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전설의 오꽝 (14)
‘그 자식을 어떻게든 해야 되는데’
2차전을 앞두고 스카이퍼 트윈스 선수단은 머리를 맞댔다.
최대 고민은 역시 이인영, 우리만 만났다 하면 불방망이를 휘두르는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혹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상대의 약점보다 내부사정을 먼저 살폈다.
이인영의 약점은 역시 슬라이더, 특히 언더핸드 투수들이 유의미한 성적을 거뒀다. 언더핸드는 프로에서도 보기 드문 유형, 2년 차 고졸 선수 눈엔 아직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약점으로 남을지는 미지수, 팀 내 유일한 언더핸드 투수를 두고 김학의 감독의 고민은 깊어졌다.
고작 타자 한 명 때문에 언더핸드 투수를 선발로 써야 하나, 하지만 그 한 명이 성운 라이온즈 타선에 부여하는 임팩트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결단을 내렸다.
‘그래, 한두 타석만 상대하게 하자, 그게 타이밍을 흩트려 놓을 수도 있으니까.’
김학의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느닷없는 선발 기용, 처음엔 당황했지만 감독의 뜻을 확인한 위재성은 등판을 받아들였다.
* * *
“자, 오늘 스카이퍼 트윈스는 위재성 선수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올 시즌 6경기 등판, 승리 없이 평균자책점 4.50, 볼넷 3개, 탈삼진 5개, WHIP는 1.48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로 불펜으로 투입이 되는 선수인데, 오늘은 선발로 기용이 됐네요. 최고 138km의 빠른 볼, 110km 중후반대의 커브, 싱커, 슬라이더를 던지는데요. 요즘 보기 드문 전형적인 언더핸드 투수입니다.”
위재성은 릴리스 포인트가 거의 바닥을 스치면서 올라오는 수준, 처음 보는 타자들은 공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착각에 빠진다.
심판도 가끔 이게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헷갈려 할 정도, 하지만 쓸 만한 변화구는 슬라이더 정도다.
언더핸드 투수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싱커는 아직 미완성, 그렇다고 쳐도 빠른 볼 특유의 무브먼트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갖췄다.
특히 슬라이더에 약점이 있는 이인영이라면 위재성 앞에서 힘을 쓰기 어렵겠지, 김학의 감독은 주문을 중얼거리며 불안감을 다스렸다.
“자, 1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타자는 임완수 선수, 올 시즌 타율 0.275, 홈런 없이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두 번 출루하면서 리드 오프 역할을 잘 해냈죠. 확실히 성운 라이온즈 타선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퇴하긴 했지만 이건 박한우 감독의 유산이라고 봐야죠. 4년 동안 온갖 논란에 시달리면서 팀을 재건했는데, 결국 빛을 보진 못했습니다.”
임완수는 초구를 지켜봤다.
언더핸드는 다른 폼에 비해 투구 궤적이 읽히기 쉬운 폼,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빠른 볼 궤적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그게 읽힌다는 건 치명적, 지난 4년 동안 경험이 쌓인 임완수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따악 ~ !!
“강한타구!! 하지만 2루수가 잡아 1루에 송구합니다!! 원 아웃!! 이태승 선수가 좋은 수비를 보여줍니다.”
“지금은 경험에서 나온 수비네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타구를 처리한 이태승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박한우 감독의 제자답게 임완수는 밀어치는 타격에 초점을 두는 스타일, 거기다 오늘은 언더핸드 투수가 올라왔다.
당겨 쳐봤자 유격수 쪽 느린 땅볼이 날아오겠지, 나이가 들어 발은 느려졌지만 그동안 쌓은 경험으로 타구 방향을 예측했다.
하지만 다음 타자는 임완수보다 배팅 파워가 훨씬 좋은 편, 아니나 다를까 홍현구는 특유의 파워로 내야진을 뚫어내는 안타를 뽑아냈다.
‘일단 볼을 봐야겠네.’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선배들이 직접 가르침을 준 건 아니지만 타격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대략 이해했다.
특히 위재성의 슬라이더는 커브처럼 11시에서 5시 방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불리한 카운트에서 날아오면 스윙을 할 수밖에 없는 궤적을 그린다.
슬라이더를 던지기 전에 쳐내는 게 상책, 배트를 허공에 두어 번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바깥 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좌 타자 입장에선 꽤 멀리 보이는 공이네요. 이인영 선수가 통산 언더핸드 상대로 8타수 1안타, 표본이 적기 때문에 약하다 뭐다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구속이 느린 만큼 장타를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상식이죠. 뭣보다 위재성 선수가 볼 끝이 가벼운 편이라 걸리면 위험합니다.”
초구를 잡았지만 트윈스 배터리는 신중한 투구를 이어갔다.
상대는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탄, 다시 바깥쪽으로 던졌지만 이인영은 공을 끝까지 보며 유인구를 골라냈다.
무브먼트는 분명 뛰어나지만 볼 궤적은 일정한 편, 일부 수준급 언더핸드 투수들은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해 릴리스 포인트를 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재성은 그 레벨엔 오르지 못한 투수, 3구도 문제없이 골라냈다.
‘이것도 안 되는 거냐?’
김학의 감독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졌다.
역시 위재성을 선발로 내세운 건 무리수였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일, 예정대로 이번 이닝은 지켜보기로 했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이렇게 되면 승부하긴 위험한데요. 역시 빠져 앉네요.”
위재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감독이 내린 임무는 겨우 1이닝, 그 정도 일도 못하고 쩔쩔 매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세 또 성장했군. 쭈그러든 건 나인가…’
적이지만 김학의 감독은 이인영을 높게 평가했다.
