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외전-여전히 노리고 있다 (23/23)

여전히 노리고 있다

빛의 신이 보상이랍시고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것은 내가 용사가 될 가능성이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이 내 미래를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원작에서 용사의 동료는 마족보다 위험한 적이었다. 그러니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했다. 그걸 위해 선택한 마법이었고, 회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화를 얻은 이유는 독 때문이었다. 소설 속 동료들이 용사를 독살하려 했다는 서술과 더불어 자허 블리스가 죽은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마경의 오염된 땅을 신에게 받은 힘으로 정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화해야 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어쩌겠어. 모든 일을 완벽한 확신을 두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마경의 넓이는 면적만 따지자면 작은 왕국 정도 된다. 그 땅에 거주하는 모든 생물은 독을 품고 사는 괴물이거나 독에 의해 죽어가는 패배자들뿐이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까지 총 다섯 마리의 터주가 독에 오염된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중앙의 터주인 아라크네는 마왕이 처리한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공석이라고 했다.

펠런과 함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처리할 셈으로 터주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설득 내용은, 터전을 떠나 마왕군에 들어올 것.

피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 펠런을 보자마자 순순히 머리를 조아리더라. 역시 대단하다. 마왕님.

새까만 이끼 낀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높이 자란 새까만 나무에 가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당분간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비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썩은 물비린내가 지독하다. 정화와 회복이 없었다면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어려웠겠지. 나는 껍질만 남은 거대한 흰 거미의 사체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지금 다시 붙으면 이길 자신 있는데 아쉽다. 빌어먹을 거미 같으니라고.

그렇다. 이곳은 3년 전 자허 블리스가 죽은 곳이다.

의도해서 온 건 아니지만 적합한 장소를 찾다 보니 이곳이다. 하긴, 그러니까 터주가 이곳을 거처로 삼은 거겠지. 나는 고개 돌려 펠런을 바라보며 감상을 말했다.

“추억으로 삼을 만한 장소는 아닌데 이상하게 반갑네.”

“…반갑다고?”

펠런이 내 감상에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도 내가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겁먹거나 우울해했다면 또 몰라. 반갑다니, 내 죽음을 앞에 두고 긍정적인 반응이라니.

“다시 살아나서 그런가 봐. 실감이 나지 않아. 내가 정말 죽었었나? 3년이 흘렀다고? 같은 거.”

“그럴 수도 있겠지.”

무던한 녀석의 대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펠런에게 나쁜 기억을 남긴 장소라 혼자 오고 싶었는데 녀석은 부득부득 나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제 와서 내가 달아나리라 생각하는 걸까? 어조를 바꿔서 놈에게 물어봤더니 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한시라도 네 곁에서 떨어지기 싫은 것뿐이다.”

“…자꾸 설레게 할래? 어디서 그렇게 예쁜 말을 배워서 써먹고 그러냐.”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만.”

나를 따라 바위에서 내려온 놈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금 전까지 질겅거리던 약초 때문에 놈의 입안에선 계속 약초 향이 나더라.

씁쓸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계속 먹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 같다. 먹지 않았어도 혀에 남는 쌉쌀한 향에 입맛을 다시며 나는 바닥까지 텅텅 비울 생각으로 늪지를 정화했다.

넓게, 그리고 깊게. 마법도 검술도 그렇지만 정화하는 방법에도 구상과 표현이 필요하다. 이 경우 대상은 마경 전체가 되며 해독의 기준은 내 몸이 된다.

오염된 땅을 모두 정화하는 데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까. 정화를 바닥까지 써본 적이 없어서 감을 잡을 수 없다. 결국, 오늘 해봐야 대충 견적이 나올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늪지의 고인 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썩은 냄새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늪지에 뿌리를 박고 자라던 나무들이 일제히 새까만 이파리를 떨어트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늪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부스러졌다.

독을 마시며 자란 나무들이 급격한 환경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선 채로 죽었다. 독이 쌓여 죽어가던 마수와 마물들이 기력을 되찾고, 바닥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썩은 물이 깨끗하게 정화되었다. 검은 물이 투명해지고 나무가 죽는다.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풍경이 빠르게 변해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쉬워졌다.

“지금 정화 범위가 비경에 닿았다고 한다.”

“생각보다 한 번에 정화되는 면적이 넓은데?”

마경의 하늘을 크게 선회하던 와이번 라이더들이 빠르게 상황을 보고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내 곁에 서 있던 펠런이 내게 곧장 정화 범위를 말해줬다.

와, 세상에. 생각보다 빠르고 강한 정화 작용에 나는 치약 끄트머리를 쥐어짜는 심정으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화했다.

“좋아. 나는 끝났어. 오늘은 더 못 해.”

“수고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

“이제 나를 극진히 모시고 이동하도록.”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너 나를 말 정도로 여기는 거 아닌가?”

“아, 아닌데. 세상에서 제일 강한 탈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

마력 탈진이나 체력이 끝장난 것과 다른 느낌의 탈력감이 전신에 엄습했다. 나는 바닥을 짚은 손을 떼고 축축한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처럼 입은 좋은 옷이 진흙투성이가 되겠지만 손가락 까딱할 힘이 없다. 물먹은 솜을 입은 듯 온몸이 무겁다. 졸리진 않은데 나른한 것이 탈진한 것 같다.

축 늘어진 내 몸을 펠런이 부축했다. 나는 갓 태어난 짐승처럼 놈의 어깨에 매달려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정화가 끝난 마경의 대기는 이제 악취가 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독기 섞인 공기를 마시느라 코가 다 마비가 된 것 같다.

나는 펠런의 체취를 좋아한다. 냄새 패티시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탈진도 했겠다 놈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눈을 감았다. 놈의 체온과 체취에 온몸이 나른하게 퍼진다.

진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은 놈이 자세를 제대로 잡아줬다. 자허 블리스의 몸과 비교하면 용사의 몸은 키만 조금 더 컸을 뿐 체격은 비슷하다. 아마 근밀도는 이쪽이 더 많겠지. 무게는 둘째 치고 키 때문에 나를 안고 있기 어려울 텐데 펠런 놈은 별 부담 없이 나를 고쳐앉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아, 젠장. 놈이 만지는 게 너무 좋다.

“반 정도 영지가 정화 작업이 끝났다고 한다.”

“…이만큼 고생한 보람이 있군.”

“나인이 몹시 기뻐하더군.”

“그럴 만도 하지. 마경의 가치가 달라질 거 아냐.”

무슨 일을 해도 결국 나인 놈에게 득이 되는 일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늙고 교활한 암룡 놈에게 언젠가 한 방 먹이고 싶다.

“나인 녀석은 약점 없나?”

“찾는다면 반드시 내게도 알려줬으면 좋겠군.”

저런, 다스리는 왕도 약점을 모르는 신하라니. 과장된 목소리로 탄식하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단둘이 있는 것도 좋지만 우선 요새로 돌아가 깨끗하게 씻고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보인 정화 능력이 다시 회복하기까지 이틀 정도 걸렸다. 신성력에 의존하는 치료에 비해 회복하는 속도가 몹시 빠르다. 미적거리다가 이미 정화를 마친 땅에 다시 독이 퍼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회복이 되는 대로 마경과 요새를 왕복하며 정화에 집중했다.

내가 하는 일에 늘 시큰둥하던 나인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우리를 지원했다. 젠장, 하여튼 자신의 이득 앞에서 약해지는 건 마족이나 인간이나 다 똑같다. 고생에 대한 보상은 내가 꼭 나인에게 받고 말 거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그러고 보니 내 사기를 북돋기 위해 암룡의 수급이 필요한데.”

“비매품이라서요. 가능한 물건으로 알아보시죠.”

“뭐든 말하라며! 뭐든 말하라며!”

“수급 같은 무서운 물건을 원하니 사람이 자꾸 삭막하고 어두워지는 겁니다.”

“진짜 어두운 게 어떤 건지 보여줘?”

대답 없이 펠런의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나인의 등을 보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피곤한데 더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

남아 있을지 모를 독을 대비해 땅 깊은 곳까지 정화하는 데 보름 정도 시간을 들였다. 그 이후 한 일은 간단하다. 마경에 거처를 둔 마수와 마물들을 모두 비경으로 몰아넣고 마경을 갈아엎었다.

