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탈출 (2)
눈을 감고 있으면 바로 곁에서 펠런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개에서 맡을 수 있는 펠런의 체취도 내 이성을 잃게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을 거다. 내가 이런 변태가 되었다니 놀랄 만한 일이다. 항상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처럼 성실하고 정의로운 용사를 고작 몇 달 만에 타락시키다니 역시 마왕 녀석 대단하다, 같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성기를 감싸 쥐고 천천히 문질렀다.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약한 쾌감에 전신의 근육이 나른하게 풀렸다. 욕망은 솔직해서 다른 일보다 쾌감에 집중하고 만다.
그 때문인지 펠런의 말에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문장이 제대로 들어오긴 하는데 그걸 해독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대화의 내용보다 펠런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따뜻한 수프처럼 녹진녹진 풀어졌다. 그리고 눈치 빠른 우리 마왕님은 단박에 내 변화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 피곤한 건가?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 어, 아니. 그건 아냐. 오히려 잠이 안 와.
-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 있다. 과도하게 단련한 건 아닌가?
- 괜찮아. 워낙 좋은 몸을 받아서 네가 하루가 멀다고 덮쳐도 멀쩡하게 잘 움직인다고?
- …….
네 목소리를 들으며 야한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놈이 나를 걱정해 주는 목소리에 기묘한 죄책감과 배덕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래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정신을 길게 유지하고 있는 펠런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다.
귀두 아래쪽을 엄지로 쓸어 올리며 꾹 누르자 등허리에서 잔경련이 일었다. 용사의 성감대를 개발한 건 내가 아니라 펠런 놈이다. 사람이 거기까지 느낄 수 있는지 녀석이 내게 다 알려줬다. 심지어 피부뿐만 아니라 점막까지 말이다.
나는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놈의 베개에 이마를 비볐다. 젠장, 이 상황을 놈이 모른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나를 흥분시켰다.
“하아, 흣… 흐응……. 젠…장. 기분 좋아.”
엎드린 채 시트에 하반신을 밀착했다. 자위하기 어려워졌지만 매끄러운 시트에 귀두가 쓸리는 느낌에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놈이 뒤로 덮칠 때 항상 느꼈던 쾌감이다.
귀두에 맺힌 선액이 시트를 적시고 충혈된 귀두가 부드러운 천에 문질러져 마치 민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질척한 자국을 남긴다. 내가 흘린 옅은 땀 냄새와 펠런의 체취가 뒤섞여 마치 놈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목 안에서 울리는 갸르릉거리는 신음을 참지 않고 내뱉으며 놈에게 한 박자 느리게 애원했다.
- 계속, 대화하고 싶어. 네 목소리 듣고 싶어.
- …지금 당장 네게 달려가서 널 끌어안고 싶다.
- 미치겠네…….
“으, 흣!”
욕망이 듬뿍 담긴 놈의 목소리에 허리가 퍼드득 떨렸다. 아랫배까지 휘어진 성기가 너무나 간단하게 정액을 토했다. 얕고 빠른 절정에 나는 숨을 멈췄다. 그러나 이걸로 부족하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쾌감에 여운을 느낄 새도 없다. 사정 직후 민감해진 귀두를 엄지로 문질렀다.
“흐윽, 너무, 민감한데, 쓸리는 거 아픈…가? 아니 기분 좋은 건가……?”
어깨와 허리가 움찔거릴 정도로 예민해졌는데도 부족하다. 이보다 더 끝내주는 걸 알고 있는데 그건 나 혼자로 부족하다. 꼬리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안쪽도 부족했다.
젠장. 펠런이 뒤를 쑤셔줬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놈이 돌아와서 내 곁에 있어준다면 지금보다 덜 불안할 텐데. 좀 미치긴 했지만 뭐 어때. 여전히 잘생겼는데.
- …유마?
- …아, 미안. 지금 깜박 졸았어. 네 말대로 피곤했나 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취한 것 같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원하는 말만 골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스스로 엉덩이를 쑤실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펠런의 베개를 끌어안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이어 찾아올 쾌감을 기다리듯 욱신거리는 몸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펠런을 부르면 안 된다. 급한 일로 북부 산맥에 간 놈이지만 어쩌면 내가 돌아와서 뜨겁게 한 판 하자고 하면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면 내일 당장 비경을 빠져나갈 계획 자체가 어그러진다. 한순간의 욕망에 취해 일을 그르치지 말자. 잘만 해결되면 앞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놈과 야한 짓 할 수 있다.
결국, 목표가 야한 짓이 된 것 같아서 나는 킬킬 웃었다. 정정한다. 앞으로 오래오래 놈과 건강하고 활기차게 대련도 하고 같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다. 가끔 방심한 놈의 엉덩이도 노릴 거고 말이다.
졸았다는 내 변명을 들은 펠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쉰다. 역시 숙달된 마법사는 다르구나. 한숨 소리도 통신으로 보낼 수 있고 나는 투덜거리며 놈을 따라 하듯 흥, 코웃음을 쳐봤다.
- 그럴 줄 알았다. 내일 다시 연락할 테니 이만 자라.
- 오랜만에 목소리 오래 들어서 좋았나 봐. 너도 잘 거지?
- 그래야겠지. 이른 오후까지 인견이 있어서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연락할 수 있을 것 같다.
- 알았어. 안 자고 기다릴게.
- …네가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 당연하지 인마. 졸음도 참아가며 너랑 대화하고 있다고? 솔직히 지금 자는 것도 아깝단 말이지.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놈이 말끝을 늘였다. 자라고 말은 해도 정작 통신을 끊는 건 아쉬워하는 눈치다. 사실 나도 그렇다. 말이 씨가 된다고 졸음을 참느니 어쩌니, 했더니 한 발 빼자 정말 피곤하다.
서로 먼저 통신을 닫으라며 실랑이를 한다고 또 한 시간을 허비한 후에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통신을 닫았다.
통신하는 내내 펠런에게 왜 나를 살려뒀는지 묻고 싶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놈을 죽이려 했던 이방인들이 전부 나라고 한다. 내 의지보다 빛의 농간이었고 지금의 나로선 기억조차 없지만, 그래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저지른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목숨이다.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한 발 빼고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보통은 펠런에게 시달리다가 지쳐 잠들기 일쑤라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거려야 했다. 근심이 많으면 어쩔 수 없다. 거기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이 먼저 타격을 받는 편이라 더 괴롭다.
욱신거리는 위장을 움켜쥐고 골똘히 생각했다. 나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충격을 먹은 내게 당황하더니 변명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야 물론 당한 것도 많지만 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신의 저주라는 걸 알고 있으니 왕께서도 당신에게 원한이 있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신 걸요.”
“몇 번이고 죽이려고 한 상대와 친구가 되고 싶은 놈은 어디 사는 피학주의자냐.”
“우리 왕이 좀 그런 성향이 있죠?”
“좋은. 정보. 감사. 용사… 다음에 꼭, 정보 활용. 한다.”
나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는 나인의 시선에 중독될 것 같다. 진지한 이야기 중엔 놀리는 걸 자제해야 하는데 놈의 반응이 워낙 극적이다 보니 그게 잘 안 된다. 하하.
그건 그렇고, 나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방인과는 오래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죽이려 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몇 번이고 당신을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원한이 있다면 당신 쪽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어. 그리고 내가 먼저 덤볐다며. 그러면 선빵 친 놈이 잘못한 거야.”
