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마왕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좋은 점이 있다면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욱신거리는 통증 말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이 잘린 것치고 상당히 버틸 만해서 나는 내가 팔을 잘리는 꿈이라도 꾼 줄 알았다.
푹신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왠지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냄새가 나는 방이다. 머리를 굴리다가 이 냄새를 나인의 요새에서 맡아본 적 있다는 것까지 기억해 냈다.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다.
눈알만 굴려 옆을 본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펠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와 대조적인 검은 눈. 새까만 눈에 옅게 웃음기가 비쳐 나는 간신히 들이쉰 숨을 뱉었다.
“…놀랐잖아.”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는 사람 그렇게 관찰하는 거 아니야. 심장 떨어지면 어쩌려고.”
“이런 일로 죽을 정도로 네가 약할 것 같지 않아서.”
“죽진 않아도 놀라. 평범하게 놀랐고.”
“너무 오래 기다려서 그런 거다. 3년은 너무 길었다.”
놈과 대화하며 막연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다. 놈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여기 어디야?”
“비경 안의 요새다. 네가 머물던 방이고.”
끄응, 앓는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키려다 고꾸라졌다. 이상할 정도로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슴까지 덮은 얇은 이불을 걷었다.
흰 면바지와 셔츠. 그리고 맨발. 허리 아래까지 늘어진 백금의 머리카락과 내가 길들이지 않았어도 여전히 단단한 왼손. 그리고 뭉툭하게 잘려나간 오른팔.
“…내 오른팔은 어디에다 뒀냐?”
“탁자 위에 올려뒀다. 가져다줄까?”
“내가 가져오지 뭐.”
“내게 시키는 편이 좋을 텐데.”
몸을 돌려 탁자 위를 본다.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매끈하게 절단된 팔이 조형물처럼 이상하게 보였다. 저거 저렇게 두면 썩거나 마를 텐데. 잘 붙을까?
잘려나간 부위가 있으면 붙이는 편이 좋지만 잘려나간 시간이 길면 차라리 새로 재생시키는 게 나을 때도 있다고, 선물로 학습한 신관의 힘이 내게 말했다.
“나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으, 악!”
침대를 벗어나기 무섭게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팔 하나 잃었다고 이 정도로 균형감각이 무너지나? 그럴 리 없다. 사지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갓 태어난 새끼사슴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와 한쪽 팔에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의자 위에 앉아서 나를 관찰하는 펠런을 봤다.
놈의 표정은 전과 같다. 덤덤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옅은 미소도 그린 것처럼 똑같다. 그 모습을 보고 올올히 팔다리에 잔털이 곤두섰다.
목 뒤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에 나는 더듬거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쪽 팔로 침대 시트를 쥐고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힘을 줬다. 그러나 사지가 내 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하며 마법을 쓴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뭔가에 막힌 것처럼 어떤 마법도 내게 깃들지 않았다. 정화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잖나. 내게 시키는 편이 좋을 거라고.”
놈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나를 들어 올렸다. 발끝이 양탄자에 쓸렸다. 그 사이 키가 큰 걸까. 훤칠하게 성장한 내 새로운 몸과 비교해도 머리 반 개 정도 키 차이가 났다. 나는 코앞에 다가온 놈의 새까만 눈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본다.
놈이 나를 침대에 앉혔다. 제대로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어준 후 다시 이불을 아랫배까지 덮어줬다. 나는 입을 연다. 그러나 뭘 물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펠런이 잘린 팔을 내게 내밀었다.
“회복은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괜찮아. 그거 없어도 회복할 수 있어.”
나는 잘려나간 팔꿈치를 손으로 감싸 기도했다. 지혈한 듯 뭉툭하게 짓눌린 상처 부위가 갑자기 터지면서 핏물이 후두둑 시트 위로 쏟아졌다. 고통은 거의 없다. 손가락을 재생할 때 느꼈던 통증을 떠올려보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지금이 오히려 이상하다.
빠르게 재생된 팔이 피투성이다. 나는 오른손을 쥐었다 펴보며 상태를 살폈다.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지 뭐야,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기 때문일 거다. 마치 전신 마취에서 방금 깬 것 같다.
“내게 무슨 짓을 했어?”
“…….”
간신히 고개를 돌려 펠런을 바라봤다. 조금 전 팔을 재생할 때 튄 피가 놈의 흰 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놈은 자신이 쥐고 있던 내 오른팔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탁자 위에 올려뒀다. 피 묻은 시트를 바라보던 놈이 시트를 걷었다.
“새 시트를 준비해 주마. 배는 고프지 않고?”
“내게 무슨 짓을 했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놈에게 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평온하다. 너무 화가 많이 나서 그런 걸까? 이성을 잃고 화를 내봤자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지금처럼 상대가 맛이 간 것 같을 때는 더더욱.
“마법을 조금 썼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다시 풀어줄 테니. 그전까지 넌 쉴 필요가 있어.”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지.”
“그래.”
펠런이 손을 뻗고 내 뺨을 어루만진다. 무의식에 각인된 습관은 무서워서 나는 놈이 손에 내 뺨을 비볐다.
“오랜만이다. 유마.”
놈이 내 이름을 말한다. 나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이야. 펠런.”
놈이 옅게 웃었다. 그 웃음만큼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보며 나는 안도하는 대신 오한을 느꼈다. 내가 몸 상태가 좆같긴 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신머리까지 박살 나진 않은 것 같다.
뭔가 옳지 않다. 일이 잘못된 것 같다. 그렇지만 뭐가 잘못된 건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손에 닿으면 녹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실처럼,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불안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나는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재생한 팔을 쥐었다 펴보며 동떨어진 감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끝도 없다. 마왕으로 각성하며 놈이 미친 건지, 아니면 지난 3년간 놈의 정신을 부술 만한 혹독한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꼬박 하루 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지?”
“모르겠어. 배는 고프지 않은데. 싸우느라 힘들었나?”
펠런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조금 나이를 먹었나? 그래 봤자 3년 정도라 어디가 어떻게 바뀐 건지 모르겠다.
놈이 내 몸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가온 후 나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셔츠 너머 놈의 체온이 따뜻하다. 놈이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내 허리와 등을 단단히 붙들었다. 마치 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미아처럼 절박하게.
나는 간신히 팔을 들어 놈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연습하다 보면 곧 이 무뎌진 육체의 감각에도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놈처럼 나도 강하게 끌어안아 주고 싶은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
“…와줬으니 괜찮다.”
내가 돌아올 거로 생각했던 건가? 용사로 환생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건가? 희미하게 내 안에서 의심하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맞는데.
겁이 났다.
살아 돌아왔으니 된 거 아닐까? 나는 오랜만에 맡는 펠런의 체향에 몸에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여신이 이 세상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했을 때 내가 원했던 것은 이미 이뤘다. 펠런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얼굴에 억지로 힘을 줘 웃었다. 그리고 놈의 검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나를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갑갑하긴 해도 아프지 않다. 나는 고개를 돌려 놈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보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곤란하게 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조곤조곤 속삭이듯 놈에게 말한다. 놈이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내 욕설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독하게 마음을 먹었구나. 나 역시 놈을 바라보며 여전히 웃는 낯으로 경고했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도 당장 이거 안 풀면 가만 안 둔다.”
