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의가 아니다
해안을 따라 쉬지 않고 날았더니 점심 무렵 라이트의 국경을 넘어 미스트에 닿았다. 나 혼자 이동할 때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나 빠른 속도다.
이 속도라면 내일 오전 중에 자유무역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나인이 급격하게 속도를 줄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도 전에 나인이 먼저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후 내게 상황을 알렸다.
“…왕께서 비경에 돌아오셨습니다.”
“며칠 걸린다더니 벌써?”
며칠은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지금 움직인 건데 큰일이다. 아니, 큰일은 아닌가. 어차피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나인을 통해 듣고 있을 거다.
나는 재빠르게 펠런에게 통신을 걸었다. 잘 돌아왔냐고, 나는 지금 미스트 해안 상공 위를 날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하고 싶은데 빌어먹을 통신이 되지 않았다.
느낌이 썩 좋지 않다. 놈과 닿는 마법사 링크가 까칠까칠한 느낌이다. 감각으로 잘 표현할 수 없는 불협화음. 혹은 아귀가 맞지 않는 태엽 같다.
“통신을 걸어도 소용없을 겁니다. 통신에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무슨 미친 소리야.”
“블리스와 라이트의 군대가 드로젠을 침공했습니다.”
끔찍한 비보에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신음을 삼켰다.
기록에 의하면 마왕은 인간의 영토를 침략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악하고 무도한 생물이라고 했다. 그런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은 성검을 가진 용사뿐이다.
그리고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마족의 땅에 들어간 용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왕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황제는 불안에 떨었다. 마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올 것 같았다. 마왕과 용사의 대결에서 대부분 용사가 이겼지만, 아주 가끔 마왕이 승리한 기록도 있었다. 패배한 자의 역사는 짧게 기록된다. 그리하여 남은 기록은 단 몇 줄뿐이었다.
[인류는 멸망 직전에 이르러 대륙의 극동에서 간신히 숨을 붙이고 명맥을 유지했다.]
용사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이들은 마왕의 침공에 대비할 준비를 했다. 아직 빛의 탑은 그 힘을 유지하고 있으니 빛의 탑을 중심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자는 말까지 나왔다.
라이트 가의 가주는 용사와 연결된 마법사 링크가 끊기지 않았으니 용사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 주장했다. 제후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얻었으나, 그 후로 몇 주 동안 용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왕 역시 드로젠 외 다른 나라를 침공할 기미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렸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보를 확인할 만한 근거가 없으니 나도는 것들은 모두 근거 없는 소문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권위를 지키는 것에 혈안이 된 황제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 짧고 멍청한 소견으로 버틴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황제는 드로젠의 실향민들을 전위에 세워 드로젠을 되찾을 것을 몇 가지 은유와 강권을 통해 명령했다. 침공 부대에 제국의 군사는 합류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 그러니까 마왕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경우 손쉽게 발을 빼기 위해서였다.
같은 맥락으로 오로지 드로젠의 국민만으로 부대를 꾸리길 원했으나 다니엘 미스트와 핀 더 라이트가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침공 부대에 합류했다.
“여기까지가 밀정을 통해 알려진 일의 전말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펠런은 그럼 지금 드로젠에 있나?”
“예. 북부 산맥에서 드로젠으로 곧장 귀환한 후, 최전선에 있는 돌격 부대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치열하게 갈등했다. 어쩌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펠런의 움직임이 드로젠의 국경에서 전투에 묶인다면 그동안 대신관을 데리고 비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펠런이 나를 쫓아 여기까지 올 시간이 부족하겠지. 성공 확률은 높다.
하지만 그동안 전쟁이 벌어질 거다. 물론 이 경우는 제국 측의 침공이니 펠런이 국경을 침범한 이들을 당연히 쓰러트려야 한다. 이쪽이 약하게 보이면 무조건 처맞는다.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나 그것이 영토를 침공할 변명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영감님도 최전선에 계시겠지.
“지금 내가 국경으로 가면 더 문제가 생겨.”
“아직 전투는 발발하지 않았습니다. 왕께서 순찰대를 부대 주둔지 안쪽으로 후퇴시키셨다고 합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정했다. 펠런을 돕기 위해 드로젠의 국경으로 가봤자 일이 복잡해진다.
용사가 마왕을 도와 침공 부대를 공격하면 황제가 미쳐 날뛸 것이고, 반대로 내가 침공 부대를 도와 펠런과 대척하면 펠런이 이성을 잃고 날뛸 거다. 그러면 결말은 인류 멸망일 가능성이 크다.
“하루. 딱 하루만 버티라고 해. 공격하지 말고 최소한으로 대응하라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하라고 해. 그리고 펠런에게 절대 외부에 모습을 노출하지 말라고 해. 특히 인간 쪽 병사나 기사의 눈에 띄면 안 돼. 광기가 돌 것 같거든 무조건 요새 안에서 버티라고 해.”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고 묻는 나인의 시선에 나는 침착하게 고삐를 틀어쥐고 내 몸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젠장. 나인에게 버프를 걸지 못해 안타깝다.
“그리고 이대로 자유무역 도시로 날아.”
“…예?”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지금 내 생각에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 펠런이 미쳐서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리고 제국이 미쳐서 패배가 확실한 싸움을 하지 않을 방법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정확하게 설명해 주시죠.”
마른침을 삼키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황제를 죽이러 갈 거다.”
정말 미친 소리 같다고 나인은 한숨을 내쉰다. 나를 설득하고 싶거든 우선 가면서 설득하라고 재촉했다. 나인은 단박에 속도를 올려 쏜살처럼 북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미스트 제후국의 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푸르른 곡식들과 농부들. 일촉즉발인 전쟁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한가로운 모습이지만 내가 실패하거나 다른 수가 없다면 여기도 몇 년 안에 불바다가 될 거다. 광기에 취한 마왕은 인간의 몰살을 원하니까 말이다.
아마도 극동에서 최소한만 살아남겠지. 소설에서 나왔던 내용처럼 말이다.
마왕의 광기가 잠잠해져도 수백 년간 그렇게 죽은 듯 살다가 다시 언젠가 빛의 신이 죽은 나 대신 새로운 용사를 보낼 것이다. 펠런은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 아니면 천수를 누린 펠런 대신 새로운 마왕이 용사와 대적할까.
백년해로와 만수무강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동화란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고 그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인데. 하하하, 그걸 누리기 위해 살인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자유무역 도시에서 어떻게 황제를 죽일 셈입니까?”
“제국은 뒤이어 갈 거다. 그전에 대신관을 만나 말을 맞출 필요가 있어. 이대로 내가 황제를 죽이면 가장 먼저 피해와 의심을 받는 건 빛의 신전이니.”
“신전까지 신경을 써주는 겁니까? 그것참 대단한 빛의 사도군요.”
“명분을 만들겠다는 소리야. 황제를 마왕으로 몰 거거든.”
“…예?”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지만 나쁜 일에 쓸 때는 이만큼 기민한 적이 없다.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짠 끝에 나온 결론이라 오류투성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리라. 최소한 수만의 인간이 죽는 것보다 나으리라.
“할 수 있어. 인간들은 마왕이 드로젠의 왕자였던 펠런의 몸에 빙의한 상태라고 믿고 있거든.”
