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불 붙여드립니다 (5)
“너 이번에도 하품 할 거냐?”
“아니요. 저 지금 진지해요.”
한편, 훈련을 앞두고 이인영은 동료들의 관심에 휩싸였다.
의도했든 아니든 하품 사건으로 여론의 관심에 둘러싸인 녀석, 결승전에서도 일본에게 도발을 날릴까. 하지만 슈퍼 루키는 이번은 장난 칠 생각 없다며 몸을 풀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해 봐라.”
“아니요. 진지해지면 저는 평소보다 3배 정도 강해지거든요.”
“푸핫 ~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밑도 끝도 없는 허풍에 즐거워진 분위기, 하지만 이인영은 훈련만큼은 진지하게 임했다.
결승전 키를 쥐고 있는 전인규도 맹연습 모드, 2000년생 듀오는 스탠스를 넓게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에선 스탠스를 넓게 쓰면 지도자들이 싫어하고 팬들도 이상한 눈으로 보곤 하는데, 사실 스탠스의 넓이는 정석이 없다.
똑딱이면 스탠스를 넓게 하면 안 되나? 한 예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리드오프 조니 돗슨은 스탠스를 넓게 잡고 상체를 극단적으로 숙이는 타격 폼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190cm나 되는 큰 키 때문에 무게 중심이 1루로 쏠리는 증상이 나타나자, 스탠스를 넓게 해 자세를 낮추고 상체를 숙여 중심을 단단히 고정시킨 것, 덕분에 타구 질이 좋아지고 라인드라이브 타구도 늘어났다.
전인규도 돗슨과 비슷한 스타일, 덕분에 홈런은 잘 못 쳐도 드라이브 타구 비율은 높은 편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간다.’
프리배팅에서 전인규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밀고 나갔다.
똑딱이 치고 높은 뜬공 비율 때문에 상대 팀이 괴상한 시프트를 거는 경우도 많지만, 어쨌든 타자는 강한 타구를 때리는 게 좋은 거다.
무리하게 땅볼을 굴릴 이유는 없겠지, 왼발을 고정시키고 타구를 외야로 밀어내는 연습을 반복했다.
‘똑딱이는 아님, 내가 보장함’
이인영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스탠스를 넓게 하고 상체를 눕힌 폼이라 얼핏 보면 치면서 1루로 달려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스탠스를 넓게 쓰는 타자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전인규는 공을 맞추고 뛰는 전형적인 똑딱이일까? 정말 그런 타자라면 상대 팀이 중견수를 좌측에, 2루수를 우익수 앞에 배치하는 기이한 시프트를 하지도 않았을 거다.
선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이 하는 말, 이인영은 전인규가 훗날 10홈런 이상은 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터질지 안 터질지는 지켜볼 일, 지금은 태극마크를 공유하고 있지만 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적으로 마주할 사이라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
“넌 내 폼이 웃기다고 생각 하냐?”
“글쎄? 웃긴 폼이 따로 있을까?”
이날 밤, 2000년 생 듀오는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첫해에 신인왕을 차지하고 2년 차에도 팀을 이끄는 주력 선수로 활약하고 있지만, 전인규는 지금 실력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장타를 치고 싶은데 큰 키에 비해 마른 몸이 문제, 신장이 185cm인데 몸무게는 78kg밖에 안 된다. 189.2cm에 92kg이라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친구에 비하면 뼈 밖에 없는 몸, 그나마 이것도 작년보다 2kg 늘린 거다.
억지로 몸무게를 늘린다고 장타가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처럼 웃긴 타격 폼으로 살아가는 게 정답일까? 하지만 이인영은 세상에 웃긴 타격 폼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잘 하고 있는데 그걸 웃기다 뭐다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솔직히 나도 너처럼 홈런 뻥뻥 치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럼 하체부터 제대로 써야겠네.”
이인영은 일본 대표팀의 3번 타자 모리사와를 예로 들었다.
모리사와도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매년 30홈런 정도를 쳐 줄 수 있는 선수,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홈런을 잘 쳤던 건 아니다.
신인시절 기록은 타율 0.251, 홈런 5개, 이도 저도 아닌 선수였다.
하지만 팀 코치의 조언대로 하체를 쓰는 법을 바꾸면서 홈런 타자로 발전했다.
모리사와는 임팩트 순간에 상하체가 함께 회전하는데, 온 몸을 수건처럼 짜내면서 회전운동을 극대화 한다.
당연히 밀어치는 홈런이 적을 수밖에 없고 밀어치는 홈런이 나와도 중심이동의 여파로 뒷발이 크게 흔들린다.
하지만 이인영의 타격 폼은 모리사와와 조금 달랐다.
모리사와가 마지막까지 상하체를 뒤트는 반면, 이인영은 임팩트 때 오른 발이 고정 됐다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회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윙에 의해 무게중심이 오른발이 왼발로 이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 그래도 임팩트 순간엔 앞발이 단단히 지면에 고정돼 있다.
이때 하체는 앞으로 전진 하는 반면, 배트를 쥔 그립은 그 자리를 유지하는데 여기서 앞다리와 배트 그립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큰 힘이 발휘된다.
하체를 덜 쓰고 홈런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힘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 뿐, 다리가 지면을 밀면서 발생한 힘(지면반력)이 몸통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가장 많은 운동량이 만들어진다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된 일이다.
왜 타격할 때 어깨에 힘을 빼고 치라는 말이 나왔을까?
몸과 팔에 힘이 빠져 있어야 하체에서 만들어진 힘이 그대로 몸통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몸 전체를 비틀어 회전력에만 의존하는 모리사와는 스윙이 역동적이지만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그에 비해 툭툭 건드리는 것 같은데도 비거리를 만들어 내는 이인영, 어느 쪽이 한수 위일까?
