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불 붙여 드립니다 (19)
‘아~조금 빨랐나.’
손목이 조금 일찍 꺾이면서 파울, 간발의 차이가 안타와 아웃을 가르는 게 타격이라지만 이인영은 고개를 저으며 아쉬움을 표했다.
숨을 고르는 건 배터리도 마찬가지, 서로를 노려보는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사이 팬들은 홈런을 외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딱~!
“다시 빠른 볼! 파울입니다.”
“계속 볼배합을 바꿔주고 있지만, 커트를 해내고 있네요.”
“이렇게 볼배합을 바꿔주면 타자가 타이밍을 잡기 어려울 텐데, 이인영 선수는 다 커트를 해 내네요. 박한우 위원님은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볼배합을 바꿔도 타자의 히팅 포인트는 거의 일정합니다. 그건 제가 전 프로야구 선수로서 장담드릴 수 있습니다.”
“팬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빠른 볼을 칠 때 밀어치기와 당겨치기는 공 한 개 정도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빠른 볼과 변화구의 히팅 포인트 차이는 공 두 세 개 정도에 불과하죠. 잘 치는 비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바깥쪽 공은 공을 끝까지 보지 못하면 칠 수가 없다.
이인영은 왜 연습타격 때 의도적으로 좌중간으로 타구를 보내는 연습을 할까, 밀어 치기가 공을 끝까지 보게 하는 선구안과 안정된 밸런스를 유지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빠른 볼 타이밍에 변화구를 칠 수 있어야 좋은 타자라는 말도 이와 일맥상통, 밀어치기가 되면 배트 헤드가 마지막까지 뒤에 남아 있기 때문에 컨택 범위가 넓어진다.
헤드가 조금 일찍 나오면 당겨치기, 조금 늦게 나오면 밀어치기가 될 뿐, 기본적으로 타자의 히팅 포인트는 정해져 있다.
왜 투수들은 바깥쪽 승부에 70~80%이상을 투자하는 걸까. 그곳이 타자가 가장 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하지만 타자가 그곳을 공략할 수 있다면 볼 배합을 바꿔도 큰 의미가 없다.
물론, 이게 쉽다면 누구나 다 해냈겠지.
실전에서 만나는 투수들의 공은 배팅 볼과 차원이 다르다. 밀어치기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몸 쪽 공에 대처가 느려지는 선수들이 대부분, 이 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만년 유망주들이 넘쳐나는 거다.
이인영은 저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히팅 포인트를 설정하고 투수의 공에 맞춰 밸런스와 타이밍을 맞춰나가는 선수, 한 마디로 정리하면 투수가 뭘 던져도 대응이 되는 타자다.
바깥쪽 승부가 안 되는 만큼 배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스트라이크 존 범위는 제한적, 직구와 변화구를 번갈아가며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떨어지는데요. 볼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배터리가 뭘 던질지 알고 있다는 거죠. 저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오고가는지는 하느님도 모를 겁니다. 물론 그걸 볼 수 있다면 야구를 보는 재미가 떨어졌겠죠.”
“하하~그렇습니까?”
“예, 마음 같아선 저도 현장에 나가고 싶네요. 보는 재미보다는 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거든요.”
박한우 위원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2000안타를 치고 성구회에도 가입된 전설이지만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 그래도 인생에서 도망칠 시간은 없다는 격언을 마음 속에 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양아들도 지금 50홈런을 날리고 황금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 영광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걸 알고 있다면 매 타석마다 최선을 다해야겠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제발 좀 죽어라.’
한편, 이인영은 빠지는 볼을 골라내며 승부를 풀카운트로 끌고 갔다.
진짜 안 죽는 자식, 조익현 포수는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며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한 타석 한 타석이 아쉬운데 볼넷이라니, 기분은 상했지만 보호대를 풀며 1루로 걸어 나갔다.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냐?”
한진 타이거스의 1루수 진상우는 의미 없는 말을 던졌다.
한때 주먹다짐까지 주고받은 견원지간, 타자가 출루하는 게 일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이인영도지지 않고 한방을 날렸다.
“선배님은 오늘 화장실에서 X 싸셨어요?”
인간이 살아 있으면 먹고 싸는 게 일, 화장실은 무조건 다녀와야 하는 곳이다.
타자에게도 1루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구역, 그런데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냐는 말은 왜 하는 건가. 의미 없는 질문하지 말라는 반격에 진상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 괜히 또 한 마디 했다간 뒤통수에 주먹이 날아오겠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꾹 참았다.
따악~!!
그 사이 성운 라이온즈는 후속 타선의 분발로 역전에 성공, 타선의 득점 지원에 힘입은 존 워커도 호투를 이어갔다.
지구 2위 ST 위너스와의 경기 차는 겨우 1게임, 지구 1위 UA 베어스와의 격차는 3경기다.
오늘까지 남은 경기는 4게임, 1위 등극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한창 달아오른 라이온즈 선수단은 적어도 2위는 하겠다는 의지를 열정적인 플레이로 드러냈다.
따악~!
“느린 땅볼, 유격수가 잡아 1루로 던지지만 세이프 판정입니다!! 선두 타자 출루!! 성운 라이온즈가 다시 기회를 잡습니다.”
“이기는 맛을 안 것 같네요. 제가 지휘봉을 잡았을 땐 이렇게 열심히 뛰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혹시 서운하신 겁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경기는 어느새 6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홍현구는 머리에서 조금 이탈한 헬멧을 깊게 눌러썼다.
예전엔 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는데 이제는 지는 게 이상,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이 결과로 이어지는 날이 반복되자 어느 새 욕심이라는 게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후속 타자 임완수가 희생타를 기록하면서 1사 주자 2루가 됐다.
