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전설의 오꽝 (8)
“다시 3루 도루!! 잡아내지 못합니다!! 전인규 선수가 성운 라이온즈 배터리를 농락하고 있군요.”
“전인규 선수의 주루 센스가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김민구 선수의 미숙함도 원인이네요. 지금도 공을 한 번에 잡지 못했어요.”
계속되는 자동 진루에 성운 라이온즈 배터리는 평정심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선발 존 워커는 5이닝을 채우지 못 하고 6피안타 4실점 강판, 장타력이 떨어지는 타선은 한 방은 커녕 끈끈한 조직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 결과는 6대 2, 선화 이글스의 승리,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한 슈퍼루키는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 길에 올랐다.
홈 경기에 비교적 약한 징크스는 오늘도 계속, 뭣보다 고교시절 한 번 붙었던 라이벌에게 판정패를 당한 게 너무 분했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는 날씨,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도 많은 팬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섰다.
‘해주다 안 해주면 서운하다고 하겠지.’
이인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사인에 응했다.
솔직히 사람이라 매일 기분 좋게 사인에 응해 줄 순 없다. 하지만 형편없는 경기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준 팬들을 외면하는 건 프로의 자세가 아니겠지, 그렇게 사인 응대는 한동안 계속됐다.
“네가 연예인이냐?!! 인기 끌지 말고 홈런을 치라고!!”
이때 먼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인을 받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움찔, 이인영도 순간 멈칫 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인기 끌지 말고 홈런을 치라고?’
집으로 돌아온 슈퍼루키는 퇴근 길에 일어난 소동을 머릿 속에 되새겼다.
‘그래, 확실히 나는 연예인은 아니지’
그래도 팬들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프로선수로 대접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팬이 시비를 걸었다고 모든 팬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냐?”
“아니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고민 있는 얼굴인데”
이때 찾아온 아버지 찬스, 속마음을 꽁꽁 감싸맸던 이인영은 거듭되는 관심에 슬쩍 마음을 열었다.
“네가 모든 책임을 떠안을 이유는 없다. 그 사람들은 책임을 떠넘길 그럴 듯한 이유가 필요한 것뿐이야.”
이인호는 아들에게 부담감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아들은 이제 성운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간판 선수, 그래도 팀의 승패는 모든 선수들이 공평하게 짊어지는 거다.
하지만 스타는 잘 할 때도 못 할 때도 팬들의 관심에 둘러싸이는 법,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면 내가 잘못해서 팀이 졌다는 착각에 시달리게 된다.
이제 막 프로 선수의 첫 발걸음을 뗀 아들은 너무 의욕이 넘치는 게 흠, 이인호는 길게 가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며 충고를 이어갔다.
“시즌은 장기적으로 봐야 된다. 사소한 일은 잊어버려, 세상이 넓은 만큼 다양한 인간들이 있는 법이니까.”
“네”
이인영은 아버지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친절하게 대하면 모든 팬틀이 날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친절하게 응하되 그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게 정답, 모든 팬들의 사랑을 받겠다는 비상식적인 목표는 치워버렸다.
[전인규가 이인영보다 낫다. 오늘 경기로 확실히 증명]
-> 관심종자들 또 몰려왔네. 비교할 걸 비교해라
-> 놔 둬, 이인영 뺏긴 게 억울해서 자위하는 거야.
-> 자위 아닌데? 이인영은 전인규만 만나면 패배 아니냐?
한편 경기가 끝난 후, 양 팀 팬들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선화 이글스 팬들은 한 때 이인영을 거르고 전인규를 택한 프런트를 멍청이라고 욕하며 반발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2019 시즌 신인왕은 이인영이 아니라 전인규, 거기다 이번 시리즈에서 전인규가 놀라운 주루 능력으로 성운 라이온즈 배터리를 농락하자 전인규를 택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며 여론전을 펼쳤다.
그냥 우리 선수 뛰어나다고 하면 될 것이지, 왜 우리 동네 스타를 들먹이며 비교질을 하는 건가.
발끈한 성운 라이온즈 팬들이 맞불을 놓으면서, 기자들도 두 선수를 비교하는 흐름에 슬쩍 끼어들었다.
‘아무 것도 안 들려’
슈퍼루키는 외부의 잡음에 귀를 닫았다.
