 수비를 보여준 오건무는 뭐 씹은 표정, 일단 뛰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뒤집어야지.’
이제 타석에는 4번 타자 박한수, 주자가 없어서 칠 맛은 사라졌지만 집중력을 유지했다.
“뛰어!! 뛰어!!”
또 옆으로 튀는 공, 주자도 없는데 박한수는 자기도 모르게 베이스를 돌라는 손짓을 했다.
팽팽한 긴장감을 끊어내는 가위질, 성운 라이온즈 선수들은 정신 좀 차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자 없어 인마!!”
“홈런 쳐!! 홈런!!”
박한수는 쏟아지는 질책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헬멧을 고쳐 썼다.
하지만 폭투가 나오면 손짓을 해주는 건 좋은 습관, 그만큼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이성한 코치는 박수를 치며 기대감을 드높였다.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방금 전 이인호 위원께서 그런 기사를 내보내는 건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의 결속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벤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박한우 위원이 멍석을 깔아주자 이인호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외부의 잡음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선수의 덕목, 괜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따아악~!!
“와아아~!!”
이때 큰 타구가 터져 나왔다.
설마 하던 박한수는 전력으로 1루로 질주, 역전 홈런이 확정되는 순간 박한수는 양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1회에 2점을 내줬지만 바로 역전 시킨 경기, 외부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성운 라이온즈는 우리가 우승할 자격이 있는 팀이라는 걸 실력으로 증명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