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4권(완)-1. 탈출 (1) (18/23)

1. 탈출 (1)

결국, 놈이 해후의 정을 푸는 데 만 하루가 걸렸다.

놈은 지치지 않았다. 피로라는 걸 모르는 생물 같았다. 그러니까 몇 년 만에 대륙도 정복하고 그러나? 내가 몇 번이고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후에도 놈은 한결같았다. 한결같이 크고 단단했다.

어둑하게 흐린 하늘이 여전해서 아직 해가 뜨지 않았나 했더니 다음 날 오후라는 소리를 듣고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밥, 밥은 주고 해, 이 자식아!!”

울컥 치민 서러움에 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하찮은 내 발버둥을 무시하고 계속하려던 놈이 밥이라는 말에 멈칫 굳었다. 성기를 빼낸 놈이 다시 물 덩어리를 불러와 내 뒤처리를 해줬다. 사실 뒤처리는 내가 아니라 이 방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식사 전에 건들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 나는 허리가 부러진 옷장 안에서 속옷과 실내복을 꺼내 대충 몸에 둘렀다. 품이나 크기가 조금 넉넉한 걸 보면 펠런의 옷 같기도 하다.

“감옥에서 죄수도 식사는 하게 해주는 거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잘못했다. 반드시 끼니는 지키도록 하마.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나 간식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다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먹을 거에 미친놈처럼 들리거든? 때 되면 밥 달라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극적으로 받아들여.”

“너는 굶는 거 싫어하잖나.”

“굶어야 하는 경우라면 굶는 거야 뭐, 하지만 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먹어두자는 주의거든?”

“다른 점을 모르겠다.”

이 자식이 한 판 하고 나니 입이 풀리는 모양이다. 은근슬쩍 나를 먹보로 만드는 놈의 말에 흘겨보며 명치에 잽을 날렸다. 이번에는 놈이 손으로 주먹을 막았다. 아까 얼굴을 맞을 때는 막지 못한 건지 아니면 막지 않은 건지.

한 번 제대로 다시 대련하고 싶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브레이크가 걸리고 만다. 다른 게 아니라 어제처럼 또 놈이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이다.

펠런이 사람을 부르기 무섭게 정복을 입은 시종 여럿이 들어와 처참한 방 안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이미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펠런은 마법사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이 요새에 머무는 녀석 중 마법사와 통신을 할 수 있겠구나. 야한 짓하면서 할 일은 제대로 했네.

새삼스러워서 고개를 돌려 놈을 봤다. 이제 눈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옆모습은 여전히 조각 같고, 퉁퉁 부은 왼팔은 이제 시커멓게 죽었다. 등줄기에 맺힌 피는 셔츠와 함께 말라붙은 처참한 꼴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닌데?

“잠깐, 밥 먹기 전에 치료부터 하자.”

“다친 곳이 있나? 네 기도로 회복이 되지 않는 건가. 고위 신관이 필요하다면 가져오겠다.”

고위 신관이 편의점 물건 사듯 그렇게 단번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닐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놈의 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괜찮아. 어지간하면 죽기 직전 상처도 다 회복할 수 있어. 그런데 그건 인간 한정이고 너 말이야. 팔 결딴났잖아.”

“…아.”

새삼 알아차린 것처럼 고개 끄덕거리는 놈의 모습에 부아가 치민다. 아니 자기 몸을 소중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팔 부러트리고 등에 밭고랑 만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치료할 생각도 안 한 눈치다.

“괜찮다. 식당에 나인이 있으니 그에게 명령하면 된다.”

“…정말이지?”

“그런 거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네가 거짓말하는 건 내 정체라든지 네 속셈 같은 중요한 것뿐이지.”

“…….”

“내가 이럴 거 예상했다며. 각오도 한 거 아니었어?”

한동안 요새에 머문 덕에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앞서 걷기 시작한 내 뒤로 몇 걸음 떨어져 나를 뒤따라오는 펠런이 느껴졌다. 어쩌다 보니 몸을 섞긴 했지만 그건 썩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후다.

내가 놈에게 정을 떼야 할까?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알기 위해서는 놈이 왜 그랬는지, 그리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선 그것들부터 들어야 했다.

거기까지 숨기거나 거짓말하면 정말 끝인 거고.

놈을 좋아한다. 어쩌면 사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그건 지반이 부실한 집과 같다. 무너지기라도 하면 깔려 죽겠지. 나는 깔려 죽고 싶지 않다. 지반을 공고히 다질 방법을 찾지 못하면 무너지기 전에 달아날 생각이다.

“아, 맞아. 나 이제 마법도 쓸 줄 알거든? 마법사 링크 연결하자. 언제든 대화할 수 있게.”

“…그렇게 해줄 건가?”

“괜찮아. 빛의 신이 준 선물이거든. 그래서 나인이나 네가 정신 지배를 걸어봤자 내게 통하지 않을걸. 우선 닫아둘 거고.”

“너를 정신 지배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놈이 드물게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놈의 반응이 우스워 나는 낄낄거리며 음식으로 테이블이 꽉꽉 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납치하고 약을 먹이고 감금하는 건 괜찮고 정신 지배는 안 돼?”

“정신을 지배당한 너는 네가 아니니까.”

“…그거냐고. 나쁜 짓이라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온전히 원해서?”

“당연하다.”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하긴, 싫어했다면 첫 대결에서 팔 날리는 김에 내 목도 날렸겠지. 그러면 용사는 죽고 성검은 마왕의 손에 떨어지고 인류는 멸망했으리라.

생각보다 내 목숨값이 큰 것 같지만 상관없다. 윤유마부터 자허 블리스, 그리고 지금의 용사에 이르기까지 난 항상 내 목숨이 최우선이었다.

전갈을 받고 온 건지 식당 안에는 이미 나인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뻔뻔한 미중년의 모습에 나는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었다.

“와, 여기 사기꾼이 다 모여 있네?”

“오랜만입니다, 자허. 아니면 이제 용사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유마라고 부르고 싶지만 말입니다.”

내가 비꼬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걸 보니 나인이 맞는 것 같다. 놈도 내가 용사로 다시 태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 그런 불공정계약을 요구한 걸 테고.

그래도 생각보다 나인에게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 여신이 내 사지에 묶은 줄을 풀고, 용사로 다시 태어났음에도 기억이 있음에는 전적으로 저 자식의 공이니 말이다.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지 않나? 그냥 용사라고 부르세요. 허락은 무슨 얼어 죽을.”

“모습은 변했지만 성질머리는 여전히 건강한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나인과 나는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도마뱀 같으니라고. 우리를 지켜보던 펠런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먼저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본다. 전체적으로 고기 요리들이 많다. 내가 아무리 고기 요리에 환장한다고 해도 이러면 매우 감사하다.

식사하기 전 나인이 우선하여 펠런을 치료했다. 마족의 치유술은 인간의 신관과 어떻게 다르나 했더니 거의 비슷하다. 기도하는 신이 빛이냐 어둠이냐에 따라 다른 걸까.

자신의 왕이 피떡이 되어 나타났는데도 나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대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한 계약이 어떤 건지 당사자인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말이다.

“우리 셋만 먹는 건가?”

