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좋은 긴장감 (6)
2아웃 1, 2회 기회를 맞이했지만 성운 라이온즈의 1회 초 공격은 성과 없이 끝났다.
그건 한진 타이거스도 마찬가지, 1사 주자 1루에서 진상우가 병살타를 치며 기회를 날려버렸다.
타이거스도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 입장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된 팬서비스 문제가 올 시즌 폭발했기 때문이다.
때는 지난 2020년 8월 21일,
비가 오는 날에도 구장 앞에서 선수단을 기다린 팬들을 선수들이 무시한 게 방송에 보도된 게 문제, 특히 어린 팬들은 구단에서 돈 받고 파는 굿즈에 사인을 해달라고 했지만 누구 한 명 응하는 선수가 없었다.
고참이고 그 아래 선수들이고 똑같이 행동, 특히 진상우는 어린 팬이 뒤에서 달려오는데도 무시하고 가버리는 모습을 보여 팬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막아, 막으라고”
타이거스 구단은 급히 뒷수습에 나섰다.
팬서비스 개선을 약속하는 사과가 아니라, 방송국 최초 보도 이후 기사가 못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사태가 커지는 걸 막으려고 한 것, 요즘 시대에서 이런 방식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구단의 대응방식에 실망한 팬들은 포스트 시즌 진출만으로 면죄부를 주지 않았다.
뿌리가 깊은 골수팬들은 변함없는 응원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전체 팬의 몇 %가 되겠나.
선거도 중립 표를 얻어야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흥행도 다르지 않다.
일례로 성운 라이온즈는 올 시즌 중립 팬들을 대거 끌어 모으면서 역대 최초 시즌 100만 관중 달성을 기록했다.
콘크리트 지지층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흥행, 타이거스 구단 관계자들은 물론 선수들도 제법 비어있는 관중석을 보고 느끼는 게 많았다.
하지만 이미 등을 돌린 팬들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지, 우승은 그 답이 아니었다.
[이인영, 이번에는 홈런 가자, TK의 자존심]
-> 아니지, 한국 야구의 자존심이다.
반면, 이인영은 대구 - 경북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력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팬서비스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수, 올림픽에서 대표 팀 금메달을 이끌었는데 TK의 자존심이라는 별명은 조금 편협적이지 않은가.
골수 대구 팬들은 우리 선수라고 감싸고 있지만, 많은 중립 팬들은 이인영을 앞으로 한국야구를 대표할 아이콘으로 인정했다.
“다시 바깥쪽으로 낮게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한번 방망이가 나가 볼 법 한데, 움직이질 않네요. 마치 거대한 산 같습니다.”
경기는 이제 3회 초, 라이온즈의 이성한 코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인영은 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저 코스를 공략하기 위해 밀어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런데 왜 치지 않는 건가? 아예 칠 마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연습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어지간한 공은 쳐보라고 슬쩍 권했던 것, 신중한 타격은 오늘도 계속 됐다.
‘그래, 계속 던져 봐라.’
이인영은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지금 내가 이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어내면 배터리는 어떻게 나올까. 그건 둘 째 치고 쳐 봤자 장타 나오기 어려운 코스, 기다리면 볼넷으로 나가는데 내가 뭣 때문에 무리수를 둬야 하나.
바깥쪽 낮은 공 타격은 마지막까지 아껴뒀다.
“다시 발을 풀어봅니다. 사인 교환이 길어지고 있군요.”
“타이거스 배터리는 생각 잘해야 됩니다. 오늘 김상규 선수가 첫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났지만 2차전에서 적시타 2개를 때려내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이인영 선수를 내보내는 것도 좋을 게 없어요.”
조익현 포수는 투수에게 하나 넣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번 타석도 거르면 이인영은 준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볼넷만 9개다. 무려 9할이 넘는 출루율, 이런 경기를 누가 좋아하겠나.
뭣보다 조익현은 진상우와 함께 타이거스를 이끄는 베테랑, 이런 선수가 승부를 피하는 건 선수단 전체의 사기에도 좋은 영향을 주기 어려웠다.
“아~하나 넣으라니까.”
하지만 완전히 빠져버린 공, 조익현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고, 이걸 캐치한 이인영은 바로 도발을 날렸다.
“넣었으면 맞았을 텐데 오히려 다행 아닌가.”
혼잣말이지만 누가 봐도 너희들 들으라고 한 말, 조익현은 순간 울컥했지만 원 쓰리에서 승부하는 건 위험했다.
결국 치욕을 감수하고 고의사구, 이 볼넷은 김상규의 2루타, 후속 타자의 희생플라이로 이어지며 실점의 빌미가 됐다.
“내가 넣으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죄송합니다.”
공수교대 후, 조익현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 후배를 다그쳤다.
누군 던지기 싫어서 못 던졌나? 도망치는 리드로 볼 카운트를 불리하게 만들고 승부를 지시 하다니, 이런 몰상식한 대우가 어디에 있나.
잘 되면 본인 덕, 못되면 남 탓의 전형적인 유형, 불만은 많았지만 원래 이런 사람 아닌가. 후배는 면피용 발언으로 불쾌한 상황을 넘겼다.
‘미안하다고 하면 네가 어쩔 건데?’
팬서비스 사건으로 이미 망신을 당한 베테랑들, 그런데 여기서 후배 갈구고 또 문제 일으키면 누가 손해인가.
집합을 시켜도 본인들 손해, 무서울 게 없는 후배는 저 쪽으로 멀어지는 선배의 뒷모습을 향해 비웃음 섞인 미소를 날렸다.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랴.’
타이거스 베테랑들도 어린 선수들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역인 만큼, 우리가 팀의 중심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린 녀석들은 우리가 이끌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 본인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자존심이 서질 않았다.