‘거를 테면 걸러라.’
타석에는 이인영, 또 1루 채우고 또 후속타자와 승부 할 건가.
앞선 타석에서 권상규에게 쳐 맞았으니 같은 짓을 반복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우우~우~”
카운트가 투 볼이 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한 다발 쏟아졌다. 하지만 한국산 곰은 덤덤한 표정, 3회와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가!!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홈으로!! 1루 주자는 3루까지 진출합니다!! 스코어 5대 1!! 김상규 선수는 오늘 득점권에서 만점 활약입니다!!”
“이 선수도 드디어 빛을 보네요. 사실 지금도 너무 잡아당기려는 성향이 강하긴 한데, 본인의 스타일을 살릴 수 있다면 상관 없겠죠.”
밀어치는 타구가 20%도 안 되는 김상규,
이런 스타일 때문에 시즌 병살타가 21개나 된다. 그래도 많은 타점으로 만회하는 스타일, 애송이 군단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마른 팬들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까.
적어도 오늘 경기만큼은 그 기대를 채워주고도 남았다.
“하아~어떻게 사진을 이렇게 찍었냐.”
한편, 구단 관계자는 오늘 경기 전 선수들이 관중석에서 찍은 사진을 편집했다.
이제 경기는 막바지라 사진을 전광판에 띄워야 하는데, 이인영이 찍은 사진은 모두 얼굴이 잘린 상태로 나왔다.
선수 얼굴이 잘 나와야 나중에 기념품으로 팔 거 아닌가. 합성을 할까 했지만 누가 봐도 티가 나고 멋도 안 나오는 상황, 고민을 하다가 사진에 그럴 듯한 말을 합성했다.
선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휘갈겨 쓴 글, 이런 배경을 알 리 없는 이인영은 4번째 타석을 준비했다.
[3번 타자, 좌익수, 이 ‧ 인 ‧ 영]
“와아아~!!”
경기는 이제 8회 말, 팬들은 이게 올 시즌 슈퍼스타의 마지막 홈경기 타석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웃이 되더라도 볼넷은 아니길 바라는 심정, 이인영도 방망이를 곧추 세운 채 투수와 신경전을 벌였다.
[우우우~우~]
“초구는 볼입니다. 야유가 대단한데요.”
“승부를 했으면 좋겠지만 타이거스도 아직 경기를 포기할 입장은 아니거든요. 도망가더라도 책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운트가 쓰리 볼이 됐지만 이인영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어정쩡한 볼이 들어오면 때려내겠다는 뜻, 그 각오를 확인한 배터리는 공을 완전히 빼버렸다.
결국 마지막타석까지 볼넷 출루, 경기는 성운 라이온즈의 6대 2 승리로 끝났지만 이인영은 아쉬운 얼굴로 동료들과 손을 마주쳤다.
[팬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전광판에 구단관계자들이 편집한 사진이 드러났다.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다더니, 어째 팬보다 선수 얼굴이 더 부각된 사진, 하지만 이인영이 찍은 사진은 그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진을 못 찍어서 죄송합니다]
눈만 빼꼼 나온 사진에 팬들은 박장대소, 그제야 문제의 사진을 확인한 이인영은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관중석에서 팬들과 셀카를 찍은 건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함 아니었나? 팬이 한 명이라도 더 사진에 나오라고 나는 구석으로 비켜준 것뿐인데, 사진을 못 찍어서 죄송하다는 말로 팬 얼굴을 가려버리다니,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며 분개했다.
‘그런 뜻이었어?’
당황한 구단 관계자는 서둘러 사진 수정에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작업, 그 사이 성운 라이온즈 역사상 첫 50홈런 타자가 된 이인영은 수훈선수 인터뷰에 응했다.
“이인영 선수, 왜 저렇게 사진을 찍으셨나요?”
“팬 여러분들이 한 명이라도 더 나오라고 구석으로 빠진 겁니다.”
그제야 사진의 진실을 알게 된 홈팬들은 뭉클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사진을 너무 못 찍는다고 웃어댔으니, 마침 구단에서 수정한 사진이 전광판에 드러났다.
오늘은 팬들이 주인공이라며 구석으로 빠져준 슈퍼스타,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고 의도한 연출을 이끌어낸 이인영은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장사를 할 줄 아는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차명석 단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잘렸지만 나름 사연이 있는 사진, 팬들이 뭘 구매할지는 결정된 거 아닌가.
야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마케팅 능력도 상당한 선수, 유니폼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으니 그런 것들도 연봉 인상에 반영하기로 했다.
“성운 라이온즈 역사상 첫 50홈런 선수가 되셨는데요. 간단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50홈런을 쳤지만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은 3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할 테니,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경기를 마친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서울로 향하는 버스로 향했다.
올 시즌을 마무리 하는 원정 3연전, 팬들은 각오를 다지고 버스에 오르는 선수들을 향해 응원과 환호를 보냈다.
“이인영 선수!! 여기요!!”
발걸음을 옮기던 이인영은 날아드는 사인요청에 응했다.
일정이 바빠 오래 머물 순 없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대응, 이때 한 팬이 불쑥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죄송한데 사진 촬영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그러세요.”
“이번엔 얼굴 안 잘리게 찍을 게요.”
여성 팬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포즈를 잡았다.
최대한 선수 얼굴이 잘 나오게 해야 되는데 생각보다 각이 안 나오는 상황, 보다 못한 이인영은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또 잘렸어!!”
그렇게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팬의 절규가 들려왔다.
어쨌든 돌아가서 다시 찍어주는 건 불가능, 나는 원래 사진을 못 찍는 건가. 슈퍼스타는 그렇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대구를 등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