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언제까지고 (22/23)

5. 언제까지고

“와, 젠장……. 해가 떴네.”

내 생에 가장 길게 느껴졌던 밤이 지나갔다. 정신을 놓고 싶었지만, 상처에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와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살점과 핏물은 시간이 많이 지나 시커멓게 말랐다.

다행스럽게도 해가 뜰 즈음 간신히 몸을 회복시킬 정도의 신성력이 돌아왔다. 나는 부서진 이 조각을 뱉고 너덜너덜한 몸을 치료했다.

치료 한 번에 엉망진창으로 박살 난 팔다리가 돌아오고, 펠런 놈이 베어 먹은 살점이 아물었다. 회복은 회복이고 터진 내장과 부서진 뼛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느껴지는 고통에 갈라진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삼켜야 했다.

빌어먹을 펠런 자식.

고개를 들면 살을 엘 듯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펠런과 내가 싸우느라 벽을 박살 낸 탓이다. 여유가 좀 생겨 주변을 살펴봤더니 대리석 바닥도 반만 남았다. 오오, 심지어 흉물스러운 골자가 그대로 드러난 벽 밖으로 멀리 북부 산맥이 희미하게 보였다.

빠르게 밝아오는 하늘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기어이 살아남았구나. 장하다, 나 새끼. 장하다, 윤유마.

속이 울렁거렸다. 목도 마르고 어지럽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상체만 반쯤 일으켰다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었다. 체내 고여 있던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넘치는 느낌이 썩 좋지 못하다.

그렇구나, 치료가 내부에 들어온 이물까지 제거하는 건 아니었지. 어처구니없어서 낄낄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하룻밤 사이 신경이 무뎌진 건지 미쳐버린 건지 모르겠다.

팔을 멀리 뻗어 찢어진 침대 시트를 끌어와 대충 어깨에 둘렀다. 시트에 묻은 돌 조각 때문에 까슬까슬하다. 그래도 워낙 단단한 몸이라 돌 파편 정도로 생채기도 나지 않더라. 그런 몸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으니 대단한 치악력이다.

망할 마왕 새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원을 그리며 가볍게 풀었다.

뭐 상관없다. 어제저녁 놈에게 깔린 후 잠깐 기절했다. 그리고 다시 눈떠 보니 상황은 진행 중이었고, 펠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를 념념거리며 덮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맛이 좋으면 저렇게 아껴 먹을까. 나는 훈훈하게 웃으며 놈의 멱살을 쥐고 얼굴을 후려쳤다.

사실, 자유무역 도시에서 비경으로 돌아오면서 펠런에 대해, 전망에 대해 생각 참 많이 했다. 그래서 피치 못할 놈의 사정을 헤아려 조금은 놈에게 관대해질 생각이었다.

그것도 기절하기 전까지 일이다. 내가 기절하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짐승 같은 놈에게 화가 나서 바로 반격했다. 성검은 빼앗겼고 계약까지 적었지만 알까 보냐.

그런 게 없었어도 놈을 칼로 벨 생각은 없었다. 주먹으로 충분하니 말이다. 그렇게 새벽까지 싸우고 깔리고, 박히고 후려치다 보니 이 시간이다. 나도 참 활기찬 녀석이라니까.

조금 뿌듯해서 바닥을 본다. 바닥에 칠한 핏자국 중 절반 이상 지분은 펠런에게 있을 거다. 하하. 내가 아무리 놈에게 반했어도 당하고는 못 살지.

이왕 일어난 김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풀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다. 내 정강이를 베고 누워 있던 놈이 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뜬 탓이다. 와, 미친. 깜짝이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시커먼 눈동자를 응시하며 절로 입매가 굳어졌다. 새벽까지 나를 물어뜯을 때는 언제고 벌써 일어날 줄이야. 잠도 적은 자식 같으니.

“더 자지 그래. 벌써 일어났……. 억!”

혼이 나간 듯 멍한 녀석의 표정을 봤을 때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거로 생각했지만, 갑자기 달려들 줄은 몰랐다.

송어처럼 튀어 올라 내게 달려드는 놈 때문에 혀를 깨물었다. 욱신거리는 입 안 통증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물린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자, 즉시 놈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네가 짐승도 아니고 왜 자꾸 사람을 물어. 되도록 상냥하게 굴고 싶어도 빌어먹을 자식이 기회를 주지 않으니 큰일이다.

“그래도 적당히 미칠 줄 알았지. 구제 불능으로 맛이 갈 줄 알았나.”

한 대 맞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목울대를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놈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고 한숨을 내쉰다.

어제저녁 싸움으로 놈의 왼쪽 귀는 날아갔고 왼쪽 눈도 터져서 보이지 않을 거다. 저래서야 제대로 균형을 잡기 어려울 텐데 눈앞의 용사를 쓰러트리겠다는 본능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하긴, 나를 적극적으로 죽이려 들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다.

치료를 끝낸 나와 다르게 놈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완벽하게 마왕으로 각성한 펠런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마족들의 신을 모시는 신관이 와야 할 텐데,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마족 신관은 나인뿐이지만 말이다.

펠런의 목숨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내가 워낙 마음이 약해서 손속에 사정을 뒀기 때문은 아니고 빌어먹을 계약 탓에 치명상을 입히기 전에 손이 굳더라.

성검이 내 손 안에 없는 것도 한몫했다. 물론 놈도 칠흑 같던 검을 꺼내지 않고 맨손으로 덤볐지만 말이다. 내가 계약 문제만 아니었어도 놈과 목숨 걸고 대련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턱이 잡히고도 어떻게든 나를 맛보겠다고 밀어붙이는 펠런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놈의 목이 삐걱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갔다. 속이 후련한 것도 잠시, 갈고리 같은 놈의 손이 내 어깨를 움켜쥔다.

근육을 파고드는 손톱에 핏물이 줄줄 흐른다. 신음이 나올 것 같아 숨을 멈추고 놈의 손을 움켜쥔 후 힘주어 빼냈다. 생살이 뚫린 건 고통스럽지만 치료는 잠시 보류하자. 이런 가벼운 상처에 치료를 남발하면 안 된다는 걸 어젯밤 내내 배웠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다시 놈이 달려든다. 활처럼 휘어진 정강이가 놈의 몸을 후려쳤다. 벽으로 튕겨 날아간 놈이 가볍게 벽을 딛고 다시 덤빈다. 이 자식은 왜 미친 후에 더 근성 있게 덤비는 건지 모르겠다. 맨정신일 때 이러면 좀 좋아?

“진즉에 아카데미에서 대결을 이렇게 했어 봐. 마음 편하게 섬으로 도망갔지.”

학을 떼고 진저리치지 않았을까?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받아들인 상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내 말을 알아듣긴 한 건지 놈의 기세가 좀 더 난폭해졌다.

“진짜라고 믿은 건 아니지? 농담이다? 어디 갈 생각 없거든?”

“…….”

나는 알몸이고, 놈은 너덜너덜한 셔츠 한 장 걸친 상태다. 바지는 이미 찢어져 정강이와 발목만 간신히 가린 흉한 꼴이다. 저 셔츠도 찢고 싶은데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나 혼자 알몸이라니 억울하기도 하지. 겸사겸사 저 자식 상체 근육도 보고 싶고.

“잘 피해봐!”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해 놈의 옆구리를 노리고 빠르게 내찔렀다. 그걸 펠런이 용하게도 쳐냈다. 밖으로 빠진 팔에 부딪혀 간신히 골자에 매달려 있던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벽돌 조각이 몇 초가 지난 후, 바닥에 턱턱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나는 실소한다. 이대로 벽 밖으로 떨어지면 마법으로 보호하지 않고선 즉사할지도 모르겠다.

콰르륵―!!

벽이 무너진 덕분에 우리가 저지르는 소란을 요새 밖에서 알아차린 모양이다. 어제 밤새도록 아무 소식이 없던 나인이 링크를 연결해 왔다.

통신에 대답할 틈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뭔가 알아야 할 소식을 전할지 몰라 다급하게 연결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잘 버티고 계십니까?

- 살려줘!

- 저런, 바쁜 모양인데 끊을까요?

이 자식 봐라? 어금니에 힘 꽉 들어가게 하네? 나인의 통신에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느라 한눈을 파는 사이 펠런 놈에게 두들겨 맞고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물수제비처럼 두어 번 바닥에 튕겨 벽에 부딪힌 나를 마무리 짓겠다고 놈이 발로 후려쳤다. 한 바퀴 굴러 간신히 명치를 부술 듯 달려든 놈을 피하고 곧장 놈이 서 있던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이대로 아래층으로 떨어지면 좋고, 떨어진 김에 제정신을 되찾으면 더 좋고.