“상대를 협박할 때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통한다. 유마.”
“…평생 이렇게 내 사지를 묶어둘 셈이야?”
“언젠간 풀어주겠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사람처럼 말한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니까. 이 개자식아. 당장 돌려놔.”
“전투에서 진 건 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네 처지는 포로고. 포로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사령관은 없다.”
“정말 적처럼 굴어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내 목을 타고 미끄러졌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스스럼없이 내 셔츠 단추를 툭툭 푼다. 섬뜩한 예감에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어 놈의 가슴팍을 밀었다.
그러나 놈은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 마.”
“이제 내가 싫어진 건가?”
펠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다. 그러나 나는 놈의 물음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차고 서늘해 보이는 검은 눈이 한밤중 어두운 창처럼 나를 반사했다. 나는 놈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혼란스럽고 당황한 윤유마.
“…극단적인 말 하지 마.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으로 너랑 섹스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셔츠 단추를 풀었다. 풀어 헤쳐진 셔츠가 놈의 손에 잡혀 바닥에 나뒹군다. 놈의 손이 내 바지를 내렸다. 오소소 소름 돋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이제 고작 내 것이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내 어깨를 깨문다.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한 건 너다.”
“…내가 하지 말라는 짓까지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 말만 남기고 넌 가버렸지.”
“…빌어먹을.”
어금니 꽉 물고 나는 진저리쳤다. 쇄골에 닿는 놈의 입술이 너무 뜨거워서, 그리고 놈의 말이 내 양심을 후려쳐서.
“나를 포로로 얻은 김에 네 성욕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 건 이해하는데 이 빌어먹을 자식아. 몸만 얻고 싶어? 미움받고 싶어서 작정한 거야?”
“…….”
“이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것도 서로 합의하고 해야 좋은 거지 인마. 내가 너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가르쳤어?”
“…아니라고 생각하나?”
“…….”
“얌전히 지내면 내게 돌아와 주겠다고 한 것도 너 아니었나?”
나를 이렇게 키운 건 팔 할이 자허 블리스라는 시선으로 펠런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내 사지만 약하게 만들어둔 건지 양심만큼은 욱신욱신 쑤셨다. 아 젠장 빌어먹을.
놈과 만나면 원 없이 대결하고, 그리고 짜잔 내가 바로 유마였습니다! 하고 외친 후에 오랜 회포를 풀며 대화할 줄 알았지. 물론 언젠가 야한 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게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너를 안고 싶다.”
놈이 덤덤히 토로하며 속옷을 벗겼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펠런에게 나는 뭘까. 3년간 기다려서 얻은 노획물? 아니면 저승에서 돌아온 친구? 미련이 남은 사랑일 수도 있고 적수인 용사기도 하겠지. 나는 체념하며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을 풀었다.
“마음대로 해. 노획물을 삶아 먹든 찢어 먹든 패자가 승자에게 뭐라고 하겠냐.”
이런 일을 당한 사람치고 내 반응이 너무 무덤덤했을까. 나를 바라보는 펠런의 표정에 의아함이 얼핏 보였다. 놈의 옆에 오래 머물렀던 내가 아니라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당혹감에 나는 조금 안도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아직 네게 뭐라도 되긴 하는 모양이구나.
“무슨 생각이지? 도망칠 계획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생각 없잖아. 그런 놈을 앞에 두고 외쳐봤자 내 입만 아프지.”
“…상황이 안정되면 마법을 풀어주겠다고 했을 텐데?”
저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른 놈들 앞에서는 착실하게 연기할 수 있는데 이놈 앞에서는 어렵다. 부아가 치밀어서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놈을 추궁했다.
“태도 똑바로 해. 펠런. 나와 적이 될 각오를 하고 이런 짓을 한 거잖아. 이런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네게 호의적일 거로 생각한 거 아니잖아. 미움받아도 상관없다며? 그러면 끝까지 뻔뻔하게 굴어. 통하지도 않는 변명하지 말고.”
놈의 눈이 잘게 떨렸다. 색 짙은 검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짧게 실소했다. 생각해 보면 놈과 나 사이에 있는 애정인지 우정인지 알 수 없는 관계의 근본은 거짓말이다.
나도 놈을 속이고 놈도 나를 속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도 상대의 패를 읽는 데 실패한 내 패배라고 여기고 놈을 마음껏 미워하면 된다.
놈은 내가 용사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용사에게 살수를 날리지 않은 것, 내가 말하기 전에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자허 블리스가 죽기 전에 놈이 보였던 모호한 대답까지도 놈이 내가 용사가 되어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나를 가뒀나? 내가 용사로 각성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펠런이 고개 숙여 나를 응시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놈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뻗어서 놈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 미끄러지는 머리카락이 예전처럼 매끄러워 촉감이 좋다. 나는 펠런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만지작거리며 놈에게 말했다.
“계기도 있겠다. 네가 한 말도 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게 정 떼려고.”
“…유마.”
“그렇잖아.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한 거잖아.”
쥐고 있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시트 위에 툭 떨어지는 팔에 잔경련이 일었다. 팔을 뻗고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놈의 말대로 마법을 쓴 건 아니다.
놈은 내가 여신에게 어떤 걸 받았는지 모르고 있는 거다. 중요한 패는 마지막까지 숨겨야 하니 지금은 입 다물고 놈이나 더 추궁하자.
“내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지?”
“…그래.”
“언제부터? 아카데미 때 알았어?”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는 말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 놈이 뭘 묻는 거냐며 시치미를 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놈은 내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놈의 손이 조심스럽게 나를 어루만졌다. 뺨과 입술을 감싼 후 문지르는 부드러운 손길 때문에 예전 아카데미 시절이 떠올랐다. 체감상 고작 한 달 정도 흐른 것 같지만 놈의 변화와 표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줬다.
그래서일까. 나는 놈의 손을 밀어내지 못했고, 가슴팍을 가로지른 손은 아무 방해 없이 아랫배와 허벅지를 세심하게 훑었다. 그 움직임이 부드럽다 못해 정중해서 야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놈은 정말 내가 여기 있는지 눈으로, 귀로 그리고 촉감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접근한 거냐?”
“그리고 너는 나를 죽일 수 없게 된 거지.”
“나인을 부추겨서 계약서에 서명하게 하고?”
“그곳에서 네가 죽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자허 블리스는 마왕이 각성하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 찾아올 거라고 그랬어. 그래야 효용 가치가 사라진 이방인을 용사로 만들 수 있으니까.”
빛은 말했다. 자허 블리스의 죽음은 예정된 일이었다고.
