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비운의 2인자 (9)
“너 아직도 걔랑 연락 하냐?”
“아니”
연습경기를 삼일 앞둔 2월 11일, 이인영은 여느 때처럼 선배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신체건강한 남자들이 모였는데 나누는 대화야 뻔하지 않은가. 누굴 만났네 아니네 하는데, 연애 경험이 없는 루키는 입을 다물었다.
“넌 만나는 여자 있냐?”
“아니요.”
가만히 놔둘 것이지 한 번 건드려보는 눈치없는 선배들, 숫총각 괴롭히는데 재미가 들린 선배들은 좀 더 노골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너 결혼하기 전에 연애는 안 해도 여자랑 잠자리는 해라.”
“왜요?”
“요즘 여자들은 숫총각 싫어하거든”
이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결혼하기 전에 연애는 안 해도 잠자리는 해보라니, 그럼 지금까지 누굴 만나느니 마니 했던 상대가 다 잠자리 상대였단 말인가.
선배들은 당연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건 결혼이나 사랑 없이도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순결을 지켰으니 상대도 지켜야 된다? 요즘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 별로 없어.”
“오호 ~ 그래요?”
“그래, 그러니까 너도 여자는 만나라. 품에 안으면 천국을 맛볼 거다.”
“그 말, 왠지 저도 알 것 같네요.”
선배들은 웃긴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자도 안 만나본 녀석이 여자의 살결을 어떻게 안다는 건가. 이에 대한 숫총각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혼자해도 기분 좋은 건, 둘이 하면 더 기분 좋겠죠. 아닌가요?”
그 뜻을 이해한 남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생긴 거나 하는 짓은 모범생 같아 고리타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주위 분위기에 맞춰줄 줄 아는 녀석, 덕분에 이인영은 빠르게 팀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이인영 선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2월 12일, 연습경기를 앞두고 방송국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이인영은 성운 라이온즈가 연고지를 둔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구 관심을 받는 유망주, 방송국은 연습경기를 앞둔 지금이 슈퍼 루키를 취재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리포터는 스포츠 아나운서 6년 차에 접어든 김지영,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린지 제법 된 사람이라 이인영은 선배를 대하는 자세로 인터뷰에 응했다.
“프로선수로서 첫 전지훈련을 치르고 계신데, 긴장되거나 어려운 일은 없으신가요?”
“아니요, 수학여행 온 것처럼 즐겁습니다.”
“수학여행이라고요?”
“네, 저는 수학여행 때 훈련하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멀리 집에서 떨어진 건 처음이라 조금 흥분되네요.”
김지영 아나운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자신이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애들이 있는데, 아직 풋풋함이 남아 있는 선수, 솔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인영 선수는 붙임성이 좋은 것 같은데, 팀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
“글쎄요 ··· 제가 붙임성이 있다는 근거가 될 만한 자료가 있나요?”
김지영 아나운서는 2달 전 있었던 팬 페스티벌을 근거로 내세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치어리더 사이에 끼어 춤을 추고, 팬들에게도 친절했던 선수, 뭣보다 붙임성이 좋다는 증언을 몇 몇 선수들에게 들었기에 거의 확실했다.
“글쎄요. 붙임성이 좋은 게 아니라 처세술이 좋은 거 아닐까요?”
“처세술이라고요?”
“전 아직 루키잖아요. 사람을 가려서 사귈 입장이 아니라 일단 친해지고 보는 거죠.”
이인영은 순간 아차 했다. 자기도 모르게 밝힌 속마음, 이건 편집해달라는 귓속말을 흘리면서 촬영장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인터뷰, 김지영 아나운서는 대본에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이성 스타일은 뭔가요?”
“글쎄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쉽게 생각하세요. 여자 연예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잖아요.”
“그게 제일 애매해요.”
여자를 만나고 겪어봐야 내가 좋아하는 기준을 세울 것 아닌가. TV 속의 연예인이 이상향이라는 건 연애를 모른다는 증거, 기준이 없으니 막연한 대상을 내세우는 거 아닐까.
제법 그럴듯한 논리에 김지영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은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시는데요?"
"네?"
"저보다는 오래 사셨으니까.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pd는 폭소를 터뜨렸다.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반격을 하다니, 거기다 저보다 오래사셨으니라는 말에 당황한 리포터의 반응도 재미있었다.
망신을 당한 김지영 아나운서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 이인영도 장난기 없는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프로야구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음 ··· 글쎄요. 연봉을 가장 많이 받는 선수가 최고의 선수 아닐까요?"
홈런왕을 한다고 프로야구 최고의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선수의 평가는 종합적인 것, 연봉이야 말로 그 지표가 아니냐는 말에 김지영 아나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인영 선수의 목표는 높은 연봉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그렇죠.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솔직담백한 인터뷰가 끝났다. 인사를 나눈 이인영은 숙소로 귀환, 바로 선배들에게 붙잡혀 문초를 당했다.
