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불 붙여드립니다 (7)
한국 대표팀은 3회 말 공격에서 2점을 획득하며 역전에 성공, 김정길 감독은 선발 김성현을 내리고 불펜야구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1점을 지키자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뭣보다 투수진이 일본보다 두텁다고 할 수 없는 전력으로 수비 야구를 하는 건 자멸하는 길, 몇 점 더 내야 승산이 있다는 건 선수들도 알고 있었다.
‘더는 주면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의 다케토 감독은 탄탄한 투수진을 앞세워 빗장걸기에 나섰다.
한국을 상대로 3점은 줄 수도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 이상 주면 패배, 결승전인데 아낄 전력이 어디에 있나. 불펜 싸움이 되면서 전세는 조금씩 일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만 한국이 4회까지 4안타 2볼넷으로 3점, 일본도 8안타를 치고도 3점 밖에 못내는 지독한 변비야구에 시달리는 상황, 모리사와를 제외하면 찬스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는 타자가 없었다.
그래도 명백히 일본이 몰아붙이는 기세, 벤치에 앉은 김정길 감독은 2009 WBC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랬지, 이랬어…’
당시 한국은 우승을 놓고 일본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얄팍한 전력으로 어떻게든 대등한 게임을 펼쳤지만 경기가 연장으로 접어들면서 지칠 대로 지친 불펜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불펜은 물론 대주자까지 모두 기용해 예비전력도 없었던 상황, 방패와 창이 모두 무너지며 역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 때만큼 한국의 전력이 탄탄한 때도 없었다.
해외파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고 선수들의 기량도 무르익었던 때, 지금 대표 팀이 그때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타선은 몰라도 불펜은 오히려 퇴보, 그래서 선발 김성현이 많은 이닝을 버텨주길 바랐다. 하지만 초반에 흔들린 게 문제, 일찍 뺀 것 같다는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따악 ~ !!
“아, 다시 안타를 내주는 군요. 일본이 5회 초 공격을 선두 타자 안타로 시작합니다.”
“지금 한국 타선에서 일본 투수들을 제대로 공략하고 있는 선수가 전인규 그리고 이인영 선수뿐이거든요. 그에 비해 일본은 타선 간에 기복이 별로 없는데 ··· 이런 분위기는 곤란합니다. 다른 선수들도 뭔가 보여줘야 돼요.”
마운드에 오른 이학영(선화 이글스)은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후속타자의 강습 타구가 병살타로 이어지며 위기를 넘겼다.
다음 타자는 모리사와, 오늘 홈런과 적시타가 있는 선수라 거르고 다음 타자 후지타를 내야 뜬공으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이어지는 한국의 5회 말 공격, 경기가 생각보다 풀리지 않자 다케토 감독은 나오토 마사카즈를 마운드에 올렸다.
올 시즌 NPB에서 9승 3패, 평균자책점 2.20을 기록한 선발 투수, 최고 155km의 강속구와 슬라이더, 커브, 포크볼, 체인지업, 슈트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한다.
이 선수까지 올라왔다는 건 일본이 그만큼 심리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뜻, 김정길 감독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승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지켜보는 타격은 의미가 없겠지, 타자들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요구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들어옵니다. 151km, 역시 볼이 빠르네요.”
“나오토 선수가 프로필 신장이 174cm로 나와 있거든요. 올라오는 선수들마다 강속구를 던지는데 역시 일본의 투수력이 많이 올라와 있네요.”
“그런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겁니까? 체격 조건에서 일본에 밀리질 않는데 말이죠.”
캐스터의 질문에 박한우 해설위원은 입을 다물었다.
일본은 저렇게 키가 작은 선수가 150km를 던지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왜 140km를 던지는 투수도 찾기 어려운 걸까.
분명한 건 나오토가 정통 오버핸드 투수라는 것, 키가 작은 선수가 저렇게 높은 곳에서 공을 뿌리는데 우리나라 코치였다면 가만히 지켜봤을까?