그 이후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펠런에게 통신이 와서 대화가 끊겼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었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뭘 물어봐야 할지.
* * *
잠든 시간이 어떻든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같다. 눈곱 낀 눈을 비비며 욕실로 들어가 샤워한다. 마법으로 축축하게 젖은 몸을 말리고 머리카락을 반 묶어 뒤에서 고정했다.
완전히 묶는 건 어려워도 앞으로 머리카락이 쏟아지지 않게 고정하는 정도로 묶는 건 머리끈이 어떻게 버티더라. 감사한 일이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방해될 정도로 낮은 경지는 아니지만, 식사할 때마다 정리가 안 되는 건 여간 불편해서 말이다.
보통 마법사들끼리 개인 회로를 연결해 통신하는 경우는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잘 쓰지 않는다. 거리가 멀수록 소비되는 마력이 상당한 데다 상대편 마법사가 악한 생각을 하는 경우 자신의 회로가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로의 오염이 죽음까지 가져오는 예는 없지만, 상대가 마족이면 말이 다르다. 실제로 나는 바슈키에 의해 회로가 오염되어 죽은 식스라는 마법사를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식스의 경우는 상대편 마법사와 극단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 손 쓸 시간도 없이 당한 거다. 지금 나는 빛의 가호로 마왕과 거의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다. 더불어 오염을 정화할 힘도 있고 말이다. 그 힘으로도 펠런의 광증을 치료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며 펠런에게 지난 밤 잘 잤는지 물어봤지만, 통신은 연결되지 않았다. 하긴 슬슬 바쁠 때다. 더군다나 펠런이 있는 북부 산맥은 내가 있는 비경과 위치한 경도가 달라 표준시에서 차이가 난다. 아마 그쪽은 새벽이리라.
아니면 통신을 연결할 이성이 없을 정도로 광증이 도졌거나.
며칠 사이 옷장이 내 체격에 맞는 옷으로 가득 찼다. 나인의 인조 시종들이 채워 넣은 옷들이지만 처음 내가 입고 온 옷과 디자인이 거의 같다.
흰 코트를 걸치고 성검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검을 달았다. 완벽하게 잘난 내 모습을 전신 거울에 비춰보며 뿌듯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근육의 굵기는 자허 블리스 때와 거의 같지만 밀도 자체가 다르다. 탄력과 악력 또한 마찬가지다. 관절은 기름칠한 스프링처럼 부드럽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기민하고 완벽한 전사의 몸에 감탄한다. 남이 준 거지만 이게 내 몸이라니 기쁘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모든 몸은 타인이 준 거다. 그게 부모든 신이든 여하튼.
코트 깃 안쪽에 언뜻 붉은 자국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깃을 잡아당겨 목에 남은 펠런 놈의 잇자국을 바라봤다. 아주 야무지게 물어뜯어서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다.
일부러 치료하지 않은 상처긴 하다. 뭐, 이 정도야 목숨이나 거동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고 놈도 상처를 볼 때마다 얼핏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 보였다.
아이고, 그래. 마킹한 게 아직 남아 있어서 기뻤어요? 우리 짐승 같은 마왕 놈 같으니라고.
나와 함께 움직이기로 한 나인이 불시에 들어와 한심한 생물을 바라보듯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어거스트 때도 그런 성향을 보이긴 했었죠. 거울 앞에서 도취해 자신을 바라봤던가요.”
“깜, 짝이야. 언제 들어왔대?”
“노크해도 전혀 반응이 없어서 죽었나 하고 들어와 봤습니다.”
“웃기지 마라. 내가 노크 소리도 못 들었을까 봐.”
“예. 농담입니다. 이 요새 안에서 저는 언제든 순간이동을 할 수 있기에 무턱대고 들어왔습니다. 약점이나 하나 잡아둘까 해서요. 그런데 못 볼 꼴을 봤네요.”
“거, 내가 기억 못 하는 지난 생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니 그런데 정말 내가 거울 앞에서 도취하고 그랬어?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도 몸이 좋았나 봐?”
“그럭저럭? 그러면 뭘 합니까. 당신이 들어온 이후 하루가 다르게 근육이 사라지고 물렁물렁한 몸이 되어 갔는데.”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돌려 까는 게 수준급이다. 당신?”
“기쁘게도 전부 예전의 당신에게 배운 겁니다.”
할 말이 없다. 저런 말투는 내 주특기기도 하니까. 내가 내 특기에 당하니 급소를 맞은 듯 짜릿하다. 어이가 없어 나인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어거스트에 대해 말해준다고 했지?”
“그 외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모두 말해드리죠.”
“그건 가면서 이야기하자. 펠런이 언제 다시 여기 돌아올지 모르잖아. 깜짝 선물은 빨리 마련할수록 안전할 것 같거든.”
“…정말 가려는 겁니까.”
“어차피 난 마왕에게 귀화한 배신자 용사야. 이참에 범죄 하나둘 더 저지른다고 어긋난 인생이 다시 펴지겠어?”
사악하게 크크크 하고 웃었다. 좀 악당처럼 보일까? 나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나인이 미간을 짚었다. ‘왜 그런 건 한결같습니까?’ 하고 앓는 소리를 토하는 나인의 어깨에 나는 팔을 걸쳤다.
“좋아. 너는 이제 발언권이 없다. 순순히 나를 따라오도록. 인질.”
“저런, 목숨만 붙여주시죠.”
건들건들 말하는 나인이 조금 얄밉다. 오랏줄로 손이라도 묶고 싶었지만 정말 포로로 대우할 생각은 없다. 이 작전에서 나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포로 겸 운송장비 겸 비상금이다. 내 설명에 나인이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상금입니까?”
“내가 돈이 하나도 없거든.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따뜻한 침대에서 숙면할 거고 따뜻한 물이 아니면 샤워하지 않겠다. 왕복하는 동안 간식도 챙겨 먹을 거니까 넉넉하게 준비했지?”
“가다가 제국 황궁 정원 위에 당신을 떨어트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내 오랜 꿈이 이루어지겠네.”
엉뚱한 내 대답에도 나인은 오랜 꿈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뭘 물어도 이상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는 눈치다. 아깝다. 제2의 마왕이 되고 싶은 내 오랜 포부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가 될 거로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도 펠런과 내가 2층을 박살 낸 후 새로 얻은 층은 옥상으로 통하는 원형 계단과 바로 이어져 있는 층이었다.
요새를 이용하는 다른 고위 마족과 마주칠 염려가 적은 데다, 나인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놈들은 지금 펠런을 수행하며 같이 북부 산맥으로 떠났다더라. 정말 탈출하기 좋은 날이다.
“당신이 떠나면 왕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텐데요?”
“아, 그거? 펠런에게 통신 오면 말할 거야. 나를 쫓아오면 그 즉시 인질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고.”
“…설마 그 인질이 저입니까?”
“응. 그리고 네 목숨은 이제 펠런에게 달렸다. 평소에 놈이 너를 소중하게 여겼기를 빌고 있으라고.”
“저는 죽겠군요.”
당장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 놈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어딜 도망가.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는 한배를 탄 동료와 다름없다.
“보통 동료의 목숨을 인질 삼아 협박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식상한 관계에서 벗어나 보자고.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줘, 친구. 괜찮아, 너의 희생은 절대로 잊지 않을게! 비석에는 어떤 글귀를 적는 게 좋을까?”
