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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더라 (21/23)

4.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더라

반나절을 꼬박 걸려 자유무역 도시에 다다른 후, 곧장 대신전으로 향했다. 황제 서거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지 길을 걷는 이들의 표정에 불안이나 슬픈 기색이 없다.

아마도 제후들과 차기 황제가 죽은 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리라. 그리고 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기사와 마법사의 입을 막고 있겠지.

상관없다. 제국이 침묵하고 있는 편이 내가 움직이기 쉽다.

대신전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항상 열려 있는 문이 닫혀 있는 것에 의아해하는 주민들이 몇몇 신전 앞을 기웃거렸다. 사람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투명화 마법을 건 채로 대신전의 벽을 넘었다.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나인이 미간을 짚었다. 머리가 아픈 건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역시 빛의 신전은 마족에게 좋지 않은 건가 싶어 물어봤더니 나를 보며 헛웃음을 친다.

“하룻밤 사이 당신이 저지른 일,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해 펠런에게 보고 중입니다.”

“오, 저런. 나 욕 안 먹게 잘 좀 포장해 줘.”

“예. 대신 욕은 제가 먹고 있지요. 옆에서 잘 감시하라고 했더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을 벌이냐면서요.”

“…저런, 고생하네?”

“당신 좋아지라고 하는 일 아니니 가벼운 실수인 양 웃지 마십시오. 당신 대신 펠런의 분노를 받을 생각 없습니다.”

구렁이 담 넘듯 엮어볼 생각이었는데 단호하게 자르는 나인의 말에 아쉬워서 혀를 찼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나인이 그걸 노리고 잔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루 저녁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던 용사와 마족,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자 불안에 떨며 서성거리거나 한군데 모여 조용한 목소리로 격론을 펼치고 있던 신관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도 잠시, 곧 누군가 대신관을 모시러 달려갔고 고위 신관들은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도 누구 하나 내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결국, 소통의 장을 연 것은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초췌한 몰골의 대신관였다. 긴 지팡이를 짚고 어느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늙은 마법사처럼 다가온 신관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물었다.

“…마왕을 처단하셨습니까.”

“그래. 황제의 육신을 차지한 끔찍한 어둠은 내가 처리했다. 그리고 제국은 마왕이 명령한 무모한 탈환 작전을 포기했다.”

“…그렇습니까.”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말을 듣고도 대신관의 얼굴에 더 깊은 근심이 어렸다. 다른 사제들은 모르겠지만 대신관은 내가 어떤 이를 처리한 건지 알고 있는 거다. 무능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인 쓰레기지만 그래도 제국의 황제였던 이다.

나는 대신관이 감상에 젖을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대신관이 나를 도와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입니까?”

언뜻 비치는 두려움의 이유를 안다. 황제를 죽인 칼날이 자신 또한 처리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여기서 수틀리면 대신관이 입을 열 수 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신관에게 다가가 주름 잡힌 가느다란 두 손을 붙잡았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나의 신성은 오로지 악을 쓰러트리는 데 발달해 있어. 빛께서 치유하시며 살피시는 더없는 자애의 힘을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써주지 않겠나?”

치료할 사람이 있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아 나는 이곳에 모인 신관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내 힘과 목숨을 다해 대신관을 보호하겠다. 어떠한 문제 없이 며칠 안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빛의 대리자께서 이 노구가 있어야 하신다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든 대신관은 내가 쥔 손에 힘을 주고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신께서 저를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그곳이 어디든 가오리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곳을 떠나 드로젠의 국경으로 가고 싶다. 대치 상태가 제대로 와해된 건지 확인해야 한다.

차기 황제가 될 자가 제 아비처럼 쓰레기 같은 녀석이라 하더라도 이미 한 번 후퇴한 제후국의 군대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러니 그사이 방비를 한다.

나인은 신전 안이 불편한 건지 잠시 밖에서 대기하겠다고 말했다. 떠나기 전 사야 할 물건도 있다면서 말이다. 내가 나인의 움직임을 강제할 권리도 없거니와 장소가 불편할 만도 하지 싶어 저녁 전에 돌아와 달라고만 말했다.

굳게 닫힌 대신전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대신관이 채비할 동안 나는 신전 안쪽 소박한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직 식사하지 못했다는 말에 젊은 신관이 쟁반에 밤이나 호두 등 견과류를 넣어 구운 쫄깃한 빵과 오렌지 주스, 얇게 썰린 햄과 치즈를 가져왔다.

빵 사이 치즈와 햄을 끼워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한 입 베어 물고 삼키기 무섭게 구토했다.

기껏 준비해 준 음식을 되올려 쟁반을 더럽혔다. 마법을 사용해 대충 처리하고 뒤집힌 속에 오렌지 주스를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뭐든 먹어야 힘이 날 텐데, 음료니까 괜찮을 것 같았지만 결국 다 토하고 말았다.

속이 텅텅 비어 쓰라리다. 목구멍까지 따갑지만, 회복을 걸 기력이 없다. 그릇을 대충 치우고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 기어 올라가 벽을 등지고 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웅크렸다. 차라리 소란스럽고 바빴으면 좋겠다. 휴식은 필요 없는데 말이지. 신성력을 사용하면 피로는 풀리기 마련이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깝다.

대신관의 준비는 아직 멀었을까. 아니면 나를 이런 방에 가두고 어떻게 처분할 건지 대책을 마련하는 중인가. 새로운 황제에게 나를 진상하는 것도 대신전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겠지. 나를 제압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걱정은 기우다.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말자.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자.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만 생각하자. 나는 주문을 외우듯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다짐했다.

펠런에게 돌아가서 어둠의 신과 연결을 끊을 것. 그것을 위해 대신관을 비경에 데리고 가는 것에 집중하자. 그리고 놈을 데리고 북부 산맥 위로 올라가는 거다. 거기가 내 새로운 고향이 되겠지.

혹은 마지막 무덤이거나.

자꾸 목 안쪽에서 신물이 올라와 입안이 쓰고 비리다. 생각도 잠시,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누군가 내가 쉬고 있는 작은 방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사람이 모두 셋. 그중 가장 앞선 이는 내가 아는 기척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대신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떠날 준비는 끝났나?”

“그 전에 당신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긴장한 듯 잘게 떨리는 대신관의 손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두렵겠지. 저지른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데. 그렇지만 뭘 묻고 싶은 건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 황제를 마왕으로 몰고 죽인 건지 묻고 싶은 거겠지.”

“황제는 극악무도한 자입니다. 자신의 안위를 제국민보다 우선시하며, 신을 믿지 않으며, 빛의 대리자께 끔찍한 실례를 했지요. 그러나 그는 마왕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빛의 대리자여. 황제를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진짜 마왕은 어찌하실 겁니까.”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많은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빛의 신전이 황제 살해를 묵인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황제를 죽이는 것을 묵인한 거겠지. 신권에 위협이 되는 현 황제가 죽는 편이 빛의 신전에 이득이 되니 말이다. 더군다나 차기 황제가 빛의 신전에 죄를 물을 명분조차 없어졌다. 황제가 마왕이었다는 것을 목격한 기사와 마법사의 입을 모두 막는다고 하더라도 뒤에서 퍼지는 소문을 막을 수 없잖은가.”

