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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빛과 마리오네트 (13/23)

2. 빛과 마리오네트

빛이 내게 말했다. 정해진 죽음이 찾아온 것뿐이라고.

나는 허공을 향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것참 감사하니 엿 드십시오.

빛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빛의 여신이라고 했던가? 참 이상한 성격인 것 같다.

사방이 구분되지 않는 환한 공간이었다. 최소한 어둡지 않아서 좋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내 몸뚱이 하나뿐이라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죽어서 갈 만한 곳이라고 하면 저승밖에 더 있을까?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허 블리스의 몸이 아닌 윤유마로 돌아온 나를 본다. 손으로 몸을 더듬어보면 귀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과 앙상하게 마른 손목과 발목이 익숙했다. 근육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납작한 배는 전혀 그립지 않았지만 말이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 발악했다. 배우고 수련하고 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헛수고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화는커녕 슬픔도 무서움도 없다.

몇 년 동안 죽어라 만들어둔 전투적인 근육이 사라진 것만큼은 조금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근육이 사라진 것도 슬프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내 신경을 건드는 것이 있다.

나는 사지를 손끝으로 더듬어봤다.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손목과 발목을 휘감고 있다. 손에 잡히지만, 탄성은 거의 없는 편이었고 굵기는 머리카락 정도였다. 이런 게 감겨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기력이 없어지는 건지 온몸이 나른하고 묵직하다.

내 모습이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느껴졌다. 실을 자를 방법을 찾기 위해 손가락으로 더듬어 실의 흔적을 따라가 봤다. 길고 가는 실은 내 손목과 발목을 한 바퀴 휘감고 있었고 그 끝은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내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빛이 실의 끝은 자신이 잡고 있다고 말했다.

좆같네요, 라고 나는 빛에게 말했다.

빛이 다시 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는 아무것도 없는 아이였지.”

그 말 그대로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가족도 없고 지인도 없다. 하고자 하는 목표도 없었으며 남기고 싶은 것도 없으므로 이 세상에 가지고 오기 수월했다. 네가 엮은 인연도 없고 네게 엮인 인연도 없었기에.”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미간을 구겼다. 혼자 잘 살았다는 말을 참 멋들어지게 하는 양반이다. 대상이 보이면 제대로 노려볼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빌어먹을 제기랄이다.

“그래서 네게 적에 대한 살의를 선물했는데, 넌 거꾸로 그들과 친분을 쌓았지.”

툭―

소리가 나더니 사지를 감고 있던 실 하나가 끊겼다. 허공에서 공기에 녹듯 사라지는 실에 나는 오른쪽 손목 언저리를 더듬어봤다. 손목에 감겨 있던 실이 사라진 덕인지 팔을 움직이는 게 아까보다 수월했다.

“살의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게 해 앞으로의 고된 싸움을 대비하게 했더니 그 정보를 적과 공유했어.”

툭―

두 번째 실이 끊어졌다. 일어난 일을 관조하듯 무미건조한 빛의 시선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가벼워진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좀 억울하다. 내가 정보를 공유했던가?

아니다. 앞서 펠런에게 살해당한 다른 이방인들이 한 짓이지.

“그리고 숙명 앞에서 반드시 서로의 목숨을 노려야 할 이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어둠의 사제가 내민 서약서에 서명까지 했지.”

툭―

세 번째 실이 끊겼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할까. 내 어리숙한 사도여.”

“어찌하긴 뭘 어찌해. 여기까지 동의 없이 납치해 온 것만 해도 해선 안 되는 범죄인 거 알아 몰라?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이다음은 내 변호사와 이야기하도록 해요.”

빛이 다시 웃었다. 그는 내가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패라고 했다. 아니, 사람 가지고 도박하지 마. 인권 몰라? 미친 거 아냐? 으르렁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눈치였다. 오른쪽 발목에 감긴 마지막 실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나는 허공을 향해 질문했다.

“마지막 실은 어떻게 해야 끊어집니까?”

“그것마저 끊기면 내가 널 다룰 수 없잖니?”

“네게 다뤄질 생각 없는데?”