죽은 나무를 송두리째 뽑고 바위를 부순다. 이럴 때 쓰라고 광역 마법이 있는 거 아니겠는가. 펠런과 나인, 그리고 내가 쓰는 마법에 늪이 갈라지고 땅이 찢어졌다.

이런 큰 마법은 처음 써본 탓에 힘 조절을 잘못해서 커다란 구덩이가 몇 개 생겼다. 그래도 땅 깊이 박힌 바위를 모래보다 잘게 부수고 터트리는 재미가 있더라.

북부 산맥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배수가 좋지 못해 바다로 빠지지 못하고 고이고 썩는 게 문제라 아예 땅 깊은 곳까지 뒤집어엎어야 했다. 하하, 스트레스 풀리고 좋네.

대충 개간이 끝난 드넓은 땅을 요새의 첨탑 위에서 내려다보며 펠런은 내게 말했다.

“내년에 바로 사용하지 못할 거다. 빨라도 내후년, 어쩌면 몇 년 더 걸릴지 모르지.”

“가까운 시일에 쓸 수 있는 넓은 경작지가 생긴 게 어디야. 짧게 쓰다 버릴 거 아니잖아. 멀리 보자고, 멀리. 당분간 드로젠에서 수확한 곡물로 버티고.”

정화보다 땅을 갈아엎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 파괴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용도와 다르게 마법을 쓰자니 일이 조금 복잡해진 탓이다.

결국, 우기를 지나서 날이 추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마경의 개간이 끝을 보였다. 이후는 우리 같은 초짜가 아닌, 제대로 된 농부의 손이 닿아야겠지.

드로젠의 국경 근처에 주둔하던 인간의 군대는 하늘을 나는 암룡의 모습에 겁을 먹은 건지 빠르게 철수했다. 인간으로 변신한 나인이 들은 바로는 제국의 수도 내에선 아직 마왕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시시때때로 내게 통신을 거는 라이트의 제후에게 마경의 정화가 끝나는 대로 사실을 고한 탓이다.

용사는 황제를 죽이고 마왕의 편에 섰다. 설마 했던 사실을 내 입을 통해 듣자, 라이트는 비분강개하는 대신 이유를 물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라이트의 제후에게 나는 적절하게 사실을 섞어 대답했다.

-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취미는 없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지.

- …그걸 지금 말이라고, 추악한 배신자 같으니!

- 이제 알았나? 지금의 나는 절대 마왕을 이길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왕이 제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막는 정도다. 그것도 인간이 선공해 침략의 빌미를 준다면 막을 수 없겠지. 그것이 내가 황제를 죽인 이유다.

- 빛의 신을 걸고도 거짓을 말한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 믿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라.

이 통신을 끝으로 핀 더 라이트와 마법사 연결을 완전히 끊었다. 어차피 용사의 생존은 성검을 통해 알려지기 마련이다. 용사가 죽으면 어떤 형태로든 빛의 신전으로 성검이 되돌아간다고 하더라.

내가 죽인 황제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제국 내부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드로젠을 탈환하겠다고 움직이기보다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는 데 집중할 생각인 듯했다. 급작스러운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죽은 황제가 마왕이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탓이란다.

어차피 내가 황제를 죽인 건 순전히 우리 영감님과 펠런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이 드로젠을 탈환하려 하거나, 마왕을 쓰러트리려 한다면 나도 더는 펠런을 막을 자신이 없다.

불현듯 영감님을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젠 피가 섞인 몸도 아니고 인제 와서 내가 자허 블리스였다고 말할 용기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뿐이다. 실제로 영감님을 만나봤자, 나도 혼란스럽고 영감님도 혼란스러울 거다.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 국경 너머로 가끔 소식이나 들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마지막에 썩 좋은 손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비경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펠런은 마왕이고, 마왕은 마족이 수호하는 북부 산맥 위쪽에서 군림하는 게 맞다.

마경의 정화를 빌미로 흐지부지 거의 1년 정도를 비경에서 보냈지만,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북부 산맥 위쪽, 마족의 땅으로 아예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앞으로 살 고향이 바뀌는 것에는 부담감이 없다. 어차피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으니 어디가 터전이든 펠런 녀석과 같이 있다면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보다 불안한 건 따로 있다.

용사의 신체와 마법 덕분에 추위나 더위를 크게 타지 않지만 그래도 부츠와 코트를 입고 목도리까지 걸친 후 와이번을 타고 마족의 땅으로 향했다.

와이번을 타고 반나절, 산맥을 지나 북으로 올라갈수록 공기는 차가워졌고 하늘은 새파랗게 물들었다. 하늘이 어느 순간 지나치게 푸르르다 여긴 순간, 우리는 어둠이 지배하는 땅, 마왕의 국가인 바얀스에 도착했다.

마족의 땅은 크게 이름이 붙은 땅이 없다고 했다. 도처에 널린 마수와 마물들은 특정 거주 지역을 가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먹이를 찾아 항시 영구동토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나마 지성을 가진 마족들은 항구를 낀 분지 형태의 도시에 밀집해서 생활하는데, 그곳이 마족들의 유일한 도시이자 수도인 바얀스다.

“이렇게 멋질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바얀스에 온 걸 환영한다.”

하늘 위에서 본 마족의 땅은 아름다웠다. 얼음과 바위로 가득한 삭막한 영구동토를 생각했는데 항구를 낀 바얀스는 생각보다 제대로 된 도시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른 삼각 형태의 지붕과 좁고 높은 건물,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 간격이 매우 좁았는데, 골목마다 지붕에서 긁은 오래된 눈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육지 쪽으로 반달 형태로 우묵하게 들어간 항구에는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배가 정박해 있거나, 근해를 오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북해 쪽으로 많은 어선이 만선의 꿈을 가지고 출항하고 있다고 했다.

“여긴 벌써부터 눈이 내린 건가?”

“항상 눈이 내리는 땅이다. 우기 때 짧게 날이 풀리지만 그 시기가 고작 50여 일을 넘지 않는다.”

“그때 수확하는 작물로 1년을 버틴다고?”

“역대 마왕들이 인간의 땅을 노리는 이유지.”

“…큰일이다. 나도 노리고 싶어졌어.”

커다란 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원을 그리며 대로가 길게 뻗어 있었는데, 잘 정비된 그 길 위에 마수와 두꺼운 회색 가죽으로 뒤덮인 와이번들이 짐수레를 끌며 이동하고 있었다. 마족의 땅이 아니랄까 봐 말 대신 마수를 부리는 거겠지.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줬으면 좋겠군.”

“…제국 정복할 거야?”

“마경과 드로젠으로 부족하다면, 적의 사정을 봐주자고 내 백성을 굶길 수 없으니까.”

“일단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할게.”

새파란 바다를 낀 항구도시, 지성을 가진 이족 보행 생물들의 습성은 인간이나 마족이나 다르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것도 원작이 있는 세계라 그런 걸까. 아름다운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어선을 지나쳐 와이번은 빠른 속도로 낙하해 목적지인 바얀스 성으로 향했다.

“제국의 편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이대로 인간의 땅을 침략하면 빛의 신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나는 너 죽이기 싫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싸우면 네가 이길 것처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하하, 이 녀석. 자꾸 호승심을 자극하네. 외성의 원형 옥상에 있는 와이번 착륙장에 하차한 후 나는 벌쭉 웃으며 펠런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까지 내가 계약 때문에 봐준 거지. 지금 너랑 나랑 똑같은 입장이거든? 싸우면 네가 지거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면 원하는 대로 해라.”

다정하게 대답하는 것 같아도 결국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펠런의 어깨 위에 얹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무리 놈을 좋아해도 잘못된 상식은 제대로 고쳐주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 창 있지? 일 끝나면 한 판 붙자.”

“겪어봐야 확신이 든다면 얼마든지.”

빛의 대신전에서 양피지를 가져온 후 펠런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좋은 의미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손안의 병아리처럼 잘못 쥐면 터질까 주의하는 태도가 눈에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계약이 제대로 먹혀 내키는 대로 치고받고 싸워도 내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제대로 된 대련은 해본 적이 없다. 마경의 정화부터 마족들의 수도인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회백색의 높은 첨탑과 우뚝 선 성을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어깨 힘을 풀었다. 그래, 앞으로 여기가 내가 살아야 할 곳이라 이거지.