“…얻을 이득을 위해 입을 다문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이 빛의 대리자를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했기에 눈을 감았습니다.”

“나 역시 그러하다. 전 황제의 행태는 백해무익하며 오히려 마족을 자극하고 있었지. 이대로 황제의 뜻에 따라 드로젠을 공격하면 도리어 마족들이 그것을 빌미로 인간의 영토를 습격했을 거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차기 황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사 차기 황제가 신전에 반감이 있다 하더라도 나서서 신전을 억압하지 못할 겁니다. 신전은 전 황제의 몸을 마왕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제국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요.”

“공표하지 않을 셈인가?”

“황권을 이 이상 흔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상의 권력이 아닙니다. 빛의 복되신 은혜를 더욱더 많은 인간에게 포교하는 것뿐이지요.”

아무렴요. 그렇고 말고요. 어깨를 으쓱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룻밤 사이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대사제를 응시했다.

“당신의 질문에 답하겠다. 마왕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그는 내 수중 아래 있다.”

“어째서 처단하지 않으시고…….”

“빛은 이 이상 빛과 어둠의 전투에서 그녀의 어린 자식들이 상처 입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빛과 어둠의 결투 아래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됐나.”

그래. 입을 털려면 끝까지 털어야지. 사실 여신이 내게 구슬 하나 더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구슬에는 사기, 혹은 공갈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겠지.

“그러나 우리가 멈춘다고 해서 어둠 또한 그러리라는 확신이 없잖습니까.”

“그래. 그렇기에 당신이 필요하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마왕을 잡아 가둔 곳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와 어둠의 신과 이어진 연결을 끊어야 한다.”

“…연결을 끊는다고요.”

연결을 끊는 방법에 대해서 여기 오면서 나인에게 들은 내용이 있다. 큰 골자는 내가 한 계약과 같다. 강대한 신력을 가진 신관이 작성한 계약서에 자발적으로 서명하는 거다. 대신 서명한 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조건이라고 말이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빛의 신과 연결이 끊겨 내가 작성한 계약서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대륙에서 신성력이 가장 강하면서 빛의 신과 긴밀히 연결된 이는 대신관 토드뿐이지.

“방법은 빛의 신께서 직접 확인해 주셨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마왕은 용사인 나를 죽일 수 없다. 나 역시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정체가 지속하겠지.”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나 역시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생이 다할 때까지 마왕을 감시할 것이다. 천년이고 만년이고.”

이것만은 진심이다. 계약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는 계속 놈 곁에 있을 거다. 놈이 결국 미쳐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뭐 어쩌겠어. 한 번 죽어봐서 아는데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죽는 게 더 후회스럽다.

이제 정말 한 번 사는 생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홀가분한 생각이 들어 웃고 말았다. 몇 번이나 반복한 건지 알 수 없기만 원하는 걸 찾았다. 윤유마로 사는 동안 당장 하루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걸 원하며 산 적이 없는데 신기하다.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대신관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끝까지 오로지 빛과 빛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시군요. 당신의 저의를 의심한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빛의 대리자여.”

나는 긴장한 건지 불안한 건지 뻣뻣하게 굳은 늙은 대신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는 시늉을 했다.

“이 상황이 두려운가?”

“…두려움은 없습니다. 대리자께서 오로지 빛의 의지로 움직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륜이 언변인지 대신관이 말은 잘한다. 대신관쯤 되려면 저 정도 믿음은 보여줘야 하는 걸까? 나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대신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마족의 땅에서 나는 빛과 어둠의 전투에 지친 고위 마족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빛의 신의 뜻을 말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마왕을 그 땅에 감금하는 데 성공했다.”

“당신과 함께 온 마족 말입니까?”

“그래. 당신도 들은 바 있는 이름일 것이다. 암룡 바슈키.”

“…맙소사. 빛이여.”

새삼스럽다는 듯 대신관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빛의 신에게 기도했다.

“암룡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강림한 마왕과 용사의 싸움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왕의 오른팔로서 움직였지. 격렬한 전쟁 속에서 인간과 마족 가릴 것 없이 많은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렇겠지요. 고작 한 세기도 다 살지 못하는 인간에 비해 마족은 몇 세기를 살고 있으니 지난 전쟁을 기억하는 마족도 있겠군요.”

“그렇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이길 때마다 항상 다른 종은 멸망 직전에 이르렀지. 암룡을 비롯한 많은 마족이 이러한 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빛의 신 또한 이 굴레를 끊고 싶어 하신다. 오로지 인간을 위하여.”

여신이 내 말을 듣고 있다면 저 자식 사기 잘 친다고 껄껄 웃고 있겠지.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역시나 빛의 신은 방목이 취향인 듯하다. 그러니 나 역시 착실하게 제2의 마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마족이 드로젠을 침공한 이유를 아나?”

“…알고 있습니다. 마왕이 강림한 첫해는 제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역사에 기록된 마왕의 끔찍한 악행을 되새기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마왕은 움직이지 않았고 신전의 기도 속에서도 용사님은 지상에 강림하지 않았지요. 그러한 사태가 한 해, 두 해를 지나 마침내 3년에 이르자 제국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제국이 움직였다라…….”

“예. 드로젠의 멸망은 제국이 자초한 일입니다. 제국에서 드로젠 왕자의 몸을 마왕이 약탈했으니 마왕이 강림한 것은 드로젠 왕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만 탓이지요.”

“…황제인가? 그런 빌어먹을 궤변을 꺼낸 건?”

“그렇습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황제파에서 모든 책임을 드로젠에 물었고 드로젠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사와 기사들을 이끌고 마경으로 전진했습니다. 그 결과 드로젠은 멸망했고 대륙은 마왕의 각성을 재확인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강림했다. 이 별의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마왕 편에 선 용사가 말이다. 하하 이것 참, 빛의 여신이 자포자기하고 내게서 손을 뗄 만도 하다. 그쪽은 멋대로 나를 데리고 와 몇 번이나 환생하게 했으니 비긴 걸로 치자.

퍼뜩 생각난 것처럼 늙은 대신관 토드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마왕을 가두셨습니까? 대단하십니다. 암룡이 빛의 대리자를 도왔겠군요. 사악한 마왕의 목을 베 승리할 수 있음에도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찬양하라. 빛이여.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에 잠시라도 당신을 의심한 저를 용서하시길.”

광신도의 찬양처럼 들어서는 안 된다. 대신관의 말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는 양반이다. 하긴, 그러니 내가 황제를 죽이는 것도 방조한 거겠지.