“…그렇지요.”
“그래서 그걸 이용할 거야. 한 번 빙의했으니 다른 몸으로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할 거야. 그리고 드로젠의 국경에서 치러진 격전 이후, 마왕은 황제의 몸에 빙의한 거지. 펠런이 마왕이 되고 나서 내 시체를 들고 와서 다니엘 블리스 제후를 만났던 정황이 있어. 마왕이 된 이후 움직인 거니 이 정보를 활용하면 돼.”
“무슨 미친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목적은 이미 정해졌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이유를 찾는 식이라 주먹구구식의 설명이 될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명분이다. 필요한 건 황제의 죽음이니 말이다.
“황제를 죽이고 당신은 어쩔 셈입니까?”
“성검 말이야. 아카데미에서 쓰는 수련용 검이랑 외형은 똑같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검이나 그거나 거의 비슷하지.”
“아니, 죽인 후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는 내 알 바 아니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게 성검인지 아니면 그냥 검인지 알 수 있는 건 신관들뿐인데 뭐 어쩌겠어. 용사가 지금 이걸 성검이라고 말하면 성검이 되는 거지.”
“제 말 안 듣고 있지요? 지금 이게 황제를 죽인다고 해결이 되는 문제입니까?”
“아마도 해결돼.”
황제가 용사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용사는 황제를 마왕이라고 주장한다. 주장의 신용도와 상관없이 마족들이 퇴각한다. 그러면 우선 제국의 수뇌부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백년해로 못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다. 우리 영감님이 살아남을 시간, 그리고 황제의 명령 아래 창과 검을 쥔 병사들이 살아남을 시간.
이런 상황에 끼어드는 것이 싫어서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리고 섬으로 도망치고 싶었는데 말이다.
펠런은 내게 통신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놈이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만약의 경우 문제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놈이 내게 말 할 거다.
변명할지 통보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편도 들 수 없고 들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거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는, 입니까? 당신으로 국한하시죠?”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가자고.”
펠런을 업어 키운 드로젠의 마법사 나인 드라코헤드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의 얼굴로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대단하다 정말.
“그래서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건 아니잖아.”
“…….”
“당신도 펠런이 제대로 삶을 누리길 원하니까 말이야.”
“…너무 어린 나이인 그를 발견했습니다. 젠장, 정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후회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라며 나인에게 동의했다.
“정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식이 너무 착하잖아. 성실하고, 왜 앞으로 마왕이 될 녀석이 호구인 건데.”
“마왕이라면 아랫사람을 공포와 존경으로 부려야 하는데 반은 인간이 섞인 탓일까요. 제 용생 중 제게 의지하려 한 마왕 후보는 처음이었습니다.”
“만나자마자 자기가 뭘 알고 있는지 다 불더라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니까 친구가 되고 싶대. 아무리 영혼이 같아도 말이지. 이쪽은 기억이 없는데 혼자서 오래 만나지 못한 가족 상봉하듯 굴면 어쩌자는 거야.”
“심지어 당신은 앞으로 용사가 될 인물이니 절대 선을 넘은 정을 주지 말라 충언을 해도 듣지 않더군요. 더 깊은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요.”
시시덕거리며 펠런을 깠다. 까고 있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놈에게 이래저래 쌓인 불만이 많다. 애초에 매정하게 굴었다면 나도 시원하게 놈을 떨치고 지금쯤 섬에서 한가롭게 모은 돈 펑펑 쓰며 잘 지내고 있을지 알 게 뭐냐.
잠시 침묵하던 나인이 펠런과 통신 연결이 되었다고 짧게 보고했다. 내 말대로 할 수 있을지 나인이 입을 다문 몇 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인이 짧게 대답했다.
“왕께서 그러겠다 하셨습니다. 대치 상태를 유지하되 선공은 없을 것이며 적군이 공격하는 경우 수비 태세로 대처하겠다고, 그러나 방어 일관으로 버틸 수 없는 돌격전으로 진행이 되면 대응은 불가피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거면 충분해.”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어차피 황제의 목을 베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빛의 신이 준 마법과 치유술이 있으니 살아서 황궁을 나서는 건 가능할 거다. 그 이후가 문제지.
말도 되지 않는 일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건 자연스러운 연출과 명분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줘야겠어.”
미스트 제후국은 제국의 남부와 국경을 마주한 나라다. 완만하게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나인은 힘이 드는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풍경이 지나치는 속도가 어제보다 배 이상 빠른 것 같다. 거의 피를 토할 지경에 이르러서 나인은 굴러떨어지듯 아래로 추락했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보며 빛의 신이 무슨 미친 짓 중이냐고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 모르겠다. 여신의 분부를 듣고 대신관이 내 제안을 거부할 우려도 있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 경우에는 곧장 제국으로 다시 날아가 황제의 멱을 따자.
해 질 녘 우리는 자유무역 도시에 도착했다. 장시간 비행으로 맛이 간 나인이 초췌하고 곧 죽어가는 몰골인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측은지심이 일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나라도 멀쩡해 보이겠다고 스스로 몸에 버프와 회복을 걸었다. 뻐근했던 허벅지가 풀린다. 용사의 몸으로도 이 정도니, 무리를 했구나 싶다.
열서너 개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흰색 열주들이 거대한 흰 신전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동서남북으로 나뉜 네 개의 신전.
대륙에서 가장 성스러운 빛의 대신전을 앞에 두고 불온한 것을 바라보듯 미간을 찌푸린 나인의 표정에, 이런 상황인데도 실소가 흘러나왔다.
“들어가기 힘들면 여기 있어.”
“혼자서 탈출 못 할 것 아닙니까. 인질답게 따라가지요.”
“…펠런이 마족 혼혈인 걸 알아차린 양반인데 당신이 가도 되겠어?”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투덜거리는 나인의 말에 나는 옅게 웃었다. 도착한 이후 이미 해가 진 뒤라 열주를 빙 둘러 장식한 은은한 불빛이 광원의 전부다. 그러나 신전은 언제나 열려 있고, 나는 거리낌 없이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목격한 최초의 신관이 빛의 신을 부르짖으며 무릎 꿇었다. 엎드려 기도하는 신관 뒤로 또 다른 고위 신관이 흰 법복이 휘날리도록 어디론가 달려갔다. 대신관니이이임 하고 목놓아 부르는 외침 이후에 기적과 찬양이 이어졌다.
잠시 후에 연로하신 대신관이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초저녁인데 벌써 잠자리에 드셨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잠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옷을 입고 샤워를 하는 취향이라도 있으신 걸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빛의 대리자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도했는데 신께서 제 기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내 발치에 엎드려 우는 대신관의 몸에서 향냄새가 났다. 이 영감님 내가 국경에서 사라진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도한 모양이다. 설마 성수를 온몸에 뿌리며 기도한 걸까. 그러다 몸이 축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걸까. 아니다, 어차피 치유할 수 있구나.
나이 든 분이 고생하는 걸 보니 오만 잡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질 때가 아니다. 나는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대신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눈물범벅이 된 분을 보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미안하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고개를 들어라, 대신관. 나는 여태껏 마왕과 격전을 치렀다.”
“예!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격전을 치르셨다고!”
