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4화 (24/309)

24화. 전설의 오꽝 (3)

‘결국 왔군. 나의 패배인가.’

한승규 감독은 전지훈련장까지 날아온 단장을 경계했다.

사실 한국야구는 단장이 현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단장이라고 해봤자 모기업에서 파견된 낙하산이 많고 이력만 채운 채 모기업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 단장의 역할은 마케팅에 집중되고 그 외는 거의 감독에게 모든 권한이 돌아간다.

하지만 성운 라이온즈는 사정이 조금 다른 편, 일단 모기업인 성운 그룹 회장 김태성이 야구광으로 유명했다.

“회장님 오시니까 오늘은 박한진 내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김태성이 떳다하는 날엔 선발 로테이션이고 뭐고 없었다.

이기기 위해 에이스를 등판시켰고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단장이 구단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승규도 선수 시절 그런 장면을 자주 봤기 때문에 성운 라이온즈는 단장이 팀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입 다물고 프런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감독이 되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팀을 꾸려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대들었다고 미야자키로 내려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단장, 허수아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코칭 스태프 모두 단장이 임명한 사람들, 내 편을 들어 줄 사람이라고 믿었던 신명철까지 대표 팀으로 가버렸으니, 손발이 잘린 신세나 마찬가지다.

설상가상 선수단 장악까지 실패,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단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선수단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올해는 뭔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경기는 선수들이 하는 거니까 선수들 사기가 제일 중요하죠.”

차명석 단장은 파워게임에 쐐기를 박았다.

게임은 선수가 하는 거라니, 코칭 스태프는 각자의 자리에서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라는 뜻, 허수아비 임무를 부여받은 한승규는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차명석 단장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작년 시즌, 이인영의 성장 방향을 두고 내게 조언을 구한 사람이 누구인가. 거기다 박한우가 물러나자 마자 차기 감독으로 추대해 줬으니 올 시즌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냉정했다.

“다들 고생 좀 하게, 올해는 포스트 시즌 나가야지.”

“네”

위계질서를 확립한 차명석 단장은 선수들을 격려했다.

사실상 구단의 실세, 선수들은 알아서 기었고 이인영도 그 앞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올해는 자네 많이 바빠질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자네 이름을 딴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거든”

차명석 단장은 올해부터 공격적인 마케팅을 추진했다.

짧았지만 작년 3달 동안 이인영이 보여준 활약은 집 나간 팬들을 구장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선수를 마케팅에 활용하지 않는 건 낭비, 그래서 이인영의 생일인 6월 12일을 이인영의 날로 지정했다.

팬 사인회와 야구용품 경매, 유니폼 제공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일 예정, 팀에 별 도움이 못 됐다며 스스로 연봉을 동결한 선수 아닌가.

다른 팀 팬들은 정신이 나갔다며 조롱하고 있지만 대구 팬들이 보내는 지지는 절대적, 팀의 실세인 단장의 총애를 얻으면서 팀 내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확고해졌다.

‘나도 그런 건 없었는데’

한승규 감독은 이 조치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선수시절에 30, 40 홈런을 뻥뻥 쳐도 구단은 그 정도 대우를 해 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막 프로 맛 좀 본 녀석이 자기 이름을 딴 행사의 주인공이 되다니, 단장은 물론 저 녀석의 눈치도 봐야 하는 건가.

내가 왜 감독이 됐을까 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어쨌든 위계질서를 바로 세운 차명석 단장은 다시 한국으로 출국, 단장의 양아들로 취임한 이인영은 동료 선수들의 축하를 받았다.

“야, 오늘은 클럽 가서 기분 좀 풀자.”

“그래, 가서 홈런도 좀 쳐 봐야지.”

일부 선수들은 은밀한 일탈을 제시, 슈퍼루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홈런은 경기장에서 쳐야지 클럽 가서 쳐서 뭐해요.”

“야, 클럽 간다고 무슨 죄 짓는 거 아니야. 사람이 놀 줄도 알아야지.”

그날 밤, 이인영은 마지 못 해 동료들을 따라나섰다.

내 이름을 딴 기념일이 생겼다고 가는 클럽, 그리고 집단생활을 하려면 동료들 기분에 맞춰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알죠?”

“그럼요. 어서 들어가십쇼.”

클럽 입구를 관리하는 남자들은 또렷한 한국말로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을 맞이했다. 도대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기에 VIP 대접인지, 솔직히 조금 놀랐지만 애송이 취급당하는 게 싫었는지 이인영은 말없이 동료들 뒤를 따라갔다.

뭔가 화려하긴 한데 정신이 없는 분위기, 유치원에 갓 입학한 아이처럼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조금 죽치고 앉아 있자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2년 전, 팬 미팅 행사에서 치어리더과 함께 열정을 불태웠던 그 음악, 아니나 다를까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슈퍼 루키를 무대 한 가운데로 내밀었다.

그때처럼 분위기 좀 띄워보라는 건데, 이인영은 큰 키와 유연한 몸짓으로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날 수 천 명 앞에서 재롱을 떨었는데 이 정도야 우스운 일, 단숨에 스테이지를 장악해버렸다.

“돈 터치!! 돈 터치!!”

조금 있자 몇 몇 여자들이 스킨십을 시도해 왔다.

깜짝 놀란 슈퍼루키 머리를 재킷으로 감싸고 현장에서 도주, 별로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은 아닌데 이성과의 신체적 접촉은 아직 어색했다.

그런 모습도 귀여웠는지 끈질기게 따라 붙는 추격자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술 한 병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인이에요?”

“네, 한국 말 잘하시네요?”

“쪼끔 할 줄 알아요.”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미야자키 현은 길거리를 거닐다보면 한국어로 된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도시, 거리야 그렇다 쳐도 한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놀라웠다.

