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용사 (2)
“황제 폐하께서 손님을 부르십니다.”
“안내하도록.”
오후 시간이 되어 황제가 나를 찾았다. 다시 만난 황제는 접견실이 아닌 관리들이 대기 중인 집무실로 나를 친히 이끌었다.
황제가 대신전에서 온 용사를 하룻밤 방치했다는 게 소문이 난 건지 집무실에 들어가자 거멓게 안색이 죽은 관리들이 황제와 나를 맞이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내 눈치를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멍청하고 이기적인 황제의 행동에 곧 터질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이도 있다.
“오늘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그대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다.”
마치 친한 이를 소개하듯 감말랭이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탁탁 두드리며 나를 앞으로 밀었다. 나는 공손하게 황제 놈에게 머리를 조아린 후 고개를 들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소집된 관리들과 여섯 제후, 그러니까 우리 영감님 앞에서 입을 열었다.
“빛의 기쁨이며 영광이신 지상의 지배자, 황제 폐하 만세. 이자는 황제 폐하의 이름 없는 검으로 폐하의 뜻에 따라 싸울 빛의 대리인이오.”
크림힐트 글로리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우리 영감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혀 존나 긴 걸 보면 저거 사기꾼 아닙니까?”
“…말을 삼가게. 대신전에서 보장한 인물이니.”
“아닌데. 관상이 딱 뒤통수치기 좋은 관상인데?”
표정 관리를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몇 년 만에 보는 거지만 저분은 여전하시다.
그리고 영감님. 얼굴을 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사이 10년은 훌쩍 더 늙으신 것 같은 우리 영감님이 반갑고 슬프다.
“요즘 대륙에서 일어난 사특하고 불온한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 빛께서 직접, 이 몸에 자신의 검을 선사하셨다. 이자는 이제 황제인 나의 검이 되어 사특한 마왕을 쓰러트릴 것이다.”
“전쟁입니까?”
미스트의 가주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응시했다. 언뜻 라울 미스트와 닮은 외형에 나는 조금 그리워져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전쟁은 없다. 그대들은 평소처럼 국경을 수호하고 나를 지키는 검과 방패가 될 것이다.”
“…마족의 군대와 맞서려면 군대가 필요합니다. 폐하.”
“다시 말하지만, 전쟁은 없다. 마왕을 쓰러트리는 자는 용사뿐이라 했지. 그 말인즉슨 용사가 아니라면 마왕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병사들을 사지로 보낼 수 없는 것 아닌가.”
논리적인 척 개소리를 지껄이는 황제를 바라보며 크림힐트 글로리가 뒷목을 잡았다. 영감님은 천장을 쏘아보고 다른 제후들은 황망하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것은 용사가 직접 내게 한 말이네. 병사는 필요없으니 최소한의 지원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이야.”
그렇지? 라고 동의하듯 나를 돌아보는 황제를 바라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감말랭이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지만, 지금은 고개를 끄덕여야 할 때다.
“명령하소서.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면 이름 없는 자는 가서 행할 것입니다.”
“거보게, 그렇다지 않나. 이건 황제인 이 몸의 뜻이지만 빛의 대리자인 용사의 뜻이기도 한 거지.”
책임 전가하는 것 좀 보라지. 상관없다. 어차피 펠런에게 가려면 인간 병사는 없는 편이 좋다. 내가 원하는 건 드로젠까지 갈 여비와 이동 수단 정도니까 말이다.
“수색 정찰대의 보고에 따르면 드로젠의 국경에 밀집한 마족 병사의 수가 최소 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많은 병사를 용사 혼자 상대할 수 없습니다.”
“누가 병사를 일일이 상대하라 했나. 마왕만 쓰러트리면 되는 거 아닌가.”
“암살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피치 못하게 마족의 군대와 싸워야 할 겁니다. 그러니 군대를…….”
“말이 많아!”
황제가 왈칵 성을 내며 책상을 내려쳤다. 뒤뚱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한 박자 느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아무도 웃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괴물은 편협하고 속이 좁기에 끔찍하다. 원더가 가주의 말을 단박에 자르며 황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용사에게 지원은 없다! 빛의 신께서 성검을 내리셨으니 신께서 가호하시겠지. 마왕을 무찌르는 것은 용사의 몫이라고 하지 않았나? 세간에서 뭐라 하던가. 인세를 구원할 구원자라 했던가? 그렇다면 가서 싸우라고 해!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루겠지! 그 어디에 인간의 황제가 용사를 도우라는 말이 적혀 있던가?”
에이잇!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탕탕 책상을 두드리던 황제가 질투를 억누르지 못한 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침착하게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 옥체를 보존하소서, 위대한 나의 주인이시며 빛의 영광이신 황제 폐하. 이들은 폐하의 큰 뜻을 알지 못합니다. 우미한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소서.”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위해서다 이 감말랭이 새끼야.
씨근덕거리던 황제의 호흡이 내 아부에 차츰 가라앉았다. 분명히 황제 놈 주변에 간신배 여럿 붙어 있을 거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빌어먹을 놈들 말이다.
그래, 저 자식 하는 꼴을 보니 잊고 있던 내 꿈을 다시 펼칠 때가 된 것 같다. 제2의 마왕. 나쁘지 않지. 펠런이 제국을 정복하겠다고 하면 한 두어 번 말리다가 황제만 처리하자고 말해봐야겠다.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하소서. 명령하시면 달려가 싸우겠나이다.”
“저 봐, 용사가 그렇다지 않나. 그대들은 어찌 수십 년간 나를 보필한 이들이면서 빛의 신께서 나를 위해 내려보내신 검보다 못해?”
빌어먹을 못 해먹겠네. 이를 으드득 갈며 크림힐트 글로리가 황제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딱 내 마음이라 속으로 동조하면서도 나는 황제가 고개를 들라 명령하기 전까지 꼼짝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왕이 되면 저 빌어먹을 감말랭이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버리든지 해야지.
“그럼 그렇게 알고 있는 것으로 하고 나는 들어가 쉬겠네. 내가 군대를 아끼겠다고 했지 용사에게 원조하지 않겠다고 한 건 아니야. 그에게 여비와 말, 그리고 지원자가 있다면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
“…….”
“초대 황제께서도 전대 마왕을 무찌를 때 그리하셨다고 하지. 마음이 맞는 동료 여섯과 함께 단신으로 마왕의 성으로 달려가 사흘 밤낮을 싸워 이기셨다고 말이야. 용사도 그렇게 이 몸에 승리의 영광을 가져올 거라 믿게.”
뻔뻔스레 고개를 치켜든 황제가 더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뒤뚱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황제가 떠나기 무섭게 크림힐트 글로리 제후가 나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침착하게 몸을 일으킨 후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용사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군.”
핀 더 라이트 교수, 아니 핀 더 라이트 제후가 나를 바라보며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옅은 적의마저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언제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냐는 듯 표정을 굳혔다.
“빛께서 마왕을 쓰러트리라 하셨으니 그 뜻을 따를 뿐이오.”
“방금 황제 폐하의 말을 듣지 못했나? 병사도 없고 원조도 없이 어떻게 마족 대군을 상대하려고?”
“내가 그 방법을 그대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소?”
획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치켜든 크림힐트 글로리가 나를 노려봤다. 그 옆에 서 있는 영감님과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허 블리스는 죽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여기 남은 건 윤유마다. 용사인 척하는 윤유마 말이다. 이제 육체적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그런데도 지금 영감님과 시선을 맞추면 죄책감에 무너질 것 같았다.