- 아직 끊지 마! 이 자식아. 할 말 있어서 통신 건 거 아냐?

- 그렇긴 합니다만, 대답할 상황이 아닐 것 같아서요.

- 알면. 용건만. 간단히!

나인 녀석과 연락을 한다고 잠시 한눈을 판 내가 잘못이다. 그 틈을 노리고 금 간 바닥을 밟고 솟구친 놈이 한 바퀴 빙글 돌며 내 턱을 발끝으로 쳤다.

“커, 윽!!”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튄다. 아픈 것보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일그러졌다. 단 한 방의 치명타를 허용한 탓에 턱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흔들렸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속이 뒤집힌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서 먹은 것도 없는데 위액을 쏟으며 구토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다시 고개를 들자 코를 타고 핏물이 물처럼 줄줄 흘렀다. 뇌진탕이 온 것 같다.

- 제국에서 드로젠을 되찾기 위해 병사를 모집 중이라고 합니다.

- …벌써?

- 마왕이 죽었다고 알려졌으니까요. 구심점을 잃은 마족이 드로젠의 땅에 집착하지 않으리라 믿는 거죠.

- 새로운 황제가 그래? 아니, 아직 즉위식은커녕 전 황제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잖아.

- 갑작스러운 황제의 서거를 드로젠 탈환으로 무마할 생각인 겁니다. 황제의 최후를 본 기사와 마법사가 제법 많으니 그들의 입을 막을 시간을 벌 겸, 드로젠으로 이목을 돌릴 셈이 아닐까요?

코와 입 안에 꿀럭꿀럭 들어차는 핏물을 내뱉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왜 하필 전쟁이냐. 하여튼 인간이 제일 파괴적이다. 이목을 끌 사건이 없어서 전쟁으로 무마하려고 해? 평화적인 방법도 있잖아.

가뜩이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상생할 생각은 없는 걸까. 공존과 평화. 얼마나 좋아. 나는 내 어깨를 무는 펠런의 그나마 성한 안구를 노리고 손가락을 휘둘렀다. 시야를 잃으면 좀 얌전해지려나.

한쪽 세반고리관이 망가지고 안구도 하나 터져서 원근감을 잡기 어려울 텐데 우리 마왕님 참 잘 움직인다.

이성이 없어도 두 눈이 다 머는 건 싫은 건지 고개를 뒤로 젖혀 내 손가락을 피한다. 손톱이 놈의 광대뼈를 긁고 지나갔다. 다시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뒤로 구른 몸이 허공에 뜬다.

이크, 무너진 벽 쪽이다.

다급하게 손을 뻗어 박살 난 바닥을 움켜쥔다. 추락하면 죽거나, 혹은 도망갈 수 있겠지. 어느 쪽이든 싫다. 여기서 결판내려고 온 거거든? 손끝에 힘을 줘 단숨에 솟구쳤다.

혹시 펠런 놈이 무너진 바닥 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내게 막타를 먹이지 않을까 불안했는데 옅게나마 당황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 조각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급하게 놈에게 물었다.

“…제정신 돌아왔냐?”

“…크, 윽!!”

놈은 다시 내게 달려들며 그럴 일 없다고 온몸으로 대답했다. 하하, 나는 실없이 웃으며 달려드는 놈의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내게 언제 돌아올 거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하긴, 너도 3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하루, 혹은 이틀 기다린 내가 물어볼 말은 아니다. 그래도 난 성미가 급한 편이라 되도록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최소한 돌아올 거라는 확신만이라도.

“너도 불안했냐?”

“…….”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어?”

“…….”

주먹이 부딪히고 손가락뼈가 터졌다. 그래도 주로 육탄전만 써서 다행이다. 놈은 대단한 전사이기에 앞서 마법사다.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그 힘으로 나와 싸웠다면 더 버티기 어려웠을 거다. 그런 마법은 나도 쓸 수 있지만 쓰고 싶지 않다. 수년간 창기사로 자라온 내 아집 때문이다.

“이제 어디 안 갈 건데. 계속 옆에 있을 건데.”

“…….”

“지금 날 봐라. 네게 처맞고 있으면서 씩씩하게 옆에 있잖아.”

“……?”

“얼마나 가련하고 헌신적이냐. 이런 날 봐서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와 줄 순 없어?”

“…….”

놈이 얼핏 기막혀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상한 생선 같은 눈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긴 자식이 양심이 있으면 내 말에 공감하면 했지, 기막혀하진 않았을 거다.

더 싸우면 안 될 것 같다고 몸에서 신호를 보냈다. 신성력은 얼마나 찼나. 완벽하게 치료할 정도로 모이진 않았다.

턱을 맞은 게 컸다. 나도 나지만 지금은 제국의 움직임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다. 드로젠과 국경이 이어진 곳은 블리스 제후국이고 드로젠의 유력 인사들이 다 죽은 것을 빌미로 제국은 사령관의 자리에 영감님을 앉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야 탈환하는 경우, 탈환의 대가로 드로젠 역시 제국에 복속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에 실패하더라도 제국이 아닌 블리스에 책임을 물기 쉽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인에게 빠르게 명령했다.

- 음, 어쩔 수 없지. 드로젠 국경에서 네 본모습을 보여. 순찰대와 함께 움직여도 좋다. 마왕이 없다 하더라도 손쉽게 드로젠을 받아 가지 못할 거로 생각하도록.

- 명령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나? 내 꿈이 제2의 마왕이라는 거?

- …당신이 말하면 진짜 같으니 제발 그만두시죠. 여하튼 나쁘지 않은 방법 같으니 그대로 하겠습니다. 추후, 왕께서 멋대로 움직인 죄를 물으신다면 당신을 걸고 넘어가겠습니다.

농담 아닌데. 진짠데. 히죽거리던 차에 다시 펠런에게 한 대 맞았다. 이크, 집중해야지. 더 맞으면 죽게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주먹질하는 내 손에 힘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더 때리면 쌓이고 쌓인 타격만으로도 놈을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시점부터다. 그래서 제대로 때릴 수 없는 거지. 계약이 제대로 도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 가기 전에 잠깐 펠런 좀 보고 가.

- 왕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 그건 아니고 더 때리면 죽을 듯.

-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죠.

- 계약서도 들고 와. 놈이 정신 차리면 강제로라도 서명하게 할 테니까.

- 자꾸 저를 한편으로 몰아가지 마시죠. 전 제 왕을 따릅니다.

- 와, 다행이네. 나도 펠런 편인데.

끄응 앓는 신음과 함께 나인이 통신을 끊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간신히 운용 가능할 정도로 찬 신성력으로 몸을 치료했다. 근육이 붙고 신경이 이어졌다. 그 즉시 놈의 목과 팔을 움켜쥐고 뒤로 넘긴다.

쩡―!!

사람 몸에서 날 수 없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이 다시 움푹 꺼졌다. 놈이 울컥,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한다. 하하, 괜찮아. 내가 널 죽일 정도로 패진 못하거든.

변명처럼 중얼거린 후 놈의 팔을 뒤에서 얽어 깔아뭉갰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기어코 일어나려는 놈을 체중으로 짓누른다. 근성으로 움직이고 싶어도 이미 근육이 말을 듣지 않겠지. 나도 아카데미에서 대련 중에 그 상태가 될 때까지 맞아봐서 잘 안다.

그 사이 나인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냥 보면 좀 이상한 광경이긴 하다. 바닥과 벽은 반 이상 무너졌고, 사방이 피투성이인 데다, 깔아뭉갠 놈은 이미 치료를 끝내 성한 벌거숭이고, 바닥에 쓰러진 놈은 만신창이니 말이다.

“…세상에, 맙소사.”

“치료하기 전에 일단 이 자식 기절 좀 시켜줄래?”

탄식하며 뻣뻣하게 굳은 나인을 향해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나인이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본다. 노려보면 어쩔 거야. 거, 용사인 내가 마왕 좀 잡을 수 있지.

“치료해서 그렇지 내가 더 많이 다쳤거든?”

“계약하길 정말 잘한 것 같군요.”

분을 억누르듯 단어 하나하나를 힘주어 중얼거린 후 나인은 버둥거리는 펠런을 수면 마법을 사용해 잠재웠다.

과연 전대 마왕이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닌 듯 나인의 마법에 저항하지 않고 순식간에 잠든 펠런 녀석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래 저쪽은 동료고 나는 적이라 이거지. 조금 섭섭한데 이거.