“이미 저는 희생을 당하는 것으로 예정이 되어 있는 겁니까!”
울부짖는 암룡을 끌고 요새 옥상에 올라갔다. 거대한 암룡이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단단한 부지 위로 하늘이 높고 푸르다. 오랜만에 직접 받는 햇빛에 나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날기 딱 좋을 정도로 끝내주는 날씨네!”
대형 와이번 정도의 크기로 자신의 본체를 줄인 나인이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거칠게 검은 꼬리를 휙휙 흔들었다. 그런 놈의 등에 와이번용 안장을 얹으며 나는 씩 웃었다.
“와, 그런데 무슨 안장이 이렇게 착용하기 힘드냐.”
“그걸 왜 날개 아래 고정합니까. 갈비뼈 아래에 조임쇠가 가게 하세요. 잘못하면 안장이 뒤집혀서 추락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왜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건 성검을 든 용사뿐이고, 용사는 누구나 죽일 수 있는 건데?”
나인이 마음먹고 동귀어진을 원하면 그대로 추락사하는 거 아냐? 오싹한 생각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이라면 고도 1km 높이에서 떨어져도 마법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낙하지점이 마그마가 펄펄 끓는 화산 안이라면 나도 위험해질 것 같다.
“몇 세기 전에 승리한 마왕이 정한 규칙이죠. 보통 그런 식으로 승자 쪽에서 이후 규칙을 정합니다. 인간의 국경을 따라 세워진 빛의 탑도 이전 용사의 승리로 얻은 거니까요.”
“뭐야. 그럼 지금 내가 이겨도 규칙 같은 거 정할 수 있나?”
“어디 노력해 보시죠. 응원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공할 일이 없다. 마왕 토벌에 가장 필요한 물건인 성검을 빼앗긴 데다 마왕을 죽이지 못하는 계약까지 걸린 상황을 극복하면 그야말로 신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나인의 잔소리를 들으며 얹은 안장 위에 앉았다.
지난번에 마경에 갈 때 나인의 도움을 받아서 알고 있다. 암룡 바슈키의 비행 속도는 상당하다. 그러나 대형 와이번 정도로 크기를 줄인 데다 나까지 매달고 있어서 목적지까지 며칠 걸릴 거라고 했다. 펠런의 대응이 걱정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더군다나 나도 나인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기도 하다.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나인과 경유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국의 상공을 날아가는 건 위험하니 글로리에서 바로 남으로 내려가 원더와 미스트를 거쳐 라이트로, 그리고 자유무역 도시로 갈 생각이다.
지도상으로 선을 그어보면 대륙 남단을 횡단해야만 하는 긴 거리에 혀를 찼다.
“왕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말이죠.”
“걱정하지 마. 펠런에게 통신 오면 바로바로 받을 거야. 나도 놈이 나 쫓아오면서 대륙을 정벌하는 건 원하지 않거든.”
“그런 위험을 아는 분이 잘도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겁니까.”
“거참 불평 많네. 이미 우리는 한배를 탔어요. 네가 인질이 되었다는 변명이 있다고 해도 날 놓친 건데, 펠런이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너도 살고 싶으면 순순히 협조하라고?”
나인이 투덜거리고 있긴 하지만 놈의 협조가 아니었다면 이런 식의 탈출을 빙자한 대신관 납치 계획은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 칼바람이 귀를 찢을 듯 거세게 불었지만, 마법으로 내 몸에 얇은 피부 같은 막을 씌워 바람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인에게 버프를 걸어주고 싶었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디버프는 걸 수 있더라. 지금은 걸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마족이나 인간 병사들에게 나인의 동선을 들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높은 고도에서 날아줬으면 했는데 어렵단다.
본체였다면 북부 산맥 위를 큰 저항 없이 날아다녔을 테지만 와이번 정도로 몸을 줄인 이상 그리 높게 날지 못한다고 했다. 그 부분은 마법을 통해 모습을 지워 해결하기로 했다.
지독하게 빠른 속도에 곧 드로젠의 국경에 다다랐다. 그리고 우리는 드로젠의 국경을 따라 포진한 글로리와 원더의 군대를 볼 수 있었다.
“용사가 사라졌으니 말이죠. 그들도 드디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알게 된 거죠.”
“그런 거치고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병사의 수가 적다?”
“제국의 기사들을 포함해 드로젠과 국경이 맞닿지 않은 혼을 비롯한 네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은 지금 제국을 수호 중입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요. 심지어 저곳의 병사들은 대부분 드로젠 출신들입니다. 왕국을 빼앗긴 건 드로젠의 실책이니 되찾는 것도 드로젠이 직접 하라는 황제의 말이 있었지요.”
“…정말 정 안 가는 황제 놈이다.”
“이참에 이쪽으로 귀화하시지요. 원하신다면 마왕의 왼팔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발언으로 오른팔이 누군지 확실히 알겠다.”
“하하. 이것 참, 굳이 나서지 않아도 다들 알아보게 되더군요. 영광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나인을 무시하고 나는 궁금했던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에 관해 물었다.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은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습니다. 미치기 전까지 말이죠.”
“내가 들어와서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가?”
“하루 전만 해도 멀쩡했던 왕자가 교육받은 기억을 전부 잃고 멍청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 당시 나이가 15세 정도였던가요.”
“…와, 듣기만 해도 암담하네.”
“어리지만 영민하고 훌륭한 전사의 재목이라 평가받던 이가 검을 휘두르는 방법도 잊어버린 것에 대해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준 엑사 드로젠 측에서 독약을 먹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다 보니 증거는 나오지 않았죠.”
나인은 덤덤하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미쳐버린 왕자는 다시 검을 들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보였으나 유력한 후보인 준 엑사 드로젠과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거기다 요양을 위해 별궁으로 이사한 어거스트는 별궁에 방치된 자신의 형제를 보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서툰 솜씨 덕분에 펠런의 부상은 얕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왕족이 자신의 형제에게 칼을 휘두른 상황이다.
당연히 글로리아 왕은 진노했고 어거스트는 그렇게 왕위 경쟁에서 탈락했다.
“한 며칠은 어린 펠런이 다가오면 살의를 숨기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죠. 독 오른 들짐승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고작 일곱 살 아이에게 살심을 품는 자신을 혐오하기도 했고요.”
“…나라면 그랬겠지.”
“그때는 이미 몇몇 이방인을 만난 후라, 만난 직후 어거스트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심문은 제가 했지만 다른 이방인들처럼 잡아 가두거나 고문을 할 수는 없었죠. 왕이 포기했다 하나 명색이 왕족이니 말입니다.”
“와, 고문이래. 그 기억은 없어서 다행이다.”
“그건 저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을 쓰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고를 가장해 죽여버리기엔 아직 이방인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많았다.
확신과 추측 사이에서 갈등하던 궁정 마법사 나인에게 오히려 어거스트가 먼저 찾아와 푸념과 하소연을 쏟았다.
* * *
“빌어먹을. 미치겠네. 한주먹도 안 될 것 같은 어린애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나 완전 쓰레기 아니냐?”
“뭐,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편이죠.”
“그래서 말인데, 내가 돌아버려서 꼬마를 공격하거나 하면 지난번처럼 나를 말려줄 수 있냐? 패도 되고 여차하면 날려버려도 되는데.”
