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펠런
감금된 지 열흘이 지났다. 키는 전혀 자라지 않았고 체중도 그대로다. 근육이 빠지는 것이 무서워서 요새 밖을 달려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요새 밖은 위험하다며 나인이 실내 연무장을 개방해 줬다.
온다고 했던 펠런은 열흘째 감감무소식이다.
요새 안에서 생활은 아카데미와 달랐다. 강의가 없고 대련할 상대가 없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땀이 나도록 달리고, 꾸준히 실내 연무장에서 창을 수련한 후 손님방에 붙어 있는 서재의 책을 읽었다.
붙잡혀 온 처지라고 해도 대우가 좋다. 요새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외에 나를 강제하는 것이 거의 없다. 이쯤 되면 포로가 아니라 손님 취급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종을 빙자한 감시가 24시간 붙는다는 점일까.
요즘 내가 읽는 책은 대부분 오래된 인문학 서적들이다. 도서관 책 중 열에 다섯은 마법에 관한 논문이었다. 요새의 주인인 나인의 취향이리라.
그 외에 이 세계에 필요하지 않은 약초학과 지리학, 사회, 과학 중 내가 읽어본 작가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인에게 물어봤더니 대부분 저자가 마족이라고 했다.
“음, 블리스가 마력에 재능 없길 다행이다. 마법 존나 어렵네.”
상투적이지만 마족들도 한글을 쓴다. 북부 산맥으로 가로막혀 문화가 단절된 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북부 산맥 남쪽에서 쓰던 말을 아무 문제 없이 북에서도 쓸 수 있다니. 대충 만든 판타지 소설이 다 그렇지 뭐.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새로 배워야 할 언어가 없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도록 하자. 공용어 만세. 한글 만세.
마족이 쓴 글이라 작가의 성향이 패도적이거나 파괴적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하고 온건하다.
책장 구석이나 안쪽에 혹시 나인이 몰래 숨겨둔 비밀 마도서나 강력한 마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계약서 뭐 이런 게 있을까 하고 찾아봤는데, 손님용 서재라 그런지 없더라. 조금 아쉬웠다. 아무래도 제2의 마왕 계획은 슬슬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북부 산맥 위쪽, 그러니까 마족의 땅은 지구로 치자면 중국의 절반 정도 크기다. 비율은 산맥 남쪽 제국을 포함한 인간의 땅과 비슷하다. 그 정도 땅을 가지고 왜 호시탐탐 인간의 땅을 노리느냐면 마족의 영역은 대부분 영구동토 지대거든.
영토의 9할이 얼어붙은 바위나 모래고 남은 1할도 얼어붙은 호수와 늪이다. 언 바위틈 사이 뿌리 뻗고 자생하는 식용 식물이 있긴 하지만 한 해 수확량은 인구 전체 식용작물 의존량에 한참 미달한다.
상황이 그러니 문화가 제대로 발달할 수 없다. 그나마 지성을 가진 마족 마법사들이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 용을 써보지만, 인간과 빛의 탑으로 인해 남부로 내려갈 길은 막혔고, 바다는 칼날보다 날카롭고 얼음보다 차다. 남은 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뿐이다.
심지어 그들을 하나로 모을 왕조차 부재했다.
몇백 년에 한 번씩 등장하는 마왕에게 그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에게 마왕은 그야말로 구명줄인 셈이다.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이후 세대를 위한, 종족의 영속성을 지켜줄 구명줄.
괜한 걸 읽은 느낌이 들어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집어넣었다. 그렇다고 마왕의 인간 학살이 옳은 건 아니다. 역사는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 동시에 봐야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펠런에게 아양이라도 떨어 볼까.
무릎에 앉아서 목을 끌어안고 눈웃음을 치면서 ‘있잖아, 인간을 너무 죽이면 내가 너무 슬퍼지는데’라고 말하면 펠런이 내 말을 들을까.
“우웨엑.”
“…이번엔 또 뭡니까.”
서재로 들어오던 나인이 내 헛구역질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입가를 닦았다.
“엄청 끔찍한 걸 상상했거든. 들어볼래?”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 건 혼자 감내하시죠.”
“매정한 뱀 같으니라고. 아주 주인이나 부하나 똑같아요.”
뿌듯한 표정 짓지 마. 칭찬 아니야. 경멸 어린 눈으로 대놓고 좋아하는 나인을 흘겨봤다. 어찌나 바쁘신지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반갑기는커녕 징그럽고 귀찮은 것이 낯이 익을 대로 익은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찾으셨나?”
“왕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신?”
나인이 겹쳐 들고 있던 문서들 사이에서 둘둘 말린 편지 하나를 꺼냈다. 문서 사이에 눌려 접힌 자국이 생겼긴 해도 읽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다.
빌어먹을 자식이다. 열흘 만에 온다는 연락이 직접 오는 게 아니라 서신 한 장이다 이거지?
“이방인이 적은 서신은 펠런에게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여러 문제가 겹쳐 도착까지 시일이 좀 걸리긴 했지만 심한 손상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알았으니까. 그거 주고 가서 일 보세요.”
손을 내밀었지만, 나인은 내 손에 서신을 들려주지 않았다. 펠런이 준 서신으로 장난을 칠 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미간을 구긴 나를 내려다보며 나인이 물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영혼 아니면 이름 말하는 거야?”
“열흘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을 텐데요.”
“영혼의 무게가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잖아.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생각해.”
“제 조건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그런 건 계약 전에 알려줘야지. 인제 와서 말하면 사기 거래인 거 몰라?”
“결정까지 다시 열흘을 더 드리죠. 이후는 당신이 무엇을 걸더라도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저야 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요.”
“아니 사장님 이렇게 마음대로 결정하시면 나는 어떻게 먹고살라고…….”
이상하다.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익숙하다. 너무 익숙해서, 토할 것 같다. 묘하게 대화가 즐거워 보이는 나인을 올려다본다. 이 높이가 조금 낯설다.
“…….”
“서신은 여기 있습니다. 이방인.”
귀 안쪽에 이명이 울렸다. 약한 둔통에 서신을 받기 위해 내민 손이 쳐졌다. 장난칠 상태가 아닌 걸 알아차린 건지 나인이 내 손에 서신을 쥐여주고 몸을 돌렸다.
잡을 새도 없이 서재 밖으로 나가는 녀석을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다음에 올 땐 빈손으로 오지 말고 간식 같은 것도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자 이명이 조금씩 사라졌다. 펠런이 보내온 서신을 쥐고 창가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히죽거리며 돌돌 말린 서신을 펼쳤다. 여긴 아침에도 해가 잘 들지 않아서 시계를 봐야 정확하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나저나 뭐가 적혀 있을지 궁금하다. 변명일까? 아니면 협박일까. 펠런의 손 글씨는 유려하고 깔끔하다. 잘 배운 놈 같으니. 그건 그런데 서신에 적힌 글이 짧다. 나는 구구절절 길게 썼는데 이 자식은 말도 짧더니 글도 짧냐?
[곧 갈 테니 기다려줘, 도망가면 끝까지 추적한다.]
협박이었군. 웃음이 나옴과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웃기고 무서운 놈 같으니라고. 조금 억울하다. 내가 능력만 된다면 이 자식의 끝까지가 어디까지인지 실험해 봤을 텐데.
“빌어먹을 자식이 왜 사람 설레게 만들어. 사제도 없는데 숨통 터지도록 대련하고 싶어지게.”
한걸음에 책상으로 다가가 펠런에게 답신을 썼다.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는 펠런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서.
[빨리 와. 죽여버릴 테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나는 거칠게 휘날린 펜을 내려놓고 서신을 고이 접었다.
열흘씩이나 심사숙고할 필요 없이 빌어먹을 여신의 저주는 포기하기로 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에게 영혼을 걸어야 한다니 불안하다. 그리고 빌어먹을 펠런 자식. 오면 너는 내게 죽는다.
서신은 낮 식사 시간에 나인을 통해 펠런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내 딴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인에게 내 서신을 전달했는데 받는 나인의 표정이 이상하다.
“몰래 읽으면 안 돼.”
“설마요. 애들 연애편지 훔쳐보는 사감도 아니고.”
“그 배역 완전히 잘 어울리는데. 그래도 읽어보면 안 돼. 내용 완전 야함.”
‘그런 거 읽을까 보냐.’라고 중얼거리는 나인을 무시하고 내 자리에 앉아 서버가 차려준 부드러운 콩 수프로 빈속을 채웠다.
“펠런이 열흘 후 도착하는 모양이지?”
“서신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까?”
“응, 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정말 기한이 중요했다면 네가 저주에 관해 이야기할 때 먼저 말을 했겠지. 그런데 지금 와서 기한을 정하는 걸 보니 녀석이 여기 올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서?”
“어디서 잔머리 잘 굴린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먹고 산 20년이야. 칭찬으로 듣지.”
앞으로 20일 후면 언제더라. 중간고사가 끝나는 시기던가. 그 후에 무도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다음이 방학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주요리로 버터와 향신료와 함께 찐 대구가 올라왔다. 남김없이 비우고 쌉쌀한 맛이 비린내를 잡아주는 음료로 입가심한다.
“그래서 언제 아카데미로 갈 거야? 펠런은 너를 타고 날아오나?”
남은 소스와 감자를 빵에 발라 남김없이 먹었다. 음식은 남기는 거 아니라고 했다.
블리스가에 있는 우리 주방장 아저씨와 맞먹을 정도로 여기 주방장도 요리 솜씨가 좋다. 보름 동안 요새에서 지내면서 제일 좋았던 것이 음식 맛이다. 이러다가 섬으로 도망친 후에 식비에 돈을 다 쓰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저도 그렇게 왕을 모셔오고 싶지만, 홀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시는 왕의 뜻에 따라 먼발치에서 얌전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나인의 대답이 좀 이상하다. 어떻게 오냐고 물어봤는데 지켜보긴 뭘 지켜봐. 입에 남은 것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 다시 물었다.
“마경 한가운데 유일하게 독기가 없는 장소가 비경이라며? 비경으로 들어오려면 어쨌든 마경을 지나와야 하는데 날아서 오지 않고 어떻게 온다는 거야. 드로젠의 국경 수비대가 입는 방역복이라도 입나?”
“아마도요?”
“마경에서 마물을 만나면 어쩌고?”
“처리하시겠죠?”
툭툭 던지는 대답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인 놈에게 던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포크를 내려놓고 침착하게 찬물을 마셨다.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태연자약한 나인의 표정과 말투가 불길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고 스스로 다독거리면서도 기분이 싸하다.
“북부 산맥에 마수와 마물들이 발정기라며? 그래서 서열 싸움에서 도태된 놈들이 마경으로 다 쫓겨 내려온 탓에 한동안 이 주변에 마수가 들끓을 거라고 암룡 바슈키가 그러지 않았나?”
“예. 그랬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신이 아는 펠런이 그 정도 마수에 몸이 상할 실력이던가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왕께서 아카데미에 계신 것이 맞습니다. 열흘 후, 시간을 내서 이곳에 오실 예정이시고요.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이미 예전부터 자주 이곳을 혼자 다니시던 분입니다. 우리와 밀정들만 알고 있는 안전한 길이 있거든요.”
“…땅굴 같은 거야?”
“맞습니다. 소설에 그런 것도 적혀 있습니까?”
