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언젠간 다가갈 그 날 (1)
[너 얼른 메이저리그로 가라]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래야 내가 맘 놓고 편파해설을 하지.]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이인영은 박한우 위원과 전화통화를 나눴다.
이번 준 플레이오프에서 편파해설 논란에 시달린 옛 감독 겸 자칭 양아버지, 해외진출한 선수를 응원하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분위기라 편파 해설위원은 그날이 어서 오길 기원했다.
“그것보다는 팀 우승이 먼저죠.”
하지만 슈퍼스타는 모든 일엔 순서가 있다며 한 발 물러섰다.
우승을 이끌어야 팀도 기분 좋게 포스팅에 응해줄 것 아닌가. 지금 내게 해외진출은 아직 먼 일, 하지만 자칭 양아버지는 화제를 그쪽으로 끌고 갔다.
[실은 PD한테도 얘기를 해뒀다.]
“뭘요?”
[너 나중에 해외진출하면 내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고 술 한 잔 샀지]
“아니 …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무슨 로비를 하세요?”
이인영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국내야구 해설위원 한다고 메이저리그 중계 해설하는 거 아니지 않는가. 국내야구 해설하다 그쪽으로 갈아탔는데 별로라며 욕만 얻어먹는 경우도 부지기수, 그리고 그쪽은 해외야구 기자들이 전문이다.
양아버지가 유명한 전직 프로야구 선수라고 해도 한 자리 차지하기 쉽지 않겠지, 그래서 로비 활동을 벌이는 거 아닐까.
그렇게까지 편파해설을 하고 싶으시다면 이뤄드려야겠지, 노력은 해보겠다며 통화를 마쳤다.
[행운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는 것이다.]
미디어 데이를 앞둔 어느 날, 이인영은 SNS를 뒤적거리다 중학교 시절에 끄적 거린 메모를 발견했다.
나에겐 왜 우승이라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걸까. 어린 시절엔 이런 푸념도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행운은 저절로 찾아오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 뿐 아닐까?
행운이란 돈과 같은 것, 누구나 누리길 원하지만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한정적인 양만 생산된다.
다 시험에 합격하고 다 같이 부를 누리고 다 같이 행복해지는 사회가 정말 존재할까. 존재한다고 쳐도 정상적인 사회도 아니고,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덜 떨어진 이상주의자의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몇 몇 사람들은 희망이 스스로 찾아오길 바란다.
다가가기 힘들고 귀찮으니 네가 알아서 찾아오라는 것, 이런 인간에게 행운이 주어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행운에 다가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행운이 떨어지길 기대한다면 그건 바보, 메이저리그 진출도 마찬가지다.
노력해서 다가가도 안 된다면 내가 더 다가서야겠지, 가슴에 담아둔 목표를 SNS에 한 마디로 정리했다.
[너는 거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
도망쳐도 내가 직접 쟁취하겠다는 뜻, 하지만 몇몇 팬들은 마음에 둔 이성을 두고 한 말 아니냐는 추측을 쏟아냈다.
“잘못 해석 하셨습니다.”
미디어 데이에서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에 공식 입장을 밝혔다.
포스트 시즌을 앞둔 선수에게 이성이니 뭐니 하는 질문이 웬 말인가, 번역하는 공부 좀 더 해두시라며 폭소를 자아냈다.
“그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우승을 바라는 건 저도 상대 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올해 4할을 치고 50홈런을 쳤다고 해도 그 행운이 제 손에 쥐어진다는 보장이 없죠. 우승이란 사랑처럼 쟁취해서 얻어내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 올린 것이니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인영 선수는 훗날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면 먼저 다가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지금 하시는 말씀 들어보면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 …… 진짜 이상한 아저씨네. 이제 그만 하시죠?”
대놓고 면박을 주는 슈퍼스타, 어쨌든 덕분에 기자회견장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ST 위너스 진영으로 넘어간 마이크, 1사천 선발로 예정된 김성현은 기자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이인영 선수가 준 플레이오프에서 볼넷만 11개를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김성현 선수는 어떻게 상대하실 겁니까?”
“저는 정면 승부할 겁니다. 쟤는 저한테 안 돼요.”
김성현은 대뜸 도발을 날렸다.
통산 이인영을 상대로 11타수 3안타, 나름대로 잘 대처했으니 이번 시리즈에서도 자신 있다는 반응, 이때 슈퍼스타의 혼잣말이 ST 위너스 진영을 덮쳤다.
“괜히 시비나 걸지 마세요. 지난번처럼”
“우리가 무슨 시비를 걸었다고 그러냐?”
“그걸 제 입으로 말하길 바란다면 말씀해 드리죠.”
작년 4월, 이인영은 ST 위너스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때렸다.
그런데 김성수 감독은 이인영이 부정 타격을 했다며 항의, 주심이 그냥 들어가시라며 주의를 줬지만 항의가 계속되자 박한우 감독이 뛰쳐나와 저 노망난 늙은이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본인들은 잊은 모양인데 당사자 입장에선 잊기 어려운 기억, 당황한 김성현은 말끝을 흐렸다.
“야, 넌 작년 일을 왜 여기서 꺼내냐?”
“그러니까 정정 당당히 승부하시라고요. 지금 하신 말씀처럼요.”
김성현은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본인도 민망한지 기자들의 눈빛을 외면하는데, 그때는 신인의 기를 꺾어놔야겠다는 생각에 무리수를 던졌다. 하지만 이제는 씨도 안 먹힐 작전, 침묵으로 민망한 마음을 대신했다.
* * *
“어디 아프데요?”