“성스러운 힘으로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성공했지만 나 역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마족들의 손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신의 가호가 나를 수호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빛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귀하신 우리 대리자를 가호해 주셔서 영광, 오오. 영광입니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알아서 찬송가 하나 만드시겠다 싶어서 나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들으라, 대신관.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었던 왕자의 몸에 빙의한 마왕은 가짜였다.”
“…예?”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울며 찬양하던 신관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고, 대신관도 울며 웃던 표정 그대로 굳었다.
좋아. 완벽하다. 이 분위기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왕의 술수에 내가 당했던 탓이다. 지금의 마왕은 사람의 몸에서 몸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빙의라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본체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족이 승리할 수 있도록 갖은 술수를 다 부리고 있지.”
“…도대체 그것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대 역시 의심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빛의 대리자를 보내는 일에 그리 저어했을 리 없지. 생각해 보라. 누가 대신전과 척을 지고 몇몇 신관을 앞세워 빛의 신과 대립하고 있나. 누가 빛의 대리자에게 마족을 쓰러트릴 군대를 주지 못하게 막았는가.”
“설마…….”
“생각해 보라. 누가 빛의 대리자에게 동료라 말하며 독을 쓰는 암살자를 보냈는가.”
“암, 암살자 말입니까?!”
“혼가의 가주는 알리라. 그의 기사들과 라이트의 가주 역시 마왕의 술수에 휘말려 빛의 대리자를 죽이기 위해 일조했다.”
“불경하고 끔찍하도다!!”
무릎을 박살 낼 것처럼 곳곳에서 신관들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렸다. 역시 광신도들에게 선동과 날조는 잘 먹힌단 말이지.
나는 고고하게 턱을 들고 신성력을 온몸에 둘렀다. 치료하라고 준 힘인데 이런 데 써먹게 된다니 참 즐거운 일이다.
“황제가 빛의 대리자에게 저지른 일을 보라. 그는 황제가 아니다. 황제의 인두겁 아래에는 빛의 대리자를 죽이기 위해 이 온갖 술수를 벌인 마왕의 영혼이 빙의된 것이다!”
충격적인 말이 대신전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대신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의 경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 말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드디어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대신전에서 소환한 빛의 대리자가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를 마왕으로 지칭했다.
“그러므로 나 빛의 대리자인 용사는 지금 제국으로 날아가 황제의 몸을 차지한 사특한 마왕을 쓰러트릴 것이다.”
“…대신전의 문을 닫아라!”
내 말에 대한 신뢰와 상관없이 대신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원했던 반응에 나는 입가에 새어 나올 것 같은 미소를 억누르고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신전이 살아남을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빛의 대리자가 어둠에 오염되어 미쳤다고 선언하고 대리자를 붙잡아 황제에게 진상하거나, 아니면 빛의 대리자를 따라 모반을 일으키거나.
“이제부터 아무도 신전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지 못한다.”
신관은 마법을 쓸 수 없다. 그 말인즉슨 지금 이 대화가 마법사 통신을 통해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눈물 자국 남은 얼굴로 침착하게 숨을 돌린 대신관이 새삼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는 나인을 바라봤다.
“…그쪽은?”
“내가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된 마족이다.”
“…마족이라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대신관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역시나 나인이 마족이라는 걸 이미 눈치를 챈 듯했다.
이럴 때는 선수 쳐서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정보는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다. 거짓말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진실 사이에 숨기는 거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우리 대리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대신관은 몸을 잘게 떨며 나를 바라봤다. 모반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마법을 일으켜 대신관의 축축하게 젖은 옷을 말려줬다. 이런 밤에 젖은 옷을 입고 있다니. 보는 내가 다 춥다.
“빛의 대리자께서 황궁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는 전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지금 행적이 수상쩍다는 이야기도 분분했지요.”
“…….”
“마족 침공 이후 황제가 보여준 대신전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이 의아했습니다만 세상에, 지상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사특한 마왕이 군림하고 있을 줄이야.”
“지금의 마왕은 빙의 외에 다른 능력이 없다. 그래서 지상을 침공하는 자체가 미진한 거지. 역사를 보라. 힘을 가진 마왕이 인간의 땅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보라.”
“…….”
“오히려 이 경우에는 미약한 힘을 가진 마왕이 강림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놈의 본체가 황제에게 빙의한 이상, 황제를 쓰러트리면 마족들은 물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마족이면서 어떻게 용사님을 구하게 되신 건지. 모든 마족은 마왕의 뜻을 따른다고 하던데.”
대답할 말이 곤궁해지자 나인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머리가 좋은 양반이니 헛소리를 하지는 않겠다 싶어 잠자코 있었더니 다행히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해줬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보다 강한 자를 따르는 본능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강자 나름이지요. 월등한 힘과 마력, 그리고 지혜를 가진 마왕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지금처럼 인간의 몸에 숨어 시답잖은 분란을 일으키는 이가 어떻게 마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호오…….”
“지금의 싸움은 마족들이 원하는 성스러운 빛과 어둠의 대결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힘과 마력에서 황제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은 그를 마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황제는 마왕이 아니니까. 교묘하게 말을 꼬긴 했어도 나인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어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마왕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지금 황제의 몸에 들어 있는 당신들의 적보다 더 강하냐 묻는다면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황제를 우리의 적이라 칭하는 말에 대신관은 무의식중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듯 흠칫 굳었지만 말이다. 그의 행동에 쐐기를 박듯 나는 짧게 선언했다.
“따르지 않아도 좋다.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빛의 신관이 어떠한 선택을 해도 존중하겠다. 빛께서 계시는 천상과 다르게 지상은 많은 제약이 있다지. 그러나 선언하건대 나는 이대로 제국으로 날아가 마왕의 수급을 베고 성스러운 빛과 어둠의 전쟁을 종결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 있다. 만약 빛의 신이 이대로 대신관에게 저 자식이 하는 말 모두 거짓말이니 듣지 말고 놈을 파문하라 말하면 이 모든 쇼는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지.
대신관이 빛의 신에게 기도를 올릴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몰아쳤지만, 그걸로 통하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만난 빛은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어차피 앞으로 사용하게 될 패는 많고 대결은 앞으로도 이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니 제발 그 입장 그대로 고수해 줬으면 좋겠다.
마침내 대신관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선언했다.
“대신전을 비롯하여 여기 있는 모든 빛의 신관들은 신께서 보내주신 빛의 대리자를 따르겠나이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달은 탓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몸을 돌려 외쳤다.
“신전의 문을 열어라. 출병할 것이다.”
내 등 뒤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나인과 함께 대신전을 나섰다. 나인은 다시 와이번 크기의 용으로 변신하려 했다. 어차피 마족이라는 것을 말한 이상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나는 나인을 만류했다.
크기가 작긴 해도 나인의 용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 수 없었다. 재빠르게 뒷골목을 찾아 주변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나인은 변신했다.
허공에 솟구친 직후 나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펠런에게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하는 게 아닐까 했다. 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나인에게 말을 걸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러 간다.
아니, 결국 변명이다. 황제는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해 움직인 것뿐이다. 그로 인해 죽는 건 제국과 왕국의 백성들이지만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건 마수와 마족 병사들이니까. 놈에게 죄책감은 없겠지.
