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비운의 2인자 (16)
[복권 좀 사와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st 위너스와의 경기에서 멀티 홈런을 날린 기분 좋은 하루, 호텔로 돌아온 이인영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취미는 소액으로 사는 즉석복권, 꽝이 절반이 넘는데 그런 걸 왜 사실까. 담패 태우실 돈으로 사는 거라 그동안 말리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돈 낭비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너 오늘 멀티 홈런 쳤잖아. 기운이 좋은 녀석이 사와야지.]
“에이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쨌든 부탁한다.]
이쪽 입장은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아버지, 착한 아들은 근처 편의점에서 복권 5000원 어치를 샀다.
‘사니까 괜히 긁고 싶네.’
평생 복권은 사보지도 않았건만, 반짝거리는 표면을 보니 긁어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매일 꽝만 나오는 아버지보다 오늘 홈런을 친 내 손을 빌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부탁해서 산 것,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호텔로 돌아왔다.
[긁어라 긁어라 어서 긁어라]
잠자리에 들었지만 복권이 신경 쓰여 환청까지 들리는 밤, 누웠다 고뇌를 거듭하던 루키는 기어이 동전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야!!’
결과를 확인한 슈퍼루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5장 전부 꽝,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뒷면을 보니 천 원짜리가 걸릴 확률은 대략 30%, 5장이나 샀는데 다 꽝이라고? 이딴 쓰레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이딴 쓰레기 다시는 사나 봐라.’
제대로 빈정이 상한 이인영은 연신 불만을 중얼거렸다.
3 ~ 4타석을 거치면 안타가 하나는 나온다. 그게 하나 둘 쌓이면 연봉협상에서 구단과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지만 복권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당첨확률은 안타가 나올 확률보다 조금 높은데 투자 대비 효율성은 쓰레기, 차라리 타석에서 스윙 한 번 하는 게 더 생산적 아닌가.
이딴 종잇조각에 대박을 기대하느니 안타 하나 더 치고 연봉대박을 노리겠다며 이를 갈았다.
따악 ~ !!
“2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 이인영 선수가 첫 타석부터 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출발이 좋네요. 스윙에서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이어지는 2차전, 이인영은 첫 타석부터 매서운 스윙을 뽐냈다.
복권에 비하면 훨씬 생산적인 스윙, 5천 원을 날린 건 속이 쓰렸지만 나름대로 교훈을 얻지 않았나, 확신이 있다면 휘두르는 게 상책, 망설임 따윈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st 위너스의 감독 김성수는 그 활약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어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시비를 건 건 저 녀석의 집중력을 흩트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날카로워진 스윙, 이대로 두고 봐야 하나.
뭔가 자극을 줘야 하는데 살기등등한 박한우 감독의 눈치가 신경 쓰이는 게 사실, 현역시절 때도 아니다 싶으면 그냥 들이받았던 인간이다.
감싸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제 일은 홈 팬들도 쉴드 쳐주기 어려웠던 추태, 그냥 조용히 지켜봤다.
‘진짜 답이 없네.’
2대 0으로 앞서나가는 성운 라이온즈의 4회 초 반격, 요주의 인물의 등장에 st 위너스 배터리는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볼을 고르는 선수와 일단 치고 보는 선수 중, 어느 쪽이 더 성가실까.
이인영의 올 시즌 IsoD(순수출루율)는 0.37, 평균보다 월등히 떨어진다.
이인영과 완전히 대비되는 선수가 st 위너스의 2루수 배재성, 배재성은 통산 IsoD가 0.90이나 되는데 이 정도면 리그 상위 10% 안에 든다.
그렇다면 배재성이 이인영보다 선구안과 참을성이 좋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배재성이 많은 볼넷을 얻어내는 건 사실이지만 컨택률이 떨어지는 게 흠,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초구 스윙은 거의 하질 않는다.
당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는 승부, 이런 선수에게 참을성이 좋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볼넷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투수가 던지는 공의 절반 가까이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다.
뭣보다 자기가 칠 수 있는 공을 쳐 내는 것도 선구안의 일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현대 야구의 시각, 이 때문에 IsoD는 선구안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못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막 휘두르는 것 같지만 정확하게 때려내는 선수, 타석에서 소극적인 선수, 어느 쪽이 더 선구안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이인영은 칠 수 없는 볼을 걸러낼 뿐이지 선구안이나 참을성이 나쁜 게 아니다.
그 증거가 어제의 2홈런 5타점 경기, 오늘도 첫 타석부터 안타를 때려내지 않았나, 스트라이크를 던지기도 애매한 상대라 배터리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따악 ~ !!
“타격!! 파울입니다. 이번에도 초구 타격이네요.”
“지금은 바깥쪽 약간 높았는데 위험했어요. 조금 더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합니다.”
공을 넘겨받은 박재우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코스보다 조금 더 빼야 되는데 할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2구는 크게 벗어나면서 볼, 3구는 변화구를 던졌지만 바운드 볼이 되면서 수세에 몰렸다.
