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4)
플레이오프 2차전을 앞두고 양 팀 벤치는 미세한 온도 차를 보였다.
원정에서 1승을 선점한 라이온즈는 여유라는 게 있었지만 st 위너스는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사소한 말도 눈치를 살폈다.
“내가 오늘은 홈런 쳐서 이길게”
작년 이 맘 때 쯤, 플레이오프 2차전을 앞둔 박혁은 동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전날 경기에서 실책에 무안타까지 겹치면서 팀의 패배에 일조한 선수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코칭스태프는 박혁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저 입장이라면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을 텐데 오히려 자신감을 드러내다니, 그 정신력을 높이 평가했다.
‘입이 안 떨어지네.’
그러나 이번 포스트 시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는 제 역할을 다 했는데 따라와 주질 못하는 동료들, 거기다 어제 그 애송이의 인터뷰 때문에 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여기서 내가 자신감을 드러내봤자 오히려 역효과 아닐까. 결국 한 마디도 못 떼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너 오늘도 홈런 하나 쳐라.”
반면 성운 라이온즈 벤치에선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어제 1사 주자 1-3루에서 이인영에게 희생플라이를 요구했다가 진짜 그만큼만 대접을 받은 이성한 코치, 오늘도 홈런 하나치라고 미리 예약을 넣었다.
“저 오늘은 묻어갈 거예요.”
이인영은 요구가 너무 많으시다며 퇴짜를 놨다.
본심은 그게 아니지만 너무 쉬운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사절, 한 번 튕겨보는 아가씨처럼 새침한 얼굴로 돌아섰다.
‘네가 치면 나도 친다.’
‘이하동문’
경기를 앞두고 양 팀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는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미 여론은 둘을 두고 비교질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최강이 돼야 한다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뿐, 나이는 어리지만 욕심 많은 곰은 다 내꺼라는 야욕을 가슴에 품었다.
“자, 성운 라이온즈의 선공으로 플레이오프 2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타자는 임완수 선수, 이번 가을 야구에서 14타수 7안타, 고감도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현구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력이 조금 위축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있었는데, 이가 빠져도 잇몸은 튼튼했습니다.”
따악 ~ !!
“말씀 드리는 사이!! 유격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박혁 선수의 멋진 수비!! 안타 하나를 지워냅니다!!”
“어제 제가 박혁 선수의 유격수 수비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했었는데요. 역시 선수들도 해설을 듣는 게 확실합니다. 보란 듯이 좋은 수비를 보여주네요.”
허탈한 표정의 임완수와 달리 박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잠잠해졌던 성운 라이온즈 응원단은 기세를 드높였다.
오늘 ST 위너스의 선발은 앨런 쿼크, 좌완이라 이인영은 밀어치기에 초점을 맞췄다. 자신만의 루틴과 타격 접근법이 정립되면 어떤 투수가 나와도 배트가 자연스럽게 반응하기 마련, 초구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지만 의식하진 않았다.
딱 ~ !
“2구!!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이렇게 카운트 싸움에서 몰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 말이죠.”
“타격을 하다보면 늘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순 없죠. 문제는 대응 능력입니다.”
3구는 높게 들어오는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존에 겨우 걸칠 정도로 높게 들어왔지만 이렇게 날아온 변화구는 밀어치는 타격에 걸린다.
처음부터 밀어치기에 초점을 두고 있던 이인영은 배트를 돌려버렸고, 약간 높게 뜬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졌다.
앨런 쿼크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 하지만 슈퍼스타는 당연한 결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보세요. 이런 타격이 됐다는 건 처음부터 밀어 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공을 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이인영 선수가 무서운 게 자신이 생각한 결과를 그대로 만들어 냅니다. 어떤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까 바로 방망이가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들어도 이해가 안 되네요 … 박한우 감독님도 선수 생활에 그런 예지력을 발휘 하셨습니까?”
“글쎄요.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참고로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투 스트라이크 이후 타율이 0.373인데 … 저는 이 기록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플랜은 정해 놓고 타석에 섰지만 마음대로 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는 … 여러분들이 보시다 시피입니다. 정말 타고 났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마침 중계카메라에 잡힌 이인영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큰 경기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이 장면을 보고 있던 팬들은 경악했다. 박한우 위원의 해설이 옳다면 이 자식은 처음부터 모든 볼 배합을 다 예상해 두고 거기에 맞는 스윙을 했다는 것 아닌가.
어지간한 공포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섬뜩한 미소, 넋이 나간 투수의 얼굴만 봐도 이인영이 얼마나 무서운 타자인지 알 수 있었다.
후속타자 김상규가 진루타를 치면서 2사에 주자는 2루, 2루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박혁은 슬쩍 대화를 시도했다.
“솔직히 말해 봐.”
“뭐가요?”
“너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당연하죠.”
배려 없는 답에 박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금은 망설여도 될 텐데 예의고 뭐고 없는 자식,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럼 저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지 말해보세요.”
“나 올 시즌 끝나면 메이저리그 진출하잖아. 너보다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너무 잘난 척 하지 마세요. 아직 진출할 것도 아니잖아요.”
메이저리그 포스팅도 시작 안 됐는데 벌써부터 메이저리거 대접을 받길 바라는 건가. 이인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도 조만간 미국 따라 갈 테니까 기다리세요.”
