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비운의 2인자 (19)
[지불 완료]
선화 이글스와의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sns에 벌금 지불 영수증을 올렸다.
지금이야 선수가 벌금을 내는 게 당연하지만, 예전엔 구단에서 벌금을 대신 내주기도 했다.
벌금을 맞은 이유가 빈볼을 맞은 팀원을 위한 보복이라면 거의 확실, 벌금대리 납부는 물론 격려금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안 되는 일, 벌금을 내야 할 일이 생기면 통장거래 내역을 제출하고 벌금을 반납했다는 영주증까지 받아야 모든 절차가 끝난다.
생애 첫 벌금납부, 이것도 기념이지 않겠나.
뭐가 자랑이라고 벌금납부 영수증을 sns에 올린 건지, 팬들은 재미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이게 뭐지?”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통장을 정리하던 이인영의 어머니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들의 올시즌 연봉은 2700만 원, 그런데 이번 달에만 무려 700만원이 들어온 걸 확인했다.
“차명석? 어디서 들어봤는데”
심지어 돈이 들어온 라인은 두 곳, 한쪽은 성운 라이온즈가 맞는데 다른 쪽의 이름은 뭔가 귀에 익었다.
아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통장내역을 확인하자마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700만 원이 들어왔다고요?”
[그래, 차명석이라는 사람이 450만원 넣었더라.]
성운 라이온즈 단장 이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이인영은 바로 구단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단장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주는 돈이니까 받게]
차명석 단장은 그냥 넣어두라며 뒷주머니를 슬쩍 찔렀다.
그러나 메리트 지급은 kbo 위원회에서 철저히 단속하는 행위, 심지어 명절 날에 선수틀에게 돌리는 선물이나 보너스도 모두 없어졌다.
다만 ks 우승이나 대기록 달성을 기념하는 성과금은 인정, 작년 시즌 통산 200홈런을 달성한 UA 베어스의 주포 김재규는 2천 만 원 상당의 격려금을 받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인영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 격려금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월급에서 주는 거네. 그러니까 괜찮아.]
"아니요. 이런 푼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루키의 힘 있는 목소리는 차명석 단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450만원이 푼돈이라니, 다른 선수는 이보다 더 적은 돈에도 고개를 넙죽 숙인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것도 부족하다는 건가. 도대체 얼마를 원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돈이라면 연봉협상에서 정정당당하게 받아낼 겁니다. 이 정도 푼돈 때문에 논란에 얽매이면 저도 구단도 손해죠. 아닙니까?"
잠시 말이 없던 차명석 단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너스 몇 번 주면서 길들이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봉협상 때 두고 보자는 거 아닌가.
하긴, 지금 기세라면 대대적인 연봉인상은 불가피, 돈은 실력으로 뜯어내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나. 이인영은 450만원을 모두 차명석 단장 계좌로 되돌렸다.
‘원래 이런 세계였나.’
이번 사건으로 슈퍼루키는 구시대의 악습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야박하게 굴면 정이 없다고 하는 게 한국의 문화 아닌가. 문제는 정이라는 탈을 쓴 악행이 친절로 둔갑하는 것, 이 문제는 이대로 넘어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모두에게 알려야 하나.
공개하면 잘 나가는 팀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건 사실, 눈을 질끈 감았다.
착한 척 해봤자 나도 그들과 같은 배를 탄 운명, 눈을 감기로 한 이상 나도 진흙 속을 나뒹구는 신세 아닌가, 고결함 따위는 집어던졌다.
따악 ~ !!
“투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이인영 선수는 오늘도 안타를 추가하는군요. 27경기 연속안타 행진입니다.”
“박한우 감독의 33경기 연속 안타 기록에 조금 더 가까워지네요. 데뷔 시즌부터 역사를 새길 수도 있겠습니다.”
독기를 품은 슈퍼루키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홈런 페이스는 6월 들어 살짝 떨어졌지만 꾸준히 터져나오는 안타, 박한우 감독은 만족스러운 활약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여름을 넘겨야 되는데’
하지만 걱정되는 점도 있었다.
대구는 여름이 되면 지옥도가 펼쳐지는 곳,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도 힘든데 대전에서 평생을 보낸 저 녀석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실제로 7 - 8월에 들어 페이스가 꺾이는 선수가 태반, 그 고비만 넘기면 신인 자격으로 역대급 성적을 찍을 거라 믿었다.
“홈!!런!! 이인 ~ 영!!”
“이인영!! 이인영!!”
이어지는 두 번째 타석, 홈 팬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안타도 좋지만 역시 시원한 한방이 기대되는 선수, 시즌 12호 홈런이 나온 게 벌써 열흘 전이다.
안타가 계속 나오고 있으니 조만간 한방 터지겠지, 자신 있는 스윙은 기대감을 한껏 드높였다.
따아악 ~ !!
“걷어 올린 타구가 높게!! 우익수가 담장 앞에서!! 날아오르지만 잡지 못합니다!! 그 사이 타자 주자는 1루를 돌아 2루!! 2루에서 3루까지!! 3루까지 들어!! 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 3루타!! 성운 라이온즈가 3대 2로 다시 앞서 나갑니다!!”
“지금은 굉장히 파이팅 넘치는 주루 플레이를 보여줬네요. 벌써부터 뜨거워질 필요는 없습니다.”