나인이 놀란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소설에 마족만 사용하는 숨겨진 길 같은 게 적혀 있을 리가 없지.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놈의 말대로 땅굴로 찾아오는 거라면 그거야 다행이지만, 나는 다른 걸 생각했다.
소설의 펠런은 마경에서 각성한다.
나인의 말에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어도 놈을 믿는 건 아니다. 상황이 좀 이상하다. 외전에서 어떻게 전개되더라?
그러니까. 제뉴어리와 자허 블리스가 작당해서 펠런을 아카데미에서 불명예 퇴학을 시킨다. 그리고 드로젠으로 급하게 귀국한 펠런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국경 수비대장인 준 엑사 드로젠을 대신해 국경 수비대장이 된다.
국왕의 용태가 나빴지. 그래서 차기 왕세녀였던 준 엑사 드로젠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중앙으로 나섰고. 갑자기 튀어나온 낙하산, 그것도 본능적으로 공포와 혐오만을 주는 펠런을 병사와 기사들은 따르지 않는다.
결국, 폭발적으로 늘어난 번식기 마물들의 개체 수 증가로 국경의 개념이 사라진 마경에서 펠런은 베고 또 썰다가 죽기 직전 마왕으로 각성한다.
“디저트는 언제 나오냐? 어제 먹었던 과일 타르트 맛있었는데.”
“과일과 차, 그리고 에클레어가 곧 나올 겁니다.”
“좋아. 하나만 먹고 다섯 바퀴 뛰면 되겠지.”
포크로 에클레어를 반으로 나눴다. 만약 제뉴어리 드로젠의 사고를 어떻게든 펠런과 걸고넘어져서 놈을 본국으로 귀환시켰다면, 펠런은 이미 드로젠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준 엑사 드로젠이라면 어떨까. 마지막 하나 남은 자신의 경쟁자가 아카데미에서 범죄를 저질러 탈락한 경우, 자신의 왕위 계승이 거의 확실시 되면?
내 가정교사였던 데이벨 블랑은 말했다. 왕께서 병상에 너무 오래 계신 탓에 왕국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외전에서 펠런을 본국으로 송환한 것은 아마도 글로리아 드로젠이 아닌 왕세녀 준 드로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먹고 또 움직일 겁니까? 단련도 좋지만, 몸 생각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펠런이 곧 올 테니까. 한 대라도 때리려면 이것도 부족해.”
나인의 물음에 태연하게 대꾸하고 절반 자른 에클레어를 크게 입에 밀어넣었다. 보름간 내 성질 다 죽여가며 빌어먹을 뱀 자식이 나를 의심하지 않게 내 집처럼 편안하게 생활했는데, 지금 놈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외전에서 펠런이 마왕으로 각성했던 나이는 20대 중반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앞으로 거의 5년 후다. 내가 납치 감금을 당해놓고 태연했던 이유기도 하다. 앞으로 5년은 안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펠런, 이 자식 지금 마경에 있는 거다. 그래서 여기 오지 못하는 거고.
왜 시일을 앞당긴 걸까. 25세가 아니더라도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 마왕으로 각성을 하게 되나? 그러면 어린 시절 이방인 기사에게 크게 다쳤을 때는 왜 마왕으로 각성하지 않은 걸까. 그땐 너무 어려서?
“이것도 맛있긴 하다. 다른 데서 먹었던 에클레어는 너무 달아서 코가 아프던데 이건 괜찮네.”
“보통 초콜릿이나 캐러멜을 코팅하지만, 손님의 입맛대로 주방장이 달지 않게 농도를 조절한 복숭아 콩포트 위에 피스타치오를 잘게 다져 올리는 정도로 맛을 냈다고 합니다. 차와 함께 먹기 괜찮은 맛이지요.”
남은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주방장에게 미안하지만 긴장한 모양이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꽉 차서 달지 않다는 것 말고 맛을 느낄 틈이 없다. 적당히 나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 자식 두들겨 패도 암말 하지 마. 괜히 너희 두목이라고 나 말리고 그러면 너도 같이 맞는다?”
“아무렴요. 부디 원하는 만큼 때리실 수 있길 빌겠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훈련량 두 배로 늘리고 만다. 두고 봐라.”
나인은 그 실력으로 어디 손이나 댈 수 있겠냐는 내용을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보여줬다. 저 표정을 보니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아도 어금니에 힘이 저절로 꽉 들어갔다. 마족은 혈관에 비꼼, 이죽거림. 뭐 이런 성분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못된 놈들 같으니.
수련용 창을 들고 실내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몇 걸음 뒤에 나인이 붙여준 마족 시종이 뒤따라왔다.
내 편의를 봐주는 개인 시종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감시 역할이다. 보름 동안 객실을 제외하고 내가 요새 안을 돌아다닐 때는 무조건 저 마족 시종이 따라붙었다.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질문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질문은 했을 때는 잠시 후에 나인이 나를 찾아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종도 마법을 쓰는 모양이다. 젠장, 나 빼고 다 마법을 쓰는군.
요새 1층 홀에서 조금 떨어진 무도회장을 연무장으로 대신 쓰고 있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곳인지 오래 방치된 티가 났다. 높고 넓고 바닥도 튼튼하다.
뛰고 구르고 내리쳐도 잔금 하나 가지 않는 바닥을 보면 나인이 마법적인 처리를 했을 것이다. 실수인 척 후려쳐도 깨지지 않던 창문처럼.
연무장에 도착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마저 걸어가도 시종은 나를 붙들거나 막아서지 않았다. 요새 밖으로 나갈 길이 없으니 붙잡을 이유도 없는 거다. 그러나 내가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나인에게 보고하겠지.
복도를 지나쳐 사용인들이 쓰는 좁은 복도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가 흠칫 놀라더니 나오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명백히 나를 피하는 모습이지만 상관없다. 보통은 저게 맞다. 주인이 초대한 손님이면서 사용인들의 복도에 들어온 내가 경우가 없는 거겠지.
내 목적은 사용인을 만나는 게 아니다. 복도를 따라 드문드문 닫힌 문 중 아무 문이나 열어봤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빈방인지 공기조차 싸늘했다.
다음 방은 잠겨 있었다. 문을 부수지 않고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이미 사람이 들어간 방은 무시하기로 했다. 몇 번 반복해 보니 패턴을 알 것 같았다. 열린 방은 아무도 쓰지 않는 방. 잠긴 방은 주인이 있는 방. 하지만 나는 주인이 있는 개인 방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복도 끝에서 문을 열었다. 사용감 있는 낡은 문을 열자, 말린 꽃 냄새가 훅 끼쳤다. 불을 켜지 않아 안이 어두웠지만, 보지 않아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을 활짝 열어 복도의 불로 방 안의 내용물을 살펴볼 수 있었다.
찾았다. 비품실이다.
가지런히 접은 식탁보와 커튼들이 면 보자기에 싸여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 사이 가장 먼저 벽을 살폈다.
내가 찾는 건 부피가 크다. 거의 사람만 할 거다.
역시나 방호복이 두 벌 벽에 걸려 있다.
생각보다 요새 안에 머무는 이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내 눈에 띄지 않는 시종들부터 하인들, 미스트워커와 같은 마부, 창고지기.
블리스 저택만 하더라도 집사를 비롯한 관리인의 수가 수십에 가까웠다. 내가 스쳐 지나가며 본 이들은 그보다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것이다.
그 많은 이들이 비경에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마경에 들어가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요새 어딘가엔 분명히 쓸 수 있는 방호복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너무 적다. 누군가가 평소에 사용할 목적으로 꺼내놓은 것이리라. 내가 찾는 것은 더 많은 양의 방호복이다.
그래서 다시 복도 밖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쓰는 좁은 복도를 가로질러, 복도 끝에 빡빡한 여닫이문을 열었다. 여닫기가 힘들지 않은 것이 누구나 오갈 수 있도록 잠금장치도 없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시야가 환하게 뚫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이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 밖은 아닌 것이, 내가 서 있는 곳은 아무리 봐도 외벽으로 둘러싸인 순찰로다. 그리고 바로 아래 물이 빠진 깊은 해자가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을 눈에 담았다.
“하나, 둘, 셋……. 미쳤네. 병사용 숙소가 오망성 형태야?”
연병장을 둘러싼 형태의 병사용 숙소가 적게 잡아도 네, 다섯. 그 앞과 뒤로 우뚝 선 첨탑들. 잘 정비된 도로와 거대한 마구간들이며 그리고 곤봉처럼 생긴 기묘한 둥지에 와이번 수십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 뒤로 빼곡한 2층, 3층의 건물들. 소형 요새와 아치형 다리와 터널로 이어진 거주 구역. 내가 서 있는 이곳, 요새를 시작으로 비경은 하나의 거대한 군사 도시였다.
그렇다. 군사 도시다.
바람결에 익숙한 가죽 냄새와 철 연마제 냄새가 났다. 멀리서 희미하게 연병장을 구르는 고함도 들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외벽으로 둘러싸인 포대용 포루가 보였다.
저 멀리 누도 위에 우뚝 서 있는 위병소 좀 보라지. 아이쿠, 시설 좋다. 내가 머무는 객실에서 볼 수 없는 각도네? 하하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 별세계가 다 있었네.
나인 뱀 새끼. 펠런 개새끼.
두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군대의 규모에 뒷덜미가 싸늘하게 식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이건 아카데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건 아무리 멍청한 나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에 마족의 군대가 있다. 마왕이 바로 진두지휘할 수 있도록 그의 각성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군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무표정한 얼굴로 마족 시종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인 역시 나를 찾아오는 기미가 없다.
아마 지금쯤 내가 뭘 생각하고 있나 구경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요새의 실상을 알아봤자, 요새 밖으로 나가지 못하리라 여기는 거겠지. 어쩌면 일부러 보여준 걸지도 모르겠다. 상황 파악을 한 후, 어디에 붙을지 잘 생각하고 움직이라고.
하긴 그렇다. 정말 나갈 곳이 없더라. 이곳이 견습 기사 한 명에게 뚫리면 암룡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는 거겠지.
누군가 악을 쓰며 시정하겠다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신병이 구르는 건 인간이나 마족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그 바람에 실소하며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4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보고도 여기 머물 수 있는 강심장은 아니다.
여기서 나가야겠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요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한 곳뿐이다. 깊이 심호흡을 하고 나는 다시 왔던 샛문으로 들어가 복도를 되짚어갔다.
나인이 안심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목격한 군대의 규모에 질려 꼬리를 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요새의 상층부로 향하는 원형 계단을 올라갔다.
열흘간 쉬지 않고 꾸준히 운동한 덕분에 생각보다 걸음은 수월했다. 쥐고 있는 창을 놓치지도 않았고, 숨 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런 거로 힘들면 블리스의 이름이 아깝다. 하긴 내가 이미 버린 이름을 들먹이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등 뒤에서 마족 시종이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뒤로도 누군가 다급하게 뒤따라오는 소리도 들린다.
슬슬 따라올 거라 생각은 했다. 원형 계단이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지? 나는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목적지는 거의 가까워졌다.
원형 계단 중간쯤 봐뒀던 굳게 닫힌 나무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처음 온 날 확인한 것처럼 자물쇠는 없었다. 하긴 이 요새를 날아서 오갈 수 있는 건 용뿐일 테니 굳이 잠글 필요가 없었겠지.
문 너머는 바로 토굴이었다. 발이 쑥 꺼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헛디딜 뻔했다. 그래, 여길 내려가야 한단 말이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길래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토굴 벽에 걸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았는데 금방 바닥이다. 손으로 더듬어 문을 찾자마자 열어젖혔다.