“너 포스팅 자격 얻으려면 앞으로 한참 남았잖아.”
“아? 그렇죠? 그 때 되면 선배님 골골 대실 테니까 제가 코리안 메이저리거 바통 이어 받을 게요.”
그때 되면 당신은 늙어서 KBO에 복귀했을 테니 메이저리그 정복은 내가 하겠다는 뜻, 박혁의 영혼은 지구를 넘어 우주 저 편으로 날아갔다.
열은 받는데 마취된 것처럼 열리지 않는 입, 그 사이 후속타자의 안타가 이어지며 성운 라이온즈는 선취점을 올렸다.
‘이런 때는 당쳐 치기가 기본이지’
경기는 흘러 3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1사 주자 3루에서 이인영은 두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좌완을 상대할 땐 밀어치기가 기본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당겨치기가 팀 배팅, 바깥쪽 공을 잡아당겨 3루 주자의 홈 쇄도를 도왔다.
안타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순식간에 2대 0, 다급해진 ST 위너스 타자들은 공세에 나섰지만 경기는 풀리지 않았다.
딱 ~ !
“밀어 친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2루수가 잡아 1루에 송구, 투 아웃이 됩니다.”
“급하네요. 어제도 박혁 선수가 빠지는 공을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이런 타격은 안정성이 떨어지거든요. 모든 공을 다 치겠다고 달려드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어제 홈런 포함 2안타를 때려내며 팀 공격을 이끌었던 박혁은 첫 두 타석에서 모두 범타로 물러났다.
설마 홈에서 2경기를 내주는 건가.
선수들도 당황했지만 누구보다 어이가 없는 건 팬들, 전문가들의 예상이 옳다면 이번 시리즈는 ST 위너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게 맞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정 반대의 결과, 끌려가는 경기는 이후에도 반복됐다.
‘던질 공이 없다.’
경기는 어느덧 5회 초, 앨런 쿼크는 이인영과의 3번째 승부에서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이인영은 첫 타석에서 출루를 의식한 밀어치는 배팅, 두 번째 타석에선 3루 주자를 불러들이기 위한 팀 배팅을 했다.
그럼 지금 상황에선 어떨까? 팀이 2대 0으로 앞서고 있으니 굳이 팀 배팅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공을 좀 더 몸에 붙여 놓고 배팅을 하겠지, 바깥쪽으로 던져봤자 타자가 반응할 리가 없다.
승부를 하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도 애매한 상황, 배터리는 코치의 지시대로 바깥쪽 공을 던졌다.
‘보였다.’
이인영은 공이 미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을 뺐다.
던져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던져야 하다니, 이런 때 투수만큼 처량한 신세도 없다.
그렇다고 봐주는 건 없는 프로 세계, 노렸던 공이 들어오자 바로 풀스윙을 돌렸다.
따아악 ~ !!
“배트를 던졌고!! 이 타구는 높게 떠서 담장 밖으로 ~ !!!!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홈런포를 작렬시킵니다!! 스코어 3대 0!! 성운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한 발 더 다가섭니다!!”
“어제 2안타에 홈런 하나, 오늘도 2안타에 홈런 하나 … 답이 없네요. 이걸 어떻게 막습니까.”
타격이 되는 순간 앨런 쿼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승부를 위해선 반드시 던져야 했던 공, 그걸 놓치지 때려버리는데 뭘 어쩌겠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이 이상은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포스팅 룰을 바꿔서라도 데려오고 싶다.’
한편, 관중석에 앉은 스카우터들은 입맛을 다셨다.
치는 순간 몸이 1루 쪽으로 약간 쏠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건 약간 굽혔던 몸을 세우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좌타자가 이런 자세가 되면 당연히 내야 안타 생산에도 유리, 메이저리거라고 다 장타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감각, 주루 능력도 중요한 요소, 이게 받쳐주는 선수라면 고타율은 어지간하면 따라 붙는다.
실제로 현재 메이저리그를 호령하고 있는 로버트 그린(LA)도 매해 150개에 가까운 삼진을 당하지만, 많은 내야 안타 덕분에 3할에 근접한 타율을 찍어내고 있다.
저 어린 선수가 메이저리그 투수에 얼마나 적응해 줄지는 모르지만, 컨택률이 평균만 찍어줘도 성공할 가능성은 높은 편, 하지만 KBO가 메이저리그의 하청업체도 아니고 멋대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젠 만족하시죠?”
한편, 홈런을 치고 돌아온 이인영은 이성한 코치 옆을 지나가며 귓속말을 흘렸다.
묻어가겠다며 튕기더니 할 건 다하는 녀석, 이렇게 든든한 선수가 있는데 우리가 지는 게 말이 되나.
길게 끌 것 없이 3차전에서 마무리 짓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 선수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따악 ~ !!
“아 ~ 여기서 또 안타가 나오는 군요. 3루 주자, 2루 주자까지 모두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6대 0!! 성운 라이온즈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제는 나름대로 팽팽하게 진행이 됐는데, 오늘은 너무 일방적이네요. 전문가들의 예상과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결국 플레이오프 2차전은 성운 라이온즈의 6대 1 승리로 끝났다.
이제 한 경기만 이기면 KS 진출,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