“자네 잠깐 나와 대화 할 수 있겠나?”
숨을 멈췄다.
알고 있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내가 느끼지 못한 5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목소리, 그리고 하나뿐인 손주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목소리기도 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영감님을 바라봤다.
“자네의 생각이 어떻든 우리는 제후국을 더 나아가서 제국민과 이 대륙에 존재하는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이들일세. 그러니 자네의 뜻이 강경하더라도 의견이라도 들어주시게.”
“…그렇게 하겠소.”
누그러진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걸까. 영감님이 전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영감님에게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첫인상만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는 게 나쁜 일인 건 알고 있지만, 황제의 얕고 좁은 성정을 판단하는 데 하루 정도면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황제의 인식은 자기 안위만 살필 줄 아는 머저리에서 상종 못 할 쓰레기로 완벽하게 격하되었다.
그래. 항상 바닥 밑엔 지하실이 있기 마련이지. 이전의 나였다면 그런 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처지를 비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별 느낌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궁을 떠날 자신이 있는 지금, 내게 겁먹고 짖는 쓰레기 정도야 귀찮을 뿐이지 무섭지 않거든.
글쎄, 황제가 내가 원한 일을 정면에서 가로막았다면 번거로운 장애물 치우듯 대충 대하고 제국을 떠났을 거다. 그렇게 행동했다면 골치 아픈 꼬리가 여럿 붙었겠지. 황제의 암수를 상대하는 일이 지금의 내게 위협이 되진 않았겠지만 귀찮아졌을 거다.
지금의 나는 원작에서 봤던 용사보다 훨씬 강하다. 빛의 신이 내게 보상이랍시고 준 완벽한 육체와 마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간계와 암수, 그리고 아득바득 한 줌 권력이라도 지켜보겠다고 날뛰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어수룩하게 굴다가 몇 번이고 죽을 뻔했던 놈과 나를 비교하면 섭섭하다.
황제는 의심 많고 이기적인, 속물적인 인간이니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이후의 일까지 신경을 썼을 거다.
그가 나를 견제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300여 년 전 제국을 건국한 최초의 황제는 용사였다. 빛의 탑이 세워진 후 마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용사의 이름 아래 모여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
용사가 건국한 제국, 그리고 용사의 동료들이 수호하는 제후국. 지금의 황제는 다시 나타난 용사가 이 땅에 새로운 건국 신화를 쓰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걸 거다. 근시안도 이 정도면 재앙에 가깝다.
멍청한 속물 같으니.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황제가 군림할 제국 역시 마왕의 손에 무너질 거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걸까.
황제의 선언이 떨어졌으니 제국의 차원에서 용사에게 지원이 내려오지 않을 거다. 인적 자원과 물자를 포함해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용사는 혈혈단신 마족의 땅에 들어가 마왕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다 용사가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성검을 다루는 용사뿐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면 지금 황제의 행동은 이기적이다 못해 한심하다. 세습제의 폐단이지. 저런 멍청이도 용사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제의 억지에 잠시 집무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여섯 제후와 황제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제국의 대신들은 정적 속에 흐르는 제후들의 분노를 견디지 못한 건지 변명 비슷한 걸 중얼거리더니 황제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소란이 지나가고 집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여섯 제후와 집무실을 지키는 기사 몇 명 정도였다.
황망한 상황에 말을 잃고 시름에 잠긴 제후들의 면면이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황제가 하는 꼴을 보자니 불신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노려보는 글로리의 제후를 이해할 것 같다.
그보다 지금 황제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직 집무실에 남아 있으니 큰일이다. 나는 오랜만에 뵙는 영감님을 슬쩍 바라봤다. 내 시선이 닿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영감님이 고개를 들고 내게 대화할 자리를 변경할 것을 권했다.
“제1궁의 후원은 항상 관리가 잘되어 있어 산책하기 좋지. 잠시 걷겠나?”
“…안내해 준다면 가겠소.”
황궁 안에서는 어디든 황제의 눈과 귀가 붙어 있다. 그러니 어딜 가도 진솔한 대화를 나눌 장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자허 블리스였다는 사실을 영감님에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복잡해질 상황이 귀찮은 건 아니다. 그날, 블리스를 버리고 떠난 내게 실망했을 영감님을 받아들이기 무서운 거다.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젊은 기사가 내게 검집째 성검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황제가 홀대하더라도 용사가 건국한 제국에서 용사의 이름은 여전히 기사들의 로망이다. 내가 배운 바로 성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용사뿐이다.
허리춤에 다시 검을 패용하고 나는 눈알만 굴려 나를 후원으로 안내하는 영감님의 옆 모습을 훔쳐봤다.
정말 내가 죽은 사이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대신전에서 지금까지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 몸이 바뀐 것 말고 다른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영감님을 보며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우리 영감님 세월을 제대로 맞으셨다. 여전히 탄탄한 체격에 강건한 기세가 젊은이 못지않았지만, 눈가와 아래턱에 잔주름이 전보다 많아졌다.
옅은 청색이 남아 있던 몇 년 전과 달리 머리 색도 온통 하얗다. 검버섯이 유난히 눈에 띄는 영감님의 주름 잡힌 손등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나는 영감님을 뒤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영감님 외에도 혼과 라이트의 제후가 후원 산책에 동행했다. 글로리의 제후도 함께하길 원했지만, 미스트의 가주는 크림힐트 글로리를 만류했다. 아마 불같은 성격에 상황을 참지 못하고 뒤집어엎지 않을까 걱정한 거겠지.
혼가의 제후가 후원 산책을 함께할 거라는 건 확신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 혼은 대대로 황제의 최측근이었다. 용사의 일은 용사 홀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한 듯해도 여전히 내게 황제의 감시가 붙은 셈이다.
자칫 긴장을 풀면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 언동을 조심하도록 하자. 표정을 굳히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우기를 갓 지난 후원에 이름 모를 화려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짙은 꽃향기가 모양만큼 다채롭다. 후원 안쪽 지붕만 올린 정자에 자리를 잡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영감님이 가장 먼저 내게 물었다.
“대륙의 상황은 어디까지 알고 있나?”
“300년 만에 지상에 마왕이 강림했다는 것만 알고 있소. 여기 오면서 들은 정보라면 강림한 후 3년 동안 움직임이 없었지만 최근 마경과 국경을 마주한 드로젠을 침공했고 드로젠을 점령했다 하던데, 맞소?”
“그래. 침략 전에 전쟁을 선포하는 등, 전대 마왕과 다른 행보를 걷고 있으나 큰 뼈대를 보자면 자네가 알고 있는 사실 대로라네. 보름의 전투를 끝으로 2개월 전 드로젠은 패배했고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왕국의 국민들은 여섯 제후국이 수용했지. 그러나 마지막까지 드로젠에 남아 항쟁한 기사들과 왕족들은 모두 전투 중 전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네.”
뒤따라온 혼가의 가주 유 혼이 침착한 목소리로 영감님의 말에 첨언해 줬다.
“드로젠은 빛의 탑이 수호하지 않는 마족의 땅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다. 그 땅을 마족에게 빼앗기면 적 앞에 어서 오시라고 대문을 열어주는 꼴이 되지.”
