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8화 (8/309)

8화. 비운의 2인자 (8)

‘뭘 먹어야 되나.’

일본 미야자키 현에서 시작된 전지훈련, 올 시즌 성운 라이온즈와 1년 60만 달러 계약을 맺은 존 워커는 점심메뉴를 빠르게 스캔했다.

뷔페 식이라 먹을 건 많지만 한국인 선수들이 주고객이라 망설여지는 메뉴가 있는 것도 사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릇을 겨우채웠다.

“김치 사랑해요.”

“삼겹살 맛있어요.”

입단식 때는 이런 말을 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 앞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척 하기도 했지만 입에 안 맞는 게 사실, 지금은 언론플레이를 할 사람도 없으니 그릇 위에 본심을 드러냈다.

‘저건 뭐지?’

그 와중에도 곁눈질로 동료 선수들의 식단을 체크했다.

다들 머리만한 그릇에 담긴 스프를 후루룩거리는데, 한국인들은 다들 저렇게 먹는 건가. 그러던 중, 한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김치는 물론 국도 없는 식단, 풀은 거의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낙원 아닌가. 본인과 비슷한 식단이라 더 눈길이 갔다.

“너 원래 국 안 먹냐?”

“네.”

“희한한 녀석이네.”

이상한 밥상의 주인공은 이인영, 홍현구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 없이 어떻게 밥을 먹나. 26년 동안 밥과 국을 실과 바늘 같은 존재로 여겨왔으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 그러건 말건 루키는 태평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야, 한국인이면 국하고 밥을 먹어야지”

“그런가요? 쌀 원산지는 상관없고요?”

이인영은 식당 입구에서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 재료 원산지에 주목했다.

오늘의 밥 원산지는 메이드 인 재팬, 꼭 밥과 국을 먹어야한다면 원산지는 상관 없는 건가? 예상 외의 반격에 홍현구는 얼굴을 붉혔다.

메이드 인 재팬 쌀 먹으면서 무슨 한국인은 밥 타령인가, 뭐든 입맛대로 맛있게 먹으면 그만, 유쾌한 후배 덕분에 핀잔을 준 선배만 망신살이 뻗쳤다.

덕분에 한결 밝아진 분위기 아직 그 틈에 낄 레벨이 못 되는 존 워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왜 웃는 거야?”

“그게 말이죠.”

통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존 워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왜 마음에도 없는 김치 사랑해요를 외쳤을까. 그냥 솔직하게 얘기했어도 됐을 텐데, 외국인이라고 현지인들에게 억지로 좋은 인상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닌지, 그에 비해 저 녀석은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거 먹겠다는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일단 기회를 지켜봤다.

따악 - !!

식사가 끝나고 이어지는 훈련, 이인영은 코치의 지시대로 가벼운 스윙으로 타구를 날렸다.

고교야구 때 접한 훈련과는 전혀 다른 방식, 동산고의 김재호 감독은 언제나 실전 같은 훈련을 요구했다.

땅볼을 쳐도 전력으로 달려야 하고, 배팅볼 투수를 맡은 선수도 전력으로 공을 던져줘야 했다.

그런데 여기는 프로인데도 한결 느슨한 분위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루키는 코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훈련에만 집중하라는 말 뿐, 불친절한 선생님에게 매달릴 이유가 있을까. 퇴짜를 당한 학생은 스스로 답을 찾아나섰다.

‘아, 그러고 보니…’

직접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코치가 옆에서 공을 던져주는 토스 타격은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는 훈련, 당연히 본인의 자세에 좀 더 신경을 기울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전에서 자세를 의식하며 치는 선수가 어디에 있나? 공이 날아오면 치기 바쁜 게 현실이다.

지금은 스프링캠프 초기, 그럼 지금은 자세에 집중하고 실전 같은 훈련은 나중에 할까?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진 않았다.

애시당초 이곳에 실전처럼 공을 던져줄 전문 배팅볼 선수가 있나? 당연히 없다.

기껏해야 청백전 정도만 하겠지.