내 정강이를 어루만지던 놈의 손이 멈칫 굳었다. 흉계를 숨기고 내게 접근했다고 고백한 놈이 이런 일로 굳으면 쓰나.
손가락 사이 머리카락을 한 바퀴 감았다. 머릿결이 얼마나 좋은지 손가락을 놓자마자 스르르 풀렸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 잡아당겼다가 시선만 올려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나중에 용사가 될 거라는 거.”
“몇 가지 사건으로 짐작한 거다. 추측에 확신이 선 건 네가 계약서에 서명한 이후고.”
“대단하네! 우리 마왕님. 마족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는데, 몸까지 바쳐가며 날 회유할 줄이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것마저 거짓이라 생각하나?”
“…진지하게 이야기 중인데 훅 치고 들어올래? 너라면 믿겠어? 너에 대한 내 신뢰는 완전 바닥이에요. 바닥이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간다고. 지금까지 계속 속이고 또 속이고, 결국 나는 네 술수에 당해 여기서 이 모양 이 꼴이고.”
사랑은 사랑이고, 놈의 감정이 진짜라고 해도 놈이 나를 속인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게 정상인데 내가 생각해도 참 침착하다.
“그것마저 네가 믿지 못할까 하는 말이다.”
“맞아. 못 믿어. 왠지 알아? 지금도 네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것 같거든. 목적이 안 좋잖아. 과정도 나쁘고. 그런데도 믿는다면 내가 호구지.”
“…….”
“처지 바꿔 생각해 봐. 내가 이런 상황에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넌 믿을 수 있겠냐?”
딱딱하게 굳은 놈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얼굴에 힘을 풀었다. 배신감이 적어도 놈이 한 일을 무마할 정도는 아니다. 지금 놈이 뭘 해도 내게 닿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놈의 행동이 대륙을 완벽하게 점령하기 위한 초석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놈이 내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이제 놈과 내 손 크기에 차이가 거의 없다. 나는 의식해서 놈의 손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쥔다고 쥐었는데도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 이완제라도 투여한 걸까.
못된 녀석. 멋대로 굴고 싶으면 끝까지 멋대로 굴면 나도 마음 놓고 놈에게 실망할 수 있을 텐데. 놈이 하는 짓이 너무 어설프다.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나?”
“잘못했다고 빌어. 숨긴 거 다 말하고, 아직 숨기는 게 있다면 그것도 말해. 그리고 내 몸도 제대로 돌려놔. 우선 거기가 출발점이야. 그런 후에 너를 용서할지 말지 생각해 볼게.”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군.”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 우리 마왕님.”
여기 와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쉰 건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속 깊은 곳에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고, 나는 잘게 경련하는 두 팔을 좌우로 벌렸다.
“그래도 만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그것부터 하자. 이리 와. 널 안게 해줘.”
놈이 머뭇거리며 몸을 숙여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리웠던 놈의 향을 깊이 맡았다.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단단하게 근육 잡힌 놈의 견갑골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피부에 닿는 놈의 조금 서늘한 귀에 뺨을 문지르며 온 힘을 다해 놈을 끌어안았다.
“펠런, 내 이름 불러봐.”
“…유마.”
“…목소리 듣기 좋네.”
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열이 치밀어 오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놈에게 몇 번이고 속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놈에게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내가 용사인 모양이다. 답도 없는 호구 새끼라.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질 치는 새끼가 제일 나쁜 새끼라고 내가 말했던가?”
“…그래.”
“그럼 내가 너 미워해도 당연한 거지?”
악! 아악! 나를 끌어안은 놈의 팔에 힘이 들어가서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놈의 뿔을 움켜쥐고 밀쳤다.
파들파들 떨리는 내 손에 놈이 간신히 힘을 풀었다. 갈비뼈 으스러질 뻔했네. 으르렁거리며 놈의 이마에 딱밤을 먹여보지만 빌어먹을, 갈대가 스치는 것도 내 딱밤보다 강할 것 같다. 아니 말하는 거랑 행동하는 거랑 전혀 다르다고.
“미움받아도 상관없다며. 말 한마디에 대놓고 동요하면서 입은 청산유수지.”
“…정말이다. 미워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널 놔주지 않을 거다.”
“오, 존나 쓰레기 같은 말이다. 내가 좀 반골 기질이 있는 거 네가 잘 알 텐데 그렇게 말해도 돼?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고 그러네.”
놈이 옅게 웃는다. 그 표정이 지독하게 불길하고 어둡다.
“그래. 널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만약 네가 달아난다면 도망친 길을 따라, 그 주위의 인간은 모두 멸족시키며 너를 쫓을 생각이다.”
“…미친 새끼 아냐 이거.”
한숨을 내쉬고 다시 놈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빌어먹을 자식. 이런 말을 듣고 진저리가 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놈이 여전히 내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다.
그래, 아예 나를 버릴 작정으로 속인 건 아니구나. 슬금슬금 미끄러진 내 손이 놈의 탄탄한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유마.”
“지금 그럴 분위기 아니었어?”
모양 좋게 올라온 둔부의 감촉이 참 좋다. 검은 바지 한 장으로 가릴 수 없는 우월한 대퇴근을 만족스럽게 주물럭거려 봤다. 손안에 꽉 들어찬 단단한 근육 덩어리. 제길. 내 팔에 힘이 조금만 더 돌아왔으면 좋겠다.
“몸에 힘이라도 돌려주면 안 돼? 내가 정말 잘해줄게.”
“…….”
“몸이 바뀐 것 때문인지 내가 키도 크고, 덩치도 조금 더 커졌고, 그리고 다른 곳도 놀랄 만치 커졌거든?”
“…윤유마.”
그렇게 성까지 합쳐서 부르지 마라. 보호자에게 혼나는 것 같아서 위축된다. 나는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축인 후 놈의 허벅지 안쪽을 슬금슬금 어루만졌다.
“어차피 할 생각으로 벗긴 거잖아. 너는 해도 되고, 나는 하면 안 되냐?”
“그럴 리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 시도해도 좋다. 단, 나는 철저히 저항하겠지만.”
“사람 몸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저항까지 하시겠다?”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지, 네 몸은 나와 맞먹을 정도로 강하니까.”
“…진짜 하려고?”
먼저 엉덩이를 만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놈의 눈가에 불그스름하게 열이 올랐다. 밀착한 몸을 통해 놈의 맥박이 빨라진 것을 읽었다. 방 안 공기가 차가운 것도 아닌데 오한이 일었다.
나는 펠런이 새로 가지고 온 시트를 끌어당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이 부끄러워서 급소만이라도 가리고 싶었지만, 펠런 이 망할 자식이 자꾸 시트를 치워대니 어깨 하나 감출 수가 없었다.
“가리지 마라. 상태를 봐야 하니까.”
“큿, 내게 이런저런 야한 짓을 할 셈이지. 차라리 죽여라!”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한번 해보고 싶은 대사였다고.”
펠런의 손이 멈췄다. 실제로 말하면 천년 발정도 식게 만드는 회심의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통한 걸까? 의기양양하게 놈을 노려보며 슬금슬금 시트를 끌어당겨 봤다.