거센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기고 첨탑 안으로 들어갔다. 마중을 나온 마족들이 있었기에 우리 일행의 머리엔 펠런이, 바로 옆에 내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나인과 상급 마족들이 뒤따라 걸었다.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 조촐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일행만 보자면 황제의 행진과 다를 바 없다. 마왕과 용사, 그리고 암룡의 행차니 말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조금 걱정이 되어 펠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마족의 수도 바얀스에서 내게 시비를 거는 놈이 있으면 조져도 되냐고 말이다.

“이미 내 측근들은 너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네게 시비를 거는 마족은 없을 거다.”

“그래도 말이야 만약에 ‘마왕님의 곁에 너 같은 인간은 필요 없다!’라고 외치는 충성심 강한 녀석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온다면 알아서 처리해도 상관없다.”

좋았어. 시비를 거는 놈이 나오면 본보기로 대련을 해야지. 마족 사제도 있겠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이런 계획을 펠런에게 이야기하자, 펠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고 있는 녀석 중 네가 가장 호전적인 건 알고 있나?”

“아니다. 오해다. 용사는 평화주의자다.”

“너는 평화라는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앞장서서 우리를 맞이한 노쇠한 마족이 흘깃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돌리지 않고 뻔뻔스레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여기서 내가 제일 세다. 좋아, 아무나 시비를 걸어라. 언제든 상대해 주마. 맨주먹 불끈 쥐고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도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무 조용하다. 내가 머무는 귀빈용 객실의 커다란 벽난로에선 항상 장작이 타고 있고, 소리 없이 걷는 마족들은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묵례했다. 가끔 말을 거는 이들의 어조와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했다.

그래, 마치 나를 또 다른 마왕님 대하듯 극진하게 모시더라.

여기 오면 많은 마족을 만날 거로 생각했다. 소설에 나온 마왕의 부하들, 사천왕들. 용사를 마지막까지 괴롭혔던 다양한 고위 마족 마법사들과 마수 조련사들 말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내 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펠런의 옆에 있으려면 그만한 일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는데…….

여기 온 후, 한 달 동안 내가 만난 사람은 펠런과 나인, 그리고 아주 가끔 내 방을 청소하거나 내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오는 마족 시종들뿐이다.

심지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들이 내게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인간인데? 나, 용산데? 너 같은 불한당에게 우리 순진한 마왕님을 넘길 수 없다고 지나친 충성심을 보여줄 놈은 정녕 없는 건가?

놈들이 내가 용사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도 나는 여전히 유마가 아니라 용사로 불리고 있다.

내 이름이 유마라는 걸 아는 건 나인과 펠런뿐이고, 유일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펠런도 단둘이 있을 때만 나를 유마라고 불러주니 하다못해 바얀스 성에서 키우는 사냥개도 내 이름이 용산 줄 알고 있을 거다.

물론 이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좋다. 누군가를 만날 필요도 없고 모르는 녀석과 기력 낭비해 가며 친해질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 펠런을 되찾겠다며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마족을 멋있게 제압해서 내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겠다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런 사실을 오전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펠런에게 하소연 겸 상황을 설명하자 녀석이 옅게 웃었다.

“그들에게 너는 수천 년 만에 마족들에게 비옥한 땅을 선물한 은인이다. 그건 어떤 마왕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지.”

“…그게 그렇게 되나?”

“나와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넌 충분히 대단한 일을 했다. 황제를 처리한 것도 너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러게, 마족의 입장으로 보면 나는 귀순한 용사구나. 긴 침대에 엎드려 누운 후 깊게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되니 긴장한 게 억울할 지경이다.

“그리고 너, 타인과 소통하는 걸 싫어하잖나.”

“시,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부담스러워하는 거지……. 그리고 필요하면 할 생각이었거든?”

“네가 불편해하는 걸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최소한 바얀스에선 그렇다.”

“…그렇게 티 났어?”

“아카데미 때부터.”

일찌감치 들켰구나. 나는 쿠션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 뒹굴었다. 아, 젠장. 그렇다. 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싫다. 불편하다. 영, 내키지 않는다.

“애지중지 모신 마왕님 데리고 간다고 멍석말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네가 잘도 당하고 있겠군.”

“원래 그럴 때는 알아서 당해주는 거야. 면면 가득 행복하게 웃으며, 어이쿠 이렇게 저를 핍박하시더라도 이미 펠런은 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고?”

웃을 줄 알았던 녀석이 대답이 없다. 몸을 데굴 굴려 고개를 드니 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 밖으로 드러난 귀가 붉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건가? 기쁜가? 안고 있던 쿠션은 멀리 던져버리고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기어가 펠런의 허벅지에 머리를 괴고 누웠다.

“우리 상황 좋아지면 결혼…하……. 븝.”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데?”

결혼까지 꺼내기 무섭게 내 입을 틀어막는 펠런의 손에 입에서 코까지 덥석 막혔다. 좋아한다는 말은 저 녀석이 먼저 했고, 사귀자는 말은 내가 먼저 했지. 그러니 청혼만 내가 먼저 하면 이기는 거로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막아?

놈을 흘겨보며 슬쩍 혀를 내밀어 손가락 사이를 핥자 놈의 손바닥이 꿈틀, 작게 경련했다.

호오, 그렇군요. 우리 마왕님은 손가락이 성감대군요.

음흉한 얼굴로 히죽거리며 이 세워 놈의 손바닥을 긁자, 놈이 서둘러 손을 뗀다. 반응이 저러면 어떡해. 사람을 자꾸 변태로 만들고 있어. 히죽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고 놈에게 밀착했다. 걱정하지 마. 형이 잘해줄게.

“당분간 안 된다고 네게 말한 것 같은데.”

“그래서 한 주 동안 얌전히 있었잖아. 나 이제 괜찮은데 하면 안 되나?”

“네가 걱정이라 하는 말이다. 유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드는 놈의 손을 덥석 잡아 엄지와 검지 사이를 물었다. 어딜 가려고. 사납게 노려보며 질겅질겅 입질하자, 놈이 다른 손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느리게 쓰다듬는다.

“손장난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버틸 수 있다니까. 치료도 할 수 있겠다. 체력도 있겠다. 뭐가 문젠데?”

“네가 다치니 하는 말이야.”

“괜찮아. 그만큼 너도 다치게 만들 수 있어.”

빛의 신과 어둠의 신. 상쇄되는 계약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실상은 달랐다. 빛의 신이 축복을 내린 양피지는 내가 반강제로 작성한 계약과 거의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계약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빛과 내 연결을 끊은 건 빛의 신 자신의 선택이었지 계약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어둠은 펠런과 계약을 끊을 생각이 없다는 것 말이다.

결국, 계약은 기묘한 형태로 이어졌다. 펠런은 나에 대한 살의를 억누를 수 있었고 사망에 이르는 공격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어둠과 연결된 이상 용사에 대한 저항감은 여전히 남아 있어,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평소라면 나를 대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나에 대한 감정이 저항감보다 앞서는 탓이다. 대련해도 괜찮다. 오히려 안전장치를 달아둔 것 같아 살수 외 다른 기술은 제법 노련해졌다. 나도 즐기며 싸울 수 있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잠자리다.

자제가 어려운 상황에 감정마저 폭발한다, 그러니 놈과 섹스할 때마다 거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물어뜯고, 뜯기고 붙잡히고 박혔다. 내가 저항할수록 반응은 더 거칠어지고, 저항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황은 대충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냥 당하고 버틸 성질이 아니어서 나도 결국 치고받고 싸운다. 싸우다가 박히고, 기절한 후에도 놈에게 질겅질겅 씹혔다.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중상은 없다. 그런 장치가 있기에 오히려 깨물고 붙잡고 나를 짓누르는 행위가 집요해졌다. 짧게는 온종일 걸리질 않나, 나 역시 자제하지 못하고 놈에게 반격이라도 한다 치면 사나흘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상황이 그러니 펠런은 아예 나와 섹스하는 것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제기랄이다.

그런 거 상관없다고, 오히려 좋아한다고. 네게 물어뜯기고 맞는 게 좋아! 라고 외쳐도 도통 들어먹질 않는다. 안 믿는 눈치다. 아니, 나 스스로 변태라고 당당히 외치는데 왜 안 믿느냔 말이다.

너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더니 펠런은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내게 말했다.

“네가 변태인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네가 변태인 것과 이건 다른 문제다. 변태라고 해서 모든 행위를 받아줘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은근슬쩍 세 번이나 변태라고 말했어. 이 자식.”

