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용사 (1)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나는 눈만 굴려 창밖을 봤다. 창문 하나 사이에 두고 잡음처럼 빗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금방 잠에서 깬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렇구나. 살아서 돌아왔구나.
자각하고 나자 뒤이어 밀물처럼 온갖 감정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죽었다. 마물의 발톱에 배가 뚫리고 독에 중독되어 처참하게 죽었다. 그 순간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끔찍한 절망감에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고 고개를 깊이 파묻었다.
아프고 괴로웠다. 죽는 순간에도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두려움이 거친 모래처럼 나를 긁고 상처 냈다. 너무 괴로워서 그런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폐가 터지도록 숨을 몰아쉰다.
“흡, 읍, 흐윽!”
숨을 뱉는 법을 잊은 것 같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워서야 간신히 길게 숨을 뱉었다. 슬픔보다 공포가 더 컸다. 얇은 막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자허 블리스일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나를 짓눌렀다.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무거운 감정이 도리어 나를 깨웠다. 겁이 난 탓이다. 이렇게 계속 감정에 매몰되면 결국 화석처럼 굳어 아무것도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예전 생에 몇 번이나 겪었다.
그러니 우선 움직이자. 우는 건 나중에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순서대로 하나씩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덮고 있던 담요를 걷고 낡은 침대에서 일어나 내 몸부터 살폈다.
누구의 몸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사지에 제대로 근육이 붙어 있다. 몸을 일으켰더니 시야가 평소보다 조금 더 높다. 키가 큰 사람인가? 손바닥에 단단히 잡힌 굳은살이 마음에 든다.
침대와 협탁 그리고 낡은 거울을 확인하고 나는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신었다. 이 육체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잘 쓰겠다고 뻔뻔스레 생각하며 나는 먼지 뒤덮인 거울 앞에 섰다.
새삼스럽지만 거울에 비친 이는 자허 블리스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잘생긴 놈이네? 거울에 비친 몸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레몬 속껍질 같은 백금발이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하다. 눈매가 강건하고 얼음처럼 맑고 푸른 눈이 인상적인 미인이라. 빛의 신의 취향이 미인인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백금발에 푸른 눈의 미인은 거의 없다. 내가 소설 전문을 다 외우는 건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런 묘사의 녀석은 한 놈뿐이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나오지 않고 소설 내내 전문직으로만 불리는 놈. 『굴러라 용사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호구력을 보여주던 놈.
제목을 충실히 따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르고 또 구르다가 결국 마지막에 뒤통수 맞을 사망 플래그만 무수히 쌓고 어정쩡하게 세상을 구한 그놈 말이다.
이런 젠장, 아무래도 나는 용사가 된 모양이다.
필요없이 결 좋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이마 뒤로 쓸어 올렸다. 이 상황을 예상을 못 한 건 아니다. 여신이 내게 했던 말들에 내가 용사가 될 거라는 암시는 차고 넘쳤으니까.
그래도 말이야. 사람이 늘 최악만 생각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래서 불길한 가정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세상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용사를 시키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내가 용사가 된 게 확실한 건 아니다. 백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흔한 지역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몸이 용사의 친척일 수도 있고, 용사와 전혀 관계없는 단역에게 들어온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여신과 대화하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다. 내게 일어난 일을 비롯한 장소와 시간을 파악해야 가장 먼저 뭘 할지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비가 내리는 탓에 방 안이 어두컴컴하다. 나는 빛 덩어리를 만들어 천장에 띄웠다. 처음 쓰는 마법인데도 숨 쉬는 일만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마나 홀에서 빠져나간 마력도 매우 적은 편이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 먼지 낀 창문을 열고 내가 눈 뜬 장소를 확인했다.
낮게 구름 낀 하늘과 빼곡하게 들어찬 회색 건물들이 이국적이다.
내가 눈을 뜬 방은 건물의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층고가 낮은 편이라, 창밖 도로 쪽으로 뛰어내려도 다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2층 건물이라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되겠지.
자허 블리스의 몸으로 익히 보아온 제국의 건축양식이 아니다.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일 가능성이 크다. 풍경은 좋게 말해서 실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삭막하다.
장식이라고는 전혀 달리지 않은 2층 혹은 3층의 건물들이 숲처럼 빼곡하다. 길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마차가 없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에 눅진하게 달라붙은 먼지에 진저리치며 손을 뻗어 빗물에 손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닦을 수건을 찾아봐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침대 시트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았다.
새로운 몸이 걸친 옷은 짙은 하늘색의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낡은 구두 한 켤레뿐이다. 옷장을 열고 그나마 허리까지 내려오는 얇은 흰색 코트를 걸쳤다.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대륙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들어온 몸이 진짜 용사가 맞는지도 알아야 할 것 같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뒤져봤다. 역시나 내가 자허 블리스의 몸으로 애지중지 모아온 비상금 주머니는 잡히지 않았다.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도토리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다람쥐처럼 사라진 목돈을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오열했다.
빛 덩어리를 거두고 몸 전체를 마법으로 스캔했다. 여신에게 받은 구슬은 제대로 내 안에 흡수된 듯했다. 걷고 말하는 것처럼 마법을 쓰는 게 자연스럽다. 그 외 다른 두 기술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만큼은 정말 다행이지 싶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보였다. 이전보다 더 예민해진 감각으로 이 건물 안에 나 외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다. 감각만이 아니다. 몇 걸음 걷는 것만으로 내가 달라진 것을 체감했다.
체력과 근력을 포함한 모든 육체적인 능력이 자허 블리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지금의 몸에 비한다면 내가 십여 년간 수련한 자허 블리스의 몸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다.
죽어라 하고 노력을 해봤자 신이 주신 육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긴 그러니까 신인 거겠지.
복도 끝 계단을 찾아 아래로 내려갔다. 텅텅 빈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먼지 쌓인 계산대가 조금 음산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것 정도가 아니라 문을 닫은 여관 같다.
눈을 감고 기감을 확대했다. 건물뿐만 아니라 건물 밖 어디에서도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몸에 들어와 압도적으로 넓어진 내 간격 어디에서도 말이다.