딱~!
“투수 앞으로 굴러가는 타구!! 2루 송구!! 다시 1루에서~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조익현 선수가 여기서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군요.”
“이번 준 플레이오프는 유독 병살타가 많네요. 양 팀 합쳐 벌써 10개째인데, 5개로 서로 동등합니다.”
3회 말,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버린 조익현은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우타자에 느린 발, 나이가 들면서 현격히 떨어진 배트스피드 때문에 당겨 치는 비율이 높아진 성향, 병살 머신 되기 딱 좋은 조건 아닌가.
타이거스 골수팬들도 이젠 ‘조병살’이라고 놀려대는 신세,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진상우에 비해, 조익현의 하락세는 분명했다.
‘생각만큼 안 풀리네.’
경기는 어느덧 5회 초, 이성한 타격 코치는 선수들에게 집중력을 유지하라고 주문했다.
2차전에서 16안타를 몰아치며 대량득점을 올린 타선, 오늘도 주자는 꾸준히 출루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올린 득점은 1점뿐이다.
상대 팀의 공격력이 침체 돼 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 타자들은 제법 날카로운 타구를 날렸지만 리그 최강의 내야진을 보유한 타이거스는 안타를 용납하지 않았다.
간절해지는 이인영의 홈런 포, 하지만 배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정면 승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다시 바깥쪽입니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올 시즌 4할에 55홈런을 친 타자아닙니까. 이 상황에서 정면승부 할 이유가 없죠. 저라도 피했을 겁니다.”
이인영은 5회 초도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준 플레이오프에서 볼넷만 10개, 출루율은 9할을 넘겼다. 이 정도면 어서 가시라며 안내하는 수준, 이인영은 풀어 낸 보호대를 1루수 진상우에게 넘겼다.
“이걸 왜 나한테 주냐?”
“1루 단골인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주셔야죠.”
진상우는 피식 웃다가 보호대를 1루 코치에게 넘겼다.
마음엔 안 들지만 홈런 치고 베이스 도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음에도 볼넷 얻어내면 보호대 받아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다음엔 괜찮아요. 홈런 칠거니까요.”
“그렇게 쉽게 될 것 같냐?”
이인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 1루에서 멀어지며 상황을 살폈다.
‘밀어 칠 필요는 없다.’
3루 코치는 타석에 들어선 김상규에게 사인을 보냈다.
예상대로 좌측에 촘촘히 들어선 그물망, 타이거스 내야진이 단단한 건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밀어치는 타격을 할 필요는 없겠지, 네 스윙을 하라는 신뢰를 보였다.
‘병살만 치지 말자.’
김상규는 큰 욕심 부리지 않았다.
1차전에 3병살, 2차전에 적시타 2개, 그리고 오늘은 무안타,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보니 어지간한 상황은 이제 떨리지도 않는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만 조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타이거스 배터리는 몸 쪽 빠른 볼로 의표를 찔렀다.
1대 0이고 주자가 1루에 있기 때문에 런 앤 히트가 나올 거라고 예상한 것, 하지만 라이온즈 벤치는 그런 작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치라고 했는데 왜 못 치냐.’
한승규 감독은 초구를 지켜본 김상규의 타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 치고 싶어도 못 쳐서 볼넷으로 나가는데 저 녀석은 그냥 지켜보고 있으니, 타격을 주문하는 사인을 다시 보냈다.
“아~떨어지는 군요. 따라 나옵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김상규 선수가 이게 문제에요. 올 시즌 좋은 활약을 했지만 약점이 간파됐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반짝 선수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저 코스를 무리하게 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인영 선수처럼 골라내도 되거든요. 본인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타석에서 잠시 물러선 김상규는 숨을 골랐다.
올 시즌 이렇게 긴장된 타석이 있었던가. 내가 배터리라면 같은 공을 또 던질 텐데, 의외로 바로 승부가 들어올 수도 있다.
1차전에서도 그런 볼 배합에 낚여서 병살만 때리지 않았나. 설마 이번에도 같은 패턴으로 나올까.
마음을 정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딱~!
“파울입니다!! 공 하나 하나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애매하다 싶으면 걷어내는 것도 기술입니다. 이런 게 하나 둘 쌓이면서 타자는 성장하는 거죠.”
파울로 시간을 번 김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타이거스가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진루타다.
1루 주자 이인영은 발도 빠르고 주루 센스가 있는 선수, 2루에 진출하면 단타 하나로 바로 추가점이다.
내가 빠른 볼을 커트해 냈으니 인플레이 타구를 억제해야 하는 배터리는 부담을 느끼겠지,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고 변화구에 대응하는 타격의 정석을 유지했다.
“바깥쪽!! 참아냅니다!!”
“지금은 위험했어요. 블로킹을 잘해줬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옆으로 튀었으면 바로 뛰었을 겁니다.”
송구 자세를 잡은 조익현은 1루로 돌아간 주자를 확인하고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주워들었다.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포수에게 옆으로 튀는 공만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지금처럼 팽팽한 대립이 유지되는 경기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고심 끝에 다시 한 번 바깥쪽 유인구를 요구했다.
베테랑이라도 부담이 되는 볼 배합, 하지만 지금은 이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좋은데.’
김상규는 이것도 골라냈고, 이인영은 박수를 치며 활약을 독려했다.
선수란 큰 무대에서 성장하는 법, 이런 긴장감 넘치는 경기는 레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두렵다고 위축되면 오히려 마이너스, 정규시즌에서 김상규는 이런 패턴에 너무 쉽게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런데 준 프레이오프 3경기 만에 선수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결과가 어떻든 이런 모습은 라이온즈의 미래에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