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전설의 오꽝 (16)
“자, 1사 주자 1루에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두 타석 모두 볼넷으로 출루했습니다.”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가겠죠. 절대 몸 쪽을 줄 리가 없습니다.”
해설위원은 이인영을 상대하는 볼 배합은 정해져 있다고 못을 박았다.
이인영이 한때 슬라이더에 약점을 보였던 이유는 상체의 기울임 정도와 연관이 있다.
몸을 기울이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게 통상적인 개념, 특히 팔 길이가 긴 선수들이 이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투수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할까.
타자가 몸을 기울이는 만큼 투수 입장에선 몸 쪽을 던지기 어려운 게 사실, 하지만 강타자를 잡아내려면 바깥쪽 공을 던져야 하고, 당연히 몸 쪽에 미끼를 던져줘야 한다.
그걸 이겨내야 홈런을 칠 수 있는 것도 타자의 운명, 이인영은 작년 시즌, 바깥쪽 공에 대응하기 위해 허리를 많이 굽힌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허리 회전이 원활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 하지만 올해는 좀 더 허리를 세웠다.
작년엔 타석에 들어섰을 때 뭔가 꽉 찬 느낌이 들었지만 올 시즌은 몸 쪽이 훤히 열려있게 된 것,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공을 무리하게 따라가지 않고 몸 쪽을 열어둔 뒤 몸통을 힘껏 뒤틀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해 줬다.
덕분에 체중은 줄었지만 몸통회전을 동반한 파워는 한 단계 더 상승,
지난 6월 7일 경기에서는 몸 쪽으로 떨어지는 싱커를 잡아당겨 홈런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인 선수였다면 파울이 됐을 타구를 그렇게 쳐내버리는데 어떻게 몸 쪽을 던지나.
김건일 해설위원은 바스케스가 몸 쪽을 던지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1루 주자는 2루 돌아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내! 달립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 2루타!! 성운 라이온즈가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지금도 보세요. 몸 쪽에 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스윙거리를 늘려주거든요. 배트 헤드가 일찍 떨어지질 않으니 걸리면 장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스윙궤적입니다.”
“거기다 이인영 선수가 컨택 능력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몸 쪽은 위험하다는 게 이번 타석에서 다시 증명이 되네요.”
제대로 맞은 바스케스는 포수가 던져준 공을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었다.
바깥쪽 유인구는 죽어도 안 나오고 몸 쪽 공은 귀신같이 쳐내버리니 미칠 지경, 반면 동점 적시타를 때려낸 슈퍼루키는 당연한 결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체를 세우고 잡아당기는 타격을 하면서 늘어난 장타, 밀어치는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렇게 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후속타자 김상규의 추가 적시타가 나오면서 성운 라이온즈는 역전에 성공, 제 역할을 다한 슈퍼 루키는 동료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거 많이 위험한데…’
현장을 찾은 일본 야구 대표팀 분석원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라면 공략할 수 있다고 봤는데 1년 만에 바뀐 스윙 스타일, 저렇게 몸 쪽을 잡아당겨서 홈런을 칠 수 있는 선수라면 굳이 바깥쪽을 밀어 칠 이유가 없다.
좌우 폭이 좁아진 국제대회 스트라이크 존, 일본도 거기에 맞춰 프로 선수들도 시즌을 치르고 있다. 그 중 몸 쪽 공을 저렇게 받아쳐서 담장을 넘길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있을까.
일본 투수들의 제구력과 구위는 한국에 비해 한수 위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 타케토 감독에게 작전을 다시 짜야겠다는 보고서를 올리기로 했다.
“와아아 ~ !!”
경기는 계속 흘러 7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4번 째 타석을 맞이한 이인영은 방망이를 홈 플레이트 쪽으로 뻗으며 자세를 잡았다.
얼핏 보면 헐렁해 보이지만 투수가 공을 던질 즈음 단단히 조여지는 몸, 용수철처럼 힘을 장전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우우우 ~ 우 ~ ”
“바깥쪽 말고 던질 생각이 없는 거야?!!”
“아웃사이드 오!!!!”
포수마스크를 쓰고 있는 오건무는 홈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다들 넌 바깥쪽 밖에 못 던지는 거냐고 욕 하는데, 본인은 코칭스태프의 지시에 따르는 것뿐이다.
더 열 받는 건 감독이 볼 배합에 대해 기자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문제가 생기면 선수가 다 욕을 먹는다. 본인이 지시한 거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싫은 건가.
선수를 총알받이로 세우고 뒤에서 KBO 리그 1위 팀을 이끄는 명장 놀이에 심취한 감독,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다.
[몸 쪽]
느닷없는 몸 쪽 사인에 투수는 당황했다. 못 던질 이유는 없지만 상대가 상대라 망설여지는 게 사실, 한참을 망설이던 김하규는 몸 쪽 승부를 택했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우측 담장!! 너머로 ~ 오!!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23호 홈런!!!! 페르난데스와의 격차를 다시 7개 차로 벌립니다!!”
“생일에 결국 한 건 하네요. 그건 그렇고 이 상황에서 꼭 몸 쪽을 던져야 했을지 ··· 의문입니다.”
베어스의 이재학 감독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바깥쪽으로 가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바스케스에 이어 이번엔 김하규까지, 항명은 절대 못 참는 성격이라 문제의 선수들을 다 교체해 버렸다.
그러건 말건 홈팬들은 슈퍼루키를 향해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연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던 이인영은 다시 밖으로 나와 팬들을 향해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날 성운 라이온즈는 리그 1위 베어스를 잡아내고 리그 단독 3위에 등극, 아무것도 안 하고 명장이 된 한승규 감독은 승장 인터뷰에 나섰다.