“그러한 사항을 알면서도 제국의 대응은 좋지 못한 것 같던데.”
“그래서 전쟁이 발발한 직후 제후국을 비롯해 제국이 드로젠 전쟁에 동맹군으로 참전할 것을 황제 폐하께 요청했지만, 마족이 제후국의 영토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청은 각하되었다.”
“…….”
“마왕에 관한 과거 기록에 의하면 마족들은 구심점인 마왕을 쓰러트리면 다 흩어진다고 하더군. 어제 자네와 동행한 부관에게 자네의 검술 실력에 대한 말은 들었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돌리지 말고 말하라.”
“그러도록 하지. 자네 군대를 지휘해 본 경험은 있나? 혼자서 1만의 마족 병사를 상대할 실력이 되어 원군은 필요없다고 말하는 건가?”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로 혼가의 제후가 내게 일갈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 곁에 서 있던 영감님도 말은 없지만, 혼의 가주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하긴, 나라도 용사랍시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상대가 인류의 적을 홀로 상대하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할 거다. 그리고 제후들의 의심은 나름 타당하기도 하다.
난 마왕과 싸울 생각이 없거든.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긴 하군요. 우리 가문의 마법사들을 전부 모아도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죠.”
한참 묵묵히 나를 응시하던 핀 더 라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아온 어떤 마법사보다 강합니다. 당신이라면 말 그대로 1만의 대군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왕이지요. 정말 단신으로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도움을 달라 요청하면 내게 지휘할 부대라도 줄 거요? 그게 아니라면 그대들이 내 부관이 될 수 있소? 무엇을 해도 받지 못할 것을 아는데 덧없이 원해야 할 필요가 있나?”
“…황제 폐하께 잘 간청하면 분명 지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 가장 큰 적수라 생각하는 상대는 마왕이 아니라 용사인 듯하오만.”
“…….”
영감님에게 들은 실상은 내가 마차 안에서 들은 바와 조금 달랐다. 각성 후 3년 동안 마왕이 움직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제국 기사는 마왕군이 드로젠을 침공했다고 말했지만 실상 먼저 마경을 드나들며 간을 본 건 드로젠이었다고 한다.
마왕이 각성했다는 징조는 있었으나 자그마치 3년이나 잠잠했다. 당연한 절차로 등장해야 할 용사도 몇 년이나 소식이 없었으니 태만했으리라. 300년 전 문서 속의 기록에 의존해 적을 만만히 봤으리라. 그리고 멸망했겠지.
펠런은 여전히 선빵 때리지 말라는 내 말을 착실히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소국이 무너진 것을 보고도 여전히 제국은 태만했다. 300년에 걸쳐 조금씩 잊힌 마왕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펠런이 각성하고 몇 년이나 움직이지 않은 일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오만한 제국의 검을 무디게 만든 거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제후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제국의 지원을 거절하지 않았다.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다름 아닌 제국이다.
“내가 오해하고 있다면 지금 말하라. 내가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긍정적인 대가가 생긴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내 목적은 오로지 마왕과 검을 맞대는 것뿐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릎 꿇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
“…그건, 그것은.”
혼의 제후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이상 추궁하기도 민망했겠지. 용사를 홀대한 건 그들의 주인인 황제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황제가 아닌 제후들에게 대신 화를 낼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덤덤히 사실을 고했다.
“하룻낮과 밤을 홀로 서서 황제 폐하의 접견을 기다렸다. 그리고 폐하의 충성스러운 칼로 싸우며 어떠한 공도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황제 폐하를 위해 싸우겠다 선언했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를 잠시 시험하기 위해 그런 일을…….”
“시험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하는 거라면 입을 다물라. 빛의 신께서 지상에 강림시키신 신의 대행자를 황제 폐하께서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분의 불안을 이해할 수 없으나 알고 있다. 그러니 수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폐하께 무릎 꿇었다고 말하는 거요?”
“거듭 말해야 믿을까. 나는 마왕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황궁에 들어온 용사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현실을 지키던 기사와 오가던 시종들이 목격했다. 자연스럽게 제후들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역시나 내가 겪은 일을 알고 있었던 건지 세 제후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황제 폐하께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그러나 폐하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대들 역시 내게 요구하지 말라.”
“우리는 용사가 진정 혈혈단신의 몸으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뿐이오.”
“죽거나 죽이겠지. 그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패배하면 당신 하나 죽는 거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받을 수 있는 건 받겠다. 그러나 받지 못할 것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일은 없을 거라 했다.”
결국, 쳇바퀴 돌듯 대화가 멈췄다. 무덤덤한 내 목소리에 영감님을 비롯한 세 제후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만약 펠런 녀석과 만났는데 놈의 성격이 완전히 돌아버려 내가 유마고 뭐고 간에 용사와 싸우겠다고 하면 놈과 싸우겠지. 지금 내 실력이라면 둘 중 한 명은 죽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죽음이 무섭다. 그러니 제국이 용사를 지원한다면 뭐든 받을 생각이다. 언젠가 배신할 동료나 독을 탄 물자는 제외하고 말이다.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3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내겐 내 죽음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눈을 감으면 죽기 직전 본 펠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마왕님은 나름 나와 한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드로젠도 선빵을 때리지 않았다면 멸망하지 않고 잘 살았을지 알 게 뭐냐. 원래 싸움은 항상 먼저 시비 걸고 주먹질하는 놈이 잘못한 거다.
“많은 걸 지원할 수 없소. 하지만 용사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 우리가 준비해 둔 것은 있으니 그걸 드리겠소.”
군대는 필요없는데. 혼자 움직이는 게 제일 마음 편하기도 하고, 내 손에 살려야 할 아랫사람 수가 많아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줄 거면 여비만 좀 챙겨 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주겠다는 사람에게 사양하는 건 이상한 모양새일 것 같아 나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필요없는 것까지 받고 관리하기 귀찮을 것 같아 경고성 말을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마족과 맞서지 못할 정도로 약한 병사는 원치 않는다. 마족의 땅에서 다른 이들을 지키며 싸울 여력은 없을 테니. 그리고 마왕이라면 병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그러니 굳이 주겠다면 마족의 땅까지 갈 도움 정도면 좋겠군.”
인적 자원 말고 돈 주세요, 라는 말을 애써 돌려서 했는데 잘 통했을지 모르겠다. 역시나 통하지 않은 듯 영감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자를 지원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걸세. 빛의 탑이 수호하는 곳은 북부 산맥과 국경이 닿은 곳뿐이네. 드로젠이 패배했으니 마왕군은 이제 언제든 탑의 간섭 없이 인간의 땅을 침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
“…….”
“기동 순찰병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마왕군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패배한 드로젠의 수도지만 그 안에 마왕이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네. 애초에 기동병이 마족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지.”
“…….”
“드로젠 국경에서 확인한 마왕군의 수만 와이번 라이더가 포함된 편대가 셋, 마물과 마수를 부리는 보병 중대가 다섯. 파악된 부대만 작성한 거니 실상 마왕군의 규모는 못해도 두 배, 어쩌면 열 배 이상 될 거라고 정보부는 확신하고 있네.”
“그 모든 병력을 상대할 생각은 없소.”
“마왕은 북부 산맥 너머 마족들의 도시 어딘가에 군림하고 있겠지. 말하자면 마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아. 그런데도 사방이 적인 거대한 땅덩어리를 홀로 돌파할 생각인가.”