“우악, 바람 장난 아니네!”
요새 외벽에서 눈짐작으로 봤던 게 맞았다. 역시 이 문이 요새의 순찰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순찰로를 가로질러 내 창으로 볼 수 있었던 마경 쪽, 검은 나무숲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가 향한 순찰로 끝에 병사용 막사가 보였다. 저기에 내가 쓸 수 있는 방호복이 있길 빌어보자.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야가 잡힐 정도로 밝아서 마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방호복뿐만 아니라 무기도 필요할 거다. 말이 있다면 더 좋겠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인이다. 나인의 도움이 없다면 내가 날고뛰어도 저기서 펠런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망할 뱀 새끼가 보라고 대낮부터 이런 활극을 펼치는 중이지만.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방인.”
바람 소리가 제법 크다. 그래서 소리보다 기척으로 먼저 나인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렸다. 다급하게 몸을 돌리다가 발을 헛디뎌 외벽 너머로 떨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는 나를 본다고 나인도 놀랐겠지만 내가 제일 놀랐다.
오던 걸음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나인이 엉거주춤 선 모습이 좀 우스웠다. 그렇다고 놀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놈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가진 패가 내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놈에게 요구할 게 좀 크다. 놈이 들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도 믿기 힘든 목숨 걸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나인이 그래도 안 됩니다, 라고 말하면 그냥 다 포기하고 얌전히 포로나 될 거다. 난 내 목숨이 제일 아깝거든.
“그 시종 말이야. 너무 부자연스러웠어. 감시할 거면 제대로 된 감시자를 붙여주든지.”
“그렇죠. 좀 더 당신의 자유를 제한할 걸 그랬습니다.”
“웃기지 마. 펠런과 네게 맞서면 무엇과 대적하게 되는지 일부러 보여준 거잖아.”
“보자마자 도망갈 줄은 몰랐죠. 이쪽으로 오시죠. 심지어 마경 한복판이라 어디 도망칠 곳도 없잖습니까.”
나인이 가볍게 손짓해 무표정한 얼굴로 그 옆에 서 있는 시종을 요새 안으로 되돌려보냈다.
아무리 충성스럽고 체력이 좋다고 해도 먹고 싸고 자는 생물이 24시간 딱 붙어서 누군가를 감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저 시종은 열흘간, 내가 손님방 안에 머물 때는 방 앞에서 그리고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내 뒤에서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바람이 차다. 셔츠와 바지 한 장으로 버티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지. 코트 한 벌은 걸치고 올 걸 그랬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나인에게 대꾸했다.
“솔직히 말하면 얌전히 감금당할 생각이었어. 한 3, 4년 정도는 말이야. 밥도 잘 주고 잠자리도 편하고 딱히 강제하는 것도 없었으니까.”
“마음을 달리 먹은 이유가 뭡니까?”
“펠런 엑사 드로젠이 아직 인간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거든.”
“당연하게도 아직 인간입니다. 설마 그게 걱정되어 이 난리를 친 겁니까?”
실수를 저지른 아이를 달래는 듯 시종일관 부드러운 나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인의 말을 믿으면 편하겠지. 내가 틀린 거면 민망하고 말 일이다. 그런데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민망한 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네가 암룡 바슈키로서 한 말이 있으니까. 그 식스라는 마법사의 입으로 그랬지. 마경의 문제는 마경과 드로젠의 문제다. 그러니 다른 나라의 개입은 용서하지 않겠다.”
“그런 말을 했지요. 암묵적인 규칙입니다. 마족과 인간, 서로 외부 용병을 끌어들이면 전투가 전쟁으로 커지니까요. 이번 번식기에 유례없이 마물과 마수의 개체 수가 늘어 이번만큼은 모습을 드러내 규칙을 상기시켰을 뿐입니다. 당신도 전쟁을 원하진 않잖습니까?”
“내가 읽은 소설 외전도 그랬어. 갑자기 늘어난 마물과 마수의 개체 수를 처리하기 위해 새롭게 국경 수비대장 자리에 오른 펠런이 싸우다가 죽음의 위기에서 마왕으로 각성했지.”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이제 귀와 코에 감각이 없다. 셔츠와 바지, 그리고 실내화 하나 걸친 채 칼바람을 등지고 서 있으니 죽을 맛이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평소보다 뜨겁게 열이 올랐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내가 지금 감금된 상황이라 사실 확인이 안 돼요. 제발 제대로 말해줘. 펠런을 만나고 싶어. 그런데 내가 만나야 하는 건 인간인 펠런이야. 빌어먹을, 내가 아는 새끼는 고지식하고 검 잘 쓰는 스무 살 아카데미생 펠런이라고.”
제발 내가 틀렸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 생각이 너무 나간 거라고. 펠런이 마왕이 되려면 앞으로 5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왜 소란을 피우는 거냐고 핀잔을 줘야 하는데, 왜 저 빌어먹을 나인 놈은 내 시선을 피하는 걸까.
“…….”
“…그 자식 마경에 있구나?”
심호흡했다. 차가운 공기에 폐가 얼어붙을 것 같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서서히 감각이 사라졌다. 코를 훌쩍거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설에서 어떻게 되었더라. 준 엑사 드로젠은 본국으로 귀환했어? 그리고 빈 국경 수비대장의 자리를 펠런에게 넘겼었는데…….”
“당신이 읽은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야. 네놈이 와이번을 가지고 장난쳤던 그때야?”
“비슷합니다. 몇 년 만에 마수 및 마물의 짝짓기 시기가 겹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를 위해 이 시기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준 엑사 드로젠은 예상대로 움직여줬습니다.”
“그래서 5년이나 시기를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군.”
“미룰 필요가 없잖습니까. 펠런이 5년 더 고통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앞으로 남은 5년이 고통일 거라고 놈이 그러던가?”
“…….”
펠런 개새끼.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있었다면 이성을 잃고 덤볐을 거다. 그러나 눈앞의 대상은 펠런이 아니다. 화를 낼 상대를 착각하지 말아야지.
지금은 분노를 차곡차곡 분 단위로 복리 저축만 해두자. 그리고 지금 당장 폭발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직 펠런에게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내 모든 생각은 다 가정이며, 제삼자인 나인의 입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나는 그걸 위해 여기 올라온 거다.
“펠런을 만날 거야. 나를 놈에게 데려다줘.”
“기다리면 만날 수 있습니다. 열흘, 아니 일주일만 기다리면…….”
“마왕이 된 펠런을 말하는 게 아니야, 이 빌어먹을 뱀 자식아. 내가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에서 만난 내 친구인 펠런을 만나겠다는 거야. 당장, 나를 그 자식에게 데려가지 않으면 여기서 뛰어내리겠다. 그리고 나 다음에 만나는 이방인은 나보다 쓰레기이길 빌어주마.”
이를 악물고 으름장을 놓았다. 속된 말로 뻥카다. 말은 이래도 뛰지 못할 거란 말이다. 아무리 울화통이 터지고 열이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나는 죽기 싫다. 그래도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나인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항상 제멋대로죠. 당신 식대로 말해볼까요. 마음대로 해, 빌어먹을. 당신이 죽더라도, 나는 내 왕 앞에 당신을 대령할 생각 없습니다.”
“내 실력 알잖아. 놈이랑 싸워봤자 진다고. 대화만 하겠다고 그러잖아. 아니면, 시발 그냥 섬으로 도망치게 놔두든지! 이것도 저것도 못 하게 하면서 나보고 마왕이랑 만나라고! 마왕이 된 그 새끼를 죽일지 말지 고민이라도 하라는 소리냐!”
악에 받쳐 고함치느라 목이 갈라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그와 동시에 열이 올라 헝클어진 이성도 바로 잡았다. 나인이 뭐가 불안해서 인간인 펠런과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손을 들었다.
“알았어. 그거 할게. 영혼 걸고 마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이거면 돼? 이거면 그 새끼 지금 당장 만나러 갈 수 있어?”
시종일관 방어적이었던 나인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이거구나. 이 자식이 노린 게 이거였어. 마족과 영혼을 가지고 계약하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른다. 그런 건 아카데미에서도 배운 적 없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펠런 엑사 드로젠을 죽이는 건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에 하나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절대 하지 않을 일일 테니까.
“이제 나 좀 그 새끼 만나러 가게 해줘.”
“우선 계약서에 서명부터 할까요?”
참 뻔뻔스럽게 나인은 품 안에서 이상한 양피지를 하나 꺼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나는 종이가 찢어지길 빌면서 놈이 꺼낸 펜으로 거칠게 서명했다.
* * *
마경 안에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은 세 가지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마경 안의 독기를 차단할 수 있는 방호복, 두 번째는 나침반, 그리고 마물이나 마수를 쓰러트릴 수 있는 무기다.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이고 실제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은 아주 많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다 가지고 가진 않을 거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마경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빌어먹을 펠런 놈을 만나는 일이니까.
만나서 뭘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좀 싸워야겠지. 내가 처맞는 한이 있어도 한 대라도 때려야 속이 시원하겠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때리지 않겠다고 안 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거다. 내가 진짜 그 새끼 가만 안 둘 거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그쪽이니까.
속 시원해질 때까지 싸운 후에 대화를 할 거다. 놈이 언제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미련이 남지 않도록 서로 끝맺음은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으로 도망을 치든 아니면 놈과 싸우든 그건 그 이후 일이다. 거기까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비우고 있다. 가끔은 나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가 있다.
목 바로 위까지 방호복을 껴입고 코와 입을 막는 마스크를 썼다. 마법을 걸어둔 물건이어서 그런지 점프슈트처럼 생긴 물건이 생각보다 가볍고 손가락 놀리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꼭 가야겠습니까?”
슬쩍 나를 만류하는 나인 놈을 노려봤다. 놈은 계약까지 다 해놓고 인제 와서 사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딴소리를 해왔다. 펠런을 주축으로 한 토벌대가 마경의 입구에서 마물과 마수의 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이 사흘 전이라고 했다.
너는 왜 그걸 인제 와서 이야기하냐고 타박을 했더니 그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란다. 아니 그럼 나는 너희 편이 아니냐? 그래, 아니지. 이해하면서도 조금 섭섭해졌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복잡 미묘하다.
여기 왔던 방식대로 한밤중에 마차나 말에 타서 나인이 마경 위를 날아가 펠런의 막사 근처에 내려놔 주는, 뭐 그런 작전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럴 시간도 없게 생겼다.
마경 안에서 하룻밤 이상 머물 생각은 없다. 장시간 접촉하면 치명적인 독기가 마경 전체에 흐르는 것도 문제지만, 마수와 마물을 만나는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가장 좋은 건 펠런의 부대와 접촉한 후 놈과 대화를 나누는 거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면 섬으로 떠나는 거지.
“펠런 그 자식이 이미 마경 안에 있다는 거지?”
“왕께서는 드로젠의 변경에 침입하는 마물을 처리하던 도중, 어쩌다 보니 마수에 휩쓸려 점점 마경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상황을 연출 중입니다.”
“순간 이동 아티팩트 남았다고 했지. 그거 내놔.”
“안 됩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그걸 당신에게 씁니까?”
“나는 영혼도 걸었는데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
“당신을 이대로 풀어준 걸 왕이 아시면 저는 영혼 이전에 육체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용이잖아? 본체로 버텨봐. 맷집 하나는 좋아 보이던데.”