“감독은 시즌 6연승 달성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팀이 굉장한 상승세를 달리고 있는데,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한승규 감독은 다 내 덕분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단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데다 지금 팀 상승세를 이끄는 선수가 따로 있는 게 현실, 걸레짝이 된 자존심은 던져버렸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선수들이 잘 해준 덕분이죠.”
“오늘 이인영 선수가 시즌 23호 홈런을 쏘아 올렸는데요. 이러다 감독님이 세운 단일 시즌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을까요?”
“뭐 ··· 선수가 잘해야 저도 득이 되는 법이죠. 딱히 압박을 주거나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자존심까지 던져버린 한승규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퇴장, 오늘 2타수 2안타에 동점 적시타, 홈런까지 날린 이인영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인영 선수, 오늘 경기 승리 축하드립니다.”
“네, 승리는 몇 번이나 맛 봐도 기분 좋네요. 앞으로도 얼굴 좀 자주 뵀으면 좋겠습니다.”
뜬금없는 고백에 리포터는 당황, 이 광경을 지켜보던 팬들도 지금 작업 거는 거냐며 놀림 섞인 환호를 쏟아냈다.
“오늘도 홈런을 쏘아 올리셨는데, 그렇게 멀리 칠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어 ··· 정말 사소한 변화였습니다. 타격이라는 건 복잡한 기계 같아서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작동하지 않거든요, 올 시즌 초 만해도 밀어치는 타격에 집중을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코치님이 뭔가 도움을 주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제가 독학으로 ··· ”
먼 곳에서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던 이성한 코치는 얼굴을 붉혔다.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내 덕분이라고 해줄 것이지 거짓말을 못하는 녀석, 천재적인 재능과 감각을 갖춘 녀석이라 코치 입장에서도 배우는 게 많았다.
“사실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재능은 모든 선수들이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방법을 찾는 길이 너무 힘든 것뿐이죠. 저는 그 길을 조금 일찍 찾았을 뿐입니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오 ~ 이제는 철학적인 표현까지 하시네요?”
“뭐 ··· 한 분야에서 정점에 오르면 자신만의 철학은 생기는 법이죠.”
리포터는 물론 팬들도 폭소를 터뜨렸다.
자신감이 있다 못해 흘러넘치는데 미워할 수가 없는 선수, 계속되는 인터뷰에 귀를 기울였다.
“올해 꼭 이루고 싶으신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일단 대표 팀에 뽑히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 거두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팀도 좋은 성적 거두면 좋겠죠. 그러다 보면 개인 타이틀이나 상은 따라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 이루겠다는 뜻이네요?”
“당연하죠. 욕심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네, 지금까지 이인영 선수였습니다.”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한 이인영은 퇴근길에 올랐다.
흥분한 팬들은 여전히 구장 근처를 기웃거리는 중, 아직 운전면허가 없어서 도보로 출퇴근 하는 슈퍼루키는 팬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가서 하이파이브 해달라고 해봐.”
“받아줄까요?”
“괜찮아, 얼른 가 봐.”
이때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등을 살짝 밀어줬다.
선수한테 다가가는 건 머리 털 나고 이번이 처음,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인영은 기꺼이 응해줬고, 신이 난 아이는 ‘한 번 더’를 연호했다.
“형은 올해 홈런 몇 개 칠 거예요?”
“넌 몇 개 쳤으면 좋겠어?”
“음 ··· 우리 아빠 나이보다는 많이 쳤으면 좋겠어요.”
뜬금없는 나이 공격에 아버지는 당황했다. 딸만 둘 낳고 겨우 얻은 막내아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인영은 꾹 참았다. 아무리 내가 가벼운 성격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 슬쩍 분위기를 틀었다.
“그럼 40개만 넘기면 되니?”
“어? 아닌데? 우리 아빠 그것 보다 나이 많아요.”
“그래? 형이 보기엔 40대 정도로 보이시는데”
너무 눈에 보이는 아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지 아이 아버지는 시원하게 나이를 공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55개 쳐버리세요.”
“하하 ~ 네, 노력은 해 볼게요.”
이인영은 속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분인데 늦둥이를 보다니, 저 나이에 남자 구실 할 수 있다면 결혼은 조금 늦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성관계보다 야구가 훨씬 재미있을 나이, 야구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인영 또 홈런, 1위 자리 굳건]
슈퍼루키는 6월에 홈런 8개를 추가, 28개로 홈런 선두를 지켰다.
그리고 7월 4일, 올스타 팬 투표에서 전체 1위를 확정, 시즌 30호 홈런으로 축포를 터뜨렸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2년 차 선수의 대진격, 이 업화는 사방으로 튀어 대전까지 번져나갔다.
[송호영이 이글스의 10년 미래를 망쳤다]
[전인규 - 이인영 조합이었다면 지금 쯤 최소 3위는 했을 듯]
선화 이글스 팬들은 1차 드래프트에서 이인영을 지목하지 않은 송호영 단장을 맹비난했다.
이인영이 학교를 다닌 곳은 대전, 당연히 구단에서 관심이 있었다면 선화 이글스의 1차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을 거다.
그런데 2차 드래프트까지 밀린 지명, 2차 드래프트 1라운드 1차 지명권을 쥔 선화 이글스의 선택은 전인규였다.
이인영을 1차 드래프트에서 지목했다면 지금 이글스는 전인규 - 이인영이라는 국가 대표급 타자를 두 명이나 보유 했겠지.
그런데 단장의 뻘짓 때문에 꿈의 라인업은 국가 대표 경기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거기다 팀 성적까지 안 나오고 있으니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건 당연, 팬들의 원성이 대단했지만 송호영 단장은 침묵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