일단 한국 투수들은 대부분 폼이 비슷비슷 하다.
축이 되는 왼발과 앞으로 뻗는 오른 발의 거리를 좁히고 상체 회전으로 구속을 끌어올리는데, 릴리스 포인트도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구속이 나오는 게 이상한 일, 타자도 투수도 스트라이드를 좁게 하는데 무슨 구력이 나오겠나. 결국 코치진의 지도능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KBO의 현실을 지적하긴 어려운 일 아닌가.
박한우는 입을 다물었다.
“와아아 ~ !!”
그 사이, 나오토는 142km 슬라이더로 선두타자 전인규를 삼진처리 했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고속 슬라이더, 컨택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전인규가 삼진으로 물러나자 김정길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기 많이 어렵냐?”
감독의 질문에 전인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답하기엔 자존심이 많이 상한 삼진, 그 심정을 알고 있는 감독은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아 ~ 떨어지는군요. 도민호 선수도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저 슬라이더는 정말 마구네요. 저희 타자들이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이인영 선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뭔가 분위기를 바꿔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천천히 타석에 들어서는 괴물, 타케토 감독은 이번에도 거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수석코치 아리마 코우타는 나오토에게 승부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감독의 생각은 이해했지만 여기서도 도망치는 건 수치, 저 녀석에게 지금까지 내준 홈런이 몇 개인가. 도망쳐서 얻어내는 승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찬성’
나오토도 승부를 받아들였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걸 좋아하고 그 자들을 쓰러트리는 걸 더더욱 좋아하는 스타일, 키는 작아도 배짱은 웬만한 덩치들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초구는 너무 낮게 들어갔고, 나오토는 153km 공을 몸 쪽으로 붙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어째 내 지시와는 반대로 들어가는 투구,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은 타케토 감독은 투수에게 직접 도망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승부욕이 불타오른 나오토는 이 지시를 무시, 빠른 볼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갔다.
따아악 ~ !!
“다시 높게 가는 타구!!!! 이 한 방은 도쿄 돔을 침묵으로 몰아!!!! 넣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리드를 되찾아 옵니다!!!!”
“저 선수가 제 양아들입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흥분한 박한우 위원은 뜬금없는 양아들 드립을 날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는 분위기, 역전 홈런을 내준 나오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들었다.
이번에도 몸 쪽으로 잘 붙였는데, 노리고 있었다는 건가. 마치 저 자식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느낌, 유유히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가는 뒤태를 멍하니 지켜봤다.
“다시 보시죠. 몸 쪽 높은 공!!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가 나왔습니다.”
“지금 보시면 상체가 뒤로 기울면서 자연스럽게 어퍼컷 스윙이 나왔거든요. 저렇게 높은 공은 어퍼 스윙으로 들어올리기 쉽지 않은데, 이건 투구 궤적을 완전히 읽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인영 선수는 한일전에서만 홈런 4방이네요. 서동우 선수가 통산 일본전에서 홈런 4개를 기록했는데, 단 2경기 만에 따라잡았습니다.”
김정길 감독은 더그아웃 보호펜스 앞까지 나와 영웅을 맞이했다.
30년 넘게 감독 생활을 했지만 이런 거물은 처음, 겉절이가 된 것 같아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전인규를 필두로 하는 선수들도 격한 환영을 표했다.
“도대체 뭐야?!! 뭐냐고?!!”
타케토 감독은 역전 홈런에 분개했다.
그렇게 피하라고 주문을 했는데, 감독이 지시를 했으면 들어야 될 거 아닌가. 최정예 멤버를 뽑으면 뭐 하나, 다들 나 잘났다고 자존심만 앞세우는 오합지졸, 찔리는 게 있는 아리마 코치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한국의 카이도, 도망치는 게 답이었다]
-> 지금은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네. 왜 피하지 않은 거야?
