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불 붙여드립니다 (6)
“고토부키 씨, 그래도 뭔가 공략할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편, 일본 중계석에선 이인영의 약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이어지는 캐스터의 집요한 질문, 잠시 말이 없던 고토부키는 나름대로 답을 제시했다.
“이 선수는 약간 낮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하체에서 상체로 힘을 끌어올리는 타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수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죠.”
“그게 뭡니까?”
“타격 폼에 적응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겁니다. 상당히 복잡한 메커니즘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즌 초반엔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고토부키는 이인영의 스타일을 정확히 분석했다.
시즌 초 만해도 홈런이 안 터져서 염려를 표했던 팬들, 하지만 이후 감을 잡더니 무서운 기세로 홈런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적응하기 어렵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타격, 지금이 시즌 초라면 모를까 한창 물이 오른 이인영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공략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이런 선수는 한 번 감을 잡으면 미친 듯이 몰아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번 올핌픽에서 홈런만 4개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절대 정면승부 해선 안 됩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아 ··· 그렇군요. 타케토 감독도 이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니나 다를까 일본 벤치에서도 비슷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절대 정면승부 하지 말라는 지시, 물론 자존심이 강한 와타리카와는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감독의 지시는 절대적, 항명하면 재대결이고 뭐고 교체 아닌가.
일단은 리드를 되찾아오는데 집중했다.
‘이번엔 다를 거다.’
이어지는 일본의 2회 초 공격, 1회 모리사와에게 홈런을 내 주며 다소 불안하게 출발한 김성현은 140km 중반대의 빠른 볼을 앞세웠다.
언더핸드 폼이지만 거의 사이드 암과 비슷한 수준이라 구속은 꽤 나오는 편, 어깨 부상을 당하기 전까진 150km가 넘는 공도 던졌다.
이젠 일본에도 그렇게 많지 않은 언더핸드, 이런 폼으로 이렇게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는 더더욱 없다. 여기에 130 ~ 140km 사이를 오가는 싱커, 슬라이더, 커브를 던지는데 타자 입장에선 상하좌우로 휘어지는 공이라 공략하기 쉽지 않다.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해외진출도 노려봤을 선수, 본인도 한때 도전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작년에 ST 위너스와 4년 86억 계약을 맺고 KBO에 눌러 앉았다.
예전에 비해 구위가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우완 선발, 일본의 정예 멤버라도 공략하긴 쉽지 않았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지금은 어떤 구종인가요?”
“제가 봤을 때는 커브입니다. 김성현 선수가 2가지 커브를 던지는데요. 좌타자를 상대로 던질 땐 지금처럼 위로 떠오르지만, 우타자에게 던질 땐 슬라이더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갑니다. 보통 슬라이더로 보기도 하는데, 바로 이 커브 덕분에 좌타자 상대로 강점을 보일 수 있는 거죠.”
김성현은 우완인데도 좌완에게 강점을 보였다.
올 시즌 우타자 피 OPS가 0.816인데 좌타자 피 OPS는 0.690밖에 안 될 정도,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궤적은 타자의 시선을 교란한다.
이인영이 김성현을 까다롭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일본 대표 팀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1회에 홈런을 하나 씩 주고받았지만 양 팀 선발 투수는 2회를 무실점으로 막았고, 경기가 팽팽히 진행되면서 그라운드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차 ··· ”
일본의 3회 초 공격, 김성현은 선두 타자에게 볼넷을 내줬다.
구위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제구, 김성현은 데뷔시즌에 122이닝을 던지면서 삼진 134개를 잡아냈지만 볼넷도 61개를 내주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이야 연차가 쌓이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 거기다 특유의 투구 폼 때문에 도루에 약점이 있다.
투구 폼이 언더라 견제도 어려운데 선두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다니,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아 ··· 뛰는데요. 2루까지 여유 있게 들어갑니다. 도루 성공, 이소카와의 도루로 일본이 득점권 기회를 잡습니다.”
“확실히 일본이 김성현 선수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네요. 이렇게 되면 김정길 감독님이 이른 교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대로 한국 불펜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김정길 감독은 프로 팀을 지휘했던 시절, 잦은 투수 교체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미래를 보지 않고 당장의 승리만 본다는 논리, 하지만 그런 스타일이 오히려 국가대항전에서 빛을 발휘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빼버리기 때문에 팬들의 뒷목을 잡는 똥고집이 별로 없는 편, 운도 약간 겹쳤을지 모르지만 김정길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을 때 대표 팀 평균 자책점은 3.30으로 괜찮았다.
오늘도 그 마법이 발휘될 수 있을지, 하지만 지금 당장 교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김성현이 조금은 더 버텨줘야 했다.
“아 ~ 진짜 ··· ”
하지만 김성현은 다음 타자 다니 요시시게도 볼넷으로 내보냈다.
이제 무사 주자 1 - 2루에 타석에는 모리사와,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선수라 한국 팬들은 불안에 떨었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우중간에 떨어지는 군요.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1루 주자도 2루를 돌아 3루까지 진출합니다. 모리사와의 적시타, 일본이 다시 리드를 잡습니다.”
“모리사와가 지난 프리미어 12에서 김성현 선수에게 삼진만 2번을 당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네요.”
신명철 투수 코치가 급히 마운드로 향했다.
누가 봐도 불펜이 몸을 풀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 일본 대표 팀을 향한 환호와 한국을 향한 야유가 동시에 쏟아졌다.
‘이쪽으론 오지 마라.’