“여차하면 죽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서비스가 부담스러울 정돈데? 괜찮아. 부담스러우니 넣어둬.”
자진해서 자신을 펠런의 목숨을 구명하려 하는 새로운 이방인을 앞에 두고 나인은 생각했다. 뭐지, 이 쓸데없이 착한 척하는 호구 같은 생물은?
“대충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그리고 내가 베려고 했던 꼬마가 누군지도 알고 있어. 그런데 솔직히 말이야. 나도 인세에 다시 없을 폭군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린 폭군을 베어버릴 수 있다는 주의였거든?”
“어린 폭군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듣기만 해. 나도 네놈에게서 답을 원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아니더라. 제대로 못 먹고 바짝 마른 저 어린놈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리겠냐. 그리고 아직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심판할 권리가 있나 싶기도 하고.”
대화라기보다 넋두리에 가까웠다.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어거스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하면서도 나인은 신중하게 정보를 주웠다. 스스로 정보를 토하는 적이라니, 이 얼마나 쓸 만한가. 즉결 처리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리고 애 잘 좀 먹여라. 저 나이 때는 포동포동하니 젖살도 있어야 나중에 키도 크고 그러는 거야. 애가 얼마나 굶으며 지냈으면 손목에 뼈가 다 보이냐. 수련도 그만 시키고. 성장기 전에 혹사하면 키가 안 자라요. 저 나이 때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게 일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어거스트는 토하라는 정보는 내뱉지 않고 육아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육에 대해 건의할 사항이 있다면 이번에 새로 온 펠런 전하의 유모와 전속 시종에게 언질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는 일개 궁정 마법사라.”
“무슨 소리야. 너 저 꼬마 지키려고 잠입한 마족이잖아. 차기 마왕이 저렇게 비쩍 마르면 누구 책임이겠냐. 네 책임이지.”
힘도 마력도 없는 인간이 태연하게 지껄이는 말에 나인은 마음을 정하고 마법을 써서 어거스트를 처리하려 했다.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면 자기 입장뿐만 아니라 마왕의 입장도 곤란해지는 정보다.
그때 문을 열고 펠런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양탄자 위에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의 수급이 뒹굴고 있었을 거다.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들어와 봤다.”
아장아장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리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온 펠런 엑사 드로젠은 자신을 죽이려 한 이부 형과 자신의 하나뿐인 아군을 번갈아 바라봤다. 태연한 척 냉담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지만, 무표정을 가장한 눈가에 얼핏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내가 되도록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지. 꼬마.”
“꼬마가 아니라 펠런이다.”
“그래, 펠런. 자꾸 다가오면 형아가 어흥 한다?”
“너는 호랑이가 아닌데 어떻게 어흥 하나?”
“하, 영리하네. 이 꼬마, 아주 똑똑해.”
어거스트의 몸을 차지한 이방인은 펠런을 공격하기는커녕 어설픈 움직임으로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기 바빴다. 어린아이고 뭐고 펠런을 보면 그 즉시 살수를 날리는 다른 이방인과 다르게 어거스트는 자신의 살의를 통제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펠런은 다른 이방인과 다른 어거스트에게 쉽게 접근했다. 졸지에 살해 대상이 암살자를 쫓는 이상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조금 더 지켜보자, 라고 나인이 판단한 직후 펠런은 나인의 옆에 서서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조막만 한 손안에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종이비행기가 들려 있었다.
“날개가 찢어져 제대로 날지 못한다. 피닉스의 수리를 원한다.”
“뭐야. 하루 만에 찢어진 거야? 날개 보강부터 해야겠네. 여기 풀 없나? 덧댈 종이도 필요하고.”
슬그머니 침대 끝에서 머리를 내민 어거스트가 펠런의 손에 들린 일명 피닉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만들어준 장난감을 하루 만에 망가트린 탓에 화가 난 게 아닐까 움찔 몸이 굳은 펠런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와 종이비행기를 살핀다.
“튼튼하게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영 부실했나 보네. 걱정 마. 더 튼튼하게 치료해 줄게. 다른 놈들은 어때? 페가수스는 괜찮냐?”
“페가수스는 잘 가동하고 있다.”
펠런의 다른 손에서 조잡한 나무말이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졌다. 나무 조각을 목공용 접착제와 털실로 엮어 만든 장난감에 페가수스라는 거창한 이름이라니. 그보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건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에 나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오늘 페가수스의 친구를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래서 온 거구나. 나인이 뜻 모를 죄책감에 시달릴 때, 나인과 어거스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펠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혹시 바쁘다면 나중으로 미뤄도 좋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 싶군.”
“어? 아냐, 아냐. 괜찮아. 지금 대화 다 끝났어. 너 점심 뭐 먹일까, 그런 대화 한 거야.”
살의가 사라졌다. 나인은 어거스트의 주변에 미약하게 어린 펠런에 대한 적의가 봄날 눈 녹듯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한 대상도 문제인데 심지어 하는 짓도 문제다. 마른세수하는 나인을 무시하고 어거스트는 펠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오늘 점심은 소고기라고 하더라.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고기 님.”
* * *
그때도 나는 고기에 환장하는 놈이었던 것 같다. 몸이 바뀌어도 영혼이 그대로면 취향도 그대로인 거지.
윤유마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몸이 바뀐다고 변하는 게 아니라서 미친 왕자라는 소문이 돌았음에도 어거스트는 몇 주 만에 별궁의 사용인들을 전부 제 편으로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모셔야 할 왕자가 둘인데 한 명은 생리적으로 공포를 일으키는 왕도 버린 괴물이고, 다른 한 명은 기억을 잃었을 뿐 넉살 좋고 낙천적인 인간인 거다.
문제는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을 따르는 인물 중에 펠런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볼 때마다 살의를 보내는 적이다. 더군다나 몸은 형제일지 몰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자신이 몇 번이고 죽였던 암살자일 텐데 어떻게 따를 수가 있지? 의아해하는 내게 나인은 참 간단한 답을 말해줬다.
“그때 펠런은 고작 일곱 살이었고, 별궁 안에서 그나마 그를 사람대접해 주는 건 당신뿐이었으니까요.”
“당신이라고 하지 말고 어거스트라고 말해. 아직 실감이 안 나니까.”
“그러죠. 여하튼 어거스트는 죽이고 싶은 이에게 조건 없는 친절과 애정을 쏟는 이상한 놈이었습니다.”
“…내가 인칭만 바꾸라고 했지, 그놈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았는데 이 자식아.”
“저런, 제가 실례를…….”
전혀 실례하지 않은 것 같은 말투로 말꼬리를 늘이며 나인은 계속 말했다.
* * *
어거스트는 지금까지 만나본 이방인 중 가장 수상쩍은 놈이었다.
그들의 행동, 버릇, 말투와 정신 오염을 통해 지금까지 접근한 이방인은 모두 한 명이며, 이방인을 죽여도 곧 새로운 몸에 들어와 몇 번이고 펠런을 죽이려 한다는 확신을 했음에도 나인은 어거스트가 지금까지의 이방인과 같은 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 오염을 통해 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트는 왕족이었다. 쉽게 고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인은 이번에 온 이방인은 사고로 가장해 죽일 생각으로 펠런에게 처리를 건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잠시 보류였다.