그래도 잠든 놈을 보니 긴장이 좀 풀렸다. 쉴 요량으로 바닥에 대충 주저앉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아드레날린이 제 할 일을 하는 건지 약간의 뻐근함 말고 다른 통증은 느낄 수 없었다. 급하게 끌어 쓰느라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빛의 신이 튼튼한 몸을 주지 않았다면 벌써 맛이 갔을 거다. 그것만큼은 고맙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으니 이제 숨을 돌려야겠다. 몸을 일으키자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흘러나왔다. 피와 정액 그리고 흙먼지에 뒤덮인 내 알몸을 목격한 나인이 질겁했다.

하긴, 나인으로서는 직장 상사의 성생활 혹은 업어 키운 자식의 일탈을 보는 느낌이겠구나. 괜히 쑥스러워 헤헤 웃자 나인 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부서진 방 안을 둘러봤다.

“아예. 박살을 내놨군요.”

“수리비 청구는 펠런에게 해. 같이 부쉈거든.”

“그렇게 따지면 5할은 당신 책임 아닙니까?”

“성검 가져갔잖아. 그거 팔아서 메우든가. 세상에 하나뿐인 검이라 비쌀걸?”

“쓸 수 있는 마족이 없는 검을 누가 삽니까? 집에 장신구로 둬봤자 다른 마족에게 불길하다는 소리나 듣죠.”

“…나중에 갚을게요.”

괜히 목이 움츠러들었다. 젠장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나도 유능한 부하가 있었으면 좋겠다. 강하고 마법도 잘 쓰고 돈도 많고 내게 충성하는 부하 말이다.

갚을 방법이 있느냐 묻는 놈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있고말고, 지금 당장 써먹긴 어려운 방법이지만.

기절한 펠런을 바라봤다. 좋아. 이 모든 일이 제대로 끝나면 저 자식을 내 부하로 부려먹어야지. 스스로 생각해도 재치 있는 아이디어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나인이 펠런 앞을 가로막듯 내 앞에 섰다.

“아니, 안 죽인다니까. 용 앞에서 공주 지키는 용사처럼 굴래?”

“…진짜 용사가 용에게 할 말은 아니잖습니까?”

“원한다면 진짜 용사처럼 굴어줄 자신이 있는데.”

“왕께서 항마력이 워낙 높아 곧 깨어나실 겁니다. 이 틈에 자리를 피하고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리시죠.”

“그건 안 돼.”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답 없는 나인 녀석을 흘깃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고 부서진 문을 껑충 뛰어 욕실에 들어갔다.

이런, 빌어먹을 싸움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건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마법으로 물 덩어리를 만들어 대충 몸에 묻은 먼지와 핏자국을 닦았다. 겸사겸사 엉덩이 세척도 하자. 펠런이 언제 다시 깰지 모르니 신속하게 씻어야 했다.

펠런이 박살 낸 물건 중에 탁자 위의 주전자도 있었던가. 목이 마른데 물 주전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내가 만든 물 덩어리로 갈증을 해결해야 했다.

그 사이 나인은 자신이 만든 인공 시종들을 불러 부서진 방을 치우게 했다. 뭉텅이로 쏟아진 돌 조각이 사라지고 바닥이 깨끗해졌다. 그렇지만 계속 여길 쓰지는 못할 거다. 일단 벽이 무너졌으니 말이다.

잠든 펠런을 어깨에 걸치고 나인의 안내대로 같은 층에 있는 다른 방으로 이사했다. 최소한 멀쩡한 침대와 식탁, 그리고 식탁 위에 따뜻한 음식이 준비된 멀쩡한 방이 기꺼웠다.

“이 방도 박살 내면 다음번엔 창고로 쫓아낼 겁니다.”

“펠런에게 그대로 전해줄게.”

“이 정도로 부순 걸 알면 왕께서도 겸허히 창고행을 받아들이실걸요.”

“…나중에 갚는다니까.”

옷장을 열고 새 옷과 바지를 찾아 입었다. 펠런의 체격에 맞춘 옷인지 조금 컸다. 그래도 괜찮다. 기장에서 많이 차이가 난 않으니까.

성큼성큼 테이블로 걸어가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사과를 하나 꺼내 소매로 문질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향기 좋은 사과지만 먹고 싶지 않다. 아마 입에 넣으면 또 토하겠지.

심드렁하게 바구니에 내려놓고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나인에게 턱짓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뜸을 들여?”

“당신이 여기 머물고 있기에 왕께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그거야 펠런이 알아서 감수할 문제고. 뭐 어쩌겠어. 그걸 알면서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게 네놈들 왕의 뜻인데.”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해도 놈에 대한 내 생각에 균열을 만들지 못할 거다. 펠런을 위해 희생한다든지 사랑하니까 떠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로지 자기 안위만 생각하고 살아온 수십 년인데 지금이라고 변할까 보냐. 저 자식은 내 거다.

“억울하면 너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 왔을 때 당신이 미친놈이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잖아. 펠런을 봐봐. 얼마나 기특하냐? 정신이 나갔어도 여전히 내게 집착하는 게 좀 귀여워야 말이지. 그런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야. 이성 없는 짐승을 어르고 달래며 키울 생각은 없어. …드로젠의 국경으로 가서 암룡 바슈키의 건재함을 알리고 와. 그때까지 양피지는 내가 가지고 있겠다.”

잠든 펠런을 흘깃 바라보고 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신관이 직접 작성해 준 양피지를 되돌려 받아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내가 네 뜻대로 움직인 건 목적이 서로 일치해서였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네게 더할 나위 없는 개새끼처럼 굴었겠지.”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나인은 묵묵하게 나를 응시했다. 우리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펠런을 좋아하고 놈이 펠런의 부하라서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를 엿 먹인 놈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겠지.

내가 자허 블리스일 때부터 지금까지 놈의 행동은 오로지 나를 죽이거나, 나를 펠런에게서 떨어트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내가 원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하게끔 이끌면서 말이다.

처음 음식점에서 만난 날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부터, 마경에 간 펠런의 행적을 설명하고, 내가 펠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게 만들었지. 그리고 용사가 된 이후에도 나를 위한다며 펠런의 곁을 떠나 자유무역 도시로 가는 걸 도왔다.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 용사를 시야에서 치우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건 네 생각이지 펠런의 생각이 아니잖아.”

“항상 그게 문제가 되곤 하더군요. 모셔야 할 왕의 뜻과 내 뜻이 다르다는 것.”

“알면 고치도록 노력해 봐. 생각보다 간단해. 다른 놈을 존중하면 되더라고.”

“사심은 없습니다. 오로지 왕을 위해 움직였죠. 다만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성격이라.”

“결과가 나빴다면 나도 널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나인이 허허 웃었다. ‘때리고 싶게 얄밉네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지금 당장 나를 처리한다 해도, 놈은 뒤이어 제정신이 돌아온 펠런의 분노를 몸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나도 용사라서 놈과 싸운다 해도 쉽게 지지 않을 거다. 성검이 없으니 죽이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래 맞아, 라울 미스트의 말에 의하면 빛의 신의 축복받은 무기가 아니면 죽일 수 없다고 했지. 그건 놈이 전대 마왕이라 그런 걸까?

놈이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과 완벽하게 같을 수 없다. 놈이 하는 일이 펠런을 위해서라고 해도 그게 펠런의 뜻과 일치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래서 나인에게 계약을 일임하는 계획은 애초에 버렸다.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놈은 언제고 내 적수가 될 놈이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자. 해묵은 용을 상대할 정도로 내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있다.

나는 유들유들 웃으며 다시 나인에게 손을 쭉 내밀었다. 놈이 머뭇거리며 품 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줄 거면 빨리 줄 것이지 손에 쥐고 망설이는 놈을 한 번 더 채근했다.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계약서 주고 가. 댁이 떠난 후에 펠런이 제정신을 차릴 수도 있잖아. 언제든 놈과 붙어 있는 사람이 계약서를 가지고 있는 편이 나아.”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수틀리면 도망칠 생각 아니었습니까? 왕의 호적수로 다시 태어나서도 찾아오질 않나, 기껏 달아날 기회를 버리고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자처하질 않나.”

“용사. 원래.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대충 중얼거린 후 놈의 손에서 양피지를 낚아챘다. 혹시 놈이 손에 힘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고분고분 줘서 다행이다.

양피지에 각종 보호 마법과 복구 마법을 잔뜩 걸어놓고 품 안에 양피지를 집어넣었다. 만약의 상황에서 또다시 싸움이 벌어져도 되도록 옷이 찢어지지 않게 해야겠다.

