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비운의 2인자 (18)
“저희는 그런 적 없습니다.”
한진 타이거스의 조상우 감독은 빈볼 따윈 지시한 적 없다며 항의했다.
하지만 박한우 감독은 선수와 코치의 증언을 토대로 고의성을 주장, 이런 배경을 알 리 없는 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경기가 재개되길 기다렸다.
“그럼 어디 지켜봅시다. 빈볼이 나오나 안 나오나.”
박한우 감독은 한 마디 툭 던지고 물러났다.
이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설마 빈볼 던지겠나, 두고 보자는 말을 넘기고 더그아웃으로 철수, 몸에 맞는 볼을 고집하던 이인영도 타석으로 돌아와 자세를 잡았다.
‘몸 쪽 승부는 다했네.’
마운드를 지키는 조헌영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 분위기에서 몸쪽 승부는 논란을 가중시킬 뿐,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승부를 하면서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비열한 자식, 마마보이냐? 바로 일러바치네?’
이 상황에서도 진상우는 입방아를 찧었다.
도대체 누가 누굴 비열하다고 욕하는 건지, 한 마디 받아칠까 했지만 쓰레기와 입을 섞는 게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견제구 하나 줘 봐.’
약이 오른 진상우는 눈빛으로 견제구를 요구했다.
태그를 하는 척 하면서 한 대 때리는 작전, 꼭 저렇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조헌영은 견제구를 던졌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필요 이상의 강한 태그, 이인영은 일단 잠자코 1루에서 멀어졌다.
또 견제구를 던지면 그 땐 몸통박치기를 해버릴 예정, 조용히 넘어가나 싶던 분위기는 여기서 크게 흔들렸다.
“아 ··· 이게 뭔가요. 진상우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양 팀 선수 굉장히 흥분한 것 같은데요.”
“말려야 합니다. 보기좋은 광경이 아니에요.”
쓰러진 진상우는 바로 일어나 주먹을 날렸다.
가볍게 피한 슈퍼루키는 신체적 우위를 앞세워 일방적인 힘싸움을 펼쳤고, 마치 곰이 앞발로 먹잇감을 후려치듯 결정타를 날렸다.
뒤통수를 붙잡고 쓰러지는 진상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있던 1루 코치가 이인영의 팔을 붙잡았다.
“참아!! 참아!! 안 돼!! 안 돼!!”
평소 장난기 넘치고 순한 모습만 보여줬던 녀석이라 다들 놀라 기절할 지경,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박한우 감독도 흥분한 양아들을 붙잡았다.
양 선수단이 서로 장막을 치면서 일은 더 커지지 않았지만, 퇴장조치를 갇은 이인영은 코치의 다독임을 받으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 했다.
“참지. 왜 그랬냐?”
“저 인간이 태그 하는 척하면서 제 거길 쳤어요.”
설명을 들은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경악했다.
설마 했는데 그런 짓을 했을 줄이야. 그 상황에서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왜 참지 못했냐는 여론은 동정과 격려로 바뀌었다.
“야 괜찮아, 저 인간은 저렇게 나가야 돼."
"X 밟았다고 생각해라. 프로야구 판에 저런 인간만 있는 건 아니야."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후배를 말렸다.
진상우가 쓰레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더 웃긴 건 시비도 상대를 가려서 한다는 것, 좀 강해보이는 선수 앞에선 찍 소리도 못 한다.
상대가 루키라고 건드려 본 것 같은데 힘 싸움에서 완전히 밀렸으니 본인만 망신, 한 번 강하게 나갈 필요는 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인영, 심리전이었나?]
다음 날, 이 사건을 두고 대구와 광주 사이엔 미묘한 기운이 흘렀다.
한진 타이거스를 응원하는 광주 팬들은 루키 주제에 사기를 친다며 폭발, 반면 대구 팬들은 놀랄 일도 아니라며 공세를 펼쳤다.
[한진 타이거스, 빈볼 시비가 한 두 번이냐?]
-> 이틀 동안 NA 자이언츠 주축 선수 두 명 아웃시킨 적도 있지, 너희들의 더러운 과거를 생각해라.
-> 용의자가 진상우라는 증언이 더 믿음이 간다. 이 xx 동업자 정신 없는 거 모르는 사람 있냐?
좀처럼 끝나지 않는 논란은 kbo 상벌위원회의 결정에 다시 한 번 끓어 올랐다.
이유야 어쨌든 몸통 박치기를 시전한 이인영의 행동이 벤클로 이어진 건 사실, 상벌위원회는 벌금 100만 원과 사회봉사 24시간을 부과 했다.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은 덤, 진상우도 처벌을 받았지만 이인영의 절반 수준으로 끝났다.
"항의 해야지 뭐하는 겁니까?"
박한우 감독은 소극적인 구단 대응에 격분했다.
우리 팀 선수가 시비에 휘말렸으면 적극 변호하고 항의를 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차명석 단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 싸움을 부추겨 어쩌겠다는 건가. 서로 화해를 하도록 주선해야지.]
"화해라니요. 사과를 해도 저쪽에서 하는 게 맞는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유야 어쨌든 한국 문화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걸 달갑게 보지 않는다.
거기다 야구는 선후배 문화가 확실한 곳, 후배가 선배의 뒤통수를 후려쳤는데 싸움을 부추겨야 되겠나.
하지만 박한우 감독은 진상우가 글러브로 이인영의 사타구니를 치는 장면을 근거로 더 강력한 대책을 요구했다.