“직업이 뭐예요?”

“야구 선수요”

“정말이요?!!”

그렇게 이어진 대화, 여자들은 서로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한국에서 야구선수는 여자들에게 큰 인기가 없는데 이곳은 아닌 모양,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갔는지 이인영은 구단 홍보 대사를 자처했다.

“혹시 한국으로 여행도 다니세요?”

“네, 엄마랑 많이 갔어요.”

“그럼 6월 12일에 대구 라이온즈 파크로 오세요. 그날 제 이름을 딴 행사 있거든요. 예약도 받으니까 괜찮으시면 제가 해드릴게요.”

이인영은 직접 예약까지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외국인의 예약을 받는 건 구단도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일, 절차에 약간 문제가 생기자 일단 자기 이름으로 예약을 했다.

“일단 제 이름으로 했어요. 나중에 구단 사무실에 전화해서 정식으로 예약해 드릴게요.”

“와아아 ~ 친절하셔라.”

여자들은 그날 꼭 간다며 약속까지 했다.

클럽에서도 구단 홍보에 열을 올리다니, 이 소식을 접한 차명석 단장은 그런 이유라면 언제든지 클럽에 가도 좋다며 쿨 하게 넘어갔다.

[지금이라도 연봉 올려줘라.]

-> 5000만 원 줘도 안 아까울 듯

-> 성운 라이온즈는 계 탔네. 이런 선수가 있으면 부러울 거 없을 듯

대구 팬들도 이인영의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구단에서 3300만원으로 올려준다고 했을 때 그냥 받을 것이지, 왜 동결을 했을까. 600만원 인상도 적은 편, 5천만 원으로 인상해 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인영은 연봉 동결은 내가 정한 일이라며 선을 그었고, 그 문제는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을 밝혔다.

‘나한테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고’

17개면 적게 친 건 아니다.

하지만 시즌을 앞두고 아버지 앞에서 30개 이상은 치겠다고 자신했는데 결과는 부상이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창피했다.

30개 이상 치고 연봉인상 받으면 될 거 아닌가. 목표는 역대 KBO 최다 인상 폭인 500%, 내년에 1억 3천 찍고, 다음 시즌에 40홈런 넘겨 3억 원을 넘기겠다는 야욕을 불태웠다.

‘지금대로 하면 되겠어.’

이성한 타격코치는 훈련에 열중하는 이인영을 유심히 살폈다.

홈런 타자는 기술로 공을 멀리 보내는 선수와 타고난 힘으로 비거리를 내는 타입으로 나뉜다.

굳이 따지자면 이인영은 후자에 가까운 편, 정확히 맞추기만 해도 타구가 쭉 쭉 뻗어나갈 정도로 파워가 좋다.

공을 들어 올리는 기술을 좀 더 가다듬어도 좋겠지만 컨택 능력을 희생할 수도 있는 시도, 이인영은 작년에 타율 0.342, 홈런 17개를 기록할 정도로 컨택과 파워를 겸비한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밀어 친 홈런이 3개, 현역 프로야구 선수 중, 밀어치기로 홈런을 양산할 수 있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스윗 스팟에 맞지 않아도 강한 손목 힘으로 넘겨버리는 괴물 같은 녀석, 이런 타고난 천재에겐 딱히 가르칠 게 없었다.

따아악 ~ !!

그렇게 계속된 프리 배팅, 타이밍이 약간 어긋났지만 이번에도 타구는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갔다.

체중이 줄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배팅 파워는 여전, 이인영은 이후에도 밀어치는 훈련을 반복했다.

컨디션이 좋을 땐 자연스럽게 밀어 치면서 타구를 센터 쪽으로 보내는 편, 박한우 전(前) 감독도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해서 타구 질을 높였다.

좋은 것은 취하는 게 프로의 세계, 센터 쪽으로 타구를 보내는 훈련은 계속됐다.

‘이거 위험한데…’

훈련 현장에 나타난 기자들, 그 사이에 섞인 일본인 기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020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의 우승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한국,

고교 시절, 명문으로 이름난 니시테츠 구단의 스카웃을 받은 데다 작년에 펜스가 무너지면서 어이없는 부상을 당한 탓에, 이인영은 일본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진짜 유명한 건 무지막지한 파워와 히팅 능력, NPB가 한국 야구보다 수준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밀어 쳐서 홈런을 만들 수 있는 파워를 갖춘 선수는 거의 없다.

굳이 비교할 선수가 있다면 요코하마 웨일스의 3번 타자 에릭 바메스,바메스는 작년 시즌 타율 0.306, 홈런 49개를 기록하며 일본 무대를 평정했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풀 스윙과 가볍게 밀어서 넘기는 파워가 일품, 저 어린 선수를 NPB를 대표하는 거포와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히팅 스타일만 놓고 보면 바메스와 다를 게 없었다.

따아악 ~ !!!!

“오 ··· ”

다시 한 번 높게 날아가는 포물선, 담장 위를 지난 공은 그물망까지 넘겨버렸다. 그냥 말이 안 나오는 파워, 결과에 만족했는지 이인영은 배트를 내려놨다.

“너 오늘도 클럽 가냐?”

“코치님도 흥미 있으세요?”

“적당히 다녀 인마, 노는데 맛 들리면 야구 못해.”

“비시즌 기간이니까 가는 거죠. 시즌 중엔 못 가니까 지금이라도 열심히 다녀야죠.”

이성한 코치는 여유가 넘치는 루키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늦게 배운 놈이 무섭다고 요즘 틈만 나면 클럽을 드나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시즌 중엔 안 다닐 모양, 프로의 자세는 갖춘 놈이라 별 다른 참견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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