촉촉하게 젖은 대신관의 눈이 부담스럽다. 다시 짧은 기도를 올린 후 대신관은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성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오리라 짐작했던 질문이다. 답을 꾸밀 시간도 충분했지. 나는 뻔뻔스레 대답했다.

“성검의 힘으로 마왕을 탑에 가뒀다. 영구적으로 가두는 것은 어렵지만,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성검이 없었다면 바슈키가 나와 동행하기도 어려웠을 거다. 그간 인간을 살육하고자 미쳐 날뛰는 마왕을 제압한 건 바슈키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위 마족인 그가 인간을 도울 이유가 없을 텐데요.”

“피에 취한 마왕이 인간을 다 죽이고 나면 광기가 잠잠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미친 검이 누구에게 향하겠나. 마족들 자신이지 않겠나.”

“…그런 자를 억누르기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겁니까?”

의심하려면 의심을 하고 감동하려면 감동만 했으면 좋겠다. 대신관 토드는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마음을 다해 말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길이니까.”

사기를 치고 사람을 죽였다. 어쩌면 내가 지켰을지도 모를 블리스의 사람들, 그리고 영감님의 목숨값을 내가 멋대로 이고 진 거다.

보답은 필요 없다. 복수하고 싶다면 언제든 칼을 갈고 찾아오라고 해라. 그 대신 나는 반격할 거다. 또 같은 일이 일어나면 내 멋대로 날뛸 거다.

함께 오래 머물면 닮는다더니 나도 펠런을 닮는 걸까. 광기 어린 내 시선에 대신관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지금은 적막한 고요가 필요하다. 신관이 보거나 말거나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대신관은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뭔가 내 행동에 감화가 된 것 같은데 추측하기 부끄럽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거니 하고 그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신관이 신과 직접 소통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신관은 오로지 기도로 신을 찬양하고, 신은 신성력을 내림으로써 신관의 신실함을 칭찬한다고 했던가.

신성력은 있지만, 신심은 없는 내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몰입해서 빛의 신에게 기도하던 대신관이 오랜 기도를 끝내고 무릎을 일으켰다. 곧 쓰러질 것처럼 후들거리는 늙은 신관의 몸을 부축해 일어나는 것을 돕자, 대신관 토드는 밝은 얼굴로 감사를 전했다.

“계약에 대해 빛께 기도했습니다. 빛께서 충만한 신성력으로 화답하셨으니 계약을 돕겠습니다. 그런데 계약서만 필요하신 거라면 굳이 제가 동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음?”

뜬금없는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걸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흔들리는 내 동공을 본 건지 대신관이 덩달아 나와 함께 당황했다. 나는 다급하게 신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인에게 통신을 걸었다.

- 저기 나인, 바쁘냐? 급하게 물어봐야 하는 게 있어서 그런데.

- 한가하진 않습니다. 대화는 아직 멀었습니까?

- 아직 멀었어. 그게, 계약서라는 것만 받으면 되나? 대신관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 꼭 작성한 신관이 동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건 신성이 뛰어난 신관이 만든 계약서지, 계약서를 만든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 …그걸 왜 인제 와서 말하지? 그러면 대신관을 비경까지 데리고 갈 필요가 없잖아.

- …정말 대신관을 데리고 비경으로 갈 셈이었습니까? 마왕에 더불어 고위 마족들이 머무는 그곳에?

‘끄으응’ 앓는 소리가 들렸다. 졸지에 멍청이가 된 것 같아 나는 짧은 욕설을 지껄이고 나인과 급하게 연결을 끊었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처음부터 말해주면 좀 좋냔 말이다.

“그렇군. 동행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대리자님과 함께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만 노쇠한 육신이라 여정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죄스러웠는데 다행입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겸양의 말을 몇 마디 한 후 나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얼마만큼 시간이 걸리는지 물었다.

나인과 통신을 하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대신관이 냉큼 원하는 대로 작성하고 신성을 불어넣는 데 반나절이면 된다고 대답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관이 작은 방에서 떠난 후 딱딱한 침대에 엎드렸다. 잠시 대화를 한 것뿐인데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

눈 안쪽이 뜨겁게 메말라 잠시 눈을 감고 목이 낮은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나인에게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괘씸해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필요하면 묻겠지. 그때가 되면 대답해 주기로 하자.

밤이 깊어졌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 등이 식은땀에 푹 젖었다. 방 불을 켜지 않아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 은은하게 밝았다. 왜 일어난 거지? 의아해하다가 문밖에서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와도 된다고 대답했다.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젊은 신관이 딱딱하게 긴장한 얼굴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 바구니에 사과 주스와 빵, 그리고 수프를 가져온 이가 깊게 머리를 숙이고 대신관의 말을 전했다.

“부탁하신 일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십니다. 새벽까지 완성할 수 있다, 전하셨으니 오늘 밤은 이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그러하겠다 전해다오.”

오래 걸리는 일이었구나. 하긴 나인도 내가 계약서를 찢겠다든지 파기하겠다고 할 때 길길이 날뛰었지.

혹시 말로만 작성한다고 해놓고 나를 이곳에 잡아둘 생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닐까 고민해 봤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차해서 문제가 생기면 대신관을 납치해서 비경으로 튀면 될 일이다.

저녁에 잠깐 잔 것이 독이 된 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젊은 신관이 가지고 온 음식 바구니는 내버려 두고 나인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곧 불퉁한 어투로 나인이 통신을 받았다.

- 저를 아예 잊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군요.

- 피곤해서 잠깐 잠들었어. 그보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약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나 봐.

- 제가 만든 것과 성질이 같은 거라면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아침에 찾아뵈면 되겠습니까?

- 신전의 문이 열리면 내가 통신을 걸게. 여기 들어오기 힘들면 내가 계약서를 받아서 나오면 되니까. 지금 어디서 쉬고 있나?

- 근처 여행자 여관입니다. 그럼 아침에 연락이 오길 기다리지요.

짧은 통신을 끝내고 나는 다시 침대에 옆으로 누웠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은은하다. 전등의 불을 켜고 싶지 않아 누워서 창문만 바라봤다.

펠런과 대화하고 싶다. 하지만 연락할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놈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내일로 미루자. 그래, 내일은 꼭 통신을 걸어보는 거다. 어제도 비슷한 다짐을 했던 것 같지만 어쩌겠어. 어젠 정말 내 정신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

새벽이 지나 해가 뜰 즈음 하룻밤 사이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의 대신관이 양피지 한 장을 들고 찾아왔다. 내가 작성해 준 것과 같은 내용인 건 둘째 치고 이거 한 장 만드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인 건지 물어보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방 안으로 들어온 대신관은 다시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거의 기어나가다시피 나왔다. 나를 배웅하겠다는 말에 우선 안정을 취하고 휴식하라 명령에 가까운 만류를 하며 떠날 채비를 끝냈다.