빌어먹을,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김없이 시트를 치운 놈은 아예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버렸다.
엉덩이를 희롱하는 내 손을 간단히 움켜쥔 펠런이 손가락 사이 깍지를 끼고 시트에 팔을 고정하듯 내리눌렀다.
졸지에 두 팔이 붙잡혀 빠져나갈 수가 없다. 놈이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과 입술이 닿기 직전 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상할 정도로 감질난다.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왜 망설여.
“미워해도 어쩔 수 없다며? 그것까지 거짓말이지. 멍청하고 겁 많은 펠런.”
“그래. 네가 내 유일한 두려움이라 그렇다.”
“…말은 존나 잘하는 펠런. 사람 설레게 하는데 뭐 있지 정말.”
놈이 속삭이는 말 한마디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만 너를 격정이고 두려움으로 본 게 아닌가 봐.
나를 몇 번이나 속이고 감춘 타인이 말하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야 하는데 왜 너는 내게 여과 없이 쏟아져. 왜 나는 그게 약인지 독인지 구분도 않고 온전히 받아 마시나. 놈의 말이 달고 향긋하다. 그래서 나는 울며 웃었다.
“아, 젠장. 네 앞에서 죽어도 울 생각 없었는데.”
죽어도 놈에게 우는 건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이다. 홀로 우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는 걸 보여주면 지는 꼴이 되니까. 윤유마로 살아오면서도 철든 이후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는데. 폭력이나 증오보다 애정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넘쳤다.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렸다. 태연한 척 대범한 척 구는 것도 여기까지구나. 나는 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틸 줄 알았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쉬울 거로 생각했지.
억울하고 분해서 얼굴을 가린 팔을 치우고 놈을 노려봤다. 놈이 표정이 찰나에 천변만화하는 꼴이 우습다. 그 얼굴도 일렁거리는 눈물에 일그러져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고인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뒀다.
“…유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처럼 놈이 머뭇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충혈된 눈을 어설프게 비비며 눈을 뜬다. 놈이 겁에 질린 것 같다. 허둥대던 놈이 내 손목을 움켜쥔다. 놈의 커다란 손에 붙들린 손목이 아프다. 으스러트릴 듯 쥔 강한 악력에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손목 관절에서 피부를 타고 뿌드득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픈 것보다 놀랐다.
어어, 하던 차에 놈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처박았다. 놈의 뾰족한 뿔이 목덜미를 세차게 긁었다. 칼날 같은 뿔 끝에 베인 목에서 실금을 타고 붉은 피가 흘렀다. 통증은 모르겠다. 그보다 놈의 이가 박힌 어깨가 더 아프다.
“아, 악!”
이빨이 살갗을 찢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니, 사람이 울면 달랠 생각을 해야지, 왜 물어. 네가 개야? 내가 아무리 너를 개새끼라고 속으로 욕을 했어도 진짜 개가 되면 안 되는 거 아냐? 라는 말을 외쳤던 것 같다.
그러나 놈의 귀에 닿지 않는 것 같다. 거친 숨소리가 정말 짐승처럼 걸걸해서 나는 눈물 섞인 침을 삼키고 몸을 뒤틀었다.
안 되겠다. 정화하자.
놈의 상태가 심상찮다. 어깨 상처에서 흘러넘치는 핏물을 마시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놈은 내게 마법을 써서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나도 여신에게 받은 마법 탓에 놈이 내게 한 것이 마법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경지에 이르렀다.
놈이 내게 쓴 건 독이다. 아마 수의근의 움직임을 저해하는 그런 물건이겠지. 독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 없다. 하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해독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판단은 짧고 행동은 더 빨랐다. 패를 꺼내는 것도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아끼다 썩는다. 눈 한 번 깜박거릴 시간이 지난 후, 내 몸에 쌓인 안 좋은 것들이 정화되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선 즉시 오른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놈의 관자놀이를 노려 강하게 후려쳤다.
쩌억―!!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내 주먹은 놈의 손에 막혔다. 빠르게 손을 회수한 후 침대를 박차며 상체를 일으켜 놈의 명치를 발로 찼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발끝에 닿는 느낌이 얕다. 타격을 받기 전 뒤로 몸을 뺀 거다. 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방어까지 가능할 줄 몰랐다. 이쪽은 나인과 한 빌어먹을 계약 탓에 전력을 다하지도 못하는데. 젠장, 미치겠다.
물린 어깨에서 흩뿌려진 피가 시트와 베개에 반원을 그리듯 점점이 얼룩졌다. 급하게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양 주먹을 쥔다. 독 때문에 흐트러진 마력도 돌아왔겠다. 쓸 수 있는 버프를 몽땅 내 몸에 때려 박았다.
어차피 나는 놈을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저주가 알아서 놈을 죽이지 못하게 내 힘을 조절해 줄 것이다.
“생각을 다르게 하면 편리하다니까?”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찼다. 눈 한 번 깜박거릴 시간 동안 버프를 거는 일은 끝났다. 놈에게 디버프를 걸어볼까? 아냐. 놈은 나인보다 강한 마법사다. 괜히 마력 소비하지 말고 나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자.
내 일격에 침대가 부서졌다. 제법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는데 유감이다. 반으로 쪼개진 매트리스에서 속을 채운 솜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호흡을 내뱉기도 전에 펠런이 반격했다.
매의 발톱처럼 틈을 노리고 파고드는 놈의 손을 팔뚝을 노리고 발로 찼다. 알몸으로 싸우려니 힘들긴 하다. 덜렁거리는 게 자꾸 허벅지에 부딪혀 아프기도 하고.
발등에 부딪힌 놈의 팔뚝은 차라리 쇠기둥을 차도 이것보다 덜 단단하겠다 싶을 정도의 강도를 보였다. 이성을 잃은 놈이 그 와중에 자기 몸에 버프까지 걸어둔 것 같다.
이쯤 되면 차라리 이성이 없는 편이 전투에 합리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낄낄 웃으며 내 옆구리로 꽂히는 놈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웃었다.
“야, 너 이 자식. 이렇게 싸울 수 있으면서! 국경에선 그따위로 싸워? 정신은 좀 나중에 차려도 되겠다!”
“…….”
“너도 그렇다고? 딱 좋네! 싸워보자고. 지는 쪽이 깔리는 거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조금 흥분했다. 내가 언제 이 자식이랑 이렇게 마음 놓고 싸워보겠어. 좋아하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상대할 때마다 손속에 사정 두던 놈이니 말이다.
전력을 다해도 놈이 죽을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수련을 통해 얻은 실력이 아니지만 상관없다. 그렇게 따지면 자허 블리스도 처음부터 내 몸은 아니었다.
착각일까? 지는 쪽이 깔리는 거라고 말한 시점부터 펠런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이 자식 제정신인 거 아냐? 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놈의 모든 수가 내 급소를 노리는 것에 의심은 빠르게 지워졌다. 잘못하면 여기서 죽을 수 있겠다 싶다.
