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47화 (47/309)

47화. 불 붙여드립니다 (9)

[한국대표팀 오늘 금의환향]

8월 9일, 한국 야구대표팀은 인천 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오랫동안 국제대회에서 부진에 허덕인 대표 팀에 내린 단 비 같은 성과, KBO 위원장과 그 휘화 관계자들은 귀국한 선수들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고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감독님, 다음 2021 WBC까지 기대해도 될까요?”

“욕먹기 전에 떠날까 합니다.”

김정길 감독은 기자들의 질문에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법, 올림픽에서 2번이나 금메달을 땄으니 지금이 은퇴할 적기 아닐까. 사실 이번 대회도 선수 차출 문제로 KBO 협회와 의견 충돌이 있었고 여론의 비난 등 말 못할 속사장도 많았다.

지금이야 성과를 냈으니 하하호호 거릴 수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쓰린 게 사실, 다른 유능한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는 게 낫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 은퇴하셔도 욕먹는 건 마찬가지인데’

이인영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1년 밖에 안 남은 WBC, 올림픽 우승까지 이끈 사람이 은퇴한다고 하면 뒷말이 없겠나.

올림픽에서 완패한 타케토 감독이 사퇴를 한 건 당연했지만 김정길 감독이 은퇴하는 건 조금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인영 선수, 금메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셨는데 간단하게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올림픽은 끝났지만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많이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미는 있지만 다소 짧았던 인터뷰, 한 기자가 다시 손을 들었다.

“얼굴에 면도크림 바르고 포즈를 취하신 건 혹시 면도기 광고를 노린 게 아니냐는 팬들의 의견이 있는데요, 맞습니까?”

통관절차 없이 쑥 들어오는 발언,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애송이의 답을 기다렸다.

“저는 털이 얼굴에 안 나요. 털 없는 사람한테 그런 광고 들어올까요?”

기자회견장은 웃음바다, 다른 기자가 질문을 이어받았다.

“한국 야구흥행에 큰 역할을 하셨는데 앞으로도 KBO를 이끄는 아이콘 역할, 자신하십니까?”

“야구는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닙니다. 혼자 잘 한다고 팀이 이기는 것도 아니고, 프로야구 흥행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 공정한 판정, 팬서비스, 이게 지켜진다면 인기는 당연히 이어지겠죠. 저한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성대한 환영식을 마친 이인영은 근처 호텔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

딱 하루 쉬고 재개되는 시즌, 1월 초부터 각 구단은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휴식을 더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빡빡한 일정에 묵살됐다.

하지만 슈퍼 루키는 남은 시즌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겠다는 의욕을 불태울 뿐, 피곤함은 느끼지 않았다.

[그럼 집에는 못 오는 거니?]

“비효율적이에요. 일단 여기서 하루 쉬고 대전으로 내려가려고요.”

어머니는 바로 집으로 오지 않는 아들에게 약간 서운함을 표했다.

하지만 인천에서 대구까지는 너무 먼 거리, 호텔에서 쉬고 다음 경기가 열리는 대전으로 내려가는 게 나았다.

언제 크나 했는데 프로야구 선수가 돼서 금메달까지 따 온 아들, 힘껏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뤘다.

[아빠는 너 우승했을 때 창문 밖에다 우리 아들 만세라고 하셨어]

“그거 신고 안 들어 왔어요?”

[신고는 무슨, 아파트 전체가 들썩들썩 했는데]

아들 잘 둔 어머니의 자랑은 계속 됐다. 한국 대표 팀의 우승과 함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환호성, 이인영의 부모님은 다음 날 같은 동에 사는 주민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부모님이 즐거우셨다면 나도 기쁜 일, 간만에 효자 노릇한 아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연봉 오르면 그때 차 한 대 뽑아 드릴게요.”

[차는 무슨, 돈 모아서 결혼할 생각 해야지]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에요. 엄마 전에 차 한 대 사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기대하세요.”

다음 날, 이인영은 대전으로 향했다.

원정인데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 같은 환대, 원래 대전 출신이라 그동안 이곳에서 많은 환대를 받지만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첫 타석을 맞이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올림픽 복귀 이후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시즌 타율 0.386, 홈런 30개, 62타점, 프로야구 흥행에 다시 불을 붙인 선수입니다.”

“이번 올림픽 활약은 정말 엄청났죠. 타율 0.814에 홈런 5개, 고비 때마다 한국에 리드를 안기는 한방을 날려줬습니다.”

대전 팬들이 이인영 홈런을 연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순위 경쟁은 물 건너갔고 저 선수의 홈런이라도 보겠다는 건가.

선화 이글스를 대표하는 전인규는 환대를 받는 친구를 바라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올림픽 때는 콤비를 이뤘지만 지금부터는 다시 경쟁하는 사이, 양보는 없다는 눈빛을 드러냈다.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를 상대하는 전형적인 패턴이죠. 몸 쪽 승부가 안 되기 때문에 바깥쪽을 던질 수밖에 없고, 볼넷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인영은 올 시즌 71경기를 치르는 동안 볼넷을 79개나 얻어냈다.

타점이 의외로 많지 않은 것도 승부처에서 피해버리는 배터리의 패턴 때문, 그래도 성급히 배트를 내진 않았다.

격투기에서 중요한 건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것, 거리를 잘못 재고 주먹을 뻗으면 돌파를 허용하면서 카운터를 맞는다.

야구의 타격도 다를 게 있을까. 홈런 타자에게 몸 쪽 승부 잘 안 하는 건 당연,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거리를 재면서 한방을 날릴 기회를 노렸다.

‘조금 더 들어와야지’

2구는 스트라이크가 울렸지만 그냥 지켜봤다.