“마왕이 되면 산을 가르고 평지에 협곡을 만든다는 분에게 맷집이라는 개념이 통하겠습니까?”
“내가 가서 살아남으면 잘 말해줄게. 살아남지 못하면, 뭐 네가 알아서 말을 꾸며봐. 인간 놈이 하도 간교한 수를 써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이러쿵저러쿵하면서도 결국 나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계약서에 서명도 했고.
그러니 어서 뭐라도 쓸 만한 걸 내놓으라고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너도 내가 놈에게 가길 원해서 못 이기는 척하면서도 펠런에게 마법사 통신으로 내가 한 짓을 고자질도 하지 않고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간 거 아니냐.
그 말에 나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머릿속에 꿍꿍이가 수만 가지는 들어 있을 것 같다. 교묘한 뱀 새끼 같으니.
“순간 이동은 쓸 수 없습니다. 대신 직접 왕이 계신 근처까지 말과 함께 모셔다드리죠. 당신이 다른 마음을 품고 곧장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감시도 할 겸.”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말 못 하겠다. 조금 뜨끔해서 헛기침을 하며 비뚤어진 마스크를 고쳐 썼다.
육로를 통해서 마경으로 이동하면 도착까지 사흘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마경의 절반은 늪지고 나머지 절반은 마물의 서식처다. 마물과 싸우거나 늪에 빠져 발이 묶이기 쉽다. 독기에 중독되어 반쯤 미친 마수와 마물은 저보다 강한 마족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했다.
“그럼 마왕이 돼도 통제할 수 없는 거 아냐?”
“마왕은 다릅니다. 마수부터 마족까지 힘의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는 마왕에게 본능적으로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 경외와 충성을 바칩니다. 독기에 미치고 죽어간다고 하더라도 마물로 태어난 이상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중후한 용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아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숲을 내려다봤다. 온통 검은 가지에 뒤덮여 깊이를 알 수 없이 그저 고요한 밤바다처럼 보였다. 독과 마물을 품은 검은 바다.
“여기까지 왔으니 말인데, 이왕 영혼도 걸었으니 내게 걸린 저주 좀 어떻게 안 되나?”
“당신이 영혼을 건 대가로 저는 목숨을 걸고 왕의 명령을 어기는 중인 것 같은데요?”
“거참 사람 야박하네. 이왕 목숨 건 김에 하나 정도 더 해주면 좀 좋아?”
“대신 간단하게 교환 하나 하죠. 저도 질문 하나를 할 테니 답을 준다면 해주도 하는 것으로.”
나인이 조금씩 비행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긴 했지만, 마법으로 보호해 주고 있는 덕에 추위나 압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기척도 들지 않았다.
느리게 아래로 내려가는 날갯짓이 제법 크다. 맞은편 발에 붙들려 있던 말은 나인이 무슨 마법을 쓴 건지, 아니면 너무 무서워서 굳은 건지 미동도 없다. 차라리 발작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도시락을 매달고 달아난 서니사이드업을 생각하면 말이다.
바닥에 도착한 후 나는 내 장비를 다시 확인했다. 놓고 온 물건은 없다. 가장 최선은 창이었지만 이렇게 나무가 많은 장소에서 쓰기에 창보다 검이 좋을 것 같았다. 내 머리카락 색에 창까지 다루면 너무 튀어 보일 것 같았고.
펠런 놈의 군대에 아카데미 생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말이다.
“뭐가 궁금한데?”
다시 사람의 형태로 변한 나인이 구둣발에 뭉그러지는 썩은 나뭇잎에 인상을 찌푸렸다. 용이라서 그런 건지 놈은 방호복과 마스크 없이도 독기 안에서 태연하게 움직였다. 하긴 장시간 접촉해야 문제가 되는 독기라고 했으니 잠깐은 없이 움직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늪지라는 말을 들었는데 발이 바닥이 잠길 정도로 질척거리진 않았다. 쌓이고 썩기를 반복한 검은 나뭇잎이 군용 부츠 아래 끈끈하게 엉겨 붙을 정도였다.
독기와 늪 때문에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날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스크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 건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미래를 알면서 아무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까?”
“…….”
“당신은 블리스의 후계자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래요. 제가 만약 인간이고 자허 블리스로 태어났다면 다니엘 블리스에게 즉시 모든 사실을 말했겠군요. 그리고 어떻게든 어린 나이의 펠런 엑사 드로젠을 각성시키지 않도록 구금하고 감시했을 겁니다.”
“영감님이 퍽이나 믿었겠다.”
“아니요. 그들이 증거를 원한다면 대신전과 입을 맞출 수 있겠지요. 대신관은 펠런의 태생을 알고 있으니까요. 대신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대가로 드로젠의 왕이 신전에 바친 수많은 기부금을 빌미로 왕국과 신전을 움직여 마경의 경계를 강화하고…….”
“난 자허 블리스가 아니라 그냥 자허로 뒷골목 움막에서 눈을 떴어. 그리고 그날 하루가 다 가기 전까지 잡탕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나보다 덩치 큰 놈들에게 얻어맞았지.”
“…….”
“내가 과거 팔이 하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거든? 그래서 이런 이야기 우리 영감님 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보다 더 깊은 이야기는 펠런에게도 한 적 없고. 그런데 여신의 저주가 걸려서 네게만 하는 이야긴데, 나는 여기 오기 전에도 그렇게 살았어.”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생리적인 거부감에 치를 떤다. 지난 삶에서 내가 가장 하기 싫어하던 짓을 하고 있다.
“그때도 고아였어. 그렇다고 거창한 건 아니고, 남에게 기대거나 협조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여태까지 뭘 가져본 적이 없어.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네가 그렇게 대비해야 한다는 미래도.”
어우, 머쓱하다. 이런 이야기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뿐인 친구 놈 납치 감금한 자식을 만나서 때려주고 대화하러 가고 싶은 것뿐인데 싸구려 판타지 소설 속 아니랄까 봐 고난과 역경이 기본 옵션으로 따라오고 난리냐.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나는 나인을 쏘아봤다.
“그래서 내 앞가림만 생각했어. 나 혼자 살 수 있는 길만 생각했어. 누가 내게 뭘 해줬어야 나도 남에게 베풀지. 근데 나는 거기서도 여기서도 먼저 받은 적 없거든. 야박하고 이기적인 새끼라고 생각해도 돼. 그래서 답이 됐나? 저주 풀어줄 수 있겠어?”
“…당신이 원하는 순간, 저주는 풀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인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나인에게 물었다.
“…야, 이 사기꾼 새끼야. 너 지금 사기 친 거지. 계약서 내놔. 찢어버릴 거니까.”
“…무슨 그런 심한 말을 합니까?!”
“아냐. 이거 분명히 사기 친 거야. 사기꾼들 꼭 하는 말이 있어요. 저주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으면 저주를 풀 수 있다. 당신이 저주에 걸린 건 마음이 약해서다. 와, 내가 여기 와서 이런 사기를 당하네. 계약서 안 내놔?!”
“해주했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큰 대가를 바쳐서 해주를 한 건지 모르시면서. 계약은 끝났습니다. 지금 찢어도 무효할 수 없어요!”
“해주는 무슨 빌어먹을 놈의 해주야. 그래서 이다음은 뭐냐. 당신이 간절하게 원하면 그 순간 온 우주가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뭐 이딴 말이나 하려고?”
“온 우주까지는 아니고 어둠의 신이 당신을…….”
“아이고, 그러세요. 사기꾼이 아니라 사이비 교주셨어요.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의심스럽다. 터무니없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추궁하기에 너무 늦었다. 나는 억울한 것처럼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나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씨근덕거렸다. 역시 조상님이 삼도천 너머에서 그 계약서 서명하지 마오, 하시며 손 흔들 때 그만둬야 했나.
“여하튼 저는 약속대로 당신을 왕 앞에 모셔다드렸습니다. 이후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보시죠.”
목 졸린 듯 절박하게 외치는 나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검은 나무 울창한 늪지대를 응시했다.
저 어딘가 펠런이 있다. 마물과 싸우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마왕이 되기 일보 직전일까.
왜 점점 더 놈을 추궁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걸까. 내가 놈을 만나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보자마자 분노로 미치는 건 아닐까.
마경 안에서 문제가 되는 건 독기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인은 펠런과 최대한 가까운 장소에 말과 나를 안내한 후 잽싸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지그시 놈이 도망간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만약 내게 사기를 친 거라면 언젠가 추적해서 기필코 복수할 테다.
그리고 나는 펠런을 찾았다.
펠런 엑사 드로젠은 피 묻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말라붙은 마수의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그 형태가 처절한 싸움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살아남은 검은 사자와 같았다.
그의 주변에 남은 병사는 없었다. 달아나거나 죽은 이들이 남긴 건 고질적인 절망과 타성 같은 증오뿐이었다. 살아남아 마경에서 도망친 병사들은 펠런 엑사 드로젠을 증오하리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우연을 가장해 이끈 그는 덤덤하게 그 증오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죽을 이들이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해야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내가 지난 생에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이라면 놈이 앉아 있는 풍경을 그런 식으로 묘사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빌어먹을 펠런 자식은 그렇게 궁상맞은 얼굴로 바위에 앉아 늪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너 혼자야. 다른 병사들은?”
“……?”
내 목소리에 펠런이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굴 전체를 가린 마스크가 갑갑한 듯, 고개를 흔들며 투레질하는 말의 목을 긁어서 달래주며 나는 펠런에게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저 자식의 낡아 빠진 마스크에도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저래서야 호흡도 어려울 것 같다. 방호복도 사이사이 찢어져 안에 입은 가죽 갑옷이 보일 정도다.
목덜미와 뺨이 푸르스름한 걸 보면 이미 독기에 중독이 된 것 같은데. 이 자식 쓰고 있는 마스크 고장 난 거 아냐? 그렇게 빨리 마왕이 되고 싶었냐?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아직 인간 맞지?”
“…그래.”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안도하고 기뻐하며 놈을 올려다봤다. 아직 놈이 마왕이 아니라, 두들겨 패기 전에 전력을 다해 도망칠 생각부터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섬으로 가기 전에 미련이 남을 뻔했지 뭐야.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놈이 나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무슨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보는 건 또 뭐람? 나는 조금 쑥스러워져 어깨와 주먹을 가볍게 풀었다.
“어금니 꽉 물어. 이 새끼야.”
놈이 턱에 힘을 줬을지 모르겠다.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고 주먹을 단단히 쥐고 놈의 얼굴을 전력을 다해 후려쳤다.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은 놈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늪지라 그런지 바닥이 영 자세 잡기가 어려워 나도 디딤발이 미끄러졌다. 상관없다. 넘어질 걸 각오하고 반 바퀴 돌아 놈의 아랫배를 발로 내려찍었다.
“큭!”
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저 자식이 바닥에 쓰러지는 걸 처음 보는 것 같다. 배가 워낙 단단해야 말이지. 덕분에 나도 진창에 뒹굴었다. 진흙 덩어리가 방호복에 달라붙어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인마. 아직 덜 때렸어.”
놈의 가슴팍에 올라타 멱살을 움켜쥐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검은 눈에 흔들림이 없다. 내가 쥔 주먹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나와 시선을 맞춘 놈의 한결같음에 내심 안도하며 다시 놈의 콧잔등에 주먹을 휘둘렀다.
쩍―!