뭔가 더 말을 할 것처럼 굴던 나인이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눕혀 놓은 펠런을 바라봤다. 나도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녀석에게 놀라, 서둘러 나인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어서 가서 네 할 일 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놈이 짧게 혀를 차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문밖으로 달아났다. 하긴 놈도 이성 잃은 마왕을 상대하는 건 무서웠을 거다.

나도 무섭거든.

“잘 잤어? 여전히 맛이 간 상태야?”

“…….”

웃으며 놈에게 말을 걸었다. 놈은 여전히 침묵으로 대답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놈의 몸 상태가 멀쩡하다. 잠재우는 김에 눈도 귀도, 옆구리도 다 치료를 하고 간 모양이다. 펠런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저걸 또 어떻게 상대하나 싶어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놈이 내게 덤벼들었다. 빌어먹게 한결같은 짐승 같으니.

양피지를 보호하고자 몸을 뒤로 물린 내게 접근해 목과 뺨에 제 얼굴을 비빈다. 차가운 뿔이 이마에 닿았지만 긁히지 않았다. 온몸을 밀착하고 두 팔로 내 등과 팔, 그리고 옆구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살의는 없다. 역시 몸이 아프지 않으니 하반신에 충실해질 모양이다.

“잠깐, 기다려. 옷은 벗고 하자. 그리고 이왕이면 침대에서.”

놈의 몸을 끌어안았다. 내가 몸을 밀착해도 저항하지 않는 걸 보니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나는 느리게 놈을 침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거의 헐벗은 상태인 놈이 제 성기를 내 하복부에 밀어붙이고 문질렀다. 혀로 입술과 뺨을 핥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빈다. 발정 난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셔츠와 조끼도 마저 벗어 침대 아래 던져놨다.

안쪽 소매에 들어 있는 양피지는 언젠가 쓸 날이 오겠지. 평생, 이 상태는 아니길 빌 뿐이다.

“너 말이야. 뭘 좀 먹어야 하는데.”

“……?”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테이블 위에 음식 있는데 먹을 수 있겠어?”

대답이 없는 시점에서 포기했다. 그래도 놈은 내가 말하는 걸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것 같다. 내 낮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놈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신성력으로 몸을 회복해도 영 기력이 나지 않았다. 먹긴 해야 하는데 입에 뭘 넣으면 자꾸 토해서 문제다.

벌어진 아랫입술을 펠런이 핥았다. 메마른 입술 위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살캉살캉한 혀에 짜르르한 간지럼을 느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입맞춤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슬쩍 혀를 내밀어 놈의 혀끝을 마주 얽었다.

온 신경이 혀끝에 매달린 것 같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닿았다. 덥고 단 숨을 놈이 내뱉고 다시 들이쉰다. 혀 아래 매끈한 점막과 위쪽의 미뢰까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숨이 점점 더 거칠어지는 건, 내 혀의 모양을 새길 듯 느리게 움직이는 혀가 너무 달기 때문이다.

놈이 내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긴 손가락이 손등을 길게 훑고, 손바닥으로 미끄러진다. 닿은 자리가 간지럽다. 아니 예민해진다.

오목하게 파인 손바닥을 느리게 훑던 손끝이 손목을 움켜쥔다. 놈의 단단한 손바닥 안에서 내 손목이 맥박친다. 그리고 팔꿈치로, 내 온몸을 훑듯 어루만지는 손에 나는 놈의 입안에서 단 숨을 내쉰다.

펠런이 너무 좋다.

놈이 나를 만지는 방식이 좋다. 나를 욕구하는 감정이 사랑스럽다. 놈의 시선이 오로지 나를 바라보고, 나를 향해 움직이는 것에 만족한다. 놈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심지어 펠런 그 자신에게조차.

그러니 놈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거다. 빌어먹을 어둠과 계약도 풀고, 놈이 놈답게 나를 원할 수 있게 만들 거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무는 놈의 입술에 입을 겹쳤다. 미끄러지듯 파고든 혀가 매끈한 입천장을 훑자 몸이 퍼드득 떨렸다. 간지럽고, 달다. 과일을 삼킨 듯 단 타액을 몇 번이고 삼켰다.

이따금 충동이 치미는 듯 놈이 제 몸을 밀어붙여 발기한 성기를 허벅지나 배에 비빈다. 그러나 아직 삽입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 이성이 돌아온 게 아닐까? 희망적인 관측을 할 수밖에 없다.

“네가 만지면 좋아.”

“…….”

팔꿈치를 부드럽게 감싸 쥔 놈의 손이 겨드랑이로 파고든다. 단단하게 근육 붙은 팔뚝을 위로 훑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놈의 손이 닿은 곳마다 새로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다.

내 몸에 이런 부위가 있었나? 자극에 반응할 때마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고, 반대로 뒤집혀 날뛰었다. 물을 마셨는데 목이 말랐다. 목 안에서 열이 오른 탓에 갈증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물을 찾아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

나는 다급하게 한 손으로 놈의 뺨을 감싸 쥐고 놈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놈이 호응하듯 다시 입을 맞췄다.

더욱더 깊이 파고든 놈의 혀가 내 혀와 하나가 될 것처럼 얽혔다. 느리게 비비고 문지르다가 쿡쿡 쑤시는 순간 허리가 퍼드득 튄다. 코와 입으로 낮고 갈라진 신음을 내뱉고 만다.

“…흐으, 응.”

지금의 놈은 내 온몸 구석구석 맛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역시 나인의 치료가 마음에 들었나? 느긋한 사자처럼 다시 입술을 뗀 녀석이 내 귓불을 잘근 물더니 귓바퀴 안쪽을 핥았다.

“…흐극, 거기는……. 소리가 울려서 이상, 해…….”

찌걱거리는 젖은 소리에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 몸 안쪽을 직접 만지는 것 같다. 따뜻하고 젖은 혀끝이 좁은 귓구멍을 찔꺽거리며 부드럽게 쑤신다. 그럴 때마다 놈이 몇 번이고 쑤시고 헤집은 뒤가 욱신거렸다.

나는 놈의 어깨에 매달려 몇 번이고 시트를 발끝으로 밀었다. 이 침대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었는데. 점막 안을 문지르는 젖은 소리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 발 등에 시트가 종이처럼 북북 찢어졌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게 굳은 허리를 놈이 끌어안았다. 나는 놈의 품에 안겨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지는 놈의 입술에 잘게 떨었다. 아프지 않은데 무서워서 어깨를 붙잡은 손을 풀 수가 없다. 차라리 놈과 싸울 때가 덜 무서웠던 것 같다.

“제, 정신으로 돌아와야……. 하아, 고백할 거 아냐.”

“…….”

놈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근육만 가득한 가슴이 뭐가 그리 좋은지 혀끝을 세워 유두 구멍 안에 끝까지 쑤셔 넣고 안쪽에 들어간 유두를 헤집는다.

몇 번의 자극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을 입안 전체로 머금고 빨아들이는 힘이 제법 강해서 나는 움찔움찔 몸을 떨며 다리로 놈의 허리를 휘감았다.

“하아… 안이 근질거려.”

그사이 발기한 성기에서 말간 액이 흘렀다. 밤새 시달린 거로 부족해서 아직도 분기탱천한 내 성기를 보면 나도 펠런을 닮아 짐승이 되어가는 것 같다.

놈의 단단한 아랫배에 선액 맺힌 귀두를 문지르자, 자극이 너무 강해 허리가 뒤로 빠졌다. 그걸 물러나는 거로 오해한 놈이 낮게 그릉거리며 몸을 밀착했다.

놈의 흥분이 파괴로 이어지게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어제저녁 싸운 것도 결국 내가 기절한 후에도 덮치는 놈에게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두른 것이 시발점이었지.

그래 오늘은 내가 참자. 놈이 만족할 때까지 상대하다 보면 제정신이 돌아올지 또 모르니까.

“너무, 느껴서 그래. 허리가 풀려서……. 도망가는 거 아냐.”

“…….”

아주 조금씩이지만 놈이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달래듯 속삭이자 놈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 대신 맛보지 않은 반대편 가슴에 얼굴을 파묻긴 했지만 말이다.

고개를 들고 놈의 입술과 미간에 입을 맞췄다.

이후 일어날 일을 예감하고 두 다리로 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밀착했다. 적절하게 회복을 사용한 덕분에 멀쩡해진 뒤부터 회음까지 놈의 성기가 꾹꾹 짓누르고 문지르며 자극했다. 욕실에서 씻고 와서 그런지 아직 엉덩이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대로 넣어도 돼.