유령도시. 기분 나쁜 장소에 있다는 두려움에 진저리치며 나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여관 문을 열고 나가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것만이 아니다. 창문을 열고 봤던 회색 하늘은 사라졌고 높고 푸른 하늘에 해까지 쨍쨍하다. 시야가 갑자기 밝아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철퍽―
하는 물소리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본다. 발목까지 잠긴 맑은 물이 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바닥은 단단한 흰 타일이다. 거리가 잠길 정도로 비가 온 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회색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내가 나왔을 문이 보이지 않았고 타일을 둘러싼 목이 낮은 벽만 보였다. 이런 맙소사. 아까 창을 통해 봤던 회색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문 하나를 두고 공간 이동을 한 것 같다.
나는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정면을 응시했다. 희고 매끈한 도리아식 기둥들이 열서너 개 정도 내가 서 있는 인공 연못을 둘러싸듯 서 있었다. 천장은 뻥 뚫려 푸른 하늘이 보였고, 기둥 너머 보이는 건 기둥과 마찬가지로 흰 3층 건물들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사면이 건물로 둘러싸인 중원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인공 연못 같았다. 바닥을 타일로 마감한 연못 한가운데에 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의 갈라진 틈에서 맑은 물이 흘러넘쳐 내 발목 깊이 정도의 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그리고 바위 한가운데 반쯤 박힌 검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상황, 그리고 이 타이밍에 등장하는 검이라고 하면 보통은 성검일 가능성이 크다. 용사만 뽑을 수 있다는 그 검 말이다.
문을 열자마자 발견한 검을 통해 빛의 여신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가 노골적이기 짝이 없다. 그래. 다른 가정들은 다 버리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데 집중하자. 저건 성검이 맞고 나는 용사인 게 확실하니까.
이번에는 아서왕 전설이냐? 깊게 한숨을 내쉬고 바지를 척척하게 적시는 물은 무시하고 분수대를 가로질러 흰 바위로 걸어갔다. 아무 장식이 없는 뭉툭하고 둥근 폼멜과 장식 없이 매끈한 그립과 가드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배급하는 연습용 장검과 똑같이 생겼다.
그립을 쥐고 검을 잡아당기자, 두부에 꽂아둔 것처럼 검이 자연스럽게 뽑혔다. 보기보다 제법 무게가 있지만 휘두르기 딱 좋을 정도의 무게다.
이미 몇 번이고 사용한 것처럼 손에 착 붙는 데다, 블레이드의 무게 중심도 완벽하다. 심지어 물속에 처박아 뒀는데 검날이 방금 손질을 마친 것처럼 예리하고 깨끗하다.
이 근처에 호수가 있다면 집어 던지고 싶네.
이대로 다시 검을 바위에 꽂고 내 갈 길을 가면 어떨까 궁금했지만 검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성검이고 자시고 일단 내가 봤던 검 중에서 제일 상태가 좋다. 가볍게 휘두르자 맑고 예리한 파공음마저 만족스럽게 들렸다.
그래, 검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무기는 잘못 없다. 휘두르는 사람이 문제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오, 드디어 빛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도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서 나는 검을 쥐고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던 인공 연못 주변에 흰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이 빙 둘러서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울고 있었다.
어디서 이 많은 인원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검을 뽑기 전까지 무언가가 그들과 나 사이를 가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지금에서야 내가 저들의 기척을 알아차린 걸 보면 말이다.
“빛의 대리자여, 용사여, 드디어, 드디어 오셨나이까!”
다니엘 블리스와 비슷한 연배의 수염 성성한 할아버지가 원형 분수대 가장자리에서 곧 뛰어들 것처럼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그러나 투명한 뭔가에 막힌 듯 분수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손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이 드신 분이 저러고 있는 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어서 어느 순간 내 허리춤에 매달린 단출한 검집에 검을 수납하고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수염 할아버지를 향해 걸어갔다.
“대신관님 진정하십시오! 이러다 졸도하십니다.”
“복되도다! 드디어 기도가 닿았음이라!”
저들이 입은 흰옷을 알고 있다. 나도 종종 봤던 빛의 신관들이 입은 법복이다. 그리고 울고 있는 할아버지가 쓴 크고 높은 흰 관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물건이다. 저 관을 쓸 수 있는 직위는 단 한 명뿐이다.
초면인 대신관에게 배운 대로 예를 갖춰야 하는 건지 아니면 검을 들고 당장 튀어야 하는지 격렬하게 갈등하는 사이 대신관이 허우적거리다 못해 앞으로 휘청거렸다.
“신의 부름을 받은 용사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온 신의 대리자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빛의 신이여.”
곧 졸도할 것처럼 경련하는 대신관을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고위 신관이 부축했다. 튈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우두커니 서서 대신관을 바라봤다. 일단 분수대에서 나가고 싶은데 나갈 자리 없이 분수대를 빙 둘러싼 사제들의 시선이 매우 부담스럽다.
“이 땅에 사악하고 끔찍한 어둠의 사도가 내려오고 벌써 3년, 드디어 신께서 우리의 부름에 응해 용사를 내려주셨다.”
“…3년이라고?”
부드럽고 낮은 저음이 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와, 이게 내 목소리라고? 헛소리를 지껄여도 설득력이 생길 것 같은 미성이다. 내 목소리에 감격한 게 나 혼자만은 아닌 듯 대신관이 왈칵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기도하듯 움켜쥐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 빛의 대리자여. 사특한 마왕이 지상에 강림한 후 자그마치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라도 우리의 기원을 들어주신 빛의 신께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한 대신관을 필두로 마치 대가 부러진 허수아비처럼 신관들이 털썩털썩 무릎을 꿇고 마치 내가 빛의 신인 양 나를 바라보며 오열했다. 진짜 부담스럽다, 이 광신도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분수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신발과 바지 밑단의 물기가 분수대 밖으로 나오자 거짓말처럼 사라져 보송보송해졌다. 신발에 물이 들어가면 움직이는데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는데 순식간에 말라서 다행이다.
일단 의문 중 하나가 해결된 것 같다. 여기가 어딘지 짐작했다는 말이다. 대신관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인공 연못. 그리고 성검이 박힌 바위를 보아하니 자유무역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인 대신전인 듯했다.
기억대로라면 내가 나온 연못은 빛의 신이 인간에게 준 이적 중 하나인 성수가 흐르는 바위인 모양이고.
내가 연못 밖으로 나오자 짧은 기도를 마친 대신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나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몸이 잘생긴 건 알지만 할아버지뻘인 사람이 저렇게 열렬하게 쳐다보니 좀 부담스럽다.
그보다 어둠의 사도가 내려오고 3년이라니? 빛의 신과 대화한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신이 머무는 공간은 인간이 사는 땅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걸까? 그래도 3년은 너무했다.