둥근 빵을 찢어 버터를 발라 먹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성검을 들고 싸웠을 때, 펠런의 곁에 있던 고위 마족 몇 명이 떠올랐다. 암룡 바슈키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이들, 소설 속에서 중후반까지 용사를 괴롭혔던 마왕의 부하들 말이다.

“그들은 요새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실제로 이 요새 안에 머무는 마족은 나와 나인뿐이다.”

“…시종들은?”

“그들은 나인이 만든 인공 생물이니 마족이라 볼 수 없지.”

제대로 감금할 준비를 했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가 날 보는 것도 싫은 걸까. 이런 식의 집착은 처음 받아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마족을 인질로 잡고 탈출하려고 할 수도 있고.”

“…….”

정정이다. 위협이 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군.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꼭 써먹고 싶은 좋은 탈출 방법이었는데.

“그리고 고위 마족일수록 빛의 대리인에 대한 증오를 감출 수가 없다. 네가 처음 나를 봤을 때 느낀 살의와 비슷하거나 더할 거다.”

“아, 그렇지. 그런 설정이 있었지.”

부드러운 크림 수프가 주린 배를 채워줬다. 비프 스튜 안의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고기가 많으니 오늘은 당근을 편식해도 괜찮겠지.

달짝지근하게 졸인 양파의 향 그리고 혀로 눌러도 부스러지는 부드러운 고기, 목구멍을 스르르 미끄러지는 맛에 식욕이 제대로 돌아와서 한 그릇을 비우고 부족해서 화로에 구운 고깃덩어리도 집게로 가져와 허브 버터에 발라 살뜰하게 맛봤다.

“위장을 너무 채우지 마라. 아직 디저트도 남았다.”

“아, 이 자식 역시 나를 아네. 그래. 어제오늘 쉬지 않고 덮친 거 용서한다.”

나인이 마시던 와인을 뱉었다.

잔기침을 내뱉는 놈을 무시하고 펠런을 향해 씩 웃었다. 이 요새에 납치 감금된 게 이번이 두 번째라 그런 건지 좀 적응이 된 것 같다. 이만치 밥 잘 나오고 잠자리 편하면 조금 감금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 몸이 바뀌어도 여전히 생각이 변하지 않는 걸 보면 내가 피학 성향에 더불어 스톡홀름 증후군도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정도로 마왕 놈을 사랑하거나.

식사를 마치고 펠런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인 역시 그런 펠런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놈과 내가 공들여 박살 낸 방에 다시 갇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나인의 인조 인형이 나를 안내한 곳은 새로운 방이었다.

요새 안쪽에 이런 좋은 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크고 멋진 방이었는데, 가구라고 있는 물건이 최소한의 물건뿐이었다.

그래도 침대가 있는 게 어디냐. 가로로 누워서 데굴데굴 굴러도 될 만큼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 푹 쓰러지듯 누워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놈은 내게 다시 약을 먹이지 않았다. 사지는 멀쩡하게 움직이고 마력도 여전하다. 내가 해독하는 힘이 있다고 믿어서 그러는 거라면 다른 수를 쓸 만도 한데 거의 방목하듯 방에 집어넣고 그걸로 끝이다. 그건 아마 내가 놈의 협박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네가 달아난다면 도망친 길을 따라, 그 주위의 인간은 모두 멸족시키며 너를 쫓을 생각이다.”

“미친놈 아니냐고 정말.”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기절하기만 했지 잠은 제대로 자지 못했다. 치료를 남발한 탓에 피로는 쌓이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몰려 나는 이미 너덜너덜한 만신창이다. 내가 놈을 그렇게 키웠다고? 아닌데. 완전 건강하고 씩씩하고 용감한 검사로 키웠던 것 같은데.

“부모 뜻대로 자라지 않는 게 아이라더니.”

개소리를 지껄여대며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되살아난 후 내가 생각했던 건 놈에게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할 거라는 목표도 없었다.

빛의 신이 내게 준 펠런에 대한 맹목적인 살의를 벗고 나니 남은 게 이런 거다. 여전히 대결은 하고 싶지만, 그뿐이다. 놈이 인간을 죽이려 하면 말리겠지. 어쩌면 대립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까무룩 잠들었나. 자세가 좋지 않았던 건지 목이 다 뻐근했다. 가볍게 치유를 남발하고 나는 옆에 누운 펠런의 몸을 끌어당겨 놈의 허리에 팔을 걸쳤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놈이 보일 거라는 생각은 했다. 잠결에도 놈이 내가 누운 침대에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고. 나보다 늦게 잔 놈이 일어나기는 일찍 일어난 듯 눈이 초롱초롱하다. 아직 졸려서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며 놈의 눈에 손바닥을 덮었다.

“나 아직 안 일어났어. 좀 더 자.”

“그럼 지금은 꿈속인가?”

“그런 거지. 네가 아주 끝내주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속이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깬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발정하지 마. 그러지 마. 나 아직 마음이 덜 치료됐어. 하루 걸러서 해.”

아침 발기를 한 건지 아랫배에 빳빳하게 성난 것이 닿았다. 나는 다급하게 중얼거리며 놈의 눈가에서 손을 뗐다.

“버틸 수 있는 체력 같은데?”

“체력은 버티는데 정신이 못 버텨. 내일 하자. 아니면 저녁에.”

저녁이라는 말에 놈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서 얌전한 척이야. 하반신에 맹수를 키우는 자식이. 얄미워서 놈의 뺨을 가볍게 잡아당긴 후 몸을 일으켰다. 다시 봐도 참 좋은 방이다.

“여기 네가 쓰는 방이지?”

“이제는 너와 같이 쓸 방이다.”

“그런 말은 반지와 함께 해야 하는 거 아냐?”

“…….”

여기서도 프러포즈 문화는 현대와 비슷하다. 꽃과 반지. 혹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추억이 있는 장소 등등. 태연하게 지껄이는 내 말에 놈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지 치수를 어제 알게 되어서 제작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벌써 제작을 하고 있냐고.”

“…….”

놈이 입을 다물었다. 제작하고 있다는 것도 내가 몰라야 하는 거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가 놈의 검은 머리카락에 손을 얹고 대충 흐트러트렸다.

“반지 줘도 안 받을 건데?”

“괜찮다. 알아서 끼우겠다.”

“그거 내 말투 같은데 왜 그런 나쁜 것만 배운 거냐.”

“스승이 워낙 뛰어나서 저절로 감화되더군.”

놈이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길게 기지개를 켠 후 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아침밥은 뭐야? 웅얼거리며 묻는 물음에 놈이 새우와 관자, 그리고 연어구이라는 말을 해줬다.

내가 해산물 좋아하는 걸 용케 알고서 대접을 해주는구나. 이마를 묻은 채 킬킬 웃자 놈이 움찔 몸을 떨었다.

“반지 말이야. 왜 안 받는 건지 물어봐야지.”

“내가 너를 속여서 그런 거 아닌가?”

“정답. 그리고 다신 속이지 않겠다는 말도 안 했지. 그리고 아직 속이고 있는 것도 있고.”

“…….”

