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비운의 2인자 (12)
‘일본에서 망한 거 맞아?’
2회 초 원정팀 한진 타이거스의 공격,
레프트 필드로 나간 이인영은 존 워커어 투구를 지켜봤다.
오늘 최고 구속은 대략 145km 정도, 하지만 타자들은 빠른 볼에 거의 대응을 못했다.
비결은 역회전, 사이드암 투수들은 공을 옆으로 채기 때문에 역회전이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존 워커는 쓰리 쿼터 투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에이스를 책임졌던 몸이라 이인영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투구인지 이해했다.
저런 실력으로도 정복하지 못했던 NPB,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건가, 아니면 일본과 한국의 갭이 생각보다 큰 건가.
어쨌든 존 워커는 2회도 삼자범퇴로 막아내는 저력을 보여주며 팬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
이어지는 성운 라이온즈의 2회 말 공격, 박한우 감독은 무사 주자 1루에서 홍현구에게 번트를 지시했다.
요즘은 수비 시프트가 발달해 좌타자를 상대로 3유간을 비워두는 일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주자를 득점권에 보내고 차근차근 점수를 쌓는 게 박한우 감독의 야구, 하지만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재미없는 야구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뭣보다 박한우 감독의 지나친 번트사랑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한진 타이거스는 기습번트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딱 ~
“아, 2루에 포스 아웃, 1루에서는 세이프입니다.”
“답답하네요. 지금이 정규시즌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시범경기 아닙니까? 거기다 홍현구 선수는 구단에서 신경을 쓰는 유망주인데 ··· 이런 플레이가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될 지 의문이네요.”
방망이가 믿을 게 못 된다고 해도, 쳐야 이기는 거 아닌가. 올해도 박한우의 번트놀이에 뒷목을 잡아야하는 건지, 존 워커의 호투와 이인영의 경쾌한 한 방에 달아오른 관중석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렇게 경기는 3회 말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이인영은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번트 플레이에 실망한 팬들의 장타를 갈구하는 함성, 반면 슈퍼 루키는 차분하게 내야진의 위치를 확인했다.
‘벌써 시프트 쓰는 거야?’
비어있는 3유간, 그도 그럴 것이 이인영은 첫 타석에서 몸 쪽 공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였다.
공을 오래보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 앞에서 때려내기 때문에 수비 위치가 우측으로 이동한 건 당연, 시범경기지만 타자의 성향에 맞춘 시프트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고 자세를 잡았다.
딱 ~ !
“어? 이게 뭔가요?! 유격수도 3루수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인영 선수의 기습번트!! 2번 째 타석도 안타로 출루합니다!!”
“박한우 감독의 지시는 아닌 것 같네요, 이인영 선수가 주력도 굉장한 걸로 아는데, 이렇게 되면 상대팀도 시프트를 진지하게 재검토 해야겠습니다.”
눈 뜨고 코 베인 팀 입장에선 그저 기가 막힐 뿐, 이렇게 되면 유격수를 원위치로 되돌려야 한다.
장타를 맞느니 차라리 안타를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인영은 50m를 5.8초에 끓는 빠른 발을 갖추고 있다.
3번을 치고 있지만 내보내면 리드오프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 아니나 다를까 후속타선의 안타가 이어지며 득점으로 이어졌다.
작년과 달리 뭔가 연결고리가 생긴 타선, 연습경기 성적은 시원치 않았지만 성운 라이온즈 팬들은 올 시즌은 원가 다르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었다.
“잘 했다!!”
한편, 박한우 감독은 두 팔을 벌려 슈퍼 루키를 맞이했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추구했던 야구가 바로 이것, 그 이상향을 이 녀석이 실현시켜줄 줄이야. 원래 곱게 보지 않았던 선수지만 오늘 활약으로 마음속의 양아들로 급부상했다.
‘좋은 공 안 주네.’
경기는 어느덧 5회 말, 이인영은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1루를 밟았다.
노골적으로 바깥쪽을 공략하는 배터리, 지금 스윙으론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코스다.
시범경기도 이 정도면 정규시즌에선 견제가 더 심해지겠지, 좋은 활약을 했지만 숙제 하나를 남기고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성운 라이온즈 선수단은 다음 경기를 위해 서울로 향하는 버스로 이동, 그 사이 몇 몇 팬들은 버스 주변을 기웃거렸다.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외야수가 타는 3번째 버스를 노렸다.
