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재회 (16/23)

5. 재회

드로젠으로 가는 길은 대충 알고 있다. 제국에서 블리스를 지나 북서쪽에 있는 드로젠까지 말을 타고 쉬엄쉬엄 가면 나흘에서 닷새 정도 시일이 걸릴 거다. 물론 마법을 쓰거나 중간에 말을 바꿔 타면 더 빠르게 도착하겠지.

빠르게 말을 달리자, 바람에 흐트러진 백금발이 나풀거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은 대충 말려도 알아서 윤이 나고 묶어도 스르르 풀어지더라. 신이 주신 몸은 머리카락 하나까지 완벽하다는 뜻일까. 씻으며 봤는데 내 몸에 점 하나 없더라.

완벽한 아치형의 손발톱. 가지런한 치열과 상처 없이 완벽하게 좌우 대칭인 근육. 요즘 수련을 한 덕에 오른쪽 팔에 근육이 조금 더 붙긴 했지만 그건 자주 쓰는 손이 그쪽이라 그런 것 같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인다는 게 조금 즐겁긴 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작은 도시에서 사슬 갑옷과 망토를 좋은 값을 주고 팔았다. 더불어 말에게 걸린 등자와 가슴받이도 처리해 수중에 목돈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가죽 갑옷과 사용감 있는 중고 안장을 사서 말 등에 얹었다. 그 외에 야영에 필요한 침낭과 뱀을 쫓는 향초, 건량과 수통 등을 구매하고 나서도 돈이 한참 남더라.

그래도 내가 잃어버린 자허 블리스의 용돈만큼은 아니어서 조금 안타까웠다. 그 돈이 있다면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저택과 토지를 사고도 돈이 남아 노후 자금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

마법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수통에 물을 따로 뜨러 갈 필요 없이 마법으로 수통을 채우고 부싯돌이 없어도 불을 피울 수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알 수 있도록 함정 마법을 걸고 침낭에서 숙면한다.

이렇게 좋은 걸 이제 배우다니. 창술도 검술도 좋지만 역시 마법이 제일 편리하다.

국경에 다다랐을 때는 출입국 사무실을 피해 마법을 써서 국경을 넘었다. 마법사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사무실마다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사가 존재했지만 내 마력을 감지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없었다.

슬슬 무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었지만 블리스에 가까워질수록 더위는 조금씩 가셨다. 북부 산맥을 지날 즈음에는 날이 선선해져 챙겨 온 흰 코트를 걸쳐야 할 정도였다.

“꼼짝하지 마. 나는 윤유마다, 라고 말하면 알아듣겠지.”

말을 느리게 몰며 나는 고심했다. 어떻게 말해야 펠런, 이 자식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 용사를 찾아서 무조건 죽이라고 말했던 지난날을 후회해 봤자 과거가 수정되진 않을 거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빠르게 내가 유마라는 걸 놈이 알게 해야 했다.

그래. 얼굴 보자마자 외치자.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를 죽이려 들 수 있으니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볼까. 내가 나라는 걸 알고 나서도 나를 죽이려 들면 어쩌지.

그래도 한번 싸워보고 싶긴 하다. 나도 이만큼 강해졌는데 말이야. 지금이라면 놈과 호적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조금 무섭네.”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무섭다. 펠런이 나를 보고도 죽이려 들까 봐, 결국 마왕으로 각성한 후 이성을 잃고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괴물이 되었을까 봐. 혹은 내가 여전히 놈을 보면 살의를 참지 못할까 봐.

놈이 내게 보여준 애정이 3년 사이 희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죽은 놈을 추억하는 데 3년이면 차고 넘친다. 사랑할 때 나오는 호르몬도 길어봤자 3년이라잖아. 어쩌면 나는 이미 놈에게 추억일지 모른다. 이미 나를 잊고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축하는 못 하겠군.”

내가 좀 속이 좁아서 말이야. 괜히 부아가 치밀어 안장에 걸린 발걸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드로젠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하다. 그리고 여전히 놈이 무섭다.

영감님이 가족이라면, 펠런은 하나뿐인 녀석이다. 내 하나뿐인 친구고, 맞수인 동시에 내가 나보다 좋아하는 놈이다. 정을 줄 수밖에 없는 외곬 호구 녀석.

멋대로 판단해서 나를 속이고 감금한 건 지금 생각해도 울컥 화가 치밀지만 뭐 어쩌겠어. 죽기 전까지 두들겨 팬 후에 용서해 주면 될 일이고.

어차피 나는 나인과 한 계약 때문이라도 놈을 죽이지 못한다. 아마 계약이 없다고 해도 내 손으로 놈의 숨통을 끊는 일은 없겠지. 먼저 반한 놈이 지는 거라던데 그거 다 거짓말이다. 나중에 반해도 진다. 날 좀 보라지. 승산 없는 싸움판에 자진해서 들어가고 있잖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다시 그 녀석을 보면 분명 심장이 뛰고 열이 오를 테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혼란스러워하겠지만 그래도, 그때 그 감정은 처음처럼 살의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사랑하나.”