슬쩍 넘겨짚은 말에 놈이 시선을 피했다. 그렇구나. 이 빌어먹을 마왕 놈 아직도 숨기고 있는 게 있구나.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의 시선을 쫓았다. 몇 번이고 눈을 피하던 놈이 한숨을 깊이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해결되면 숨김없이 말해주마.”

“해결할 수 있는 이야긴데 왜 지금 말 못 하냐? 그리고 딱 봐도 나와 연관이 있는 거면 당사자에게 가장 먼저 말해야 하거든?”

굳게 다문 입을 봐서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려보지만, 알 수 없다. 어차피 외전을 제외한 원작은 항상 용사를 중심으로 보여줬다. 마왕의 강림 시기부터 놈의 행동이 어느 것 하나 원작과 같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 사이에 가장 필요한 건 대화지. 서로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내놓지 않고 쥐고만 있으면 오해가 쌓일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날 떠나지 않겠다면.”

“…아니, 그건 아니지. 나도 사람인데 내 목숨도 소중하고, 내 주변 사람들 목숨도 중요하니까. 네가 정말 나쁜 짓 할 것 같으면 말릴 거고. 화도 낼 거고.”

내가 가지고 온 성검이 어디 있는지 펠런에게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거 다른 사람이 쥐어봤자 장난감 검보다 못한 무딘 검이 된다고 하니 오용될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펠런은 모르겠지만 대충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용사라서 그런 건지 감각을 확장하면 북쪽에서 성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북쪽이라니. 북부 산맥 너머 말고는 없다. 확실하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가지고 갔구나! 용의주도한 놈 같으니라고.

방향은 알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설마 불타는 용암이나 크레바스 사이 던져 넣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물어볼 수 없다. 괜히 검 하나 찾겠다고 놈에게 물어봤다가 놈의 목숨을 노린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고, 애초에 내 전력은 검이 아니라 창이다. 대련한다면 창을 휘두르고 싶다.

아침 식사 후, 펠런은 요새 안을 안내해 줬다. 이미 왔던 곳이라 거의 알고 있지만 3년 전과 쓰임새가 달라진 장소도 있고 새로 추가된 방도 있다. 그리고 안내를 받으며 펠런은 한 가지 주의 사항을 덧붙였다.

“네가 머무는 층을 제외한 다른 층은 출입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 않길 권하는 거야? 하지 말라는 거야?”

“하지 말라는 것에 가깝다. 다른 층은 고위 마족들이 사용할 때도 있으니 자칫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 네가 기운을 숨기면 여타의 마족들은 용사라는 걸 모르고 지나갈 거다. 하지만 이 요새를 사용하는 녀석들은 나인과 같은 수 세기를 살아온 괴물들이 많아.”

“너보다 세?”

“…그건 아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너보다도 약하다. 하지만 이 요새에 용사가 머물고 있다는 걸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다.”

“그건 그렇겠다. 너랑 나랑 어젯밤에 뭐 했는지 알면 다들 쓰러지는 거 아냐?”

펠런에게 끈을 하나 받고 머리를 묶었다. 오랜만에 예전 머리 스타일로 돌아가나 했더니 역시나 머리끈이 스르륵 풀린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투덜거렸지만 자를 생각은 없다. 누구 씨가 긴 머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한 층만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뿐만 아니라 서재와 실내 연무장까지 있어 몸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창을 열거나 테라스로 나가는 정도로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건 아쉽다.

다만 아주 조금 문제가 생겼다.

처음엔 사소한 문제가 방치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 일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나는 펠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인을 찾았다. 어차피 나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 인조 시종이나 붙들고 나인을 만나야겠다고 말하면 안내해 줬으니까.

자신의 왕이 열렬히 사모하는 상대를 대하기에 상당히 불손해 보이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며 나인은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무슨 일입니까? 요즘 건강하고 활기차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더니.”

“비꼬는 이유는 잘 알고 있는데 바로 그 이유로 찾아온 거니 좀 봐줘.”

아무렇게나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나를 안내한 인조 시종에게 음료 한 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건 덤이다.

내 집처럼 편안하게 앉은 나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나인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야근에 찌든 직장인 같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용사가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으니 당신에게 그런 불공정계약을 강요한 거겠지요?”

“그 계약에서 내가 죽이지 못하는 건 마왕뿐인데 말이야. 용 한 마리 정도는 사냥한다고 계약 위반인 건 아닐 거 아냐.”

“멍청한 사람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지면 꼭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더군요. 당신은 영리하니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다. 용사, 멍청하다. 용사 멍청해서, 멋대로 파괴한다.”

“…….”

너무 그렇게 진귀한 생물 바라보듯 보면 쑥스러운데 말이야.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척을 하자 나인은 구역질이 치민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냥 해본 말이야. 널 죽이면 펠런이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내게 사기 하나 쳤다고 네 목을 치겠어?”

“왕이 계시지 않았다면 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렇다. 용사. 뭐든 잘 벤다.”

국어책 읽듯 딱딱 끊어친 말에 나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해야겠다 싶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놈에게 물었다.

“펠런이 요즘 이상해. 이유를 알고 있나?”

“권태기라 그런 것 아닙니까?”

“집착이 더 심해지고 있어. 실상 나는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놓으려고 안달이야.”

“…….”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인마. 갈수록 심해지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물어보는 거다. 어차피 이곳에서 내가 펠런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상대가 너 말고 없기도 하고.”

“집착만 심해졌습니까?”

“아니. 나를 만나면 조금씩 이성을 잃는 시간이 있어. 그때는 나와 싸우거나, 아니면 덮치거나 둘 중 하나야. 내가 저항하면 그때부터 피 튀기고 싸우는 거고, 어디 뭘 하는지 보자 싶어서 내버려 두면 밤새 덮치고.”

“…듣기만 해선 사랑싸움 같지만,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너는 뭐라도 알 줄 알았다. 용사를 앞에 둬서 살의를 참지 못하는 것치고 펠런이 나를 대하는 것이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다. 그리고 차마 나인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제정신을 차린 후에도 나를 대하는 것을 조금씩 어려워하는 눈치다.

그래도 상관없다. 사람 마음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거니까. 더군다나 나는 모습마저 변했다. 용사기도 하지. 놈이 종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나를 거부하는 거라면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고 나도 조금씩 놈을 비울 거다. 그런데 지금 이건 그런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이유를 알고 있다면 해결 방법도 알겠네?”

“예. 당연합니다. 이유는 당신이니까요.”

“…….”

예상했던 대답을 칼같이 하는 나인 덕분에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음, 그렇군. 나 때문이군. 원인이 확실해졌으니 해결 방법도 깔끔하다.

“그건 해결 못 할 것 같은데.”

“예. 어렵습니다. 당신이 사라지거나 떠나면 우리 왕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 대륙을 뒤집어엎을 겁니다. 물론 모든 마족과 마수들이 환호하며 그 뒤를 따를 거고요.”

“사라진 신랑감 찾는 여정치고 규모가 너무 큰데?”

“…신랑이요?”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처럼 나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상관없다. 펠런이 조금씩 변한 이유라도 알았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기지개를 켰다.

그사이 나를 데리고 온 인공 시종이 차가운 아이스티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나인에게 인사했다.

“내가 떠나는 것 말고 해결 방법을 찾으면 알려줘.”