여기서 죽을 수 없지. 이성 잃은 상태에서 날 죽인 걸 알면 놈은 또 울 거다.
“이왕 호구가 된 거, 세상에서 제일가는 호구가 되어주마!”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말도 되지 않는 외침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릿속이 뜨겁다. 그리고 즐겁지. 놈이 박투술에도 자질이 있을 줄 몰랐다. 하긴 날마다 창 아니면 검을 들고 싸워댔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에서 맨손 격투도 해보자고 할 걸 그랬다.
놈과 내 주먹이 오가는 자리마다 가구가 부서지고 바닥이 패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천장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놈도 나도 맨발이지만 육체를 강화한 탓에 유리 조각을 밟아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렇게 강화한 몸인데 놈의 손끝이, 그리고 내 발끝이 서로의 몸에 칼에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상처를 만든다. 버프를 건 놈과 내 몸이 칼보다 강한 탓이다.
쨍그랑―!!
격자무늬로 틀을 짠 커다란 유리창이 터졌다. 밖으로 떨어지는 깨진 유리 조각을 확인할 시간이 없다. 찰나의 틈도 없이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내 급소를 노리는 놈의 손발을 쳐내고 놈을 공격한다.
한 호흡 사이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간다. 놈의 발등을 노리고 뒤꿈치로 내려찍었다. 아쉽다. 놈의 발등을 부수지 못했다. 대신 처맞은 대리석 바닥에 내 발등을 중심으로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갔다.
먼지가 자욱하고 파편이 허공을 떠다닌다. 단 몇 분 만에 화려하게 꾸민 손님 방은 폐허가 되었다.
잔기침이 일었다. 치료는 미뤄두고 우선 공방에 집중하도록 하자. 서로 때리고 부수는 싸움 어디에 미학이 있을까마는 지금 나는 미친 걸로 해두자.
기쁘다. 놈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있다. 몸으로 막고 반격할 수 있다. 이제 겨우 놈과 제대로 싸울 수 있다. 용사로 다시 태어나서 다행이다.
“커, 윽!”
놈의 주먹이 명치에 처박혔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찢어졌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내장 조각 섞인 피를 토하며 나는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급하게 회복해 가루가 되다시피 한 뼛조각과 찢어진 내장을 치료했다.
놈의 몸도 성하지 않다. 뿔 한쪽은 부러졌고, 안에서 뼈가 부러진 건지 왼팔은 내출혈을 일으켜 내 허벅지만큼 퉁퉁 부었다. 찢기고 뜯어진 옷조각에 스미는 놈의 핏물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죽이진 못한다. 그래도 나는 자체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아주 오래 싸울 수 있다는 말이다.
놈이 자세를 낮췄다. 다시 달려드는 놈을 피하려다 팔을 붙잡혔다. 순간 독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팔뚝만 버프를 풀고 뜯어낸 후 회복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사제의 치료는 만능이 아니지.”
어째서인지 예전에 놈이 아카데미에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아서, 결국 나는 사제가 없는 곳에서, 사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마물의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지금 당장 내가 독을 정화할 수 있다 해도 또 어떤 죽음이 나를 후려칠지 모를 일이다. 하다못해 지금 내 앞에 있는 놈만 해도 용사를 죽이는 데 최적화된 마왕님이니까.
머뭇거리던 차에 놈이 나를 덮치듯 쓰러트렸다. 먼지를 뒤집어썼는데도 잘생긴 놈 같으니.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할 틈도 없이 다시 놈이 내 목덜미를 문다.
아, 맞다. 이 자식 이성 잃었지. 싸우는 데 정신이 팔려 싸우는 목적을 잊었다. 흠씬 두들겨 패서 제정신이 들게 하든지 아니면 아예 기절시킬 생각이었는데.
“나 아직 항복 안 했는데, 이 자식아. 왜 멋대로 덮쳐!”
“…….”
지는 쪽이 깔리기로 했잖냐고 투덜거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먼지 묻은 몸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고 뜯고 맛보고 계신다.
내가 이런 더러운 수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놈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싶어 놈의 다리 사이를 노리고 무릎을 올려 쳤다.
그러나 막혔다. 어느새 놈의 손이 내 무릎을 막고 허벅지 안쪽에 손톱을 세워 움켜쥔다. 놈의 손톱이 파고든 자리마다 핏물이 맺혔다. 날카로운 통증에 나는 낮게 신음하며 목을 잘근거리는 놈의 머리를 손으로 밀었다.
“너 솔직하게 말해봐. 지금 제정신이지?”
“…….”
“입 다물고 이성 잃는 척한다고 내가 나중에 봐줄 거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비겁해도 상관없다. 나는 시커멓게 피멍이 든 펠런의 왼팔을 노리고 다시 주먹질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근육을 끊어두면 자가 회복되지 않는 놈으로서 반격할 수단 하나를 잃는 셈이다. 그러나 놈은 너덜거리는 왼팔은 포기한 듯 전혀 방어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뭘 잘못 주워 먹고 이러는 거야.”
곧 끊어질 것처럼 너덜거리는 놈의 팔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몸에 힘을 풀었다. 여기서 좀 더 싸우면 놈을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놈의 몸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완전히 마왕으로 각성한 녀석에게 빛의 신이 준 치료가 통할 리 없고 나인이 녀석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얼마나 제대로 치료할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더 싸우면 내가 이기는 건데 봐주는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
부서진 침대 파편 위에 누워서 펠런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을 잃은 놈에게 남은 건 성욕뿐인 듯하다. 목덜미며 어깨부터 가슴까지 이갈이하는 어린 짐승처럼 입질하더니 제가 물어뜯은 자리를 혀로 삭삭 핥아 맛본다. 용사의 피가 마왕에게 자양강장제라도 되는 건가?
옆구리며 허벅지까지 물고 빤 흔적에 온몸이 얼룩덜룩하다. 먼지도 뒤집어써서 지저분할 텐데 뭐가 그리 맛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마왕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증오는 대륙 내에서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다. 인간은 마왕에게 쫓겨 대륙 동부까지 내몰리고, 빛의 신전은 하나같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러한 마왕의 상태를 보고 소설 속에서 고위 신관 한 명이 용사에게 한 말이 있다.
“마왕은 대륙에 존재하는 마지막 인간이 사라질 때까지 침략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머리 좋고 잘생기고 유능한 먼치킨이면 뭘 하냐? 미쳤는데. 소설 마지막쯤 용사와 대결할 때 보여준 마왕의 광기를 기억한다. 그래서 내가 놈을 피해 섬으로 도망치려고 한 거고.
“어쩐지 마왕이 된 녀석이 여전히 이성이 남아 있다 했지. 난 네가 정상인 줄 알았잖아.”
