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불 붙여드립니다 (4)
“주자들 뛰었고!! 포수는 던지지 못 합니다! 자 ···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글쎄요. 일단 제가 보기엔 인플레이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멕시코의 감독 루이스 페레스는 도루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시간을 약간 되돌리면 투수가 로진 백을 터는 동안 3루수는 파울 라인 밖으로 잠시 나가 있었다.
하지만 발을 풀진 않았던 투수, 야구에서는 인플레이는 주심이 플레이볼을 선언한 이후 경기가 중단 될 때까지를 뜻한다.
투수가 발을 풀거나 타임을 요청한 건 아니니 넓게 보면 인플레이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주자들은 그 틈을 찔렀을 뿐이다.
주심은 인 플레이 상황으로 인정했지만 지금 플레이를 도루로 보진 않았다.
로진 백을 터는 행동을 투구 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멕시코의 페레스 감독은 이건 불공평하다고 항의를 이어갔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저 애송이 녀석들이…’
한편, 한국의 김정길 감독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단독 도루야 선수가 알아서 판단 할 수도 있지만. 투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대범한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 애송이들, 결과는 좋았지만 머리에 백발이 내린 감독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자극적이었다.
‘저 자식은 이 타이밍에 뛰네.’
놀란 건 이인영도 마찬가지, 솔직히 지금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3루로 돌진한 전인규, 투수의 시선이 3루로 향한 사이 2루를 훔쳐냈다. 악송구가 나오면 3루 주자가 홈로 뛰겠지, 부담을 느낀 3루수는 송구를 포기했다.
순간적인 기지로 만들어 낸 2 - 3루 기회, 팬들은 1999년생 듀오에게 찬사를 표했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가는군요. 3루 주자 묶어두고 1루로 던져 잡아냅니다.”
“너무 아쉽네요. 안타는 몰라도 희생타는 나왔어야 했는데 불이 붙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지도 후속타자들의 불발로 물거품, 예선전에서 보여준 타선의 집중력은 어디로 간 건지, 도화선이 젖어버렸는데 폭약을 채운들 무슨 의미가 있나.
8회 까지 한 점도 내지 못한 한국 대표 팀, 더그아웃엔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멕시코는 결승전 진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9회 말 한국의 마지막 공격, 이인영은 말없이 다음 타석을 준비했다.
9번 타자 이재민부터 시작되는 타순, 여기서 출루하면 다음이 전인규라 기대해 볼만 했다.
“몸 쪽!! 볼입니다. 이재민 선수가 피하질 않네요.”
“피하면 안 되죠. 지금은 살을 내주는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대표 팀이 패배에 몰리자 박한우 위원은 과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현역 시절 국가대표로 명성을 날린 만큼 태극마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편, 정상을 앞에 둔 대표 팀이 무너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바깥쪽 공을 차분히 골라낸 이재민은 볼넷으로 출루, 전인규가 타석에 들어서자 한국 팬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다들 이인영까지만 가자는 분위기, 하지만 전인규는 본인이 영웅이 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초구부터 배트를 돌렸다.
따악 ~ !!
“됐어!!”
“돌아!! 돌아!!”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적시타, 1루 주자 이재민은 2루를 돌아 3루까지 돌진, 1루에 멈춰선 전인규는 코치와 주먹을 맞부딪쳤다. 2루까지 갔다면 좋았을 텐데 후속 플레이가 좋았던 멕시코의 외야진, 도민호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다.
‘힘껏 쳐라.’
김정길 감독은 여기서 강공을 지시했다.
현재 상황은 무사 주자 1 - 3루, 뒤에 중심타선이 버티고 있으니 병살은 피하자는 생각에 소극적인 배팅을 지시하는 감독도 있다. 본인도 한때 그랬지만 2000경기를 넘게 지휘하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따악 ~ !!
“아 ~ !! 정말!!”
2구 타격, 하지만 잘 맞은 타구는 좌익수 정면으로 가버렸다. 주자들이 움직이지 못하면서 1아웃, 한국 대표 팀의 운명은 이제 이인영의 손에 떨어졌다.
“음 ··· 초구는 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공을 안 주는 건가요?”
“그래도 서두르면 안 됩니다. 안타를 못 쳐도 지금처럼 볼을 보는 게 낫습니다.”
“글쎄요. 이인영 선수가 밀어치는 타격을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지금 정도의 공은 쳐도 괜찮다고 봅니다.”
박한우 위원은 적극적인 타격을 원했다.
올 시즌, 이인영의 외야 타구 분포도는 넓게 퍼져 있지만, 땅볼 타구는 1루와 2루 사이에 집중됐다.
멕시코가 원하는 최적의 시나리오는 병살, 예상대로 유격수와 2루수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면서 삼유간이 넓게 비었다.
단숨에 경기를 뒤집는 장타도 좋지만 따라붙는 한 점도 나쁘지 않겠지, 박한우 위원도 현역시절 그런 배팅으로 대표 팀의 득점을 터줬다.
멕시코도 일단 장타는 안 맞겠다는 분위기, 넓어진 구멍을 활용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이인영은 바깥쪽엔 입질도 주지 않았다.
쳐도 되는 공이지만 목표물이 그물 안에 들어올 때까지 인내, 승부가 길어지자 멕시코의 투수 베니토 산타이고는 한숨을 몰아쉬며 발을 풀었다.
주자가 3루에 있기 때문에 바깥쪽 투구가 부담이 되는 게 사실, 몸 쪽으로 붙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넣어야 할 구멍은 더 좁아졌다.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다음 공은 노려볼만 합니다. 여기서 만루가 되는 건 멕시코가 원하는 시나리오가 아니에요.”