마왕이 각성하고 3년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일단 드로젠과 여섯 제후국을 비롯한 제국이 무너졌던가. 아니면 제국은 살아남았나? 소설 원작이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용사가 이런 식으로 등장했던가?
하긴 인제 와서 원작의 흐름대로 사건이 벌어질 리 없다. 어차피 지금의 마왕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생각할 것은 많은데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자세히 묻기 전에 대신관이 내 지척까지 다가와 공손히 입을 열었다.
“신의 기적이신 대리자님. 저는 이 땅에 빛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낮은 자 중 가장 낮은 자, 대신관 토드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찾아오신 것을 찬양, 또 찬양할지어다.”
“…….”
잘 움직이던 세 치 혀가 이 상황에서 아무 일을 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있어야 입을 열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듯 다시 대신관 토드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용사의 몸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신의 기적이 맞긴 하는데, 나는 빛에 유감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여기 오기 직전까지 빛의 신에게 최선을 다해 엿을 먹였다는 걸 알고도 대신관이 나를 찬양할지 모르겠다.
“위대한 대리자, 용사님께 인세의 법칙을 말씀드리기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제 용사님은 황제를 만나러 제국으로 가서야 합니다.”
“황제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고?
자칫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질문을 애써 삼켰다. 마왕이 각성한 후 3년이 지났다면 제국은 벌써 망했어야 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인간의 영토는 동쪽의 소국과 자유무역 도시뿐이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라는 직책은 이 땅에 머무는 인간들의 나라 중 가장 큰 제국의 지배자를 일컫는 말인데…….”
내가 황제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갑자기 황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대신관의 말을 자르고 나는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황제는 제국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신의 사도여. 저는 고작해야 신의 기적을 찬양하는 사제일 뿐이니 지상 어디에서도 당신이 말을 높일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다. 다만 대륙의 상황은 자세히 알지 못하니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할아버지 연배인 분에게 말을 놓기 멋쩍지만, 신의 대리자가 된 이상 대신관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들은 걸 써먹기에 가장 적합한 말투를 흉내내 봤다. 펠런의 말투가 내게 잘 어울릴까 걱정했는데 용사의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어색함이 없다.
“황제를 뵙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겁니다. 신의 대리자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지상에 강림한 것인지 그들도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저를 따라서 오십시오.”
성검을 허리춤에 차고 나는 대신관의 뒤를 따라 성수가 흐르는 바위를 벗어나, 신전 안쪽으로 향했다. 바로 황제를 보러 제국으로 떠날 줄 알았는데 그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하긴 나도 현재 대륙의 정세라든지 마왕군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대신관과 고위 신관은 대륙의 상황과 마왕군의 행보는 제쳐두고 필요없는 황제를 알현할 때 필요한 예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상에 당신보다 높은 이는 없으니 황제 앞에서도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쪽에서 성검이라 할지라도 황제를 알현할 때 검의 패용을 불허한다 했으니, 함께 갈 고위 신관에게 잠시 성검을 맡기셔야 할 겁니다.”
황제의 성격을 들어서 아는데 용사고 자시고 그 앞에서 말 높여야 할걸? 자칫 원작의 끔찍한 호구 짓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고위 신관은 침중한 얼굴로 신관이 황제를 뵐 때 해야 할 예법에 관해 설명했다.
무기의 패용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한 번 구겨진 대신관의 얼굴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구절에서 결국 움켜쥔 도화지처럼 거칠게 구겨졌다.
“신의 대리자께서 인간의 예법을 배워야 한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오.”
분통을 터트리는 대신관 토드의 눈치를 보며 내게 예법에 관해 말하던 고위 신관이 작게 속살거렸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입니다. 마왕의 대군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기사들이 필요하고요.”
“오직 용사만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소. 그 외 어떤 대적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마족의 땅에서 누가 용사를 수호합니까. 혈혈단신 북부 산맥으로 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구색을 갖추기라도 해야 하는 것을요.”
“황제께서 직접 이곳으로 오셔야 하는 게 맞지 않소?”
“듣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군!”
벌컥―!
거칠게 문을 열며 제국 기사복을 입은 서너 명의 기사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덩치가 제법 크고 단단한 이들뿐이라 달리기를 해도 될 만큼 큰 방이 꽉 차 보였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나는 구겨질 것 같은 표정을 관리하며 무심한 척,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의 대리자인 척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를 사이에 두고 정교와 제국이 알력 싸움을 하는 이 상황이 존나 불편해서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왜 나를 두고 싸우고 그래. 부담스럽게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경하다. 황제 폐하의 발이 닿는 곳은 오로지 제국뿐이니, 아니면 자유무역 도시가 제국 안에 들어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무례하십니다. 빛의 대리자께서 머무시는 공간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이다니요.”
“내 주인은 빛의 대리자가 아니라 제국의 지배자이시니 내 주인을 욕되게 하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마왕이 강림하고 이제 3년이다. 묵묵부답이더니 제국이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나타난 용사 아닌가.”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제국의 기사가 나와 대신관을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가만히 있던 나는 왜 노려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적으로 인지한 것 같은 시선에도 뻔뻔하게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입안이 바작바작 마르는 기분이다.
『굴러라 용사님』에서도 이런 분위기였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황제는 이미 죽고 없었지. 대신 살아남은 인류가 힘을 합쳐 연합군이라는 걸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도 정교와 연합군은 이런 식으로 싸웠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그 사이에서 동료라고 쓰고 적이라고 읽던 놈들에게 죽어나갈 뻔한 건 용사였고.
상대를 벨 것처럼 날카로운 말들이 몇 번이나 오갔다. 젠장, 이럴 시간에 누가 내게 마왕군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듣고 있다가 시간만 지체할 것 같아 나는 영양가 없는 신경전을 자르기 위해 신관과 기사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없다.”
“인간의 예법을 안단 말이오?”
“그래, 내가 이 땅에 내려온 이유를 안다면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 텐데?”
내 말을 투박하게 자르며 기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숨기지 않는 적의와 더불어 기사 특유의 호승심이 나와 내 허리에 걸친 성검을 꿰뚫듯 보고 있다.