“네, 어제부터 두통이 너무 심하시다고 … ”
이곳은 플레이오프 1차전이 벌어지는 ST 위너스 파크,
방송을 앞둔 박한우 위원은 중계차에서 PD와 대화를 나눴다. 함께 하기로 한 이상명 위원이 건강에 이상이 생겨 빠지게 된 것, 그럼 나 혼자 해설을 해야 되는 건가.
그렇잖아도 편파 중계한다고 말이 많은데, 그럼 균형을 맞춰줄 누군가를 대타로 보내야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PD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어렵게 됐다는 입장을 표했다.
“그럼 오늘 저 혼자 해설해야 됩니까?”
“예”
“허허 ~ 이거야 원 … ”
박한우 위원은 급하게 ST 위너스 투수 정보를 수집 했다.
타자 출신이라 타격에 대한 해설은 정통이 났지만 투수 쪽은 부족한 게 사실, 그래도 성운 라이온즈 감독 출신이라 그쪽 투수진은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ST 위너스는 잘 모르는 편,
이상명 위원이 있다면 박자를 맞춰 줬을 텐데, 급한 대로 자료를 끌어 모아 어느 정도는 머리에 넣어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ST 위너스와 성운 라이온즈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리는 ST 위너스 파크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오늘 경기를 두고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예측을 내놨는데, 팬 여러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요점만 읊어주시오.”
오프닝부터 큰 숙제를 안겨주는 캐스터, 하지만 이미 약속된 일이라 차분하게 대응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오늘 ST 위너스의 선발로 나서는 김성현 선수는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이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입니다. 하지만 기복이 있다는 단점이 있거든요. 초반에 감을 잡지 못한다면 성운 라이온즈 타선에 고전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김성현은 기복이 있는 투수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3번 타자 모리사와에게 좌중간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하다니, 경기 내내 어렵게 투구를 이어가며 3회를 넘기지 못하고 강판 당했다.
올 시즌 성적은 28경기 등판, 15승 7패 평균자책점 3.53, 분명 좋은 투구 내용이지만 주무기인 빠른 볼과 커브 제구에 따라 그날 경기가 갈린다.
내가 아는 내용을 성운 라이온즈 코치진이 모르겠나? 의외로 초반에 분위기가 갈릴 수도 있는 경기, 박한우 위원은 1회가 중요하다는 논평을 남겼다.
“첫째도 둘째도 수비다. 알았냐?”
“예!!”
ST 위너스 벤치에서도 비슷한 말이 오갔다.
김성현은 수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 실제로 전성기로 평가 받는 2014 ~ 2017시즌을 살펴보면 당시 ST 위너스의 수비진은 KBO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젠 예전만 못한 내야수비진, 메이저리그 급 수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박혁이 중심을 지키고 있지만 장타를 위해 체중을 불리면서 몸놀림이 예전만 못하다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결국 김성현은 자신의 구위를 믿고 던져야 하는 입장, 1회부터 빠른 볼 구위를 집중적으로 체크했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선두 타자 임완수의 안타!! 성운 라이온즈가 1회부터 기회를 맞이합니다!!”
“임완수 선수는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확실히 타격에 눈을 뜬 것 같네요. 지금도 거침없이 배트가 돌아 나왔습니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13타수 6안타, 고감도 타격을 선보인 임완수는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국가대표급 투수의 공도 쳐내고 있는데 이 정도면 내년이 기대되지 않는가, 중계석에 앉아 있는 신세지만 박한우 위원은 옛 제자의 앞길에 꽃잎이 휘날리길 기원했다.
“그분이 오셨네 ~ ”
“홈런이 보이네 ~ ”
“승리가 왔노라 ~ ”
“모두 소리 질러!! 이인 ~ 영 홈런!!!!”
이어지는 그분의 타석, 성운 라이온즈 응원단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홈 팬들의 기세는 가라앉았다.
다들 홈런만 아니면 된다는 분위기, 그 사이 이인영은 솟아오르는 초구를 골라났다.
“지금은 커브죠?”
“그렇습니다. 얼핏 보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에 업 슛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립은 분명 커브에요. 이인영 선수가 김성현 선수를 상대할 때 이 커브에 조금 약간 모습을 보였는데, 이제는 익숙해 질 때도 됐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임완수는 1루에서 멀어졌다.
김성현은 언더핸드 폼이라 1루 견제에 약점이 있는 편, 거기다 초구부터 커브를 던질 정도면 상대를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조금 흔들어 주면 집중력은 더 흐트러지겠지,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이 날아들었지만 무시했다.
‘다가가긴 조금 부담스럽네.’
2구는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볼, 이인영은 이번에도 지켜봤다.
행운은 내게서 늘 도망치는 법, 그렇다고 무작정 따라갈 필요는 없다. 가끔은 밀당도 필요한 법, 계속 쫒던 놈이 멈춰서면 행운도 가끔 이 쪽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때 때려잡아 생포하면 그만, 준 플레이오프도 그런 식으로 대응했으니 급할 건 없었다.
‘얼른 와라. 완전히 보내버리겠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 타자의 눈치를 살피던 서범윤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않았다.
상대는 4할 타자, 60%는 아웃으로 물러나는데 그 40%의 확률이 배터리에게 주는 심리적 압박은 대단했다.
“자, 일단 발을 풀어보는 군요. 쉽게 승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성현 선수가 미디어 데이에서 정면승부 하겠다고 예고했지만 … 제가 봤을 때 그거 허풍입니다. 이인영 선수에게 정면 승부할 선수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박한우 위원은 어느덧 편파해설로 돌아섰다.
솔직히 편파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 뿐, 도망치는 선수한테 도망친다고 하는 게 편파 해설인가.
하루 빨리 양아들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해야 속마음을 풀어낼 텐데, 김성현의 도망치는 투구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더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