“그럼 아닌가?”

“맞긴 하는데 너도 변태거든? 솔직히 말해봐. 물고 뜯고 질겅거리는 거 네 취향이지? 그냥 상황에 네 취향을 끼얹은 거지?”

“설마. 나는 언제든 너를 정중하게 대하고 싶다.”

“웃기는 소리 하네. 아카데미 때도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박았거든? 내가 해 뜨는 거 보고 기절했거든? 너 그때도 자꾸 가슴이고 목이고 물었거든?”

자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여기서 자기만 정상인 척 넘어갈 생각이라니. 나만 변태로 남을 수 없다. 나는 동귀어진이라도 할 심정으로 놈의 취향을 물고 늘어졌다.

그대로 놈을 덮칠 생각이었지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결국 그날은 못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후 내가 먼저 놈을 쓰러트리고 덮쳤지.

금속 사슬을 가져와 놈의 손목을 묶고, 네가 박아서 내가 다치는 거라면 너를 묶고 내가 덮치면 해결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슬을 간단히 끊는 놈을 상대해야 했다.

어우, 다시 생각하니 오싹하다.

부르르 몸을 떨고 펠런을 바라봤다. 왜 도망가. 놈의 목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내 체중의 곱절 이상을 손가락 끝으로 들 수 있는 놈이 얌전히 쓰러져준다.

몸을 빙글 돌려 나와 시선을 맞춘 놈을 빤히 바라봤다. 검고 깊은 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봐야 파악할 수 있는 무표정이 귀엽기도 하지. 이마 위로 돋은 검은 뿔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 녀석이 늙고 아저씨가 되고, 언젠가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나는 여전히 이 모습일 거다. 그리고 놈은 마족이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기억나진 않지만 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그리고 청년인 지금부터 앞으로 네가 호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다 내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겁나 뿌듯하다.”

“그래서 잘 자란 동생을 보니 기쁜가?”

“다른 생은 아쉽지 않은데 그건 아쉬워. 완전 귀여웠다며. 작고 사랑스러운 꼬마였다며. 나인이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조랑말을 타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웠다면서.”

“…….”

놈의 표정이 조금 무너졌다. 생각해 보면 훨씬 어린 시절도 내가 봤다는 거 아냐. 갓 태어난 펠런이라든지, 첫걸음마를 걸을 때조차 분명히 옆에 있었을 거다. 그 빌어먹을 놈의 살의만 아니었다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형아, 하고 불러볼래?”

“그 농담 재미없다.”

“난 재미있는데. 나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 아냐? 어거스트를 잘 따라다녔다며. 내가 어떤 놀이 알려줬어?”

놈은 대답 대신 내게 입을 맞췄다. 노골적으로 대화를 피하는 기색이라 어떨까 하다가 순순히 입을 벌려 놈의 혀를 얽고 혀끝을 느리게 비벼 오랜만의 자극을 맞이했다.

키스는 그리 길지 않다. 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은 후 입술을 뗐다. 이마를 가로지르는 놈의 머리카락을 뿔 뒤로 쓸어 넘겨주고, 오뚝한 콧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옆으로 누워 봐도 잘생긴 내 애인.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인중 아래 부드러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놈이 내 손을 붙잡아 손가락 전체로 감싸 쥔다. 놈의 손바닥 안에 내 손이 갇혔다. 한 치 앞에 놈의 얼굴을 두고 나는 느긋하게 명화를 감상하듯 놈의 얼굴을 감상한다.

“네가 너무 좋아.”

“…….”

움찔하고 눈가에 경련이 이는 걸 본다. 그것마저 사랑스럽다. 내가 하는 말에 반응하는 것 좀 보라지. 이렇게 잘생긴 놈이 내 애인이래. 목말에 태우고 도시를 한 바퀴 돌며 자랑하고 싶다.

“잘생긴 얼굴도 좋고, 성격도 마음에 들어. 강한 것도 즐거워. 날마다 대련하고 싶어. 날 생각해 줘서 고마워. 계속 기다려줘서 그것도 고마워.”

“…너니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내가 대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일 거야. 주는 만큼 받거나 받는 만큼 줘야 한다는 부담 없이 말이야. 그냥 너니까 주고 싶고, 네가 주는 거니까 받고 싶고 그래.”

내 목숨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다.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사는 것만 생각하고 주변 사람을 이용하며 생존만 생각했던 내가.

“독거미에게 죽을 때 다른 것보다 너 혼자 남겨놓고 가는 게 제일 무섭더라.”

다른 무엇보다 녀석을 놓고 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무서웠고 고통은 괴로웠지만 그래도 내가 죽을 때 나는 처절하게 발악하고 두려워하고 죽음을 피하고자 몸부림칠 줄 알았다. 온통 머릿속에 남 생각으로 가득 찰 줄 몰랐지.

“이제 누구도 너를 죽이지 못할 거다.”

“그야 그렇겠지. 세상에서 제일 강한 놈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면 얼마든지.”

생각했던 것보다 이 자식 호승심이 끝내주는 것 같다. 분위기 제법 좋았는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 말꼬투리를 잡아야 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얄미워 놈의 뺨을 잡아당겼다.

“나중에 대련하자. 얼마든지 싸워서 이겨주마.”

“지금은?”

“지금은 안 돼. 너하고 내가 바빠질 예정이거든.”

보아하니 묘한 분위기를 넘어가기 위해 날 도발한 눈치다. 물고 뜯는 것보다 대련이 낫다는 걸까.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어서 놈의 뺨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시트에 머리를 괴고 누웠다.

“억지로 하자는 거 아니야. 그냥, 오랜만이니까 너를 만지고 싶어서 그랬어.”

“내가 무엇보다 널 원하는 걸 알면서.”

“그래서 자제하는 것도 알지. 알긴 아는데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병이 아니야. 때리면 더 단단해지는 강철이지.”

“강철도 계속 때리면 깨진다.”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자식아.”

하여튼 말 한마디를 안 진다. 다시 놈의 뺨을 쭉 잡아당긴 후 놓는다. 그리고 슬금슬금 놈의 가슴팍으로 기어가 얼굴을 묻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놈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좋다. 뺨에 닿는 셔츠 감촉도 좋다. 내 등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즐거워진다. 늘 날 서 있고 사나웠던 내가 이 자식과 함께 있다 보면 무던해지고 만다.

이마와 뺨을 타고 들리는 놈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피부에 닿는 조금 서늘했던 피부에 열이 오른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봤다.

“그렇게 내가 좋아? 심장이 막 뛴다?”

“자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울 정도로?”

“좋다. 한결같이. 가끔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어디다 가두고 꼭꼭 숨겨두고 싶을 정도로.”

“반골 성질 있는 애인이라 큰일이네. 어디 가둬두지도 못하고.”

“어쩌겠나. 먼저 반한 건 나니 따라가야지.”

녀석의 말에 퍼뜩 생각이 나서 몸을 돌려 놈의 가슴팍에 팔을 괴고 엎드려 누웠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로 봐도 여전히 잘생긴 놈의 얼굴을 감상하며 펠런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내게 반한 건데?”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래? 궁금해서 그래. 그때 내가 막 나가면 막 나갔지 네게 살갑게 굴진 않았는데.”

잠시 할 말을 찾듯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놈이 장난치듯 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겹쳤다.

“그날, 마차에서.”

“마차에서?”

“의상실에서 예복을 맞춘 날, 네가 내게 말했다. 더러운 걸 아득바득 움켜쥐면 내 손만 썩는다고. 털고 씻어버리라고.”

“…그런 말을 했던가?”

“그리고 내게 말하게 했지. 빌어먹을 드로젠 왕가. 내가 더러워서 버리고 만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다. 제뉴어리 놈의 잘못까지 사과하려 들길래 빡쳐서 말했었지. 그날은 나도 기억난다. 다른 게 아니라 그렇게 대화한 후 놈이 지금처럼 내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숨이 뜨거워져 펠런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손바닥에도 불이 이는 것 같아서 그대로 펠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 조금 진정하면 고개를 들어야지. 생각하는 내 머리 위로 펠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부드럽게 부푸는 놈의 가슴, 가슴 안에서 세차게 뛰는 놈의 심장 소리가 적나라하고…….

“그래서 그때 확실하게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자각했다.”

