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불 붙여드립니다 (8)
“자, 6대 3으로 앞선 대한민국의 8회 초 수비입니다. 박준민 선수가 올라오는 군요!!”
“대한민국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이죠. 이번 대회에서도 좋은 활약 기대합니다.”
박준민의 등장에 일본 벤치는 바짝 긴장했다.
올해 38살의 노장, 국가대표 경력은 한국야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2002 인터콘티넨탈 컵, 2006 WBC,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WBC,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3 WBC, 2015 프리미어 12, 2017 WBC까지, 말 그대로 안 낀 경기가 없다.
통산 국가대표 성적은 3승 무패 평균자책점 1.13, 일본을 상대로도 12이닝을 3안타, 1실점, 15탈삼진으로 막았다.
특히 2002,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일본을 상대로 7이닝을 11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낸 경기는 압권, 이후 부상으로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직했지만 특유의 묵직한 구위와 배짱으로 한국의 뒷문을 책임졌다.
그러나 박준민이 국가대표로 뽑혔을 땐 한국 여론은 말이 많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부상으로 올 시즌 24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한 선수, 평균자책점도 4.20으로 그렇게 좋지 못했다.
하지만 김정길 감독은 박준민을 선택했고, 이 결정에 많은 팬들이 분개했다.
[아니, 기왕이면 어린 선수 뽑아서 병역 혜택 좀 보게 해 줄 것이지 40이 다된 4점 대 투수 뽑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 박준민 김정길 양아들이잖아. 모든 대회에서 거의 다 뽑았음.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린 선수들 실망이 엄청 클 듯
-> 박준민도 생각이 없다. 본인이 생각이 있으면 거절 할 것이지
언제부터 여론이 선수들의 병역 혜택에 맞춰줘 있었나.
뭣보다 김정길 감독은 딱히 편애 때문에 박준민을 선택한 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불펜 중, 박준민을 대체할 선수가 있나? 김정길 감독도 젊은 선수를 뽑고 싶었지만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박준민의 구위와 배짱을 대체할 선수가 없었다.
4점대 평균자책점은 겉으로 보이는 수치일 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정길 감독은 이번에도 박준민이 뒷문을 책임져 줄 거라 믿었다.
이게 내 마지막 태극마크라는 걸 직감한 박준민도 발열 모드, 초구부터 엄청난 무브먼트를 선보였다.
“초구!! 들어옵니다!! 135km”
“지금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파고드는 백도어 슬라이더죠. 박준민 선수의 전매특허입니다.”
“이 슬라이더로 우타자들을 완전히 봉쇄해 왔죠. 정규시즌보다 컨디션이 더 좋아보이는데요.”
2구는 싱커,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떨어지는 볼에 선두타자 모리시게는 평범한 2루 땅볼을 때렸다.
역시 우타자가 공략하긴 어려운 스타일, 타케토 감독은 좌타자 마츠키 노리노부를 대타로 투입했다.
박준민은 좌타자에겐 싱커와 체인지업을 주로 던지지만 아무래도 우타자에 비해 피안타율이 높은 편, 하지만 특유의 배짱으로 정면 돌파를 택했다.
‘쉽게는 못 칠 거다.’
오건무(UA 베어스)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아 미트를 벌렸다.
여론은 깎아내렸지만 박준민의 구위는 모든 선수들이 인정한다.
특히 빠른 볼이 다른 선수와 달리 살짝 아래로 떨어지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경력이 짧은 포수들은 이쯤으로 들어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미트를 내밀다 피를 본다.
NA 자이언츠는 경험 많은 포수가 없다보니 박준민의 구위를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편, 하지만 프로 경력 10년의 오건무가 파트너라면 얘기가 달랐다.
딱 ~ !
“이번에도 유격수 정면!! 잡아서 2루로 송구합니다!! 투 아웃!! 공 세 개로 두 타자를 돌려세웁니다.”
“일본 선수들이 어려서 뭘 모르네요. 겉보기엔 쉬워보여도, 절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공입니다.”
땅볼을 때린 마츠키 노리노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석을 나름대로 하고 나왔지만 생각보다 더 떨어지는 공, 140km도 안 되는 구속에 속아 넘어간 일본 타자들은 성급한 타격으로 아웃카운트를 헌납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4개 뿐, 3점차를 뒤집을 수 있을까.
2등은 의미가 없는 대회, 타케토 감독은 물론 그 휘하 선수들의 마음도 초조해졌다.
‘줄줄이 다 낚이네.’
3번째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자 이인영은 더그아웃으로 질주했다.
이제는 눈앞까지 다가온 금메달, 아마추어도 아니고 흥분하는 건 좋지 않지만 지금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 표정도 말도 없는 박준민은 벤치 구석에서 다음 투구를 준비할 뿐, 이인영은 그 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멀티 홈런을 날린 녀석인데 안 받아주면 어쩔 건가. 대선배가 잇몸을 드러내자 겁 없는 후배는 시비를 걸었다.
“선배님도 웃긴 웃네요?”
“저리 가 인마.”
말 하는 것 자체가 싫은지 손짓을 하는 한국 야구의 전설, 그러건 말건 젖을 뗀 애송이는 계속 말을 걸었다.
“9회에도 올라가실 거예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 아니야.”
“그냥 올라가시죠. 그래야 제가 할 일이 없잖아요.”
이인영은 좌익수, 당연히 땅볼이 나와야 수비 부담이 없다.
땅볼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대선배가 9회에도 등판한다면 땡큐 베리 감사, 살가운 후배가 싫진 않았는지 박준민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선배님은 피부 관리 어떻게 하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선배님 피부 개꿀이라고 다들 칭찬하잖아요.”