그게 아니라면 내 행동을 해석할 수 없다. 그렇겠지. 사랑하겠지. 와, 씨 새삼 인정하려니 부끄럽네. 나는 아직 이름 지어주지 못한 갈색 말에게 물었다.

“그렇지? 네가 봐도 내가 사랑에 빠진 것 같지?”

나를 버리고 간 서니사이드업의 저주 탓에 나는 말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포기했다. 어차피 마경에 도착하기 전에 팔아버릴 말이다.

마경의 독기는 정화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전투 중에 마수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크다. 내 두 번째 말도 그렇게 내장 압축한 마물에게 끝장났었지. 아련하고 끔찍한 추억을 회상하며 말의 목을 부드럽게 두드려줬다.

“좋은 주인 만나게 해줄게. 걱정하지 마. 내가 인간 외 생명은 소중히 하자는 좌우명으로 살고 있거든.”

갈색 준마는 알아들은 것처럼 불퉁하게 투레질을 했다. 나는 달래듯 갈기 사이를 가볍게 긁어줬다.

“그렇다고 나 따라서 마경에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 거기서 너 먹일 건초를 구하기도 어렵고. 널 먹이로 볼 마수들도 많고?”

그리고 어쩌면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뒷말은 불길한 예언이 될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저 웃었다.

블리스를 지나 드로젠에 가까워질수록 드로젠이 멸망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늘었다. 잠시 쉴 요량으로 말을 세운 마을마다 초췌한 얼굴을 한 난민들이 보였다.

다행히 재산을 가지고 도망칠 시간은 있었던 건지 상거지 꼴을 한 이들은 적었지만, 그늘진 얼굴이 대부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어 알아보기 쉬웠다.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목 좋은 곳에 천막을 세우고 유랑민처럼 떠도는 이들도 있었다. 말을 원하는 이들이 있어 군마가 아닌 노동력으로 치고 저렴한 가격에 말을 팔았다.

펠런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드로젠의 국경이 가까워져 말이 더 필요없게 된 것뿐이다.

도보로 이동했지만, 마법을 써서 근력을 강화한 덕에 말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말이 사라졌으니 황제가 내 동선을 읽는 것도 슬슬 어려워졌을 것이다.

내가 탄 말에 추적 마법이 걸려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뭐 상관없다.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드로젠으로 향하는 것 정도야 황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드로젠에 도착하기 전 마법사 링크를 통해 라이트의 가주가 통신을 요청했다. 무슨 일이 있나 들어볼 요량으로 링크를 열자 주저하며 핀 더 라이트가 내게 물었다.

- 정말 홀로 마왕을 쓰러트릴 생각입니까?

- 인제 와서 묻기엔 너무 늦은 질문 같은데?

- 신관 한 명이 당신께 무례를 저지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신관으로 대체할 테니 동료와 함께 움직이십시오.

- 내 적은 마왕으로 족하다. 목숨을 노릴 또 다른 적과 동행하고 싶지 않다.

- …오해라고 말해 봤자 통하지 않겠지요.

- 오해가 아닌 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링크는 핀 더 라이트의 체념 어린 한숨까지 듣게 했다.

- …그렇다면 그것만 약속해 주십시오. 마왕을 쓰러트린 후에도, 그리고 쓰러트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제국을 넘보지 않겠다고.

-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군. 용사에게 제국을 넘보지 말라 말하는 건가.

- …부탁드립니다.

- 그것으로 너희가 발 뻗고 잘 수 있다면 그래, 약속하지. 이후로 다시는 제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

- 빛의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까?

- 맹세하겠다.

수치를 느끼는 건지 라이트 제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것과 비슷한 대화를 나인과도 한 것 같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내가 서명을 해야 하는 계약서가 있었고 지금은 구두 계약이라는 점이겠지.

구두 계약만으로는 효력이 없는지 맹세한 후에도 별다른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핀 더 라이트는 빛의 대리자인 용사가 빛에 걸고 맹세했다 여기며 내 맹세를 온전히 받아들인 듯했다.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어차피 염두에 둔 일이다. 빌어먹을 제국 따위 내가 다시 갈까 보냐.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왕의 편에 서서 인간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농담으로 황제가 빡치게 할 때마다 제2의 마왕을 꿈꾸긴 했지만 내가 워낙 심성이 착하고 선량해서 말이지.

선빵만 치지 않으면 나도 먼저 덤빌 생각은 없다는 거다.

-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라이트 제후는 통신을 끊었다. 결국, 제국의 목적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드로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움직임 없는 마왕보다 빛의 신전을 뒤에 업은 용사를 더더욱 경계하고 있음을 말이다.

우두머리가 이렇게 중요하다. 멍청한 우두머리를 따르려니 아랫사람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전제라는 걸 알면서도 움직여야 하는 거다. 황제가 라이트 제후를 채근했겠지. 자신이 생각해 둔 암수가 통하지 않으니 내게 확신이라도 받고 싶어 제후들을 움직인 걸 거다.