그래. 기사면 나와 싸워보고 싶겠지. 유일하게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용사가 어떤 실력인지 알고 싶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저 망할 제국 기사 놈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말발로 어디서 진 적은 없다.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을 앞에 두고 척을 지고 싶은지 돌려 묻자 제국 기사가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이 3년 전 마왕의 강림과 함께 지상에 내려왔다면 시간이 촉박하지도 않았을 거요. 황제 폐하께 바쳐야 할 예법을 알고 있다니 되었소. 빛의 신께서 이제라도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다행이군.”
늦게 등장한 주제에 지체하니 어쩌니 하지 말라는 경고다. 내가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빛의 신이 나를 이 시간대에 보낸 건데 뭐 어쩌라고. 성격대로 비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용사께서는 이제 막 인간의 땅에 발을 들이신 겁니다. 수행할 이가 필요하실 테니 고위 신관 둘과 함께 가시지요.”
“황제 폐하께서 부른 이는 용사뿐이다. 고위 신관은 황제 폐하의 곁에도 있으니 그들이 용사를 도울 것이다.”
뭔가 더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연 대신관 토드의 앞을 제국 기사들이 막았다. 제국을 비롯한 인간의 나라에서 모든 국교는 빛의 신이며, 빛의 신은 인간의 신이기도 하다.
정교분리가 되지 않은 대륙 내에서 제아무리 제국의 힘이 대신전에 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해도 황제나 고위 관리가 아닌 제국의 기사가 대신관을 겁박할 수 있다니, 내가 사라진 3년 사이 힘의 균형이 제국에게 급격하게 치우쳐질 만한 일이 벌어진 걸까.
“귀하신 분입니다. 빛의 대리자이십니다. 이런 식으로 모셔 가실 수 없습니다!”
“급한 일이라 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용사를 만나보실 것이니 대신전은 그만 물러서라.”
“용사님, 아아. 용사님!”
상황이 내게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국 기사들은 마치 대역 죄인을 호송하듯 앞뒤로 나를 둘러싼 후 신전 앞에 대기 중인 사두마차에 태웠다. 그 뒤를 법복이 흐트러지도록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온 대신관과 고위 신관 중 누구도 함께 마차에 타지 못했다.
‘…튈까?’
몇 년 전 움막을 떠나 영감님을 만나러 갈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불안하고 미래가 막막한 것도 비슷한 것 같다. 그때 영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가 한 일들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그 비슷한 수가 황제에게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내 실력이라면 이 정도 기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가는 건 간단해서 더 고민이다.
넓은 좌석을 놔두고 굳이 내 좌우에 기사들이 포위하듯 앉았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건 아까까지 대신관에게 쏘아붙였던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제국 기사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거만하게 턱을 든 기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국을 수호하는 제 1기사단의 부단장 수 혼이오.”
“혼가의 기사인가?”
“…혼가를 알고 있소?”
“제국을 수호하는 가장 예리한 검을 모를 리가 있나.”
제국을 수호하는 검, 블리스를 비롯한 여섯 제후국을 일컫는 수식어지만 그중에서도 혼가는 대대로 황족의 가장 큰 신임을 받은 가문이다. 황후와 고위 관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식어도 특별히 가장 예리한 검이시다.
자허 블리스 때 기억을 떠올려 대답하자, 부단장 수 혼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짧게 헛기침을 한 수 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상황이 좋지 못해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소. 내가 모시는 주인을 깎아내리는 불온한 성직자들을 앞에 둬 분을 참지 못하겠더군.”
“이해한다.”
딱 봐도 떠보는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을 돌려 하지 못하는 투박한 기사처럼 굴고 있지만, 속내가 확실히 보였다. 여기서 내가 그의 말에 동조할 건지 아니면 신관들을 감쌀 건지 알아보겠다는 심보인 거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건 내 주특기기도 하다. 나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지금 이해한다 했소?”
“황제 폐하는 빛의 신께서 인정하신 지상의 지배자이시다. 내가 신의 뜻대로 어둠의 사도를 격멸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것처럼 황제 폐하께서 지상을 지배하는 것 역시 빛의 뜻이며 의지이니 그분을 깎아내린다는 것은 빛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당신이 대신관에게 한 행동은 옳다.”
목소리 좋고, 무표정한 얼굴 또한 설득력을 더한다.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이는 혀에 만족했다. 펠런을 따라 한 말투가 무뚝뚝한 것에 오히려 가산점을 주고 싶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아부를 한 거지만 말한 대상이 빛의 대리자니 없던 진정성도 생길 판이다.
“황제 폐하께 영광 있을지어다. 혹여 인간사에 무지한 자가 올까 걱정했건만 신께서 제대로 된 사도를 지상에 내려보내셨군.”
“빛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와 그의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내가 내려온 것이니, 황제 폐하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 아부를 떤 게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내 좌우에 앉은 기사부터 부단장 수 혼까지 내 대꾸에 감격한 얼굴을 하고 있다.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이 빛의 광신도라면 이쪽 제국 기사들은 황제의 광신도인 거다. 내 말을 진정성 어린 빛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여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일그러진 미소를 감추기 위해 차창 밖을 바라봤다.
내가 없는 3년 사이 세상에 완전히 미쳐 돌아가게 된 게 아니라면, 그 전부터 황제와 제국은 신전과 알력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말이지, 세상을 구하러 온 용사를 알력 다툼에 끼워 넣을 정도로 맛이 갔을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니 북부 산맥에 바슈키가 침공했을 때 가장 먼저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혼의 가주를 자신의 곁으로 부른 이가 황제다. 그때 황제가 지금의 황제와 같은 인물이라면 상황이 미쳐 돌아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용사를 위한 제국의 공명정대한 지원은 물 건너갔다는 소리다.
어차피 상관없다. 제국의 도움을 원한 적도 없고 지원을 받아봤자 불편하기만 할 거다. 그리고 원작에서 용사가 동료들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기도 하다.
황제를 드높이는 내 말을 듣고 굳은 표정을 푼 제국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옅게 웃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동상이몽이라고 하던가.
펠런을 보고 싶다.
마법을 배우면 가장 먼저 놈에게 통신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어렵게 됐다. 마법사끼리 통신하려면 직접 만나 링크를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이 몸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결국, 뭘 하든 발로 뛰어야 한다는 소리다.
내게 천국에 관해 묻는 제국 기사들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뭔가 이 시점에 떠올라야 할 문제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잊은 건지 모르겠다.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 듯 영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길 빌 뿐이다.
“제국까지 마차로 달리면 하루가 걸리지. 혹시 모르니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 해야 할 예법을 알려 드리겠소.”