내가 하는 행동은 정의가 아니다. 결국, 나도 내 이기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펠런과 더불어 영감님을 구하고 싶다. 펠런의 손에 내가 아는 이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암수를 쓰고 잘못을 뒤집어씌워 놈을 죽일 거다.
결국,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놈인 거다.
한참 비행하던 나인이 보고가 끝난 건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내게 물었다.
“대신전은 당신의 말을 믿었던 걸까요?”
“아니. 믿지 못할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거기에 듣는 귀가 너무 많았거든.”
“믿지 않았는데 당신을 지지한다. 선언했다고?”
“빛의 대리자니까. 더군다나 황제가 용사가 움직이는 데 방해한 건 사실이고. 지난 3년간 용사를 소환하지 못한 일에 대해 제국에게 억압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모멸감도 어마어마했겠지.”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지금의 황제가 살아 있다면 대리자를 소환한 대신전 역시 무너트릴 테니까.”
“믿지 않았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압니까?”
“내가 성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대신관이 알아차렸거든. 마왕은 성검에 의해 쓰러진다. 그런데 성검이 없는 용사가 황제가 마왕이라며 죽이겠다고 하면 뭐겠어?”
“…….”
이해득실을 따진 거야, 라고 나는 힘없이 웃었다. 나인은 그 이후 아무 말 없이 제국의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우스운 일이다. 와이번이 제국의 하늘을 침공한 날 제국을 떠난 내가 와이번을 타고 제국을 침공하러 간다. 감상에 젖을 것 같아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나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펠런은 괜찮다고 그래? 아직 정신줄 제대로 잡고 있대?”
“당신이 없으니 오히려 제정신을 오래 유지하는 것 같더군요. 역시 용사가 옆에 있으니 그런 걸까요?”
“하긴 내가 이방인일 때도 그랬다며. 반대로 생각하면 펠런이 나를 보고 어떤 느낌일지 대충 짐작이 가. 와, 그러고도 날 안 죽인 거면 사랑 맞네.”
“…….”
“나는 이 결혼 반대입니다, 하고 말해봐.”
“반대하지 않으니 무사히 살아서 왕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나 하시죠.”
나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나는 낮게 웃으며 나인의 목덜미 비늘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겨줬다.
투명화 마법을 유지하며 나인은 자신의 몸에 몇 겹의 마법 방벽을 둘렀다. 나 역시 물리 공격과 마법 공격에 맞춰 버프를 있는 대로 다 걸었다.
머릿속에 버프 외에도 여러 마법 술식이 들어 있다. 원한다면 하늘에서 불덩이를 떨어트리거나 지각을 뒤집고 중력을 역전시킬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그건 내 힘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런이 그런 힘을 쓴다면 나도 쓰겠다. 하지만 검을 들고 창을 휘두를 때는 오로지 물리적인 공격만으로 대응하고 싶다. 용사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뇌는 창을 다루는 기사이다.
밤이 깊어졌다. 어둠이 눈에 익는 건 마법사와 몇몇 마물뿐이다. 드로젠의 국경을 넘은 인간의 군대는 여전히 대치 상태다. 그 대치가 오래 이어지지 않을 거다. 해가 뜨고, 다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일을 벌일 필요가 있다.
“내가 만일에…….”
“만일이라는 말은 없으니 나중에 필요할 때 하죠.”
“…그거, 좀 멋있게 유언을 남길 생각이었는데 참…….”
“당신 유언이라면 충분히 자주 들었으니 더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렇긴 한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삶을 포함하면 많이 들었겠지. 그런데 내가 나를 죽인 놈에게 유언을 남길 리가 없는데. 궁금해져 슬쩍 고삐를 잡아당기며 나인에게 물었다.
“보통 어떤 유언을 남겼는데?”
“그 주제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습니까?”
“이것만 듣고 벗어날게. 내가 좀 불안해서 그래. 사소한 농담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삼대가 영원히 탈모가 되어라. 다음 생엔 갯강구로 태어나서 문어의 먹이가 되어라. 무좀과 악성 치질이 함께하길…….”
“그건 유언이 아니라 저주인데?”
“다행히 효력이 하나도 없었지요. 여전히 제 발은 깨끗하고 장 활동은 건강합니다.”
태연하게 덧붙이는 나인의 말에 결국 실소했다. 와 참, 나답게 죽었다. 하긴 펠런이 거기서 울지 않았다면 유언이랍시고 죽기 싫다고 엉엉 울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사소한 잡담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뻣뻣해진 몸에 다시 한번 축복을 걸고 나는 희미한 달빛을 광원 삼아 제국을 향해 날아갔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 우리는 황궁 상공에 도착했다. 다행히 대신전은 침묵에 성공한 듯 황궁 내에 용사의 습격을 대비하는 기색은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 뚫고 갈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날아오며 나는 나인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간결하고 명확한 내 설명에 나인은 한마디로 감상을 표했다.
“미쳤군요.”
“뭐 그런 편이지.”
“그래서 인간 앞에서 용으로 변신하지 못하게 한 겁니까?”
“어디서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 외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냐고 묻자 나인은 침묵했다. 하긴 그런 게 있었다면 여기 오기 전에 말했겠지. 더불어 대신전에서 일을 하나 저지르고 왔으니 말이다. 나인은 투덜거리며 황궁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이제 늦었지요. 갑시다. 성공하길 빌며.”
순식간에 한 마리 용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나인 덕분에 졸지에 타고 있던 용이 사라진 나는 아래로 추락했다.
마력이 흐르는 생물이 둘이다. 황궁의 상공에 항시 발동되는 마법 방벽이 보였지만, 곧장 검을 꺼낸 나는 마력을 담아 방벽을 찢어발겼다.
“습격이다!!”
와이번 침공 이후 3년 만에 일어난 습격이지만 기사들의 반응이 기민했다. 어쩌면 지금 움직이는 기사 중에서 나와 함께 아카데미를 다닌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뭐 상관없다. 내 목표는 한 놈뿐이니 말이다.
나인은 침공한 직후 마법을 써서 모습을 지웠다. 대신 나는 내게 초점을 집중시키기 위해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황궁의 벽을 부수고 창을 깼다.
“…용사?!”
“마왕을 쓰러트리러 왔다. 앞을 막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장엄한 개소리에 혼란에 빠진 듯 기사들이 머뭇거렸다. 전장에서 마왕과 싸우고 있어야 할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라는 표정이다. 그래도 황궁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은 심부에 박힌 듯 기사는 황제의 침실로 돌진하는 내 앞을 막아섰다.
쩡―!!
“큭!”
일검에 손목이 부러진다. 검을 놓치지 않은 이의 허벅지를 다시 벤다. 단단한 강철 갑옷을 베고 살이 썰렸다.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근육이 썰려 움직이지 못할 거다.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는 기사를 무시하고 황제의 침실문을 발로 차 부수며 들어갔다. 몇 가지 방호 마법이 발동되긴 했지만 내 마력 앞에서는 무용지물과 다름없다. 마왕이라면 몰라도 인간을 상대하기엔 차고 넘치는 힘이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소란을 알아차리고 비밀 문으로 도망친 거군. 나는 몸을 돌려 곧장 벽난로 안쪽 벽을 부쉈다. 감쪽같이 벽으로 마감한 통로가 두부처럼 칼에 썰려 무너졌다. 안쪽에서 히이익,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확장한 기감에 물에 젖은 무말랭이 같은 형상이 잡힌다.