“으으으, 끄으으.”

귀가 터질 것 같다. 미치겠다. 좋아. 난 이런 상황에 너무 약하다. 기괴한 신음을 놈의 가슴팍에 쏟으며 발끝을 버둥거렸다. 젠장, 내가 놈을 놀릴 때는 좋더니 반대로 받는 건 취약하다. 그래도 싫지만은 않은 게 더 미치겠다.

“…유마?”

“좋아서 그래. 잠깐 이대로 놔둬 봐. 지금 행복을 만끽 중이야.”

빠르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알아차린 건지 놈이 낮게 웃었다. 가슴을 타고 느껴지는 놈의 진동에 나는 다시 한번 발을 바둥거렸다.

아, 간지러워. 가슴 안쪽 긁을 수 없는 곳이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이런 건 이상하다. 차라리 주먹질하거나 섹스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시뻘겋게 열이 오른 얼굴은 좀처럼 식을 기미가 없어서 나는 벌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자허 블리스에 맞먹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게 해준 빛의 신에게 아주 조금 감사하다. 얼핏 침대 너머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생각보다 기괴하지 않아 다행이다.

“좋아. 대화는 끝. 와, 내가 먼저 물어봐 놓고 죽을 뻔했네.”

“쑥스러운 건가?”

“쑥스러워. 멋쩍어. 네가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어. 그리고 나도 기억이 나서 그래. 그때 손바닥에 네가 이, 입 맞췄잖아.”

아, 젠장. 더듬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대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으니까. 첫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럴까. 생각해 보면 이 자식이 내 첫사랑이 맞긴 하다.

“그러게? 나 지금 처음으로 사랑해 보네?”

새삼스럽게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와, 그렇구나. 조금 놀란 듯 크게 뜬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와, 어쩌냐. 내 첫사랑이 너야.”

“…….”

“신기하다. 이게 사랑이구나. 그렇구나. 그래서 부끄럽고 쑥스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사랑. 인가.”

“그렇지 사랑이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워. 너를 사랑하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온전히, 한결같이, 어제보다 오늘 더.”

새삼 깨닫게 된 감정이 너무 강렬하고 밝다. 그리고 즐겁다. 나는 열에 들뜬 아이처럼 신이 나서 내 온몸에 켜켜이 쌓인 감정을 펠런에게 고했다.

너를 사랑해. 와, 큰일이야. 자각하고 나니 더 좋아. 입안이 온통 달고 시어. 심장이 죄는 느낌이 들어. 너를 보니 행복하고 즐거운데 동시에 울고 싶고 절박해져. 이게 사랑인가 봐. 처음 느끼는 건데 확실하게 알겠어. 증오나 체념보다 강렬해.

“개쩌네. 널 사랑하길 잘했어.”

“…….”

펠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게 앓는 신음을 냈다. 왜 그러냐고 묻기엔 나도 내가 한 말이 얼마나 듣기 부끄러운 말인 줄 안다. 알지만 어쩌겠어 말하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넌 이걸 어떻게 참았지?

두 팔 가득 놈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머리를 문질렀다. 놈의 심장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다. 그렇구나. 이 자식도 지금 온몸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구나. 놈의 고백이 듣기 좋아서 나는 놈의 가슴 위에 귀를 대고 누웠다.

“좀 더 말해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말하고 있어. 너 지금 심장 터질 듯 뛰고 있거든.”

나를 밀어낼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던 놈이 긴 한숨을 내쉬고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두 팔 안에 갇혀 놈이 몸으로 외치는 고백을 듣는다.

놈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폐 안에서 부푸는 숨소리, 그리고 느리게 빠져나가는 호흡. 부풀었던 가슴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나는 놈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해질 줄 몰랐다. 이런 즐거움이 내게 올 줄도 몰랐다.

“대답했으니 너도 알려줬으면 좋겠다.”

“내가 언제부터 널 좋아했는지?”

“…그래.”

“잠깐 기다려봐. 너처럼 확실하게 자각한 적이 없어서, 기억을 되짚어봐야 해.”

길고 단단한 손가락 끝은 조금 딱딱하다. 도드라진 손가락 마디를 어루만지고, 굳은살이 남아 있는 손바닥에 깍지를 끼고 가볍게 붕붕 흔들다가 퍼뜩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기억 났다. 네가 날 배신했을 때.”

“…….”

순간 흐려지는 놈의 표정에 나는 허허 웃으며 쥐고 있던 놈의 손을 휙 잡아당겨 내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침대 위에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이 멋있기도 하지. 엉거주춤 누워 있던 자세를 고쳐 일어나려는 놈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말했다.

“이름 알려줬을 때, 나는 나름대로 각오하고 말한 거였거든. 다시 돌아오면 거절하든 받아들이든 내가 뭘 원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대답하자고. 그런데 네가 먼저 선수를 쳤잖아? 그때 확 배신감이 들더라고.”

“그건, 내가 미안하다.”

“아니, 잠깐 들어봐.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그건 이미 끝났잖아?”

주먹으로 두들겨 패며 혼을 냈으니 이미 지난 일을 꺼내자는 게 아니라고 나는 놈에게 설명했다. 이건 순전히 놈의 질문에 대답할 요량으로 한 말이다.

“그때 원래 내 성격이라면 언젠가 찾아가서 반드시 복수한다든지, 아니면 일찌감치 그런 놈인 걸 알았으니 이제 상종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고 아예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난데. 그냥 계속 억울하고 슬픈 거야.”

“…….”

“배신감도 어마어마하게 느꼈고, 그때 여기 와서 처음으로 울었거든. 아, 내가 이 자식에게 배신감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구나, 라고 그때 깨달았어.”

그래서 나인이 요새로 나를 끌고 갈 때도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펠런을 만나서 뭐라도 한마디 해야 했으니까. 그걸 빌미로 녀석의 변명을 듣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너를 만나서 마경으로 간 거야.”

인간인 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큰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랑이라고 깨달은 건 용사로 부활한 이후고.”

“…팔을 자른 일로 반한 건 아닐 테고.”

“누굴 피학성애자로 보는 거야. 아니거든? 그냥 혼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 하다 보니까 결론이 그렇게 났어. 네가 말했잖아. 네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거나 네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냐고.”

“…….”

“그런 거 생각했더니 화가 나잖아. 절대 축복할 수 없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인정했지. 내가 네게 반했구나. 아이고 결국 사랑에 빠졌구나.”

그랬는데 사람 팔을 자르질 않나, 납치하고 독을 먹이질 않나. 나는 슬쩍 놈을 흘겨봤다.

“그런 행동이 마족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거야, 인마. 이제 마족 대표가 되었으면 걸맞게 진중해져 봐 좀.”

내 말에 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너를 납치하는 편이 큰 피해 없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한 건 나인을 비롯한 고위 마족들이다.”

“…글렀네. 아주 종 자체가 글러 먹었어.”

“원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주의라.”

“그건 또 나랑 맞네. 젠장…….”

투덜거리다가 펠런의 말에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고위 마족들이 조언했다고?”

“그래. 마왕으로 각성한 후 나 혼자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져 이곳 바얀스를 비롯해 북 대륙에 거주하는 고위 마족들의 조언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펠런은 덤덤하게 영토와 힘을 가지고 있는 고위 마족들은 대부분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마왕의 각성과 더불어 찾아올 이번 대의 용사는 마왕의 측근이니 절대 공격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 그거 자세히 이야기해 봐.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던 펠런이 덤덤한 목소리로 3년 전 고위 마족들에게 내린 명령을 설명했다. 내가 자허 블리스라는 사실을 아는 건 오로지 나인과 펠런뿐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마왕에게 설명을 원하는 간 큰 고위 마족은 없었던 듯했다.

그저 한 마디면 족하다. 용사를 적대하지 말라.

“호전적인 네 성격을 보자면 용사가 된 직후 어떻게든 나와 싸울 자리를 원하리라 여겼다. 어쩌면 내게 부활했다는 말도 없이 단신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거니 했다. 네가 내게 말했던 용사는 제대로 된 동료는 찾아볼 수도 없는 기구한 자였으니.”