“날붙이는 모두 알현실 입구에 맡긴 후, 황제 폐하께서 앉아 계신 옥좌까지 걸어간다. 붉은 카펫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뒤 폐하께 성명을 말한다. 폐하께서 고개를 들어도 된다고 허락하시면 고개를 들되, 폐하의 용안을 직시하지 않고 그분께서 먼저 말을 걸기 전에 입을 열어서도 안 된다. 나갈 때는 그분에게 등을 보이지 않게 뒷걸음질 쳐서 나와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예법에 다른 점이 있나?”
“…정확하게 알고 있군.”
그럴 수밖에 없다. 아카데미 예법 시간에 배운 거거든. 이쪽 세상 시간으로 3년이 흘렀다고 해도 내겐 몇 주 전에 배운 내용이다. 까먹고 싶어도 까먹을 수가 없는 거다.
거기다 내가 알고 있는 예법은 기사 서임을 받기 위해 황제를 배알할 때 해야 하는 예법이니 부단장의 마음에 쏙 들겠지.
빛의 대리자인 용사가 지상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다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 고개 뻣뻣하게 들고 움직일 생각 없다. 아무리 마법과 검술이 강해졌다고 해도 나는 이기적이고 멍청한 권력자를 굳이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부단장 수 혼과 함께 온 상급 기사 둘은 완전히 경계가 풀린 것처럼 굴었다. 그렇다고 속마음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나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않을 생각이다.
한나절 가까이 달리던 마차가 저물녘 혼의 국경 근처 도시에 도착했다. 노숙할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다.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할 줄 알았는데 마차가 도착한 것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어떤 남작의 저택이었다.
남작은 부단장이 내민 제국 기사의 명패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손님용 방들과 음식을 대접했다.
나와 수 혼 부단장이 한방을 쓰고, 다른 두 기사가 나머지 방을 쓰게 되었다. 혼자서 자는 편이 좋지만, 별말 하지 않고 부단장이 하자는 대로 움직였다. 어차피 나를 감시하기 위해 한 명 정도는 같이 잘 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저녁 식사는 남작의 가족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으로 준비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 차려진 음식은 제법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하긴 제국 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기사가 셋이다. 플레이트 아머보다 더 위압적인 모습 때문인지 남작의 어린 아들도, 그의 배우자도 뻣뻣하게 굳어 기사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부디 그 검을 견식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녁 식사 후 상급 기사 한 명이 내게 대련을 요청했다. 허리춤에 찬 아밍소드를 고쳐 쥔 그의 얼굴에 호승심이 역력하다. 여하튼 검 쓰는 놈들은 다 똑같다. 나 역시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했기에 저택 내 연무장에서 대련하기로 했다.
“잘 부탁합니다. 기사인 진 미스트입니다.”
20대 중반의 검사가 아밍소드를 들어 올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 역시 성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진 미스트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기억나지 않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이 아니길 빌 뿐이다.
나도 이름을 말하고 싶지만, 용사의 이름을 모르니 대충 잘 부탁한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가명을 정하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처음 본 상대에게 본명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 소설에서 용사는 그냥 용사다. 등장인물 누구도 용사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마왕이 마왕인 것처럼 용사는 교류를 할 수 있는 인격체로 봐주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신화 속에 나오는 상징 같은 존재고 나쁘게 말하면 마왕을 무찌르면 그만인 도구일 뿐이니까.
“선공을 양보하겠다.”
수긍함과 동시에 진 미스트가 한 손에 쥔 아밍소드를 휘두르며 단번에 거리를 좁혀왔다.
제국의 기사다. 자허 블리스의 몸이었다면 제대로 상대하는 것도 벅찼을 텐데, 용사가 되고 나니 진 미스트의 움직임이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느껴졌다. 검을 쳐내고 제압할 궤적이 눈에 선하다.
펠런도 이런 느낌으로 나와 대련했을까? 생각해 보니 조금 부끄럽다. 예전의 난 저 기사보다 못한 실력이었을 텐데 악착같이 한 대라도 때리겠다고 덤비는 게 놈의 눈에 얼마나 귀엽게 보였을까.
사정을 봐주며 상대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용사가 어떤 수준인지 제국의 기사에게 제대로 보여야 할 필요도 있고 말이다.
진 미스트와의 대련은 그 자신의 호승심보다 부단장 수 혼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황제에게 가기 전 내 실력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 말이다.
부단장이 나를 직접 상대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명색이 부단장인데 만약 대련에서 진다면 그 모습을 아래 기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거다.
“…졌습니다.”
단 세 합 만에 진 미스트의 목젖에 성검을 겨누고 항복을 받아냈다. 순순히 검을 내리고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상대를 보며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신에게 받은 육체의 강함이 십여 년간 수련한 내 기억과 제대로 맞물려 움직였다. 그래도 자허 블리스였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속도도 힘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창을 다루면 더 확실하게 싸울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겠지. 누가 내 창술을 보고 블리스가의 비전 창술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영감님은 잘 계실까.
검집에 검을 수납하며 나는 쓰게 웃었다. 인제 와서 내가 버린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말자. 북부 산맥을 떠날 때 나는 블리스의 이름을 버렸다. 육체마저 바뀐 지금은 더욱 블리스와 아무 연관이 없다.
“덕분에 좋은 검을 견식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신화에 나오는 실력 그대로군요.”
“나야말로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의 검과 맞댈 수 있어 영광이었다.”
대결 후 의례적인 겸양의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상투적인 내 대답에 진 미스트도, 그리고 멀리서 우리의 대련을 지켜본 수 혼도 만족한 눈치다. 내가 귀족을 대하는 예법을 알고 있다는 데 안도한 걸까. 아니면 전설 속 용사의 실력에 감탄이라도 한 걸까.
제국의 황제는 제멋대로의 인물이다.
북부 산맥에서 혼가의 가주가 황제의 명령대로 최전선에서 물러났을 때는 노골적인 황제의 행동에도 그의 편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깨달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
자허 블리스일 때는 협소했던 시야가 제대로 넓어졌다.
이게 빛의 여신이 내게 건 제약이 풀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황제와 만나야 하는 상황을 목전에 두고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다. 그때는 황제고 대륙이고 신경 쓰지 않고 내 수련에만 집중했으니 말이다.
“여력이 되신다면 제게도 당신의 검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제국의 기사와 검을 맞댈 수 있다니 기쁘게 생각한다.”