영감님이 운을 떼는 느낌이 왠지 불길하다.
“사흘이면 족하네. 용사와 함께 싸우겠다고 선언한 이들이 대륙 곳곳에서 오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싸우도록 하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모두 실력이 출중하고 뛰어난 이들이니. 300년 전 초대 건국 황제께서도 동료들과 함께 마왕과 싸우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격렬하게 사양하고 싶다. 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냐. 영감님. 지금 내게 그런 거 필요없어. 그냥 돈만 줘. 이번에는 가을철 도토리 모으듯 안 모으고 열심히 소비할 수 있어. …라고 열심히 속으로 외쳐봤자 우리 영감님 귀에 들릴 리 없다.
“조건에 미달하는 이들이라면 동행하지 않겠다.”
아주 사소한 반항을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다. 자허 블리스의 유언을 들어주겠답시고 펠런이 용사인 나를 암살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마경까지 혹까지 달고 다니게 생겼다.
“그들이 오는 대로 블리스의 저택으로 부르겠네. 그동안 내 저택에서 머물면 되겠군. 자네 말대로 황제 폐하께서는 자네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조차 불편해하실 테니 말이야.”
영감님의 말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자허 블리스로 살아온 10년의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쌓인 강력한 힘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최대한 불퉁하게 굴어 여기서 연을 끊는 게 좋은데 어째서인지 나는 다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요한 대화가 끝나고 라이트의 가주가 마법사 링크를 연결하길 원했다.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링크는 마법사들끼리 통신할 때만 쓸 수 있는 거다.
나인은 마법사 링크를 통해 식스라고 했던 젊은 마법사의 몸을 지배했지만 그건 놈이 압도적으로 마력이 강한 데다 정신계 마법에 뛰어난 암룡이라 가능한 거고. 지금은 암룡이 아니라 암룡 할아버지가 와도 나를 정신 지배 하지 못하니 괜찮다.
“제국 내 블리스 저택은 지금 당장 여러 손님을 맞기 어려울 것 같으니 혼의 저택에서 머물도록 하시오.”
권유가 아니라 강요다.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유 혼의 얼굴에 떨떠름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황제가 시킨 일이겠지. 보아하니 황제는 혼가 외에 다른 제후들은 믿지 않는 것 같고.
블리스와 지금의 용사가 결탁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까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그리고 그편이 당신도 편할 거요.”
변명하듯 짧게 말을 덧붙인 후 유 혼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전하겠다며 먼저 후원을 떠났다.
멀리 걸어가는 유 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영감님을 봤다. 블리스 저택에서 어색하게 머물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면서 동시에 내가 살던 저택에 갈 수 없는 아쉬움이 들었다.
조금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이대로 영감님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들어오는 것도 그랬지만 황궁에서 나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 한나절을 기다려 황제 폐하께 황궁을 나가 잠시 혼가의 제국 내 저택에 잠시 몸을 의탁하다가 함께 토벌할 소수의 동료와 함께 마왕을 토벌하러 가겠다고 보고해야 했다.
의심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감말랭이가 알현실에 함께 들어온 혼가의 가주에게 눈짓했다. 내 등 뒤에 있는 이가 황제에게 어떤 제스처를 보였는지 몰라도 생각보다 황제는 순순히 내가 황궁을 나가도 된다고 허락해 줬다.
“사소한 일로 나를 찾아올 필요 없다. 다음번에는 승전보와 더불어 마왕의 수급을 가지고 오도록.”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빛의 가호가 있으라 어쩌고저쩌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혀끝에 붙이려니 입이 다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다. 생각보다 간신배는 중노동인 직업이었다. 내가 세 치 혀를 잘 놀리는 재능이 있으니 이 정도로 버틴 거로 생각하자.
그래도 용사를 그냥 내보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던 건지, 내 체격에 전혀 맞지 않는 사슬 갑옷과 제국의 문장이 그려진 망토와 방패, 그리고 같은 문장을 새긴 가슴걸이 장식과 등자를 걸친 갈색 군마가 한 필, 마지막으로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 하나가 내려왔다.
이 몸이 바로 너희의 적인 제국의 기사라고 백 미터 밖의 마족이 봐도 단번에 알아볼 것 같은 화려한 모습에 나는 숨을 삼켰다. 무슨 미친 짓이야 이게. 후원받고 대회 나가는 운동선수도 이보다 덜 화려하겠다.
그래도 일단 돈이 되니 지금은 얌전히 받고 나중에 처리하자. 망토와 갑옷은 팔고 말의 장식은 다 떼면 되겠지. 뭐든 팔면 여비가 될 만한 물건들뿐이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우리를 기다리는 혼가의 마부에게 황제가 하사한 말을 맡기고 유 혼 제후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추억에 잠겨 사각의 창 너머 풍경을 구경했다. 귀족들과 관리들이 거주하는 중앙 구역의 매끈한 도로와 화려한 마차들은 예전 봤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성을 지나면 이후는 부유한 시민들과 상인들이 거주하는 번화가다.
아는 거리가 나오자 목을 조금 빼고 멀리 보이는 건물의 지붕에 한참 시선을 뒀다. 내 기억에서 고작해야 한 달 지났을 뿐인데 희미하게 보이는 아카데미 건물이 지난 생의 추억인 양 아릿하다.
외성 밖으로 빠져나온 마차가 오솔길을 달렸다. 예전에 외성을 떠나 영감님의 저택에 갈 때는 기사 토멀린과 함께였다. 지금은 맞은편에 유 혼과 영감님이 나란히 앉아 있구나.
새삼스럽게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영감님을 바라봤다. 예전에는 그래도 피는 섞인 가족이었는데 지금은 몸도 영혼도 자허 블리스가 아니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유 혼의 저택에서 영감님도 잠시 함께 머물겠다고 말했다. 이후에 올 동료 후보들을 소개도 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내 시선이 닿자 영감님이 마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부른 이들 모두 대륙 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네.”
“당신보다 강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감님보다 강하다니 호기심이 들긴 한다. 그렇지만 기술의 숙련도나 순수한 강함을 말하는 건 아닐 것 같다. 우리 영감님 나이도 있고 하니 상대적으로 그들의 체력 등을 좋게 보고 말한 건 아닐까.
잠시 후 도착한 혼가의 저택은 블리스 저택과 전혀 달랐다. 부지는 훨씬 넓었지만, 저택 내에 기와를 올린 단층 건물이 무수히 많았고 건물 사이사이 정원이나 작은 연못으로 꾸며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 작은 민속촌처럼 보였다.
“여기서 지내시는 동안 두 분을 도와 심부름을 할 이들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십시오.”
머리를 올린 젊고 체격 좋은 시종이 둘 붙었다. 시종이라고 했지만, 체격과 기세를 보아서 나를 감시할 기사를 급하게 시종처럼 꾸민 듯했다.
시종을 소개한 후 유 혼은 영감님과 내가 함께 머물 별채로 안내했다. 별채 뒤로 야트막한 뒷산의 풍경이 보기 좋은 공간이다. 별채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도 저택의 풍경과 비슷하게 검푸른 쾌자 위에 무두질한 엄심갑을 걸친 모습이 제법 멋있다. 멋있긴 한데…….
체격과 이목구비는 서양인인데 걸친 건 조선시대 포졸과 같다. 기묘한 괴리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굴러라 용사님』 작가가 누군지 몰라도 보기 좋은 건 개연성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전부 집어넣은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다.
