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불 붙여드립니다 (15)
‘내가 오늘만 참는다.’
경기를 앞두고 박한우 전 감독은 그라운드에 나섰다.
양반은 못되는 신명철 국가대표 코치, 이 사람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박한우 위원에게 귓속말을 흘렸다.
감독이 된 것보다 날 밀어낸 게 더 기쁘다니, 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 거기다 내가 4년 동안 온갖 욕을 먹어가며 재건한 팀 위에 군림하면서 포스트 시즌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솔직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오늘 양아들이 한승규의 기록을 박살내 버리면 그것도 나름 별미, 쓰린 속을 움켜잡고 기자들 앞에 나섰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이인영은 팀 역사를 대표하는 두 전설 사이에 섰다.
두 사람이 선수 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꽤 널리 알려진 일, 리포터는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PD가 사전에 눈치를 줬기 때문에 입맛을 다셨다.
대신 목표물을 이인영으로 수정, 일단 대기록을 앞둔 소감으로 포문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팀을 대표하는 전설들 사이에 서셨는데요. 대기록 달성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제 손에 물어보시죠.”
이인영은 리포터 앞에 양 손을 펴보았다.
물집이 잡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건 한눈에 봐도 정도가 심한 편,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기록은 따라오는 거 아닌가.
작년에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한 이인영은 지난 겨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배트를 돌리고 훈련에 열중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고난의 흔적, 선수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박한우 위원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예전엔 손바닥에 갈라진 부분을 불로 지지기도 했어요. 당장은 괴로워도 훈련할 때 통증이 조금은 줄어들었으니까요.”
“아 … 그러셨군요.”
리포터는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당황했다.
이런 걸 노리고 인터뷰를 한 게 아닌데, 왠지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눈치가 없는 박한우 위원은 선수의 영광엔 반드시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며 구구절절 대화를 이어갔다.
“뭐든지 큰일을 이루려면 시련을 겪기 마련이죠. 그건 제가 잘 압니다.”
박한우 위원은 감독 시절 겪은 고난의 4년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겨우 재건한 팀을 저 웬수에게 넘기다니, 참고 참았지만 양아들의 망가진 손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가슴에 담아뒀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간 다 됐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넋두리, 이때 PD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실 말씀 더 있으시면 다른 자리에서 하시죠. 멍석 깔아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저야 환영할 일이죠.”
TV 출연 약속에 겨우 멈춘 푸념, 중계석으로 돌아온 박한우 위원은 예전처럼 본분에 충실했다.
성운 라이온즈의 선발 존 워커는 안타 하나를 내줬지만 베어스의 1회 초 공격을 무실점으로 봉쇄, 메이저리그에서 114승을 거둔 한국 야구의 전설이 마운드를 이어받았다.
“자, 오늘 UA 베어스는 임선우 선수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올 시즌 26경기 등판, 10승 8패 평균자책점 4.45, 156이닝 동안 볼넷 59개, 탈삼진은 117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내 복귀 첫 시즌 치고 나쁘지 않은 기록이죠. 다만 기교에 더 신경을 써야합니다. 빠른 볼로 밀어붙이는 투구는 조금 위험하겠죠.”
임선우는 한 때 150km가 넘는 역회전 투심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명성을 날렸다.
워낙 무브먼트가 좋아 제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 기복은 있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4번이나 완봉승을 거뒀을 정도로 일단 발동이 걸리면 누구도 치기 힘든 투수였다.
하지만 이젠 30대 후반에 접어든 노장, 힘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한계가 있다. 지난 경기에서 3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것도 똥고집을 피운 결과, 오늘은 기교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떨어지는데.’
초구를 지켜본 홍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심은 옆으로 휘어져나가는 공이지만 약간 개량하면 싱커처럼 떨어지는 무브먼트를 살릴 수 있다.
실제로 투심과 싱커는 서로 사촌 사이, 전성기 시절 투심의 무브먼트 때문에 제구력에 애를 먹은 임선우는 역회전보다 떨어지는 움직임을 살려줬다.
제대로 던지면 땅볼 유도에 최고지만, 옆으로 도망가는 움직임이 떨어지기 때문에 몰리면 배팅볼, 그걸 잘 알고 있는 임선우는 바깥쪽에 투심을 붙였다.
물론 이런 단순한 투구 패턴은 한계가 있는 법, 오건무 포수는 빠른 볼도 간간이 섞어줬다.
현역 시절에 비해 구위가 떨어졌지만 지금도 145km 정도의 공을 뿌릴 수 있는 임선우, 투심으로 관심을 돌리고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는 노련한 볼 배합을 선보였다.
‘빠른 볼만 노리면 되겠네.’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배트를 휘~휘~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임선우의 주무기는 빠른 볼, 변화구를 못 던지는 건 아니지만 보여주기 용이 대부분이다. 올 시즌 시범경기에서도 한 번 붙어봤지만 그렇게 까다롭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따악~!!
“4구 타격!!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입니다!! 선두 타자 홍현구의 출루!! 성운 라이온즈가 기회를 잡습니다.”
“지금은 투심으로 보이죠? 조금 더 떨어졌어야 했는데, 제가 보기엔 회전이 너무 많이 걸렸네요.”
“회전이 안타를 맞은 이유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임선우 선수는 전성기 시절 역회전이 걸린 투심으로 승부를 봤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거든요. 회전을 덜 줘서 떨어트려야 했는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공이 들어갔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역시 투심은 다루기 까다로운 구종 같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사장되는 분위기인데, 한국야구도 참고해야 할 사항일까요?”
이명한 캐스터는 좀 더 심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강속구 투수가 나이가 들면 필연적으로 거쳐 가는 투심 익히기, 투심은 정말 투수에게 필요한 구종일까.