아침이 되어 대신전의 문이 열렸다. 신전에 일어난 이변을 걱정하고 있던 인근 주민들이 문 앞으로 몰렸지만, 신전 병사들이 주민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막으며 큰 문제는 없다고 말을 둘러대는 듯했다.

그 소란 틈으로 미리 언질을 받은 병사의 안내를 받고 신전 뒷문을 통해 몰래 신전 밖으로 나왔다.

가는 길이 제법 멀 거라는 소식에 신관들이 빵과 음식이 든 바구니를 줬다. 바구니를 팔에 걸고 나는 나인에게 링크를 연결해 통신을 걸었다.

- 좋아. 신전 밖으로 나왔어. 여기가 신전 뒷문이거든? 네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면 그쪽으로 갈게.

- …배를 타는 거 아닙니까?

- 배? 무슨 배? 여기서 비경까지 가는 배가 어디 있어.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 테니 이 이상 사고나 치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왠지 나인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착각이겠지.

인적 드문 곳에서 나인을 발견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움직였던 것처럼 나인과 내 몸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곧, 나인이 자신의 몸집을 부풀렸다. 순식간에 좁은 뒷골목을 가득 채우는 암룡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멋있다.

도시를 빠져나간 후 나인은 나는 속도를 높였다. 와이번만 한 크기의 암룡의 등장에 소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투명화 마법 덕분이다.

몇 번 홰친 것만으로 순식간에 땅이 멀어지고 하늘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하늘이 맑다. 오늘은 구름도 끼지 않아 조금 더울 것 같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지 아침나절부터 라이트의 제후에게서 몇 번이고 마법사 통신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들어왔으나 모두 쳐냈다. 어차피 내가 듣고 싶은 변경의 정보는 나인을 통해 들어온다.

정작 내가 지금 가장 대화하고 싶은 상대와 통신을 못 하는데 다른 놈의 목소리를 들어봤자 심란하기만 할 것 같다.

펠런과 대화하고 싶다. 하지만 대화하기 무섭다. 내 목소리를 듣고 놈이 폭주할까 봐. 그리고 이성을 잃고 인간을 공격할지 모르니까.

나인은 말했다. 내가 멀리 떠나서 오히려 마왕이 제정신을 차리는 것 같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 이 세상에 떨어져서 원하게 된 유일한 게 나 때문에 맛이 가고 있다니 말이다.

하루를 꼬박 나인의 등에서 보냈다. 용변을 볼 때만 잠시 땅에 내려오고 식사는 신관이 넣어준 음식 바구니에 있는 거로 해결하기로 했다. 신전에서 만든 음식이라 나인도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신전 밖에서 대기할 때 이미 자신 몫의 음식을 샀다고 하더라.

바구니 안에는 갖가지 음식이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오렌지 주스만 마셨다. 빈속에 오렌지 주스가 들어가자 위장이 조금 따끔거리길래 한 모금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위장을 신성력으로 회복하고 빵은 입에 대지 않았다. 나인의 등에 구토하면 이번에야말로 놈이 나를 떨어트려 죽이려 들지 몰랐다.

낮이 깊어지고 조금씩 해가 저물었다. 몇 시간이나 비행하느라 나인도 피곤할 텐데 내가 회복을 걸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슬쩍 나인에게 물었더니 그 자신도 어둠의 신관이라 자체 회복이 가능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 맞아 그랬지. 예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 기억이 났다.

신성력이 만능이 아닌 건 확실하다. 몸은 분명히 멀쩡한데 알고 있던 사실을 깜박하거나 주의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너무 많은 일을 벌인 탓이다. 그래서 약해진 거겠지.

다시 밤이 되어 마을 근처에 착륙했다. 상인들이 자주 오가는 곳인지 여관의 상태가 좋다. 나란히 붙어 있는 1인실을 빌려 일찍 잠잘 채비를 했다. 비경을 떠난 목적도 구했으니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 떠날 생각이다.

가슴팍에 넣어둔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양가죽. 손안에 착착 감기는 감촉이 이상하다. 이걸 쓰면 정말 놈을 구할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펠런에게 마법사 통신을 걸었다. 혹시 놈이 내 목소리를 듣고 이성을 잃을까 걱정했지만, 더 견디기 어렵다. 그리고 나인이 제대로 펠런에게 상황을 보고했는지 듣고 싶기도 하고.

그쪽도 늦은 밤일 텐데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통신 연결 신청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펠런과 링크가 연결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펠런을 불렀다.

- 지금 돌아가고 있어. 미안, 반지는 못 구했어.

- 혹시 그럴 것 같아서 내가 준비했으니 괜찮다.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이크, 나인이 듣진 않았겠지? 여관의 벽이 얇지 않길 빈다.

- 준비성 좋네. 신혼여행은 섬이 좋을 것 같아. 이 난리를 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하면 억울해서.

- 네가 돌아오면 제대로 프러포즈하마.

실없는 농담이다. 아니다. 농담이 아닐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모아 두 팔로 감싸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펠런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하고 싶어서다.

- 나인에게 설명 들었어?

- 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혼란에 빠트린 후 이제는 대신관을 협박해 계약서를 만들고 마족의 땅으로 오고 있다며 네가 마왕의 오른팔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데.

- 정확하게 말하면 노리는 건 제2의 마왕인데.

- 내가 이룩한 것보다 네 업적이 더 대단하니. 원한다면 퇴임식을 치르고 네게 왕관을 넘기겠다.

- 오, 그러면 네가 국서가 되는 건가?

그렇구나. 펠런은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이미 알고 있구나. 손등에 온기가 가시는 느낌에 나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가 폈다.

-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일 나은 선택이 그것이기에, 내가 원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기에 사람을 죽였어.

- 죄책감을 느끼고 있나?

- 그것도 있는데 더 끔찍한 느낌도 들어.

- 더 끔찍한 느낌?

- 나를 곤란하게 만든 새끼를 죽여서 시원해.

- …….

- 그런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좀 이상해. 다행히 연민은 없고, 점점 더 홀가분해져. 뭐 어때. 억울하면 자손이 복수하러 오겠지. 어차피 내가 더 세니까 오면 엉덩이 두들겨 팬 후 쫓아내야지. 뭐 이런 거.

- 그럴 수도 있겠군.

- 네가 비난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어차피 넌 내 편이잖아. 그렇다고 위로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말하고 싶었어. 말하면 좀 더 시원해질 것 같아서.

- 그래서 지금 시원한가?

- 모르겠어. 답답하고 우울한 건 둘째 치고 지금 당장 너 보고 싶다.

- 그렇다면 됐다.

다시 소리 내어 킬킬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웃음소리가 컸다. 이크, 조용히 해야지. 아주 예전 2평 고시원 쪽방에서 숨죽여 지내던 것이 생각나서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펠런과 링크는 연결한 채다.

- 어둠의 신과 연결을 끊어줘. 그리고 나를 죽이지 마. 그러면 미쳐서 덤비는 일이 없을 거라 하더라.