여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나뿐일 것 같지만 말이다.
목욕하기 전에 미리 점심은 먹지 않겠다고 말해 뒀다. 그보다 급한 게 잠이다. 아무리 마법을 통해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도 심리적인 피로는 계속 쌓이고 있었다. 손님방에 있는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졌다.
자기 전에 간단히 몇 가지 마법을 썼다. 불시의 침입을 막는다거나 물리적인 타격이 다가오면 내 몸을 중심으로 마법 방벽이 생성된다거나 하는 정도다.
용사로 다시 태어난 이상 세상 어디에도 내 편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내 안전에 도움이 될 거다. 원작의 용사가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뭐든 의심하는 편이 좋다.
뭐 상관없다. 블리스 저택에 들어가기 전에도 늘 불안에 떨며 잠들어야 했다. 지금은 마법도 쓸 수 있고 빛이 선물해 준 용사의 육체도 있으니 기습 정도는 깊이 잠들었다 해도 바로 대응할 수 있다.
한참 달게 자다가 일어나니 밤이었다. 여전히 피로는 남아 있었지만, 배가 고파서 깨고 말았다. 창밖이 어둑하고 달이 거의 저물 무렵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대충 10시간 넘게 잔 것 같다. 호출용 줄을 당겨 늦은 시간인데도 시종을 불러 간단하게 먹을 걸 부탁했다.
“이제 일어났나?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직접 식사를 가져오실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수프 그릇을 가지고 온 건 시종이 아니라 영감님이었다. 저택에서 종종 봤던 단출한 평상복이 눈에 익어 저도 모르게 반존대를 하고 말았다.
수프를 마시는 동안 맞은편 의자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영감님의 시선에 수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혹시 뭔가 알아차린 건가? 체할 것 같아서 수프만 마시고 곁들여 온 빵과 고기는 입도 대지 않았다.
“할 말이 있습니까?”
결국,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영감님께 부득불 시종을 대신해 방에 들어온 이유를 물었다. 어차피 여기도 혼가의 시선과 귀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전부 혼을 거쳐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하다.
지금만 해도 내가 머무는 손님방 천장에 쥐새끼처럼 사람 둘이 매달려 있지 않은가.
영감님이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쓸데없는 말을 해서 황제의 진노를 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나올 기색이 보이면 내가 먼저 쳐내겠지만 말이다.
“그걸로 식사가 되겠나? 더 먹지 그래.”
“불청객을 앞에 두고 편하게 밥이나 먹을 수 있나.”
“하긴, 이런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왔으니 환대를 받을 거라 생각은 못 했네.”
그걸 알면서 나를 찾았나 묻자 영감님은 그저 허허 웃었다. 쉽게 나갈 것 같지 않아 나는 수프와 함께 준비된 차를 마셔 입안을 헹구고 다시 시종을 불러 반 이상 남은 그릇을 물렸다.
“그래서 다시 묻지만 나를 찾은 용건은?”
“용건까지야 있나. 나도 잠이 오지 않아 잠시 걷던 와중에 식사를 가져오는 시종 아이를 만나 대신 가지고 온 것뿐일세.”
의뭉을 떠는 영감님의 모습이 조금 낯설다. 항상 내찌르는 창처럼 장해물이고 뭐고 돌진만 하던 모습만 기억에 있는데.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영감님은 3년 사이 조금 유해지셨다. 쉬고 싶으니 용건이 없다면 이대로 나가 달라 말해야 하는데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영감님과 독대하는 이 시간이 좋은 건지 괴로운 건지 모르겠다. 지난 생을 포함해도 내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단어의 뜻은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거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내가 가족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을 단 한 명 고르자면 아마 영감님이겠지. 십 년 넘게 나를 키우고 돌보고 가르친 사람이다.
그렇다. 유일한 가족인 거다.
코끝이 시근시근해서 고개를 숙였다. 슬픈 건 아니라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잘 우는 편도 아니고, 그저 조금 답답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윤유마일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리움을 느낄 줄이야.
“그 호흡은 어디서 배웠나.”
불시에 치고 들어오는 영감님의 물음에 나는 한 호흡 숨을 멈췄다. 울적한 감성은 영감님 물음에 쏙 들어가고 차가운 이성이 영감님의 물음에 뭘 묻는지 알아차리고 여태 한 내 멍청한 행동을 질책한다.
“호흡만이 아니지. 걸음과 간격. 검을 맞대면 더 확실해질까. 마음 같아서는 대련을 청하고 싶지만 이미 혼가의 이들과 겨뤘다고 했지.”
“…….”
“그것은 블리스의 것이야. 그래서 묻는 걸세. 어디서 우리 가문의 비전을 배운 건가?”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멍청한 윤유마. 영감님을 멀리하겠답시고 행동해 놓고 정작 감정적으로 굴고 말았구나. 내가 자허 블리스라는 걸 모르는 영감님이 혹시 나를 잃어버린 손주와 겹쳐 보지 않을까 웃기는 생각마저 했지.
다행히 영감님의 시선은 가문의 비전을 훔쳐 간 도둑을 보는 것치고 사납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저 궁금한 것을 묻는 듯 오히려 담백한 자세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빛께서 내려주신 것들이다. 검술과 마법을 포함해 이 육체까지도.”
“기뻐해야겠군. 마왕을 쓰러트리는 데 우리 가문의 비전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신 걸 테니.”
하나도 고맙지 않다는 말투였다. 당신에게 직접 보고 배운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바싹 마른 입안을 찻물로 적셨다.
“달리 배운 건 있나?”
“…창술을 조금.”
“그것도 블리스의 것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검술은 혼가의 것이 더 뛰어나지. 마법은 라이트의 것일 테고. 활도 다룰 줄 아나?”
“…창과 검, 그리고 마법이 끝이오.”
“해가 뜬 뒤에 잠시 창을 맞대봐도 괜찮을까? 용사인 당신에 비해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당신이 다루는 창술의 원류를 알고 있으니 부족하나마 조언할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군.”
“거절한다. 나는 이 땅에 누군가와 대련하러 온 것이 아니다. 마왕을 죽이러 온 거지.”
창을 맞대면 정말 들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단박에 대련을 거절했다. 영감님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한 번 더 권하지 않았다. 빛의 신이 준 거라는데 뭐 어쩌겠어. 마왕을 쓰러트리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하지, 라고 이해한 걸까.
한시름 돌린 걸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걸 빛의 신이 준 거로 대신해도 되는 걸까 생각하던 차에 다시 영감님이 훅 치고 들어온다.
“손주가 있었다. 영리하고 성실했으며 나를 닮아 잘난 녀석이었지.”
“…….”
입에 머금은 찻물을 삼키고 나는 말 없이 영감님을 바라봤다. 이제 영감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추측도 되지 않았다.
“3년 전에 죽었네. 각성한 마왕의 손에 의해 가장 먼저 희생된 이들 중 한 명이었지.”
“그것참 유감이군.”
“괜찮네. 강한 아이였고 신념에 따라 싸우다 갔으니 그 죽음에 후회는 없을 테지. 대단한 녀석이었어. 친우를 위해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혈혈단신 사지로 달려갔으니 말일세.”
“……?”