자세에만 신경을 쓰던 선수들이 실전에서 얼마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출장이 보장된 주전급 선수라면 꾸준한 출장으로 감을 찾아가겠지만, 그럼 나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별 수 없지.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하는 수밖에’

훈련은 끝났지만 이인영은 배트를 놓지 않았다. 초과근무가 아니라 부족한 훈련을 하는 것 뿐, 하지만 그 깊은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선배들은 그냥 열심히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부웅 ~

훈련 때와는 다른 풀스윙, 배트에 뭔가 걸리는 게 있어야 하는데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랄까. 몇 번 하다가 기분이 나질 않아 그만 뒀다.

“what make you so serious?”

= 뭐가 그렇게 심각해?

이때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존 워커, 꼬부랑 영어는 아직 서툴러 통역을 거친 대화를 나눴다.

“연습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몸 좀 풀고 있었지.”

“연습?”

자초지종에 귀를 기울이던 존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본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뜻이 맞을 줄이야. 그렇게 대화는 계속됐다.

“솔직히 여기 와서 좀 놀랐어. 한국은 일본과 비슷할 줄 알았거든”

“비슷하다니?”

존 워커는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워커는 한국으로 오기 전 일본 무대를 거친 선수, 일본야구는 토스 훈련도 하지만 배팅볼 투수를 동원한 실전 같은 훈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은 일본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전혀 다른 실상, 궁금한 게 많은 루키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메이저리그는 어때?”

“어느 쪽이든 미친듯이 하지. 살아 남으려면 뭐든 해야 하니까.”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훈련은 미친듯이 하는 게 답, 자체 청백전 정도로 무슨 훈련이 될까. 구단에서 전문 배팅볼 투수를 운영해 주길 바랐지만 이제 와서 그게 가능할까.

뭣보다 감독의 훈련 스타일에 딴지를 걸 수도 있는 일, 아직 루키 신분이고 한국사회는 아랫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문화가 아니라 입을 열기 애매했다.

“연습상대라면 내가 해 줄 수도 있는데”

이때 존 워커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청백전이든 뭐든 앞으로 마주할 일이 있다면 전력으로 상대해주겠다는 것, 거래관계가 확실한 루키는 뭔가 내게 원하는 게 있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

“뭐 ··· 그럼 나쁠 게 없네. ”

이렇게 두 사람은 의기투합, 간간히 대화를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일본 야구 수준은 어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궁금해서”

이인영은 일본야구의 수준이 은근 신경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니시테츠 호크스의 러브 콜도 받았고, 일본은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대다.

존 워커는 일본야구를 거쳤으니 뭔가 해 줄 말이 있겠지.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실패해서 여기로 왔잖아. 굳이 들어야겠어?”

일본에서 좋은 성적 거뒀다면 한국으로 올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꼭 들어야겠다며 그 이유를 제시했다.

“한국 팬들은 일본에서 실패한 선수가 한국에서 성공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한국에서 성공한 선수가 일본이나 해외에서 성공하면 열광하지. 그러니까 너도 해외로 재진출 노리는 게 나을 거야.”

“그게 뭐야? 이해를 못하겠네.”

존 워커는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두 나라의 역사를 모르니 당연한 일, 일본에서 실패했으니 한국에 그냥 눌러 앉을 건가.

뭐가 문제인지 가다듬어서 일본이든 미국이든 더 넓은 곳으로 진출해야 할 것 아닌가.

실패를 돌아보는 것도 성장의 밑거름, 이인영도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되면 해외로 진출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정보를 교환하는 건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 그제야 존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구가 문제였던 것 같아.”

“제구?”

“그래, 이 정도면 됐다고 던진 공도 커트가 되더라고”

존 워커는 일본에서 5승 7패, 평균자책점 4.12을 기록하고 방출됐다.

아주 형편없는 성적은 아니지만 용병을 기준으로 하면 매력없는 성적, 부상도 부진의 원인이었지만 생각보다 뛰어난 일본 타자들의 배트 컨트롤에 고전했다.

일본도 그 정도인데 메이저리그엔 얼마나 대단한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을까. 겁을 먹긴 커녕 루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나중에 나 상대해보고 솔직하게 평가 좀 해 줘, 참고 할 테니까.”

“알았어.”

존 워커는 열혈야구 소년의 열정에 아빠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한때 메이저리거를 꿈꿨지만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고 거기서도 밀려나 한국까지 왔다.

내게 그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을까. 여기서도 밀리면 그 다음은 낭떠러지, 다음 기회는 없다며 정신을 재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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