“그래서 드로젠 국경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나를 잡으려고?”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지만 제국 내에도 밀정이 잠입해 있다. 더군다나 황제는 너를 감출 생각도 없었지. 네 움직임을 전해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구나. 젠장. 좀 더 긴밀하게 움직이면 깜짝 선물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깝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죽인 황제 놈의 실수지. 펠런과 나의 관계라 괜찮은 거지, 정말 마왕과 용사였어 봐. 빌어먹을 놈의 제국 같으니. 중심부에서 중요한 정보가 터진 수도꼭지처럼 줄줄 샜군.

끙 앓는 신음을 토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를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속이 조금 뒤틀렸다. 권력을 멋대로 부리는 쓰레기를 죽인 것에 후회는 없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러더군.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협조한 후 빚을 지우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래서 생각했다. 네가 죽기 전까지 바라던 일이 뭐였나 하고.”

“…이종족의 섬에 가는 거였지.”

“그래. 그래서 팔을 자른 후 독을 먹이기로 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극단적이야! 중간 과정이 전혀 없잖아. 그래서 성검 빼앗고 독 먹이고 일이 잘 해결됐어? 내가 화만 났잖아.”

큰일이다. 고위 마족들도 제정신이 아닌가 봐. 무슨 그따위 조언을 하고 그런담. 아직 만나지 않은 마왕의 부하들을 생각하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잘 해결되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어 봐. 지워지지 않는 깊은 골이 생길 뻔했다.

“내가 성격 좋고 호탕하고 뒤끝 없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라. 이 자식아. 보통 사람 같았으면 네 집요함에 질려서 벌써 달아났어.”

“네가 도망칠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집요하게 굴 일도 없었다.”

못된 말을 하는 건 이 입인가? 그런 건가? 어디서 건방지게 적반하장질이야. 혈압이 오를 것 같아 핏대 오른손으로 놈의 양쪽 뺨을 쥐고 쭉 잡아당겼다. 제법 단단한 살이 멋대로 쭉 늘어나는 걸 툭 놓고 다시 놈의 가슴팍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큰일이다. 죽을 때까지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이런 못된 놈을 세상에 풀어두는 건 용사가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칭찬 고맙군.”

“칭찬이 아니다, 이 자식아. 얼굴이 잘생겨서 봐준 줄 알아. 네 미모가 널 살린 거야.”

놈이 옅게 웃는다. 종종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외모를 칭찬하는 게 좋은 모양이다. 아이구, 잘생겨서 좋았어요? 히죽거리며 놈의 턱을 쥐고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자세가 제법 좋다. 특히, 잘 볼 수 없는 각도의 펠런 얼굴은 두 배로 좋다.

키스해야지.

고개 숙여 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볍고 부드럽게, 혀는 쓰지 않고. 도장을 찍듯 꾹 눌렀다 떼자 놈이 조금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귀여워. 젠장.

“잘생기고 귀엽고 다 해먹어라.”

“잘생기고 귀여운 건 너도 마찬가지잖나.”

“음, 아니지. 나는 멋있는 편이지. 귀여운 건 아니지.”

뭔가 할 말이 많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에게 멋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나 정도 되어야 놈의 표정을 일일이 구분할 수 있을 거다. 지금도 거의 무표정에 가깝고.

“일 다 풀리면 같이 여행 가자.”

“언제든지, 네가 원하면 시간을 내겠다. 그런데 어딜 가고 싶은 거지?”

“어디겠어? 이종족의 섬이지.”

“…….”

놈의 반응이 미묘하다. 왜 저러나, 그 섬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바로 이유를 깨닫고 낄낄 웃었다. 놈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는데 아니야.

“도망갈 생각 없어 인마. 이제 너 있는 곳이 내 집인데 내가 가긴 어디를 가.”

“…듣기는 좋다만.”

“정말이야. 날 봐. 마경이고 마족 소굴이고 너 쫓아서 열심히 왔잖아? 이제 신용해도 되지 않아?”

“…네가 신용을 말하나?”

“너무하네. 그래도 거짓말은 한 적 없다고?”

투덜거리며 놈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느긋하게 누워 있던 놈의 표정에 균열이 일더니 다급하게 가슴팍에 걸린 단추를 푸는 내 손을 붙든다. 아니 왜.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놈을 바라봤다.

“대화도 대충 나눴겠다. 이제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할 차례 아냐?”

“…우리 대화 어디에 성애적인 분위기가 있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했던 부분?”

“…….”

할 말을 잃은 듯 놈의 손이 굳었다. 곧 뾰족한 귀 끝이 발갛게 물든 놈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며 나는 나머지 단추를 마저 풀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감히 내게 말발로 이기려 들어. 아직 한참 멀었다.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걱정 마. 그만큼 나도 너 깨물고 찢고 부술 거야.”

“…….”

당하고만 사는 놈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슬쩍 윙크했다. 놈이 낮게 탄식한다. 아니 그런 분위기 아니라니까. 마지막 남은 단추 하나를 마저 풀고 나는 놈의 가슴팍 위에 손을 얹었다.

“아니면 내가 덮친다?”

“…….”

“나 아직 포기 못 했는데. 네 엉덩이를 내게 주지 않을래? 소중하게 대할게.”

“싫다.”

“칼 같네, 정말. 아니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면 엉덩이도 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다시 말하지만, 싫다.”

이럴 때만 단호한 것 좀 보라지. 슬금슬금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손을 빠르게 쳐내는 놈의 거절에 나는 시무룩해서 얼얼한 손등을 어루만지며 놈의 허벅지 위에 내 다리를 얹었다.

“그럼 엉덩이 빼고 괜찮나? 넣겠다고 안 할게. 나도 너 만지고 싶어서 그래.”

“거길 노리는 게 아니라면야…….”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펠런에게 조금 억울해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신용이 없나? 나를 속인 놈에게 적반하장으로 의심을 받으니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면 금방 풀이 죽을 놈을 걱정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자상한 사람인데 놈이 몰라줘서 참 슬프단 말이지.

바지를 마저 벗겼다. 놈이 머뭇거리며 한 장 남은 속옷을 마저 벗으려 들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내가 널 만질 거거든? 얌전히 있어. 저항하지 말고. 정 못 참겠거든 너도 해도 되는데. 그럴 거면 끝까지 해.”

서로 만지다가 이성을 잃을 것 같으면 도망치기 일쑤인 놈의 저항을 처음부터 막아버리고 나는 놈의 하반신 위에 늠름하게 올라타 놈을 내려다봤다.

항상 놈에게 받기만 해서 지금 이 상황이 즐겁다. 조금 긴장한 듯 나를 바라보는 펠런의 시선마저 짜릿하다.

그러고 보니 놈의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셋. 어린 나이에 마왕이 되어서 그렇지 이제 막 어른이 된 놈이다. 지난 생까지 합하면 제법 나이를 먹은 내가 주도를 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멍청한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 숙여 놈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

놈이 숨을 들이켠다. 나는 슬쩍 웃으며 입안에 탄탄하게 씹히는 놈의 피부를 맛봤다. 도톰하게 이 사이 걸리는 탄력 있는 피부, 부풀듯 입안에 볼록하게 들어온 피부를 혀끝으로 핥았다.

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금 차가운 피부가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겨드랑이를 지나서 가슴 위를 배회해 보면 완벽한 흉근에 감탄하고 만다.

목덜미를 핥다가 고개를 들어 뾰족한 귀 끝을 혀로 할짝거렸다. 놈의 몸이 내 아래서 긴장한다.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슬쩍 엉덩이를 흔들어 짓누른 놈의 성기를 자극했다.

사랑은 사람을 참 뻔뻔스럽게 만든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럽긴커녕 내 행동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놈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열이 오르는 놈의 피부, 숨을 들이켜는 소리. 긴장으로 수축한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탐욕스럽게 보고, 느낀다. 네가 나로 인해 변하고 있구나. 내가 네게 자극이 되는구나. 그 모든 것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이고 만족이다.

주는 것만으로 동시에 받는 것이 있다. 이건 또한 내게 선물 같은 거라 이보다 더한 행동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몸은 마치 뱀처럼 놈의 몸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놈의 몸 어느 곳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신중하게 맛보고 어루만졌다. 도드라진 쇄골, 단단한 가슴 위를 핥고, 근육 잡힌 아랫배를 이 세워 긁으면 놈의 몸이 꿈틀, 크게 경련했다.

신음을 삼키듯 놈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이미 반쯤 발기한 놈의 성기가 내 아랫배에 툭툭 닿는다.