뭔가 내가 알고 있던 자허 블리스의 죽음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용과 싸워야 하는 제후의 자리가 무서워서 튄다고 편지에 적고 도망쳤는데 왜 내용이 이렇게 와전이 된 걸까.
“3년 전, 마왕의 각성을 앞두고 북부 산맥에 암룡이 등장했지. 그리고 마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국경을 맞댄 드로젠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개입을 막았네.”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다. 펠런의 각성을 앞당기기 위해 나인이 북부 산맥에서 엄포를 놓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말이다.
“꿍꿍이가 있을 거로 추측하면서도 여섯 제후를 비롯한 제국은 움직이지 않았어. 어차피 마경의 일, 어차피 소국의 일이니, 제국의 방위가 최우선이라 변명했지.”
“…당연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네. 빛의 탑이 수호하는 것은 제국과 그에 따른 제후국뿐이지. 마경으로 막혔다 하나 드로젠이 무너지면 마족이 제국을 침공할 길이 열리는 건데.”
“…….”
“결국, 드로젠은 단신으로 마경의 초입에서 들끓는 마수와 마물을 상대해야 했네. 그리고 내 손주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자신의 친우를 위해 블리스의 후계자 자리를 버리고 마경으로 달려갔지.”
그런 적 없는데, 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정말 튈 생각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니 자기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키워준 은혜를 버린 게 나다.
“나는 녀석이 무엇을 위해 떠난 건지 몰랐어. 그저 손주가 용이 무서워 블리스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지. 가문의 명패에서 손주의 이름을 파내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를 엄하게 벌하겠다 했지. 손주를 찾지 않겠다고, 우리 가문과 상관없는 이라고 고집을 부려 선언했네.”
내가 떠난 후에 그랬구나. 역시 불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나를 내쳤구나. 하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영감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씁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마왕과 싸우다 죽은 내 손주의 시체가 내게 돌아왔네.”
“…네?”
“…가문의 이름과 지원을 버리고 오로지 검 하나만 들고, 검사이자 기사인 이로 친우를 위해 싸우러 간 거였어. 드로젠의 병사들조차 버티지 못하고 버린 지옥 같은 마족의 땅에 들어간 내 손주는 그 목숨이 다하도록 자신의 친우와 함께 싸웠다고 했네. 그리고 마왕과 싸우다가 숨이 다했다 하더군.”
“…예?”
멋모르고 존대했다. 내 말투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영감님의 눈가가 붉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잘게 경련하는 아래턱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며 입을 꾹 다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거 아닌데요, 라고 말할 것 같다.
“그 아이를 누구보다 믿어야 할 내가, 가장 먼저 내 손주를 내쳤지. 어찌나 열심히 싸웠는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처참한 모습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어. 그래도 녀석은 기사답게 끝까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고 들었네. 울며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지. 나는 그렇게 내 유일한 혈육을 내 이기심으로 잃었어.”
문제는 그거다. 이 이야기가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자허 블리스가 블리스가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체를 가지고 온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모든 정황을 이야기하는 이는 또 누구인가.
“…그 이야기를 한 이는 누구입니까?”
“…….”
들끓는 자신의 속에서 울분을 쏟으며 말하던 영감님이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이야기를 꾸밀 수 있는 이, 그 정황을 마치 본 것처럼 영감님에게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내가 알기로 세상에 딱 둘뿐이다.
“말할 수 없네.”
나인, 그리고 펠런이겠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 벌어졌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워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경에서 내 죽은 손주를 데리고 온 이가 내게 사정을 설명해 줬지.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이후 그들을 본 적이 없으니 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고.”
아니 중요한데요. 정말 중요한데? 그 말인즉슨 각성 후 펠런이 블리스에 올 정도로 제정신이었다는 말이 된다. 뿔과 귀는 마법으로 감췄겠지. 그리고 블리스 내 거주하는 인간을 보고도 살의를 터트리지 않을 정도의 자제심과 이성도 남아 있다는 거고.
“용사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네. 하지만 마왕과 그의 군대를 홀로 상대할 거라면 그러지 말아달라 하는 부탁이오.”
“…….”
“당신의 걸음, 그리고 호흡. 그리고 기의 흐름이 내 손주와 매우 닮았더군. 멀리서 봤을 때는 내 손주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지 뭐요. 어쩌면 빛의 신께서 당신에게 준 기술의 근간이 내 손주일지도 모르겠군.”
예리하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를 그런 눈으로 본 걸까. 개인적인 슬픔을 내게 말한 걸까. 나를 손주와 겹쳐 봐서, 어쩌면 손주의 기술을 가진 내가 죽지 않게 하려고.
속죄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 건 나다. 당신을 배신하고 블리스를 버린 건 난데, 버려진 이가 버린 이에게 잘못했다고 슬픔을 말하는 이 아이러니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밤이 늦었다. 쉬고 싶으니 돌아가라.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건 들었다. 동행을 무조건 내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다.”
나는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명백한 축객령에 영감님은 낮게 웃으며 내가 머무는 손님방을 떠났다.
“이거 내가 쉬어야 하는 이를 너무 오래 붙들었군.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편히 쉬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력은 영감님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바닥이 났고 정신은 금이 갔다. 무엇보다 영감님의 말에 대답할 염치가 없었다.
영감님이 방 밖으로 나가신 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영감님의 말을 들은 후와 지금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나는 용사고, 천장 위에 나를 감시하는 시선이 둘 있고, 잠은 오지 않고, 뒤틀린 위장은 이제 공복의 고통이 아닌 다른 고통으로 뒤틀린 듯 아플 뿐이지.
영감님의 말속에 반드시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은 없었다. 초면인 상대에게 하기에 너무 깊고 무거운 이야기다. 그런데도 영감님은 내게 죽은 자허 블리스에 대해 말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들어 있는 내용물이 같으니 뭔가 느끼신 걸까. 아니면 마왕을 무찌르기로 예정되어 있는 용사에게 손주의 복수를 부탁한 걸지도 모르지.
영감님을 비롯한 제국은 마왕이 펠런의 몸을 빼앗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내 시체를 가지고 온 건 펠런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나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상관없어.”
너무 깊게 생각한 걸까. 멋대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자허 블리스의 시체를 누가 가지고 왔든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이제 도망가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많은 걸 알고, 겪고, 받았다.
우는 녀석을 두고 달아나기엔 내가 놈에게 받은 게 너무 많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이제 얼마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
* * *
다음 날 아침부터 내게 대련을 요청한 건 다니엘 블리스뿐만 아니었다. 혼가의 가주 유 혼을 비롯해 혼의 기사들이 내가 머무는 별채에 오며 가며 어떻게든 내 시선이 닿길 빌며 서성거리는 모습이 내가 마치 유명한 배우가 된 거 같아서 멋쩍어졌다.
염치를 알듯 정중하게 대련을 신청하던 이가 한둘, 그러다 이튿날이 되자 제발 한 번만 싸워달라고 비는 이들이 담장을 점령했다.
우는 소리를 들어보니 부단장과 대련했다면서 왜 자신과는 검을 맞대주지 않느냐는 하소연이다. 그 하소연을 하는 이들에 이미 나와 검을 맞댄 수 혼과 두 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게 또 아이러니다.
“한 번이면 족하오. 다시 한번 대련해 주시오!”
“부단장님은 용사님과 싸워보셨으면서 욕심이 넘치십니다. 양보의 미덕도 모르십니까? 대련한다면 나와 해주시오. 내가 혼가의 기사 중 가장 검이 빠르오!”
