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불 붙여드립니다 (13)
“여러분, 살아 돌아왔습니다.”
라커룸 탐방을 마친 유투버는 경기를 앞두고 자신만의 중계석으로 돌아왔다.
찍은 영상은 이미 계정에 올렸고 지금은 여론의 반응을 확인하는 중, 재미있다며 호응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기 끌려고 별 짓 다한다는 악담도 따라 붙었다.
뭣보다 죽은 척 연기를 하는 건 선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무리수, 하지만 서로 짜고 치면 가능한 거 아니냐는 반대 여론도 있었다.
“제가 욕먹는 건 이해하는데 짜고 친 거는 아닙니다.”
유투버는 주작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23만 구독자를 위해 라커룸에 있었던 썰을 풀어냈다.
“이인영 선수 실제로 보면 정말 큽니다. 프로필 키가 189.2로 돼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확실히 큽니다. 왜냐면 제가 185로 작은 편이 아닌데, 저보다 눈에 띄게 큰 편이었습니다.”
아직 20살이라 더 클 수도 있는 나이, 팬들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어지는 증언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제가 미처 올리지 못한 영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죽을 뻔 했습니다.”
유투버는 이인영에게 네 발로 걷는 훈련법을 제시했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지혜를 얻었지만 많은 것을 잃었다. 대표적인 예가 약한 척추, 실제로 허리디스크는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에게 자주 일어나는 질병이다.
여기까지면 괜찮았을 텐데 신체에서 근육은 줄고, 지방은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먹을 게 부족하고 뇌가 커지면서 많은 열량이 필요했던 초기 인류에겐 근육보다 지방이 더 필요했다는 게 과학자들의 주장, 이 때문에 최근 척추건강을 지키고 몸의 근육을 골고루 발달시키는 네 발 걷기 훈련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당신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이인영은 날 진짜 곰 취급 하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다.
그건 진짜 무례했다는 게 구독자들의 반응, 하지만 유투버는 이인영 선수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했을 뿐이라며 반박했다.
“엣취~!!”
한편, 이인영은 평소처럼 느릿한 몸짓으로 더그아웃을 어슬렁거렸다.
덥다고 너무 찬 것만 많이 먹은 게 아닌가, 아까부터 계속 재채기가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체온을 끌어올리기 위해 활동량을 늘렸다.
‘네 발로 걸어보시는 게 어때요? 근육량 유지에 좋다는데.’
이때 건방진 유투버의 말이 떠올랐다.
괜히 열 받긴 하는데 야구만 잘할 수 있다면 뭐든 하는 게 선수 아닌가. 아직 경기 시작 전이라 더그아웃 뒤편에서 네발 걷기를 연습했다.
“야, 너 진짜 하냐?”
“야구 잘하려고 하는 거예요.”
홍현구는 기가 막힌다는 반응,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이 자식은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은 건가. 그것보다 네발로 걷는 폼이 진짜 곰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몸에 좋은 거 맞죠?”
“뭐 … 움직인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트레이너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아직 연구가 필요한 분야지만 움직여서 나쁠 게 없는 사람의 몸, 뭣보다 야구만 잘 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정신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1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홍현구 선수, 올 시즌 타율 0.281, 홈런 13개, 3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심타선으로 갈 수도 있는 선수지만 한승규 감독은 꾸준하게 리드오프로 기용하고 있네요.”
“그런데 이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홍현구 선수가 병살타 비율이 꽤 높거든요. 그리고 팀에 이인영 - 김상규라는 확실한 중심 타선이 있기 때문에 이 선수를 리드오프로 쓸 수 있는 거죠.”
홍현구는 초구부터 공격적인 스윙을 했다.
확실히 중심타선보다는 1번에서 스윙을 했을 때 부담이 덜 한 편, 덕분에 개인 성적도 많이 향상되면서 프로 입단 5년 만에 억대 연봉자가 됐다.
조금 더 분발하면 FA 대박도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 눈에 보이지 않는 볼넷보다 안타 적립에 집중했다.
따악~!!
첫 타석부터 안타, 홈팬들은 홍현구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성운 라이온즈는 홍현구 - 임완수 - 이인영 - 김상규로 이어지는 라인이 쳐주지 못하면 득점을 못내는 팀, 기대할 수 있는 구간이 여기뿐이라 기대가 되는 건 당연했다.
‘번트 대야지.’
후속타자 임완수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인완수는 순장타율이 0.100이 겨우 넘는 똑딱이, 그렇다고 출루율(0.334)이 높은 것도 아니다.
웃긴 건 컨택 능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라는 것, 출루율이 높은 2번 타자는 볼 카운트가 유리해도 아니다 싶은 공은 참아내면서 볼넷을 유도한다.
그런데 임완수는 컨택이 나쁘지 않아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들어내고도 본인이 무리수를 두다 기회를 날려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너는 번트를 대라.”
그래서 전임 감독이었던 박한우는 임완수에게 번트를 대는 훈련을 자주 시켰다.
1번으로 쓰기엔 발이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타력이나 출루율이 좋은 것도 아니니 강한 2번으로 키우는 건 무리다.
그렇다면 작전 능력이 좋은 전형적인 2번 타자로 방향을 잡는 게 낫겠지, 팬들은 그런 박한우 감독의 지도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박한우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리며 팀에 큰 공헌을 하게 됐다.
주자가 있을 때는 진루에 집중하고 없을 때는 적극적인 타격으로 안타를 만들어 내는 게 내가 할 일, 하지만 ST 위너스의 내야진은 뻔히 보이는 작전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강공.’
초구 번트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성한 코치는 타격 사인을 냈다.