놈을 달래는 내 모습이 낯설다. 어쩌면 이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온 양피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놈이 영영 이성을 찾지 못하면 어쩌지. 계속 이렇게 물어뜯기고 놈을 달래고, 안기겠지. 정신없는 놈을 억지로 안고 싶지 않으니 내가 놈의 엉덩이를 뚫는 날은 영영 물 건너간 걸까.

펠런이 이 세워 내 어깨를 으적으적 물기 시작했다. 입질을 시작한 걸 보니 또 광증이 도는 건가, 조금 두려워져서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봤다.

감정 섞이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에 약간의 불만이 보였다. 그렇구나. 놈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것 같다. 나는 작게 웃고 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집중할게, 다른 생각한 거 아냐. 네 생각 했어.”

“…….”

“요즘에 계속 그래. 너 말고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어. 사소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너와 연결된 것들뿐이야.”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거 말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봐, 듣고 있어? 내 말이 네게 닿고 있긴 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이 미끄러져 놈의 뺨을 감쌌다. 물린 어깨가 욱신거리지만 피는 나지 않는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자신만 바라보라는 놈 나름의 투정이다. 최소한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문 건 아니니까 귀엽게 느끼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 거다.

“네가 이대로 정신을 못 차리면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미쳐서 날뛰어도 회복하면 버티겠지. 그래도 네 손에 죽지 말자 같은 거.”

더듬더듬 잘려 나간 잡생각을 하나씩 놈에게 말했다. 그 사이 놈의 단단해진 성기가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슬쩍 귀두를 걸고 꾹꾹 눌러 예민한 점막을 자극했다.

조금 벌어진 틈에 걸린 놈의 성기가 뜨겁게 느껴진다. 괜히 감질나서 스스로 허리를 내려 움찔움찔 놈의 것을 조금씩 삼켰다.

“그래도, 읏…….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육체와 본능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건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걸 거다. 송두리째 너를 가지고 싶다. 제대로 분별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네 사고와 지성까지 원하는 걸 보면.

“아니면 내가 너무 막 나갈 것 같아서 그래.”

이미 사람을 죽이고 사기를 쳤다. 여기서 더 어떻게 내가 행동할지 모르겠다. 막강한 힘을 가졌지만 다스리고 좋게 활용하려면 펠런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를 위해서든, 놈을 위해서든 좋을 거다.

“웃기지… 않아?”

끅끅 웃으며 느릿하게 허리를 굴렸다. 예민한 점막에 닿은 놈의 귀두가 점점 더 단단해졌다. 물 덩어리로 씻은 내부가 뜨겁게 젖어 놈의 선단을 조금씩 빨아들였다. 팽팽하게 벌어진 입구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이 좋아서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자극한다.

“마왕은, 너보다 나 같……. 으, 흐응. 아, 직. 넣지 마……. 가만히 있어야 해.”

내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걸 보면 놈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걸까? 펠런? 하고 놈의 이름을 부르자,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 새까만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눈에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스스로 달래도 이럴 때마다 서글프다.

“가만히, 있으…라니, 까아.”

귀두에 닿는 자극만으로 부족했던 녀석이 허리를 다급하게 밀어붙였다. 회복 때문에 밤새 시달린 자극을 잊은 내벽이 한껏 벌어지며 놈의 성기를 삼켰다.

뜨겁게 열 오른 안쪽이 꽉 차는 감각에 나는 헐떡거리며 놈을 붙들었다. 녀석의 페이스대로 움직이면 나도 맛이 가는데 큰일이다.

굵은 기둥이 느끼는 곳을 긁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잠깐, 기다려. 너무 흥분하면 또 맛이 가니까. 애원하며 달래도 놈은 꿈쩍하지 않고 더 깊이 들어온다.

윗배까지 닿는 자극에 나는 진저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내장이 밀려 올라가고 안쪽 깊은 곳까지 점령당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뒤틀려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발기한 성기에서 선액이 기둥을 타고 흘러 배꼽까지 고였다.

“깨물지만, 마. 알았, 지? 그럼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더듬거리며 마지노선을 정했다. 잘못 씹혀서 경동맥이 잘리면 죽는 거다. 간신히 한두 번 치료할 신성력이 돌아오긴 했지만, 어제처럼 싸우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거다. 그리고 사인은 복상사가 되겠지. 그러기만 해봐라. 죽어서도 이 자식을 괴롭힐 거다.

놈의 눈에서 희미한 수긍을 읽었다. 역시나, 정신이 돌아오는 건 맞는 것 같다. 다행이다. 눈앞에 내가 있으면 계속 맛이 간 상태로 남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쿡쿡 쳐올리는 성기에 몸이 안달한다. 잘금잘금 내벽 깊은 곳을 꼼꼼하게 맛보듯 가볍게 들쑤신다. 그 바람에 천천히 하라고 해놓고 먼저 항복한 건 나다.

제발 제대로 박아달라 애원하자, 놈이 내 몸을 가볍게 뒤집고 깔아뭉개듯 올라탔다. 탄탄하게 올려 붙은 엉덩이 사이를 강제로 벌리며 놈의 성기가 윗배까지 단번에 파고들었다.

“아, 흐아앙!!”

나는 자지러지며 시트를 움켜쥔다. 목덜미부터 등을 타고 발가락 끝까지 짜릿짜릿하다. 내 등을 놈이 점령하고 맛본다. 목덜미와 견갑골에 이르기까지 물고 빠는 놈의 입술을 느끼며 나는 인정한다. 놈은 내 전신을 성감대로 바꾸고 있다.

윗배가 불룩하게 솟구쳤다. 시트에 쓸린 성기에선 이미 정액이 줄줄 흘러넘쳤다. 젖은 살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와 더불어 놈이 내 귓구멍 안에 혀를 쑤셔 넣고 안쪽을 헤집고 찔꺽거렸다. 고막과 뒷구멍의 점막이 동시에 능욕당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어서, 나는 숨넘어갈 듯 애원하고 보채며 허리를 흔들었다.

“좋, 아. 미친 더, 더어. 해봐. 안에, 흣, 흐으응, 더 박아. 거기. 거기잇!!”

시트를 긁는 내 손목을 놈이 움켜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놈이 집어삼키고 있다. 침대 매트는 격렬한 행위에 거칠게 삐걱거리고, 나는 몇 번인지 모를 사정과 함께 절정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놈의 성기가 안에서 부푼다. 나는 희게 웃으며 엉덩이에 힘을 줘 놈의 성기를 잘라 먹을 듯 조였다. 등 뒤에서 놈이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놈이 나로 인해 느낀다.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나, 와. 읏… 또… 가아…….”

걸걸하게 쉰 목소리로 울며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을 푼다. 침대 아래로 꺼질 것 같은 나른한 탈력감.

그러나 한 번의 사정으로 끝날 놈이 아니다. 축 늘어진 내 몸에서 성기를 빼내자 끈적한 정액이 줄줄 흘러 내 허벅지와 옆구리에 점점이 떨어졌다.

괜찮다. 어차피 포기했다. 원하는 대로 잡수시라고 나는 선뜻 놈이 나를 잡아끄는 대로 끌려갔다.

“이왕이면, 마주 보면서 하고 싶은데…….”

“…….”

뒤로 하는 게 놈의 취향이라면 나는 놈의 얼굴을 보며 하는 게 좋다. 놈의 얼굴을 보며 쾌감에 찌푸려진 미간이라든지 흐트러진 숨을 내 눈으로 보고 듣고 싶은 거다.

내가 너를 변하게 하는 순간을 온전히 가지고 싶어. 쉰 목소리로 말하자,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은 놈이 나를 끌어당겨 제 성기 위에 앉혔다.

“어, 흑!!”

아이처럼 나를 앞으로 안은 놈이 그대로 나를 꿰뚫었다. 놈의 성기를 깊이 머금었던 내벽이 단번에 놈을 끝까지 삼켰다.

구부러진 안쪽까지 역류해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놈의 정액 때문에 안쪽이 젖은 탓이겠지. 엉덩이에 닿는 놈의 고환에 나는 꺽꺽 뒤로 숨이 넘어갔다. 빌어먹을. 이 체위 말고 정상위, 자식아.

놈이 두 손으로 내 둔부를 움켜쥔다. 두 팔 안에 갇혀 쓰러지지 못한 몸을 그대로 붙들고 침대에서 벗어나 양탄자 깔린 바닥에 섰다. 졸지에 앞으로 안긴 몸에 체중이 더해져 놈이 나를 깊이 꿰뚫었다. 이런 거 말고. 물론 이것도 좋아하긴 하는데.