드디어 사정권까지 좁혀진 목표물, 한가운데 약간 낮은 공을 힘껏 들어올렸다.
따아악 ~ !!!!
굉음과 함께 솟아오르는 타구, 결과를 예감한 이인영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측 스탠스 상단에 처박히는 끝내기 쓰리 런 홈런, 경기 내내 끌려가는 경기를 하다 극적으로 경기를 뒤집은 한국 대표 팀 더그아웃은 말 그대로 뒤집어 졌다.
펄쩍펄쩍 뛰며 그라운드로 뛰쳐나온 선수들, 홈 플레이트로 몰려가 오늘의 영웅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 사이 끝내기 패배를 당한 멕시코 선수단은 쓸쓸히 퇴장, 대역전극을 이뤄낸 슈퍼 루키는 헬멧을 집어던지고 동료들 품에 뛰어들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환영의 손찌검, 300여 명의 한인 팬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이인영을 연호했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를 장식하는 한 방, 이인영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은메달 자동 확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오늘의 영웅은 전인규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4주 훈련 같이 받으러 가자는 뜻, 2000년생 듀오는 그렇게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자, 오늘 결승 홈런의 주인공 이인영 선수와 인터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인영 선수”
“예”
“일본전에서 2홈런, 그리고 오늘은 끝내기 쓰리 런 홈런까지, 말 그대로 드라마를 쓰고 계신데요. 혹시 오늘 홈런도 노리고 치신 건가요?”
“당연하죠. 그래서 바깥쪽 공은 무조건 걸렀습니다.”
이인영은 당시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일단 1점만 내겠다는 생각으로 타격을 했다면 바깥쪽 공을 밀어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쥐구멍을 통과해 봤자 경기를 뒤집긴 어렵다는 생각에 풀스윙을 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런데 홈런이 노린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요? 전에도 홈런은 안타를 치는 과정에서 나오는 거라고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요.”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죠. 중요한 건 홈런을 쳤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인영은 날카로운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내가 뱉은 말이라 부정할 순 없고, 그렇다고 노리고 쳤다는 근사한 허세를 이제 와서 물리기도 뭣하지 않은가.
그냥 좋게 넘어가면 그만, 말귀를 알아들은 리포터는 눈으로 보내는 신호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결승전만 남았는데요. 역시 금메달 획득이 최종 목표겠죠?”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팬 여러분들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끝난 인터뷰, 결승전 진출을 확정지은 한국 대표 팀은 선수 대기실에서 한 바탕 축제를 벌였다.
남의 집에서 부리는 행패라 더 기분 좋은 파티, 일본 기자들은 한 발 앞서 나간 라이벌을 향해 분노와 시기 섞인 눈빛을 보냈다.
* * *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이곳은 결승전을 앞둔 일본 대표 팀 감독실, 타케토 감독은 2번 째 한국전을 앞두고 전략을 새로 짰다.
이인영만 막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탄탄한 한국 타선, 뭣보다 리드 오프를 이끄는 전인규의 활약이 대단하다.
한국산 괴물이 이번 대회에서 9타점을 쏟아 붓고 있는 비결은 전인규의 꾸준한 출루 덕분, 홈런이야 맞을 수도 있지만 그 앞에 주자를 쌓아서 좋을 게 없었다.
“자료는 가져왔나?”
“네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대표 팀은 지난 7월 1일, 대전에서 벌어진 경기에 주목했다.
그날 창원 레이더스는 전인규를 상대로 2루수를 우익수 앞까지 뒤로 빼고 중견수를 좌익수 근처로 옮기는 극단적인 시프트를 펼쳤다.
1회 말, 전인규는 첫 타석에서 외야로 타구를 날렸지만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중견수에게 잡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 째 타석, 이번엔 2루수의 수비 위치를 보고 잡아당기는 타격을 했지만 창원 레이더스는 좌완 이대성을 내보내 잡아당기는 타격을 봉쇄했다.
선화 이글스의 공격을 이끄는 건 전인규, 이 선수만 잡아내면 된다는 창원의 작전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전인규가 시리즈 동안 12타수 무안타로 봉쇄되면서 막혀버린 선화 이글스의 득점 루트, 전인규를 봉쇄하면 한국 대표 팀의 공격도 막히지 않을까?
그동안 이인영만 신경 썼던 타케토 감독이 시야를 넓히면서 흐름은 묘하게 흘러갔다.
‘대책을 마련해야 되는데’
한국의 김정길 감독도 뭔가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1차전을 쉽게 잡아냈지만 일본은 만만하게 볼 팀이 아니다.
첫 경기에서 패배했으니 한국 선수들을 더 철저히 파고 연구하겠지, 뭣보다 밀어 쳐야 좋은 타구가 나오는 전인규를 상대하는 시프트는 정해져 있다.
본인도 그걸 의식하고 있는지 가끔 잡아당기는 스윙을 하는데, 힘이 부족해 우익수 뜬 공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틈을 이용한 스윙을 할 줄 아는 것도 전인규의 장점, 시프트가 언제나 통했다면 3할 중반의 타율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일본 투수들의 수준이 한국보다 높다는 것, 실제로 전인규는 일본과의 1차전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한국보다 수준 높은 투수들을 상대로 잘해줘야 2021 WBC에서도 국가대표 팀에서 중용 받겠지,
김정길 감독은 선수와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도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전인규도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시프트가 먹히는 경우는 '뜬 공'이 나왔을 때다.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전인규는 땅볼을 굴려야 안타가 나오는 유형, 공을 굴려 버리면 좌측으로 치우친 중견수도, 우익수 바로 앞까지 이동한 2루수도 손 쓸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땅볼만 치는 것도 어려운 일, 경기가 바로 내일이라 대책을 세울 시간은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