놈의 손톱이 옆구리를 긁었다. 놈의 이에 허벅지가 찢어지고 으스러트릴 듯 쥔 손아귀 힘에 핏줄이 툭툭 터졌다. 목 안으로 신음을 삼키고 상처가 나는 족족 치료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도 놈의 몸이 닿는 자리마다 다시 새로운 상처가 남았다. 버프를 걸어도 이 지경이니 걸지 않았으면 벌써 찢어져 죽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야. 내가, 이긴 건데. 봐주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문을 바라봤다. 마왕의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보다. 이렇게 된 이상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기 시작한 내가 너무 민망하거든.
아무래도 내게 피학 성향이 있던 모양이다. 애무라기보다 잡아 온 먹잇감을 시식하듯 물고 찢는 놈의 행동에 하반신이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놈의 혀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허벅지가 경련하며 등허리가 휘었다. 치아가 유두를 긁고 가슴 언저리를 씹을 때는 발끝으로 반파된 대리석 바닥을 득득 긁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입을 여는 것도 어렵다. 신음이 나올 것 같거든.
내 상태를 본능으로 알아차린 건지, 조급하기만 했던 놈의 움직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찢고 깨물던 자리를 혀로 핥고 얼굴을 비빈다. 짐승 같은 내 새끼.
나는 헛웃음을 치며 내가 부러트린 놈의 뿔을 어루만졌다. 여기도 감각이 이어져 있을까? 피가 흐르지 않는 걸 보면 신경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먼지투성이 내 몸을 씻기기라도 할 듯 놈의 혀가 상처가 사라진 가슴을 지나쳐 아랫배로 향했다. 힘이 들어가 단단해진 아랫배에 잔경련이 일었다. 빌어먹을 빛의 신이 무슨 몸을 준 건지 젖은 아랫배에 놈의 숨이 닿는 것만으로 성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흣, 흐으…….”
오목한 배꼽 주변을 원 그리듯 핥는 혀에 나는 숨을 멈췄다. 놈의 손이 한쪽 허벅지를 붙들고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반신에 나는 수치스러워져 주변을 둘러봤지만 빌어먹을, 내 몸을 덮을 만한 천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다 찢어지고 부서진 가구에 깔려 있지.
“너, 이 새끼. 정신 차렸… 힉! 지!”
놈이 덥석 내 성기를 입 안에 머금었다. 예민한 곳에 닿는 뜨겁고 축축한 살덩어리에 나는 흐느끼듯 신음을 토하며 놈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
억울함을 가득 담아 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내 반응을 살피듯 고개를 든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뻔뻔스레 입천장과 혀 전체로 내 성기를 휘감고 강하게 빨아들이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제정신 돌아온 거 맞잖아. 요망한 자식 같으니.
진저리치던 사이 엉덩이골 사이로 축축한 것이 미끄러졌다. 뭐지?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 촉감은 젤리 같다.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느낌이지만 뭔지 확실히 알아차리기 전에 멋대로 벌어진 다리 사이 축축한 무언가가 파고들어 틈 없이 닫힌 내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거, 물 덩어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명처럼 외쳤다. 아니 이게 여기서 왜 나와? 발바닥으로 펠런의 등을 팡팡 두드리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 차린 거 들켰으면 말이나 하라고. 빌어먹을 자식아. 으르렁거려도 놈은 낮게 웃을 뿐이다. 젠장 내 성기 물고 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목 안이 잘게 떨리는 느낌에 놈의 입에서 더 크기를 키우는 게 수치스러우니.
타액에 질척하게 젖은 성기에서 입을 떼고 놈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가볍게 놈의 허벅지 위에 둔부를 얹었다. 활짝 벌어진 다리가 수치스럽다. 그보다 놈이 만들어낸 물 덩어리가 내벽 안 깊이 파고들어 안을 휘젓고 적실 때마다 참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신음이 민망하다.
잠시 잃었던 이성이 돌아온 주제에 놈은 물 덩어리를 머금은 내 아랫배를 손바닥 전체로 가볍게 누르며 물었다.
“지는 놈이 깔린다고 했지.”
“미친놈아. 내가 이겼거든!”
“지금 바닥에 쓰러진 건 유마 너인 것 같은데?”
“…봐주지 말걸. 그냥 팔 잘라버릴걸!”
순간 혈압이 솟구쳐서 머리가 핑 돌았다. 바닥에 뒤통수를 쿵 소리 나게 처박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빡친 것도 빡친 건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노린 것처럼 내가 느끼는 곳을 잘게 두드리는 물 덩어리의 진동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거기는, 너무 깊…어. 아, 흐응. 우, 움직이지 마.”
쾌감이 지나치다. 급격하게 치고 올라오는 사정감에 나는 겁에 질려 아랫배를 누르는 펠런의 팔뚝을 붙들었다.
빳빳하게 선 성기는 놈의 타액에 뒤섞여 선액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색 밝은 음모를 흥건히 적시는 액체. 탄탄하게 긴장한 허벅지가 펠런의 옆구리를 몇 번이고 짓누르지만, 놈은 태연하게 내 아랫배를 원 그리듯 문질렀다.
“이 몸으로는 처음이니까. 그리고 너도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무슨, 사실……. 읏, 으응. 아, 마친 거기만 두드리지 마. 이상…해.”
“성장한 건 너뿐만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 너도 마왕으로 잘 컸다는 거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낼 말인가. 구불거리며 내벽 안을 들쑤시던 물 덩어리가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설마 위장까지 들어올 셈인가. 나는 겁에 질려 몸을 뒤틀었다.
“그래, 잘. 컸어. 컸다고. 칭찬할게! 아이고 기특하네! 그러니까 이것 좀 빼줘.”
쾌감을 느끼라고 있는 부위가 아닌 곳까지 헤집어지는 기묘한 감각에 나는 겁에 질려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차라리 싸우게 해줘. 찢고 부수게 해줘. 성검이 아니라도 좋아. 창을 줘. 애달프게 말해도 펠런 이 자식은 달래듯 나를 끌어안고 목덜미며 뺨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 힘을 쓰게 된 거지? 사제의 치료에 해독하는 힘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용사니, 까. 흐응, 귀 안쪽 핥지 마.”
“다시 약을 써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거군.”
“그래서 왜, 읏. 아. 소리 이상…해. 다른 거라도 하게?”
“…필요하다면.”
욕설을 퍼부을 생각이었지만 귓바퀴 안쪽을 느리게 핥는 놈의 혀에 해야 할 말이 지워졌다. 찔꺽거리는 물소리와 더불어 물 덩어리가 놈의 혀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안을 치대고 문지르는 통에 전신이 능욕당하는 것 같다. 나는 제발 빼달라고 울며 놈의 팔을 붙들었다.
“네가 치료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되도록 아프지 않게 해주고 싶다.”
“…아플, 게. 아니 이거 예전에도, 아, 흑! 했, 했던 아, 아아!”
힘이 들어간 팔꿈치가 바닥을 내려찍었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바닥에 깔린 파편이 과자처럼 쉽게 부스러졌다. 나는 헐떡거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안을 가득 채운 채 부풀기 시작한 물 덩어리가 전립선을 짜부라트릴 듯 누른다.