- 확실하지 않다. 전례가 없으므로.

- 그래도 뭐든 해봐야지. 오래오래 나랑 살고 싶지 않아?

- …살고 싶다.

그래야 착한 펠런이지. 나는 조금 으쓱해졌다.

- 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이야기 많이 하자. 묻고 싶은 거 많아. 내가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일 때 네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알고 싶고.

-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

-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냐. 그런데 아마 영원히 기억 못 할 거야.

펠런은 덤덤히 내게 말했다.

- 괜찮다. 나는 지금의 네가 가장 소중하다.

- 음… 지금 고백한 거야?

- 고백만큼은 얼굴 보고 제대로 하고 싶군.

기대할 테다. 설렐 테다. 잔뜩 상상할 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해서 나는 경련하는 입꼬리를 억지로 억눌렀다. 하, 정말이지 어거스트가 잘 키운 것 같다.

펠런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녀석도 드로젠 국경 근처에 진을 친 인간의 군대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었을 거다. 아침이 되면 널 만나러 갈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 기다리고 있겠다.

조금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펠런? 불안해져서 놈을 불렀다. 두 호흡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목 안에서 끓는 것 같은 낮은 신음 소리가 통신을 타고 들렸다. 괜찮냐고 빠르게 물었다.

그러나 펠런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해일처럼 난폭한 감정이 연결된 링크를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다급하게 통신을 끊었다. 이성을 잃은 거겠지. 통신을 걸지 말 걸 그랬나. 괜히 불안해져 눈을 감고 무릎 사이 얼굴을 파묻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오만 잡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잠시 고민하다가 반쯤 남은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라 아주 조금씩 나눠서 삼켰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제정신으로 움직일 수 있다.

빈 컵을 다시 바구니 안에 넣어둔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다음은 나도 잠이 든 모양이다.

희미한 빛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문 밖이 환했다. 가볍게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나인이 한심한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무역 도시에서 대신관을 봤을 때부터 영 놈이 나를 보는 시선이 불손하다.

종일 안장 위에 앉아서 신성력으로 회복했을 때와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몸 상태의 질이 다르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 후 빈 바구니를 버리고 간단히 요기할 음식을 찾아 여관 1층에서 샌드위치와 물을 샀다. 그동안 나는 슬쩍 나인을 바라보며 링크를 연결했다.

- 어제저녁에 펠런과 통신을 하다가 끊겼는데 그 후에 다른 일은 없대?

- …당신이었습니까? 어쩐지 그동안 잠잠하시던 왕께서 미쳐 날뛰셨다는 전보가 있었습니다.

- 저런, 그래서 지금은 어떻대?

- 현재진행 중입니다. 가면 큰 고생을 하겠군요. 저런.

전혀 측은하지 않다는 말투로 말해봤자 이쪽은 비꼬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잠시 나인을 흘겨보다가 생각을 정리해 놈에게 물었다.

- 그러면 어쩌지. 놈이 제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갈까?

- 당신을 찾기 위해 왕께서 직접 인간의 땅을 침공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 …바로 날아가자.

기껏 대신관을 부추겨 계약서까지 만들었는데 쓰기 전에 사고 치면 안 되지. 폭주한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불안한데.

그러면서 어제저녁 펠런과 한 대화가 자꾸 생각났다. 통신이 끊기기 전만 하더라도 즐거웠지. 마른세수한 후 고개를 들었다. 근심 어린 내 얼굴을 흘깃 바라보던 나인이 무던한 목소리로 통신을 이었다.

- 별일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어디 있는지 좀 찾으시다가, 당신의 방을 박살 내고 칼을 쥔 채 마경을 서성거리셨다고 하더군요.

- …완전히 심각한데? 누가 봐도 광인인데?

- 괜찮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곧장 피신한 덕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 큰일이다. 미친개 조련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는데. 지금이라도 배워둬야 하나.

- …그대로 왕께 전해드리죠.

- 좋아. 가는 길에 마차 안에서 유서를 써두도록 하지.

나인과 나는 서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이 자식은 어디까지나 펠런을 위해 움직이는 놈이다. 내 편이라고 생각하고 다루면 언젠가 크게 뒤통수를 맞을 것 같다. 이미 계약서로 뒤통수를 한 번 맞기도 했고 말이지.

결과가 좋아서 망정이지 내가 펠런과 뜻이 달랐다면 계약서에서 이미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니냐.

그나저나 큰일이다. 펠런이 미쳐서 날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놈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국경 근처 마을에서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자 나인이 고개를 젓고 냉담히 말했다.

- 당신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날뛸 겁니다.

- …저런. 간식이라도 사서 가져가야 하나.

- 간식 대신 당신을 물어뜯을 가능성이 크죠.

분리 불안이 있는 강아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어서 조금 고민했다. 역시 오래 기다린 보상을 주는 편이 좋겠지? 이것저것 의견을 묻자 나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연결된 링크로 말했다.

- 이제 도망칠 생각은 버린 겁니까?

- 뭐?

- 비경에서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대신관을 데리고 올 거라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핑계로 자유무역 도시에 간 후 나를 따돌리고 섬으로 도망치리라 짐작했지요.

- …아하, 도망치라고 날 데리고 거기까지 간 거였어?

그래서 자유무역 도시까지 갔던 건가? 갑자기 배를 타는 게 아니냐고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식료품점에서 나온 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는 나인을 바라봤다.

나인이 나를 신용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나도 놈을 신용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의 경우 놈이 펠런의 뜻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제 의지대로 움직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전에 마왕을 했던 놈이라 그런지 놈의 행보는 조건 없이 현 마왕을 따르는 다른 마족들과 다르다. 내게 계약서를 쓰게 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 놈의 말을 들어보면 놈은 내가 섬으로 도망치길 원한 것 같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데리고 비경을 떠난 거였나.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 내 말을 듣더라니.

짧게 심호흡했다. 나인에게 확답을 줘야 할 것 같다. 내가 펠런을 놔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몸을 돌려 나인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요새로 돌아간다.”

“지금 상황에 요새로 돌아가면 당신이 위험해질 겁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더 위험해지겠지. 상관없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비경을 떠난 건지 알 텐데. 이봐, 달아날 수 있었다면 자허 블리스였을 때 놈을 피해 달아났어. 놈과 대화하겠다고 마경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머뭇거리는 나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온 후 다시 용으로 변신하라 말했지만, 놈은 본 모습으로 변신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 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뭐 마족에겐 잘된 일이네. 용사가 죽고 나면 마왕이 승리하는 거 아냐.”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지난 3년간 억누르던 인간에 대한 증오가 당신이 등장한 이래 급격하게 뒤틀렸습니다. 이대로 당신을 만나면 살의를 억누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나보고 도망치라는 거야?”

“원한다면 자유무역 도시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아직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배편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비는 물론이고 당신이 그곳에서 정착할 지원금도 준비해 뒀습니다.”