“승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부디 지도해 주십시오.”
동행한 다른 한 명의 기사가 다시 대련을 신청했다. 제 몸집만 한 클레이모어를 쥔 기사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클레이모어에 사용자의 근력 강화 마법이 걸려 있나?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력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읽혔다.
내가 자신에게 걸 수 있는 버프 마법만 해도 그 수가 십여 가지에 이른다. 그걸 다 걸고 움직여도 사나흘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흘러넘치고 있지만, 굳이 버프를 걸지 않아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펠런이 왜 디버프를 걸고 나와 대련한 건지 알 것 같다. 집중하지 않으면 검과 함께 상대의 손목도 날려버릴 것 같다.
만약 여신이 내민 구슬 중 검술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까? 나는 쓰게 웃으며 내 두개골을 부술 듯 내려꽂히는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옆으로 흘렸다.
대련이라기보다는 검술 지도에 가까운 승부였다. 나는 검을 맞대는 동안 기사가 원하는 대로 간격과 기술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대련이 끝나고 진 미스트가 이번에는 지도 대련을 부탁했고, 부단장 수 혼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내게 대련을 요청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밤이 깊어 달도 저물었다. 마법을 써서 주변을 밝힐 수 있지만 그래서야 저택의 주인인 남작들의 수면에 방해가 된다.
번갈아 대련하다가 나가떨어진 두 기사가 흙먼지에 더러워진 몸을 씻기 위해 발을 질질 끌며 저택 안 대욕탕으로 향했고, 나도 방 안에 딸린 욕실에서 가볍게 몸을 씻었다.
젖은 머리를 마법으로 말렸다. 순식간에 보송보송해진 백금발을 대충 하나로 묶고 남작이 준비해 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씻으며 새삼 깨달은 사실인데 키가 많이 커졌다. 아마 아카데미 시절 펠런과 눈높이가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근육도 조금 더 붙긴 했지만, 허리는 여전히 가늘다. 필요없는 군살은 전혀 붙어 있지 않은 완벽한 좌우 대칭의 몸은 차라리 아름답게 느껴졌다.
자허 블리스 때도 없었던 나르시시즘이 생길 것 같다. 신이 만든 몸이라서 이렇게 완벽한 거겠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1인용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원작에서 용사의 과거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왕이 강림하고 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무너지던 어느 해, 자유무역 도시에 자리한 대신전에서 신의 부름을 받은 용사가 기적처럼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용사가 자유무역 도시에서 살고 있던 평범한 기사 지망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지.
부단장 수 혼은 잠시 집주인인 남작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 틈에 침대에 모로 쓰러져 베개를 끌어안았다.
지금 와서 이종족의 섬으로 도망치고 싶냐면 그것도 아니다. 마지막에 본 펠런의 얼굴이 눈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울고 있을까. 내 생각은 할까. 죽기 전에 놈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용사를 죽여. 멱을 따버려.”
“…빌어먹을.”
갑자기 떠오른 내 마지막 말을 생각하며 베개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줬다.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거였구나.
어떻게든 놈을 살리겠다고 죽어가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외쳤던 말들이 내 목을 죄어왔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라고 했던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용사가 더 강해지기 전에 죽이라고 했던가.
‘…이종족의 섬으로 가는 배편이 자유무역 도시에 있었지.’
나는 침착하게 승선권을 살 방법을 떠올려봤다. 더불어 제국의 기사들을 피해 도망칠 방법도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펠런 놈을 만나자마자 죽게 생겼다.
아니지, 나도 놈 못지않게 강해졌으니 즉사하진 않겠지. 내가 유마라고 외칠 시간을 벌 정도의 실력은 되길 바란다. 설마 놈이 비열하게 암살을 시도하면 어쩌지. 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 못 하고 있을 텐데.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생각에 잠긴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 골머리를 썩인 탓에 아침에 눈 뜨는 게 조금 늦어졌다.
그래도 마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나 자신을 추스를 시간은 다행히 충분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거다. 우선 펠런을 만날 생각만 하도록 하자. 내가 용사고 놈이 마왕이라는 사소한 문제는 그전까지 접어둘 생각이다.
오후가 되어 해지기 전 혼을 가로질러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원작대로라면 전쟁 중인 상황일 텐데 수도의 풍경은 내가 로열 아카데미에 다닐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길거리의 분위기도 사람들의 표정도 말이다.
차창 밖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심드렁하고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원작의 마왕과 내가 알고 있는 펠런의 행보가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마왕의 행보를 들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빛의 신에게 대적하는 어둠의 하수인인 마왕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명제뿐이다. 그러니 마왕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면 좋겠군.”
고민해 봤지만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았다. 대련한 효과 때문인지 부단장 수 혼과 기사들의 태도도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말없이 시선을 나누던 기사 중 부단장 수 혼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3년 전, 대신전에서 성검이 공명을 시작했음을 알려왔소. 그래서 마왕이 각성했음을 탐지했지. 마법사들은 북부 산맥에서 거대한 마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파악했고 우리는 마족과의 전쟁을 대비해야 했소.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마족들은 움직이지 않았지. 도리어 드로젠과 맞닿은 마경에서 종종 출몰하던 마수와 마물들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
“대신전은 빛의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으나 신은 응답하지 않았소. 그래서 우리는 마왕의 각성이 오보이거나, 아니면 마왕의 각성이 불완전할 거로 추측했소. 기록에 의하면 역대 마왕들은 각성과 동시에 참혹하게 대지를 불태우고 인간을 살육해 왔으니까.”
“그러나, 각성했다면 필히 보여야 할 마왕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소. 마왕의 각성 여부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불안한 고요가 지속하던 올해, 결국 마왕이 그 송곳니를 드러내고 드로젠을 습격했소.”
“드로젠은 어떻게 되었나?”
“완전히 마왕의 손안에 떨어졌지. 침공 전에 마왕군의 침공 선언이 있었고, 대다수 드로젠의 국민이 이웃하는 제후국으로 피난을 할 수 있었소.”
“…….”
“검을 들 수 있는 드로젠의 모든 병사는 용감하게 마왕군과 혈전을 벌였고 패배했지. 드로젠의 왕족과 기사들은 전부 쓰러졌고 이제 드로젠 왕국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소.”
“다른 나라는?”
“아직 침략을 받은 나라는 없소. 드로젠의 국경에서 마수와 마물이 보이나 국경을 넘는 일은 없지. 살아남은 병사들과 기사 몇이 풍문이 맞는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오.”