“무슨 얘기 했냐?”
“뭐 그냥 평범한 대화했어요.”
“경고하는데 아나운서는, 결혼할 거 아니면 건드리지 마라.”
선배들은 너에겐 아직 아나운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참견을 늘어놨다. 즐길 상대는 일반인이 좋다는 것, 아나운서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어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때? 한국 가면 내가 한 명 소개시켜줄까?”
“일단 돈부터 벌고요. 돈이 있어야 여자도 만나죠.”
그럴듯한 변명에 선배들은 알아서 물러났다. 왜 이 팀이 지난 3년 동안 리빌딩을 해도 성과가 없었는지 대략 이해가 되는 분위기, 그렇다고 서로 얼굴 붉혀봤자 뭐가 달라지겠나.
일단 야구에서 성공하는 것만 집중했다.
* * *
2월 14일, 성운 라이온즈는 미야자키현의 진다이 구장에서 연습경기를 치렀다.
상대는 미요시 라이온즈, 같은 라이온즈지만 이곳의 라이온즈는 암흑기에 빠진 한국과 달리 호황을 누리고 있다.
경기 시작 전부터 관중석을 가득 채운 인파가 그 증거, 객관적인 전력에서 명백한 우세를 점한 미요시는 2군을 대거 기용하는 여유를 보였다.
‘큰 스윙은 의미가 없지.’
박한우 감독은 짧게 치는 타자들을 대거 기용했다.
제구와 스피드를 갖춘 일본 투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거지만, 큰 틀에서 보면 지난 3년과 다를 게 없는 기용. 거포를 육성하는 팀 정책과 명백히 배치되는 짓이다.
본인이 틀렸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상황,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밀린다고?’
성운 라이온즈 타선은 2회까지 안타 하나 못 때리는 졸전을 벌였다.
상대는 지난 시즌 1군에서 6승 8패 평균자책점 4.51을 기록한 고사카 히로야, 제구는 좀 불안정하지만 최고 153km를 던진다.
짧은 스윙으로 밀어내기엔 너무 묵직한 공, 박한우 감독은 공을 많이 보게 해 투구수를 늘리겠다는 고전적인 전략에만 의존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3회 초 성운 라이온즈의 공격, 이인영은 가벼운 스윙으로 몸을 풀며 타석에 들어섰다.
청소년 대표에도 안 나왔고 일본에선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름, 고사카 히로야는 이 녀석도 앞선 타자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따악!!
‘엇?’
초구부터 강한 타구, 고사카가 흠칫하는 사이, 1루로 달리던 이인영은 파울판정에 아쉬움을 표했다.
라인에서 약 30cm 정도 벗어난 타구, 타석으로 돌아와 집중력을 다듬었다.
‘이 녀석은 다르다.’
146km 빠른 볼을 제대로 잡아당기다니, 상대를 잠시 얕잡아 보고 있던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좋아!! 잘 보고 있어!!”
2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 동료들의 응원에 힘 입은 루키는 강한 스윙을 이어갔다.
‘저래서 어떻게 따라가겠다는 거야?’
박한우 감독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놈이 정확히 맞출 생각은 하지 않고 크게 돌리고 있으니, 저래가지고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미요시 라이온즈의 감독 니시자와 후쿠이의 생각은 달랐다.
얼핏 보면 무모할 정도의 풀스윙이지만 배트 컨트롤이 좋아 어떻게든 맞춰내고 있다. 우연일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스윙만 보면 상당히 위협적, 배터리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걸 골라낸다고?’
회심의 커브가 볼이 되자 고사카 히로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운 라이온즈 타자들은 대부분 짧은 스윙을 하기 때문에 가슴이 일찍 열리는 경우가 많다.
변화구나 예상하지 못 한 공이 들어왔을 때 배트를 멈춰 세우기 어려운 이유, 하지만 이인영은 마지막까지 가슴을 닫아두기 때문에 변화구에 대응하기 용이한 편이다.
배트 스피드가 처지면 빠른 볼에 대응하기 어려운 폼이지만, 145km가 넘는 공을 따라가는 걸 보면 그렇게 처지지도 않는 편, 니시자와 후쿠이 감독은 고사카가 의외로 고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아악 ~ !!
아니나 다를까, 이인영은 멋들어진 풀스윙으로 타구를 외야로 보냈다.
떨어질 줄 모르고 뻗어나가는 타구는 관중들의 머리 위를 지나 진다이 구장 밖으로 퇴장, 얼마나 멀리 갔을지 감도 안 잡히는 초대형 홈런에 모두들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자식은 뭐야?’
이인영을 경기 내내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박한우 감독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이 일자로 차렷할 정도의 충격, 자기도 모르게 하이파이브에 반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