하고 고기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놈의 빌어먹을 코뼈는 무쇠로 만들었는지 부러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건틀릿과 보호복을 낀 내 주먹이 아프다. 마법으로 보호한 것 같지 않은데 뭘 어떻게 단련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반쯤 마왕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새끼가!”
시체처럼 늘어진 놈의 얼굴을 두들겨 팼다. 내가 먼저 숨이 찰 지경이지만 놈은 처음 한 번 숨을 내뱉은 것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입술이 터지고 건틀렛의 금속 부품에 이마가 베이긴 했지만, 놈이 다친 건 피부뿐이다.
펠런이 점점 인간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숨이 차서 주먹을 늘어트리고 놈을 노려봤다. 여전히 검은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땀이 마스크에 스며들어 숨쉬기가 힘들다. 평소보다 더 지친다 싶었는데 이 빌어먹을 마스크가 호흡을 방해했다.
“빌어먹을 자식아.”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힘이 다하도록 주먹질을 했더니 그래도 속에 얹힌 게 아주 조금 풀린 것 같다. 나를 따라 일어난 놈이 헝클어진 앞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겨 나를 응시했다.
“…유마?”
“그 이름으로 날 부를 자격이 너한테 있다고 보냐?”
“…….”
양심도 없는 새끼 같으니. 사납게 노려보며 쏘아붙이자 놈의 검은 눈이 잘게 흔들렸다.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아는 거다. 그 안에 병아리 눈물만큼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지?
“다짜고짜 패고 나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일단 대화 좀 하러 왔다. 어디 앉을 데 없냐?”
“…앉을 곳이라면. 천막이 있긴 하다만.”
“들어가. 여기까지 널 찾아온 거 보면 알겠지만 할 말 많아.”
내 질문에 놈이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펠런은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구멍이 숭숭 난 거대한 보자기 비슷한 것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소형 천막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놈을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국경 수비대장이 머무는 천막이 고작해야 사람 하나가 쭈그리고 누워서 쉴 정도의 크기다. 앉으면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삼각 형태의 천장에 닿을락 말락 했다.
바닥은 두터워서 습기가 올라올 것 같지 않지만, 이미 마른 진흙과 젖은 진흙이 뒤범벅되어 좋게 봐줘도 돼지우리 같았다.
국경을 넘는 마물을 처리하라고 수비대장 자리에 앉혀놨더니, 공에 눈이 멀어 마경으로 들어가 버린 대책 없는 막내 왕자. 마경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은 펠런이 무리한 토벌을 감행했다고 외치고 있을 거다.
펠런에게 도착한 왕의 명령서는 이미 누군가 불태웠겠지. 외전에서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마경으로 들어가 대형 마수를 처리해 증식의 원인 자체를 제거하라.’ 슬슬 드로젠에서는 펠런과 사라진 수비대원들의 수색을 손이 부족하다며 미루고 있을 것이고.
마스크가 불편해 작게 마른기침하는 내게 천막 구석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연 펠런이 그 안에서 약초 한 움큼을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입에 넣고 침이 섞이도록 천천히 하나씩 씹어. 해독 효과가 있다.”
“나인은 이런 이야기 안 해줬는데.”
“드로젠 특산품이다. 희소품이다 보니 국경 수비대가 아니라면 잘 모르는 물건이라고 하더군.”
마스크를 벗고 하나 입에 넣어 질겅거렸다. 쓴맛이 확 돌 줄 알았는데 박하처럼 화한 맛이 오히려 기분 좋다. 박하 향에 썩은 풀 냄새와 역한 진흙 냄새가 뒤섞여 코 안쪽이 얼얼하다.
“그래도 되도록 마스크는 쓰고 있는 게 좋아. 약초로 버틸 수 있는 건 몇 시간뿐이니.”
“됐어.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너도 이거 씹어.”
놈의 마스크를 벗기고 억지로 약초 하나를 펠런의 입에 밀어넣었다. 의외로 순순히 받아먹고 얌전히 우물거리는 놈의 얼굴이 오랜만이다.
“잠시만 기다려.”
약초를 삼킨 다음 펠런은 나를 잠시 방치했다. 그 틈에 나는 천막을 둘러봤다. 영감님이 머물던 막사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 최소한의 생활도 할 수 없는 공간이잖아.
나인과 통신을 시도하는 건지 펠런의 미간이 점점 더 깊이 팼다. 나인 놈은 마법사 통신을 할 때만큼은 얼간이 같았는데 저 자식은 저래도 잘생겼다. 입 안에 남은 약초 부스러기를 삼킨 후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인에게 연락 안 될걸. 내가 오늘 하루만 네 연락 받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새 또 나인을 매수했나.”
“매수는 무슨. 협박이지. 내가 네 유일한 친구 아니냐. 놈도 고개 숙여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 거지.”
어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편하게 농담이 나왔다. 그게 참 쉬웠다. 한 번 입이 터지니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스처도 썩 자연스러웠다. 펠런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그 미소를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말 돌리는 거 싫어하니까.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내일 나는 섬으로 떠날 거야.”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가 간다는데 네가 왜?”
칼같이 대답하는 거 봐라. 옅게 웃던 기색이 싹 사라지고 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 이제 좀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 싸움의 시작이 이래야지. 놈도 이제 조금 상황을 파악한 것처럼 무뚝뚝하게 내게 명령했다. 즉,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나를 도발했다.
“보내지 않을 거다. 여긴 네가 머물 만한 곳이 아니다. 요새로 돌아가. 나도 곧 그곳으로 갈 테니.”
“이 새끼가, 내가 말로 타이르니 지가 아직 사람 새낀 줄 알지? 사람 마음 가지고 사기 치고 거짓말하고 납치에 감금까지 한 짐승 새끼가 입으로 자꾸 짖네?”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보낼 거다.”
이성적으로 대화하고 싶었다. 정말이다. 내 불같은 성질머리를 알고 있으니 더더욱 침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기 전에 몇 번이고 우선 몇 대 때리고 대화하자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아직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사람만 대화로 상대해. 그리고 짐승 새끼는 두들겨 패는 편이고.”
시작부터 망한 우정과 어쩌다 보니 몸이 먼저 엮인 관계였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인연을 생각해서 사람대접해 주려고 했는데 이게 잘 안 된다.
어금니 부드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놈을 만나지 못한 기간 동안 쌓인 서러움이 한 번에 터졌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입학식 시험 날 느낀 이후 계속 잊고 있었던, 그래서 사라진 줄 알았던 난폭한 살의가 다시 몰아쳤다. 이게 이방인이 느끼는 살의인지 아니면 내가 놈에게 느끼는 배신감인지 알게 뭐냐.
펠런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이대로 잡히며 다시 감금당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본능인지 저주인지가 놈의 심장에 검을 휘두르라고 외쳤다. 아무래도 여신이 건 저주는 좀 멍청한 모양이다. 이 협소한 천막 안에서 검을 쥐면 휘두르기는커녕 내찌르지도 못한다.
놈의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쥔 순간, 방호복 허벅지에 걸어둔 사냥용 나이프를 불시에 빼 들어 놈의 팔뚝을 찔렀다.
핏물이 튀었다. 피하거나 마법으로 막을 거로 생각했는데 놈이 피 흘리는 건 처음 봤다.
그렇다고 놀란 건 아니다. 예상보다 단단한 놈의 근육 때문에 칼날이 표면만 긁고 깊이 박히지 못했다. 나이프를 휘두른 내 자세가 나쁜 탓도 있었다. 그대로 힘주어 세로로 그을 생각이었는데 놈이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직후, 천막이 무너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내가 앉아 있던 자리를 짓눌렀다.
“습격이다.”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나는 허겁지겁 넝마가 된 천막 천을 찢고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여기가 어딘지 생각을 했어야지.
마물이다.
원기둥 같은 두터운 여덟 개의 다리. 상대적으로 납작한 등과 머리는 기묘한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가시돌기 달린 긴 채찍 같은 꼬리와 두꺼비처럼 위아래로 쫙 찢어지는 입. 저게 뭐였더라? 아카데미에서 배웠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기억났다. 놈의 약점은 부드러운 배다. 기이할 정도로 장기가 납작하게 압축되어 있어 배에 조금만 상처를 입혀도 그 틈으로 제 내장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줄줄 쏟아내며 죽는 놈이라고 용병 출신 교수님이 그랬다.
그리고 소화가 심각할 정도로 느린 놈이라 똥 냄새가 심하다고 그랬지. 그래. 곧 죽일 놈의 이름을 알 필요가 있을까. 나는 내 비상한 기억력에 환호했다.
“안으로 파고든다. 엄호해!”
마물은 뭔가를 씹고 있었다. 턱이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살점이 다른 마수를 먹나 했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내가 배 쪽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자, 마물은 즉시 가시돌기 꼬리를 안으로 말아 나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렀다.
“……!”
꼬리가 닿기 전에 펠런이 놈의 꼬리를 단번에 추수하듯 쳐냈다. 마물이 나를 밟기 위해 거칠게 날뛴다. 오히려 내겐 기회다. 접근하는 놈의 안쪽 다리를 밟으며 박차고 튀어 올라 마물의 배를 수면 위의 달을 베듯 단숨에 잘랐다.
조금 얕았다. 젠장. 내 창이 절실하다.
그래도 피부 안까지 닿은 모양인지 시차를 두고 시뻘건 살이 벌어지며 내장이 쏟아졌다. 마수든 마물이든 산소를 호흡하고 사는 생물이라 그런지 어차피 피는 다 붉다.
급하게 몸을 굴려 내장에 깔리는 일은 막았지만, 잘린 단면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에 피범벅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놈의 거대한 몸뚱이에 펠런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깔렸다. 무표정한 놈의 표정을 보니 천막에 별 미련은 없어 보인다. 어느 틈에 약초 통이라든지 필요한 물건은 또 챙긴 듯했고.
“지척까지 왔는데 알아차리질 못했어.”
“여긴 공간이 뒤틀려 있다. 그래서 생물의 기척을 읽기가 어려워.”
“배운 건 역시 경험을 해봐야 안다니까. 이제 좀 실감이 나네.”
피에 젖어 미끈거리는 손바닥을 진흙 바닥에 문질러 닦고 다시 검 손잡이를 쥐었다.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펠런이 여기서 겪은 건 대부분 이런 식의 전투였을까.
펠런은 허공에 검을 휘둘러 마물의 살점을 털었다. 우둘투둘 이가 나간 모양이 볼품없는 톱 같다.
제아무리 날을 상하지 않게 다루고 관리해도 무기는 소모품이다. 그냥 봐도 펠런의 검은 몽둥이만도 못하다. 저걸로 어떻게 저 거대한 마물의 꼬리를 베고 또 여태껏 다른 마물들과 싸우며 버틴 건지 모르겠다.
놈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목덜미에 선뜩하게 소름이 돋았다. 놈이 보는 방향에 늪지를 거슬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십은 되어 보이는 마수와 마물의 무리가 보였다. 펠런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나인을 부를 테니. 요새로 가라.”
고개를 돌려 펠런을 봤다. 섬으로 가기 전에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여기 온 걸까. 결국, 나는 여기서 죽나?
놈의 찢어진 방호복을 봤다. 내가 상처 입힌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와 무덤덤한 표정에 부채감을 느꼈다. 놈이 나를 속인 건 맞지만 지금 놈이 나를 구한 것도 사실이다.