국경으로 갈수록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블리스와 맞닿은 드로젠의 국경을 따라 소대로 느껴지는 마수와 마물의 기운이 제법 강성하다. 그렇다고 곧 싸울 것처럼 난폭하지는 않다. 오히려 잘 벼려진 차가운 칼날처럼 고요하고 예리하다.

본능에 더 충실한 마물과 마수가 이렇게 잠잠하다는 것이 조금 대단하게 느껴졌다. 되도록 마수와 마물을 상대하지 말자.

그보다 먼저 어떻게든 펠런을 만나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경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비경으로 향해 거기서 나인을 만나는 일이다. 나인을 통해 펠런과 대화하는 것. 지금 내 목표는 그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와, 너희 대응 정말 빠르다. 빌어먹을 제국이랑 비교도 못 하겠네.”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을 한 걸음 지나쳤을 뿐인데, 사방에서 포위하듯 마수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시야에 잡힐 정도는 아니지만, 완전히 기척을 지운 내 움직임에 대응한다는 건, 뛰어난 마법사가 드로젠의 국경에 장난을 쳤다는 말이 된다.

내 기척에 반응할 정도의 마법사라면 펠런이나 나인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마왕의 수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인이면 좋겠다. 최소한 대화는 할 수 있을 텐데.”

유마라고 이름을 밝혀도 알아들을 수 있는 두 사람 중 하나고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그물처럼 조여오는 마족 병사의 움직임에 대응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대로 접근하는 병사들이 나를 공격하면 대응해서 싸워야 할까. 그들을 죽이는 편이 용사의 등장을 펠런이 알아차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펠런이 빡쳐서 문답 무용으로 나를 공격하면…….

재미있겠네.

설핏 치미는 승부욕에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다. 싸우고 싶다. 정확하게 말하면 펠런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강한지 알고 싶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 충동에 몸을 맡겨 저지르는 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하지. 거대한 여덟 다리 코끼리 같은 마수를 타고 등장한 마족 병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투항하면 유혈사태는 없을 거다.”

“…그건 포위한 우리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코끼리를 탄 한 무리의 기병을 이끌고 등장한 마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마력과 기척을 완전히 갈무리한 탓인지 놈은 나를 보고도 용사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멋모르고 땅에 발을 디딘 난민이라면 돌려보냈겠지만 지금 한 말 대로라면 우리에게 덤비겠다 선언한 거지?”

“…뭐?”

“우리를 보자마자 발작하고 도망치는 인간 난민들만 수두룩하게 봤지. 잘못 들어온 난민은 죽이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거든.”

“그거 말하면 안 되는 내용 아닌가?”

“대신 덤비는 놈은 목을 쳐서 비료로 쓰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곧 죽을 놈에게 기밀을 떠드는 건 악당의 특권 중 하나거든.”

“그런 악당 중에 대부분이 정의의 편에게 쓰러지는 건 알고 있지.”

“인간이라서 그런가. 어릴 때 즐겨 본 동화 결말이 서로 다른 모양이야. 우리 쪽 동화는 항상 악당이 주인공이었거든.”

“확실히 다르긴 하네. 우리 쪽 동화에서는 그 악당을 쓰러트리는 놈이 주인공이어서.”

대화하기 썩 즐거운 놈이다. 그렇다고 대화만 하다 끝날 것 같지 않다.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혀 오던 기병들이 포위진을 갖추고, 가장 앞에 서 있던 마족 장교가 가시돌기가 돋은 거대한 모닝스타를 한 손에 늘어트리듯 쥐고 코끼리 마수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보통 너처럼 겁 없이 말하는 놈들은 둘 중 하나던데, 나같이 어중간한 실력자는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거나 혹은 입만 살았거나.”

검은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리며 웃는 낯이 매섭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덤비겠다는 기세가 역력하다. 난폭하고 거칠지만 음험하기 짝이 없는 제국의 황제에 비한다면 차라리 대하기 좋다.

“그래서 나는 어느 쪽 같아?”

“후자겠지. 보통 인간은 마족의 기운에 겁먹기 마련이니.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서 쓰러지더라도 널 상대할 다른 장교가 곧 너를 처리할 테니.”

펠런이 조금 부러워졌다. 재미있는 놈을 부하로 부리고 있네. 아니다. 이런 놈을 발굴할 때까지 지난 3년간 많이 고생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닝스타로 바닥을 긁듯 늘어트린 녀석이 마수의 옆구리를 강하게 발로 찼다.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칠게 달려드는 코끼리 마수의 모습에 나는 조금 긴장해 성검을 빼 들었다. 실전은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싸운 게 마지막이었던가.

놀랄 정도로 움직임이 부드럽다. 마수의 발굽 아래 짓이겨져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흙이 보일 정도다. 나는 사납게 웃으며 성검을 횡으로 들고 그대로 마수의 목을 베어 넘겼다.

핏물이 솟구치고 코끼리 마수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달려드는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무너지는 마수의 등을 박차고 마족 장교가 뛰어내렸다.