찾았다.
나는 사악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황제의 곁에서 움직이는 기척은 셋이다. 그중 둘은 기사고 다른 한 명은 마법사다. 신관이 없어서 다행이다. 하긴 황제가 대신전을 취급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곁에 신관을 뒀을 리 없을 거로 생각하긴 했다.
나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주 희미한 기척이라 집중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하긴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인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내 작전은 나인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니 말이다.
긴 통로를 지나 무수히 많은 갈림길과 교차로가 나왔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황제의 기척을 나침반 삼아 통로를 따라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내 모습에 황제는 거의 뛰다시피 달아났다.
가장 먼저 기사 둘이 내 앞을 막아섰지만 몇 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다음은 마법사다. 그러나 마법사는 단 한 번 마법을 부딪친 것만으로 마력의 차이를 알아차린 듯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핀 더 라이트. 지금 드로젠의 국경에서 우리 영감님과 함께 있어야 할 양반이 기가 막히게도 여기서 황제를 수호하고 계신다.
“…어째서 용사께서 황제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십니까?”
“저것이 황제로 보이나? 너도 물들었군.”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듯 내게 외치는 라이트 제후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못 보던 사이 더 쭈글쭈글해진 황제의 멱살을 쥐고 내가 온 길을 되짚어 질질 끌고 갔다.
“내,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 말 진짜 물리니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나는 용사다. 용사답게 말할 필요가 있는 거다. 나는 냉담하고 무정하게 놈의 말을 잘랐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사지 근육을 끊겠다.”
“이, 이 빌어먹을 광신도! 역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그리고 나는 입에서 꺼낸 말은 되도록 지키는 편이다.
사지의 힘줄이 끊긴 황제가 목이 찢어지라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뭍으로 나온 생선 같은 격렬한 퍼덕거림에도 멱살을 쥔 내 손은 굳건했다. 그러나 좁은 공간 안에서 울리는 비명에 귀가 따가웠기에 나는 다시 한번 놈에게 경고했다.
“손가락을 잘라주랴?”
“…히이익!!”
놈은 격렬하게 딸꾹질을 하며 비명을 삼켰다. 이제 좀 조용하다. 생각할 정신머리도 돌아오고, 말이다. 그대로 황제의 침실로 되돌아온 나와 무말랭이 황제를 맞이한 것은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두 명의 신관이었다.
마침 무대도 관객도 그리고 배우도 한자리다. 그렇다면 해야 할 건 연극의 개막뿐이지 않을까.
* * *
내가 비밀 통로에서 황제를 끌고 나온 사이, 황궁을 수호하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검과 지팡이를 쥐고 박살 난 황제의 침실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집중해서 기척을 읽어봤더니 입구부터 복도까지 용사의 손에서 황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들의 수가 백에 달한다.
제후국 코앞에 마족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걸 알면서 결국 황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만 신경을 쓴 거겠지. 미친개처럼 미쳐 날뛰는 황제의 목을 움켜쥐고 개처럼 짖는 놈의 말을 모두 무시했다.
“놔라!! 이 더러운 광신도가 어디에 손을 대는 거냐!”
테라스와 이어진 거대한 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곧 해가 뜨겠지. 나인에게는 테라스 밖 황제의 개인 정원에 잠시 몸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인은 대단한 마법사다. 마력의 용량은 마왕보다 적을지 몰라도 사용하는 기술의 숙련도는 훨씬 높다. 어지간한 황궁 마법사라 할지라도 나인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처럼 야단법석일 때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
“너희는 무얼 하는 거야! 당장 이 반역자를 처단하지 않고!”
비밀 통로로 들어가기 전 치른 전투 탓에 황제의 침실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난장판이다. 나는 살기등등한 기세를 감추지 않고 기사와 마법사들을 노려봤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 몰아쳐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저들이 제대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
“돈이냐? 아니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거냐? 오오, 그렇지. 네놈이 드디어 그 더러운 야욕을 드러내는구나!”
나를 향해 겨눈 검과 소리 없이 내게 마법을 펼치는 지팡이를 두고 나는 겁먹지 않았다.
내가 가진 용사의 힘은 각성한 마왕과 겨룰 수 있을 정도라서 지금 이들이 덤빈다고 해서 내가 죽을 것 같지 않다. 힘의 차이를 생각하면 불곰 앞의 들개 정도일까. 하긴, 공격하는 들개의 수가 많으면 곰도 다치겠지.
“네놈이 이런다 해서 황제의 자리를 줄 것 같으냐! 더러운 광신도 같으니라고!”
“더 지껄이면 다리를 찢겠다.”
“이, 이 미친!!”
“두 번 경고는 없다.”
황제의 안위를 생각한 건지 누군가 명령한 건지 섣불리 덤벼드는 기사는 없었다.
다만 마법사들은 달랐다. 소리 없이 고도의 기술보다 물량으로 파고드는 마법사들의 디버프와 마법을 압도적인 마력으로 짓누르고, 다중 마법을 전개해 가볍게 되받아쳤다. 수면과 마비, 마취 등등. 혼란이나 질병 등의 마법은 역시 마족의 영역이라 그런지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가 인질이 된 시점에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마법은 걸지 않았다.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용사뿐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는 거다.
여신이 직접 나서서 내게 내린 신성을 거두지 않는 한 나는 인간을 상대로 무적에 가깝다. 그리고 빛은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빌어먹을 나인의 계약서에 서명할 때 말리지 않은 것처럼, 『굴러라 용사님』에서 인간이 그녀가 내린 대리자에게 술수를 벌이고 암살을 시도할 때도 방조했듯.
개입하면 나는 좆되는 거고.
끊긴 힘줄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겁에 질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황제는 자신을 살리라 발악했다.
시끄러운 무말랭이가 제국의 기사들이 나를 포위한 형국에 기가 산 것 같아 내가 한 경고를 충실하게 지킬 겸 마법을 써서 황제의 다리 한쪽을 으스러트렸다.
“끄아아악!!”
“이곳에서 너를 구할 자는 없다. 황제의 몸을 빼앗은 사특한 마왕이여.”
내 말 한마디에 기사들의 몸이 움찔 굳었다. 눈앞에서 황제의 다리가 부러지는 것을 본 마법사는 읊조리고 있던 주문을 멈췄고, 허겁지겁 잠옷 바람으로 달려온 고위 사제는 황제의 일부를 으스러트린 대리자의 모습에 다리 힘이 풀린 듯 풀썩 주저앉았다.
“마왕, 마왕이라고?”
“지금 황제 폐하를 마왕이라고 부른 거지?”
“…빛이여, 이게 무슨 일인지…….”
지금 당장 황제의 머리를 칠 수 없다. 연극은 진행 중이지만 필요한 배역 하나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황제를 구명할 막중한 책임을 질 만한 자.
아마 황태자는 아닐 것이다. 지배자와 후계자가 동시에 위험에 처할 수 없으니 지금쯤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궁 수비대장 혹은 황후 어쩌면 외무대신이라도 상관없다.
