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비운의 2인자 (15)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화려한 데뷔전도 잠시, 슈퍼루키는 난관에 부딪쳤다.
발목이 잡힌 건 스트라이크 존, 맞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깊숙한 볼이 스트라이크 콜을 받는 일이 반복되자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가지 못했다.
나만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용의 타격코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건 kbo가 미쳐서 그렇다.”
“미쳤다고요?“
“그래, 딱히 네 잘못이 아니다.”
신용의 코치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놨다.
kbo의 스트라이크 존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 틀렸다.
한국 야구관계자들은 npb의 스트라이크 존이 넓다고 하는데, 현실은 야구의 본고장 메이저리그보다 좁다.
야구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바늘구멍만한 스트라이크 존이 그나마 넓어진 것, 하지만 kbo는 그딴 거 없다.
타고 투저를 해결한다며 스트라이크 존을 넓혀놨는데, 이것도 부족하다며 스트라이크 존을 더 넓혀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가 엿장수 마음대로 식의 스트라이크 존, 이런 저질 룰 속에서 선구안을 발휘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타자 입장에선 볼과 스트라이크를 골라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칠 수 있는 공과 그렇지 않은 공을 골라내는 게 현실적, 신용의 코치는 스트라이크 콜에 신경 쓰지 말고 너만의 히팅 존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뭐 ···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인영은 kbo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현장지도자들이 알고도 묵인할 정도라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뜻,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달라질 일인가. 현장의 사정에 맞춰나갈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타율, 뒷사정을 모르는 여론은 슈퍼루키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인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잘 하고 있어.’
나만의 히팅 범위를 정하는 게 그렇게 단기간에 될 일인가. 초구부터 건드리지 말고 공을 좀 보라는 방구석 전문가들의 참견은 무시하고 프로 리그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성운 라이온즈 5할 승률로 첫 달 넘겼다]
그 사이, 성운 라이온즈는 시즌 첫 20경기에서 10승 10패, 5할 승률을 유지하며 리그 5위 자리에 안착했다.
지난 3년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 하지만 그 이상을 노리는 프런트는 외부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다.
한국야구협회 기술위원을 맡고 있는 한승규도 그 중 하나, 차명석 단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전설과 얼굴을 마주했다.
이인영은 차기 한승규로 성장해야 할 재목, 지금 이대로 가도 괜찮은지에 대한 질문도 빼놓지 않았다.
“너무 성급한 게 문젭니다.”
“성급하다고요?“
“네. 이대로 가면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한승규는 이인영이 선구안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미 선수들은 왜 메이저리그에서 고전하는 걸까.지나치게 공격적인 타격이 문제, 볼넷보다 안타 홈런을 쳐야 스카우터의 눈에 들기 때문에 남미 선수들은 어지간하면 치려는 습관이 몸에 뱄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에도 선구안 개선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 한승규는 박한우 감독이 유망주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며 포문을 열었다.
"하위타선에서 마음껏 스윙을 하게 할 게 아니라 중심타선에 두고 볼을 고르는 연습을 시켜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두면 못 된 버릇이 몸에 배서 고치기 어려울 겁니다."
차명석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여론도 이인영이 너무 성급한 스윙을 하고 있다며 염려를 표하는 중, 거기다 프로야구의 전설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박한우 감독에게 다음 경기부터는 이인영을 3번에 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여기서 단장과 감독은 다시 충돌했다.
하위타선에서 프로에 적응하고 있는 선수를 중심에 배치하라니, 거기다 선수의 스윙스타일까지 간섭할 줄이야.
이인영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는 논리를 펼쳤다.
“한승규 위원의 생각은 다르던데”
“지금 한승규라고 하셨습니까?“
단장과 줄다리기를 하던 박한우 감독은 그제야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 눈치 챘다.
본인의 스타일로 슈퍼루키를 개조해보겠다는 건가?
이러다 이인영이 좋은 활약을 하면 내 조언 덕분이라며 홍보를 하고 다닐 인간, 그런 헛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적극적인 스윙이 나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장님은 그 친구가 볼 놀이나 하는 허수아비가 되길 바라는 겁니까?“
차명석 단장은 순간 울컥했다.
내가 귀도 얇고 야구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런 당신은 얼마나 잘나서 작년시즌 9위를 찍었냐며 맞불을 놨다.
“하 ~ ! 기가 막히는 군요. 지금 책임을 저에게 떠넘기는 겁니까?!! 지라고 지시를 내린 건 당신 아닙니까?!!“
작년 시즌, 성운 라이온즈는 드래프트에서 좋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알 게 모르 게 지는 경기를 거듭했다.좋게 말하면 전략이고 나쁘게 말하면 승부조작, 그렇게 해서 얻어낸 2순위로 이인영을 업어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너는 얼마나 잘났냐는 말을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단장이냐는 막말을 쏟아냈다.예전부터 감정의 골이 깊었지만, 이번 일로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두고 봐라. 죽어도 나 혼자는 안 죽는다.’
박한우 감독은 이후에도 이인영을 계속 7번에 기용했다.