3루에 몸을 날린 이인영은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홈런은 아니지만 팬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에 감격, 이어지는 느린 땅볼로 추가점이 나오면서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다들 올해도 어려울 거라 예상했던 성운 라이온즈의 2019 시즌, 하지만 지금까지 54경기에서 30승을 거두며 리그 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그 3위 UA 베어스와의 격차는 겨우 2경기, 포스트 시즌 직행도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라 선수들은 ‘올해는 반드시’라는 팬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냈다.
‘사인 받아가야 되는데 ··· 기회가 오려나.’
한편, 성운 라이온즈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GM 가디언즈는 침통한 분위기에 잠겼다.
5월 한 때 리그 4위까지 올라갔지만 기세가 꺾이면서 지금은 6위로 추락, 오늘도 지면 7위까지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이재우 감독은 팀 성적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 그 곁에 앉은 유재덕 코치는 딴 생각에 사로잡혔다.
딸에게 이인영 선수 사인 좀 받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기회가 올까. 가뜩이나 팀 분위기도 안 좋은데 상대팀 선수한테 사인 받아내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그나저나 인기가 대단하네.’
유재덕 코치는 3번 째 타석을 맞이하는 슈퍼 루키를 유심히 살폈다.
떴다 하면 우뢰처럼 쏟아지는 환호, 데뷔 시즌에 이렇게 팬들의 마음을 훔쳐낸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자세히 보면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얼굴도 제법 귀여움이 붙어 있는 편, 뭣보다 야구를 잘 한다.
팬 입장에서 야구 잘하는 야구 선수만큼 매력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남의 집 선수인데 괜히 탐이 났다.
따아악 ~ !!
“자!! 이번에는!! 이번에는!! ··· 확실히 담장을 넘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11경기 만에 시즌 13호 홈런을 추가합니다!! 오늘 3타수 3안타!! 사이클링 히트까지 앞으로 2루타 하나입니다!!”
“괴물은 괴물이네요. 컨택 능력이 워낙 좋다보니 기복도 거의 없고, 성운 라이온즈는 향후 10년을 받칠 기둥을 제대로 골랐네요.”
홈을 밟은 이인영은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이 순간만큼은 아이돌 부럽지 않은 대우, 동료 선수들도 잘 나가는 후배 몸에 질투 섞인 손찌검을 날렸다.
이제 남은 건 대기록 달성 뿐, KBO 역사상 사이클링 히트는 딱 25번 나왔다. 성운 라이온즈에선 2014년 이후 5년 넘게 맥이 끊긴 기록, 그렇게 이인영은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4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우우 ~ 우 ~ ”
하지만 GM 가디언즈 배터리는 좋은 볼을 던져주지 않았다.
오늘 홈런 포함 3안타를 날린 선수에게 정면 승부를 걸 바보가 몇 명이나 있을까. 거기다 스코어는 아직 6대 3, 경기를 포기할 상황이 아니라 볼넷으로 걸렀다.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택한 GM 가디언즈는 8회 초 반격에서 추격에 성공, 스코어가 6대 4로 좁혀지자 그라운드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따악 ~ !!
“앗!!”
2사 주자 1, 3루에서 이대홍이 좌중간을 가르는 안타를 뽑아냈다.
동점은 물론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황, 성운 라이온즈의 유격수 홍현구는 중개 플레이를 위해 제자리에서 송구를 기다렸다.
‘뭐라고?!!’
이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펜스 근처에서 타구를 잡은 이인영은 유격수의 손을 거치지 않고 2루로 다이렉트 송구, 1루 주자가 3루를 지나 홈으로 내달리는 사이, 2루로 돌진하던 이대홍은 태그아웃 판정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1루 주자가 홈을 밟기 전에 벌어진 상황, 아웃이면 6대 5로 이닝 종료라 이재우 감독은 비디오 판독을 요구했다.
‘저기서 송구가 가능하다고?’
비디오 판독이 진행되는 동안, 이대홍은 곁눈질로 외야를 훑었다.
누가 봐도 중계플레이를 했어야 하는 상황인데 다이렉트 송구를 할 줄이야. 거기다 그게 2루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왔다는 게 더 놀라왔다.
적이지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플레이, 아웃 판정에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결국 이날 경기는 성운 라이온즈의 6대 5 승리로 종료, 코앞에서 승리를 놓친 GM 가디언즈 선수단은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빠, 사인 받았어요?]
[눈치가 있지 그걸 어떻게 받냐?]
호텔로 돌아온 유재덕 코치는 딸의 독촉 문자에 인상을 구겼다.
팀이 졌는데 사인은 무슨 사인인가, 뭣보다 이인영은 팬 서비스가 확실한 선수, 그렇게 받고 싶으면 나중에 성운 라이온즈가 원정경기 갔을 때 받아내라며 철벽을 쳤다.
삐쳤는지 답장도 안 해주는 딸, 마음이 약한 딸 바보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남들의 시선을 피해 적진 침입을 시도했다.
“사인이라고요?”
“네, 여기에 부탁드린다고 ··· ”
이인영은 홍보부 직원이 내민 수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기록 달성을 앞둔 선수를 볼넷으로 거른 GM 가디언즈, 그 팀 코치의 사인 요청을 내가 왜 들어줘야 하나? 바로 퇴짜를 놔버렸다.
“안 된다고 했다고요?”
“네, 무슨 염치로 사인을 요구 하냐고 ··· 그러네요.”
퇴짜를 맞은 유재덕 코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인을 잘 해준다고 소문이 난 선순데 어제 볼넷은 역시 기분이 상했던 모양, 본인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는지 쉽게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