이인영이 예선전에서 무라사메의 156km 빠른 볼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린 건 우연일까? 아시아에서 놀 레벨을 넘어선 수준, 메이저리그 팀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솔직히 너는 하체 쓰는 법은 꽝이야. 네 마른 몸이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라고”
가차 없는 독설에 전인규는 인상을 구겼다.
맞는 소리긴 한데 왜 이렇게 귀에 거슬릴까 하지만 쓴 소리도 받아들여야 발전하는 법, 나이는 같아도 타격 레벨에서 한 참 앞서 있는 친구의 조언을 받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니까, 잘 봐.”
밤도 잊고 학구열을 불태우는 2000년 생 듀오, 타오르는 열정만큼 한국야구의 미래도 밟아졌다.
* * *
“君が代は ~ 千代に ~ 八千代に ~ ”
“細石の 巌となりて ~ 苔の生すまで”
드디어 밝은 결전의 날, 도쿄 돔은 일본의 우승을 바라는 5만 여명의 열망으로 들썩거렸다.
몇 번이나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선율, 하품은 하지 않았지만 이인영은 먼 곳을 바라보며 애국가가 울려 퍼지길 기다렸다.
“자, 이제는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집니다. 지금까지 4승 무패!! 우리 선수들 여기까지 정말 잘 달려왔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이곳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먼 거리에 있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도 캐스터의 말에 동의했다.
져도 잘 했다고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이번 대회 성적, 그래도 기왕이면 금메달이 좋지 않을까.
애국가 제창이 끝나고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경기, 선발로 나선 김성현(ST 위너스)은 첫 두 타자를 잘 잡아냈지만, 3번 타자 모리사와에게 좌중간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내주고 말았다.
일단 경기 초반은 일본의 기세, 그래도 김성현은 후속 타자를 잘 처리하며 1회를 마쳤다.
“자, 이제 대한민국의 1회 말 반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선두 타자는 전인규 선수, 이번 대회에서 12타수 5안타,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수비 위치가 뭔가 이상하죠. 1차전에서 졌기 때문에 타케토 감독이 연구를 많이 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중견수가 좌측, 2루수가 우익수 바로 뒤까지 간 이상한 시프트,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 전인규는 침착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오늘 일본의 선발은 와타리카와 카츠타케, 고교 시절 160km를 던진 괴물인데 프로에 올라와서 구속을 164km까지 끌어올렸다.
프리미어 12에서 한국 타자들을 물 먹인 정신 나간 구위, 그 무서움을 알고 있는 전인규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넣고 말았다.
상체만으로 타격을 하는데 어떻게 공이 뻗어나가겠나. 높게 뜬 공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고 아웃카운트가 올라가자 외야석은 일본의 승리를 연호하는 목소리로 뒤덮였다.
후속 타자 도민호도 사정은 마찬가지,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으로 향했다.
일본산 괴물과 한국산 괴물의 첫 대면, 구위에 자신이 있는 카츠타케는 초구부터 158km 공을 뿌렸다.
따아악 ~ !!
“밀어 낸 타구가!!!! 센터 쪽 높게!! 담장을 ~ 넘어 ~ !!!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대한민국이 바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하하 ~ 지금 투수는 넋이 나갔네요. 이걸 쳐? 이런 표정인데, 이인영 선수의 파워를 너무 얕잡아 본 거 아닌가요?”
“얕잡아 봤다면 맞아야죠. 당연한 겁니다.”
첫 대결부터 제대로 한 방 맞은 와타리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862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좌타자에게 밀어치는 홈런을 내 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인 용병들도 못했던 짓을 저 자식이 하고 있으니, 현실을 인정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본 측 중계박스도 패닉 상태, 일본의 야구원로 모리타게 아츠시는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분석했다.
“지금은 공이 조금 몰렸네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바깥쪽으로 잘 붙인 것 같은데요?”
캐스터의 질문에 모리타케는 입을 다물었다.
공이 몰렸을 뿐이라고 현실을 부정했는데 거기에 말꼬리를 잡으면 어쩌자는 건가, 이때 메이저리그 무대를 경험한 고토부키 고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지금 타격은 상당히 인상적이네요. 힘으로 승부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 바깥쪽으로 붙인 공이 홈런이 되는 경우가 제법 있었거든요. 그 악몽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네요. 가볍게 치는 것 같은데 멀리 뻗어나가는 선수가 무서운 겁니다. 지금 이 선수 앞에선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네요. 도망칠 여유가 있다면 그것도 방법입니다.”
“아 ··· 그렇습니까? 무섭군요 ··· ”
캐스터는 이후 입을 다물었다.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6년을 버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진짜 무서운 상대, 이번 대회에서 이인영에게 홈런 3방을 헌납한 일본 벤치 분위기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 녀석은 와타리카와의 구위로도 잠재울 수 없는 건가?
그렇다면 누구도 정면승부를 하면 안 된다는 뜻, 하지만 와타리카와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지고는 절대 못 사는 성격, 다음 타석에선 반드시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에 비해 더그아웃을 활보하는 슈퍼 루키의 얼굴은 여유만만,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를 입에 문 채 다음 투구를 준비하는 와타리카와를 응시했다.
‘나부터 잡고 그런 소리해라.’
프리미어 12에서 한국을 이겼다고 일본의 승리를 장담했던 녀석, 하지만 지금까지 날 상대해 본 적은 없다.
164km를 던지는 괴물이라고 해서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봤는데, 빠른 볼 구위는 무라사메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 공은 빠른데 궤적이 너무 깨끗하다.
140km대의 업 슛을 던지는 김성현이 상대하기 더 까다로운 편, 타이밍만 맞으면 언제든지 담장을 넘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