요리는 정확한 레시피가 있어도 계속 연구하고 연습해야 결과가 나오는 법, 레시피도 없이 이렇게 하면 대충 맛이 나겠지 하는 삼류 요리사는 절대 명인이 될 수 없다.
야구라고 다르겠는가.
타이밍을 흔들기 위해 언더핸드 투수를 올렸는데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수를 몰아세우다니, 이런 타자는 절대 잔머리로 상대할 수 없다.
오늘 내가 한 짓이 삼류 요리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김학의 감독은 볼넷을 내 준 위재성보다 자신의 선수기용 방식을 부끄럽게 여겼다.
어쨌든 1사 주자 1 - 2루에서 성운 라이온즈는 선취점을 내는데 만족, 트윈스도 바로 추격에 성공하면서 팽팽한 접전이 계속됐다.
이제 경기는 3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이인영은 2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김재환, 트윈스 배터리는 정석대로 가라는 감독의 지시에 따랐다.
‘정석?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런데 그 정석이라는 게 뭔가, 스트라이크 넣고 맞으라는 건가.
하지만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 운명, 언제까지 도망칠 수도 없는 상대라 배터리는 각오를 다졌다.
따아악 ~ !!
“걸린 타구가!! 센터 쪽으로 높게!! 담장을 넘어 ~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성운 라이온즈가 다시 한 발 앞서 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시즌 15호 홈런이죠. 일단 작년의 기록은 넘어섰습니다.”
김재환은 덤덤한 얼굴로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았다.
알고도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 자존심은 상했지만 적어도 다른 투수들처럼 도망치진 않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 사이, 슈퍼 루키는 유유히 베이스를 돌아 홈에 입성, 후속타자 김상규와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동료들을 거친 손은 자연스럽게 감독 전용 냉장고로 향했고, 포기했는지 한승규 감독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많이도 채워놨네.’
이인영은 단숨에 음료수 한 병을 비워냈다.
뺏어먹는 맛은 역시 각별한 법, 냉장고를 채운 넉넉할 살림 덕분에 다음 타석도 홈런을 치겠다는 의욕은 달아올랐다.
* * *
[따아악 ~ !!]
“어? 간다!! 간다!!”
이곳은 대구에 있는 이인영의 친가, 소파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이인호는 경쾌한 타구에 몸을 일으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멀티 홈런을 기록한 아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장타행진에 어머니는 엉덩이춤으로 기쁨을 표했다.
“아이 ~ 저리 좀 비켜 봐. 안 보이잖아.”
“억울하면 당신도 나처럼 춤추면 되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인호도 사실은 아내처럼 몸을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의 체면이 있는 법, 엉덩이를 소파에 붙였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몸 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였는데 이걸 걷어 올리네요.]
[어제 기록까지 합쳐 4연타석 홈런이죠. 사실 5월 들어 타율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번 시리즈에서 말 그대로 대폭발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직 한 타석 더 들어설 기회가 있거든요. 150년 역사를 가진 MLB도 5연타석 홈런이 나온 적이 없는데, 오늘 기대해 보겠습니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를 단숨에 뒤집어 버린 한 방, 중계카메라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이인영의 뒤태를 집중 조명했다.
곰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더그아웃을 어슬렁거리는 느낌, 빵 하나 먹어도 논란이 되는 그라운드에서 저렇게 대놓고 음료수를 입에 물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야구만 잘한다면 뭐든 용서가 되는 세계,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5연 타석 가자!!]
-> 가즈아!!
-> 5연 타석 치면 내가 음료수 트럭으로 보내 줄게
-> 나는 그거 받고 빵 추가, 이인영은 먹을 자격 있다
문제는커녕 야구 기사엔 사식을 넣어주고 싶다는 팬들의 댓글이 쏟아졌다.
작년에 비해 살이 너무 빠진 곰돌이, 살이 빠져도 이 정돈데 체중이 좀 더 불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밥 한 끼 사주고 싶다는 댓글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와아아 ~ !!”
8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원정 팬들은 이인영 홈런을 연호했다.
이전은 물론 앞으로도 다시없을 지도 모르는 대기록의 현장, 이 상황에서 볼넷을 택하면 치욕을 당하는 건 누구일까.
트윈스의 김학의 감독은 승부를 지시했다.
딱 ~ !!
“초구!! 파울입니다. 후우 ~ 괜히 제가 긴장이 되네요.”
“조금 신중했으면 합니다. 여기서 땅볼이 나오면 본인도 그렇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정말 허무하거든요.”
해설위원들도 어느새 본분을 망각했다.
어느 쪽에도 치우쳐선 안 되지만 대기록 앞에선 모두가 한 마음,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TV 시청률은 순간 24%를 돌파, 인터넷 중계 창도 폭주, 모든 야구팬들의 관심이 이 타석에 집중됐다.
[딱 ~ !]
“아 ~ 이게 왜 나가지?”
집에서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던 이인호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의 체면이고 뭐고 여기서 홈런을 치면 집 밖에서 춤이라도 출 기세, 그 옆에 자리를 잡은 아내도 두 손을 모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딱 ~ !!
“다시 파울, 양 선수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팬들이 원했던 야구가 바로 이런 거죠. 이인영 선수도 대단하지만, 승부를 하고 있는 트윈스 배터리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마침 중계카메라가 김학의 감독의 얼굴을 비췄다.
승패를 떠나 재미있는 야구를 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중, 위장선발 논란으로 얼룩진 게시판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딱 ~ !
“그렇지!! 아 ~ !! 이게!! ··· ”
4구도 타격, 김학의 감독은 살짝 벗어난 타구에 아쉬움을 표했다.
인플레이가 됐다면 1루수가 잡아 베이스를 터치했을 텐데 정말 끈질긴 녀석, 이제는 좀 끝내자는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