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전설의 오꽝 (13)
[잘 지내냐?]
“저야 잘 지내죠.”
월간 mvp 수상이 끝난 다음 날, 이인영은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2005년에 실행 됐다가 1년 만에 폐지된 월간 mvp제도, 그러다 2010년에 다시 부활 됐다.
매년 12명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 그 중 한 명이 내 아들이 될 줄이야, 이인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실은 얼마 전 이상한 꿈을 꿨다.]
“무슨 꿈이요?”
[용 다섯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여의주 다섯 개를 놔두고 가더라.]
이인영은 뜬금없는 꿈 얘기에 코웃음을 쳤다.
예전부터 꿈 얘기를 자주하셨지만 이번은 스케일이 좀 큰 편, 혹시 그거 태몽 아니냐고 찔러봤다.
“늦둥이 보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이 나이에 무슨 늦둥이냐?]
“혹시 또 모르죠. 생각 있으면 노력해보세요. 저는 동생 태어나는 거 찬성이에요.”
무안했는지 이인호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꿈 얘기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 아내 앞에서도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았다.
“여의주가 다섯 개면 어디 보자 ··· 일단 월간 mvp는 받았고 ··· 2번 째는 올림픽 금메달이겠죠?”
“그러면 좋지“
어머니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평소라면 개꿈이라고 면박을 줬겠지만, 아들이 프로에 진출하면서 집안사정이 확 편 건 사실, 이번 꿈도 아들과 연관된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럼 나머지 3개는 뭘까요?”
“글쎄, 혹시 며느리 될 사람 아닐까?”
“어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얼마 전 교회에서도 우리 아들한테 관심 보이는 신도들 있었거든요.”
“하하 ~ 그랬어? 딸들 예쁘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날개, 부부는 요즘 사소한 이야기도 길게 끌고 갔다.
예전이면 다 단답형으로 끝났을 텐데, 잘 나가는 아들 덕분에 부부 관계도 예전보다 돈독해졌다.
“아, 그리고 인영이가 그 말도 했어.”
“뭐가요?”
“그거 태몽 아니냐고, 동생 태어나면 환영이라는데?”
잘 나가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분위기가 깨지자 무안해진 가장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기다려보자고, 또 좋은 소식 있을 거야.”
“그래야죠.”
그날 밤, 어머니도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번엔 용 다섯 마리가 아들의 몸을 휘감고 하늘로 날아가는 꿈, 남편 꿈에서도 용 다섯 마리가 여의주를 주고 갔는데 이번엔 아들을 끌고 갈 줄이야,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 * *
“너 오늘 홈런 칠거지?”
5월 14일, 임완수는 배팅 훈련을 앞둔 후배의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5월 들어서도 12경기에서 홈런 4방을 때려내고 있는 슈퍼루키, 12홈런으로 압도적인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2위 베어스 페르난데스 : 8개).
이제는 안 치면 서운한 녀석, 임완수는 홈런을 기념할 세리머니를 연구하자며 귓속말을 흘렸다.
“그냥 하이파이브 하면 되죠.”
“그건 재미가 없잖아. 뭔가 재미있으면서도 신박한 거 없을까?”
이인영은 계속 되는 애정표현에 거북함을 느꼈다
남자끼리 어깨 주물러주는 것도 어색한데 끈적끈적한 세리머니를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홈런을 치고 싶은 욕구마저 죽어버렸다.
“자, 1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 됩니다. 선두 타자는 임완수 선수, 올 시즌 타율 0.271, 홈런 없이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장 기회가 점점 늘어나더니 이젠 리드오프까지 올라왔죠. 분위기 메이커 노릇도 잘 해내고 있고, 이젠 팀에 없어선 안 될 선수가 됐습니다.”
임완수는 3구를 잡아당겼지만 타구는 유격수 정면으로 향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1루로 질주, 아쉽지만 다음 타석을 기약했다.
후속타자 홍현구는 볼넷 출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서자 스카이퍼 트윈스 배터리는 바짝 긴장했다.
지난 대구 원정에서 놀라운 장타력을 과시한 녀석, 5월 들어서도 가파른 홈런 페이스를 달리고 있으니, 정면승부는 피했다.
‘마음대론 안 될 거다.’
이인영은 바깥쪽 빠른 볼에 몸을 날리는 포수를 곁눈질로 살폈다.
볼배합은 정말 의미 있는 행위일까.
볼배합이란 기본적으로 제구가 바탕이 돼야 할 수 있는 것, 바깥쪽으로 볼을 요구했는데 몸 쪽으로 들어가면 볼 배합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제구가 좋은 투수도 게임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세분화해서 투구하는 건 불가능, 기껏해야 바깥쪽, 몸 쪽, 정말 컨디션이 좋은 날은 몇가지 다양성을 추가할 수 있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투수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2 - 5개 사이, 이걸 그럴듯하게 조합해서 타자를 잡아내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쳐도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현실적인 볼 배합은 배터리가 의견을 종합해 결론을 내는 것, 슈퍼루키는 차분히 볼을 보며 투수의 선택지를 하나 씩 지워냈다.
‘집어넣어, 괜찮아.’
포수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을 요구했다.
이인영이 5월 들어서도 장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4월이 넘었던 월간 타율은 5월 들어 0.316으로 떨어졌다(시즌 타율 0.376).
그래도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흉악했던 4월에 비하면 귀여운 편, 포수 사인에 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아악 ~ !!