그 사이, 이인영(좌익수)은 친구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일본 입장에선 주자가 3루에 있지만 노 아웃 상황이라 무리하게 태그 업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플라이 볼을 전인규가 잡는다면 어떨까, 전인규의 중견수 수비 능력은 알아주는 편이지만 어깨가 강한 편은 아니다.
저 녀석이 잡으면 무조건 태그 업, 내가 잡으면 조금은 망설이지 않을까. 경계선을 긋고 여기는 넘어오지 말라는 사인을 줬다.
따악 ~ !
마침 좌중간으로 날아오는 타구, 뒷걸음질 칠 타구는 아니라 이인영은 달려오면서 타구를 잡았다.
송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세, 다니 요시시게는 움찔하다 3루로 돌아갔다. 이인영은 펜스 바로 앞에서 2루로 다이렉트 송구를 하는 선수, 어깨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무리하진 않았다.
‘이번 이닝은 그냥 가자.’
김정길 감독은 고심 끝에 김성현을 밀고 갔다.
병살을 유도하면 이닝 종료지만, 야구가 그렇게 뜻대로 되진 않는다.
병살을 잡겠다고 어정쩡한 구위의 투수를 올리면 쳐맞고 TKO, 그에 비해 김성현은 제구는 불안해도 공에 힘이 있다. 방금 나온 좌익수 플라이도 그렇고 충분히 타자를 압도할 수 있는 구위, 예상은 적중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149km!! 김성현 선수가 전력으로 후지타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올 해 최고구속 아닌가요? 정규경기는 아니지만 김성현 선수가 이렇게 빠른 볼을 던지는 건 정말 오랜 만에 봅니다.”
김성현은 다음 타자 다무라 센이치도 내야 뜬공으로 처리하고 3회를 마무리 했다.
볼넷 2개에 적시타까지 내줬지만 1실점이면 양호했던 편, 그래도 아쉬움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쓸어내렸다.
내가 조금 더 버텨줬어야 했는데, 수건을 머리에 덮은 채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자, 이제 대한민국의 3회 말 반격으로 이어집니다. 9번 타자 박민우 선수부터 시작되는 공격, 이번 대회에서 10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타자가 전인규거든요. 박민우 선수가 베어스에서도 9번에서 1번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박민우 선수만 나간다면 역전 가능성 있습니다.”
문제는 마운드에 선 투수가 와타리카와라는 것, 궤적은 깨끗한 편이지만 KBO에서 보기 힘든 150km 후반대의 구속이라 박민우는 적응하지 못했다.
3구를 때렸지만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공, 빨리 쳐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일찍 열리면서 힘을 싣지 못했다.
‘내가 첫 타석에서 저랬지.’
전인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석에 섰다.
하루아침 사이에 친구처럼 하체의 힘을 이용한 타격을 할 수 있을까? 일단 평소처럼 어깨를 닫아두는 것부터 시작했다.
상체에서 가장 큰 근육은 대흉근, 이게 먼저 움직이면 다른 잔 근육으로 힘을 내야 한다. 그렇잖아도 힘이 떨어지는 선수가 그런 식으로 어떻게 추진력을 내겠나.
공이 빠르다는 이유로 몸이 열려버리면 내 손해, 타이밍이 밀리더라도 평소처럼 자세를 잡았다.
딱 ~ !!
효과는 있었다.
파울라인을 벗어났지만 힘 있게 뻗어나가는 타구, 전인규는 컨택이 뛰어난 선수라 깨끗한 궤적을 가진 와타리카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딱 ~ !!
“다시 파울입니다. 이제 승부는 5구로 넘어가는군요.”
“빠른 볼을 계속 쳐내고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변화구로 갈 수도 있습니다.”
예상대로 5구는 슬라이더, 하지만 어떻게든 커트해 냈다.
몸이 열렸다면 스윙 폭이 좁아지면서 배트가 빠르게 돌아 나왔겠지. 체크 스윙 삼진을 자주 당하는 선수들이 거의 이런 경우, 하지만 전인규는 말려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승부에 달아오르는 투수의 얼굴,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면서 승부는 8구로 넘어갔다.
따아악 ~ !!
“어?!! 이 타구는 우측으로!! 멀리!! 날아서 ~ !! 담장을 넘어갑니다!!!! 전인규 선수의 솔로 홈런!!!! 대한민국이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하하 ~ 정규시즌에 홈런이 하나도 없었던 선수거든요!! 정말 중요한 순간에 한 방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벤치는 발칵 뒤집혔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한 방, 타격 후 1루로 전력질주 하던 전인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2루 베이스를 통과했다.
오늘 홈런 2방을 내준 와타리키와는 뭐 씹은 표정, 그 사이 홈을 밟은 전인규는 팀 선배 도민호와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똑딱이 치고 나쁘지 않았어.”
이인영도 친구에게 마음에도 없는 도발을 날렸다.
언제까지 똑딱이로 남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성과를 낼 줄이야. 따라오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겠다며 마음속으로 견제했다.
따악 ~ !!
“자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도민호 선수의 안타!! 대한민국이 일본을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이거든요. 일본 입장에선 최악, 저희 입장에선 최상의 시나리오입니다.”
피해야 할 선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꼴, 타케토 감독은 호리오 포수에게 거르라는 사인을 보냈다.
물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와타리카와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 자존심을 꺾고 빠지는 공을 던졌다.
‘너는 다음에 두고 보자.’
이인영은 보호대를 풀어 젖히며 배트를 멀리 던져버렸다.
상대가 일본이라면 어느 정도 즐기는 게임이 될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빤스 런 아닌가.
도망치는 상대를 쫒아가서 물어 죽이는 취미는 없지만, 오늘만큼은 끝가지 쫒아가서 목덜미를 물어버리겠다는 살기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