“풍문?”
“수년 전 폭발적으로 증가한 마수들과 싸우다 사망한 드로젠의 왕자가 있었소. 그리고 마왕은 그 왕자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하더군. 용감하게 싸우다 죽고 나서도 왕자가 안식을 찾지 못한 것에 분노한 드로젠의 왕은 자신의 형제를 위해 검을 들었지만 패배했소.”
준 엑사 드로젠이 죽었나? 펠런이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 걸까. 손가락 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 같아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작 소설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소국 드로젠이 멸망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우선 만나자, 만나고 나서 생각하자. 놈이 용사인 나를 죽이려 들면 그때 도망치자.
사자의 입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사자가 엉망진창인 얼굴로 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최소한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놈에게 말해줘야 했다. 죽기 전에, 싸우기 전에 말이다.
“도착했소. 황제 폐하께 당신이 알고 있는 예를 다하길 빌겠소.”
블리스의 성, 그리고 아카데미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에 도착했다. 뾰족하고 높은 십여 개의 탑들, 지나갈 때마다 신원을 확인하는 성문들. 가운데가 뚫린 거대한 성의 꼭대기에 펄럭거리는 제국의 깃발이 눈처럼 희다.
나와 대련한 두 기사는 기사단으로 복귀하는 듯했다. 그 대신 수 혼이 나를 황제에게 안내했다. 마차에서 내린 후에 나는 수 혼의 뒤를 따라 황제의 접견실로 향했다.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그 시선이 신의 대리자를 보기보다 신기한 생물을 관찰하는 것 같은 호기심이 더 커서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제국의 지배자는 빛의 신이 아닌 황제라는 걸 시선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 용사가 도착했음을 말씀드리도록.”
제1 기사단 부단장 수 혼이 접견실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보고했다. 짧은 경례를 마친 후 기사 중 한 명이 정중히 문을 두드리고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접견실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굳게 닫힌 나무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감을 확대하면 그 안에 세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따금 움직이는 가장 약하고 비대한 이가 한 명.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수 혼 정도의 실력자가 한 명, 마지막은 한참 전 들어간 기사다.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 혼의 얼굴이 거멓게 죽어갔다. 죽기 전까지 단련을 거듭하는 기사가 몇 시간 서 있다고 다리가 아픈 건 아닐 테고,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에 긴장한 것이리라.
“곧 그대를 부르실 테니 경거망동하지 말라.”
“공사가 바쁘신 황제 폐하시니 기다림은 신하 된 도리 아니던가.”
“…그 말이 옳다.”
황제가 어떻게 대하든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선수 쳐서 경고하는 수 혼에게, 나는 그럴 생각 없다고 되받아쳤다.
도리어 내 대답에 수 혼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린다. 은은히 붉어진 얼굴이 최소한의 수치는 알고 있는 듯해서 나는 옅게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만든 건 수 혼이 아니니 그를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해가 저물기 직전 누군가 부단장 수 혼을 찾아왔다. 1 기사단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부단장을 호출한 것이다.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가 수 혼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찾아온 기사를 따라 사라졌다. 중간에 한 번, 접견실을 수호하는 기사가 바뀌고 나서도 접견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서녘 하늘에 걸린 해가 저물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한쪽 벽이 뚫린 접견실의 복도에 마법사들이 설치한 조명이 하나둘씩 커졌다.
접견실 안쪽에 오가는 이들이 몇 명 더 늘었다. 아무래도 친애하는 황제 폐하는 손님을 문 앞에 세워두고 저녁 식사를 즐기는 듯했다.
놀랍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황제가 대놓고 나를 엿 먹이는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이 몸에 들어와 처음 주어진 사색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펠런과 비견할 만큼 뛰어난 신체 덕에 피곤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놀랍게도 황제는 접견실에서 사라졌다. 설마 자러 간 걸까. 새벽이 깊도록 황제는 돌아오지 않았고, 접견실 입구를 지키는 기사도 한 번 더 교체되었다.
왠지 안쓰러운 생물을 바라보듯 나를 보는 기사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마법을 써서 조금 누적된 피로를 씻었다.
한 손으로 눌러 죽일 수 있는 생물이 이를 내밀고 잘근잘근 손가락을 씹으면 귀찮을 뿐이다.
황제가 어떤 의도로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 힘이 필요한 건 저쪽이고 어떤 의미에서 나는 황제를 비롯한 인간을 배신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서 꼬리 말고 짖는 개를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불쌍하기도 하지.
정오가 지난 후에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서 있는 동안 쓴 몇 번의 마법으로 내 몸은 여기 도착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배가 조금 고프긴 하지만 그 정도야 어릴 때 며칠 굶었던 날과 비교하면 멀쩡한 편에 속하기도 하고 말이다.
“신전에서 온 자의 접견을 허락한다. 황제 폐하의 크고 넓으신 마음을 찬양하며 들어가라.”
거만하게 턱을 든 시종의 말에 나는 예를 갖춰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 시종도 그리고 황제도 내 예전 장래 희망이 제2의 마왕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거겠지. 사실 그 꿈 아직 버린 적 없는데 말이다.
접견실에 들어가기 전 기사에게 성검을 맡긴 후 몸수색을 당했다. 노골적으로 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기분 나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참는 것밖에 없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눈앞에서 강아지가 깽깽거린다고 치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발치에 보이는 붉은 카펫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황제의 발끝에 시선을 두고 붉은 카펫의 끝에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지상의 지배자께 빛의 영광이 있으라, 이름 없는 자가,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왕족이 황제를 대하는 예법이 다르고, 기사가 황제를 대하는 예법이 다르다. 내가 배운 예법은 황제의 기사가 황제를 대하는 예법이다.
그리고 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황제는 고개를 들라는 말이 없었다. 내 뒤통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넘친 백금발이 바닥에 구불구불 흐드러졌다.
“이름 없는 자라?”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칼칼하게 쉰 갈라진 목소리가 귀에 듣기 좋지 못하다. 그러나 고개를 들라 하지 않았으니 나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렸다.
“빛의 대리인이라 했던가. 마왕과 유일하게 대적하는 용사라 했지. 그런 이가 인간의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건가?”
“…….”
“대답해도 좋다.”
여전히 고개를 들라는 말은 없었다. 상관없다. 개가 짖어봤자 그리 시끄럽지도 않다.