그대로 내 머리를 내려찍을 듯 내려치는 모닝스타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피했다. 그 직후 성검을 겨눈다. 목을 벨까? 사지를 자를까? 아니다. 펠런을 만나기 전까지 되도록 마족을 해하는 건 좋지 않다.

장교의 정강이를 후려친다. 인간과 다르게 단단한 몸이지만 정강이뼈가 박살 난 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모닝스타를 쥔 놈의 손목을 후려친다. 허공으로 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닝스타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마족 장교가 거친 숨을 토하며 버둥거린다. 그 목을 무릎으로 누르고 나는 놈의 머리 옆에 성검을 처박았다.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바닥에 박힌 성검에 놈이 딸꾹질했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하나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에 보통은 놀라기 마련이다. 나는 그대로 장교를 인질 삼아 검을 겨누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대응하지 못하고 술렁거리는 마족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가서 이놈보다 더 높은 놈 데리고 와. 한 시간 안에 데리고 오지 않으면 이놈 목 잘라버린다?”

바야흐로 인간이 마족을 인질로 삼고 협박하는 순간이었다.

* * *

블리스와 드로젠 사이에 국경이라는 표식은 백여 미터 간격을 두고 지면에 박힌 흰 말뚝 외에 없다. 북부 산맥의 높은 산세의 영향 탓에 블리스와 드로젠 역시 평균 고도가 상당히 높다.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북부 산맥의 계곡물과 항시 서늘한 냉대습윤기후 탓에 드로젠은 빽빽하게 자란 침엽수림 대신 목 낮은 초원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비옥한 토지는 옥수수와 감자를 비롯한 낙농업이 우세한 편이다.

멀리 말뚝 너머 블리스 쪽 초원에 흰 양떼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피난 중에 주인이 버리고 떠난 걸까. 아니면 당장 먹고살 일이 시급해 두려움도 잃어버린 겁 없는 목동이 풀어둔 걸까.

다시 시선을 돌려 지척을 보면 머리가 날아간 코끼리 마수의 몸뚱이에서 핏물이 흘러 바닥에 웅덩이를 이뤘다. 익숙해진 탓인지 피비린내가 역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마족 장교의 몸뚱이 위에서 나는 체중을 실어 놈의 등허리를 짓눌렀다.

놈의 근력이라면 나를 등에 업고도 가볍게 몸을 일으킬 수 있겠지. 하지만 그 경우 장교는 코앞에 처박힌 성검이 자신의 얼굴을 반토막 낼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체중에 얇은 사슬 갑옷과 가죽 갑옷의 무게를 더하면 제법 묵직하다. 금속 징으로 마감한 건틀렛과 그리브, 투구의 무게는 보너스라고 치자. 그 무게를 온전히 실어 마족 병사의 등허리를 압박한다.

척추 건강에 썩 좋은 자세는 아니지만 뭐 어쩌겠어. 전투에서 패배해 인질이 된 이상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나는 최대한 비열해 보이는 말투로 인질로 붙잡은 장교에게 경고했다.

“얌전하게 구니 좋네. 괜히 저항한다고 날뛰면 번거롭게 인질을 다시 잡아야 하니 말이야.”

“큭,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후후, 네놈의 상관이 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라고. 앞으로 몇 분 안에 오지 않으면 네놈의 목을 날려버릴 테니.”

이 자식 유머가 뭔지 아는 놈이다. 마치 연극 대사를 읊는 것 같은 장교의 말투를 나도 악당처럼 지껄여봤다.

내 대응에 만족한 듯 마족 장교가 소리를 내서 킬킬 웃는다. 나도 따라서 조금 웃다가 말았다. 이미 몇 번 버둥거리다가 코와 이마 주변을 검에 베인 후로 장교는 더는 발버둥 치는 걸 포기했다.

“한 치 앞에 검이 있는데 겁먹지 않는군.”

“바꿔 말하면 상관이 오기 전까지 내게 인질로 가치가 있단 셈이니 말이다.”

“그런 것치고 기회만 생기면 한 방 먹이고 싶어 했잖아.”

내 체중에 폐가 짓눌린 듯 마족 장교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것처럼 조금 갈라져 있었다. 상관으로서 유능한 녀석일지 모르겠지만 부하들에게 놈은 좋은 장교인 모양이다.

실제로 나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위한 병사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창과 활을 쥐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장교를 베는 즉시 나를 쏠 의지를 갖추고.

경고했던 시간이 조금씩 다가왔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풀고 바닥에 꽂힌 검을 가볍게 고쳐 쥐었다.

자세를 바꾸거나, 인질에게서 시선이 떨어지면 으레 급소를 노리고 화살이 날아왔다. 마법 방패로 간단히 막을 수 있는 정도의 공격이었지만 정밀도가 상당히 높아서 놀랐다.

드로젠의 국경을 넘자마자 반응했다. 그 말인즉슨 내가 국경에 닿기 전부터 나를 주시했다는 말이 된다.