박준민은 40이 다 된 나이지만 지금도 20대 후반, 30대 초 중반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늘씬하게 빠진 몸매로 많은 여성 팬들을 보유한 선수, 아직 어려서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있는 애송이는 외모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박준민은 지금까지 관리 같은 건 해 본 적 없다. 어머니의 좋은 피부를 물려받았을 뿐, 비결이 있다면 술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고 몸 관리를 철저히 했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선배 피부를 두고 개꿀이니 뭐니 하는 이 녀석은 뭔가,
현역 시절 선배들에게 엄청 두들겨 맞은 박준민은 상대가 무례한 후배라도 폭력 따윈 행사하지 않았다.
“개꿀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저리 좀 가라.”
“너무하시네, 외로우신 것 같아서 말상대 좀 해드리려고 했는데 ··· ”
끝까지 한 마디 던지고 가는 녀석, 평소 표정이 없는 박준민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한국의 8회 말 공격은 성과 없이 종료, 일본의 9회 초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박준민, 김정길 감독은 박수를 치며 변함없는 신뢰를 드러냈다.
따악 ~ !
“와아아 ~ !!”
선두타자 안타로 시작하는 일본의 공격, 오건무 포수는 1루수에게 견제구에 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박준민은 견제에 능한 선수, 벼락 견제에 넋 놓고 있다가 공을 빠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챙기는 포수 덕분에 박준민은 마음 놓고 투구에 열중,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기습 견제가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주자는 황급히 1루로 귀환, 아웃은 면했지만 일본 벤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자중해라.’
타케토 감독의 지시대로 주자는 1루에 붙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라 타자 입장에선 노려볼만 한 카운트였고, 노련한 박준민은 그 타이밍에 견제구로 주자를 묶고 타자의 흐름까지 끊었다.
38살이나 먹은 선수가 왜 대표 팀에 뽑힌 걸까.
한국의 인재 풀이 좁은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실력과 경험을 갖춘 백전노장, 적이지만 실력은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견제를 합니다. 야유가 대단한데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만큼 박준민 선수가 노련하다는 증거니까요. 지금 일본 벤치의 표정을 보십쇼. 쫒기는 쪽은 일본입니다.”
야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견제, 부담을 느낀 주자는 투구에 맞춰 대시를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행동마저 망각했다.
따악 ~ !
“유격수 정면!! 2루 송구!! 다시 1루에서 ~ ~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순식간에 위기를 지워냅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싱커였죠!! 이걸 건드려 준다면 감사한 일이죠!!!!”
순식간에 사라진 희망,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1개 뿐, 패배를 직감한 홈 팬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일장기를 내려놨다.
12년 만에 부활한 올림픽 야구, 그것도 홈에서 열린 대회에서 은메달에 그쳐야 하나, 이 대회를 위해 시간과 돈을 퍼부은 일본 야구 협회 관계자들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따악 ~ !!
“끝!!”
좌익수 쪽으로 날아오는 타구,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 타구를 잡아낸 이인영은 공을 하늘 높이 던져버렸다.
300여명의 한국 팬들도 열광의 도가니, 생애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박준민은 달려오는 오건무 포수와 격한 포옹을 주고받았다.
부상과 부진으로 신음했던 2020 시즌, 최고의 동료들과 멋진 경기를 펼치도록 해 준 하나님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그 사이 이인영은 전인규와 공중에서 엉덩이를 부딪치는 세리머니를 합작, 그리고 다시 마운드로 달려가 동료들과 회포를 풀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이에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제패, 죽 써서 한국한테 준 일본 야구협회 관계자들은 땅을 치며 분노를 표했다.
‘너만 없었어도!!’
일본전에서 홈런만 4방을 터뜨린 이인영은 이미 공공의 적, 굴욕적이지만 2021 WBC가 남아 있지 않은가. 선수들도 다음에는 반드시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야, 너 마이크 하지 말고 나가라.”
이어지는 인터뷰, 한국 선수들은 오늘의 영웅에게 경고를 줬다.
대놓고 물 테러를 하겠다는 뜻, 하지만 남의 안방에서 그런 짓을 해도 될까. 한국 선수들은 예의가 없다 뭐다 하면서 여론전을 펼칠 일본의 태도가 훤히 보였다.
“그러니까 그건 좀 참아주시죠.”
“알았어.”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 동료들, 뭔가 찝찝했지만 이인영은 천천히 리포터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인영 선수!! 금메달 획득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우승 하셨는데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두우세요?”
“지금 뒤에서 뭐가 날아올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리포터는 기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정규시즌에서도 선수들의 짓궂은 장난 때문에 피를 본 게 한 두 번인가.
하지만 의외로 별 다른 일 없이 잔잔히 진행되는 인터뷰, 방심한 이인영은 긴장의 끈을 놔버렸다.
‘내 피부가 부럽다고? 그래, 너도 개꿀로 만들어 줄게’
이때, 박준민이 폭탄을 안고 천천히 현장으로 접근했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이라 장난 따윈 치지 않는 선수, 누구도 예상 못한 특공대의 난입에 평온했던 분위기는 박살이 났다.
얼굴에 날아든 면도 크림 한 접시, 작전을 완수한 박준민은 어린애처럼 낄낄거리며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괜찮으세요?”
이어지는 리포터의 질문, 안 괜찮다고 하면 어쩔 건가.
약간 검은 피부 때문에 화면 빨이 안 받는데 지금은 면도크림 덕분에 희게 보이겠지, 얼굴이 허옇게 뜬 상태로 카메라를 향해 얼짱 포즈를 취하는 여유를 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