두 팔로 놈의 목을 휘감았다. 그걸 노린 건지 그 즉시 놈이 허리를 쳐올렸다. 퍽 치고 들어오는 성기가 아까보다 깊다. 그리고 휘어진 것이 파고들며 전립선을 쑤시며 들어왔다. 미친, 이걸, 어떻게 버티라고.

“아, 아흑! 앗! 아! 아아! 그만, 또, 가. 흐으, 아아, 나와, 크으, 윽!!”

어금니를 악물고 숨을 멈췄다. 다시금 세차게 정액을 쏟으며 사정한다. 그래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아까보다 빠르게 몇 번이고 안을 쑤시고 헤집었다.

팡팡 소리를 내며 자극으로 부푼 내벽을 치고 올라오는 두툼한 귀두와 기둥에 뒤가 찌릿찌릿하다. 물처럼 줄줄 흐르는 정액이 놈의 아랫배를 지나 내 엉덩이에 고여 뚝뚝 떨어진다. 너무 느껴서 괴롭다.

투명한 액이 세차게 쏟아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해서 깨달은 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싸지른 후다. 혀를 빼물고 잘게 기침했다. 사레가 들린 탓이다.

눈앞에서 희고 검은 별이 번쩍거리고, 숨을 제대로 내쉴 수가 없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튀고, 경련한다. 뻣뻣하게 굳은 발끝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놈이 다시 사정했다. 결장 위로 역류하는 정액을 느끼며 나는 회복을 걸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아니다. 지금 회복하면 나중에 죽는 건 나다.

놈이 나를 죽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만은 확실했다. 몇 번이고 나를 물거나 내 목을 조르거나, 혹은 살의를 비추긴 했어도 스스로 억누르고 자제하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몇 번 물어뜯기는 동안, 목 대신 팔뚝을 밀어붙이거나 반격하지 않았다.

다시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 되고 나서 나는 타액에 흠뻑 젖은 녀석과 나, 그리고 침대에 마법을 걸어 보송보송하게 만들었다.

한바탕하고 조금 진정이 된 듯 놈은 고분고분하고 얌전하다. 아직 놈의 일부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건 무시하도록 하자. 여전히 흉악스럽게 크고 단단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다. 그리고 놈의 성기를 머금고 있는 건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목 아래 늘어진 놈의 검은 머리카락, 그사이 하얀 두피까지 잘생겼다. 손을 펼쳐 손가락을 펠런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 끼워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에서 늘 맡던 향이 났다.

등허리를 끌어안은 놈의 손이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 안쪽을 감싸 쥐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엉덩이를 꾹 쥐고 제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틈 하나 없이 꽉 들어찬 성기에 내벽이 욱신거렸다.

보송보송하게 만들긴 했어도 내벽 안쪽까지 세척은 어려워서 자꾸만 놈의 정액이 새어 나왔다. 이러고 있으니 아카데미에서 처음 놈과 몸을 섞은 날이 생각났다.

“그때, 그만하라고 애원을 해도 안 듣고…….”

“…….”

“엉덩이도 양보를 안 하고…….”

투덜거리고 있지만, 본심은 아니다. 그냥 이 상황이 쑥스러워 뭐라도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거나, 호응하거나, 뻔뻔스레 자기주장을 하는 펠런의 목소리 말이다.

“내가 네 목소리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한 적 있다.”

너무 오래 말하지 않아 잠긴 듯 갈라진 펠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숨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녀석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

다시 대답하지 않는 놈에게 불안함을 느꼈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흥분하거나 당황해서 잘못 움직이면 놈이 다시 폭주할 것 같았다. 새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 없다. 잠깐 의식이 돌아온 걸까? 아니면 내가 환청을 들은 걸까.

“…펠런?”

“…….”

놈은 대답 대신 나를 끌어안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놈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지만 억지로 끌어올릴 방법을 아는 건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기다리는 것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놈의 등을 마주 끌어안고 입을 열었다.

머리는 좋지 못해도 말은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도 아니다. 속엣말을 가감 없이 꺼낸다는 게 어렵다. 부끄러움이나 무서움, 혹은 자존심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어수룩하고 볼썽사납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

“네가 죽지 않는 한, 나는 늙지 않는다고 하더라. 제국을 세운 용사를 포함해서 모든 용사가 그렇대. 네가 죽은 후에야 나도 늙을 수 있대.”

“…….”

“사실 생각해 보면 몸 바꿔가며 산 나이는 내가 너보다 많거든. 그래서 괜찮아. 나이랑 외모가 일치하지 않는 건 익숙해.”

녀석의 삼 년과 나의 사흘, 생각해 보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것이다. 심지어 나는 놈의 눈앞에서 죽기도 했고 한참 돌아오지 않았지. 그러니 나도 3년 정도 기다려 줄 수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놈에게 죽지 않는 한은 말이다.

나는 놈의 뾰족한 귀 끝을 어루만지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놈에게 속삭였다.

“난 네가 나이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왕이면 옆에서 말이야. 분명히 잘생겼을 거야.”

“…나 역시 그렇다.”

“그래도 어쩌겠어.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는 없잖아.”

놈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놈을 보며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펠런이다. 놈의 표정이다. 며칠 만에 제대로 놈을 보는 것 같다.

“오랜만에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긴 한데, 지금 내가 당장 급해서 말이야.”

슬금슬금 허리를 뺐다. 가득 찬 성기가 빠지는 느낌이 기묘하게 자극적이라 큰일이다. 벌어진 입구가 느리게 닫히느라 정액이 줄줄 흘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릎걸음으로 기어, 침대 밑에 내려놓은 옷을 뒤적거렸다.

“서명하라는 거겠지?”

“서명하기 전에 설명도 들어야 해. 그걸 듣고 나서 네가 동의해야 효력이 생기거든.”

그걸로 잘될 수 있을까? 막상 일이 여기까지 오고 나니 불안해졌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될 일이다. 한 번의 실패로 꺾일 필요는 없다.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내 시트 위에 펼쳤다. 벌써부터 펜을 소환한 놈이 내 옆에 앉아 양피지에 적힌 글을 읽었다.

사실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이 계약서에 서명한 이는 원하는 대가를 받는 대신 계약서를 가진 이가 바라는 일을 하나 들어준다. 계약은 빛의 신에 의해 중개되며, 효력은 서명 이후 발휘된다.’

“이해했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뭐지?”

“펠런 엑사 드로젠이 용사인 나를 죽이지 않는 것. 그 대신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게.”

“…그게 뭐든?”

“그게 뭐든.”

나는 펠런을 만나기 위해 계약서에 서명했다. 생각해 보면 대단히 멍청한 짓이기도 하고, 나답기도 하고. 나는 히죽거리며 놈의 옆에 밀착했다. 펠런이 내게 뭘 원할까. 높은 확률로 고백하지 않을까? 그래도 고백은 내가 먼저 하고 싶은데 선수를 칠까?

“뭐든 말해봐. 그래도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로.”

“…오늘 아침 식사를 나와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아침을?”

자신만만하게 고백을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영 뜻밖의 요청을 해와서 어리둥절하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나는 둘째 치고 놈에게 뭘 좀 먹여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으니까. 순순히 수긍하고 알았다고 말하자 놈은 한 번 망설이지 않고 양피지에 서명했다.

놈의 서명이 적힌 양피지를 다시 옷 안에 갈무리했다. 대가보다 바라는 것이 소박하지만 서명한 이상 효력은 확실하겠지. 아침을 먹고 나면 끝나는 건가.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봤다.

“네가 좋아.”

“…….”

“사랑해. 반지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는데, 돈 모아서 꼭 검 휘두를 때 방해되지 않는 거로 맞춰줄게.”

“…반지는 이미 내가 준비했다.”

놈의 표정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해졌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턱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놈을 바라봤다. 하하, 좋아한다고 먼저 말한 건 저 자식이니까 사랑한다는 고백은 내가 먼저 하고 싶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줄게.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

“…나로 괜찮은 건가?”

“괜찮지, 뭐. 잘생겼지. 정력 좋지. 성실하고 헌신적이지. 거기다 왕이잖아. 권력 최고. 돈 최고.”

“…마족의 땅은 넓을 뿐 생산력은 현격히 떨어진다.”

“그래서 싫어?”

“…….”