안타를 칠 줄 알아야 희생번트도 따라오는 법, 박한우 전임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타격 능력이 되는 선수를 희생양으로 쓰긴 아까웠다.
딱~!
“유격수 정면!! 아~그런데 여기서… 킥볼이 나오는 군요.”
“이건 아웃이네요. 역시 판정이 나옵니다.”
임완수는 2루 쪽으로 느린 땅볼 타구를 보냈다.
2루로 달리던 홍현구는 타구 위를 뛰어 오르려 했지만 공이 발에 맞고 튀었다. 심판진은 곧바로 주자 아웃을 선언했다. 야구에서 주자가 타구에 맞으면 자동 아웃, 그리고 타자에게는 안타가 주어진다.
문제는 그 다음, 타구가 정상적으로 2루수에게 왔다면 백업을 들어온 유격수에게 송구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병살을 막기 위해 주자가 고의로 킥 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자가 일부러 타구에 맞았다고 판단되면 수비 방해가 되면서 주자도 타자도 모두 아웃 처리 될 수 있다.
하지만 심판진은 홍현구가 타구를 피하기 위해 펄쩍 뛰어오른 모습을 고려해 주자만 아웃시키고 임완수에겐 안타를 부여했다.
물론 ST 위너스 입장에선 아쉬운 장면, 뭣보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녀석이 어제 2홈런을 날린 이인영이라 더욱 아쉬웠다.
“날!!려!!버!!려!! 저!!끝!!까!!지!! 죽!!지!!않!!아!! 치!!고!!달!!려!! 이인~영!! 홈런!!!!”
무더위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광란의 현장,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슈퍼 루키는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타석을 꽉 채우는 존재감, 곁눈질을 하던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물론 이인영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 졌다.
선수에겐 그날의 게임 플랜이 있어야 하는 법, 상대가 몸 쪽 승부를 안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인영은 오늘 연습 타격에서 왼쪽 외야, 좌중간을 집중 공략하는데 집중했다. 몸 쪽 승부를 걸어오더라도 철저히 버릴 예정, 초구부터 강한 스윙을 돌렸다.
딱~!
“파울입니다. 지금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은데요.”
“저희가 경기를 하기 전에 이인영 선수의 연습타격을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좌중간을 노리는 스윙을 보여줬는데, 지금도 파울은 됐지만 스윙에 힘이 있어요. 여기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더 들어오면 위험합니다.”
ST 위너스 배터리는 당황했다.
이 정도 코스에 타격을 하다니, 그럼 또 던져서 파울을 유도해야 하나. 하지만 한껏 달아오른 대포에 손을 대봤자 열기에 데일뿐, 바로 방향을 틀었다.
‘이건 아니지.’
2구는 몸 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커브, 노렸던 코스도 아니고 너무 눈에 띄는 구종이라 배트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배터리는 다시 바깥쪽을 노리겠지, 예상은 정확했다.
따아악~!!
“밀어낸 타구가!! 센터 쪽으로 높게!! 담장을~넘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선제 투런 홈런!! 성운 라이온즈가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정말 무섭네요. 저희가 방금 전 이인영 선수가 연습 타격에서 좌중간을 노리는 스윙을 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 진짜 해버리네요. 뭐 이런 선수가 다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선수가 이렇게 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팬 여러분들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쇼.”
홈런을 허용한 서재윤은 글러브를 허리에 댄 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쳐버리면 던질 게 없는데, 몇 번이나 타구가 넘어간 방향을 확인했지만 꿈은 아니었다.
그 사이 시즌 34호 홈런을 날린 이인영은 임완수와 하이파이브를 주고받고 더그아웃에 입성, 동료들은 신이 난 곰탱이의 엉덩이를 난타했다.
‘걸러라 답이 없다.’
ST 위너스는 철저한 도망을 택했다.
이틀 만에 3홈런 헌납,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곰 앞에서 어설프게 도망쳤다간 산 채로 뜯어 먹힐 뿐, 2번 째 승부에서 초구가 볼이 되자 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우~”
사방에서 쏟아지는 야유, 시즌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렇게 걸러버리면 50홈런은 어떻게 치라는 건가.
대표 팀의 올림픽 선전과 이인영의 홈런 행진으로 후끈 달아오른 프로야구 열기, ST 위너스의 행동은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그렇다고 볼넷 주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3번 째 타석마저 고의사구로 출루한 이인영은 1루에 쭈그려 앉아 마운드를 응시했다.
안 놀아준다고 단단히 삐친 표정, 이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본 팬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본인은 심각했다.
40홈런은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50개까지는 힘든 분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순위경쟁은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물이 오른 타자에게 정면 승부를 걸어줄 상위권 팀이 얼마나 있을까.
포스트 시즌에서 멀어진 팀이라면 그나마 상대를 해주겠지만, 올 시즌은 3위부터 7위까지 경기 차가 5.5게임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일정을 고려하면 만만치 않은 50홈런 도전기, 그렇다고 성급하게 달려들진 않았다.
‘기회가 오면 잡을 뿐, 놓치지 않겠어.’
상대가 피하는 승부를 하더라도 스트라이크를 안 던질 수는 없다.
어차피 타자는 투수의 실투를 노려야 하는 입장, 타석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면 결과는 따라오지 않을까.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더운 나날이 계속 됐지만 슈퍼루키는 타석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8월 한 달 동안 타율 0.375에 홈런 8개 21타점, 볼넷을 무려 20개나 얻어내며, 여름에 들어서면 페이스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었다.
KBO 역사상 3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좌타자 40홈런까지 앞으로 2개, 거침없는 행보는 한국을 넘어 일본,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