“그건 제가 가장 알고 싶군요. 우리 왕의 평온을 위해서라도.”

투덜거리는 나인의 말에 펠런에 대한 걱정이 어려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용사인데 저 자식은 나를 보며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오래 묵은 용이라 그런 걸까?

* * *

한 달 만에 내 삶은 정형화되었다. 움직이는 거리가 짧아지니 일과가 단조롭다. 먹고 자고 수련하고 섹스하면 끝이다.

가끔 테라스를 통해 상공을 점령한 와이번 부대를 본다든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져서 밖을 바라보면 요새만 한 크기의 용이 지나가고 있다든지 하지만 그뿐이다. 감각을 높이면 아주 먼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산발적이고 짧은 전투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도 항상 같다. 드로젠의 국경에서 인간의 군사와 대치 중인 걸까. 나는 시종이 가지고 온 뜨거운 허브티를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리며 눈을 감았다.

펠런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곳에 끌려온 이후, 거의 날마다 핀 더 라이트 제후에게서 통신 신청이 왔다. 물론 답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결이 되는 시점에서 그들은 내가 살아 있음을 알고 있을 거다.

드로젠 국경에서 마왕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급작스러운 결전. 그리고 패배 이후 연결되지 않는 통신. 아마도 적에게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큼.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크게 틀린 것도 없다. 감금된 건 사실이니까. 내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차지하더라도. 그래도 서서히 통신 신청을 하는 횟수가 줄어드는 걸 보면 반쯤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구출대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는 용사뿐인 세상이다. 용사에 대한 의존도가 어마어마하니 용사의 활동은 극단적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마왕이라는 막강한 적을 처리하는 목적으로 용사의 진두지휘 아래 움직이는 군대를 만들거나, 아니면 빌어먹을 감말랭이 황제처럼 용사가 알아서 다 해줄 거라는 식으로 용사에게 모든 걸 맡기고 수수방관하거나.

어쩌겠어. 빛도 나를 포기한 눈치인데.

펠런을 약속을 잘 지키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먼저 침공한 건 펠런이 아니라 드로젠이라는 뜻이다.

마왕이 강림했다는 신탁이 떴음에도 마경은 도리어 3년 동안 잠잠하다 못해 마수와 마물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마경의 미친 마물조차 엎드려 굴복하는 마왕의 명령 덕에 모든 마물과 마수, 그리고 마족들이 북부 산맥 안쪽에서 왕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마왕이 된 펠런은 단 한 번 인간의 땅에 발을 들여야 했다. 마법으로 뿔과 마족의 특징을 감추고, 마족 특유의 기운을 숨긴 채 녀석이 향한 건 블리스 제후국이었고 녀석의 뒤엔 자허 블리스의 유체가 함께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영감님이 내가 어떻게 죽은 건지 알고 있던 거였어.”

“너를 다른 데 묻을 수 없었다. 북부 산맥은 너무 춥고, 마경은 사방에 독기가 흐르니까.”

“그래도 이야기 좀 많이 와전되었더라. 영감님이 나를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놈으로 알고 계시던데?”

“크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야 그렇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펠런은 마왕으로서 차기 드로젠의 왕으로 등극할 준비하던 준 엑사 드로젠을 만났다. 자신의 이부형제가 마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세녀는 그 자리에서 펠런을 죽이려 들었지만, 힘의 격차를 이기지 못하고 검은 꺾였다.

인간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펠런은 준을 죽여 드로젠을 분란에 빠트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제 북부 산맥의 왕이 되었기에 인접한 국가에 경고하러 온 것뿐이었다.

“마경의 땅을 밟지 말 것. 먼저 칼을 겨누지 않으면 치지 않겠다.”

문제는 이 경고를 불같은 성미를 가진 준이 굴욕으로 여겼다는 점이었다.

3년 후, 마침내 글로리아 왕이 서거하자 새로이 왕위에 오른 준은 대관식이 끝나고 고작 한 달여 만에 독기를 제거하는 약초를 주머니에 매단 돌격 부대를 이끌고 마경을 침공했다.

마족들이 개체로서 강하나 독단으로 행동하니 군대 앞에서는 약할 거로 생각한 거겠지. 그리고 드로젠의 마지막 왕 준은 고위 마족 장교들이 이끄는 마물 부대를 만나 궤멸했다.

아비 다른 누이의 목을 베고, 펠런은 가장 먼저 드로젠에 공식적으로 침공을 선언했다. 앞으로 사흘 후, 드로젠을 점령할 것이다. 그리고 드로젠의 국경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처리할 것이니 알아서 도망쳐라.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올 줄 알았던 왕의 수급을 본 드로젠의 백성들은 겁에 질려서 마차에 실을 수 있는 모든 재산을 챙겨 국경을 마주한 원더와 블리스로 도망쳤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두 제후국은 국경을 열었다.

그렇게 펠런은 드로젠의 땅을 손에 넣었다.

놈의 경고가 충분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평소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었던 형제가 갑자기 마왕이 되었다고 떠들며 찾아왔으니 어이가 없었겠지. 한참 놈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불쑥 놈에게 물었다.

“준 엑사 드로젠과 싸울 때 말이야,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

“이 정도면 다시 싸워도 해볼 만할 정도다, 라고 생각하게 만든 거 아냐?”

“…그래도 형제에게 전력을 다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 마왕님 개소리도 잘하시네.”

용사와 마왕이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300년 전 이야기다. 오직 성검을 든 용사만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시간이 300년이 흐르면 전설 정도로 치부하고 끝내기 마련일 것이다.

하다못해 라울 미스트도 암룡 바슈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몰라 블리스 내부의 신전이나 역사 기록관을 뒤지며 기록을 찾았으니 말이다.

이미 저지른 일, 더군다나 상대가 먼저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면 빌미는 확실하다. 내 부탁을 교묘히 빠져나가 독기나 얼음에 뒤덮이지 않은, 편히 살 수 있는 영토를 구한 것 같지만. 뭐 놈이 악당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아는 사람만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애초에 선인도 아니고. 진짜 용사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하며 하늘을 본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은 펠런이 내게 준 2층이 아닌, 나선 계단 바로 아래 위치한 가장 높은 층이다. 왜냐면 2층은 2주 전 나와 펠런이 요새를 지탱할 골자만 남기고 박살을 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항상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이유가 있지. 오후 2시. 역시나 오늘도 하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은색의 용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은으로 빚은 것 같은 비늘, 별과 같은 날개 피막이 아름답다.

시간관념이 얼마나 철저한지, 내가 여기 머무는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이 시간을 벗어나서 움직인 적이 없다. 뭘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면 오후 아홉 시, 해가 진 이후 은으로 만든 베일 같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요새로 돌아올 것이다.

용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나는 밖으로 향하는 문을 바라봤다. 인질의 자세가 아니지만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다.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펠런이 들어왔다. 옅게 그늘진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나는 테라스 안에서 들어와 놈에게 다가갔다.

“피곤해 보여. 잠 제대로 못 잤어?”

“…그래.”

“점심은 먹었고?”