-> 진짜 무섭다. 이런 녀석을 WBC에서 또 봐야 하는 건가.
-> 이 자식 진짜 괴물이네. 무슨 쳤다 하면 홈런이냐?
그 시각, 일본의 네티즌들도 발칵 뒤집혔다.
올림픽 전부터 한국의 괴동이라고 일본에서 견제했던 선수, 한국에서 3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30홈런을 몰아친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도 그렇지 한국보다 명백히 앞서는 일본의 투수진을 어린애처럼 다룰 줄이야, 특히 150km가 넘는 공을 가볍게 넘겨버리는 파워에 다들 경악했다.
빠른 볼은 절대 주면 안 되는 분위기, 어쨌든 후속 타자를 잘 처리한 나오토는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너는 사인도 못 보냐?!! 어?!! 내 지시가 말 같지가 않아?!!”
단단히 화가 난 타케토 감독은 괴성을 내질렀다.
마음 같아선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건 내부분열을 일으킬 뿐, 누구보다 믿었던 선수라 배신감은 더 했다.
“다음에는 피하겠습니다.”
“다음? 너한테 다음은 없어!!”
타케토 감독은 바로 나오토를 교체해버렸다.
승부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 코치인데, 왜 감독이 이렇게 흥분 하는 걸까. 타케토 감독은 피하라고 2차 지시를 내렸지만 나오토는 승부에 집중하느라 사인을 보지 못했다.
진짜 범인인 아리마 코치는 지금도 눈치를 살피는 중, 홈런을 맞긴 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건가.
기분이 상한 나오토는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더그아웃 뒤편으로 퇴장, 이 장면이 중계카메라를 타고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다들 한 점 더 내자!!”
그 사이, 한국 벤치는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언제까지 이인영 한 명에게 의지할 순 없는 일, 다른 선수들도 분발하면서 7회까지 5대 3 리드를 잡았다.
“와아아 ~ !!”
“대 ~ 한!! 민!! 국!!”
이제 도쿄돔에 울려 퍼지는 건 얼마 안 되는 한국 팬의 목소리 뿐,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아니, 저 양반은 왜 자꾸 양아들이라고 해? 내 아들인데”
경기를 지켜보던 이인영의 어머니는 불만을 표했다.
5회 말, 양아들 드립을 날린 박한우 감독이 또 문제의 발언을 한 것, 누가 보면 엄마 아빠도 없는 자식으로 오해할 거 아닌가.
아내 옆에서 TV를 보고 있던 이인호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탐 낼 만 하지. 나도 이렇게 자랑스러운데’
한국야구 역사상 한일전에서 2경기 연속 멀티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있을까.
게다가 지금 일본 투수진은 과거에 비해 훨씬 업그레이드 된 버전, 솔직히 이인호는 아들이 일본을 상대로 고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의심을 홈런 4방으로 날려버린 녀석, 그에 비해 박한우 감독은 경기 내내 아들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보였다.
내가 키운 양아들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상황, 지금은 아들의 금메달 확보만 생각했다.
“다시 볼입니다. 역시 좋은 공 안주네요.”
“주는 게 비정상이죠. 그리고 루상에서 타선을 리드 할 수 있는 선수라 지금은 볼넷도 나쁘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볼넷, 김정길 감독은 여기서 대주자 투입을 망설였다.
2점이면 아직 불안하고 여기서는 추가점을 내는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인영을 장기 말로 쓰는 게 최선인가, 다치면 그 여파는?
소속 팀인 성운 라이온즈 뿐만 아니라 한국야구의 미래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 그렇다고 올림픽 금메달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 고민은 깊어졌다.
‘이 정도야 타격에 비하면 쉽지.’
감독이 망설이는 사이, 이인영은 후속 타자의 느린 땅볼에 2루로 몸을 날렸다.
정말 뭐든 다 해내는 녀석, 그 열정에 한 수 접은 김정길 감독은 대주자 투입은 머릿속에서 치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