현대 야구의 트렌드는 높은 팔각도와 빠른 포심 패스트볼, 스카우터가 눈여겨보는 유망주도 대부분 이런 유형이다.
이웃나라 일본도 이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데 한국야구는 언제까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
빠른 볼이 안 통하다보니 되도 않는 변화구가 난무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박한우 위원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와아아~!!!!”
그 사이,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3번이 제자리지만, 오늘은 한 타석이라도 더 나가라는 뜻으로 전진배치, 관중석에선 현상금을 잡기 위한 잠자리채가 솟아났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89, 홈런 43개, 9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반기보다 오히려 타율이 더 올라갔어요. 솔직히 저는 43홈런 보다 타율이 더 눈에 띕니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수치죠. 인플레이 타구 타율이 0.424나 되는데 이걸 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BABIP과 관련이 있는 건 드라이브 타구 비율과 타자의 스피드, 그리고 운인데요. 이인영 선수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습니다. 저는 운이 아니라고 봅니다.”
드라이브 타구가 안타로 이어질 확률은 70% 이상, 이인영은 작년에도 뜬 공보다는 정확한 타격으로 타구의 질을 높여주는 유형이었다.
여기에 좌타자라 발도 빠른 편이라 내야 땅볼이 안타로 이어지는 비율도 높은 편, 뭣보다 장타자라 내야수들은 전진수비를 펼치기가 어렵다.
돈이 돈을 끌어 모으는 것처럼 홈런이 안타를 끌어 모으는 이치, 약점이 없는 타자의 등장에 2020시즌 1위를 달리고 있는 베어스도 바짝 긴장했다.
‘이 자식은 방법이 없는데.’
오건무 포수는 일단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프로 경력 10년 차, 올림픽에서도 대표 팀 투수들을 리드한 만큼 오건무의 실력은 확실하다. 하지만 때론 앞이 안 보이는 길도 있는 법, 나름 머리를 굴려봤지만 공략법을 찾지 못했다.
그걸 알았다면 일본 투수들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았겠나.
한국보다 한 수 위의 제구력과 구위를 갖춘 일본 투수들도 잡아내지 못한 괴물, 아무리 리드가 좋아도 임선우의 구위로 정면승부를 하는 건 무모했다.
하지만 주자가 1루에 있으니 피하는 것도 꺼림직, 전성기 시절의 승부 근성이 남아 있는 임선우는 승부를 택했다.
시범경기에서 홈런을 맞은 사건도 있고 한 번 당한 굴욕은 반드시 갚아주는 편, 오건무도 빠져 앉은 몸을 좀 더 안으로 붙였다.
따악~!!
“걷어 올린 타구가!!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일단 2루까지!! 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무사 주자 1 - 2루가 됩니다!!”
“이게 임선우 선수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정면승부를 하는 건 좋은데, 이제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죠.”
박한우 위원은 임선우의 아픈 기억을 들춰냈다.
메이저리그에서 114승을 거뒀으니 얼마나 많은 타자들을 상대했을까. 그 중엔 천적도 있는 법, 데릭 매이슨이라는 선수에게 27타석에서 홈런만 8개를 내주는 대굴욕을 당했다.
쳐 맞아도 밀고 들어오는 얼굴, 매이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본인에겐 비극이지만 타자 입장에선 감사한 일, 덕분에 성운 라이온즈는 2점을 먼저 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쳐 맞는 길 열어드리죠.’
2회 말 2번 째 타석, 이인영은 홈 플레이트에서 약간 멀어졌다.
투심을 바깥쪽으로 붙이고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는 볼 배합은 이미 간파했다.
이렇게 홈에서 멀어지면 배터리는 바깥쪽을 노리겠지, 하지만 그런 핀 포인트 제구를 하기엔 투수의 제구가 좋지 않았다.
카운트가 몰리면 또 가드 내리고 얼굴 들이밀겠지, 턱뼈를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로 풀스윙을 돌렸다.
따아악~!!!!
“잡아당긴 타구가!! 외야로 높게~~!! 일단 넘어갔습니다!! 장외로 날아가는 타구!! 여기서 베어스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합니다!!”
“1루심은 홈런을 선언했거든요. 이인영 선수는 베이스를 돌고 있습니다.”
300만원 짜리 현상금이 장외로 넘어가자 외야석은 패닉에 빠졌다.
이제 와서 구장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그렇고, 이 타구가 파울로 판정되길 바라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줘? 말아?’
꽃다발을 들고 있던 아가씨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 홈을 밟은 이인영은 후속 타자 김상규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동료들도 일단 하이파이브를 받아줬지만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는 상황,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냉장고에서 꺼내든 물을 들이켰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 아 … 안쪽이군요!! 이건 홈런입니다!!”
“하하~지금이라도 뛰쳐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팬들은 일제히 구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운 라이온즈 구단이 작년에 거금을 들여 설치한 대형 스크린, 비디오 판독 장면이 노출되자 외야석은 들썩거렸고, 구장 밖에서도 사라진 타구를 찾기 위한 수색전이 시작됐다.
그러건 말건 이인영은 뒤늦은 꽃다발을 받았고, 현상금을 포기한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단일 시즌 44홈런, 성운 라이온즈 프랜차이즈 신기록!!]
대기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새겨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 이 와중에도 대기록의 희생양이 된 임선우는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기록 제조기라는 조롱을 받았는데 국내에 복귀하자마자 이 꼴이라니, 나는 은퇴할 시기를 잘못 잡은 건가.
37살이나 먹고 스무 살짜리에게 TKO를 당했으니 속이 너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