완전히 감춘 건 아니지만 기척을 지우고 마력을 통제했음에도 이 정도 대응을 해온다는 건 대단한 거지. 솔직히 말하면 황제의 궁에서 내가 봤던 기사나 병사들보다 우수하다.

용사의 몸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나답게 대화하는 것 같다. 북부 산맥에 가까워진 덕인지 우기를 지난 계절치고 공기는 선선하고 하늘은 맑다. 짧은 전투로 피를 봐서 조금 흥분한 탓도 있을 거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평소라면 묻지 않을 질문을 했다.

“너 이름은 뭐냐?”

“곧 죽을 놈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저승에 가면서 나를 저주하기라도 하면 액막이하기 귀찮아진단 말이지.”

“오, 앞으로 올 녀석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인가?”

“네가 쓰러트린 건 고작해야 소대장이다. 따지고 보면 장교라고 할 수도 없는 최약체지.”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서글프지 않아? 자학하는 거야, 경고하는 거야?”

놈의 행동과 나를 경계하는 마족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아마도 상관이랍시고 어마어마한 놈이 올 것이다.

인질로 잡힌 놈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 병사들. 붙잡힌 상관을 지키겠다는 의지도 느껴지지만, 그보다 내가 여기서 달아나지 못하게 포위한 형태다. 누가 오든 당연히 내가 거꾸러질 거라 믿는 거다.

“상관이 오자마자 널 죽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럼 복수해 주시겠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내가 죽든, 죽지 않든 네 죽음은 기정사실이니까.”

제 것이 아닌 힘에 보이는 긍지가 재미있다. 상사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을 자신의 목숨 위에 올릴 수 있나? 나는 헛웃음을 치며 살아 있는 방석 같은 놈에게 물었다.

“열렬하네. 대단한 놈이라도 모시고 있나 봐? 반응만 봐서 마왕님이라도 오시는 줄 알겠다.”

놈이 움찔했다.

웃던 놈의 얼굴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기색이 어렸다. 주변의 공기도 일순 무거워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내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가볍게 쳐냈다.

이것 봐봐.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니까. 화살이 날아온 나무 위를 노려보다가 나는 고개를 숙여 뻣뻣하게 굳은 장교 놈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진짜 같잖아. 무섭게 그러지 마.”

“…….”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빈틈을 만들 속셈이라면 통하지 않는다고.”

인간은 마족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개구리가 뱀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족 특유의 기척을 상시 지울 수 있는 건 나인 같은 대마법사나, 후천적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마족 밀정 정도다.

반대로 마족이 인간에게 느끼는 증오는 생리적인 감정이라기보다 몇 세기 동안 대립해 온 역사와 선조의 증오 속에서 대물림받은 후천적인 학습과 같다.

그래서 인간은 마족의 땅에 밀정을 보낼 수가 없었다.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하고 마수와 마물이 들끓는 땅에서 본능이 일으키는 공포를 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의 신이 내게 공포 대신 살의를 선물한 거였고.

지금은 그 살의조차 끊겼지만 말이다.

여하튼 바꿔 말하면 제국은 마왕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다. 암습은 둘째 치고 북부 산맥에 잠입 자체가 가당찮은 일인 거다.

그래도 말이야. 이왕 왕이 되었으니 산맥 안쪽이나 하다못해 비경에서 오랜 시간 준비해 둔 마족 군대를 이끌고 군림하고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최전선에 있겠냔 말이다.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헛웃음을 치며 깔고 앉아 있던 마족 방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조금 박힌 성검을 쥐고 가볍게 엉덩이를 털었다. 움직임이 흐트러지며 빈틈을 보였지만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방석이 끙, 앓는 신음을 토하며 일어났다. 옆구리를 움켜쥐는 것이 코끼리 마수에서 떨어지며 갈비뼈에 금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도 그랬지. 혼자 힘으로 왕국도 무너트릴 수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고위 마족들을 거느리고 내게 다가오는 펠런을 응시했다.

마왕은 자의식을 가진 재해다. 산을 무너트리고 바다를 가르며, 단신으로 왕국을 불태울 수 있다.

검과 마법에 더불어 머리까지 좋은 놈이 인간에 대한 살의로 똘똘 뭉쳤으니 『굴러라 용사님』을 읽으며 이쯤 되면 장르를 판타지가 아니라 아포칼립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용사와 마왕은 소설 후반부에 마왕 성에서 만나 최후의 결전을 치르는 게 보통 아니었던가. 하긴 놈이 바보도 아니고, 일부러 적수가 실력을 쌓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내가 자허 블리스로 죽기 전에 했던 말도 있었고.

마족 장교가 틈을 노리고 달아났다. 달아나기 전 놈이 내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 같긴 한데 펼쳐두고 있던 마법 방벽이 놈의 검을 막았다. 인질이 사라지자 틈을 노리고 화살도 몇 발 날아왔고, 가끔 마법사가 마법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하진 않다. 지금 내가 내 정신이 아니라서 말이지.

뒤돌아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놈에게 달려가고 싶다. 이상한 양가감정이다. 왜 달아나고 싶은 걸까? 스스로 든 약한 생각에 의아해하다가 성검을 꾹 움켜쥐었다.

