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73화 (73/309)

73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3)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박혁 선수가 신인 시절에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약점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야구 지능이 떨어지는 선수가 아니라 이 점은 바로 개선이 됐죠. 어중간한 유인구는 안 던지는 게 낫습니다.”

박혁은 데뷔 초만 해도 182cm에 83kg, 날렵한 체구를 지닌 유격수였지만 지금은 93kg까지 체중을 불렸다.

특히 뛰어난 운동능력이 강점인데, 적극적인 배팅과 강한 손목 힘으로 유인구를 억지로 잡아당기거나 완벽하게 빠지는 바깥쪽 공을 밀어 쳐 담장을 넘기는 모습도 자주 보여준다.

투수 입장에선 볼에 입질을 안 주는 이인영보다 상대하기 더 까다로운 유형, 배터리는 신중한 승부를 이어갔다.

‘나라면 몸 쪽으로 붙여봤을 텐데’

외야를 서성거리던 이인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박혁은 원래부터 저런 거포는 아니었다.

데뷔 2 ~ 3년 차만 해도 히팅 포인트를 왼쪽 무릎 근처에 뒀지만, 3년 차부터는 왼쪽 무릎 앞으로 옮기면서 장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스트라이크 상단(타율/장타율) - .369/0.566

■ 스트라이크 중간(타율/장타율) - .412/0.727

■ 스트라이크 아래(타율/장타율) - .262/0.440

문제는 이런 변화가 좋은 점만 가져오진 않았다는 것, 낮은 코스, 특히 몸 쪽 공에 약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투수 입장에선 승부하기 어려운 곳이라 계속 바깥쪽을 던지게 되는데 이런 소극적인 공략 법은 타자의 기를 살려줄 뿐, 나도 알고 있는 자료를 배터리가 모를 리가 없는데 조금 답답했다.

따악 ~ !!

“이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군요!! 박혁 선수도 오늘 멀티 히티를 기록합니다.”

“어중간한 유인구는 안 던지는 게 낫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지금도 바깥쪽 공을 걷어냈죠. 안타는 맞을 수 있는데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성운 라이온즈 배터리는 박한우 위원이 지적한 그 실수를 반복했다.

뭘 던질지 알고 있는 타자에게 그 공은 좋은 먹잇감일 뿐, 1회에 홈런을 허용한 공을 또 던졌으니 생각을 좀 해봐야 한다는 질책이 따라붙었다.

ST 위너스는 이 기회를 살려 추가 득점에 성공, 스코어가 3대 2가 되면서 경기는 팽팽히 진행됐다.

‘나는 28명 중 한 명일 뿐이지’

경기는 이제 6회 초,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응원단의 함성을 등에 업었다.

신도 기도를 안 들어 주는데 내가 저 함성에 일일이 반응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못하면 다른 선수들이 하면 그만, 부담감은 느끼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바깥쪽 제법 먼 곳,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심과 시선을 마주했다.

“절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마세요. 이건 누가 와도 못 쳐요.”

4할 타자는 이런 것도 쳐야 되는 건가, 어지간하면 항의 안 하는 스타일이지만 할 말은 하는 편, 눈치를 살피던 서범윤 포수는 다시 바깥쪽을 요구했다.

“이 정도면 칠만 하지 않냐?”

판정은 볼, 서범윤은 타자의 속을 긁어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박혁은 이런 공도 쳐, 못 친다는 건 네가 그 자식보다 못하다는 증거 아니냐?”

“이 집구석은 내세울 게 박혁 밖에 없나보네. 나머지 27명은 장식품인가?”

계속되는 도발에 이인영은 혼잣말을 흘렸다.

본인이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박혁을 앞세웠을까. 말 그대로 호가호위, 한 방 먹은 서범윤은 입을 다물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쳤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정면승부하진 않겠죠. 하지만 김성현 선수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할지 모르겠네요.”

빼라는 사인에 김성현은 얼굴을 붉혔다.