“네가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네 목숨을 구해줄 힘이 될 텐데?”

“내 목숨은 내가 챙겨야지. 내 게 아닌 힘을 왜 원하겠어. 여기까지 데리고 온 배상금이나 잘 챙겨주시고 이건 끊어주시지?”

다시 낮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흔들었다. 웃음이 참 많은 신이다. 다시 들린 웃음소리가 좋게만 들리지 않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말이 어느 정도 통하긴 한 모양인지 발목에 감겨 있던 마지막 실이 끊겼다.

간신히 숨이 터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이 감겨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갑갑함이 이제야 간신히 뚫려 나는 거세게 심호흡했다.

빛은 여러 가지를 말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빛은 나를 다시 펠런이 있는 그 세계로 돌려보낼 거라 했다. 자허 블리스는 죽어 땅에 묻혔고, 정해진 대로 새로운 육체를 내게 선물할 거라면서 말이다.

돌아간다고? 이유를 묻는 내게 빛은 돌아가야 답을 알 수 있을 거라 했다. 하긴, 나도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긴 했다.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뭘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여기서 눈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잠들기 직전처럼 몽롱하다. 생각이 명료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것처럼 생각을 깊이 할 수가 없다. 그저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비몽사몽처럼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당신과 연관이 있느냐고 묻자, 빛은 내 자의식을 유지하며 대화하기 위해 내 지각력과 분별력 등을 잠시 낮췄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여기서 벗어나면 다시 예전처럼 생각할 수 있을 테니.”

…라고 빛은 말했다.

멋대로 구는 신을 앞에 두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빛에게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다고 해서 그리고 빛이 내 질문에 대답하고 반응해 준다고 해서 빛과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빛은 그저 빛이었다.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나를 동등한 객체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나는 잠시 시선이 닿은 먼지 같은 거였다. 먼지를 관찰하는 사람은 있어도 동등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항상 궁금했던 것,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를 물었다. 빛은 그나마 가지고 올 수 있는 영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더 따져 물을 힘도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 정도 흥미로 나는 뽑기 기계 속에서 선택되고 들어 올려져 이 세계로 떨어진 거다.

빛이 말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빛과 나의 연결은 끊기게 될 거라고. 이유를 묻는 내 머릿속에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나인의 계약서에 이름을 꾹꾹 눌러 쓰는 내 모습이었다. 보통은 여기 와서 지난 생의 모든 기억을 묻어야 하는데, 라고 빛이 말했다.

온몸에 올올이 소름 돋는 것을 두 손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나는 나인에게 거듭 감사했다. 계약을 강권해 줘서 고맙다, 나인. 그리고 사이비 교주라고 의심해서 미안했다. 그런 내 앞에 눈앞에 무수히 많은 빛의 구슬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빛은 말했다. 선물이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세 개까지 가져가도 좋다고. 나를 납치한 대가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내기는 빛이 승리할 수 없으리라. 빛의 가호를 잃은 이가 영혼을 걸고 어둠에게 맹세했으니 마왕을 죽이지 못하리라.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투로 빛이 말했다.

나는 다시 하늘을 향해 중지를 들어 올렸다. 거듭 엿 드십시오.

빛이 다시 껄껄 웃었다.

구슬을 가져가는 대가로 다시 빛과 연결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을 듯했다. 계약서 탓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대화를 한 탓인지 빛은 나에 대한 흥미를 서서히 잃기 시작했다.

그 탓일까? 공간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떨어지다 멈춘 눈송이처럼 허공에 뜬 빛의 구슬들을 서둘러 살펴봤다.

그중에는 『굴러라 용사님』의 소설 전권이 들어 있는 구슬도 있었다. 저건 이미 알고 있으니 넘기기로 하자. 구슬 중에는 마법과 정령, 검술과 요리, 심지어 토지개발과 건축학도 있었다.

마법에 대한 것이 들어 있는 구슬을 가장 먼저 들었다. 이게 없다면 놈과 대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게 있다. 그게 여기 있을까?

다행히 아주 어두워지기 전에 내가 원하는 구슬 두 개를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좋아. 이거면 될 거야. 나는 서둘러 구슬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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