놈의 얼굴이 붉다. 설마 당황했나?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걸까. 놈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 아카데미 생활 통틀어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숨어 있던 가학심이 다시 치밀어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놈과 시선을 맞췄다.

“다른 놈이랑 키스하지 마. 연애할 거면 나랑 해. 네 옆자리 내가 가지고 싶어. 그만큼 사랑해. 펠런.”

“…그래.”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대로 굳었다. 놈의 눈가가 붉다. 아니, 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아닌가? 울 만한 일인가? 내가 울렸나?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럴 때는 달래야 하나. 놀리면 안 되겠지.

잠시 후 고개를 든 녀석은 특유의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것 말고 울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잠긴 목소리로 놈이 덤덤히 말했다.

“그건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다. 너를 사랑한다고 나와 평생 함께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면 양피지에 계약할 때 말하지 그랬어. 들어줬을 텐데.”

“…계약하면 네가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얼마나 자존감이 없는 거야.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구나. 계속 거절하고 밀어냈지.

그래도 그건 아카데미 때 이야기다. 다시 살아나서 용사가 된 후에 만나러 온 걸 보면 내 마음도 짐작했을 텐데. 우리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않았나. 결혼, 신혼여행, 반지와 청혼에 대한 농담들.

“그리고 대답이 그래가 뭐야. 내가 사랑해, 라고 말했으면 너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답해 줘야 하는 거 아냐?”

괜히 멋쩍어서 놈에게 타박했다. 놈이 옅게 웃는다.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놈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놈의 딱딱하고 차가운 뿔이 내 귓불에 닿았다. 나도 놈을 마주 끌어안았다.

“언제, 어느 누구로 내게 와도 상관없다. 귀족이든, 암살자든, 적수가 될 용사라고 해도.”

“…….”

“그게 누구든 너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마경에서.”

“그래. 마경에서 네게 했던 말이지.”

그날, 마경의 터주 아라크네의 독으로 죽어갈 때. 명멸하는 의식 속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여신의 저주 탓에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던 문장이 놈의 입을 통해 풀어졌다.

그때부터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누구로 오든, 상관없다고. 나는 그저 네게 유마니까.

그렇구나. 이미 너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마경에서도,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도. 대답을 미룬 건 나였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자식이 말이야, 사람을 감동하게 만들고 괜히 마음을 짠하게 만들어. 빨리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되돌아오는데 시간이 이렇게 걸릴 줄 내가 알았나.

“내가, 끝내주게 잘할게.”

“잘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뭐든 최선을 다해 따라갈 테니.”

“…그래서 반했나? 잘생긴 놈이 멋있기까지 해서?”

놈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잡아당기자, 탄력 있는 살이 찰떡처럼 늘어진다. 젠장. 심지어 귀엽네.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정리하고 셔츠를 갈아입는 내 허리를 펠런이 끌어안았다.

“아침부터 먹자. 그래야 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지니까.”

“조금 더 이렇게 함께 있으면 안 되나?”

“…사실 나 요새 오기 하루 전부터 굶었어.”

“…….”

놈이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셔츠와 바지를 꿰어 입고 나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나 혼자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데. 무슨 위급한 환자 다루듯 성큼성큼 걷는 놈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라 웃음이 나왔다. 저 자식 안에서 나는 얼마나 밥을 좋아하는 걸까.

그 사이 창밖이 밝았다. 그래도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어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우기가 머지않아 날이 조금 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람이 서늘한 편이다. 여기가 이런데 북부 산맥 위쪽인 마족의 땅은 더 춥겠지.

“나 보고 막 죽이고 싶고 그렇지는 않아?”

“지금은 괜찮은 것 같다. 충동도 올라오지 않고.”

“벌써 계약이 효력을 발휘한 걸까?”

어깨에 매달려 놈에게 말했다. 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는다. 옅게 웃는 놈의 표정이 보기 좋다. 계약이 벌써 진행이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보다 네 밥이 먼저다.”

“너도 먹어야 해. 나만 굶은 게 아니잖아.”

펠런의 지시가 있었던 걸까. 나인의 인조 시종들이 벌써 테이블 위가 꽉 차도록 음식을 준비했다.

감자와 치즈, 거기에 베이컨을 곁들인 감자 수프, 허브와 버터를 발라 구운 랍스터와 관자. 채 썰어 튀긴 죽순 튀김 위에 구운 연어를 얹은 요리까지. 향과 색, 그리고 냄새가 끝내줬다.

테이블 옆에 나를 내려놓은 녀석이 바로 곁에 앉았다. 왕인데 상석에 앉아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물었더니 내 옆에 앉는 게 더 좋다고 한다. 하하 이 자식, 하긴 내가 그럴 만한 매력이 있긴 하다.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맛에 주린 배가 꾸르륵 소리를 내며 어서 먹어달라 호소를 했다. 그러나 삼킬 수가 없다. 목 안에서 쓰고 신 위액이 역류했다.

구토하면, 안 돼. 스푼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은 식기가 손안에서 우그러졌지만 삼키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다시 되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삼키자.

컵 안에 가득 찬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위장이 모래집만큼 줄어든 기분이다. 코점막 안쪽에서 씁쓸한 맛과 향이 났다.

랍스타 살을 발라 억지로 입에 넣고 신중하게 씹었다. 다시 역류하고 뒤틀리고, 위장이 아프다. 괜찮다. 식도와 위장에 약한 회복을 걸었다. 뒤틀리는 속에 가벼운 마비 마법을 걸자. 곤죽이 될 때까지 씹고, 삼킨 후 물을 마셔 넘긴다.

“이거 맛있네.”

“…….”

고개를 들어 바라본 펠런의 표정이 심상찮다. 내 상황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다. 나는 옅게 웃고 놈의 눈앞에서 분홍색 연어 살을 발라 입에 넣었다. 마비가 적당히 통한 건지 위액이 역류하는 일은 없었다.

“속이 좋지 않으면 억지로 먹지 않아도 좋다. 더 간단하고 부드러운 유동식을 준비하라고 이를 테니.”

“괜찮아. 뭘 먹어도 이래. 괜찮아질 거야. 뭐든 먹긴 해야 하고.”

“…….”

황제를 죽인 일이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가 될 줄 몰랐다. 펠런과 목숨 걸고 대련할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다. 놈을 내버려 뒀다면 영감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위험해졌겠지.

놈을 죽인 걸 후회한 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위장은 이따위로 구는 건지 알 수 없다. 왜 내 위장은 몸이 바뀌어도 여전히 연약한 걸까.

결국, 감자 수프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뱃속에 뭐가 들어간 덕에 머리가 굴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지켜보느라 포크를 드는 둥 마는 둥 나만 바라보는 녀석에게 거기 있는 음식 제대로 맛보고 배부를 때까지 잘 먹으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제법 분위기 좋은 식사였다고 자부한다.

디저트는 차만 마시기로 했다. 사실 수프를 다 먹은 것만으로 칭찬하고 싶다. 따뜻하게 우린 차로 쓰고 신 목구멍을 달래며 놈에게 간단히 물었다.

“나인은 뭐 하고 있대? 내가 시킨 대로 위협 잘하고 있다고 그래?”

“드로젠 상공에서 성실하게 비행 중이라고 하더군. 이미 연락은 한 상태다.”

“성실하게 일하는 걸 들었더니 기특하군.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투덜거리며 미간을 찌푸리자 놈이 기쁜 낯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펠런 이 자식은 나와 나인이 사이가 나쁜 것에 만족한 것 같다. 내 취향은 뱃속에 독사 세 마리는 숨기고 있는 중년이 아니라 잘생긴 놈이라는 걸 놈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차를 마시던 도중 놈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가져올 것이 있다는 말에 따라갈까? 물었더니 여기서 기다리란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 따라다녔지, 먼저 어디 갈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순순히 다녀오라 말하고 느긋하게 남은 차를 마셨다.

그래서 계약서는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걸까.

빈 찻잔을 어루만지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빛의 신과 연결이 끊어진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계약을 통해 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여신이 직접 끊은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둠의 신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침 식사는 끝났고 계약은 이루어졌다. 그러니 펠런에 대한 연결을 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놈은 이제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죽지 않은 부상 정도는 회복할 수 있지. 이제 마음껏 놈과 대련하는 일만 남았나. 그런 걸 생각하면 들뜨게 된다. 힘껏 휘둘러도 죽이지 못하는 상대와 전력을 다한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창을 하나 맞춰야겠어.”

검술을 배웠지만, 창이 좋다. 여신에게 받은 육체가 워낙 뛰어나니 뛰어난 기술이 없어도 대적할 상대가 없다. 그렇다면 육체에 창술을 더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 것인가.