숨이 막혀서 입을 벌리고 코와 입으로 동시에 숨을 내뱉었다. 턱턱 목에 감기는 숨이 빠져나갈 즈음, 나는 앞을 만지지도 않고 사정했음을 깨달았다.
온몸에 열이 들끓는다. 사정 직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지는 내 몸을 끌어안고 놈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근육이 붙은 모양 좋은 가슴을 혀로 할짝거리고 입 안 가득 머금더니 혀끝을 세워 움푹 들어간 유두 안에 밀어넣는다.
빛의 신은 왜 자꾸 나를 함몰유두를 가진 인간 놈들 안에 집어넣는지 모르겠다.
신의 은밀한 성적 취향 같은 잡생각에 집중하며 나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러나 놈의 혀가 민감한 유두 끝을 헤집을 때마다 내 입에서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높은 신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죽여주는 묵직한 저음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흐으응, 거기, 만 하지 말고.”
애가 닳아 놈의 팔을 끌어당겼다. 하필 끌어당긴 팔이 왼팔이어서 놈이 잠시 숨을 멈추고 미간을 구겼다. 찌푸린 얼굴도 야하게 잘생겼다.
급하게 놈의 팔을 쥔 손을 떼어 대신 놈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식이 말이야. 너랑 나 사이에 오랜만에 만났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있지 않냐.
상체를 조금 일으켜 놈의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옅은 피비린내와 짭짤한 맛. 그리고 조금 비릿하다. 무슨 맛인가 생각해 보다가 조금 전까지 이 자식이 내 성기를 물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젠장, 알까 보냐.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먼 길 마다하고 사지로 뛰어온 건데.
놈의 벌어진 입술 사이 혀를 밀어넣었다. 조금 까슬까슬한 입술과 단단한 치열이 따뜻하다. 놈이 머뭇거리며 혀를 얽었다. 타액에 젖은 따뜻한 살덩어리가 맞부딪혀 부드럽게 서로 몸을 비빈다. 목 안을 타고 고막에 직접 닿는 젖은 물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놈의 숨이 거칠어졌다. 내 등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끼기 무섭게 놈이 난폭하게 혀를 휘감고 빨아들였다. 짓뭉개질 듯 맞부딪힌 입술이 멋대로 유린당한다. 호흡을 조절할 틈도 없다.
“읍, 흐으, 으븝!!”
나는 몸을 뒤틀었다.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두드리고 밀었지만, 놈은 반응이 없다. 혀 좀 넣었다고 놈이 미쳐서 발정할 줄 몰랐다. 간신히 숨통이 트여 고개를 돌리고 숨을 내뱉었다. 타액에 질척하게 젖은 입술이 얼얼하다. 치료할 정도는 아닌데.
“끄흐윽!!”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생각한 차에 등허리가 척척하게 젖었다. 아, 빌어먹을. 순간 의식이 날아갔나? 눈앞이 잠시 시커멓게 물들고, 다시 돌아올 즈음 통증과 더불어 지독한 압박감이 내벽을 파고들었다.
“안, 에 있어. 있다고 물. 이 미친, 아, 흑!!”
놈의 말이 맞았다. 지난 3년 사이 펠런은 성장했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성장 전에도 컸던 놈이 지금은 거의 흉기 급이다.
내벽 주름을 팽팽하게 벌리다 못해 입구를 찢을 듯 파고드는 단단하고 두툼한 성기에 나는 호흡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듯 표정이 사라진 펠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용사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멀쩡했던 놈의 이성이 달아난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그것뿐이다. 눈앞에 쓰러트려야 할 용사가 나타나서.
그러니 놈이 이성을 되찾도록 달아나야 한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절대 얼핏 다리 사이 본 놈의 터주급 마물 같은 성기 때문에 겁먹은 게 아니다.
안에서 물 덩어리가 터진 것 같다. 엉덩이 사이 줄줄 흐르는 물 덩어리에 몸을 뒤틀자, 가슴과 허벅지가 미지근한 물에 흥건하게 젖었다.
갈라진 대리석 틈 사이 스며드는 액체. 저런 게 들어 있었다고? 어디든 일단, 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도망치자. 나는 팔꿈치로 기며 앞으로 포복 전진했다.
“흐, 악!!”
허리가 붙들렸다. 간신히 귀두만 머금고 있던 몸이 다시 뒤로 질질 끌려갔다. 안 돼, 잠깐 펠런. 짓눌린 목소리로 애원하지만, 미친놈의 뇌에 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대로 놈은 나를 깔아뭉개듯 뒤에서 성기를 깊이 쑤셔 넣으며 체중으로 짓눌렀다.
“아, 아아, 미친. 아, 흑! 안에… 들어, 와. 거기, 까지 들어오면. 안, 돼.”
진저리치며 바닥을 손톱으로 득득 긁었다. 손톱에 바닥이 패어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다리 사이 자리 잡은 놈이 가슴과 하반신을 밀착했다. 톤 단위 마물을 들고 스쿼트도 할 수 있는 용사의 몸이지만 놈의 몸은 무겁다. 심적으로 용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평소 들어왔던 것보다 더 들어온다. 그런데 아직 끝날 기미가 없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스러진 침대 파편에 이마를 비볐다.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런 걸 무슨 수로 이겨.
왜 하반신만 마물급이 된 거냐. 3년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너무 오래 방치한 내가 잘못한 거냐. 그래서 내가 지금 벌 받는 거냐?!
“허, 윽!!”
목구멍에서 신물이 역류했다. 토할 것 같다. 내벽 안을 꽉 들어찬 놈의 것에 내 것은 이미 시들었다.
물 덩어리가 활약한 탓에 아프지는 않다. 그런데 압박감에 죽을 맛이다. 최대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뒤에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인제 와서 놈을 밀치고 달아나긴 글렀다. 하려면 할 수 있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지고 도망가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하기도 하거니와 밀착한 탓에 등에 닿는 놈의 온기가 오랜만이라, 뗄 수가 없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놈이 터주급 성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인 게 어디야. 인간 콘돔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자.
나는 침착하게 내 몸에 축복을 걸었다. 최소한 용사가 마왕에게 복상사로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는 남기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최소한 숨 좀 돌리, 읏, 크…흐윽!”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내장을 위로 밀어 올릴 듯 급작스러운 성기의 출납에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성을 잃은 놈에게 중간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처음부터 안이 적응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장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 온 단단한 살덩어리에 장기가 짓눌린다. 헐떡거리며 빼문 혀끝이 뜨겁다. 콧잔등을 타고 흐른 눈물이 바닥에 땀과 함께 뚝뚝 떨어졌다.
“…아, 악! 하, 미친 너무, 커. 이 빌어먹을… 마왕!”
놈의 손이 가슴과 허벅지 안을 끌어안고 밀착했다.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 놈의 혀끝에서 도톰하게 부푼 유두가 튀어나와 바닥에 비벼진다.