마지막 배역을 기다리는 데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곧 정복을 갖춰 입은 장년의 사내가 황제의 침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리카락 한쪽이 짓눌린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사내는 나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본 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게 애원했다.
“어떠한 연유로 이런 참혹한 만행을 저지른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빛의 대리자여.”
“비, 비, 빛의 대리자는 무슨, 이 자식은 악마다! 괴물이야! 이 자식이야말로 마왕이다! 나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속셈이야! 권력에 미친 악마 같으니라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당장 이 자식을 죽여!!”
“…….”
다리 한쪽이 으스러지고도 명줄이 끊기기를 자초하는 것 같은 황제의 언행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놈의 혀를 뽑아 입을 틀어막는 건 간단하지만 아직 황제는 해야 할 역할과 대사가 남았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 나는 미간을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장년의 사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상황을 통제할 권한이 있는 자인가?”
“…저는 전내부 총관 알론조입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오로지 황제 폐하를 수호하는 자들이며, 오로지 황제 폐하의 안전과 뜻에 따라 움직입니다.”
기사들을 물릴 권한 없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말하는구나. 상관없다. 일단 나와 대화를 시도할 놈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피 묻은 검을 황제의 목에 겨누고 주변을 사납게 노려봤다. 나인이 때맞춰 움직여줄지 모르겠다.
고작 몇 시간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얼기설기 짠 계획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되돌릴 생각도 없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나는 다시 검을 황제의 목에 겨누고 몸을 돌렸다. 반쯤 열려 있던 비밀 통로 밖으로 기어 나온 라이트의 제후가 상황을 보자마자 파악한 듯 탄식을 내뱉으며 희고 긴 지팡이를 내게 겨눴다.
라이트의 제후는 대대로 마법사 출신이다. 라이트의 자손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에게 제후의 자리가 넘어간다. 말하자면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이기도 한 거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나와 대결을 펼친다면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황제 외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을 즈음 핀 더 라이트가 내게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당장 황제를 풀어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아하다.
“폐하의 옥체에 사특한 마왕이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핀!!”
긴급한 상황에서 비밀 통로를 알려줄 정도로 각별하게 믿고 있던 신하에게 의심받는 말을 들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하지. 그래도 이쯤 되면 멍청한 황제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나는 발악하는 황제의 머리통을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머리가 붙잡히자 눈물을 줄줄 쏟으며 저주를 퍼붓는 소리가 듣기 괴로울 정도다. 나는 덤덤히 고개를 들어 좌중을 둘러봤다.
“나는 빛의 의지를 받아 어둠에 대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다. 태어난 의미는 마왕을 처단하고 빛의 자녀인 인간의 평안을 위함에 있다. 빛의 대리자가 마왕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너희 인간이 내게 말하는 건가?”
“…심증으로 황제 폐하께 위협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합당한 증거가 없다면 황제 폐하를 놓아주시고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책임을 지십시오.”
“이, 이, 이 자식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나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머리통이 잡히고도 잘도 말하는구나. 내가 힘줘서 터트리면 어쩌려고. 목숨의 위협보다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걸까. 정말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내게 유리한 일이지만 말이다.
“빛의 여신 앞에서 선언하겠다. 나를 비롯한 나의 핏줄, 빛의 신전은 이후 황위에 불간섭하겠다. 나는 황제의 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기이한 신음을 토하며 황제가 앞뒤로 몸을 뒤틀었다. ‘웃기지 마라. 거짓을 말하는구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아까보다 힘이 빠진 것 같다.
빛의 대리자가 신의 이름을 걸고 한 선언이다.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기사와 마법사들이 혼란에 빠진 눈으로 나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황제의 목숨 외 다른 것들을 원하지 않는 걸 이해한 것 같다.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다 똑같지 뭐. 나는 짧게 잘라 말했다.
“다시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마왕의 목숨뿐이다. 권력도 재산도 원하지 않는다.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말하겠다. 황제의 몸을 빼앗은 마왕을 처단한 후 이곳을 떠나 다시는 제국의 땅에 발을 디디지 않겠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우리는 마왕을 모시고 있었던 건가?”
청력이 얼마나 좋아진 건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기사와 마법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선임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나운 눈빛으로 작게 중얼거린 자들을 입 다물게 했지만 이미 포위한 기사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의심은 덮을 길이 없겠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미리 생각해 둔 대사를 읊었다.
“나와 대적하는 마왕은 역대 마왕 중 가장 약하다.”
거짓말이다. 소설에 의하면 우리 펠런은 역대 마왕 중에서 제일 강하다. 그래서 제대로 대적하면 너희는 다 죽는다.
“그자의 특기는 고작해야 인간의 몸을 잠식하는 것뿐이다. 너희도 알고 있을 텐데, 최초의 피해자는 드로젠의 왕족이었다는 것을.”
입술에 침을 바르지 않아도 말이 참 매끄럽게 나왔다. 내 말에 의혹을 가진 듯 나와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들에 뻔뻔하게 진중한 낯을 유지했다.
“마족과 마물, 그리고 마수는 짐승과 같아서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자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 그것이 마왕이 각성한 이후 여태 인간의 땅을 침략하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당신은 한 달 전 마왕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전투를 벌였잖습니까. 심한 상처를 입은 당신이 마왕의 수하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기사들이 확인했는데…….”
“쓰러진 척한 것뿐이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기사들이 눈으로 물었다. 나는 쥐고 있던 검을 안쪽으로 돌려 황제의 머리통을 쥔 내 팔을 스스로 그었다. 갈라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뜨뜻미지근한 핏물이 황제의 귀와 목덜미에 쏟아지자 황제가 기겁하고 히이익 울었다.
용사의 갑작스러운 자해에 술렁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곧장 신성력을 사용해 상처가 아물게 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와 병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라이트의 제후는 탄식했다. 다행이다. 빛이 내게서 힘을 거둬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언제든 내 몸을 복구할 수 있다. 그래서 마족의 방심을 유도하고 그들의 군대 내에 잠입해 그들을 일망타진할 셈이었지. 그때 나는 신이 주신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힘이 있는데 어째서… 분명히 팔이 날아갔다고…….”
“…그때 고위 사제와 동행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군.”
잘게 흔들리는 핀 더 라이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전내부 총관 알론조 역시 핏기 사라진 얼굴을 하고 의혹이 깃든 시선으로 불온하게 황제를 바라봤다.
“그 전투에서 칼을 맞댄 이가 마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너무 약한 생물이었다. 심부로 잠입해 마왕을 처단할 목적으로 일부러 붙잡혔다. 언제든 몸을 복구하고 마족을 일망타진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겁먹고 달아나면 인간들의 피해가 커질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
잠깐 사이 해가 뜬 창밖이 밝아졌다. 대치 상태가 길어져 봤자 내게 유리할 것이 없다. 다행히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아졌다. 나는 저녁에 급하게 연결한 마법사 링크를 통해 나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 내가 신호 보내면 가능해?
- …언제든지요. 그런데 정말 할 겁니까?
- 왜. 펠런이 하지 말래?
- …아니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대신 언제든 위험해지면 목숨 걸고 당신을 탈출시키라고 하시는군요.
- 오, 역시 나를 이해하는 건 내 친구뿐이군.