말에서 내린 펠런이 나를 바라본다. 마지막에 봤던 모습과 조금 다르다. 체격이 좀 더 커졌다. 나이를 먹은 것 같기도 하다. 하긴 3년이 지났으니 이제 저 녀석 나이가 스물셋이다. 내 나이는 몇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기억에 남은 윤유마와 자허 블리스, 더하기 용사의 나이까지 치면 내가 저 자식 할아버지뻘이다. 사고가 멋대로 비약하고 있는 걸 안다. 그런데도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정해두지 않았는데 이런 만남은 갑작스럽다.

“침입자가 인질을 잡고 농성 중이라 하던데, 그게 너인가.”

“…그랬지. 내가 인질 잡고 높은 놈 데리고 오라고 협박했지.”

놈의 질문에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는데 내가 들어도 이상한 말이 나왔다. 멍청해 보이니 더 말하지 말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놈과 만나면 놈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내가 유마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다.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놈이 어떻게 변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참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자허 블리스가 그런 식으로 끝장났으니 펠런 녀석 상처가 컸을 거다. 이제 괜찮다고, 네 유일한 친구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제국을 무너트리거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단신으로 여기까지 왔나. 군대는? 하다못해 동료도 없이 마족의 땅에 발을 들였을 때는 죽음을 각오한 거겠지.”

“…….”

“나는 너를 안다. 그리고 네 검도 알고 있다. 기척을 감추고 움직였다고 생각했나. 나는 네가 제국을 벗어난 순간부터 네 행적을 듣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걸음 뒷걸음질 친다.

너무 차가우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지독하게 뜨거운 칼날이 내 목울대에 닿은 느낌. 거기서부터 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살의에 나는 진저리쳤다.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와 함께 조금 부풀다가 가라앉는 흰 망토,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푸른 보석이 박힌 크라바트 체인.

펠런 엑사 드로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놈의 과거와 미래를 알고 있다. 친구였다. 몸을 섞고 죽기 전까지 함께했으니 내가 돌아가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네가 나를 안다고? 아니다. 너는 나를 모른다. 내가 용사라고 생각하고 있나. 네 유일한 적수라고? 빛의 신이 보낸 네 숨통을 끊을 유일한 인물이라고? 그래서 내가 살의를 내비치는 건가?

여신은 내게서 공포를 앗아갔다. 놈에 대한 본능적인 살의는 나 스스로 끊었다. 그런데도 나는 놈이 두렵다. 용사의 몸이라고? 신이 준 육체와 내가 직접 선택한 신의 선물이 있으니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펠런 엑사 드로젠의 강함은 죽기 직전 놈이 각성한 순간의 강함이다. 그때조차 놈은 아직 완성된 몸이 아니었는데.

놈이 두렵다.

“3년이 너무 길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검을 부딪치지 않았다. 마법을 쓴다면 또 어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최소한, 이 몸에 들어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나를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무작정 성검 하나만 들고 달려올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일주일은 너무 짧지.”

용사의 몸에 들어와서 일주일이다. 그걸로 내가 잃어버린 3년을 뛰어넘을 생각이었나.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멍청하고 무모하게. 오로지 저 자식 하나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내 신중함과 교활함은 어디에 버리고 온 걸까. 죽은 자허 블리스의 육체를 뒤지면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너와 싸우고 싶다니. 내가 미친 모양이다.”

내 말에 펠런이 옅게 웃었다. 도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놈을 본다.

사방에 원을 그리듯 둘러싼 병사들이 한 걸음씩 물러서며 간격을 벌렸다. 펠런의 뒤를 따라서 온 이들을 본다. 나인은 보이지 않지만, 암룡 바슈키와 견줄 만큼 강한 이들이다.

용사가 된 지금에 와서 드디어 놈들과 펠런의 강함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제아무리 용사가 된 나라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거다. 대단하다. 펠런. 착실하게 교활해졌구나.

“이봐, 내가 단독으로 너와 대결하고 싶다고 하면 들어줄 거냐?”

“그럴 생각으로 홀로 여기 온 거 아니었나?”

펠런이 허공에서 칠흑의 검을 뽑았다. 빛이 반사되지 않는 매끈하게 빠진 새까만 검신에 엽전처럼 둥근 가드가 멋진 검이다. 검신의 길이가 어린애 키만큼 길다.

간격을 보자면 내가 불리한가. 왠지 초라해 보이는 단출한 내 성검과 놈의 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괜찮다. 보기에 좋다고 검의 성능까지 좋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내가 든 건 ‘그’ 성검이란 말이지.

유마라고 말해야 하는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걸 말하고 나면 이제 영영 놈에게 이런 살의를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추억이라든지 감정을 배제하고 싸울 수 있는 일도 없을 거고.

난 검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계급장 다 떼고 놈과 싸워보고 싶었다. 팔이 날아가든 다리가 잘리든 말이다.