“힘은 내가 제일 강합니다!”
“기술의 숙련도를 말한다면 나를 뺄 수 없지!”
시끄러워 죽겠네. 안뜰을 산책하던 것을 포기하고 나는 별채 안 손님 방으로 들어가 환하게 열린 창문을 모조리 닫았다. 할 일이 없나. 혼의 검사씩이나 되는 이들이 왜 옹기종기 모여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걸까.
“오늘이 휴일이라 저리 모여 있는 거다.”
슬쩍 손님방을 방문한 유 혼이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로 목을 축이며 대답했다.
“휴일이라면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 수련을 해야 하는 거 아니오?”
“그렇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저렇게 용사님과 대련을 원하는 것 아니겠나?”
틀린 말은 아니라 헛기침을 했다. 하긴 나도 하루가 멀다고 펠런 놈에게 대련하자고 보챘지.
“사실 혼가에서 가장 강한 건 나다.”
뻔뻔스레 대련을 요청하는 유 혼을 지그시 바라봤다. 짧게 헛기침하며 아쉬운 척을 하던 유 혼이 생각난 것처럼 나를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고위 신관을 보내셨다고 하더군. 앞으로 용사님의 일정을 함께하며 치유를 해줄 거다.”
“…대련을 요청하기에 앞서 그 용건부터 내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겸사겸사 하는 거지. 신관께서 기다리시는 별관으로 안내하마.”
뻔뻔스레 턱을 드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찌 된 것이 내가 만난 제후 중에 정상적인 사람은 우리 영감님 말고 없는 것 같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유 혼의 뒤를 따라 별관으로 향했다. 별채 밖 담벼락에 매달려 있던 기사들이 새끼 오리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오는 일이 있었지만 유 혼의 한마디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단정한 흰 법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호기심 어린 맑은 눈이 순박해 보이는 인물이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기 섞인 노란 눈이 초면인 나를 보고 반가운 듯 한껏 휘어졌다.
“빛께서 함께하시길. 이분이 신의 대리자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사 티리얼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이사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빛께서 함께하시길. 이름은 없으니 불러야 한다면 용사라 호칭해도 좋다.”
나는 티리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신관을 알고 있다. 이름을 듣고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00편이 넘는 원작에서 중반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용사와 함께한 녀석이니까. 그 행보가 워낙 독특했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다. 소설 내내 용사의 음식에 독을 풀어 넣는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니까.
악수를 청하는 티리얼 신관의 손을 쥐고 가볍게 흔들며 잔잔히 웃었다. 내 목숨을 노리는 녀석이 마왕 하나가 아니라는 게 즐거워 죽을 것 같다.
빌어먹을 제기랄, 마왕 녀석보다 더 음험하고 비열한 이들이 용사의 인간 동료들이다. 이 빌어먹을 동료들은 제각각의 꿍꿍이를 들고 와서 아주 조금씩 사고를 치고 뒤통수를 노리며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다.
나는 푹신한 좌식 의자에 앉아 시종일관 옅게 웃으며 나를 찬양하는 티리얼 신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황제가 마련한 고위 신관이라는 놈이 이놈인 것 같은데 어떻게든 마왕과 함께 나를 삼도천 너머로 보내겠다는 황제의 의도가 노골적이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사냥개처럼 굴었어도 황제 놈은 나를 토사구팽할 생각인 거다.
원작에서 제국은 무너지고 제국민은 뿔뿔이 흩어져 변방의 소국이나 연합국가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신관 티리얼은 연합국에서 용사를 위해 준비해 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원작과 다르게 제국이 무너지지 않았음에도 내 동료가 되고자 나를 찾아왔지. 그가 왔다는 건, 동료랍시고 찾아오는 다른 이들도 원작과 거의 같은 인물이라는 걸까.
내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티리얼은 동경하는 인물을 앞에 둔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눈을 빛내며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 궁사님은 이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 안에 제국령 안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다른 분들은 이미 제국 안에 머물고 계시지만 용사님을 함께 뵙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함께 오신다더군요.”
“…….”
입안에 머금은 차를 삼키며 나는 침착하게 빛의 신에게서 얻은 힘 중 하나인 정화를 사용했다. 이럴 때 쓰려고 선택한 구슬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것 같다. 차 안에 미미할 정도로 섞여 있던 차 이외 성분은 위장 안에 들어가기 전에 사라졌다.
벌써부터 수를 쓰나.
극미량에 가까운 각성제다. 지금 당장 먹어도 아무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몇 날, 며칠 먹다 보면 체내 누적될 거다. 그리고 용사의 체내에 필요한 양이 누적될 즈음 티리얼은 내가 먹는 음식에 다른 약을 탈 것이다.
한 종류만 먹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체내 쌓인 각성제와 다른 약이 섞이면 돌이킬 수 없는 독이 된다고 했던가.
소설상 설정으로 티리얼 미스트는 미스트 가문의 사생아로서 성년이 되기 전에 신전에 몸을 의탁해 신관으로 성장하지만, 실상 가문의 명령에 따라 황제를 위해 비밀리에 키워진 암살자이기도 하다.
“차 맛이 어제 마신 것과 다르군. 차 시동이 바뀌었나?”
“귀하신 빛의 대리인께 바치고자 제가 직접 덖은 차로 우린 것입니다. 입에 맞으십니까?”
좋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태연한 안색으로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마시다가 반쯤 남은 찻잔을 느리게 손안에서 굴렸다.
“평소 차를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좋은지 나쁜지 구분할 수가 없다. 다만 재미있긴 하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이런 찻잎을 즐기는 인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
신관의 얼굴에 잔흔 같은 균열이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 시선을 두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숨기는 게 빠르다.
하지만 놈도, 그리고 나도 놈의 호흡이 흐트러졌다는 걸 알았다. 무슨 말씀이냐고 시치미를 떼지 않고 오히려 신관 티리얼은 뻔뻔스레 고개를 들었다.
“제가 직접 배합해 즐겨 마시는 찻잎이기에 무엇이 재미있다 하시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약한 각성 효과가 있는 찻잎이라 걱정하고 계심을 압니다. 하지만 독성은 없으며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하는 차니 제 의도를 곡해하지 마시고…….”
“빛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잊지 말라, 티리얼 미스트.”
드디어 선량해 보이는 처진 눈에 긴장이 어렸다. 나는 반 남은 차를 단번에 들이켠 후 다시 정화를 썼다.
독인 걸 알면서 차를 비운 것이 의아한 건지, 아니면 미스트가 아니라면 모를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건지 웃음기가 사라진 신관 티리얼을 응시하며 나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어둠 속이라도, 그늘진 곳이라도. 그러니 그만하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오해입니다.”
“이후 어떤 것을 섞어 내게 먹이고자 하는지 약초의 이름까지 말해야 할까.”
잘게 떨리는 신관의 눈가를 바라보며 나는 빈 찻잔을 거꾸로 뒤집어 탁자 위에 올렸다.
“가서 황제에게 말하라. 마왕을 쓰러트리더라도 내가 제국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니 암수를 쓸 필요 없다고.”
“…불경하다.”
“빛의 신을 모시는 신관이 빛의 대리자 앞에서 불경하다고 말하나. 네가 모시는 것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신을 기만하는 신관을 동료로 맞을 생각이 없다.”