마음 같아서 신음도 듣고 싶지만, 더 도발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시트를 움켜쥔 놈의 손이 자꾸만 꿈틀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나를 붙들고 쓰러트린 후 박고 싶다고 외치는 듯하다. 놈은 지금 신음뿐만 아니라 놈 안에서 들끓는 흉포한 욕망과도 싸우는 중이리라.

욕망에게 져도 되는데.

놈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생각을 하며 나는 히죽 웃었다. 오목한 배꼽 언저리를 핥다가, 놈의 속옷을 이로 물고 슬금슬금 벗겼다. 내 더운 콧김이 닿자, 놈의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게 보였다. 탄탄한 허벅지에 얼마나 힘이 들어간 건지, 놈의 피부가 움찔움찔 경련한다.

누굴 피학성애자로 보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사실 조금 아픈 편이 즐겁더라. 그렇다고 맞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이성 잃고 내게 달려드는 놈의 절박함을 즐기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어 물고 뜯고 질겅거리며 나만 원하는 놈이 어찌나 귀여운지. 이걸 피학성애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야지 어쩌겠어.”

갑갑한 속옷 밖으로 튀어나온 놈의 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허벅지에 걸쳐진 속옷은 잠시 내버려 두고, 반쯤 발기하고도 제법 위용이 대단한 놈의 것을 한 손에 쥐어본다.

다 커지면 위아래로 쥐고도 남겠군. 손안에서 맥동하는 두툼한 중량감에 잠시 혀를 내두른다. 나도 많이 커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은 정말 크다.

어쩌면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걸지도 모른다. 마족의 성장기는 인간보다 긴 걸까? 나는 이제 여기서 변하지 않을 텐데, 조금 아쉬워서 길게 위로 훑어봤다.

“…….”

놈이 숨을 억누르듯 목 안에서 끓는 신음을 삼켰다. 움찔거리며 몸을 뒤트는 놈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야하다. 아, 젠장. 나도 박고 싶다. 그래도 놈이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벌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손안에서 점점 단단해지는 놈의 귀두에 후, 하고 더운 입김을 불었다. 약한 자극에도 제대로 반응해 주는 놈을 보는 것이 즐겁다.

“와, 더 커지네. 쑥쑥 자라고 있어 펠런 주니어.”

“…그런 말 하지 말고.”

쉰 목소리로 낮게 말하는 놈의 목소리가 야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두 손으로 놈의 성기를 쥐고 엄지로 꾹꾹 도드라진 핏줄을 훑었다. 귀두 바로 아래부터 고환까지 길게 훑어 내린 후, 다시 밀어 올리자 놈이 허리를 퍼드득 떨며 무릎을 굽혔다.

맛 들겠네, 이거.

방울방울 맺힌 선액이 빵빵하게 부푼 고환을 주무르자, 기둥을 타고 주룩 흘렀다. 시큼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놈의 체향이 뒤섞였다.

훅 끼치는 놈의 살냄새에 내 하반신도 반응하고 만다. 놈을 만지기 전엔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게 무색하게 내가 먼저 군침을 삼킨 후 놈의 성기를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유, 마!”

놈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내 얼굴을 밀어낼 생각이겠지만 어림도 없지, 혓바닥으로 기둥을 감싸듯 머금은 후 입천장으로 슬슬 귀두를 문지르자, 놈의 손은 내 머리에 닿기도 전에 털썩 떨어져 시트를 움켜쥔다.

내 몸을 지탱하던 놈의 두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긴장으로 수축한 놈의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젠장, 놈의 성기가 입안에서 점점 더 커졌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크기야? 항상 당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나? 턱이 아플 지경이다. 그렇다고 뱉으면 바로 놈이 물러날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목구멍 깊이 놈의 성기를 삼켰다.

“후우, 으븝!”

벌어진 턱 사이로 주체하지 못하고 침이 끈끈하게 늘어졌다. 놈의 허벅지에 점점이 떨어진 타액이 멍울져 시트로 주르르 미끄러진다.

놈의 발끝에서 시트가 투두둑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힘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지만, 놈의 허벅지가 내 머리를 짓누르는 일은 없다. 아직 제정신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목구멍 안쪽으로 꿀렁꿀렁 놈의 성기를 삼켰다. 그래도 뿌리까지 삼키지는 못할 것 같다. 그전에 내가 질식하겠지. 속으로 허허 웃으며 놈의 허벅지를 쥐고 위아래로 느리게 빨아들이고 뱉었다.

입안에 시큼하고 비린 맛이 가득하다. 그리고 짙은 살냄새에 취할 것 같다. 놈과 내가 쓰는 비누 향, 놈의 반응에 취할 것 같다.

혀끝을 모아 놈의 성기를 짓누르고 느리게 성기를 빼낸다. 내 타액에 축축하게 젖은 놈의 성기와 내 입술까지 끈끈한 타액이 실처럼 늘어졌다.

“미치겠네. 흥분돼.”

입맛을 다시며 놈의 성기를 두 손으로 쥔다. 끈적끈적한 살덩어리가 뜨겁다. 손가락 사이 흘러내리는 내 타액과 놈의 선액에 손이 녹아내릴 것 같다.

창백한 놈의 피부가 붉게 물들고, 놈이 흐트러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열 오른 불그스름한 눈가에 나는 군침을 삼키고 놈의 귀두 끝을 슬쩍 혀로 핥았다.

“크, 윽!!”

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킬킬 웃으며 놈을 바라봤다. 한 줌 남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놈에게 좀 더 쉽게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슬쩍, 놈의 귀두를 엄지로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고.

놈의 눈에 귀기가 돌았다. 그래, 내가 잘 알고 있는 눈이다. 나는 태평하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내 어깨를 움켜쥔 놈이 다른 손으로 셔츠 목깃을 쥐고 찢는다. 태산을 밀고 바다를 가르는 힘 앞에서 천 한 장이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그대로 종이처럼 북 찢겨 나가는 천이 나풀거리며 침대 밑에 떨어졌다.

“귀, 여워, 죽겠네.”

나를 쓰러트리기 무섭게 놈이 내게 올라탔다. 단지 손짓 몇 번으로 바지가 찢어지고 속옷은 넝마가 되고 말았다. 알몸으로 침대 위에 누운 나는 태평하게 펠런에게 말했다.

“그러게 내 말을 잘 들었어 봐. 옷 한 벌은 버리지 않았잖아?”

“…….”

아직 희미하게 이성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놈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놈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나는 다정스레 놈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원한 거야.”

“…….”

“그리고 무섭다고 미루면 영영 고치기 어렵잖아. 해봐야 익숙해지지. 그래야 네가 너를 자제하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거 아냐.”

“…이런 일로, 너를 상하게, 하는 것이… 싫다.”

“사실 나도 못 참겠거든. 네 말대로 내가 변태라.”

그릉그릉 거친 숨을 내뱉던 놈이 내 어깨를 물었다. 선명하게 파고드는 치아는 짐승의 입질과 같다. 제 것이라는 짐승 같은 마킹. 통증과 더불어 찾아오는 기묘한 만족감에 나 역시 고개를 들어 덥썩 놈의 어깨를 물었다.

누가 뭐래도 이 자식은 내 것이니까.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 놈이 축축하게 젖은 제 성기를 문질렀다. 입구를 찾자마자 찔러 넣을 기세라 나는 슬쩍 요 며칠간 계속 물 덩어리로 뒤를 씻어둔 나 자신을 칭찬했다.

그래, 언젠가는 할 줄 알았지.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빠진 사이, 넣을 곳을 찾은 녀석의 성기가 잘금잘금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으, 읏… 좋아…….”

아직 조금은 이성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막무가내로 쑤셔 넣고 박지 않아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던 차, 결국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건지 허리를 조금 빼던 놈이 단번에 아랫배에 닿을 기세로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아, 흐아, 악!”

허리가 낭창낭창 휘며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몇 번을 했는데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다. 나는 다급하게 놈의 어깨를 붙들고 두 다리로 놈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미 몇 번이고 쑤셔져 익숙해진 안쪽은 단번에 결장까지 꿰뚫려 내장 안쪽을 헤집는 통증과 함께 배가 꽉 차는 기묘한 느낌을 함께 가져왔다.

놈의 가슴과 어깨가 나를 짓누른다. 온몸이 놈의 몸에 깔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놈의 먹이가 된 것 같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는 놈에게 더듬더듬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걸로 어디 죽겠, 어? 큰소리치더니, 별거 없네.”