확실히 국제대회보다는 좌우가 넓은 스트라이크 존,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게 원래 코리안 스타일 아닌가. 국제대회의 잔상은 지워냈다.

“다시 바깥쪽,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타격 능력도 대단하지만 저는 이 선구안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이제 겨우 프로 2년차인데 무슨 베테랑 선수를 보는 것 같아요.”

“글쎄요. 저는 선구안보다 타격의 접근 방법을 따지고 싶네요.”

박한우 위원은 볼넷과 선구안은 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내놨다.

실제로 공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도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타자의 성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3할에 200안타를 치고 볼넷은 40개 정도 밖에 못 고르는 선수가 선구안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200안타를 쳤다는 건 어쨌든 칠 수 있는 공을 쳤다는 뜻, 칠 수 있는 공을 골라내는 것도 선구안의 일종이다. 그에 비해 생산력은 조금 떨어져도 볼넷에 집중하면서 OPS 히터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박한우 위원은 현역 시절 어떤 공이든 다 쳐냈던 타입, 볼넷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스윙으로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인영은 지금 신중하게 볼을 고르는 걸까, 아니면 쳐 낼 공이 없어서 입맛을 다시는 걸까. 올림픽에서 보여준 화력 쇼를 생각하면 후자에 가까운 상황, 투수들이 조금 더 적극적인 승부를 한다면 보다 공격적인 스윙을 할 선수라고 판단했다.

‘이건 커브다.’

투수 손끝을 떠나면서 살짝 솟아오르는 공, 가만히 놔두면 볼이지만 걷어냈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일이간을 뚫어냅니다!! 후반기 첫 타석부터 안타를 때려내는 이인영 선수입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일본 대표 팀의 타격 코치가 이인영 선수의 타격을 두고 극찬을 하지 않았습니까. 적을 칭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생각이 많았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얘기였습니까? 저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던 내용이었는데요.”

“힘을 쓰는 방법이죠. 많은 홈런 타자들이 힘을 싣기 위해 의도적으로 상체를 뒤에 두지만 그것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거든요.”

타격은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수많은 연속동작이 이뤄지는데, 그 사이에서 하나의 특징을 잡아낸다는 건 무의미 한 짓이다.

그런데도 어떤 선수는 안타를 치고 못 치는 건 이유가 있는 법,

투수도 그렇지만 타자도 원활한 회전력을 이용하려면 앞 다리가 살짝 굽혀져 있어야 한다.

이인영도 상체를 회전할 때 무릎이 살짝 굽혀지는데, 임팩트 순간에 무릎이 완전히 펴지고 손목을 돌리는 과정에서 다시 굽혀지는 동작이 이뤄진다.

무릎이 너무 일찍 펴지면 원활한 회전이 안 되지만, 임팩트 때는 확실히 펴져 있어야 끌어낸 힘이 분산되지 않는다. 말이야 쉽지 그 짧은 순간에 무릎을 열고 닫고 다시 여는 게 쉬운 일인가.

이건 말로 설명하는 게 무의미하다. 그냥 타고난 선수, 여기에 더 무서운 점은 무릎 앞뒤에서 히팅 포인트가 다양하게 이뤄진다는 거다.

힘 있는 타구를 다양한 방향으로 보낼 수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상체를 작년보다 세우면서 잡아당기는 타구가 늘어났지만 밀어 쳐도 홈런을 칠 수 있다는 건 이번 올림픽에서 증명됐다.

“세상에는 다양한 타자가 있습니다. 빠른 볼을 잘 치는 선수, 초구 타율이 높은 선수, 볼을 많이 보며 투수를 괴롭히는 선수, 홈런을 잘 치는 선수, 등등 경계해야 할 선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이인영은 존재 자체가 무서웠습니다.”

“존재 자체가 무서웠다고요?”

“네, 어떤 투수를 투입해도 잡아낼 수가 없었으니까요.”

일본 대표 팀의 타격 코치 스즈하라는 인터뷰에서 이런 소감을 남겼다.

빠른 볼에 강하고, 초구 타율 높고, 볼을 보며 투수를 괴롭히고, 홈런을 잘 치고, 이건 모두 이인영에게 적용된 말이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무서웠던 선수, 일본은 이번 올림픽에서 어린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NPB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늘어난 MLB 진출, 메이저리그 구단도 이젠 일본 투수라면 믿고 쓰는 분위기다. 그런 리그에서 이름 좀 날린 젊은 투수들, 상대가 누구든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이번 대회, 역시 젊은 선수들의 패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 베테랑들이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 준 한국 대표팀, 스즈하라 코치는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대표 팀의 구성이 크게 바뀔 거라고 예고했다.

2021 WBC에서 설욕을 갚기 위해 일찌감치 전시태세에 들어간 일본, 한국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가.

그때도 이인영만 믿고 나갈 건가?

금메달을 땄다고 우쭐해 하면서 프로야구 흥행에만 집중하는 KBO 위원회, 박한우 위원은 이인영 선수가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한 선수에게 짊어지게 하는 건 위험하다는 경고를 날렸다.

따악 ~ !!

하지만 슈퍼루키는 기대를 하게 할 수밖에 없는 활약을 펼쳤다.

후반기 첫 경기부터 멀티 히트, 3번 째 타석은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수비진은 타구가 뻗는 순간 다들 움찔했다.

특히 올림픽에서 친구의 괴력을 확인한 전인규는 자기도 모르게 우익수 영역을 침범, 서로 부딪치면서 타구를 떨어트릴 뻔 했다.

‘아 ~ 자존심 상해’

전인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뜬 공에 겁을 먹을 줄이야, 나는 저 녀석을 그 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건가. 지금은 뒤쳐졌지만 언젠가는 따라잡아야 할 라이벌,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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