"선수가 그런 짓을 당했는데 먼저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겁니까? 저는 절대 동의 못 합니다."
박한우 감독은 절대 화해는 안 된다며 버텼고 성과는 확실했다. 중계카메라에 명백히 잡힌 폭행장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한진 타이거스는 먼저 화해를 주선했다.
윗사람이 고개를 숙였으니 너희도 알아서 고개를 숙일 거란 기대, 하지만 박한우 감독은 한진 타이거스 관계자가 대기실에 접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성운 라이온즈 팀 관계자가 이제 그만 회해하라고 권고했지만 요지부동, 아직 장가도 못 간 놈의 거길 치는 경우는 뭔가.
싸우자고 시비를 걸어놓고 화해하자는 게 웃긴 일, 하지만 이인영은 화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괜찮겠냐?”
“선수 생활해야 되니까 화해해야죠.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니까요.”
좋든 싫든 앞으로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이, 그때마다 계속 어색한 분위기 연출할 건가.
속이 뒤집어져도 가끔은 자존심을 숙여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렇게 기자들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화해가 이뤄졌다.
“장가가서 자식 못 낳으면 그땐 손해배상 청구할 겁니다. 각오하세요.”
이인영은 장난 반, 진담 반섞인 농담을 던졌다.
괜히 건드렸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진상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이렇게 사건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 * *
‘원래 저런 녀석이었나.’
박한우 감독은 출장정지 처분을 마치고 돌아온 양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라운드는 사내들이 경쟁을 벌이는 무대, 경기를 하다 보면 분위기가 과격해지거나 주먹다짐이 오갈 수 있다.
이인영의 첫 인상은 큰 덩치에 순한 얼굴, 솔직히 첫 인상만 보면 주먹다짐을 할 선수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을 뿐, 콜라 광고와 귀여운 이미지에 가려진 곰이 솥뚜껑만한 앞발로 먹잇감을 반 토막 내지 않는가. 이인영도 그와 비슷한 경우, 한 대 쳤는데 사람이 1루에서 퉁 ~ 하고 튕겨져 나갔다.
진상우가 부상 없이 일어난 게 기적처럼 보일 정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건 괴력뿐만이 아니다.
일부 선수들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지만 끝내 그 재능을 펴지 못하고 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뭘까?
멘탈적인 문제도 그 중 하나, 내가 그날 왜 못했는지 연구하고 화도 내야 야구를 잘 할 수 있다.
잘 해도 허허 ~ 못 해도 허허 ~ 하는 선수는 절대 성장하지 못하는 법, 박한우 감독은 선수시절부터 그런 선수를 수도 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런 선수들과 분명 달랐다.
전지훈련 때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녀석, 출장정지 처분을 마치고 돌아온 루키의 눈빛은 평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난 벤치 클리어링이 잠들어 있던 야성을 깨운 걸까, 그게 아니면 이 무대에선 거칠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겠지. 어쨌든 감독 입장에선 긍정적인 신호라 참견은 하지 않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출장 정지 처분을 마치고 복귀합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357, 홈런 11개, 30타점, 타율 - 홈런 - 타점 - 득점 모두 팀 내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최근 중심타선으로 기용되고 있는데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하위 타선을 치던 선수가 상위 타선으로 올라오면서 타격 리듬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선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1회 초, 원정 팀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초구부터 거친 스윙을 선보였다.
걸리면 용서가 없는 파워, 파울로 끝났지만 선화 이글스 외야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악 ~ !!
“아 ~ 씨!!”
2구도 걷어 올렸지만 높게 뜬 공, 타구를 확인한 슈퍼 루키는 배트를 거칠게 집어던졌다.
고작 이틀 쉬웠다고 감을 잃은 건가. 아쉬운 마음에 허공에 발길질까지 작렬, 선화 이글스의 선발 장성호는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루키 주제에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가. 그렇다고 한소리 하기엔 애매한 녀석, 진상우가 어떻게 험한 꼴을 당했는지 보지 않았나.
일단 넘어갔고 경기 내에서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너무 버릇이 없는 것 같다.]
-> 야구 잘한다고 이제 막나가는 듯
-> 성운 라이온즈는 유망주 중심이라 이런 녀석 바로 잡아줄 선배가 없다.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나중에 무슨 문제 일으킬 듯
하지만 선화 이글스 팬들은 이 사건을 물고 늘어졌다.
경기 중에 배트를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다니, 버릇이 없다며 여론전을 펼쳤고 성운 라이온즈 팬들은 프로답고 파이팅 넘치는데 왜 시비를 거냐며 방어진을 쳤다.
[그렇게 예의 따질 거면 배트 플립도 하지 말아야지]
-> 운동선수가 무슨 선비냐? 저 정도 투지와 의지도 없으면 프로라고 할 수도 없는데, 이것들이 괜히 시비 걸고 있네.
-> 배가 아픈 거지. 정상대로라면 선화 이글스에 지명 됐을 선수잖아. 선화 이글스에 지명됐어도 이런 논리 펼쳤을까?
-> 괜히 잘 나가는 선수 흔들 생각하지 마라. 지난 사건도 진상우가 잘못한 거다.
야구는 이상하게 예의 논란이 많은 스포츠,
선발 투수가 삼진 잡고 포효하는 건 괜찮고, 헛스윙 한 타자가 아쉬움에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건가.
가만히 들어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논리,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럴 듯한 논리를 끌어와 여론전을 펼친다.
이번 사건도 그런 경우, 이인영도 자잘한 여론에 신경 쓰지 않고 야구에만 집중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