작정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같은 행동을 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정말 도망칠 거라고 믿었던 걸까? 펠런을 놔두고?

“…안 가. 도망칠 생각 없어. 웃기지 말고 변신이나 해. 비경으로 갈 거야.”

“3년은 너무 길었습니다. 그동안 당신의 말이 족쇄처럼 우리의 왕을 묶었죠. 어둠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나 역시 한때 우리의 신이 준 신명을 들었기에 알 수 있죠. 빛의 아이들을 죽이고 대적자인 용사를 쓰러트려라, 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은 기간 동안 펠런은 조금씩 마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폭주했죠.”

“그래서 계약서를 가지고 온 거잖아. 네놈이 내게 한 것처럼 신과 연결을 끊기 위해서.”

“당신의 힘으로 펠런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봅니까? 그가 온전히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나인의 말속에는 펠런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무서운 게 아니다. 나를 죽이고 나서 망가질 펠런이 걱정인 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찢고 난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놈이 절망할 것이 무서워서.

“괜찮아. 안 죽어.”

나는 덤덤히 말하며 나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 근거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죽어봐서 알아. 그 자식 내버려 두고 혼자 죽을 생각 없어. 죽더라도 놈은 죽이고 갈 거야.”

조금 미친 소리 같지만 어쩌겠어. 그게 내 본심인데. 질린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나인을 보며 나는 은은하게 웃었다.

“그리고 놈이 영감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 들면 목숨 걸고 막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둘 다 죽거나 둘 다 살거나. 그런 거지.”

“…….”

말이 통하지 않는 미친놈을 바라보듯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나인의 표정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익숙하다. 아마 어거스트 때도 이런 눈빛을 종종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봤음에도 종종 나인과 하는 대화가 익숙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놈은 당당히 자신의 왕과 함께 죽겠다고 말하는 용사를 앞에 두고 탄식 같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네가 비경으로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나는 걸어서라도 비경으로 갈 거야. 여기서 말을 사도 되고. 모르나 본데 내가 버프 걸고 뛰면 말보다 빠르다. 그리고 난 마경을 무사히 건널 기술도 가지고 있어.”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무섭군요.”

두말하지 않고 나인은 용으로 변신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안장을 꺼내 놈의 등에 얹었다. 며칠 사이 익숙하게 안장을 고정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반질반질 새까만 비늘이 올올히 일어서는 모습이 재미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꿍꿍이는 네가 꾸몄다면 몰라도 내가 꾸민 적은 별로 없거든?”

“…당신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어야 믿지요.”

“내 기억에 없는 건 말하지 않기로 하자. 어거스트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나?”

“펠런과 함께 저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기억이 없는 게 아쉬운 순간이었어. 내가 널 놀렸다고?”

자승자박,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나인이 곧장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가볍게 고삐를 틀어쥐고 보호 마법을 걸었다.

비경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도 나인도 대화하지 않았다. 내가 도망칠 거로 생각한 놈에게 섭섭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떨어진 후 내가 깊은 관계를 맺은 건 펠런이 전부다. 다른 이들은 내가 쳐냈지.

외골수에 가까운 이 성정은 몇 번을 죽어도 고쳐지지 않는구나. 늘 당연하게 여겼던 성질이 오늘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인과 좀 더 대화해야 했나. 최소한 동료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서 결국 남은 관계는 의심과 불안뿐이다.

그래도 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과 친구 이상이 되어본 적이 있어야지. 솔직히 내게 친구라는 개념은 펠런이 처음이다. 그러니 다른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이런저런 후회를 하던 중 가장 높은 꼭대기에 나인이 내려섰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

요새 아래서 깊고 어두운 마력이 들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해서 감지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의 농도다. 이러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인간의 형태로 변신한 나인에게 양피지를 내밀며 덤덤히 말했다.

“계약서든 뭐든 나를 속이거나 숨기는 건 괜찮아. 서로 신용이 없는데 뭐 어쩌겠어. 그런데 내 뜻을 곡해해서 멋대로 해석하지 말아줘. 인제 와서 더 숨기는 것도 없고 꿍꿍이도 없어. 그냥 나는 펠런이 좋아. 놈과 함께 살고 싶어. 그리고 이왕 사는 거 제정신 박힌 놈과 살고 싶어서 이러는 것뿐이야.”

펠런이 오고 있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지독한 마력에 온몸이 깊은 물속에 잠길 듯 무거워졌다. 난폭한 살의에 온몸이 찢어지는 착각마저 든다. 며칠 사이 놈은 나를 잃고 조금 더 미친 듯했다.

“펠런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계약서에 서명하게 해. 내가 지금 가지고 있으면 싸우다가 찢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 왕을 위해 하는 말이니 지금이라도 탈출을 염두에 둬주십시오.”

“당신이 펠런에게 지극정성인 거 아는데 어쩌겠어. 놈이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데.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잠깐 벗어나. 그리고 놈이 제정신일 때 돌아와서 무조건 계약서부터 쓰게 해. 그거 말고 펠런이 무사히 이성을 찾을 방법 있으면 말해봐.”

역시 의견을 묻는 게 나인의 입을 다물게 하는 최적의 방법인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인을 보고 쓰게 웃으며 나는 스스로 걸어 요새 안으로 향했다. 코앞에 수백 개의 칼날이 춤추는 듯하다. 곧 난폭하게 원형 계단으로 향하는 문이 좌우로 터졌다.

“그럼 나중에 봐. 그때까지 내가 멀쩡하면 말이지.”

시커먼 어둠 속에서 불길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용으로 변신해 도망친다. 인세에 강림한 지옥을 앞에 두고 나는 머쓱해서 웃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좀 늦었나 보다. 많이 기다렸어?”

대답 대신 마왕은 내 팔을 낚아챘다.

멱살을 붙잡혔나 생각하던 차에 놈이 내 몸을 요새의 벽에 처박았다. 급하게 보호 마법을 걸고 신체를 강화했다. 나인의 마법으로 강화된 요새의 벽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크악!”

폐 안의 숨을 토하고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쉰다. 벽에 처박힌 나를 향해 이성을 잃은 마왕이 마력을 담은 손 갈퀴를 휘둘렀다.

요새의 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나는 놈의 손을 피해 한 바퀴 굴렀다. 그러나 내가 움직일 것을 예상한 듯 굴러서 피한 벽에서 새까만 송곳 같은 마력으로 만든 칼날이 솟구쳤다.

간발의 차로 칼날을 피했다. 그러나 옷이 찢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양피지를 나인에게 맡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펠런의 마법과 괴물 같은 살의에 맞서 요새 안을 뛰고 뒹굴고 반격해야 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펠런에게 검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새 어디에서도 날붙이를 찾을 수 없다. 마왕의 마력은 오로지 그 힘과 물량만으로 훌륭한 살상용 무기지만 검이 없는 게 어디냐.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냐?”