- …그럴 리가요.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니 자포자기하신 듯합니다.
이해하기를 포기했다든지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든지. 잡음처럼 들리는 나인의 투덜거림은 무시하고 나는 사기 치던 걸 마무리 짓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사납게 좌중을 노려봤다.
“그리고 잠입한 이후 진위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마족을 통합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마왕은 대륙을 지배하는 황제의 몸을 빼앗아 인간을 지배하기로했다는 걸!”
“…개소리다! 짐이 어찌하여 마왕이란 거냐! 이 미친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당장 이 미친놈을 죽이지 않고 무엇 하는 거냐!”
기사들은 황제의 명령에 어찌할 줄 모르고 머뭇거렸다. 황제가 인질로 붙잡혀 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여기서 용사를 붙잡으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다.
그리고 의심하기 시작했겠지. 빛의 대리자라 불리는 용사가 하는 말이 혹시라도 맞았다면 자신들은 마왕의 뜻대로 움직이는 거니 말이다.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전내부 총관 알론조를 바라보며 사기를 쳤다.
“황제를 구제할 방도는 없다. 이미 마왕에게 혼이 먹혔기 때문이다. 마왕은 이미 황제의 기억과 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황제 폐하의 혼이 마왕에게 먹혔다는 증거를.”
“…알론조! 네놈도 참형이다. 나를 구하지 못하겠느냐! 지금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참할 것이다!”
알아서 저 죽을 자리를 만들어주는 황제 놈의 머리통을 붙들고 들어 올렸다.
“가장 큰 증거는 곧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 스스로 생각해 보라. 황제가 인류의 패배를 위해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알 것이다. 마족에게 빼앗긴 드로젠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드로젠의 백성들을 모아 마족의 땅에 진군하게 했지.”
“빼앗긴 자들이 스스로 되찾게 하는 것이 무슨 문제라는 거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황제의 자리냐? 나를 죽인다고 해서 네놈이 황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이미 빛 앞에서 선언했다. 마왕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아니면 무엇이냐! 돈이냐? 아니, 네놈이야말로 마왕이다! 이 더러운 광신도! 마족의 앞잡이 같으니라고!”
황제의 말에 신관과 마법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검 끝이 흔들리는 기사 또한 있다.
제국의 모든 아이는 빛의 대리자이자 초대 황제였던 용사에 대한 전설을 듣고 자란다. 신성모독에 가까운 황제의 말에 여기 있는 이들의 의심은 나보다 황제에게 쏠렸다.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황제의 행동에 나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스스로 생각하라. 그리고 판단하라. 이대로 드로젠을 침공한다 해서 다수가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마족과 마물에 맞서 드로젠을 탈환할 수 있다고 보나?”
“…그건 어렵겠지요.”
“불가능하다. 그 모두가 죽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 마족의 군대는 명분을 가지게 된다. 드로젠이 멸망했을 때와 같이, 인간이 먼저 침략했으니 반격한다는 명분 말이다.”
“그것을 노리고 침공을 지시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가 정말 제국을 위하는 황제라면 지시할 수 없는 명령이지.”
“…….”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침묵에 황제가 발악하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래 봤자 내 손에 잡혀 있는 이상 빠져나갈 길은 없다.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에 황제는 발악하듯 알론조와 라이트의 제후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무슨 미친 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는 거냐! 당장, 이 미친 자를 죽여! 이자야말로 마왕이란 말이다!!”
“내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마왕이여. 이제 여기서 그대를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 이상 황제의 몸을 더럽히지 마라.”
내 신호에 맞춰 창밖에서 대기 중인 나인이 황제의 정신을 지배했다. 혹시 모를 나인의 마력을 마법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나는 동시에 압도적인 마력으로 주변을 짓눌렀다.
정제하지 않은 난폭한 마력이 황제의 침실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강한 마력은 공기의 밀도까지 바꿔서 커튼이 나부낄 만한 바람이 불었다.
황제를 처리하는 건 간단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침실 안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제압하고 황제의 목을 칠 수 있다.
달아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힘의 차이가 워낙 크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 드로젠의 국경에 다다른 군대를 물릴 방법이 없다. 황제의 복수라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누가 봐도 무모한 탈환 작전을 지시한 건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몸을 잠식한 마왕이었다고. 그러니 탈환을 위한 전쟁 자체가 마왕을 돕는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나인의 정신 지배가 잘 통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물에 불린 것 같은 무말랭이 황제라고 해도 용사인 초대 황제의 핏줄이다. 마족의 마법에 항마력이라도 있으면 어쩌지. 여차하면 내가 대가리를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나. 칼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여기서 나인의 정신 지배를 본 이가 없다는 게 천운이다. 글로리의 제후와 우리 영감님은 드로젠의 국경에 계신다.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 있는 자들은 마법사뿐이니 그들을 주의 깊게 봐야겠지.
“이렇게 들킬 거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역시 용사군요.”
황제가 고개를 들고 야비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몸에서 가시화된 마력이 먹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재미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표정을 굳혔다.
다행이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반응을 보니 제대로 통한 것 같다.
갑자기 말투가 변한 황제의 모습에 기사들과 사제들이 탄식했다. 그러나 핀 더 라이트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창밖 너머 어딘가를 쏘아봤다.
들켰구나.
제길. 저자는 지금 나인이 숨어 있는 정원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 큰일이다. 생각보다 마력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지금 당장 내가 거짓을 말한다고 지껄이거나 나인이 숨은 정원을 수색하라 명령하면 어쩌지? 순간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자도 죽여야 하나?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이 아니라 처리할 객체를 바라보는 내 시선과 마주한 라이트 제후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의 시선에 공포가 어린다. 마력을 분석하는 데 나와 나인 외 여기 있는 누구보다 민감한 마법사는 자신에게 닿은 살의를 빠르게 읽은 거다.
나는 핀 더 라이트를 바라봤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나를 고발하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고 구명할 것인가?
무언의 재촉에 핀 더 라이트는 찰나 간 고민을 했고, 결국 항복하듯 시선을 피했다. 그래, 누구나 자신의 목숨이 제일 중요한 법이지.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신께서 보낸 대리자다. 지상 어디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기필코 너를 찾아내 죽일 것이다.”
“하하하.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 몸은 나약하기 짝이 없고 이 육체에 들어온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말이지요. 곧 인간의 군대가 드로젠의 국경을 넘을 겁니다. 제아무리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마족이라도 자신의 영토에 인간이 발을 들인다면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인간이 씨가 마를 때까지 진군하겠지요.”
해석하면 드로젠 국경에 임시 주둔지를 설치한 탈환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나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황제의 목에 겨눴다. 예리한 칼날이 목에 닿자 상처에서 핏물이 흘렀다.
나는 이제 사람을 죽일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펠런과 대결할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상관없다. 나는 영웅도 아니고 선한 이는 더더욱 아니다. 이 방법 외에 할아버지를 비롯해 내 팔이 닿는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무지하지 않다. 마왕인 너를 쓰러트리고 드로젠의 국민을 구할 것이다.”
“어디 한번 해보시죠. 저승에서 웃으며 기다릴 테니 말입니다.”
정말 마왕이었어? 라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어떤 기사는 검을 떨어트리고 무릎 꿇었다. 나를 사납게 노려보는 라이트의 제후에게서 몇 번이고 마법사 통신을 연결하라는 요청이 들렸다.