나름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인데 꼴사납게 물러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미디어 데이에서도 정면승부 한다고 예고했는데 내 입장이 참으로 처량, 하지만 코치의 지시를 무시할 순 없었다.

“견제 못하니까 뛰어도 되죠?”

1루에 들어선 이인영은 1루수 한성태에게 대놓고 도발을 날렸다.

김성현은 특유의 언더핸드 폼 때문에 견제가 약한 편, 타이밍만 잘 잡으면 눈 뜨고 코 베어갈 수 있다. 한성태는 마음대로 해 보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실은 뛸 까봐 두려웠다.

‘하나 줘 봐’

마침 눈이 마주친 김성현, 견제구가 날아들자 이인영은 천천히 1루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거 알아요? ST 위너스엔 박혁 밖에 없다는 거”

“뭐야?”

“제가 한 말 아니라 팬들도 다 그래요, 아! 그리고 아까 타석에서 저 사람도 비슷한 소리 했어요.”

이인영은 손가락으로 서범윤 포수를 가리켰다.

트래시 토크를 넘어서는 이간질, 한성태는 입을 다물었지만 고자질이 심한 평소 서범윤의 행실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선두타자 출루를 허용했지만 ST위너스는 실점 없이 위기를 넘겼고, 한성태는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범윤에게 말을 걸었다.

“너 자식한테 무슨 말 했냐?”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박혁하고 비교를 한다느니 뭐라느니”

“내가 뭘 어쨌다고? 왜 안 치냐고 한마디 한 것뿐이야.”

이 인간과 엮이는 게 불편한 서범윤은 급히 자리를 떠났고, 한성태는 그냥 넘어갔지만 멀어지는 뒷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날 두고 뭐라고 했다고?’

박혁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인영이 서범윤과 뭔가 대화를 나누는 건 봤다. 그런데 그게 나와 연관된 일이라니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 그냥 넘어갔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번엔 승부한다.’

6회 말 ST 위너스의 공격, 존 워커는 코치의 지시대로 몸 쪽 승부를 택했다.

박혁이 낮은 공, 특히 몸 쪽에 약한 건 다 아는 사실, 다만 낮은 공보다 바깥쪽 제구가 편한 게 사실이다.

잘못 던져서 약간 높게 들어가면 위험, 플레이오프에서 경기를 치르다보니 모험을 택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박혁을 막지 못하면 ST 위너스를 넘어서지 못하겠지, 어차피 맞을 안타라면 승부를 하는 게 나았다.

따악 ~ !!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가!! 좌익수에 잡힙니다!! 박혁 선수가 3번 째 타석은 범타로 물러나는 군요.”

“몸 쪽을 노리긴 한 것 같은데, 방향이 좋질 않았네요.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방향을 확인한 박혁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다른 타자들에 제 구실을 못하는 만큼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사실, 팬들의 함성에 부응하지 못한 죄인은 고개를 숙였다.

따아악 ~ !!

“아자 ~ 앗!!”

이어지는 7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선두타자 임재경은 초구를 받아쳤다.

양팔을 높이 들며 만세 삼창을 외친 걸 보니 홈런을 확신한 것 같은데, 펜스 밑으로 기어들어간 타구, 1루에서 촐랑거리던 임재경은 서둘러 2루로 향했다.

본인도 민망한지 헛웃음을 짓는데, 타구 속도나 방향을 따져봤을 때 3루를 노릴 타구는 아니라 코치진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가자, 완수야’

이성한 타격 코치는 후속타자 임완수에게 영웅이 될 자격을 부여했다.

이인영이 뒤에 버티고 있으니 ST 위너스는 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 임완수도 욕심이 있었는지 대기 타석에서 힘찬 스윙을 돌리며 의욕을 드러냈다.

“자, 임완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16타수 7안타, 오늘도 1회에 안타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진루타만 나와도 괜찮습니다. 괜히 욕심 부릴 이유가 없어요.”

딱 ~ !!

“초구부터 잡아당긴 타구!!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어디로?!! 일단 3루에서 멈춰섭니다!! 무사 주자 1 - 3루!! 성운 라이온즈가 추가점 기회를 맞이합니다!!”