유두뿐만 아니다. 바닥에 쓸린 성기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는 놈의 입술도, 그리고 온몸으로 집어삼킬 듯 짓누르는 놈의 체중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느끼고 만다.
앞으로 쏟아지는 금발이 먼지에 더럽혀졌다. 단단한 귀두가 점막을 몇 번이나 긁고 쑤시며 내벽 안쪽 벽에 부딪힌다. 더 들어갈 곳도 없는데 기어이 끝까지 집어넣겠다는 듯 집요하게 구부러진 내장을 두드리는 탓에 결국 잦은 자극에 벌어진 결장 입구에 귀두가 걸린다.
“아, 픗! 크, 흐으윽!!!”
검에 베이고 팔이 부러지는 것과 다른 고통이다. 나는 헛구역질 하며 주먹을 으스러지라 쥔다. 아픈데도 이상하다. 성기가 시들지 않았다. 도리어 투명한 액을 줄줄 흘리며 위아래로 꺼떡거리며 흔들렸다.
등허리와 둔부에 닿는 놈의 몸이 좋다. 체액과 물 덩어리에 축축하게 젖은 몸이 밀착할 때마다 들리는 소리에 자꾸 이성이 날아갈 것 같다.
놈이 미쳤는데 나라도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솔직히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내장도 단련하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반쯤 미치광이 같은 생각을 하며 실소한다.
놈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안에서 움틀거리는 놈의 성기가 곧 사정할 것을 직감했다.
역시나, 놈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결장 안에서 몇 번에 걸쳐 놈이 사정하는 게 느껴졌다. 내벽은 어찌나 틈 하나 없이 꽉 들어찼는지 정액이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이 빼고 나면 바로 치료해야지, 아니면 탈장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제, 했으면. 그만 빼고…….”
짓눌려져 가늘게 내뱉는 내 말에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발 뺐으니 정신을 차릴 만도 한데. 아니면 설마 또 공격하려나. 차라리 치고받는 게 낫겠다.
“…빼라니까?”
불길하다. 놈의 성기가 시들 기미가 없다.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봤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다.
표정을 읽기 어렵지만 추측해 보자면 희미하지만 옅은 욕구가 남은, 아니 오히려 이 경우는 쾌감 탓에 욕망에 불을 지핀 것처럼 점점 욕구가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또 할 거 아니지?”
“…….”
놈은 대답 대신 다시 허리를 꾹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 흑! 안 돼. 더 못해……. 왜, 또 발정하는 건데!”
추억과 현실은 다르다.
“그, 만. 미친놈아. 나, 죽어. 죽는다니, 까?”
아카데미에서도 그랬다. 딱 한 번만 더 하겠다고 했던 놈이 밤새 나를 괴롭히다 못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잠깐 의식을 잃었었다. 왜 그걸 즐거운 추억으로 미화하고 있었던 걸까. 얼마나 시달렸는데. 그리고 그때 펠런은 인간이었지. 그리고 지금은 마왕이고.
나는 흐느끼며 축복을 통해 몸을 회복했다. 어쩌면 하루 만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상대가 너무 커도 고통뿐이다. 그걸 출혈 없이 받아들인 내가 대견할 정도다. 이러려고 얻은 사제의 치료가 아닌데…….
반쯤 넋이 나가 놈이 처박는 대로 몸이 흔들리는 걸 내버려 뒀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자꾸 놈의 성기가 쿡쿡 쳐올릴 때마다 아랫배가 자글자글 들끓듯 뭔가 느껴져서.
쯔걱―!
납작하게 단련된 아랫배가 놈의 성기가 쳐올려지는 대로 볼록하게 부푼다. 손을 뻗고 끝을 만지면 귀두가 어디쯤 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압박감은 그대로지만 통증은 이제 거의 없다. 그보다…….
기분 좋아.
몸이 잘게 경련한다.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팔다리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한 번 사정한 후 놈은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마주 본 자세로 놈의 성기에 꿰뚫려, 나는 으스러트릴 듯 놈의 목을 끌어안고 놈의 이마에 뺨을 비볐다.
“흐, 앗. 아아. 앗, 아.”
벌어진 입에서 단발적인 숨이 터졌다. 뇌가 곤죽이 된 것 같다. 뭘 생각해야 했더라. 잘 모르겠다. 신경이 온통 하반신에 쏠렸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아팠는데 이상하다. 얼마나 싼 건지 놈의 성기가 출납할 때마다 바닥에 놈의 정액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엉덩이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들. 정액이 흘러내린 감촉이 생생해 눈으로 그릴 듯하다. 아마 빛의 신이 준 이 육체의 우월한 오감 덕이겠지만,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 흑! 흐앙, 아. 앗! …왜, 이런 거로, 느끼는, 우, 큭!”
멋대로 허리가 흔들렸다. 워낙 커서 뭘 노릴 틈도 없이 쑤셔지는 대로 내벽이 팽팽하게 벌어지며 전립선이고 뭐고 다 짜부라트릴 듯 긁고 비빈다.
빳빳하게 고개 든 성기가 놈의 아랫배에 쓸렸다. 놈이 고개를 숙이고 내 가슴을 빤다. 점막과 가슴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쾌감에 나는 자지러지며 놈의 허리를 두 다리로 끌어안았다.
“아흑, 가, 가아아!”
놈의 배에 세차게 사정한다. 절정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아서 겁이 난다. 뒤로 젖혀진 몸을 놈이 붙든다. 그리고 다시 때려 박듯 제 성기 위에 주저앉혔다.
“흐, 아악!!”
결장 안으로 성기가 파고든다. 놈이 내 허리를 쥐고 마치 성인용 장난감 다루듯 위아래로 흔들어 세차게 허리 짓했다.
내가 강약을 조절할 수 없는 쾌감에 나는 진저리치며 놈의 등허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대리석도 부스러트리는 악력이다. 놈의 등이 순식간에 밭고랑처럼 패었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놈도 나도 반쯤 이성을 잃은 상황이다.
한 번 사정하고도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제 모양으로 새길 것처럼 몇 번이고 안을 헤집었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흐른다. 눈물과 타액, 땀에 흠뻑 젖은 몸에 먼지가 얽혀 온몸이 끈적끈적하다.
“가, 는 거. 안 멈춰…….”
흐느껴 운다. 발기가 풀어지지 않은 성기에서 정액이 물처럼 줄줄 흘렀다. 몇 번이고 사정하다가 결국 텅텅 비어 정액도 흘러나오지 않는 순간이 왔다. 팔과 다리에 경련이 인다. 회복은 포기했다. 회복할 때마다 내벽을 다시 풀어야 해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된다.
이런 걸 원했지만 이렇게까지 원한 건 아닌데. 축 늘어지는 나를 붙잡고 놈이 다시 허리 짓한다. 아, 그렇구나. 이 자식 아직 한 번 사정했다. 나는 실소하며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내 친구가 마왕이 될 것 같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