아직 각성하지 않은 왕의 명령이었기에 불복하는 건 간단했다. 그리고 나인이 언제까지고 드로젠의 별궁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경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펠런은 어거스트의 처리는 자신이 때를 봐서 하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저 실력으로 손에 뭘 쥐여줘도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도 그렇군요. 손에 검도 쥐어본 적 없는 자를 왜 몇 번이고 보내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 새삼 느낀 의문에 나인은 고민했다. 펠런이 성장한 후 마왕으로 각성할 거라는 것을 나인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승리 후 얻은 나인의 특권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이방인의 입을 통해 들은 소설의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이십여 년 후 일어날 일에 대해 용사의 시점으로 작성된 소설 형태의 예언서.
그걸 알고 있는 이가 마왕의 손에 붙잡혀서 정보를 빼앗길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마치 일부러 정보와 함께 인물을 던져준 후 앞으로의 사태를 대비하라 하는 것과 같지 않나.
* * *
나인은 신전으로 돌아가 어둠의 신과 독대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 아니 왜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일을 시켜? 그냥 잡아 죽이세요 하고 들이민 건데?!”
“…그걸 한 번도 의아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까?”
“내 기억은 자허 블리스가 처음이니까. 거기다가 펠런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소설에 대해 알고 있었고.”
“빛의 신은 당신에게 건넨 예언을 당신이 지킬 수 있으리라 믿은 걸까요?”
“그건 절대 아닐걸. 애초에 네가 펠런 옆에 있잖아. 네게 내 존재를 들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지 않았겠어?”
“…….”
드물게 나인이 입을 다물었다. 여신의 의중을 추측하고 있나? 나도 놈을 따라 잠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여신의 말대로라면 내게 정보를 주고 몇 번이고 소설 속 인물의 몸에 들어가게 한 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예언을 접함으로써 역경과 고난을 미리 피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펠런과 접촉을 통해 마왕에 대한 살의를 쌓고 본능적인 공포를 지우기 위한 백신을 맞는 것.
잠시 고민하다가 나인에게 물었다.
“보통 인간은 지금의 펠런을 보면 어떨 것 같아? 겁에 질리나?”
“왕께서 자신의 기운을 억제하신다면 미약한 두려움 정도입니다. 그러나 통제가 없다면 정면에서 마왕의 기운을 받은 인간은 이성을 잃거나 미칩니다.”
“…그건 어디 사는 신화 생물이냐?”
코스믹 호러는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난 내가 빙의한 세상이 판타지인 줄 알았지. 빛의 신에게 의중을 묻고 싶어도 이미 연결이 끊겨 물어볼 수 없다. 그렇다고 다시 신과 연결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잠시 가정했다. 쓸 만한 혼이라고 데리고 왔더니 생각보다 호구였던 모양이지. 차라리 영영 답을 모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글로리를 지나쳐 원더의 국경을 따라 더 남으로 내려가자 공기에 짭짤하고 비린 냄새가 섞였다. 바다 냄새다.
하긴 여기 와서 여기저기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거의 스쳐 지나가는 형태였지, 제대로 풍경을 감상한 적은 없었다. 바다 비린내와 함께 어슴푸레 바다가 보였기에 우리는 해안가 작은 도시에서 첫날 여정을 풀기로 했다.
도시 안에 들어가기 전 나인은 인간의 형태로 변신했다. 축소 마법이 걸린 가방 안에 와이번용 안장과 물품 일체를 넣고 번화가 변두리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과 저녁을 동시에 해결하기로 했다.
늦은 저녁이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숙박객들을 위해 늦은 저녁에는 반주용 맥주 한 잔 정도만 팔고 있다고 했다.
식당 안에서 명패를 확인했다. 이 몸에 들어온 후 혼가의 가주에게 받은 명패가 있지만 그건 꺼내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대륙의 어떤 곳도 검문 없는 이동이 가능하고 공공 기관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데다 배급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역참에서 교환 없이 말을 빌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문제는 적힌 이름이 용사라는 데 있다.
무언의 눈빛을 보고 나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명패를 내밀었다. 나인 드라코헤드. 마법사. 잠시 나와 나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여관 주인이 짧게 유감을 전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드로젠은 이제 지도에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1인용 방을 두 개 빌려 쓰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 짐을 올려놓고 1층 식당에서 배를 채웠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남은 음식이 변변찮다고 주인장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달짝지근한 간장소스에 조린 대방어와 잘게 썬 양파를 곁들여 버무린 생선회. 그리고 알이 꽉 찬 작은 생선을 통째로 튀긴 음식이 제법 먹음직스럽다. 고수와 양파. 그리고 쑥갓의 향이 짙은 향신료를 듬뿍 써서 비린내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몸보다 알이 더 큰 생선튀김을 우물거리며 나는 맥주만 마시는 나인에게 마저 어거스트에 대해 말해달라 부탁했다. 물론 그 전에 마법을 써서 대화를 차단하는 게 먼저였지만.
“상당히 능숙하게 마법을 다룰 줄 아는군요.”
“여신에게 받은 선물이 좀 있거든.”
“더불어 신성력도 다룰 줄 알지요. 역시 용사군요.”
“그건 너도 할 수 있잖아. 너 어둠의 사제 겸 마법사라며.”
“보통 신성력과 마력은 동시에 쓸 수 없습니다. 신들이 특별히 허락한 이가 아니라면 말이죠.”
나인도 그런 걸까? 어둠의 신에게 뭘 받았고 어떻게 받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나인이 먼저 선수를 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떠나고 1년 후,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은 펠런의 손에 죽었습니다.”
“훅 치고 들어오네.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어거스트의 몸에 들어온 이방인에 대한 처우는 잠시 보류한다. 아직 왕이 되지 못한 어린 왕의 명령을 나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왕의 설명도 적합한 부분이 있었다. 일곱 살과 열다섯 살의 차이긴 하지만 검 한번 휘둘러본 적 없는 이방인이 뭘 들고 덤벼도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는 펠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합리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인은 펠런과 어거스트를 잠시 방치하고 비경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마왕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 그의 곁에 머물거나, 반대로 어린 왕이 무사히 성장할 수 있도록 비경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자는 계속 변신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부담되고, 후자는 왕이 비경으로 가는 일을 거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나인은 추측했다.
이후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펠런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어거스트의 행적은 섣불리 꺼낼 수 없는 금기였다.
어차피 이방인은 죽여도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전의 기억을 잃었다 하더라도 근본은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곧장 죽이지 말고 추적 관찰한다. 펠런이 나인에게 전한 이방인에 대한 처우는 그것이 끝이었다.
“수년 후 왕께서 직접 어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한 해가 멀다 하고 다시 등장해서 목숨을 노리던 이방인은 그 이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말이죠.”
“…제 목숨 노리는 놈을 왜 찾아, 찾길.”
“이제 다시 오지 않는 걸까? 라고 펠런은 물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을 경계하는 물음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연락이 끊긴 친구를 걱정하는 어투였죠. 그리고 거기서 저는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추측에 불과했던 불안이 확실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덟 살, 그리고 아홉 살의 펠런은 아주 가끔 어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나인이 떠난 후 자신을 대하던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놀았으며 무슨 대화를 했는지, 그가 어떤 식으로 펠런을 대했는지. 신체 나이는 15세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은 20대 청년의 것이었다. 어거스트는 펠런을 매정하게 대할 수 없었다.