“타구 좌익수 앞으로 곧장 갔기 때문에 조금 애매했죠. 이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1루에 안착한 임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쉬움을 표했다.

내가 영웅이 될 줄 알았는데 그 기회를 이번에도 어느 녀석에게 토스, 아쉬움은 있지만 멀티 히트를 기록했다는데 의의를 뒀다.

“욕심 부리지 말고 플라이 하나만 날려줘라.”

한편, 이성한 코치는 타석으로 향하는 이인영에게 주문을 넣었다.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상황인가, 이인영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정말 플라이 하나면 만족하시나요?”

“뭐 ··· 될 수 있으면 ··· ”

“알았어요. 플라이 하나!!”

답 할 기회도 안 주고 타석으로 가버리는 녀석, 농락당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어쨌든 그 사이 위기에 몰린 ST 위너스는 급히 좌완 심수재로 투수를 교체했다.

‘허 ··· 정말 플라이냐?’

이인영은 높은 초구를 받아쳐 타구를 좌중간으로 보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코치가 주문한 대로, 서비스를 내심 기대했던 이성한 코치는 개선장군에게 농담을 건넸다.

“야, 그렇다고 진짜 플라이만 치면 어떻게 하냐?”

“공짜 바라지마세요. 저는 주문대로 하는 것 뿐이니까요.”

할 말 다하고 휙 가버리는 인심 얄팍한 녀석, 어쨌든 4대 2로 점수를 벌린 성운 라이온즈는 필승조를 투입해 굳히기에 나섰다.

ST 위너스는 8회 말 1점을 따라붙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이렇게 플레이오프 1차전은 성운 라이온즈의 승리로 돌아갔다.

6이닝 2실점 투구를 펼친 존 워커와 2타점을 올린 이인영이 수훈 선수로 선정, 먼저 인터뷰에 나선 존 워커는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2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박혁 선수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셨는데, 긴장이 되진 않으셨습니까?”

“긴장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더 무서운 녀석이 우리 팀에 있는데요.”

존 워커는 박혁과 이인영을 대놓고 비교했다.

박혁도 대단한 선수라는 건 인정하지만, 둘 중 누구와 붙으라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더 무서운 녀석이 우리 팀에 있으니 이 정도 점수 차는 다시 벌어지겠지, 은근슬쩍 이인영이 더 뛰어난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최강논쟁은 팬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좋은 떡밥, 리포터는 이 주제를 조금 더 키우기로 했다.

“자, 오늘 홈런 포함, 2타점을 놀린 이인영 선수와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인영 선수”

“예”

“방금 전 워커 선수가 이인영 선수가 KBO 최고의 선수라는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의하십니까?”

“최강 논쟁은 의미 없으니까 넘어가고요 ···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건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고든 아니든 동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외로울 뿐이죠. 박혁 선수는 그저 도움을 못 받았을 뿐입니다.”

이인영은 고단수로 ST 위너스 선수단을 깎아내렸다.

솔직히 오늘 ST 위너스에서 타자구실 한 선수가 누구인가. 혼자서 고군분투해봤자 도움을 받지 못하면 패배자 신세, 당연히 최강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

패배한 팀의 선수가 어떻게 최강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무대, 이인영은 최고의 선수보다 이기는 팀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ST 위너스 패배, 성운 라이온즈 승리, 고로 이인영 > 박혁은 진리다. 부정하는 놈은 야알못]

-> 2년 동안 홈런 69개 때린 애송이를 220홈런 타자하고 비교하는 거냐? 박혁은 메이저리그 진출 앞둔 선수다. 비교하는 게 실례지.

-> 그래서 느그 박혁 어쨌든 졌잖아? 패배자가 말이 많네.

-> 다른 놈들이 못해서 진거지 어떻게 그게 박혁 책임이냐?

이인영의 인터뷰는 ST 위너스 팬덤을 뒤집어 놨다.

진 것도 짜증나는데 은근 선수단 사이에 이간질까지 시킨 녀석,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분한 마음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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