“이 타구는 멀리!! 담장!! ··· 밖으로 날아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선제 투런 홈런!!!! 성운 라이온즈가 2대 0으로 앞서 나갑니다!! 시즌 13호 홈런!! 홈런 레이스 1위를 공고히 하는 한방입니다!!”
“초구가 바깥쪽으로 많이 빠졌기 때문에 투수 입장에선 스트라이크 존으로 붙여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한가운데 ··· 놓치질 않았습니다.”
“정말 무서운 페이스네요. 작년에 이인영 선수가 54게임에서 14홈런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올해는 34경기에서 벌써 13홈런이에요. KBO 역대 최연소 홈런왕이 점차 현실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마 했던 한방에 홈팬들은 침묵했다.
2년 전, 스카이퍼 트윈스는 홈런을 늘리기 위해 2.2m 담장 앞에 홈런 테라스를 설치했다.
하지만 트윈스가 홈에서 66개를 치는 동안 투수진은 83홈런을 헌납,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은 단장은 1년 만에 테라스를 철거했다.
여기에 공인구 반발 계수를 조정하면서 더 줄어든 홈런, 그럼 상대 팀도 못 쳐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저 애송이는 어떻게 홈런을 때려내는 건지, 트윈스 팬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사이 슈퍼루키는 유유히 베이스를 돌아 홈 인, 먼저 홈을 밟은 홍현구, 타석에 들어서는 김상규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여 ~ ”
한승규 감독은 마지 못 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도 팀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슈퍼스타, 거기다 성적이 나오면서 자신의 입지도 오르는 상황이라 대접을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다 먹어야지.’
세리머니를 마친 이인영은 당당하게 감독 전용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홈런을 치고 나면 반드시 챙겨 먹는 감독용 음료수, 성운 라이온즈 구단은 선수들의 수분 섭취량을 체크하기 위해 냉장고 칸을 나누고 그 자리에 생수병을 채워놓는다.
하루에 생수 2.2L짜리 한 병을 다 마시라고 하는데, 이인영은 대놓고 감독용 음료수를 꺼내먹는 중, 이성한 타격 코치는 왜 자꾸 감독님 냉장고를 손대냐며 타박을 줬다.
“우리 냉장고에는 음료수가 없잖아요.”
“그냥 물 마셔 인마, 그게 건강에도 좋아. 네가 자꾸 음료수를 먹으니까 구단에서 체크를 못 하잖아.”
“이것도 수분이에요. 홈런도 쳤는데 엄청 빡빡하게 구시네.”
한마디도 안 지는 녀석, 이제 슈퍼스타라고 코치 말도 안 듣는 건가.
이성한 코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이인영은 감독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님, 저 이거 마셔도 되죠?”
한승규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어쩌겠는가. 이인영은 보란 듯이 건강음료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아 ~ 맛이 좋네. 하나 또 치고 더 먹어야지 ~ "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렸다.
전지훈련에서 감독과 사소한 충돌이 있긴 했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복수할 줄이야. 하지만 대놓고 웃기엔 감독의 눈치가 보이는 입장, 입을 꾹 다물고 경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초, 슈퍼루키는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은 투런 홈런, 시즌 13호 홈런을 우중간으로 보냈습니다.”
“비거리가 무려 131m로 기록됐거든요. 올 시즌 이인영 선수의 홈런 평균 비거리가 125m, 어떤 구장에서도 홈런을 칠 수 있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트윈스 배터리는 다시 신중한 볼 배합으로 전환했다.
그냥 존재 자체가 무서운 녀석, 볼넷을 주더라도 좋은 공은 주지 않겠다는 피칭이 이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깥쪽 약간 높은 코스로 들어갔고, 힘이 실린 배트가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따아악 ~ !!
“이번에는 좌측으로!! 높게!! 멀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연타석 홈런!!!! 스코어는 이제 4대 0입니다!!”
“이것까지 쳐버리면 정말 방법이 없는데요. 지금 이 선수는 피하는 게 정답입니다.”
연타석 홈런에 트윈스 팬들은 폭발했다.
도망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두들겨 맞다니, 본인도 부끄러운지 투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넌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트윈스의 2루수 이태승은 3루로 향하는 괴물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이 녀석이 홈런을 치고 2루를 도는 모습을 올해만 4번이나 봤다. 앞으로도 많은 경기가 남았는데 몇 번이나 이 꼴을 봐야 하는 건지, 그런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인영은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주고받았다.
‘오늘 이 냉장고 털어버리자.’
슈퍼루키는 예고대로 감독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홈런을 칠 때마다 줄어드는 내용물, 홈런을 칠 때마다 한 두 개씩 꺼내 마시긴 하는데 털어버린 기억은 없다.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다음 타석은 초구를 한껏 노리고 들어갔다.
딱 ~ !
“파울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굉장히 공격적으로 나오는데요.”
“올 시즌 멀티 홈런이 3경기나 있는 선수죠. 몰아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트윈스는 정면 승부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2구는 바깥쪽으로 한참 빠지는 공, 배터리가 승부할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한 이인영은 느슨하게 자세를 잡았다.
결국 이날 성적은 2타수 2안타(2홈런, 3타점)에 볼넷 2개, 냉장고 털이에 실패한 살 빠진 곰은 다소 아쉬운 얼굴로 경기를 마무리 했다.
“꽉 채워주세요. 내일 다시 도전할 거니까요.”
구단관계자는 황당한 요구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시라는 생수는 안 마시고 감독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했지만 탄산음료를 마시는 건 아니라 요구대로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