* * *
“너는 나와 닮았거든. 진짜 동생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모친이 같으니 외형에 닮은 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똑똑하네, 꼬마. 그런데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닮았어. 나도 가진 거 하나 없이 혼자 자란 편, 이거든. 그래서 편견 같은 거에 익숙하기도 하고.”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어거스트는 펠런에게 말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펠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손을 잡아줬다.
익숙하지 않은 접촉이었지만 펠런은 거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왜 앞으로 마왕이 될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건지 물었다.
“내가 받고 싶었던 걸 네게 해주는 거야. 보상 심리라고 해야 하나.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마왕이 될 텐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아직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나쁜 거야.”
“당신이 지난 생에 한 짓을 내가 처벌하지 않는 것처럼?”
펠런의 질문에 어거스트는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았다. 그리고 펠런이 한 질문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거스트는 지독한 두통 속에서 꼬박 하루를 누워 있어야 했다.
나인과 연결한 마법사 통신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은 펠런은 어거스트에게 다른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펠런에게 어거스트는 태어난 이후 처음 갖는 가족이었다.
그 한 해 동안 펠런은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뛰어놀았다. 나인이 놓고 간 교재로 마법을 공부했고, 비밀리에 정체를 숨기고 궁정 내 취업한 밀정에게 검술을 배웠지만 어디까지나 몸을 혹사하지 않는 한도 내였다.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났다. 어거스트는 검술 수련 자체를 거부했지만, 펠런이 수련하는 것을 관전하거나 그 시간에 책을 읽는 일을 즐겨 했다. 검술을 수련하지 않는 이유에 관해 묻자 어거스트는 머쓱하게 웃었다.
“애써 배운 검을 네게 휘두르면 안 되니까.”
이따금 충동이 일 때가 있다고 어거스트는 펠런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니 멀리하고 싶다면 멀리해도 좋다면서.
펠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나를 공격해도 한 수 안에 당신을 제압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기특한데 얄밉네. 내 동생, 강하기도 하지.”
씩 웃더니 와락 끌어안고 뺨을 문지른다. 그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와 촉감. 그리고 자신을 꽉 끌어안은 다정한 포옹은 어떤 맹독보다 치명적이었다. 최소한 나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의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 나인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어둠의 신은 나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꼭 필요한 정보는 전해줬다. 이방인의 정체는 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수였다. 통신을 통해 곧장 이 사실을 펠런에게 전했지만, 펠런은 한참을 침묵한 후 예전에 내린 명령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추적 관찰하되 상황에 따라 대처할 것.’
그해 건기에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은 결국 살의를 억누르지 못했고 이성을 잃고 펠런을 공격했다.
검술 수련이 끝나고 식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시종 여럿이 목격하는 상황에서 어거스트는 수련용 검을 빼 들고 펠런의 몸을 노리고 크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몸을 두 동강 내겠다는 살의에 어린 펠런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거스트는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드로젠 왕국에 상주 중이던 고위 신관이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 * *
“죽기 전까지 몇 분 정도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둘 사이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둘만 알고 있지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니 왕만 알고 계시겠군요.”
“몰라. 기억 안 나.”
참 기가 막히게도 어거스트는 자신이 언젠가 이런 식으로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면서도 어거스트는 펠런이 어미를 만난 새끼 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비쳐 보였을 거다.
내가 펠런을 만난 이후 놈의 사정을 듣고 놈을 내치지 못한 것처럼. 저런 상황에 약하니까. 대리만족 겸, 분풀이 겸, 그리고 정말 펠런을 피붙이 동생처럼 여겼겠지.
“어거스트가 다 말해줬겠군. 소설에서 일어날 일들 그리고 이후 마왕으로 각성한 이후 일어날 변화들까지도.”
“그리고 그 후 이방인은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의 신탁대로 용사가 된 이방인과 만날 거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나를 만났고.”
식탁 위에 차게 식은 생선튀김과 음식들이 남아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하느라 먹은 건 생선튀김 한 개가 전부다. 그렇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서 스푼을 내려놓고 나는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펠런이 처음 만난 나를 보고도 적극적으로 대한 거군.”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왕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의 본질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자허 블리스를 잡아 가둔 이유도 알겠어. 각성이 임박했으니 구금을 해둬야 용사로 각성할 때 곧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당신의 혼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당연히 지난 생에 대한 기억은 없을 거로 생각했지요. 기억이 없는 용사보다 기억이 있는 자허 블리스가 다루기 쉬울 테니까요.”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았다, 뭐 그런 따뜻한 이유는 없는 거냐?”
“그건 왕의 몫이고, 충실한 오른팔인 저로서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은 것뿐입니다.”
충실한 원거리 여행용 암룡 겸 인질을 흘겨본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더 못 먹겠다. 먼저 들어가서 쉴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얌전히 지내. 아침에 보자고.”
“…이것만 먹고 괜찮겠습니까?”
“…네놈들 머릿속에서 나는 뭐냐? 대식가냐?”
펠런과 비슷한 반응에 나는 나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들어 올린 후 2층 숙소로 들어갔다.
대충 몸을 씻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후에 뭔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곧장 펠런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오후에 연락하겠다던 놈이 밤이 늦도록 연락이 없다. 늙은 마족 원로들과 대화가 길어지는 걸까? 아니면 통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또 맛이 간 걸까.
한참 통신을 걸어봐도 답이 없다. 마치 전화처럼 느껴져 통신을 쉽게 끊을 수가 없었다. 아쉽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펠런의 목소리인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우선 나인에게 어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도 해야 하고 그때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놈의 관점에서 듣고 싶기도 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냥 목소리가 필요하다.
더불어 얼굴도 보고 싶다. 놈의 몸을 끌어안고 싶다. 놈이 해준 요리를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하고. 아카데미에서 지낼 때처럼 그저 웃고 떠들고 대련도 하고 싶다. 왜 펠런은 내게 욕구가 되어버린 걸까.
통신을 걸어두고 침대에 엎드렸다. 베개에 뺨을 묻고 먼지 낀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고 달빛만 환했다.
엉금엉금 기어 창문을 열자 옅은 바다 냄새가 났다. 창 너머로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냄새만으로 족했다. 해가 뜨면, 나인에게 바다 위로 날아가자고 부탁해 볼까.
새벽녘 펠런에게 통신이 연결되었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깊게 잠들었다가 놈의 통신을 비몽사몽 간에 받았다. 놈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내게 물었다.
- 지금 어디지?
- …바다?
반쯤 졸며 대답한 직후 온몸에서 피가 빠르게 식으며 올올이 소름이 돋았다.
이 자식 내가 튄 거 벌써 알았나?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서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펠런이 이 근처까지 오지 않았을까. 전쟁이 일어난 건 아냐? 라는 생각에 마력을 확장해 주변 상황을 스캔했다.
다행히 들끓는 유황불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피비린내도 맡을 수 없었다. 내 대답을 듣고 펠런은 잠시 침묵했다. 하긴 놈도 어이가 없을 만했다.
- …거긴 왜 갔나.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건가?
- 신혼여행지 답사차?
- …….
- 바다 싫으면 다른 데로 갈까?
- …괜찮으니 돌아와라.
길게 하품을 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오싹한 건 오싹한 거고, 침착하게 대응해야만 했다.
폭풍전야의 불안한 다정함에 흔들리면 안 된다. 놈이 나를 쫓아오며 미친 짓을 저지르지 않게 말려야 한다면 최소한 나라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 저녁에 통신했을 때는 바빴어? 오후에 연락한다고 했던 녀석이 연락이 없어서 당황했지.