내가 입만 뻥끗하면 차명석 단장도 도덕성에 흠집을 입을 신세, 보장된 계약기간 동안은 내가 감독 아닌가.어차피 꿀릴 것도 없고, 어디 네 마음대로 해보라며 보란듯이 반기를 들었다.
* * *
“자, 계속되는 성운 라이온즈의 2회 초 공격,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03, 홈런 1개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막전 임팩트에 비하면 최근 성적은 조금 아쉽죠. 그래도 꾸준히 출장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4월 10일, 성운 라이온즈는 인천에서 st 위너스와 시즌 첫 대결을 벌였다.
작년 시즌 리그 2위, 한국시리즈 준우승, 올 해도 리그 2워를 달리고 있는 강호, 하지만 슈퍼루키의 얼굴에 긴장감 따윈 없었다.
‘이 정도면 끌려나오겠지?’
st 위너스 배터리는 바깥쪽에 미끼를 쳤다.개막전에서 밀어치는 홈런을 쳤다고 달려드는 성급한 루키, 하지만 같은 수에 계속 걸려들 만큼 이인영은 만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아차 하는 사이 볼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최근 부진으로 잔뜩 약이 오른 배트는 약간 높게 들어오는 공을 놓치지 않았다.
따아악 ~ !!
“됐어!!“
맞는 순간, 박한우 감독은 홈런을 직감했다.
우측 담장을 넘어 2층 상단에 처박히는 대형홈런, 최강 워너스를 외치던 목소리를 잠재운 이인영은 선행주자 홍현구와 팔꿈치를 맞대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제야 조금씩 감히 잡히는 나만의 히팅 존, 그 안으로 들어오면 용서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봤냐 한승규, 너와는 차원이 다른 선수라고!!’
박한우 감독도 마음속으로 환호를 연발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선수 지도에 훈수를 두나, 마음에 안 드는 건 단장도 마찬가지, 이 한방이 그놈들 머리통에 박히는 이미지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절로 들썩였다.
이인영의 선제 투런 홈런으로 기세를 탄 성운 라이온즈는 순조롭게 경기를 지배, 4회 초에 점수 차를 3대 0으로 벌렸다.
그리고 투 아웃 1-2루에서 또 이인영, 위기감을 느킨 st 위너스의 포수 서범윤은 타자 흔들기에 나섰다.
“동정도 못 뗀 자식이 힘 좀 쓰는데, 하긴, 여기서라도 힘써야지 네가 어쩌겠냐.”
저질 토크로 포문을 열었지만 반응은 제로, 그래도 서범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빠른 볼 하나 더 줄 테니까. 한 번 더 쳐봐라.”
예고대로 사인은 빠른 볼, 생각이 많은 선수는 변화구를 생각하다 빠른 볼에 타이밍을 뺏기는 경우가 많다.그걸 노린 흔들기, 바로 답이 날아들었다.
따아악 ~ !!
“다시 한 번 우측으로 높게 가는 타구!! 담자 ~ 앙!! 넘어 ~ 갔습니다!! 이인영 선수의 쓰리 런 홈런!! 성운 라이온즈가 6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오늘 멀티 홈런에 5타점!! 부진에서 완전히 깨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전문가들이 할 말이 없어지는데요. 저는 앞으로 이 선수의 타격 방식에 입 다물겠습니다."
충격의 연타석 홈런 허용에 관중석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오늘 경기 전까지 st 위너스는 성운 라이온즈를 상대로 홈 경기 15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절대 승리의 법칙을 깨부순 두 번의 스윙, 홈을 밟은 이인영은 동료 선수들과 승리의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잠깐! 반칙! 반칙!!“
이때 st 위너스 벤치에서 김성수 감독이 뛰쳐나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떼쓰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주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타석에서 벗어나 타격을 했잖아요. 왜 주의를 주지 않는 겁니까?”
김성수 감독은 지워진 배트 박스 선을 걸고 넘어졌다.
선을 넘어 타격을 했으니 부정타격이라는 것, 하지만 야구 규정에 따르면 타격 과정에서 배트 박스를 넘어서는 건 허용범위로 쳐 준다.
심판 경력 17년에 접어든 내가 그 규정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만 하시라며 더그아웃으로 돌려보냈다.
“뭐 이런 판정이 다 있어?!! 선을 넘었잖아! 여기 안 보여?!!”
“계속 이러시면 퇴장조치 하겠습니다.”
“퇴장?? 마음대로 해보시지!!”
김성수 감독은 야수진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또 도진 지랄 병, 가만히 있던 박한우 감독도 그라운드로 뛰쳐나왔다.
“이 자식아!!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아들뻘 되는 놈한테 시비 거냐?! 어?!”
한승규나 단장은 그렇다 쳐도 이젠 상대 팀 감독까지 내 양아들을 건드리다니, 박한우 감독이 st 위너스 벤치를 향해 욕설을 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양 팀 선수들은 너 이리 와보라는 감독을 말릴 뿐,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독님, 이제 그만 하세요.”
“이거 놔 봐 인마!! 저 영감탱이 오늘 버릇을 고쳐 놔야 지랄을 안 떨지!!”
이인영은 펄 펄 뛰는 감독을 더그아웃으로 이끌었다.
날 대신해 싸워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더 했다간 이미지만 나빠질 뿐, 배려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