“…먹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녹슨 닻을 휘감은 것처럼 무겁고, 탁하다. 잘게 흔들리는 놈의 눈에 나는 서슴없이 다가가 놈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탁―

소리가 나도록 펠런이 손을 낚아챘다. 손목을 움켜쥔 악력에 강화를 걸었는데도 핏줄과 근육이 툭툭 터졌다. 빠르게 회복한다. 놈은 내가 다친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다. 어쩔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나 했더니 오늘은 특히 그렇다.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나?”

“…안 될 것 같다.”

쥐어 짜내듯 펠런은 내게 대답했다. 짧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놈이 성심성의껏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 놈이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나는 침착하게 놈의 허리를 감싸 쥔다. 오늘도 탄탄하고 좋은 허리다.

슬쩍 엉덩이에 손이 가는 걸 참았다. 놈의 몸에서 옅은 땀 냄새가 난다. 운동이라도 하고 온 걸까.

놈과 만나고 나면 쉽게 일이 풀릴 거로 생각했다. 내가 용사고 놈이 마왕이라고 해도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죽일 필요 없이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낙천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여기 와서 놈을 만나고 그것이 가능해질 거라고 믿었다. 예를 들면 놈이 여전히 숨기고 있는 몇몇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말이다.

아, 젠장. 놈의 눈을 보지 못했다.

딴생각에 빠져 대응하지 못한 차에 놈이 나를 거꾸러트렸다. 카펫에 몸이 처박히고 내 등 위로 올라탄 놈이 셔츠를 찢었다. 요 며칠은 계속 옷을 찢네. 이 와중에도 나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용사로서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펠런의 이성이 조금씩 마모되는 게 보였다. 성교할 때 가끔 이성이 날아가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한 주가 지난 이후에는 대련조차 할 수 없었다. 펠런이 창을 부러트리는 것으로 모자라 내 심장에 검을 꽂으려 했기 때문이다. 급하게 마법을 활용해 놈의 검을 막고 어깨에서 가슴까지 반으로 갈라진 몸을 치료했다.

격통에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한 번 죽어봐서 그런지 이대로 기절하면 죽는다는 자각이 오더라.

그리고 결국, 이 상태까지 왔다. 보름 만에 펠런은 나와 잠시 대화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고 나를 공격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만나지 않는다. 식사조차 따로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듯 기어이 하루 한두 번씩 이렇게 나를 찾아온다.

어제는 대화 비슷한 걸 조금 더 했는데.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찢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자조했다. 처음에는 저항한답시고 놈을 때려눕히려 들었지만 내가 저항할수록 놈은 더 깊은 살의를 느끼는 듯했다. 단 몇 시간 만에 요새의 한 층이 박살 났다. 나인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요새는 무너졌을 거다.

나인과 이 일로 상담하고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이다.

찢긴 사지와 몸을 수복한 후에 돌아보니 벽이 온통 내가 흩뿌린 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육편 조각들. 그리고 내장들. 나인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은 후 펠런은 황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일을 자신이 저지를 줄 몰랐다는 듯, 내게 이런 짓을 벌일 거로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고 했어.”

펠런이 움찔 굳고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놈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욕구는 닮았다고 했던가? 내가 저항하지 않으면 놈은 나를 찢기보다 꺾고 누르는 데 집중했다. 그게 더 기분도 좋겠지.

“흐, 윽!”

놈이 내 어깨를 짓씹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팔과 가슴을 긁었다. 마법을 쓰고 회복해도 녀석에게 당하는 그 순간의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다.

신음을 참지 않으려고 한다. 보아하니 이성을 잃은 놈은 내 신음을 좋아하는 듯, 참으려 하면 소리를 낼 때까지 나를 괴롭혀댔다. 변태 같으니라고. 어디서 이런 걸 배웠는지…….

짧게 기침을 하는 나를 보며 놈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아, 빌어먹게 귀엽네. 아마 내가 펠런을 놔두고 도망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 미모 때문 아닐까. 정말 미모가 살렸다. 빌어먹을 마왕 자식.

놈은 느리게 식사한다. 말 그대로 식사다. 내 몸을 물어뜯고, 잇자국이 남도록 질겅거린다. 자국이 남는 걸 좋아하는 눈치라 출혈이 심하지 않으면 얕은 상처는 내버려 뒀다가 놈이 떠난 후에 치료한다. 특히 목과 어깨. 그리고 손목과 발목에 잘 남긴다.

한 번은 치아로 아킬레스건을 물어 뜯어버려 몇 번이고 치료해야 했다. 결국, 치료할 때마다 물어뜯길래 나중에 치료할 셈으로 내버려 두고 박히는 내내 기어 다녔다.

“오늘도, 그럴 거야?”

나는 펠런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성이 없을 때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짐승에 가깝다. 원작에서 마왕이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내가 문제인 걸까. 용사가 옆에 있어서?

물어뜯긴 자리가 욱신거렸다. 요즘 하도 물려서 조금 버틸 만한 것이 이 정도다. 온몸에 선명하게 난 잇자국과 맹수가 긁어둔 것처럼 핏물 맺힌 손톱자국을 놈이 만족스레 내려다봤다. 놈이 짓누르고 움켜쥔 자리마다 시퍼렇게 피멍이 드는 것 정도는 무시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곧장 펠런의 성기가 뒤를 꿰뚫었다.

“큭, 읏, 흐읍!”

놈이 오기 전 직접 풀어뒀음에도 고통스럽다. 나는 어금니를 뿌드득 물고 격통을 억눌렀다. 자꾸 튈 것 같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짧게 호흡을 내뱉으며 근육이 이완될 때까지 버텼다.

그러나 어림없지. 이 빌어먹을 마왕 놈은 제 성기를 자를 듯 꽉 조여 무는 내벽에도 아랑곳없이 성기를 깊이 처넣고 거칠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아, 윽! 크, 흐윽! 으, 흣!!”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 나는 다급하게 카펫을 움켜쥐고 거칠게 쓸리는 몸을 지탱했다. 부드러운 융단에 유두와 성기가 쓸렸다. 머릿속을 아찔하게 채우는 지독한 고통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쾌감을 억지로 쫓는다. 그러지 않으면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으니까.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펠런은 이제 나를 보고 맨정신일 때보다 이성을 잃을 때가 더 많다.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마법사 링크를 통해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때는 통신만으로도 놈이 이성을 잃는 예도 있었다.

놈의 두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쥔다. 양쪽 검지가 동시에 유두 구멍 안으로 파고들어 함몰된 것을 끄집어내듯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고통스러워야 할 텐데 짜릿한 쾌감에 나는 놈의 성기를 물고 있는 뒤를 꽉 물었다. 쯔걱, 찌걱대는 젖은 물소리가 적나라하다. 이미 안에 젤을 발라둔 덕에 내벽이 찢어지는 일은 없었다. 놈의 숨소리. 그리고 체향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아, 으응, 거기. 거기이. 좋아. 흣, 흐앙! 아, 깊어. 더, 어어.”

스스로 보채듯 놈의 성기를 깊이 머금었다. 구부러진 결장 안쪽에 귀두가 파고든다. 핏줄 도드라진 놈의 성기에 달라붙은 내벽이 발씬거리며 조이고 이완했다.