나인을 불러 달라고 얌전히 요새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펠런 놈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좆 까고 무기나 들어. 그리고 버텨. 여기서 각성하면 넌 나한테 죽어.”
멋있게 입을 털었으니 행동은 그 절반만이라도 멋있고 싶었다. 나는 마물 틈에 뛰어들어 짐승처럼 날뛰며 썰고 베고 죽였다.
이만큼 창이 절실했던 적이 없다. 시뻘건 마물의 주둥이가 몇 번이고 나를 물어뜯으려 했다. 허공을 긁고 지나가는 칼날 같은 마수의 발톱들. 나를 먹이로 보는 눈들. 그 모든 마수와 마물의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참 기가 막히게 약점은 전부 생각이 났다.
저건 모피가 비싸고, 저건 쓸개가 비싸다고 했지. 아, 저건 뿔이 약재라고 했는데. 사람이 살려고 하면 어떻게든 활로를 찾을 수 있다.
베고 썰고, 그러다가 나도 베였다. 밟히고 부러졌다. 어딘가 터지는 소리가 났고, 아파서가 아니라 지지 않으려고 고함 같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그동안 몇 번이고 펠런이 나를 구해줬다. 아무리 멍청한 나라도 이해했다. 아마 놈 혼자 싸웠다면 더 잘 싸웠을 거다. 나는 걸림돌이었다.
상관없다. 놈은 아직 마왕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다.
입에 고인 핏물을 뱉고 허리춤에 찬 물병으로 입 안을 헹궜다. 손이 떨려서 물병을 두 번 놓친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손가락이 부러져서 그런 거니까.
아까 놈이 준 약초를 챙겨두길 잘한 것이 전투 중에 마수의 발톱에 마스크와 뺨이 조금 찢어졌다. 싸우면서 몇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지만, 정오 조금 지나서 하나 더 씹으면 될 거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하나 더 씹고.
베이고 찔린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래도 치명상은 없었다. 왼쪽 발가락이 골절된 듯 걸을 때마다 절뚝거려야 했다.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게 새삼 크게 다가왔다.
괜찮다. 뒷골목에 살 때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싸우면서 어느 순간부터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펠런에게 오늘은 각성하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아무리 급해도 오늘은 참자고. 그러고 좀 웃기도 했나?
힘들다.
피 묻은 검을 쥔 펠런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놈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무리 마력의 마자도 모르는 나지만 놈의 각성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녀석을 만날 수 있는 건 오늘, 아니면 내일로 끝일지 모르겠다.
마지막 마수의 숨통을 끊은 건지 사방이 고요하다. 이제 이 주변에 살아남은 생물은 우리뿐이다.
약초를 질겅거리고 삼켰다. 전투가 끝나고 나니 베인 자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발가락 말고 골절은 없는 듯했다. 하도 많이 다쳤더니 어디를 다치면 어떻게 아픈지 감이 왔다.
펠런이 고개를 들었다. 초췌해 보이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잠시 나를 돌아봤지만 내게 말을 걸기 전에 미간부터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지금도 수시로 나인에게 통신 중이겠지. 아마 받지 않을 거다. 놈이 마왕으로 각성하기 전까진 그럴 거라고 추측 중이다.
“우선 여기서 이동해야 한다. 움직이기 힘들다면 내가 데리고 이동하마.”
대답도 듣지 않고 펠런 자식이 나를 짐짝처럼 들어 등에 업었다. 내가 타고 온 말은 이미 마수에게 물려 죽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봤다.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에서 흐르는 핏물이 검은 늪 바닥에 스며들었다. 펠런의 말인즉슨 곧 냄새를 맡고 다른 마수들이 올 거라는 이야기였다.
한쪽 팔로 날이 나간 검을 쥐고 다른 팔로 놈의 목을 감았다. 생각 난 김에 놈의 입에도 약초 하나 밀어넣어 줬다. 놈이 새끼 새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생각해 보니 아카데미에서도 이렇게 놈에게 실려 이동했던 적이 있었다. 추억이 너무 무거워서 놈의 피 묻은 뒤통수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러니까 졸린데. 자면 안 될 것 같아.”
“자도 괜찮다. 불침번은 내가 서면 되니.”
“웃기지 마라. 내가 자면 몰래 요새에 보낼 거잖아.”
놈이 짧게 칫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내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헛소리를 다 듣네?
낮고 부드러운 펠런 녀석의 목소리가 이마를 타고 피부를 통해 스미는 것 같았다. 닿은 자리가 따뜻하다 보니 새삼 여기가 추운 지역이라는 실감이 났다.
펠런은 한참 걷다가 길을 꺾거나 크게 돌아 걸었다. 최대한 집중해서 걸어가며 마물을 피하는 듯했다. 아무리 마왕 꿈나무라 하더라도 뒤틀린 공간에서 기척을 감지하긴 어려운지 몇 번이나 마수와 마주칠 뻔했다.
슬슬 졸음이 올 즈음 녀석이 마른 바닥에 나를 내려놨다. 거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나름 지붕과 엄폐물도 있는 틈이었다.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희고 깨끗한 마수의 털이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거처일 것이다. 그것도 이런 좋은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강한 녀석일 테지만, 음…….
펠런보다 강할 것 같지는 않다.
갑자기 안심되니 졸음이 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춥고 심지어 배도 고픈데 기가 막힌다. 하루 전만 해도 잘 먹고 잘 자고 몸도 건강했었지. 그렇지만 지금이 좋다. 내가 실실 웃는 것을 보고 펠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사실 내가 좀 미친 것 같다.
“왜 웃나.”
“아카데미에서 지냈던 날이 생각나서.”
품 안에서 납작하게 접은 비옷을 가볍게 털던 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놈의 표정이 복잡미묘하다. 녀석에게도 웃을 수 있는 추억일까? 하긴 그런 추억이니까 나를 감금씩이나 하려고 하는 거겠지.
“내일 아침에 국경 쪽에 나 데려다주고 다시 마경 들어가.”
“…….”
“아니면 나랑 같이 도망갈래? 둘이서 섬으로 갈까? 거긴 마족도 받아준다고 하더라. 각성 같은 거 하지 말고 둘이서 살래?”
“…….”
큰 결심을 하고 한 말인데 대답이 없다. 같이 사는 거 싫은가? 아무래도 사람보다 권력이 좋은가? 내 무릎 위에 비옷을 던져준 후 펠런이 옆에 앉았다. 원하는 대로 녀석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게 된 건 좋은데 놈이 말이 적으니 답답하다.
“입 다물고 침묵시위만 하지 말고 대화 좀 하자고. 우리 이제 대화할 시간 없잖아.”
“종이 바뀐다고 나 자신까지 바뀌지 않을 거다.”
“다른 이방인들이 말 안 하디? 마왕으로 각성하면 인간을 죽이지 못해 미쳐 날뛰는 살인귀가 된다고?”
“…….”
“그래서 목숨 걸고 온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아직 몇 년은 너랑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믿었던 놈에게 뒤통수 맞아서 얼얼하다.”
펠런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과 놈이 변한 곳이 있다면 아랫입술 한쪽이 거무스름하게 피딱지가 진 것 정도일까.
마수와 싸우다 일부러 맞았나.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놈의 상처 난 곳을 엄지로 슥슥 문질러봤다. 아, 기억났다. 낮에 내가 주먹으로 팼던 자리다.
“나쁜 자식아. 거짓말을 너무 잘했잖아. 내가 말했지 설레발 치는 건데 말 안 해주는 거면 너 나쁜 놈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왜 감정 가지고 거짓말을 하냐.”
웃으며 태연하게 마음에 상처 같은 건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굴 생각이었다. 이런 일은 내가 태어난 직후부터 사는 동안 몇 번이고 일어났고 그때마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상처받은 적도 없었다.
그때도 그렇다. 나는 펠런에게 온전히 기대하지 않았기에 본명을 다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놈을 의심하고 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도 잘해줘서 고맙다. 고작해야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즐거웠고 좋더라. 너랑 잔 거 후회 안 해. 괜찮았어.”
…그런데 잘 안 돼.
놈의 입술에서 손을 떼기가 어렵다. 미련 같은 건가 보다. 나는 그런 거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그래도 다른 놈에게 내 이름은 알려주지 말지…….”
울지 말자. 할 말만 하자. 미련을 보이며 질질 끌지 말자고 요새에 머물며 몇 번이고 스스로 타이른 덕분인지 눈물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보다 화가 날 뿐이다.
“기껏 알려준 이름을 나 속이는 데 써먹어. 이 염치 없는 놈아.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친구 좋아하시네. 이 사기꾼 새끼야.”
놈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언제 놈의 방호복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부러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천 자락에 손가락을 걸친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침착해야 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대만 더 때릴까. 사람이 너무 폭력에 의존하면 안 되는데. 근데 이 자식 어차피 내게 맞아봤자 타격도 없잖아? 몇 대 더 때려도 아무렇지 않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분노엔 굴곡이 있다. 멀거니 나를 올려다보는 놈을 보아하니 때려도 방어는 안 할 것 같다.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고 놈은 대꾸도 안 하는데 나 혼자 열을 내고 있으니 진이 빠졌다.
제풀에 지쳐 다시 주저앉았다.
“나인을 호출했으니 내일 아침 다시 요새로 돌아가라.”
“싫어.”
“종족이 변한다고 나 자신까지 달라지지 않을 거다. 인간이 선제공격하지 않는다면 나도 먼저 침공하지 않겠다.”
“엿 먹어.”
놈이 내게 한 것처럼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옅은 피로에 잠긴 펠런의 무표정한 얼굴에 드디어 사나운 기색이 어린다. 왜. 직접 겪어보니 성의 없는 단답이 좆같은 줄 알겠냐?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펠런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놔줄 생각 없다. 네 말대로 나쁜 놈이라서.”
“처음부터 속이지 말든가. 네가 내 이름 팔아버린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신뢰는 끝장난 거 모르냐?”
내게 집착하는 건 알겠다. 하지만 다른 건 모르겠다. 놈에게는 신용이 없다. 그만큼 당해놓고 믿겠냐? 내가 호구도 아니고 이름 걸고 속아서 감금까지 당해놓고 또 속겠냔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펠런을 바라보다가 놈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었다.
“먼저 믿게 행동을 했어야지. 빌어먹을 자식아.”
밀리지 않을 것 같던 놈이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놈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은 나를 죽이지 않겠지. 그것도 네가 인간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잖아. 마왕이 되면 살인귀가 된다잖아.
나는 항상 관계의 끝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도 그렇게 낯설지 않다. 특히 펠런은 더하다. 달갑지 않게 찾아와 어쩔 수 없이 친구가 되었고, 제약을 둔 채 교제했으며, 그것도 시간제한이 있었다.
어쩌면 5년, 그걸 단축한 건 내가 아니라 놈이다. 다들 그랬다.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떠난 적이 없었다.
“너마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4년을 못 버티냐.”
괜찮을 것 같았다. 무투회가 끝나면 시험공부를 하고, 무도회 정도는 같이 나가도 괜찮지 않았을까? 방학에는 드로젠에 가지 말고 같이 저택에서 지내는 거다. 영감님이 오시면 대련도 하고. 수확제에 나온 음식도 즐기면서, 주말마다 새로운 서적이 나왔나 서점에 함께 가면서.
“사고 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더니 제일 큰 사고나 치고.”
“…….”