- …그땐 통신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네가 나인과 함께 요새를 떠났다는 연락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내 정신이 아니었다.
- 지금은 괜찮고?
- …아마도.
- 답이 없길래 걱정했지. 제대로 식사는 했어? 잘 쉬고 있고?
- 지금 내 불안이라면 네 거처에 대해 걱정하는 것 말고 없다.
이크, 대충 안부를 물으며 상황을 흐지부지 넘기려고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른 후 펠런에게 말했다.
- 사흘만 기다려줘. 네게 선물 가지고 돌아갈게.
- …윤유마.
- 어떤 선물인지 물어봐. 무섭게 내 이름 부르지 말고.
- …그래, 무슨 선물인데 네가 거기까지 간 거지?
- 네게 줄 꽃과 반지.
- …….
그리고 너와 만수무강하며 살게 해줄 내 욕심.
입에 발린 말처럼 들렸을까. 그저 이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는 변명처럼 느껴진 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다시 놈에게 돌아갈 거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놈에게 통신으로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애초에 놈이 나를 놔주지 않을 것 같아서 무단으로 나온 것도 있고 말이다.
-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 사흘 정도라면 기다릴 수 있을 거다.
내 예상과 다르게 놈은 순순히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나 뒤이어 꺼낸 놈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 하지만 내가 이성을 잃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통제할 수도 없어.
- 그걸 해결하고 싶어서 가는 거야. 나만 보면 맛이 가는 놈을 제정신으로 되돌려 놓을 겸?
- …지금도 당장 너를 추적하고 싶다. 그리고 네가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내가 한 경고를 실천하겠지.
- 협박하는 거야?
- 아니, 걱정하는 거다. 내가 저지르는 일로 네가 상처받을까 봐.
달리 말하면 협박이잖아.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그렇다. 나인을 데리고 온 이유 중 하나는 만약 펠런이 나를 잡기 위해 군대를 이끄는 경우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인물이니까.
그렇게 되면 대신관을 납치해 어둠의 신과 펠런의 연결을 끊겠다는 내 계획도 물 건너가는 거다. 내가 전쟁의 원인이 될 바에 차라리 미친놈에게 물어뜯기고 치료하는 생활을 유지해야지, 어쩌겠나. 나는 침착하게 펠런을 달랬다.
- 잘 참아봐. 어떻게든 버텨봐. 사흘만 기다리면 내가 맛있는 거 사서 돌아갈게.
- …나를 반려동물 취급하는 건 너뿐일 거다.
- 하는 짓은 비슷하잖아. 나를 씹고 뜯고 맛보면서.
- 하고 싶은 대로 씹고 뜯었다면 네가 네 발로 걸어서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텐데.
아이고 우리 미친놈. 이걸 기특하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안 돼, 하고 꾸짖어줘야 할지 짧게 고민하다가 차라리 같은 변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 괜찮아.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면 벌써 네 엉덩이를 탐했을 거야.
- …내가 잘못했다. 배려와 자제는 중요하니 앞으로도 계속 자제하길 바란다.
- 뭐, 인마?
시시덕거리면서도 내 온 신경은 펠런의 어투와 내용에 집중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나에 대한 구금이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 또 언제 이런 탈출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펠런의 호의를 속이고 만 지금 상황에 미안함을 느끼진 않는다. 애초에 잡아 가둔 놈이 잘못한 거 아니냐. 그리고 영원히 도망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흘인데.
- …섬으로 갈 생각은 아니지?
- 아냐, 아냐. 잠깐 자유무역 도시에 갔다 올 거야. 놓고 온 것이 있어서.
그래서 동선도 미리 밝혔다. 이 상황에서 어물쩍 숨기려 들면 더 위험해질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태연한 척 굴었다.
손은 차갑게 식었고 목이 마른다. 지금 당장 나인의 방에 쳐들어간 후 혹시 펠런이 군을 움직인 정황이 있는지 묻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밀당이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데다 규모까지 큰지 모르겠다.
- 여기 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너도 들어볼래?
-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지만 듣겠다.
- 내가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이었다는 이야기.
- …두통은 없나?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묻기보다 먼저 놈은 내 몸 상태부터 물었다. 그 바람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닮아서 끌리는 걸까. 나도 호구지만 놈도 정말 만만찮다.
- 괜찮아. 저주는 풀렸거든. 그래서 나인에게 대충 들었어. 내가 몇 번이고 너를 죽이려 했다는 거. 그리고 자허 블리스 이전에 어거스트였다는 거. 와, 그럼 내가 네 형이었던 거네? 어디 한번 형님이라고 불러봐.
- 기억 자체는 없는 건가?
- 없어. 그나마 자허의 몸에 있던 기억만 남아 있지. 자허로 죽은 후에 저주가 풀려서 그 기억만 남아 있는 걸까?
은근슬쩍 형님이라는 소리 없이 말을 돌리는 것 좀 보라지.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가끔 보이는 저 뻔뻔한 모습 누구에게 배웠나 했더니 나였던 것 같다. 자허 블리스와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의 합작. 결국은 윤유마가 키운 뻔뻔함이구나.
- 내가 돌아가면 어거스트에 관해 이야기해 줄래?
-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바로 나인에게 전하겠다. 부탁이니 그때는 돌아와다오. 너를 협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공격하고 싶지 않다.
- 걱정하지 마. 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할게.
말하고 나니 고백 같다. 무슨 놈의 고백이 이따위야. 나는 내 헛소리에 실소했다. 그러나 놈은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 낮게 웃었다.
- 사흘이라고 했나. 꽃과 반지를 기대하지.
펠런에게서 통신이 끊겼다. 나는 새로 생긴 고민에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다. 나는 놈의 왼손 약지 반지 치수를 모른다. 나인은 알고 있을까? 아침에 슬쩍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펠런의 무의식에 가라앉은 흉포한 맹수를 어떻게 조련해야 할지도 의문이다. 단 하루 만에 들키다니.
어쩌면 나인이 먼저 펠런에게 보고한 걸지도 모르겠다. 거의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긴, 요새 안의 시종들은 전부 나인의 인형들이고 나인이 나를 따를 이유는 없다. 오히려 펠런에 대한 충성도가 높겠지. 나인이라면 자신과 내 행적을 당연하게 펠런에게 보고했으리라.
여전히 해는 뜨지 않았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나인이 머무는 객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놈을 대면했다. 내가 찾아오리라 예상했던 건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옷까지 갖춰 입은 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시길래, 요새를 떠나 자유무역 도시로 가는 이동 경로 및 목적을 모두 왕께 말씀드렸습니다.”
“당당하네. 와, 이거 바로 옆에 배신자가 있었어.”
“무슨 소립니까.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마왕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 인마. 용사의 발차기를 받아봐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하는 놈의 정강이를 발로 후려쳤다. 아파하며 몸을 뒤트는 놈을 무시하고 1층으로 내려가 빵과 건육, 그리고 물을 받아 챙겼다. 이렇게 된 이상 휴식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좋으리라.
사람이 없는 뒷골목에 들어가자마자 나인과 나는 스스로 몸에 타인의 눈에 비치지 않게 마법을 걸었다. 기감이 좋은 기사나 마법사라면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그런 놈들은 도시 뒷골목으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와이번 크기로 변신한 놈의 등에 안장을 매달고 곧장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신성력이 있다고 해서 모든 신관이 전부 나인이 내게 내민 계약서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최소한 대신관 정도로 신과 가까워야 하는 인물이라고 말이다.