괜찮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 놈이 나를 보고 욕정한다. 나를 원한다. 이성을 잃은 이상 지금 이 욕구는 놈의 속임수가 아닐 거다.

“…유, 마.”

“…응. 있어. 여기 있어.”

모처럼 행위 중에 내 이름을 부르는 펠런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웃으며 놈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얼핏 떠오르는 것 같았던 놈의 이성은 다시 깊이 침잠한다.

나는 어깻죽지를 물어뜯는 놈의 이에 신음하며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기분 좋아. 상관없다. 다소 난폭한 행위긴 해도 아직 버틸 수 있다.

난폭하게 흔들리는 몸에 다른 손을 뻗어 스스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놈이 물어뜯는 것이 좋다.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구는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성을 잃은 시점에서 슬쩍 엉덩이를 몇 번 노려보긴 했지만, 놈의 저항이 너무 격렬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한 번 정도는 내게 양보해 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 놈의 이성과 본능 모두 철저하게 엉덩이를 수호하는 중이다. 왜 내 엉덩이는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는 걸까.

“아, 아아, 나, 와. 나와앗!”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놈과 몸을 섞은 탓에 내 몸은 지독하게 민감해졌다. 빛의 신이 이러라고 준 건 아닐 텐데. 뭐, 상관없지.

갈라진 목소리로 울며 나는 카펫에 정액을 몇 번에 걸쳐 사정했다. 그러나 내가 먼저 간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절정 직후 예민해진 몸도 아랑곳없이 펠런은 오히려 조금 이완된 내벽 더 깊이 자신의 성기를 쑤셔 넣었다.

바닥에 깔려, 가슴팍까지 흥건히 적시는 내 정액 냄새와 카펫에 귀두가 쓸려 묽은 액을 줄줄 쏟으며 다시 절정한다.

“미, 친. 또. 가아아. 앗, 아… 흐으…….”

체액이 얼굴까지 튄다. 그리고 다시 전립선을 뭉개듯 내벽을 짓누르는 놈의 성기에 쾌감이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고 몸을 두들기는 파도처럼 내 몸을 쾌감이 씹어 삼켰다.

치료는 할 수 없다. 지금 하면 기력도 되찾는다. 이 빌어먹을 짐승은 내 상태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되 죽이진 않았다. 놈에게 남은 나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아니면 먹기 좋은 음식을 아껴 먹을 생각인지 모르겠다.

다시 절정이 온다. 나는 혀를 빼물고 흐느끼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머릿속에 불꽃 같은 것이 몇 번이고 점멸한다. 너무 힘을 준 근육이 파들파들 떨린다. 적과 사흘 밤낮을 싸워도 버틸 수 있는 근육인데 섹스만큼은 오히려 하면 할수록 더 지독하게 개발되고 만다.

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안에서 강하게 맥동하는 것을 재촉하듯 힘주어 허리를 원 그리듯 문질러 비볐다. 제발 빨리, 해.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걸 알지만 제발.

“흣, 후우… 큭!”

애원이 통하기라도 한 듯 놈이 사정했다. 내벽을 역류하는 놈의 체액에 나는 움찔움찔 몸을 떤다. 결국, 몇 번이고 가버린 탓에 놈과 함께 사정하며 묽은 정액을 툭툭 쏟는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싶지만, 여전히 뒤에 놈의 성기가 박혀 있어서 엉덩이만 위로 치켜든 꼴이다.

저 빌어먹을 녀석은 이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성기를 빼내지도 않고 장난치듯 앞뒤로 비비며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제 정액을 만족스레 바라본다. 위로 휘어진 단단한 귀두가 느끼는 곳을 스칠 때마다 앓는 소리가 나온다. 빌어먹을 제기랄.

결국, 오늘도 섹스는 새벽녘이 되어야 끝났다.

반쯤 기절한 나를 방치하고 놈이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픈 탓인지 입맛을 다시며 방 밖으로 떠난다. 뒤처리하는 법은 없다. 그건 이성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래도 상관없다.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 펠런뿐만이 아니니까.

나는 투덜거리며 반쯤 기듯 욕조로 기어갔다. 간신히 의식을 끌어모아 상처투성이 몸을 치유한다. 그래도…….

어깨에 놈이 물어뜯은 상처 하나는 남겨 두도록 하자.

놈이 미쳐가니 나도 미쳐가는 모양이지. 욕실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나는 낄낄 웃는다.

정액에 흥건히 젖은 몸. 수련을 빼먹지 않아 근 손실은 오지 않았지만 뭔가 다르다. 전사의 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싸우면 내가 이겨.”

너무 울어 갈라졌던 목소리도 회복하면서 되돌아왔다. 나는 수도를 틀고 따뜻한 물을 받아 물 덩어리를 만들어 스스로 뒤를 씻었다.

놈이 하는 것처럼 섬세하진 못하다. 덕분에 제멋대로 안쪽 깊이 물 덩어리가 파고든다. 그래도 이런 일로 발정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펠런 놈이 착실하게 내 몸을 개발한 탓이다.

같이 자고 싶었는데.

…라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내가 씻는 짧은 시간 사이 정액 냄새 흥건하게 밴 카펫은 새것으로 교체가 되고 환기를 위해 누군가 창문을 열어뒀다.

아침 식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다. 요즘 아침을 거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펠런 때문이다.

나는 뭉그적거리며 침대로 기어들어 가 시트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같이 쓰는 방이라서 그런지 펠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 문제라는 걸 안다. 그런데 어쩌겠어. 해결할 방도가 없는데. 이건 종의 문제다. 놈이 마족이고 내가 인간이어서, 더 자세히 보면 내가 빛의 대리자고 놈이 어둠의 사도라.

끝내주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런 심정일까. 그래도 약 먹고 죽는 결말은 싫은데. 애초에 해독이 있어서 약 먹는다고 죽지도 않고.

숨죽여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지만 잠은 자지 않는다. 아직 잘 수 없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펠런에게 통신이 온다.

- 상태는 괜찮나? 세척은 했고?

- 멀쩡해. 치료도 끝났고 물로 정액도 다 긁었고.

- 아침 식사를 침실로 가져가라, 말해둘까.

- 지금은 졸려서. 대신 일어나서 점심을 아침 못 먹은 만큼 거하게 먹을 거야.

- 어제저녁을 먹지 못했으니 두 끼나 굶는 거다.

- 그럼 두 끼만큼 더 먹어야겠네.

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바로 직전까지 놈과 체온을 나눴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펠런과 만난 기분이 들까.

나를 만족할 때까지 맛본 후 펠런은 이성을 찾는다. 그렇다고 계속 옆에 머무르거나 다시 돌아오면 아까 있었던 일의 반복이다. 그래도 오늘은 제법 길게 버텼으니 점심은 같이 먹고 싶다.

나를 안고 난 후 이성을 되찾을 때마다 놈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놈의 얼굴에 침착하게 주먹을 꽂으며 사과할 시간에 빨리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지.

놈이 이성을 잃은 것마저 놈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솔직히 조금 즐기는 것도 있고.

그래도 점점 더 심해지는 건 싫다. 놈과 제대로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싶다. 그리고 놈을 끌어안고 자고 싶다.

- 자나?

- 졸려서……. 잠깐 졸았나 봐.