좌식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 위를 가볍게 털었다. 차향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다. 독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 고개 돌려 황망한 눈으로 나를 보는 유 혼에게 말했다.
“가장 신실해야 할 신관이 이 상태이니 다른 동료들을 굳이 볼 필요가 없겠군.”
신관과 나의 대화 몇 마디로 상황을 파악한 혼의 가주가 몸을 일으켜 나를 만류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사소한 문제로 일을 그르치지 말라.”
“그게 정말 오해인지 수를 쓴 건지 티리얼 미스트가 가장 잘 알겠지.”
혼가는 황제의 최측근이다. 그리고 용사의 동료는 다 쓰레기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받았을 뿐이다.
두말하지 않고 별채 밖으로 나가는 나를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도 용사를 붙잡을 수 있는 이는 없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용사가 거꾸러진다면 마왕에 대항할 대상이 사라진다. 황제에게 가장 좋은 수는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처리하는 거였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신관 티리얼이 오늘 이 자리에서 수를 쓴 게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지 싶었다. 동료가 된 후에 일이 벌어졌다면 귀찮아졌겠지.
극미량의 각성제를 내가 느끼지 못했을 거로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알아차리더라도 변명으로 넘길 생각이었을까.
후자일 것이다. 내 반응을 보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나를 중독시킬 여러 방법을 구상하려 했겠지. 반응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진행하면 될 테고.
어디선가 멀리서 익숙한 영감님의 기합 소리가 들렸다. 혼가에 온 김에 혼의 기사들과 지도 대련 중이신 걸까. 다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기합 소리를 피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용사께서 거처하시는 별채는 그쪽이 아닙니다.”
“마왕을 쓰러트리러 간다.”
“…동행하기로 한 이들이 내일과 모레 도착한다 했을 텐데요.”
“목숨을 노리는 이를 너는 동료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황급하게 별채 밖으로 나온 유 혼이 내 앞길을 막았다. 대련을 요청하던 가벼운 분위기는 어디로 간 건지 금방이라도 허리춤에 찬 검을 뽑을 것 같다.
유 혼만이 아니다. 담벼락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혼의 기사들이 유 혼의 뒤에 방사형 진을 짜고 검을 쥐고 있다. 그렇군. 대련을 빌미로 내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모여 있었던 건가.
상관없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 나는 스스럼없이 성검을 뽑아 양손에 쥐고 자세를 잡았다.
사람을 베는 건 익숙하다. 숨만 붙여두면 죽지 않는 세상에서 팔다리 썰어버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제 몸 함부로 다루는 일에 익숙해지다 못해 죽어버리기까지 했지만 내가 좀 멍청해서 말이지. 한 번 죽은 거로 성질이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내 앞을 막는다면 용사에 대적하는 이라 판단하겠다.”
“궤변이오. 단순한 오해로 황제께서 보내주신 신관을 내칠 수 없소.”
“네가 그 차를 먹을 텐가?”
“…….”
“못해도 석 달. 그리고 마지막에 다른 찻잎을 섞는 거지. 그것만으로 마력이 흐트러지고 기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먹는 독은 그대로 배출 없이 체내 축적될 것이다.”
“…신관께서도 그 차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셨을 거요.”
“스스로 하는 말에 부끄러움을 알아라. 기사 유 혼.”
숨을 들이쉬고, 잠시 멈췄다. 기감을 확장하고 몰입하자, 유 혼이 눈을 깜박거리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중단 세를 무너트리지 않고 한 걸음 내디딘다. 바닥이 깊이 패며 내 몸이 화살보다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검을 쳐내고, 흘리며 벤다. 피를 볼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를 후려치는 것처럼 간단하다. 실력 차이가 이 정도면 차라리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이 더 번거로울 것이다. 들이쉰 호흡을 전부 내뱉기 전에 나는 혼가의 기사들을 등 뒤에 두고 십여 미터를 한걸음에 돌파했다.
“크, 악!!”
길게 늘어진 시간이 돌아오자 부러진 손목과 팔을 움켜쥐고 혼의 기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했다. 바닥에 검을 떨어트리는 자도 몇 있었으나 치명상을 입힌 자는 없었다.
지금 나는 인간이었던 과거의 펠런보다 강하다.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고 빛의 신이 각성한 마왕에 맞춰 내 능력도 올렸으니 지금 나는 소년만화에서 종종 볼 법한 파워 인플레이션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대련에서 보여준 것이, 끝이 아니었나.”
부러진 손목을 움켜쥐고 부단장 수 혼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도 전부 보여준 건 아닌데. 나는 몸을 돌려 상처를 입은 혼의 기사들 끝에 서 있는 유 혼에게 시선을 맞췄다.
“가겠다. 말을 준비하라.”
“…말을 가져와.”
짓씹듯 중얼거리는 유 혼의 명령에 잠시 후 안장을 건 갈색 준마 한 필을 시종이 데리고 왔다.
이 소란 통 속에서도 영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걸 모르고 계신 건지, 아니면 영감님도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되도록 전자였으면 좋겠지만 지금 영감님을 뵙고 작별인사를 할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가족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긴 싫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안장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이동할 때마다 황제가 준 여비가 든 주머니를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니길 잘한 것 같다. 그 사이 별채 밖으로 나온 티리얼이 상처를 입은 혼의 기사들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신관의 치료 없이 마왕과 싸울 셈입니까?”
마지막 발악을 하듯 티리얼이 외치는 물음에 나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나를 치료한다고? 너는 서서히 오는 죽음일 테지. 네 독에 죽을 바에야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독이라고?”
“무슨 소리야. 용사님께 독을 썼다고?”
말 위에서 차게 일갈하는 내 말에 기사들이 낮게 소곤대며 나와 티리얼을 번갈아 바라봤다. 저게 무슨 소리래? 신관님이 독이라니? 작은 소란이 일어나자 유 혼이 짧게 명령해 기사들의 입을 막았다.
“오해를 풀지 않을 생각입니까?”
소문을 우려해서인지 유 혼과 티리얼은 끝까지 오해로 몰고 갈 속셈인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여기서 더 설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대충 얻었다.
티리얼을 만나 일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던 건 차라리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쨌든 내가 동료를 원하지 않을 빌미를 제공해 줬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 마왕을 쓰러트린 후에 다시는 제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 그러니 제국의 황제에게 안심해도 좋다고 말하라. 그런데도 나를 뒤따라오는 이가 있다면 동료로 여기지 않겠다. 마족과 동등한 적수로 여기고 쓰러트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따라오면 죽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펠런 말투 따라 하는 거 너무 힘들다. 뭔가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머리를 굴리며 단어를 내뱉긴 하는데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수틀리면 다 죽여버린다? 라고 경고하는 편이 마음도 편하고 황제도 이해하기 좋을 텐데.
하지만 이왕 이렇게 콘셉트를 잡은 김에 제국의 녀석들 앞에서 끝까지 이 모습으로 갈 생각이다. 신의 대리인답게 단호하면서도 근엄하게 굴어야 놈들도 나를 얕보지 않을 거고 말이다. 초면에 독을 쓴 걸 보면 이미 얕보인 걸지 모른다는 추측은 잠시 보류하고.
나는 그대로 말을 몰아 혼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영감님께 가겠다는 인사를 못 한 점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미적대다가 내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황제가 처리하고 싶어 하는 용사와 자신의 손주가 같은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영감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