작년에 54경기에서 14홈런을 쳤으니, 팬들은 산술적으로 30홈런이 가능한 선수라는 기대를 하고 있을 뿐, 실제로 30홈런을 친 적이 없다.
그에 비해 전인규는 작년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팬들의 기대치를 확실히 정해놓은 입장, 내가 지금 전인규와 비교된다고 욱할 입장인가.
일단 풀타임을 소화해 팬들의 기대치를 정해놓는 게 우선, 그게 확정되면 그 녀석과 비교 될 일도 없다며 마음을 다스렸다.
* * *
[성운 라이온즈, 호세 라미레스 2군 행]
[김상규 콜 업]
다음 날, 차명석 단장은 부진한 타선을 두고 결단을 내렸다.
야심차게 영입한 라미레스는 올 시즌 14경기에서 타율 0.211, 홈런 1개, 5타점으로 부진, 성적도 성적이지만 땅볼을 치고도 최선을 다해 달리지 않는 모습에 2군 행을 결정했다.
방출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이라 조금 더 지켜보겠지만, 2군에서도 개선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칼을 들어야겠지. 만일을 대비해 대체 용병을 물색할 스카우터가 미국으로 출국했다.
덕분에 콜 업 기회를 얻은 김상규, 올 시즌 2군에서 타율 0.357, 홈런 4개를 기록하고 올라와 자신감은 충분했다.
‘그래 봤자 2군이지.’
한승규 감독은 구단의 정책에 콧방귀를 뀌었다.
2군과 1군은 전혀 다른 세계, 김상규는 라미레스의 징계가 없었다면 빛을 보지도 못했을 선수로 여겼다.
그냥 교체하고 새로운 용병을 영입할 것이지, 단장은 자신의 실패를 그렇게도 인정하기 싫은 건가.
일단 지시대로 3번에 넣었지만 김상규에게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알 게 뭐야. 내가 지휘하는 것도 아닌데’
1회 초 선화 이글스의 공격, 성운 라이온즈는 선취점을 내주며 출발했다.
이런 때일수록 선수단을 다독이고 격려하는 게 감독의 역할, 하지만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감독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경기를 방치했다.
선발 투수 이상훈이 1회에만 32개를 던지며 4실점을 했지만 무시, 코치가 독단으로 투수를 교체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형편없는 경기력에 축 처진 홈 팬들, 그래도 응원단장은 힘찬 목소리와 격렬한 율동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자!! 여러분!!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힘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형식적, 마지못해 하는 응원에 7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응원단장도 힘이 빠져 버렸다.
“자, 4대 0으로 뒤진 성운 라이온즈의 1회 말 공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홍현구 선수, 어제 경기에서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했습니다.”
[딱 ~ ]
“초구 타격, 유격수가 잡아서 1루에 송구 원 아웃입니다.”
“어제와 너무 비슷한 장면 아닙니까. 본인도 이 정도면 생각을 하고 쳐야하는데 ··· 저희도 답답한데 팬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안 봐도 뻔한 결과에 팬들은 침묵, 이인영이 타석이 들어섰지만 환호는 예전만 못했다.
받쳐 주는 타자가 없는데 어떻게 적극적인 타격을 하겠나, 아니나 다를까 첫 타석부터 볼넷, 3번 타자 김상규가 타석에 들어섰다.
따아악 ~ !!
“어?!! 간다!! 간다!!”
간만에 나온 시원한 타구, 1루에서 잠깐 멈칫했던 이인영은 2루를 돌아 3루로 내달렸다. 원활하지 못한 중계 플레이, 홈까지 파고들까 했지만 멈추라는 3루 코치의 사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어지는 4번 타자 이경완의 타석, 가볍게 밀어친 타구는 우익수 정면으로 갔고, 그 사이 이인영은 홈을 밟았다.
후속 타자가 아웃되면서 한 점 밖에 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따라갔다는 게 중요, 선화 이글스는 2회 초 공격에서 1점을 더 도망갔지만 성운 라이온즈도 바로 추가점을 내며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볼넷!! 홍현구 선수가 출루하면서 1사 주자 1-2루, 타석에는 이인영 선수가 들어섭니다.”