생각이 뚝뚝 끊겼다. 조는 걸 알아차린 건지 놈의 목소리가 한층 낮고 부드러워졌다.

- 그래도 연결 끊지 마. 목소리 들었더니 좋아.

- 나도 그렇다.

- 얼굴도 보고 싶고, 안고 자고 싶고 그러네.

- …….

- 키스도 하고, 같이 밥 먹고. 내 뺨을 어루만져 주는 거 좋아.

눈이 자꾸 감겨 차라리 눈을 감았다. 손을 뻗어 아릿하게 통증이 남은 어깨 상처를 어루만진다. 놈이 남긴 상처가 내겐 유일한 키스 마크 같다.

잠들기 직전 흐릿한 기억에 놈이 내게 낮게 대답했다.

- 나도 그렇다. 유마.

* * *

점심 먹기 전에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한나절을 잠들었다. 여기 감금당한 후에 잠이 많이 는 것 같다.

물론 변명할 수 있다. 펠런이 이성을 잃으면 거의 온종일 놈에게 붙잡혀 시달린다. 마왕이나 되는 분이 이런 곳에서 이런 일로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건가 싶지만, 오늘도 여전히 오후 두 시면 은룡이 날아가고, 어디선가 와이번 부대와 마족 병사들은 훈련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금 당장 펠런이 쥐고 있는 무기 다 내려놓고 북부 산맥으로 돌아가서 한랭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자 개발에 힘쓰자, 라고 말하면 그렇게 따를 놈들이라는 거다. 제국 정벌을 위해 수년간 비경에서 훈련을 받고 군대를 창설했다 하더라도.

개미 혹은 벌에 가까운 맹목적인 충성심에 나는 감탄했다.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가진 놈이 내 친구라네? 이쯤 되면 친구인지 애인인지 모호하지만 뭐 어쩌겠어. 아직 나는 놈에게 고백하지 않았고, 고백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전까지 우린 몸 섞는 친구다. 아니, 친구지만 자주 몸을 섞는 거다.

“제 말을 곡해해서 들었군요.”

“아니. 잘 알아들었어. 펠런이 마족 중 제일 강하다는 거.”

“잘못 들어놓고 뻔뻔하네요.”

“아니, 강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

전투 고릴라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는 나인의 시선에 나는 뻔뻔스레 턱을 치켜들었다. 뭐, 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두가 뭔지 아냐? ‘A랑 B랑 싸우면 누가 이겨?’이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녀석은 누구일까?’다.

솔직히 나도 아직 나랑 펠런이랑 빌어먹을 계약이나 애정 관계 다 버리고 오로지 승부를 위해 전력을 다하면 누가 이길지 장담하지 못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다고 그러냐.

“극단적으로 말하면 왕께서 마족들에게 이제 다시 칼을 들고 싸우지 말라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분의 말을 따를 거라는 점이 문제인 겁니다.”

“아니,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네. 의심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런 명령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명령했다면 그게 타당한 거라고 믿었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왕은 모든 마족의 신인 어둠의 사도이니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건 곧 어둠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니까요.”

느지막한 오후, 나를 찾아온 나인을 마주 보며 나는 끙 앓는 신음을 토했다.

펠런은 앞으로 며칠 요새를 떠나 북부 산맥에서 고위 마족들과 만난다고 했다. 너무 늙어 비경까지 거동이 불편한 고위 마족들을 위해 친히 마족들의 땅을 방문하시는 거라고 했지. 대통령 행차보다 거창한 분위기에 조금 질리기도 했다.

“최근 두 달간 왕께서 당신과 합작해 박살을 낸 요새의 물품 목록을 알려드릴까요?”

“그건 내가 한 게 아닌데? 펠런이 덤비길래 어쩔 수 없이 반격한 것뿐인데?”

“왕도 목록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유도요.”

펠런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박살 낸 요새의 물건 때문이 아니다. 나인이 뭘 재촉하고 있는 건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디 가지 못하도록 왕께서 내게 감시를 명령하셨습니다. 소중한 인간을 인질로 잡았으니 어디 가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계시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신 거지요.”

“…….”

“사실 왕께서 북부 산맥을 방문하시는 틈에 당신을 인간의 땅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봤자 왕을 부수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펠런이 나를 지키라고 명령했지.”

“예. 그리고 왕께서 원하신다면 설혹 그 결과가 왕의 옥체에 해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는 것이 바르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을 그 몸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거겠지요.”

요즘 들어 펠런은 통신도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놈의 기색이 흉포하게 바뀌고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섹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내 몸을 찢는 경우도 왕왕 있다.

다만 그 경우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놈은 오로지 내 힘줄을 끊는 것에 몰입했으니까. 그래서 종국에는 사지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놈에게 박혀 달랑거릴 때도 있었다.

펠런이 망가졌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놈이나 나나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도 아직 괜찮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다. 곧 둘 다 파멸할 걸 아는데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해결할 생각이 둘 다 없는 거다.

“떠나라고?”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합니다.”

“앞으로 며칠, 펠런이 여기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동안 떠나라고?”

“왕께서 자신의 목숨보다 당신을 더 원하신다면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옳지요.”

동문서답이다. 그러나 나는 나인의 말에 숨은 뜻을 읽었다. 떠나야 한다. 그래야 펠런이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다.

“내가 떠나겠다고 하면 막을 수밖에 없겠네?”

“막을 겁니다. 그리고 용사인 당신은 나보다 강합니다. 저는 왕의 명령을 지키다가 죽겠군요.”

“대단한 충성심이네.”

“예. 펠런은, 나의 왕은 당신처럼 될 수 없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적수에 대한 증오를 희석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누구였죠? 아, 산파였지요. 그다음에는 유모, 그리고 병사. 자허 블리스 이전에는 어거스트 엑사 드로젠. 빌어먹을 여신이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당신에게 한 짓을 보십시오.”

“…뭐? 내가 누구라고? 어거스트? 산파?”

갑자기 튀어나온 뜻 모를 정보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구라고? 의아해서 나인을 바라보자 나인은 나보다 더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통증이 없습니까? 내 말이 제대로 들리는 겁니까?”

“들리지, 당연히. 나보고 자허 이전에 어거스트였다며. 그리고 유모고.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계속…….”

그 모든 이방인이 전부 나라고?

숨이 턱 막혔다. 그것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헝클어져 있던 퍼즐이 맞춰졌다. 펠런이 나를 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도, 내가 용사로 다시 환생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것도. 그 무뚝뚝한 놈이 내 성격에 자연스럽게 맞춰준 것도.

그렇다면 나는 몇 번이나 펠런을 죽이려고 한 걸까.

“그렇군요. 이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군요. 계약한 탓일까요? 아니면 이제 용사가 되었으니 제약이 사라진 걸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전 생의 기억은 있습니까? 아, 그렇죠. 자허 블리스 외의 기억은 없는 것 같군요.”

나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문하고 자답한다. 마법사 특유의 좋은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놈이 멋대로 결론을 내리기 전 나는 복잡한 머릿속에서도 짧게 한 마디를 지껄였다.

“아냐. 빛이 그랬어. 나를 묶어둔 실이 끊겼다고.”