나도 대신관 급에 가까운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었더니 나인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빛의 신과 연결이 끊기기도 했고, 내 힘은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닌 빛의 특혜라고 말이다.
“빵 조각 등에 흘리지 마십시오.”
“어, 미안. 이크, 자꾸 흩날린다.”
물기 없이 버석버석한 빵을 물과 함께 우물거리다가 황급하게 다시 주머니 안에 한 입 베어 문 빵을 밀어넣었다. 이래서 버스나 기차 탈 때 뭘 먹는 게 어렵다. 흔들리면 자꾸 흘리거든.
대신 건육을 입에 넣고 침으로 불려가며 질겅거렸다. 길고 매끈한 목을 돌려 내가 앉은 쪽을 흘깃 바라보던 나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뿐입니다. 신앙이 극에 달해 신께서 자신의 힘을 베풀고자 하실 때뿐이지요. 당신은 예외입니다. 신앙심이고 뭐고 일단 필요하다고 하니 힘을 주시는 거죠. 대가야 뭐, 당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 신께 지급했으니 충분할 테고요.”
“그래서 마법과 다른 것도 준 건가?”
“다른 것도 받았습니까?”
“하하. 뭘 받았는지 말할 것 같으냐? 참고로 펠런은 이미 알고 있으니 네게만 말 안 해주지.”
“…와. 그것참. 분하네요.”
아마추어가 연극 대사를 읽어도 저것보다는 감정이 살 것 같다. 이 자식도 은근 내게 물든 것 같단 말이지. 놈의 검고 윤기 나는 뿔을 고삐 대신 쥐어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여기서 추락하면 시체도 못 건질 것이 뻔하니 말이다.
“보통 신성력과 마력은 동시에 쓰지 못한다고 했잖아. 너는 어둠의 신에게 뭘 했길래 그가 네게 특별히 두 가지 힘을 허락했어?”
새삼 생각나서 묻는다. 지난밤 숙박시설에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놈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묻지 못한 질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대답하지 않던 놈이 덤덤히 대답했다.
“용사만 자신을 선택한 신에게 힘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왕 역시 힘을 받지요. 펠런의 경우에는 마력, 압도적인 힘, 그리고 적을 앞에 두고 나약해지지 않는 광기를 받았겠지요. 용족을 포함해 마족 중에서 마왕으로 선택받는 종은 많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받은 힘은 종족의 차이를 메울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요.”
“어, 그러면 너는…….”
“예. 마왕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죠. 그리고 용사를 쓰러트리고 승리한 대가로 이후 마왕이 될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보필할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건 너무…….”
“반칙은 아닙니다. 새로운 마왕이 각성한 이후 제게 남은 힘은 용족으로서의 권능뿐이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미 무대 밖으로 떠났기에, 세상 모든 이들이 용사를 죽일 수 있어도 저는 용사를 죽이지 못합니다. 흉계를 꾸미는 것도 당신이 용사가 아닌 이방인이었을 때 가능한 거였지요.”
“…몇 세기마다 마왕이 등장한다면서…요.”
새삼 나인 드라코헤드의 나이가 떠올랐다. 수 세기마다 마왕의 곁에서 그를 보필한 암룡 바슈키. 라울 미스트의 보고로 들을 때와 나인이 직접 말할 때 느끼는 충격이 달랐다.
효도 받아야 할 나이에 어린놈을 등에 태우고 장거리 비행을 해야 한다니. 노인 공경이 아니라 노인 공격을 하고 있구나. 괜히 자세가 반듯해지고 다소곳하게 앉게 된다. 내 반응에 내심을 짐작한 건지 나인이 몸을 떨며 웃었다.
“당신에게 존대를 들으니 이상하군요.”
“그럼 놓지 뭐.”
놈이 말을 번복하기 전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한 거기도 하지만 저 고룡은 내가 용사가 될 것을 짐작하고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하게 막기 위해 이상한 계약까지 밀어붙인 놈이다. 그리고 그 계약을 위해 어떤 대가가 필요하다고 했지.
“어, 맞아. 계약하려면 대가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의 기억력은 참 필요 없을 때 잘 발휘되는군요.”
“아니 내 인생 전반에 걸쳐 그런 큰 사기는 없었거든? 기억 못 하는 게 바보지.”
“사기라니요. 정당한 대가를 받고 진행된 일입니다만?”
보통 사기꾼이 변명할 때 그런 소리를 하더라. 나는 투덜거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마력이 아니라 신성력이 필요한 거였어. 와, 난 당신이 어둠의 신관이라는 걸 빛의 신에게 들어서야 알았다니까?”
“보통 마족인 펠런의 몸을 치료할 수 있었다고 할 때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내가 마족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알아? 이쪽이 신성력으로 치료할 때 마족은 마력으로 치료하는가 보다 했지.”
할 말이 없어서인지 나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일 때 모습으로 저지른 습관 탓에 안장이 크게 들썩거려 나는 다급하게 고삐를 틀어쥐고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다. 와, 씨. 고도 5,000m에서 떨어질 뻔했네.
“요, 용사 못 죽인다며! 못 죽인다며!”
“…이런 실수를.”
상당히 안타까워하는 눈치라 실수로 떨어트리지 못한 것에 한탄하는 것처럼 들렸다. 빌어먹을 뱀 같으니.
“그러면 대신관님도 계약서 작성할 때 뭔가 대가가 필요한 거야?”
“그건 우리 쪽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대신 대가를 바친다든지요.”
“…아주 적극적으로 내 사망을 유도하는구나.”
“성공하면 광증에 빠지지 않는 마왕님을 얻는 거니 당신도 걸 만할 텐데요?”
“아주 머릿속에 펠런밖에 없지? 내가 당신을 기특하게 여겨야 해? 아니면 쥐어박아야 해?”
“하하, 여기서 저를 쥐어박으면 당신도 같이 죽습니다.”
어디 한번 해보라며 고개를 들이미는 것 같은 뻔뻔스러운 말투다. 이 자식 동귀어진을 노리고 있어.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주먹이 쥐어지는 것을 참았다. 진정하자 유마. 하는 짓은 유치해도 저 양반 몇 세기나 산 영감님이다. 노인 공격. 아니, 아니. 노인 공경.
그래도 나인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인은 나와 맞먹을 정도로 펠런을 아끼고 있다. 자신의 신인 어둠에서 펠런이 벗어나길 원할 정도로. 지금까지 놈을 만난 이후 한 모든 행동의 목적에 펠런을 끼워 맞추면 놀랍게도 말이 된다.
얼마나 많은 마왕이 용사의 손에 쓰러지고, 용사를 쓰러트리는 걸 봤을까.
“나처럼 이상한 용사도 있었어? 마왕이랑 연애하고 야한 짓도 하고?”
“당신이 이상하다는 건 스스로 알고 있었군요.”
노인을 공경하고만 싶은 착한 내 마음을 시험하는 말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인이 피식 웃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같은 이상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칭찬 감사하다. 용사. 힘내서 더 이상해진다.”
“그 말투도 그만하시고요.”
“용사.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다.”
포기한 듯 아예 입을 다무는 나인을 내려다보며 킬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