“이인영 선수 이 버스 타는 거 맞죠?”
“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기사에게 확인까지 철저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수들이 나타나자 사인을 요구하는 손이 여기저기서 뻗어 나왔다.
요즘 선수들은 어지간하면 사인을 해주도록 구단의 교육을 받는 편, 그래도 안 해주는 선수도 있지만 이인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펜을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시간, 이제 그만타라는 코치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냥 놔두고 출발 해.”
“예? 하지만 ... ”
“이 버스 태우고 가면 돼”
박한우 감독은 선수들이 탄 2번, 3번 버스를 먼저 출발시켰다.
지금은 욕을 먹고 있지만 선수 시절 사인 하나는 잘해줬던 박한우 감독, 팬들의 사랑을 받아야 선수도 흥이 날 것 아닌가.
정치를 할 줄 아는 녀석이라 씨를 뿌리도록 내버려 뒀다.
“저희들 때문에 버스 놓치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거든요.”
서울에 일찍 도착해 봤자 할 게 뭐가 있을까.
호텔에서 뒹굴거리다 지나가는 하루,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있으면 몰래 빠져나와 재미 좀 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은가.
나중에 애인 생기면 사인 해 줄 여유도 없으니, 받을 거면 지금 줄 서시라며 팬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럼 애인 생기면 사인 안 해주실 거예요?”
“연애 해야죠. 여기서 시간 끌 여유가 어디 있어요? 지금 잘 해드릴 테니까. 그때는 좀 이해해 주세요.”
“그냥 연애 안 하시면 안 돼요? 저희가 애인해 드리면 되잖아요?”
이인영은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장가가지 말라는 협박과 다를 게 뭐가 있나, 난 외동아들이라 결혼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사인회, 슈퍼 루키는 코칭스태프 전용 1호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버스 안에서도 야구를 잘 하기 위한 연구는 계속됐다.
주로 하는 타격은 당겨치기, 강한 타구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공을 끝까지 볼 수 없어 볼의 궤적을 정확히 예측하고 때려야 한다.
홈런의 8할 이상이 당겨치기에서 나오는 만큼 홈런 타자에겐 필수적인 기술, 당연히 많은 삼진이 따라붙는다.
거기다 투수들이 던지는 변화구 대부분은 바깥쪽으로 떨어지기 마련, 이걸 억지로 잡아당기면 땅볼 밖에 안 된다.
결국 두 가지를 잘 조합해야 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스윙을 구사하는 건 어지간한 레벨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히팅 포인트를 정해두고 타격을 하는 것, 하지만 볼넷보다 치는 게 좋은 이인영은 한 가지 스윙만 고집하고 싶진 않았다.
“너 잠깐 이리 와 봐라.”
때마침 날아든 감독의 호출, 부름을 받은 루키는 한 걸음에 자리를 옮겼다.
“다음에 술자리 있으면 나도 불러라.”
“넵, 며칠 전 일은 제가 술 취해서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남자가 술 마시면 그럴 수도 있지.”
박한우 감독은 지난 일은 쿨 하게 웃어넘겼다. 욕먹는 건 이제 익숙한 일, 그것보다 새롭게 맞이한 양아들과 친분을 쌓는 일에 집중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해라.”
“그럼 지금 한 말씀 드릴게요.”
루키의 고민에 박한우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은 다 때려내겠다니, 잘못하면 초구 아웃이나 어이없게 공격기회를 날려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박한우 감독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일이다.
뭣 때문에 이인영을 7번에 기용하려 했겠나? 좋은 타자가 되려면 상황에 맞는 스윙을 해야 하는 법, 그런데 이게 쉬운 게 아니다.
많은 타석을 경험하고 스스로 대처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 그래서 하위타선에서 부담 없이 스윙을 하도록 배려했던 거다.
그것도 모르고 단장은 3번으로 배치하라는 속 좋은 말이나 하고 있으니, 하긴, 선수출신도 아닌 사람이 프로의 고민을 어찌 알겠나.
박한우 감독은 루키의 적극적인 자세를 높게 평가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앞으로 넌 하위타선에 배치할 테니까. 마음대로 해라.”
초구 아웃을 당하든 병살을 치던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한우 감독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은 뭔가 고집스럽고 꽉 막힌 사람,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역시 사람은 깊게 파봐야 아는 법, 이때부터 이인영은 감독과 서슴없이 대화를 주고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