정말 위험하면 그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내 실력이라면 최소한 첫수에 목이 날아갈 일은 없지 않을까. 과신하고 자만하고 방심한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하지.

“그건 그렇긴 한데 역경과 고난이 뒤따를 줄 알았지. 원래 영웅 설화가 그렇잖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적과 싸우다가 최후의 순간 최악의 적에 맞서 싸운다.”

“그렇게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누가 알려주더군. 그리고 이 전투를 목격할 입회인도 필요하니 말이다.”

“입회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지금 국경 너머에서 너와 나를 관찰하는 눈이 있다는 걸.”

“…그 녀석들까지 처리할 생각은 아니겠지? 저들은 그저 내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그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국을 벗어난 이후 아주 멀리서 나를 쫓아오는 추적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아마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밀정일 가능성이 크다.

용사인 내가 다른 길로 빠지는 건 아닌지. 혹은 황제에게 대적하는 이들과 몰래 접촉하는 건 아닌지 감시했겠지.

“죽이지 않는다. 제국으로 돌아가 놈들이 본 것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본 사실?”

“네 녀석이 마왕의 손에 쓰러졌음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펠런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이미 기정사실처럼 덤덤히 말한다. 나를 도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여기고 있는 거다. 그래서 더 빡친다. 빌어먹을 자식. 3년 사이 키 말고 건방짐도 성장했구나.

나는 사납게 웃으며 나 스스로 몸에 걸 수 있는 모든 강화 마법을 중첩으로 걸었다.

“어디 해봐. 그들이 승전보를 가져갈지, 아니면 내 장례를 준비할지 겨뤄보자고.”

고위 마족들이 병사들을 지휘하며 물러섰다. 그들 중 한 녀석은 상당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였다. 놈이 나와 펠런을 둘러싼 반구형의 보호 마법을 걸었다.

놈들이 병사들을 뒤로 물린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왕의 전투에서 병사들과 자신이 새우 등 터지듯 터지지 않게 막은 것 같다.

막연하게 놈과 검을 겨루기 전 평화롭게 내가 누구인지 밝힐 마지막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놈과 싸우고 싶다. 그리고 놈과 싸우고 싶지 않다. 놈에게 죽고 싶지 않고 놈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 상황에서 정말 멍청한 짓인 걸 아는데…….

놈과 나중 누가 더 강한지 알고 싶다.

내가 바보라서 그런 모양이다.

웃는 대신 기합을 넣으며 아래로 늘어트린 검날을 반원을 그리듯 위로 쳐올렸다. 강화 마법을 중첩으로 건 탓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감각이 예리해졌다. 솜털 하나하나 곤두선 것까지 느껴진다.

“덤벼! 누가 더 강한지 보자고!”

“…사양하지 않겠다.”

놈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검격에서 벗어났다. 상관없다. 재차 검을 내찌른다. 팔꿈치 안쪽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며 근육이 수축한다. 사람이 휘두른 검에서 날 법한 소리가 아닌 파공음에 검풍이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한 호흡을 다 뱉기 전 부딪힌 검의 합이 셀 수 없을 정도다.

“더, 해봐! 더!”

“……!”

쩡―!!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예리하다. 펠런이 휘두른 검을 피해도, 그 검풍에 살이 찢어지고 바닥이 패었다. 몇 초 만에 우리가 디딘 바닥은 처참하게 패고, 땅이 뒤집혔다.

흩날리는 흙먼지가 바닥에 닿기 전 다시 검을 부딪친다. 병기가 부딪치며 튄 불꽃이 망막에 잔상을 남겼다.

놈이 마법을 쓴다. 내가 서 있는 바닥이 꿀렁거리며 진흙탕처럼 내 발목을 집어삼켰다. 그런 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박차고 뛰어 놈의 옆구리를 노리고 내찔렀다. 칠흑검이 성검의 검날을 비스듬히 쳐냈다.

그대로 빈손을 뻗어 검을 쥔 놈의 팔을 노리고 화염 탄을 갈긴다. 놈이 마법을 전개해 화염 탄을 상쇄한다. 허공에서 화염 탄이 터지고 뜨거운 열기가 놈과 내 머리카락을 지글지글 태울 기세지만 이미 몸에 두른 속성 저항 마법 탓에 놈과 나 둘 다 멀쩡하다.

다시 검을 겨눈다. 정강이를 베어 놈의 움직임을 막을 생각이다. 그러나 놈에게 빈틈이 없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내 팔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파고드는 칠흑검을 쳐냈다.

심장을 노릴 수가 없다.

심장뿐만이 아니다. 주요 장기가 붙어 있는 몸뚱이에 타격을 입히고 싶어도 급소를 피하게 된다. 노린다고 해봤자 사지와 옆구리 정도다. 마법을 써서 놈의 움직임을 막고 목을 베려고 해도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이게 내가 나인을 통해 반강제로 쓴 계약서 탓인지, 본능적으로 펠런을 베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흥이 조금씩 식었다. 그 대신 치미는 건 불평불만이다. 좀 더 잘 싸울 수 있는데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것. 틈 하나 없는 놈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몸이 썰리는 걸 버텨가며 만든 틈을 써먹지 못하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우습다.