나는 침착하게 검을 세웠다. 황제의 코와 입에서 검은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칼을 휘둘렀다.
“크아악!!”
투둑―
싫어하는 인간을 죽이는 건 보다 쉬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다. 검에 잘린 머리가 바닥에 나뒹군다. 잘린 단면에서 핏물이 쏟아지고 머리를 잃은 황제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안에 사람의 살과 뼈를 자른 느낌이 남아 있다.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귀 안쪽이 지끈거리면서 두통이 일었다. 토할 것 같다. 위장을 쥐어짜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함. 그러나 아직 토할 시간이 아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잘린 황제의 머리통을 쥐고 들어 올렸다.
“빛의 대리자로서 선언한다. 이 대륙을 끔찍한 파멸로 이끌 사특한 어둠은 대리자의 손에 의해 처단되었다.”
나인은 끝까지 충실했다. 황제의 몸과 내가 쥐고 있던 머리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내 손을 태울 것처럼 지글거리는 뜨거운 열기에 황제의 몸과 머리가 숯덩어리가 되기까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속해서 회복을 걸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고 내게 돌을 던지는 이도 없었다.
황제가 죽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이들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지, 아니면 마왕의 죽음에 환호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어떻게든 기세를 몰아붙여야 한다 생각하며 나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핀 더 라이트를 향해 일갈했다.
“뭐 하나! 당장 드로젠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 통신을 걸어 탈환 전쟁을 저지하도록!”
“…그러나.”
“아니면 마족과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인간의 영토를 빛의 탑이 수호하는 영역까지 후퇴시키고 싶은 건가?”
“…마법사들은 당장 국경에 통신을 걸도록. 탈환은 유보한다. 국경의 병사들을 물리도록.”
새까맣게 타들어간 시체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나는 피 묻은 검을 휘둘러 내가 죽인 자의 피를 털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십니까!”
악에 받친 핀 더 라이트의 고함에 나는 고개만 돌려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라이트의 제후를 마주 바라봤다. 놈은 알고 있다. 정원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 누군가를 이용해 황제를 마왕으로 몰고 죽였음을 말이다.
그런데도 내 만행을 파헤치지 않는 이유라면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거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멸시하듯 핀 더 라이트를 바라봤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끝까지 오만하게 광신도처럼 굴자.
“국경으로 간다. 마왕은 죽었으나 마족들이 인간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기에 그들을 구하러.”
“당신은 황제 폐하를 죽인 자입니다! 순순히 놓아줄 것 같습니까.”
“황제는 마왕이 죽였다. 그리고 나는 마왕을 죽여 복수했지. 너도 봤잖은가. 마지막에 결국 모습을 드러낸 마왕을.”
“…그건, 그것은…….”
그것은 마족에 의한 정신 지배였다고 말하는 순간 라이트가 역시 황제를 죽인 죄를 함께 묻게 된다. 왜 황제가 죽기 전에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나, 그리고 왜 용사를 막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황제 위에 둔 이상 라이트의 가주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나는 덤덤히 그가 원하는 마법사 통신을 열어 짧게 한마디 했다.
- 드로젠과 제후국의 국민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물려라.
- 왜 황제를 죽인 겁니까!
- 황제가 아니다. 마왕이다.
- 다른 자는 몰라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꾸민 일이잖습니까!
나는 고개 돌려 황제의 궁을 빠져나갔다. 무수히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내 발길을 막지 않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뒷걸음질 치거나 물러서는 이들의 얼굴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표정들뿐이었다.
- 제국의 수호 아래 있는 제후국과 소국의 국민을 사지로 몰고, 나아가 마족에게 제국을 침략할 명분까지 주는 이를 너는 황제라 부르나?
- …그러나 황제 폐하이십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충심으로 간언하고…….
육성으로 미친 소리 하고 있다고 말할 뻔했다. 그게 통했다면 애초에 드로젠 탈환을 노리지 않았겠지. 마왕을 쓰러트릴 유일한 힘을 가진 용사에게 독약을 먹이지도 않았을 거고.
- 너도 알고 있기에 나를 막지 않은 것 아닌가. 황제를 이대로 놔두면 결국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이 무너질 거라는 걸.
- …….
- 차기 황제는 제대로 된 인물이길 바란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통신을 끊었다. 핀 더 라이트는 더 이상 내게 통신을 걸지 않았다.
나를 붙잡기 위해서는 죽은 황제가 마왕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미 타들어간 시체를 가지고 무슨 수로 증명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황제가 누명을 썼음을 증명한다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황제가 죽게 내버려 둔 죄를 물어야 한다.
연극은 성공했다. 저질러놓고도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여차하면 제국의 기사들과 추격전을 펼치고 황제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되어 제국을 탈출할 생각을 했지.
내가 죽인 놈의 평판이 좆같긴 한 모양인지. 아무리 내가 용사라지만 황제를 죽인 자가 제 발로 황궁을 나서는데 아무도 막지 않는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미친놈에게 충성하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나를 추적하는 이조차 없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기척이 줄어든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는 모양인지 기척은 느껴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참 철두철미한 마족인 것 같다.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군요.”
“메소드연기를 펼치더니 왜 그래 친구. 서로 사이좋게 미친 거로 하자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인은 마법을 풀었다. 비난 섞인 감상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인의 팔을 붙들었다.
나인은 마땅찮은 듯 짧게 혀를 찬 뒤 자신과 내게 다시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뒤이어 암룡으로 변신한 나인의 등에 올라탔다. 날갯짓하기 무섭게 허공으로 떠오른 나인이 잠시 침묵했다.
“당신의 무모한 작전이 어떻게든 통한 것 같군요. 드로젠의 국경에서 인간의 군대가 후퇴했다고 합니다.”
“…잘됐네.”
“기뻐하는 목소리가 아니군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최소한 사람이 죽을 염려는 없을 거 아냐. 펠런도 제정신인 것 같고.”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는 이제 사라지면 될 일이다. 나는 암룡의 긴 목에 머리를 처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신성력으로 몸을 회복해도 욱신거리는 두통이 멎지 않았다. 내 상태를 확인하듯 긴 목을 돌려 나를 흘깃 바라보던 나인이 다른 말보다 먼저 목적지를 확인했다.
“다시 자유무역 도시로 가겠습니다.”
“그래야지. 대신관을 만나 동행해 달라고 말해야겠어.”
“목적을 잊지 않았군요. 다행입니다.”
“기껏 마왕은 죽었다고 사기를 쳤는데 펠런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 망하는 거니까.”
그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차갑고 단단한 용의 비늘에 이마를 대고 나는 어금니를 꾹 물었다.
황제를 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의나 명분은 가치가 없다. 나는 그냥 살인마지. 자허 블리스의 몸에 들어가 유년기를 뒷골목에서 뒹굴었어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복수하러 오라지. 무찔러줄 테니까.”
머리를 거칠게 털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환하게 뜬 아침 햇빛이 밝다. 두통은 여전하고 배가 고프다. 피곤하고 졸리지만 버틸 만하다. 일이 다 끝나면 쉬자. 잘 먹고 잘 자자. 뻔뻔하고 태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