좌우제구도 안 되는데 높낮이 조절이 어떻게 가능하겠나.
존을 넓혀줘도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투수들이 넘쳐나는 게 KBO의 현실, 슈퍼 루키는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훤히 보이네.’
볼과 스트라이크의 경계가 너무 뚜렷한 투수, 이런 선수상대로 굳이 히팅 존을 넓힐 필요 없지 않은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2번 째 타석은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겨우 프로에서 22경기를 치르고 있는데 특별한 약점이 안 보이는 루키, 그 놀라운 적응력에 베테랑 해설위원 하성일은 혀를 내둘렀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탐을 낸 이유가 있었네요. 이인호 전(前) 해설위원이 아들 교육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들었는데,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물어볼 게 참 많았을 겁니다.”
“그럼 이쪽에서 움직여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중계석의 돌발 발언에 PD는 당황했다.
본인이 그만둔다고 나갔는데 다시 모셔올 수 있을까. 뭣보다 이인호는 아들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다며 해설위원 은퇴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이인영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뿐, 오늘 경기도 수훈선수로 뽑혀주길 은근 기대했다.
“날!!려!!버!!려!! 저!!끝!!까!!지!! 죽!!지!!않!!아!! 치!!고!!달!!려!! 이인 ~ 영!! 홈런!!!!”
경기는 흘러 6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인천까지 날아온 원정 팬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경기도 2타석 전부 출루한 슈퍼 루키, 이제는 중심 타선에서 두고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박한우 감독은 위대한 유산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며 고집을 부리는 중, 팀 성적이 안 나가는 것도 아니라 팬들은 묵묵히 응원전을 펼쳤다.
따악 ~ !
이번에도 초구 타격, 빗맞은 타구는 회전이 걸리면서 3루 쪽으로 느리게 굴러갔다. st 위너스의 3루수 박세경은 파울을 예상하고 지켜봤지만 얄궂게도 베이스라인 위에서 멈춰버린 공, 뒤늦게 타구를 낚아챘지만 발이 빠른 얌체는 1루를 접수했다.
정말 더럽게 안 죽는 자식, st 위너스 선수단의 혈압지수가 올라갈수록 슈퍼 루키의 입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예상보다 훨씬 잘 되고 있는 야구, 내친 김에 2루 도루를 노렸다.
‘자중해라’
박한우 감독은 3루 코치에게 도루는 안 된다는 사인을 내렸다.
일부 전문가들은 20 - 20 달성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는데, 지금 도루가 문제인가. 박한우 감독이 지난 3년 동안 도루를 중시한 건 사실이지만, 이인영은 무리해서 뛸 이유가 없는 재원이다.
주루 선상에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 부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뿌리부터 차단해버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인영은 지시를 받아들였다.
감독님이 날 아끼는 진심을 보여줬으니 나도 거기에 맞춰드려야겠지, 하지만 후속 타자가 삼진 아웃 당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현재 스코어는 3대 0, 방심할 수 없는 리드라 박한우 감독은 런 앤 히트를 지시했다.
주자를 보호하는 작전, 타석에 들어선 김재성은 바운드 볼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실례’
이인영은 바로 2루로 뛰었다. 타자가 스윙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뛸 타이밍, 바운드 볼이라 포수는 송구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이제 1아웃에 주자는 2루, 상대는 9번인데 1루를 채우고 1번 타자 홍현구를 상대해야 할까. st 위너스는 승부를 걸었지만 이걸 노리고 있던 김재성에게 적시타를 맞고 무너졌다.
오늘 경기까지 잡아내면 리그 단독 4위까지 노려볼 수 있는 분위기, 자신이 원하던 야구를 하게 된 박한우 감독은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로 양아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1차전에 이어 2차전도 성운 라이온즈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수훈선수로 선정된 이인영은 덤덤한 얼굴로 리포터의 질문을 받았다.
“오늘도 초구부터 적극적인 스윙을 보여주셨는데요. 배터리가 신중하게 나올 거라는 예상은 안 하셨나요?”
“신중하게 나와 봤자 볼이죠. 저는 칠 수 있는 공을 쳤을 뿐입니다.”
피해봤자 뭘 어쩌겠느냐는 자신감, 경기 전부터 할 말이 많았던 하성일 해설위원은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이인영 선수,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플레이 모든 것이 가르침의 결과입니다. 딱히 설명은 안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 궁금증만 더해가네요. 저희가 사실 경기 중에 이인호 해설위원의 복귀를 진지하게 논의했는데, 이인영 선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야 찬성이죠. 사실 집에만 계시는 게 조금 안쓰러웠거든요.”
계약금 7억 원 중 아파트를 사고도 제법 많은 돈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들이 번 돈을 펑펑 쓰고 다니진 않겠지. 그럼 일을 하면 될 거 아닌가.
해설위원이라고 중계석에서 아들 칭찬하면 안 된다는 법 있나?
혹시 복권을 사시는 이유가 궁한 용돈 때문은 아닌지, 이인영은 방송국 PD에게 아버지 취직 좀 시켜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