다시 한 잔 따른 차가 식기 전에 펠런이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벨벳으로 마감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와, 이거 그거지. 그거 맞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래. 결혼하자.”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옅게 억울함 묻은 목소리로 놈이 중얼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새까만 상자 안에 뭔가 들어 있다. 꺼내고 보니 우와, 세상에. 수정을 깎고 갈아 만든 것처럼 투명하다. 설마 이거 보석을 통째로 깎은 건가? 아니 뭘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멋진 걸 주지? 보통은 금이 아닌가?

속물적인 건 아니고 그저 궁금하다. 매끈하고 둥근 모양이 굉장히 단순하다. 이런 디자인이면 창을 쥐고 싸울 때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마음에 들었다. 절대 빼지 말아야지. 괜히 뿌듯해서 반지 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펠런에게 돌려줬다. 이럴 때는 꼭 해야 하는 게 있더라. 나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녀석에게 말했다.

“내 손에 직접 끼워줘.”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놈이 내 표정을 보고 옅게 웃는다. 내가 너무 좋아했나? 그래도 이번 생 저번 생 통틀어서 프러포즈 받은 적이 처음이니까. 좋아할 만도 하지. 거, 내가 좀 그럴 수 있지!

놈이 내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러고 보니 이미 놈의 왼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 헤헤. 잘생긴 손가락에 반지도 잘생겼다.

“이거 끼고 창 휘두르면 깨지고 그러나?”

“마수가 밟아도 깨질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마음에 들었나?”

“영감님에게 가문 비전 창 선물 받은 것보다 좋은데?”

“…그래. 그렇군. 네가 좋아하니 다행이다.”

저 자식이라면 내가 뭘 해줬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히죽거리며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를 낀 채 가볍게 마법을 걸어 보겠나?”

“마력을?”

반지를 내려다보며 마력을 일으켰다. 어차피 반지에 여러 마법을 걸어둘 생각이었다.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마법을 씀과 동시에 투명했던 반지 안에서 푸른 그림자가 휘몰아치더니 순식간에 푸르게 물들었다.

바다를 떠서 굳힌 것처럼 투명한 파랑보다 더 기쁜 건, 마법을 거는데 필요한 마력이 반 정도 줄었다는 점이다.

“와, 미친, 이거 마법 반지야?”

“아무래도 너는 실용적인 것도 추구할 것 같아서.”

이 자식. 이 멋진 자식! 감동에 겨워 벌떡 일어나 놈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멋진 걸 주다니. 사람을 자꾸 감동하게 만들고 말이야. 내가 넌 평생 책임진다. 들떠서 외치는 내 말에 놈이 느리게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놈의 목소리에 조금 체념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 내 착각이겠거니.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몸은 멀쩡해졌고 계약도 완료했겠다. 이제 서로의 마음도 알았으니, 나와 펠런 사이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나는 열렬하게 놈을 향해 외쳤다.

“대련하자!”

“안 돼.”

단박에 자를 건 또 뭐냐. 대련하자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칼같이 거절하는 놈에게 조금 섭섭해졌다.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놈이 웃는다.

그야 물론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치지만 잠깐 몸을 쓰는 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아침까지 계속 성교도 했는데 왜 놈이 하고 싶은 건 해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막는 건가. 나는 놈을 도발하기 위해 턱을 들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계약이 끝나니 내가 무서워진 모양이군. 왜 그래. 동등한 핸디캡을 가지고서 나와 싸우면 질 것 같아?”

“그래.”

“…단박에 대답하지 말고. 호승심 좀 키워봐. 왜 그렇게 부드러워졌어. 마왕이잖아.”

자꾸 그러면 내가 일인자 한다? 내가 너 쓰러트리고 마왕 해버린다?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해도 놈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 하나 없다. 맥이 빠져서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로 앉아 시큰둥한 눈으로 놈을 바라봤다.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주 2회 이상 대련해야 해.”

“그땐 그러도록 하지.”

“…지금도 하고.”

“앞으로 며칠은 어려울 듯하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슨 해야 할 일?”

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만큼은 심상찮았다.

“제국을 무너트리는 일.”

“…빌어먹을.”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긴 금발이 눈앞에서 출렁거렸다. 이 자식이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답은 바로 나왔다.

마족들이 원하는 건 인간의 비옥한 땅이다. 북부 산맥 위의 냉혹한 토지는 살기 적합하지 않다. 제아무리 강인한 종족이라 하더라도 먹고 자고 생활할 여건은 필요하니 말이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고 펠런은 조용히 말했다.

“많은 곳을 점령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제국의 이름 아래 인간이 연합하는 일은 막고 싶다. 네가 원한다면 블리스는 건들지 않겠다.”

“영감님이 가만히 있겠어?”

“…필요하다면 반세기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다.”

마족의 수명은 길다. 펠런이 마왕으로 각성한 이상 녀석의 수명도 인간보다 훨씬 길 거다. 고위 마족들은 몇 세기나 산다고 했지. 그러니 놈도 기다릴 수 있을 거다.

내가 알고 있고, 정을 준 이들이 죽을 때까지. 그때까지 펠런은 살아 있겠지. 용사인 내가 놈을 쓰러트릴 수 없으니까. 그리고 놈도 나를 쓰러트리지 않을 테니 새로운 용사와 새로운 마왕은 없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놈을 노려봤다. 놈이 내 눈치를 보는 건 확실하다. 여기까지 다 나인과 놈이 생각한 계획일까? 아니, 방금 프러포즈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도 돼? 내가 반기를 들면 어쩌려고.

아니, 그건 아니겠지. 놈은 이미 내가 자신을 위해 황제를 죽이고 제국과 척을 진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토지가 필요한 거지? 곡식을 키우고 목축지로 쓸.”

“그래. 드로젠은 목축지로 활용하기 좋은 토지지만 농사를 짓기 어려우니.”

“마경은 어때?”

“독기가 있는 땅에서 자생하는 식물은 독을 품고 있다. 제아무리 땅이 넓어도 써먹긴 어렵지.”

“…….”

의심하고 싶지 않아도 워낙 저지른 게 많으니 펠런이 뭔가 내가 모르는 걸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그리고 제국을 노리는 것도 놈의 처지에서 보자면 타당하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드로젠을 넘보고 있는 건 제국이니 말이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놈에게 내가 가진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마경의 독기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

“……?”

“그걸 해결하고 숲을 개간하면, 네가 써먹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땅에 대한 건 내가 전문이 아니지만 아마도. 활용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가능하다고?”

“내가 용사로 여기 처음 온 날, 내게 독을 썼지?”

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황한 걸 보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빛의 신에게 선물을 받았어. 마법, 그리고 회복을 쓸 수 있는 신성력. 마지막으로 독 등을 정화하는 힘을 받았지.”

“…독을 정화한다고?”

“내가 독 때문에 죽었잖아. 그래서 무서운 것도 있었고, 그보다 자허일 때 요새에서 책을 몇 권 읽었거든. 그중의 하나가 북부 산맥 위쪽의 영구동토 지대에 대한 보고서도 있었어. 마족이 왜 인간의 땅을 원하는지 마족의 시점으로 서술한 글인데…….”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게 내 취미긴 했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여러 생각을 했다. 굶어 죽는 어린 마족을 위한다고 한다면, 내가 말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빛의 신이 선물을 준다고 했을 때 생각했던 것이 그거다. 토지 면적만 작은 국가 정도인 마경의 땅을 정화한다면 이곳을 농업 특구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그게 아니더라도 영구동토 지대에도 그런 땅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고, 독기가 고여 있는 곳. 그런 장소도 정화하고 말이야.”

“…너는.”

“도움이 되고 싶었어. 뭐든. 왜냐면 좋아하는 놈이 위기에 처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간을 죽이지 말라든지 선빵 때리지 말라든지, 하지 말라는 것뿐이었잖아.”

오로지 나를 위해 한 말들을 놈은 나름대로 충실히 지켜줬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함께 줘야 저울추가 균형을 이루지 않을까.

“그래도 부족하다고 하면, 그래. 반세기 후에 제국 정벌하러 가자. 그땐 나도 도울게. 사실 몇 사람 모르는 건데 내 꿈이 제2의 마왕이거든.”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만…….”

이미 알고 있었다니 쑥스럽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놈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어때? 여전히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놈에게 신중하게 물었다. 계약서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써야 하니 말이다. 내 질문에 놈이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게 키스하고 싶다.”

예쁜 말을 하기는. 그런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나는 고개 숙여 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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