“내가 돌아온다고 했잖아. 왜 아카데미가 아니라 여기 있는 거냐고. 빌어먹을.”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속이 답답하다. 내 손바닥이 뜨겁다. 깊은숨을 내뱉고 고개를 들어 펠런을 다시 바라봤다.
“원하는 걸 말해봐. 일단 대화를 하자고. 네가 뭘 원하는지 내가 알아야 해주고 섬으로 가든 뭘 하든 할 거 아냐.”
“널 원한다고 하면 줄 건가?”
“…밑도 끝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네. 이 새끼. 지금이 고백이나 할 상황이냐?”
“내게 대적하지 않는 너를 달라고 하면 줄 건가?”
“…펠런?”
어느새 내 지척까지 다가온 놈이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아프지 않지만, 손아귀 힘이 제법 강하다. 놈이 나를 뚫어질 듯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놈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입을 달싹거리는 입 모양을 보면서도, 의미를 유추하지 못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목 안에서 코를 타고 핏물이 역류했다. 속에서 울컥 뭔가 올라와 나는 고개 숙여 헛구역질했다. 씹어 삼킨 약초를 되올리고도 몇 번이고 억억거리며 구토했다.
펠런이 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토하듯 외치다가 내 상태를 보고 곧 입을 다물었다. 속이 아픈 건 난데 놈이 더 울 것 같다. 저렇게 약한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이게 그냥 두통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이유를 짐작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해파리가 한 천 마리 정도 들어 있는 것처럼 먹먹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내 어깨를 쥔 놈의 손이 차라리 고맙다. 이게 없으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거다.
아주 조금씩 이명처럼 귀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끔찍한 소음이 사라졌다. 그러다 간신히 희미한 펠런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놈이 머뭇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유마, 괜찮나? 그 부름에 나는 입에 고인 피 섞인 신물을 뱉고 콧잔등을 손등으로 훔치며 농담을 지껄였다.
“방금 네가 고백한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들었거든? 다시 한번 해봐. 이번엔 잘 들을게.”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요새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지내게 해주마. 시간이 지나고 안정이 되면 다른 곳도 갈 수 있을 거다. 그때 가자. 섬에 가고 싶다면 그때 가도 된다.”
“사랑을 고백하라고 했지, 우리 결혼 생활을 혼자 설계해 보라고 하지 않았는데.”
내 헛소리를 잠자코 듣던 놈이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놈을 따라 실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대화를 하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여기 왔다. 녀석과 이런 시답잖은 농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서.
머리가 둘로 쪼개질 것 같은 두통으로 모자라 속까지 뒤집혔지만, 말 몇 마디 나눈 거로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피가 잘 안 멎길래 흐를 때마다 닦았더니 손등이 코피로 범벅이다. 볼 수 없지만 지금 내 얼굴도 사나흘은 마경에서 뒹군 듯 지저분하겠지.
몸은 힘들어도 인제야 나답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자는 것도 좋지. 하지만 진창에 굴러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게 좋다.
“섬에서 얌전히 지낼게. 네가 약속대로 선빵 안 치고 북부 산맥 잘 다스리고. 그래, 맞아. 용사를 무찔렀다는 소식 들으면 내가 너 찾아갈게.”
“…용사를 무찌른다고.”
뭔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펠런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긴 이 녀석도 소설 내용을 들어봤으니 최종 결전에서 빛의 신이 강신했다는 내용을 알겠구나. 나는 놈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툭툭 두드려줬다.
“괜찮아. 소설 내용 알잖아. 놈이 초반에 경험치 쌓으며 실력 올리기 전에 일찌감치 처리해 버려.”
“…….”
“나인 시켜서 성검 받으러 대신전 가기 전에 습격해도 좋고.”
“인간은 죽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 한정이지. 내가 모든 인류를 다 지킬 생각이었으면 섬으로 튈 준비를 했겠냐? 네 무릎 위에 올라타고 ‘마왕님, 제발 인간을 죽이지 말아주세요.’라고 애교 부렸겠지.”
“…….”
“…그 반응은 뭐냐. 설마 보고 싶어?”
펠런이 시선을 피했다. 놈의 귀 끝이 붉다. 내 말을 듣고 상상한 모양이다. 나는 상상하고 헛구역질했는데 놈의 미의식이 나와 많이 다른 모양이다.
“하… 날 너무 좋아해서 어쩌냐. 네가 이렇게 귀엽게 구니 내가 화도 심하게 못 내고.”
마음이 약해서 주먹질만 조금 하고 말았지 뭐야? 배시시 웃으며 놈의 피딱지 진 입술을 주먹으로 가볍게 눌렀다가 뗐다.
“그렇게 내가 가지고 싶었어? 납치하고 감금하고 어디도 못 가게 막고 싶어서라도?”
“…그래.”
“억누르면 더 뛰쳐나가는 내 성질 알면서 잘도 저질렀네. 미친놈. 그래서 내가 너 미워하면 감당할 자신은 있고?”
“미움받더라도 지킬 생각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누가 나를 지키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 나는 내가 지켜.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내가 정해야 하는 문제지. 네가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놈이 고개를 조금 기울여 웃었다. 내 손목을 쥔 놈이 부러진 손가락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피와 진흙에 더러워진 손가락이 뭐 그렇게 좋다고 귀하고 소중한 걸 다루듯 놈의 행동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괜히 가슴이 답답해서 고개를 돌렸다. 숨도 막히는 것 같고 열도 나는 것 같고 좋아 죽을 것 같으면서 화도 나고…….
나쁜 새끼.
놈의 손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놈이 순순히 손을 내줬다. 마스크를 벗고 놈이 한 대로 놈의 손가락 마디마다 입을 맞췄다. 진흙과 피 냄새가 나는 단단한 손가락에서 아주 조금 놈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래오래 이러고 싶은데 손가락에 입을 맞추는 시간이 짧다. 같이 도망치고 싶다. 놈의 말대로 요새에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러다가 놈이 폭주해서 나를 죽이면 놈보다 내가, 나를 용서 못 할 것 같다.
고개를 들고 펠런을 본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도 마찬가지 같다. 놈도 그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미움받더라도 널 요새로 돌려보낼 거다.”
“그럴 줄 알았다, 인마. 어쩔 수 없네. 대화는 다 한 것 같으니 이제 너나 나답게 대련으로 해결하자.”
주먹을 꾹 쥐어봤다. 조금 전 전투에서 부러진 손가락이 제일 큰 문제였다. 아픈 건 참을 수 있는데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검을 단단히 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기사가 항상 최선의 몸 상태에서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몸을 일으키는 나를 바라보며 펠런이 고개를 저었다.
“너를 얕잡아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네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아도 너를 제압할 방법은 많다.”
“헛소리하지 말고 검이나 들어. 겁먹었냐?”
“그래. 네가 눈먼 검에 다쳐서 너를 잃을 것 같아 무섭다.”
“말은 잘해, 하여튼. 자꾸 훅 치고 들어올래?”
펠런이 톱날 같은 제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웅크린 검은 사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사이 실전을 몇 번이나 치른 놈은 마지막에 대련한 날보다 더 크고 강하게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키고 나는 가볍게 관절을 풀었다. 왼 발가락이 조금 맛이 가긴 했지만,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길 수 있을까? 놈과 대련할 때마다 했던 떠올렸던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놈을 이기고 싶었다.
“간다.”
펠런이 선공을 선언함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 오든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중단 막기 자세를 취한 직후 곧장 왼쪽 아래서 시야각에 잡힌 펠런을 인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허리를 절단할 기세로 펠런이 검을 휘둘렀다.
이건 못 막는다.
지금까지 나와 한 대련은 봐준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걸로 생각이 끊겼다. 검날이 아니라, 검면을 휘둘렀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몸이 날아가 바위에 처박힌 후였다. 쥐고 있던 검은 충격에 검날이 반으로 부러졌고, 방호복은 터졌다.
뼈가 부러졌나? 통증보다 먼저 감각이 사라졌다. 시야가 암전한 걸 보니 잠깐 기절한 모양이다. 예전에 팔이 터질 때와 비슷하다. 너무 고통스러우면 감각 자체가 잠깐 전원이 나갔다 돌아오는 모양이다.
“장기는 크게 상하지 않았을 거다. 너와 대련하면서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쿨럭!”
단 한 방이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웃을 생각이었는데 마른기침이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래도 억지로 무릎에 힘을 줬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다. 그때서야 얻어맞은 옆구리와 바위에 부딪힌 등허리에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윽, 큭!!”
“나인에게 명령해서 나중에 신관에게 치료받도록 손을 써줄 테니 억지로 일어나지 마라.”
“나, 아직 안 졌는데?”
신물을 뱉은 후 고개를 들었다. 반토막 남은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두어 번 고꾸라질 뻔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하다. 장기가 손상되지 않은 덕이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 같지만 괜찮다. 처음 충격이 커서 그렇지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닥치고 자세 잡아. 아직 대련 안 끝났어.”
“…유마.”
“어느 한 사람 쓰러질 때까지야. 그렇잖아?”
이것도 전력이 아닌 거겠지. 놈이 제대로 휘둘렀다면 나는 이미 피떡이 되어 저 바위에 붙어 있었을 거다. 놈은 내게 중상을 입히지 못하고 나는 내 실력을 다해 싸워도 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젠장, 나도 강해지고 싶다. 그래서 나도 놈처럼 놈을 힘으로 설득하고 싶다.
“검 들어!”
어금니 악물고 놈에게 소리쳤다. 펠런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검을 들었다. 놈이 조용히 묻는다.
“다리 힘줄을 끊을까. 그러면 어디 가지 못할 테니까.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붙여주겠다고 약속하지.”
“할 수 있다면 끊어봐. 재미있겠네. 내가 포복 전진도 잘하는 편인 건 또 어떻게 알고.”
기어서라도 가겠다는 말에 펠런이 침착하게 다시 검을 들었다. 반토막 남은 검을 고쳐 쥐고 나는 실실 웃었다.
놈의 말이 맞았다. 내게 미움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놈은 어떻게든 나를 요새 안에 보관하고 싶어 한다. 다소의 손상은 상관없음이라는 태그를 붙이고 소중하게 말이다.
아카데미를 벗어나,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미쳐 있었다. 큰일이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그리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내가 독기에 중독되어 이상해진 모양이다. 내가 먹은 약초가 유통기한이 다 된 걸까?
나를, 정확하게 말하면 내 발목 근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펠런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놈이다.”
무슨 소린지 되묻기 전에 솜털부터 곤두서는 감각을 느끼고 상황을 파악했다. 우리가 멋대로 자리를 깔았던 곳의 주인이 되돌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흰 털을 가진 마수를 볼 생각으로 나도 펠런이 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뭐야?”
“아라크네.”
마수를 지칭하는 펠런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놈도 긴장할 때가 있나? 때와 장소가 그럴 법하다. 혹시 내가 전투에 방해된다면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검은 나무 사이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거미형 마물의 모습에 나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분명히 이 영역의 주인은 흰 터럭을 가진 마수였을 것이다. 둥글게 깐 둥지의 크기와 털의 길이를 보자면 크기는 적게 잡아도 큰 곰만 했겠지.
그렇다면 저 거미 마물이 질질 끌고 오는 저 거미줄 뭉치는 뭘까. 시뻘건 핏물에 젖은 흰 털이 군데군데 튀어나와 있는, 사람보다 큰 거미줄 뭉치 말이다.
“이상하다. 아라크네라고? 내용이 기억나는 거 같기도 하고. 소설에서 저런 거 나왔었나? 가물가물한데.”