“자, 드디어 기회가 왔네요. 전 타석에서 김상규 선수가 좋은 타격을 보여줬기 때문에 여기서 거르긴 어려울 겁니다.”
경기는 흘러 3회 말, 성운 라이온즈는 동점까지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김상규가 좋은 타격을 한 건 사실이지만 임팩트는 이인영이 한 수 위, 선화 이글스 배터리는 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투구를 이어갔다.
“다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볼!! 공이 옆으로 튀었습니다!! 그 사이 주자들은 한 베이스 씩 더 진루!! 1사 주자 2-3루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1루를 채우겠죠. 역시 일어나네요.”
또 볼넷,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홈 팬들은 욕설까지 섞어가며 야유를 퍼부었지만 슈퍼루키는 보호대를 풀며 1루로 걸어 나갔다.
언제까지 날 상대로 이런 투구를 할 순 없겠지, 아버지 말대로 시즌은 길지 않은가. 나쁜 공에 따라다니지 않고 감을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
후속 타자 김상규는 보란 듯이 2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3루 주자, 2루 주자가 모두 홈을 밟으면서 스코어는 4대 3, 잡히지 않던 경기가 눈앞까지 다가오자 홈팬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최강 성운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침체기에 접어든 경기, 성운 라이온즈 팬들은 슈퍼 루키의 한방에 기대를 걸었다.
[죽!! 지!! 않!! 아!! 치!! 고!! 달!! 려!! 이인 ~ 영 ~ 홈런!!]
“자, 6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두 타석 모두 볼넷 출루, 2득점을 올리고 있습니다.”
“주루 능력이 있는 선수라 내보내서 좋을 게 없죠. 여기선 승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화 이글스는 올 시즌 1승 무패,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고 있는 이학영을 마운드에 올렸다.
망가진 불펜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 올 시즌 첫 연승을 위해 일찌감치 필승카드를 꺼내들었다.
구위에 자신이 있는 이학영은 정면 승부를 즐기는 편, 초구부터 몸 쪽 깊은 볼이 들어왔지만 이인영은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며 피했다.
전지훈련에서 상대한 일본 투수들에 비하면 그저 그런 구위, 이 정도면 충분히 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괜찮아!! 거르면 되지 뭐!!”
투 볼이 되자 포수마스크를 쓴 심재영은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볼넷으로 나가는 건 이 자식도 싫겠지, 유인구에 배트가 안 나오기에 도발을 걸어봤지만 슈퍼루키는 3구도 골라내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또 나가면 중심타선의 장기 말이 될 녀석, 후속타자 김상규의 타격감이 좋으니 마냥 도망치기도 뭣했다.
따악 ~ !
“타격!! 파울입니다. 이인영 선수가 간만에 힘껏 잡아당겨봤네요.”
“볼을 많이 보다보니 감이 조금 떨어져 있을 수 있거든요. 평소와 달리 센터 쪽으로 보내는 타격이 되질 못했어요.”
타석에서 한 발 벗어난 슈퍼루키는 가볍게 스윙을 돌렸다.
빨리 치려다 보면 어깨가 열리고 배트가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영역은 그만큼 좁아지기 마련, 존을 넓게 관통한다는 느낌으로 스윙을 돌렸다.
따아악 ~ !!
“밀어낸 타구가!! 센터 쪽 멀리!! 중견수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인영 선수의 동점 솔로 홈런!!!! 성운 라이온즈가 기어이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최근 5경기에서 4홈런이네요. 제가 1회부터 승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 역시 도망가는 게 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홈런 공동 1위 아닌가요? 첫 10경기에서 홈런이 없었는데, 기세가 정말 무섭네요.”
드디어 터진 올 시즌 홈경기 1호 홈런, 그것도 동점 홈런이라 팬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인영은 헬멧을 푹 눌러쓰며 1루로 향할 뿐, 홈에서 김상규 선수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전 감독님 기록 넘어설 겁니다. 그편이 감독님한테도 좋지 않겠어요?’
한편, 한승규 감독은 당당히 입성하는 루키를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엔 입만 산 건방진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무서울 정도, 며칠 전부터 센터 쪽으로 넘어가는 대형홈런만 쳐내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4할을 넘어선 타율까지, 뚜렷한 약점이 없는 녀석이라 40홈런 돌파가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