“빌어먹을 제기랄!”

목에 핏대가 올라 고함을 지른다. 놈에게 내 한계는 이 정도가 아니라고, 더 잘 싸울 수 있다고 외치고 싶다. 놈의 마법이 내 사지를 얽었다. 쇳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자 그 즉시 놈의 마법을 파훼한다. 나는 다시 목놓아 놈에게 외친다.

“숨통을 노려 빌어먹을 자식아!”

“…….”

놈의 검은 단 한 번도 내 급소를 노린 적이 없다. 기가 막힌 일이다. 나처럼 목숨을 노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것도 아니면서 왜 나를 기만하나. 적을 앞에 두고 왜 죽일 듯 굴지 않나. 모든 걸 다 걸고 싸우길 원했는데 돌아온 건 전과 같은 대결이다.

“큭!”

얇은 검신이 거짓말인 양 지독하게 묵직한 칠흑검을 쳐내느라 균형이 무너진다. 그와 함께 펠런의 마법으로 진흙 바닥이 마치 금속 송곳처럼 솟구쳤다. 마법으로 강화된 내 두 다리는 마치 깃털처럼 송곳 위에 발끝을 얹었다. 다행이다. 드디어 단단한 디딤판을 밟아서.

성검을 고쳐 쥔다. 어차피 보는 눈이고 자시고 알 바 아니다.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다 걸겠다는 심정으로 놈의 팔을 노리고 검을 내찔렀다. 이기고 싶다. 최소한 너와 대등한 상대가 되고 싶다. 네가 지키지 못했다는 듯 내 시체를 안고 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최소한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싶은 거다, 나는.

놈의 검이 물 흐르듯 화살처럼 달려드는 내 검을 흘렸다. 마법으로 막아도 타격이 있는 건지 놈의 사지에 찢어지고 피 흐르는 상처가 보였다.

그러나 생채기다. 최소한 놈의 팔 하나는 가져가고 싶다.

이 세상에서 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반드시 나 하나여야 했다. 나로 인해 펠런이 고통받길 원한다. 내가 놈에게 자극이길 원한다. 이게 사랑이라면 참 지독하기도 하지.

“죽엇!!”

성검의 손잡이를 쥔 손에 단단히 힘을 주고 안쪽으로 끌어당기듯 검을 부딪쳤다. 철벽을 밀고 있는 것 같다. 과열된 양팔 근육이 파열하며 관절이 뚝뚝 끊기는 소리가 몸 안쪽에서 들렸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탓인지 아픈 느낌은 없다.

괜찮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여신에게 받은 선물이 있다.

나는 신성력을 몸에 돌려 스스로 축복한다. 이것 때문에 혹시 다시 빛의 신과 연결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확답을 들었으니 마음껏 쓴다. 전투 중에 나는 불시에 부서지고 찢어진 몸을 회복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신관이 필요없다.

너덜너덜한 사지가 복구된 찰나의 시간에 펠런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간신히 놈의 옆구리에 칼이 박혔다. 아플까. 아프겠지. 놈의 살을 찢고 파고드는 검의 감각이 소름 돋도록 적나라하게 성검을 쥔 손을 타고 느껴졌다. 네 고통이 오로지 내 것이길 원한다.

놈이 나를 보며 짧게 대꾸한다.

“…속마음 대놓고 외치지 말라니까.”

잠깐, 숨을 참았다. 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게 정말,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 자문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펠런은 가볍게 칠흑검을 회수했다. 성검을 쥔 내 팔이 잘려나갔다는 걸 알아차린 건, 검을 쥔 손째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본 후였다.

“아, 아아악!!”

핏물이 솟구쳤다. 나는 잘려나간 단면을 다른 손으로 움켜쥔다. 팔 하나는 상관없다. 다른 손으로 쥐고 휘두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고통이 극심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격통이 이상할 정도다.

나는 덜덜 떨며 잘린 팔꿈치 위를 본다. 뭔가 이상한 막 같은 것이 상처를 감싸듯 파고들었다. 그 때문인지 팔이 잘린 것치고 출혈량은 많지 않지만,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고통스럽다.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신관이 없어서 되도록 사지 멀쩡하게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네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내 오른팔과 성검을 쥔 펠런이 내게 걸어왔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건 비명뿐이다.

“아플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덤빌 것 같아서. 그래도 통각만 자극할 뿐 목숨에 지장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성에 돌아가면 네가 치료할 수 있도록 오른팔도 돌려주마.”

성검이 없어도 마법은 쓸 수 있다. 회복 또한 가능하다. 그래야 하는데 머릿속이 혼탁하다. 내 비명이 시끄럽다. 겪어본 적 없는 격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무릎이 꺾이고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뚝 흘렀다. 그런 내 머리 위에 펠런이 손을 얹었다.

“지금은 자둬. 네가 아파하는 거, 더 보고 싶지 않으니.”

그 말을 들은 것을 끝으로 내 의식은 희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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