대답할 이성도 볼 수 없는 마왕을 앞에 두고 나는 쓰게 웃었다. 눈두덩이가 찢어져 한쪽 시야가 붉다. 신성력으로 회복해도 이미 흐른 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 나는 몇 시간 만에 핏물을 뒤집어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신성력도 한계가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는구나. 전처럼 원활하게 돌지 않는 기운에 웃음부터 나왔다.

이제 몇 번이나 회복할 수 있을까. 다행히 조금씩 보충이 되는 것 같지만 이대로 몇 번 더 으깨지면 육체를 수복하기 어려울 듯하다.

피 냄새에 취한 듯 놈이 시뻘겋게 젖은 손으로 내 발목을 움켜쥐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완전히 박살 난 요새는 이제 나인 요정님의 손으로도 복구가 어려울 것 같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실소하며 우르르 무너진 외벽 너머로 환히 보이는 요새 밖 풍경을 감상했다.

다행히 요새 안에 남아 있는 마족은 없는 듯했다. 아마 펠런이나 나인이 대피를 시킨 거겠지.

마왕 경보 같은 것이 있을까? 마왕님이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행동하면 각자 알아서 요새를 대피할 것. 뭐 이런 매뉴얼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살아남으면 나인에게 물어볼 생각이다.

“크, 윽!!”

잡생각을 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형태만 간신히 남은 어느 방으로 나를 끌고 온 마왕 놈이 간신히 몸에 달라붙어 있던 천 조각을 쥐어뜯었다. 살점과 함께 뜯겨 나가는 것이 여간 아픈 게 아니다.

어지간한 가벼운 상처는 내버려 두고 출혈이 더 심해지면 죽을 것 같은 뭉텅이로 뜯겨 나간 자리만 회복을 시켰다. 가슴 근처가 너무 뻐근한데 이걸 수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르겠다.

“우리 개새끼. 주인님이 너무 늦게 와서 삐졌어요?”

“…….”

빛이 투과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깊다. 놈은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흠칫 몸을 굳혔다. 알아듣나? 이름이라도 불러볼까? 싶지만, 놈의 전신에서 풍기는 마력의 소용돌이가 너무 짙고 난폭하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온전히 벗긴 내 몸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놈이 내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콰드득―!

“읏, 흑!!”

어금니 꽉 물고 신음을 참았다. 놈이 이를 드러내 어깻죽지를 물어뜯는다. 찢어진 살에서 다시 피가 솟구치자 놈이 꿀떡꿀떡 잘도 내 피를 마신다.

마왕이라는 것이 흡혈귀와 먼 친척인가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문제인 것이 빳빳하게 선 놈의 하반신이다.

“이, 성욕의 화신, 같으니.”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고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수복했다. 피가 올라오는 걸 보니 내장이 상한 모양이다.

피비린내 섞인 숨을 길게 내뱉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성 잃은 짐승에게 대화가 통할 리 없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재미있기도 하다. 맛이 간 상태로도 여전히 나를 탐하는 놈의 본능에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는 건 내가 미쳤기 때문일까.

“그, 렇다고 갑자기… 하라는 건 아니었, 크읏!!”

다리가 벌려질 때 설마 했는데 역시나, 다. 이성을 잃은 놈에게 전희를 바라는 것 자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선액을 줄줄 흘리는 놈의 단단한 귀두가 아래에 닿자 나는 숨을 멈췄다.

본능만 남은 듯 놈은 좁고 메마른 틈을 기어이 비집고 굵은 머리를 쑤셔 넣은 후 단번에 결장 입구까지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아, 으, 극!! 흡… 흐으으… 미, 친놈. 아…….”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내장은 단련할 수 없는 기관인가. 놈의 손톱에 베이고 벽에 처박혀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찢어질 때도 느끼기 어려웠던 고통에 나는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내쉰다.

덜덜 떨리는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펠런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성 잃은 놈이 매몰차게 팔을 밀어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그르렁거리며 제 성기를 머금은 엉덩이를 멀거니 바라봤다. 왜. 너도 아프냐?

내장이 밀려 올라가는 느낌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것이 패착이었다. 보다 움직이기 쉬워졌음을 깨닫자마자 마왕 놈은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앗, 힉! 히윽! 아, 아프악! 아프다고! 미친, 놈악!!”

“…….”

“안, 돼. 못 들어가. 거기. 못 풀어서어억, 으 큭!! 악, 아흑!!”

놈의 두 팔이 내 몸을 가두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놈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풀어 놈의 가슴을 밀쳤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게 바위 같다. 너무 아파서 숨도 못 쉬겠다.

할퀴고 두들겨 패도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내 저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놈이 사납게 그르렁거리더니 다시 고개 숙여 목덜미를 문다. 놈의 입안에서 내 살점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뜯겨 나갔다.

이번에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경동맥이 찢어진 즉시 신성력을 돌렸다. 놈의 얼굴이 세차게 뿜어진 내 피로 시뻘겋다. 살점을 우물거리는 짐승의 모습에 나는 본능적으로 겁에 질려 몸을 뒤틀었다. 무섭다.

무서워.

절로 통곡이 흘러나왔다. 꺽꺽거리는 울음을 내뱉으며 나는 무릎으로 기었다. 배 안쪽을 쑤시는 놈의 성기가 아프다. 무서워. 팔꿈치로 기어 꿈틀거린다. 안에서 놈의 성기가 뱃속을 득득 긁는다.

그대로 짐승처럼 엎드리자, 성기가 반쯤 빠져나왔다. 이미 내장이 상한 건지 놈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 핏물도 함께 흘러 허벅지를 타고 바닥을 적셨다. 눈물 섞인 핏물을 들이켜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도망가야겠다. 이러다가 내가 죽을 거다.

내가 안이했다.

손을 뻗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경련한다. 목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몸을 완벽하게 회복한 모양이다. 정말 신성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두세 번 더 치료하면 바닥이 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죽겠지.

죽기 싫다. 무서워.

다시 한 걸음, 벌레처럼 기며 꿈틀거리는 내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나는 울며 손을 뻗었다. 문을 열고 달아나야 하는데 걸을 수가 없다.

마왕의 마력이 나를 짓눌렀다. 이미 한 번 겪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는 기사도 용사도 아닌 유마다.

“허, 그윽!!”

바람 빠지는 신음을 토하며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내 몸 위로 체중을 실은 빌어먹을 마왕 놈이 그대로 짐승처럼 뒤에서 다시 성기를 삽입했다.

피와 선액에 끈적끈적하게 젖은 구멍 안으로 놈의 성기가 밀고 들어온다. 자세가 나빴던 건지 몸을 일으킬 수 없다. 체중보다 더 무거운 것이 나를 짓눌러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톱으로 바닥을 득득 긁었다. 무섭다. 죽고 싶지 않다.

“크, 윽, 흐응!”