“…기억 안 나나?”
“내가 소설 읽은 게 벌써 10여 년 전인데 그걸 다 기억하겠냐?”
“아라크네. 마경의 터줏대감 중 하나다. 나를 각성시키는 강력한 마물이라고 하더군.”
“…….”
빌어먹을.
저 거미 마물을 만나기 위해 펠런은 공간이 뒤틀린 이곳을 며칠이나 돌아다녔을 거다. 그러나 바라마지 않은 상대를 보고도 펠런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5년 후의 펠런도 격전 끝에 치명상을 입게 되는 괴물. 놈과의 전투가 마왕 각성에 필요한 열쇠일지 아닐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소설대로 따라갈 필요가 있었던 거겠지. 그대로 따라가면 각성은 정해진 결과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거다.
“내가 유인할 테니. 그대로 뒤돌아 천천히 바위 뒤로 가. 나인을 이쪽으로 부르겠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당장 생각해도 펠런의 말보다 좋은 수는 없어 보였다. 저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라크네는 여덟 개의 다리 관절부터 몸체까지 온통 하얀 거미형 마물이었다. 커다란 두 개의 눈과 한 쌍의 눈 위에 붙은 세 쌍의 작은 눈은 새까맣고 번들번들 윤이 났다.
길고 뾰족한 다릿마디 하나하나가 내 창보다 길고 날카롭다. 통통하게 부푼 둥근 배로 위협하듯 땅을 가볍게 두드리던 놈이 몸을 웅크렸다. 마치 고양이가 도약하기 전 자세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펠런과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멋대로 행동해서 위험을 자초하는 것도 싫다. 어쩌면 내 실수는 오늘 이곳에 온 걸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해서 오늘 이곳에 오지 못했다면 나는 인간인 펠런과 대화하지 못했을 거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한 걸음 물러서기 무섭게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아라크네가 착지했다. 풍압에 머리카락이 거칠게 뒤로 휘날렸다. 나는 숨을 멈추고 네 쌍의 눈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움직이면 죽는다. 놈은 우리 중 누가 더 약한 생물인지 보자마자 파악한 거다.
푹―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펠런이 짧은 들숨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땅을 세로로 가를 듯 강렬한 기세에 아라크네의 다리 하나가 뜯겨 나갔다. 생각보다 강한 먹이의 저항에 놀란 듯 아라크네는 다시 허공으로 도약했다.
허공에서 거미줄을 이용해 멋대로 착지 지점을 바꿔가며 아라크네가 펠런을 제가 싸우기 유리한 나무 많은 공간으로 유인했다.
펠런은 다급하게 나를 뒤돌아봤다. 괜찮아. 가. 나는 입으로 뻐금거리며 녀석을 재촉했다. 여기서 아라크네를 놓치면 위험해지는 건 우리다. 차라리 여기서 놈을 빨리 처리하고 나인의 지원을 받는 것이 내가 살아남기 더 유리해질 것이다.
내 배를 꿰뚫은 흰 거미 다리를 내려다보며 비명을 목 안으로 삼켰다.
마물의 힘이 어찌나 좋았던지, 며느리발톱 달린 다리 끝은 늪의 바닥에 박혀 있었다. 다리 힘이 풀려 나는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뚫린 자리에서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와 방호복을 붉게 물들였다.
“하아아!!”
펠런의 고함이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강맹한 공격에 다리 하나를 더 잃은 아라크네는 분노해서 펠런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들이 늪지의 바닥을 파헤치고 나무를 부러트렸다.
속이 좋지 않다. 얕게 기침하자 관통당한 곳이 죽을 만치 아팠다. 폐를 다친 건 아닌지 목 안에서 피 맛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치료하면 나을 거다. 크게 뚫린 것도 아니고, 어린애 주먹보다 작은 크긴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냥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이 뜨거운데 차갑다. 그보다 온 신경이 배에 쏠린 것 같다. 감각 중 그나마 청각만 간신히 여전히 놈과 펠런이 싸우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졸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부터 반드시 해야 하는 일까지. 그래서 해냈냐고 자문한다면 해냈다고 대답하고 싶다.
일단 만나고 싸웠지만, 대화도 하고 웃었지. 놈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도 들어보고. 바보 같은 자식. 섬에서 기다린다고 할 때. 응, 알았어. 다 해결하고 찾아갈게. 라고 대답하면 좀 좋아?
여기서 자면 좆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부릅떠 봤다. 내가 아무래도 지금 사망 플래그를 제대로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추억을 회상하지 말자. 그건 말년에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한 손에 레모네이드 한 잔 쥔 채 해도 늦지 않다.
“아직, 모은 돈도, 못 썼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래. 지난 몇 년간 개같이 벌며 한 푼도 쓰지 않은 내 돈 어떻게든 펑펑 써봐야 하지 않겠냐 이 말이다. 펠런의 기합 소리로 전투 의욕을 고취하며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거미 새끼!”
소리를 지르니 배가 더 당겼다. 젠장. 머리도 어지러운 걸 봐서 피도 많이 흘린 모양이다. 큰일이다. 저 자식 마왕 되면 신전 찾아가지 못할 텐데. 나인이 신전 근처에 내려주면 혼자 찾아가지 뭐.
배에 박힌 거미의 발톱을 움켜쥐고 힘주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다. 관통상이 이런 거였나?
억지로 비틀어 빼내거나 하지 않았지만, 상처 사이로 독기가 스며든 데다 결국 장기가 상한 건지 체온이 뚝뚝 떨어지면서 몸에 경련이 일었다. 조심스레 옷자락을 벌려 상처를 본다.
꿰뚫린 자리의 피부가 시커멓게 썩어 있다.
“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는 진동만으로도 뒤틀릴 정도로 아프다. 등 뒤가 내 피로 척척하게 젖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겁이 나서 나는 내 양팔을 손으로 붙들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건 싫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배가 찢어지고 절반의 다리가 날아간 거미가 펠런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펠런의 한쪽 어깨가 피에 젖었다. 소설 외전에서 본 묘사였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읽은 감정도 잊은 지 오래다.
다만 분노가 치밀어올라, 나는 안간힘을 써서 일어난 뒤 빌어먹을 거미 새끼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어딜, 감히. 그건 내 거야. 네가 물어뜯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놔.”
새까만 분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느꼈던 어떤 감정보다 강렬했다. 질투도 이것보단 달 것 같았다. 내 검, 어디 있지? 나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저걸 죽이고 부술 것이다. 그리고 펠런을 되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때, 목에서 피 흘리던 펠런이 한 손을 들어 올려 거미의 머리에 얹었다.
펠런의 손안에서 아라크네의 머리가 우그러졌다. 단단한 겉껍질이 부서지고 피 섞인 곤죽이 솟구쳤다. 머리 일부분을 잃어버린 아라크네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다시 반격할 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아라크네는 겁에 질린 것처럼 네 개 남은 다리를 배 안으로 말며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과 경외에 짓눌려 자신보다 강한 것 앞에서 웅크린 아라크네의 머리를 펠런은 발로 밟아 터트렸다. 강력한 터주의 최후라고 보기에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그랬다. 마경이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마치 마경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너무 놀라 호흡을 멈추고 자신 안의 이변을 관조하는 그런 생물 말이다.
착각일까? 그러나 나는 시선들을 느꼈다. 마경 안의 존재들이 하나둘씩, 마치 금이 가기 시작한 알을 발견한 것 같은 시선을 하고 펠런을 보고 있었다.
펠런의 창백한 귀 위쪽으로 한 쌍의 검은 뿔이 돋아났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 펠런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는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공기만이 아니었다. 중압감에 나는 힘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이 좋지 않다. 입을 벌리자 위액에 검은 피가 섞여 흘렀다. 한바탕 게우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펠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나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놈이 한 걸음씩 내게 다가온다. 그 짧은 사이 키가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더 뾰족해진 귀 끝. 헝클어진 앞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넘긴 펠런이 내 앞에 다가왔다.
놈의 검고 차가운 눈동자는 내가 항상 보던 그 눈이었지만 인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강력하고 무서운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도 다르지만 같다.
펠런이 나를 향해 전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크네의 발톱에는 독이 있다. 어지간한 생물도 독에 당하면 오래 버티지 못하지.”
“…어쩐지. 아까 살짝 봤더니 배가 시커멓더라.”
“내 불찰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바로 요새로 돌려보냈어야 했다.”
“대화하는 거 좋았잖아. 오랜만이었고. 그리고 내가 안 가겠다고 고집도 피웠고.”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이전에도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났는데 이젠 더 키 차이가 났다. 앞머리 내린 것보다 이마가 드러나니 더 잘생겨 보였다. 뿔도 멋있고.
“이제 마왕이야?”
“…되어 가는 중.”
“…아직도 아니야?”
“종이 변화하는 거다. 완벽하게 힘을 다룰 수 있도록 진화하는 거지. 오늘 밤이 지나면 각성이 끝날 거다.”
“그래서 폭주를 안 했나? 나는 끝까지 못 보겠네.”
신관은 만능이 아니다. 고위 신관이라 하더라도 해독을 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제뉴어리 때 나를 해독한 신관이 해독이 부족하다면 미스트가를 찾아가라고 말한 거고.
마경의 터주가 만든 독이니 얼마나 독할까. 미치도록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 사이 독이 더 퍼진 건지 손과 발에 감각이 거의 없다. 배도 마찬가지다. 아픈 게 줄어서 다행이긴 한데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춥다.
그보다 문제는 눈앞의 이 녀석이다.
내 피 묻은 손이 너무 더러운데 온몸이 진흙과 피투성이라 어디 닦을 만한 곳이 없다. 망설이다가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 싶어서 눈물 젖은 놈의 뺨을 문질러줬다.
소리 없이 울던 놈이 내 손에 조심스럽게 뺨을 비빈다. 큰일이다. 나를 감금할 정도로 내게 미친놈인데, 이 녀석을 세상에 놓고 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윤유마야. 그런데 성을 붙이는 건 별로 안 좋아해. 유마라고 불러.”
“…유마.”
“그래. 펠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사람 너무 많이 죽이지 말고 선빵 때리지 말고, 그렇지만 깐족거리는 새끼들 있으면 확실히 밟으라는 말도 해야 한다. 아, 용사는 먼저 쳐도 된다.
성검은 하나라고 하니까 훔쳐서 바다 한가운데 떨어트리라고 말해야 하는데 숨 쉬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져 앞으로 고꾸라지는 나를 펠런이 받았다. 놈이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다. 나도 팔을 들어봤지만,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놈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놈의 냄새도 감촉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다면…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원하는 대로 살았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살았어.”
“…그랬지.”
“…너도 그렇게 해.”
“…그럴 셈이다.”
펠런이 짧게 대답했다. 놈의 품이 따뜻하다. 아직 온기는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조금씩 식어간다. 아쉽다. 감각이 멀어지는 만큼 녀석에게서도 멀어지는 것 같다.
죽고 싶지 않다. 죽기 싫다. 살고 싶었다. 무섭다. 무서운데. 어쩌지. 무서워. 무서운데 여기서 겁먹고 울거나 약한 소리를 하면 놈에게 족쇄가 된다.
아, 젠장. 블리스에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녀석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녀석에게 미련으로 남고 싶은 마음은 없다. 추억 정도면 괜찮겠지. 하지만 족쇄는 싫다.
“…유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대답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