“지상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머리를 조아리겠습니까. 빛께서 지상에 이름 없는 이자를 내려보내신 이유는 왕 중의 왕이며 빛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황제 폐하의 검이자 방패가 되라 하심입니다.”
“빛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황제 폐하께서 존재하시기에 제국이 존재하는 것. 황제 폐하의 걱정이 제국의 걱정이요, 황제 폐하의 기쁨이 제국의 기쁨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름 없는 자. 폐하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자입니다.”
“…고개를 들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좌에 앉은 두툼한 개새끼를 바라봤다.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했을 몰골로 푹 퍼진 우동 면 같은 쭈글쭈글한 황제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내 검이라고?”
“황제 폐하께서 적을 무찌르라 하신다면 무찌를 것이고 황제 폐하께서 싸우라 하면 싸울 겁니다. 용사라 불리고 있으나 이 몸은 그저 검. 검을 휘두르는 것은 황제 폐하시니 그저 명하소서. 무기인 이 몸은 주인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내가 이 세 치 혀로 참 많이 싸웠다. 가슴에 손을 얹고 불어터진 황제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웃자, 황제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봤자 한 해 넘긴 감말랭이가 꿈틀거리는 꼴이었지만 말이다.
“그것이 진정 빛의 의지인가?”
“빛께서 이름 없는 저를 지상에 내려보내신 뜻입니다.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황제 폐하.”
물에 젖은 감말랭이가 몸을 일으킨 후 내게 다가왔다. 생리적인 혐오감에 몸이 조금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하신 분이 다가오고 있음에 황송한 듯 고개를 다시 숙이며 이를 갈았을 뿐이다.
“고개를 들라. 빛의 사도여.”
“위대한 폐하의 용안을 어찌 제가 가까이서 배알하리까.”
“검이라 했느냐. 검을 휘두르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일이라 했느냐. 그렇다면 네가 어둠의 사도를 해치운다 한들…….”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신 일이라면 그 모든 뜻과 이룩하심이 황제 폐하의 업적입니다.”
“그렇다면 용사는 네가 아니라 내가 맞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휘두르는 검에는 의지가 없고, 그 모든 공이 검을 휘두르는 기사에게 있듯, 황제 폐하께서 진정한 용사이시니 그저 이 이름 없는 자에게 의지를 내려주소서.”
접견실에 하루 밤낮을 세워 둔 걸 잊어버린 건지, 황제는 껄껄 웃으며 납작 수그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편협하고 이기적인 놈이다. 황제 자식.
“이 몸이 그대에게 단신으로 마왕과 맞서 그의 수급을 가져오라 명령한다면?”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빛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제가 해야 할 일이니 단신으로 가라 하신다면 단신으로 가겠나이다.”
“그대에게 병사를 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일당백은 개소리다. 나는 펠런과 나인이 마경에서 준비하고 있던 마족의 군대를 엿본 적이 있다. 그걸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걸 지금 황제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폐하. 검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싸울 뿐입니다. 그저 명령하소서.”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들자, 이제야 내 얼굴을 확인한 듯 감말랭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탐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좋아. 이 빌어먹을 놈이 나를 만지려 들면 여정에 필요한 물품이고 뭐고 당장 튀어야겠다.
황제는 나를 노골적으로 박대한 이유를 내 말 몇 마디로 잊어버렸다. 지극정성으로 지껄인 내 개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거다.
빛의 대리인이 거짓말을 할까? 싶은 것도 있을 테고, 입에 단 소리를 한 번의 의심 없이 냅다 삼키는 황제 놈의 멍청한 머리도 내게 기회였을 거다.
하긴 그러니 원작에서 마왕에게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멸망하지.
“대신전의 행보가 불온하여 내가 잠시 그대를 시험했다. 그러나 그대의 충심이 이리 깊으니 어찌 그대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빛께서 나를 위해 나의 검을 지상에 내려보냈으니, 기사들의 왕이며 왕 중의 왕인 내가 그대를 직접 휘둘러 간악한 마왕을 무찌르겠노라.”
“황제 폐하 만세. 지상의 영광이며 빛의 기쁨이시여.”
이보다 더 간지러울 수 없는 내 아부에 흡족한 듯 웃으며 황제는 나를 접견실 밖으로 물렀다.
“내가 곧 그대를 부를 테니 그대에게 배정한 방에서 대기하라.”
“제 주인이신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
황제는 시종을 불러 나를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하라 했다. 뜻밖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시종은 흠칫 몸을 떨더니 나를 황궁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다.
드디어 쉬는구나. 응접실 한가운데 자리한 소파에 앉아 나는 한숨 돌렸다. 온종일 서 있을 때도 느끼지 않았던 피로가 감말랭이랑 대화 조금 했다고 온몸을 후려쳤다. 마법을 써도 풀릴 것 같지 않은 정신적 피로에 나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후 눈을 감았다.
온종일 서 있는 동안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황제가 나를 엿먹이기로 했으니 나는 고분고분해져야겠다고 말이다.
빌어먹을 감말랭이가 나를 방치한 건 제국과 신전 사이의 알력 다툼 때문일 거다. 대신관이 황제에 대해 말할 때의 태도를 떠올려보면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차피 내 목적은 황제와 싸우는 게 아니다. 무사히 펠런을 만나러 가는 거지. 욕심 많은 황제는 원작에서도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제 안위만 챙기려 들었다.
마왕이라는 거대한 적이 북부 산맥에서 벗어나 드로젠까지 침입했으니 빛의 탑은 이제 마족을 막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자면 용사인 나와 함께 여섯 제후가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 드로젠과 마경을 거쳐 원정을 떠나는 게 맞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지금 당장 무너진 드로젠만 하더라도 황제의 영토가 아니며, 제후국이 제국의 방패로 존재하는 한 당장의 안위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사에게 권력이 밀집되는 것도 무섭겠지.
300년 전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는 용사였다. 그러니 그 하찮은 머릿속에서 마왕 토벌 후 내가 자신을 밀어내고 황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또한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런 소인배를 우리 영감님이 지키겠다고 북부 산맥에서 싸웠던 거지.
온종일 굶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처음 보는 시종이 홍차와 함께 간단한 주전부리를 가져왔지만, 홍차 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 뭘 먹으면 아무리 튼튼한 용사의 위장이라지만 체할 것 같다.
나인이 있던 마경의 탑에서도 이러지 않았다. 내게 마족보다 빌어먹을 황제가 더 적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