틈 하나 없이 빽빽하게 안이 찼다. 몇 번의 출납으로 빌어먹을 놈의 성기가 아까보다 더 커지고 굵어졌다. 그게 어떻게 더 커질 수 있어? 억울해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을 내려쳤다.

“싫, 어 아프…다고, 흣, 으으응, 미치겠, 네. 자꾸 안에서 커지지 마으, 흑!”

기어이 구부러진 결장 입구를 비집고 내장 안쪽까지 밀고 들어온다. 윗배가 볼록하게 부풀고 짓눌린 위장에서 신물이 역류한다. 피 섞인 신물을 코와 입으로 구토하고 나는 힉힉 우는 울음을 내뱉으며 내 목와 가슴을 조르는 놈의 팔을 손톱 세워 긁었다.

“헤, 으극!! 힘…들어. 미친, 아. 어디까지. 읏. 흣! 앗, 아, 아아아, 우움, 직이지, 마앗!”

쩍쩍 젖은 소리를 내며 살과 살이 부딪힌다. 성난 짐승의 성기가 내벽을 거침없이 긁으며 안을 쑤시고 빠져나간다. 귀두만 남기고 내벽을 후루룩 긁으며 빠져나간 것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진공처럼 수축한 내벽이 팽팽하게 벌어지도록 벌리며 결장까지 쑤셨다.

미친, 돌았어. 난폭하게 휘젓는 움직임에 나는 혀를 빼물고 운다. 아랫배가 욱신욱신하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와중에 몇 번이고 전립선을 뭉개고 비비는 자극에 성기가 빳빳하게 서더니 참을 틈도 없이 정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흐으, 윽, 으브, 읍!”

낭창하게 휘어진 허리가 경련한다. 갔어. 가버렸…다. 강제로 끌어 올려진 절정에 눈이 뒤집힌다. 놈의 팔을 붙든 몸이 덜덜 떨리고 곧 몸이 이완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가거나 말거나 빌어먹을 마왕 놈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방금 갔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다급하게 놈의 팔을 롤러코스터 안전바인 양 붙들기 무섭게 두 번째 절정이 온다.

“아아아, 아흐으아앙!!”

성기가 앞뒤로 세차게 흔들린다. 가슴팍과 바닥에 정액이 흩뿌려지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쏟았다. 놈의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액이 흰 거품을 만들며 열상을 입고 붉게 부푼 입구를 타고 엉덩이에서 고환으로, 그리고 허벅지로 줄줄 흘렀다.

그리고 다시 절정.

몸이 망가진 게 틀림없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붙잡고 나는 울며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죽을 위기에 처한 탓에 나도 미친 건가.

절정에 달해 꿈틀거리는 내벽에 놈이 낮게 그르렁거리며 만족스러운 목울음을 운다. 그리고 덥석 뒷목을 무는 순간 결국 다시 절정에 달해 투명한 소변 같은 물을 세차게 뿜었다.

“흐, 에…엑……. 아후으…극…….”

눈물이 짜다. 혀끝까지 아린 느낌이 들었다. 한기가 든 것처럼 덜덜 떨리면서도 머릿속은 이미 곤죽이 된 것처럼 녹아내렸다.

그 와중에 놈이 절정에 달해 결장 안으로 놈의 정액이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빌어먹을 마왕 놈은 한 번 갔다고 끝낼 놈이 아니다.

역시나 사정이 끝난 놈은 자세를 바꿔 나를 마주 보듯 안고 들어 올렸다. 나는 히죽거리며 자포자기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흑!!”

정액에 푹 젖은 내 둔부를 움켜쥐었던 놈이 손을 놓는다. 체중과 더불어 중력 덕에 나는 단번에 작살 찔린 물고기처럼 놈의 성기에 내장 안쪽까지 찔려 퍼드득 떨었다.

아까보다 더 깊이 들어오는 성기도 성기지만 전립선이 두툼한 기둥에 짜부라져서 벌어진 입은 숨을 토할 생각도 없이 숨을 멈췄다. 아니, 잠깐이지만 정말 숨이 멎은 느낌이다.

삽입만으로 절정에 달한 몸이 놈의 윗배에 아까보다 묽은 정액을 꿀럭꿀럭 토했다. 발가락 끝까지 빳빳하게 세웠던 몸이 이완되기도 전에 놈이 내 엉덩이를 쥐고 직접 제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쩍, 쩍! 쩍 하고 젖은 살이 몇 번이고 부딪힌다.

정액에 젖은 백금발이 등에 달라붙는다. 피비린내 섞인 신물을 삼키고 나는 몸을 뒤로 젖혔다. 도망,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는데 놈이 내 반응을 알아차리고 으르렁거리며 단번에 성기를 쑤셔 넣는다.

“아, 아으그, 흐, 으아… 잘, 못했……. 흐응!”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사과해야 했다. 뭔가 잘못을 했겠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우선 도망가지 말아야겠다. 뒤로 빼지도 말고. 단순해진 뇌가 단순한 대답만 꺼냈다.

놈이 내 입술을 물어뜯는다. 이게 키슨가? 모르겠다. 피 맛이 나는 놈의 치아를 조심조심 혀로 핥았다. 땀과 피 섞인 놈의 몸을 끌어안는다. 희미하게 내가 알던 체취가 났다. 괜히 억울해져서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많이 사정한 탓에 귀두가 얼얼하다. 고환이 텅텅 빈 것이 느껴지는데 놈은 여전히 멈출 기미가 없다.

문제는 사정량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한 번 쌀 때마다 그 양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마족과 인간의 차이를 알고 싶지 않다.

서로 마주 보고 몇 번 박힌 후, 나는 나가떨어졌다. 물론 나가떨어진 건 나뿐이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든 붙든 놈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얹고 그대로 옆에서 삽입했다. 위아래로 벌어진 다리를 오므릴 수조차 없다.

문제는 한껏 벌려진 틈으로 정액이 줄줄 흘러넘쳤고, 윤활유를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흠뻑 젖은 내벽 탓에 삽입할 때의 고통이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아흣, 흐아앙!!”

높은 교성을 지른 직후 나는 혀를 깨물 뻔했다.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온 건지 모르겠다. 수치스러워서 몸 둘 바 모르겠는데 이성 잃은 마왕 새끼는 그게 취향인 듯 아까부터 자꾸 내가 신음이 터지는 곳만 집요하게 쑤신다.

이미 정액은 나오지 않는데 지나친 마찰로 퉁퉁 부은 곳을 귀두와 기둥이 쓸고 비빌 때마다 잔경련 같은 쾌감이 몇 번이고 중첩된다. 안 돼. 이거, 이상해. 울며 매달려도 놈은 들을 기색이 없다. 결국, 나는 바닥을 긁으며 사정없는 절정에 다다랐다.

“흐, 크, 으으윽!!”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회복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니다. 목숨이 걸릴 때만 하자. 아니면 내가 죽는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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