“…실이 끊겼다고요?”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서 살의를 선물했다고 했지. 살의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미래에 대한 정보도 줬고, 마지막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숙명의 상대와 연결해 줬다고 했어. 그런데 끊겼어. 실을 다 끊어버렸거든.”

“좀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눈만 굴려 나인을 바라봤다. 심란하지만 지금은 방황할 때가 아닌 듯했다. 나는 침착하게 빛이 내게 남긴 말을 떠올려 나인에게 전했다.

“어둠의 사제와 계약을 했기에 빛과의 연결이 끊겼다고 한 건가요.”

“그렇게 말했어. 어차피 계약 때문에 이번 내기는 자신이 질 테니 나와 연결이 끊겨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지.”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는 대접이다. 빛이 내 분별력을 낮춰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빛의 신에게 삿대질도 하고 육두문자도 날렸을 거다. 신성모독이라고 다시 환생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으로 끝났을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이전에 받은 건 다 끊겼어. 이제 놈을 봐도 처음 봤을 때처럼 살의를 느끼거나 하지 않…….”

그렇구나. 이거구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나인을 바라본다. 이 영리한 마법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파악하고도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건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빛의 신과 연결이 끊긴 이유는 어둠의 사제와 계약했기 때문이야. 영혼을 걸고 마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지.”

“…설마 정말로 우리의 왕에게 당신이 한 맹세를 하게 할 셈입니까?”

거봐,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한 거잖아. 나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다.

“펠런이 빛의 사제와 계약을 하면 돼. 영혼을 걸고 용사를 죽이지 않겠다고 계약서를 쓰면 어둠과 연결이 끊어질 거고, 그때 나처럼 이성을 잃고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게 될 리가 없잖습니까. 설사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연결이 끊긴다는 확신도 없고요.”

“가정이잖아.”

나는 단박에 놈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저었다.

“뭐든 하고 싶어. 그래야 해. 아니면 너를 죽이고 달아나라는 소리잖아. 그러고 싶지 않아. 너를 죽이는 것도 싫고, 그보다 더 싫은 건 이대로 떠나서 펠런 자식을 영영 못 보는 거지만.”

나인이 질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나도 내가 미친 소리를 하고 있음을 안다. 확신도 없고 문제가 더 커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어봤자 남는 건 탈주하는 결말뿐이다. 그러고 싶지 않다.

“자허로 죽기 전에 펠런에게 한 말이 있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예,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어쩐지 체념한 것 같은 놈의 말투에 나는 씩 웃었다.

“내가 한 말인데 나라도 지켜야지. 안 그래? 괜찮아. 내가 잘 아는 고위 신관이 있어. 자유무역 도시에 계시는 분인데 나랑 아주 친해.”

친하다마다. 대신관 토드는 심지어 나를 보고 무릎 꿇고 울기도 한 분이다. 지금쯤 용사가 실종되었다는 정보를 받고 쓰러지진 않았을까 걱정이다. 직접 찾아뵙고 내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겸사겸사 마왕도 만나게 하고 말이지.

“나를 감시해야 한다고 했지. 잘됐네. 나랑 같이 가자. 너는 나를 감시할 겸, 나는 너를 써먹을 겸.”

이상하게 나인 앞에서는 뻔뻔스럽게 굴 수 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이다. 마른세수를 하던 나인이 나를 보며 짧게 욕설을 지껄였다.

“빌어먹을, 당신은 미쳤습니다.”

“알아, 나도. 그런데 이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더 미칠 것 같아서.”

하나 남은 구명줄을 움켜쥐듯 주먹을 꾹 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무렵 펠런에게 통신이 왔다. 나는 태연하게 통신을 받고 놈과 대화했다. 나와 거리가 멀어진 덕분인지 놈은 통신해도 이성을 잃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더 오래 펠런과 대화할 수 있었다.

- 거긴 추워? 사시사철 눈뿐이라던데.

- 춥다. 인간의 몸으로 버티기 어려운 혹한이다. 거의 모든 땅이 빙하와 얼어붙은 자갈로 뒤덮여 있지.

- 먹고살 작물도 없다는데 이참에 드로젠을 농경 구역으로 삼는 건 어때.

- 그렇지 않아도 그럴 셈이다. 필요하다면 상업 구역이나 산간 지대를 개척해서라도. 그만한 땅을 오로지 작물 재배에 집중하면 굶어 죽는 마수와 마물들이 많이 줄 것이다.

- 이제 좀 왕처럼 보이는데?

- 네가 없는 3년 사이 배워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놈의 베개를 끌어안고 나는 얼굴을 파묻었다. 베개에서 놈의 체향이 났다. 이상할 정도로 놈이 보고 싶다. 내일 아침이면 요새를 잠시 떠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신관을 여기 모셔와 펠런과 어둠의 연결을 끊는 방법을 찾을 거다.

찾지 못해도 나는 이곳으로, 펠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겠지만 말이다.

- 내 체감상 고작 몇 주 떨어져 있던 것뿐인데.

- 한 사람이라도 덜 외로워서 다행이다.

- 보고 싶다.

- …….

놈의 말이 끊겼다. 나는 웃으며 놈의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 만나면 또 이성 잃을 거 알아. 그리고 멋대로 탐하겠지. 상관없어. 그래도 너랑 몸이 닿을 때가 가장 좋아. 네 냄새를 맡고 네 목소리를 듣고, 네가 나로 흥분하는 게 기뻐.

- 네게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다.

- 그래서 네가 쫓아내도 난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야.

- …고백인가?

- 고백은 반지와 함께라고 했지?

틈을 놓치지 않고 묻는 놈을 떠올리며 낄낄 웃었다. 놈의 베개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눈을 감고 있으면 바로 곁에 놈이 있는 것 같다.

괜히 야한 기분이 들어서 한 팔로 놈의 베개를 끌어안고, 다른 손을 슬쩍 바지 안에 밀어넣었다. 통신이니까 이런 짓을 해도 놈에게 들키지 않겠지. 나는 눈을 감고 놈에게 속삭였다.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네 목소리 더 듣고 싶어.

- 반지는 장식이 없는 것이 좋겠지?

- 무기를 휘두르려면 보석은 없는 게 좋아. 이왕이면 매끈하게 빠진 거로. 얇아서 내가 창을 들고 휘두르는 데 지장이 없게, 언제든지 하고 다닐 수 있게.

- 원하는 금속은 있나?

- 금도 좋고 은도 좋고 부러지지 않는 거면 뭐든 좋아. 아, 사실 전에 네가 이성 잃었을 때… 넌 기억 안 날지 모르겠는데 내 왼손 약지 계속 깨물더라.

- …….

- 그게 반지 자국 같아서 좋았어.

-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잠시 이성이 돌아왔을 때라서.

- 그럴 줄 알았다. 존나 스윗하게 미친 줄 알았잖아.

성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둥을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위로 훑자, 손안에서 부피를 키웠다. 나는 낮게 신음하며 펠런에게 다시 통신했다. 흥분한 탓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펠런을 위해서라지만 내일 아침 여길 떠나야 하기에 긴장한 탓도 있을 거다. 통신을 타고 신음이 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내가 멋대로 굴게 하는 데 한몫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