“…….”

놈을 도발하는 이유는 별거 없다. 놈이 나를 안는 일에 대한 저항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내가 괜찮다는데 뭐 어때. 종일 놈을 맛보고 끌어안고 만지고 싶은 것도 참고 있는데 며칠에 한 번, 그것도 이렇게 도발하고 도발해서야 할 수 있다니 너무하잖은가.

도발이 어느 정도 통한 듯하다.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은 놈이 곧장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와 동시에 따뜻하고 질척한 것이 안에 파고든다. 놈이 벌써 사정할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눈을 깜박거리다 깨닫는다.

한 줌 남은 이성으로 어떻게든 마법을 쓴 놈이 작은 탁자 서랍 안에 들어 있던 젤을 꺼낸 모양이었다.

손으로 펴 바를 이성은 남아 있지 않으니 남은 건 마법이고, 그걸 물 덩어리 다루듯 내용물을 쥐어짜 그대로 내 안에 밀어넣은 건데, 빌어먹을. 이런 상황을 사전에 염두에 두지 않은 내 패배다.

“아, 흐, 그앗, 아아, 이, 미친 자식아. 그걸, 넣을 생각을, 하으, 응!”

안을 헤집는 놈의 움직임이 아까보다 수월하다. 안쪽 점막에 휘감기며 깊이 파고든 귀두가 전립선을 지나쳐 결장을 쳐올리듯 쑤실 때마다 아랫배가 잘게 경련하며 온몸 근육이 수축했다.

발끝까지 뻣뻣하게 곱아, 혈관이며 신경이 온통 도드라진다. 숨 쉬지 못하고 시트에 머리가 처박혔다.

다급하게 놈의 어깨를 붙들었다. 손톱이 녀석의 어깨와 팔을 마구잡이로 긁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처 하나 나지 않을 몸에 생채기가 났다.

끅, 윽. 숨넘어가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엉덩이골 사이로 체온에 녹은 젤이 흘러 시트를 적셨다. 젖은 시트가 엉덩이에 달라붙었다가 느리게 떨어졌다.

“…유마, 힘들면, 날 쳐도 괜찮…….”

“…….”

더듬거리며 힘겹게 말하는 놈의 목소리에 생각이 잠시 멈췄다. 녀석은 이 상황에서 내가 정말 거부할 거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 판도 내가 깔고 덮치기도 내가 먼저 덮쳤는데?

내게 얼마나 심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싫다고 밀 수 있는 놈은 내가 아니라 펠런일 텐데.

젠장. 내 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뭘 말해도 놈은 자꾸 배려라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나 변태 맞다고. 나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놈의 목을 두 팔로 휘감고 있는 힘껏 녀석의 성기를 조였다.

“…큭!”

“할 거면 끝까지 할 각오하고 덤비라고 했지?”

기껏 할짝할짝 열심히 핥아서 분위기 다 띄워놨더니, 치긴 뭘 쳐. 괜히 내 눈치 본다고 그게 시들면 내가 네 놈 명치를 치겠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놈이 옅게 웃는다.

“들어, 봐 이 자식아. 나만 받는 게 아니야. 나만, 희생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이성 잃은 네가 날 치면, 나도 널 팰 거야. 흐으……. 그리고 네가 날 물면, 나도 널 찢을 거고……. 그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네가 좋은 거야. 모르겠어?”

“…안다.”

“알면, 닥, 치고 움직여. 나도 즐기고 있으니, 까.”

이성 없는 놈이 한 대를 치면 난 세 대로 갚아줄 거다. 그거면 되는 거 아닐까? 라는 뜻을 담아 놈에게 말했다.

그럭저럭 놈에게 내 마음이 닿긴 한 건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긴 놈이 다시 허리를 깊이 밀어붙였다. 안이 가득 차다 못해, 놈의 모양대로 벌어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키고 느른하게 엉덩이를 돌려 자극한다. 빌어먹을, 인제 와서 내가 놈을 덮칠 기회가 온다고 해도 박힌 만큼 잘 느낄지 모르겠다.

놈이 고개 숙여 가슴을 핥았다. 땀에 젖어 조금 차가워졌던 가슴에 더운 혀가 닿자, 저릿저릿한 느낌에 허리가 펄쩍 튀었다. 허겁지겁 가슴을 물고 빠는 놈의 입술과 치아가 닿을 때마다 발등이 곱고 머릿속에 눈부신 불티가 솟구쳤다.

“크, 윽!!”

날카로운 치아가 가슴을 문다. 등허리에 파고드는 놈의 손톱. 서로 대화하지 않아도 몸이 받는 자극과 부담 자체가 아까와 전혀 다르다. 펠런이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거다.

내장을 뒤집을 듯 퍽, 소리를 내며 안을 쑤시고 들어오는 성기에 나는 폐에 남은 모든 숨을 뱉고 헐떡거렸다. 벌어진 입과 코로 다시 숨을 마시기 무섭게 내 몸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놈이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시야가 반쯤 가려졌다. 땀에 뒤섞인 체액. 그리고 등허리에 달라붙는 시트의 감촉. 물어뜯긴 자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본능적으로 놈의 어깨를 미는 내 손목을 놈이 부러트릴 듯 쥔다.

그렇다고 부러지진 않는 것이, 이미 사지에 강화 마법을 걸었거든. 아니면 못 버티니까.

놈이 고개 숙여 입을 맞췄다. 아니 입술을 물어뜯는다. 나 역시 이 세워 놈의 입술을 물고, 찢고, 흐르는 피로 메마른 목을 적셨다.

놈의 어깨를 깨물고, 다시 입을 맞춘다. 쏟아지는 놈의 검은 머리카락을 쥐고 투둑, 투둑 소리 나도록 끊어지는 걸 잡아당겨 다시 놈의 목에 팔을 감는다.

아, 젠장. 사랑하는 개새끼 같으니라고.

뭉텅,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상관없다. 나중에 치료하면 될 일이다. 그 대신 나도 놈의 목덜미를 으적, 문다. 이빨이 파고들고, 놈이 경련한다. 입안에서 펠런의 숨소리를 듣는다.

분명 아프고 괴로워야 하는데, 타이밍 좋게 내벽을 유린하는 놈의 용두질에 점막이 얼얼할 정도로 자극을 받아, 이미 내 성기에서 정액이 줄줄 흐르고 있다.

“아, 아아. 좋아. 갔, 어. 갔는데에……. 미친, 부족…해!”

“…….”

연속으로 찾아오는 절정에 나는 이미 미친 짐승이다. 젠장. 박고 싶어. 놈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틀어쥔다. 손톱이 단단한 둔부에 파고든다.

놈이 움찔, 이성 잃은 와중에도 다시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삽입한 상태로 내 몸을 훌렁 뒤집어 다시 박는다. 젠장. 눈치도 빠른 놈 같으니라고.

시트에 턱이 처박혔다. 침대가 박살 날 것처럼 삐걱거렸다. 허공에서 덜렁덜렁 놈의 배에 감질나는 마찰만 받던 내 성기가, 젤에 푹 젖은 따뜻한 시트에 쓸려, 울컥울컥 정액을 쏟는다.

“아, 흐, 아아아!”

놈이 내 팔을 양손으로 움켜쥔다. 뒤로 젖혀진 허리가 파들파들 떤다. 짓눌린 성기에서 묽은 정액을 쏟고, 나는 혀를 내밀고 더운 숨을 내뱉는다. 중독, 되겠네. 놈과 몸을 섞다 보면 나도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누군가 내게 통신을 건다. 나는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정신머리가 없다. 닥쳐 나, 지금 바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통신은 끊겼고 누군지 확인할 생각도 없이 나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속이 텅텅 비는 것 같다. 더 나오지 않을 때쯤에야 놈이 내 안에 사정한다. 그래. 이 지루 같으니라고…….

아직 밤은 멀었지. 나는 고통에 목쉰 신음을 토하면서도 웃는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어쩌면 더 오래 살아도 될 것 같다.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놈의 엉덩이를 노릴 수 있는 날도 오겠지.

“허, 으극!! 악. 아프, 아프다고! 생, 생각만 했어. 아직 실행 안 했다……. 고으, 흑!”

아, 젠장. 놈의 눈치가 무뎌질 날이 어서 오길 바랄 뿐이다.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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