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파니니와 아이스티 (3) (10/23)

4. 파니니와 아이스티 (3)

이틀째, 제리가 졸다가 낙마했다.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나란히 달리던 검사가 제리의 허리를 낚아채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리와 비슷하게 상태가 좋지 않은 시종 몇을 추려 녀석에게 넉넉하게 여비와 식량 등을 챙겨준 후, 테넨과 함께 다시 블리스로 출발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도련님.”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따라와. 블리스 성에 도착하면 바로 명패 보여.”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나 말고 네 몸부터 챙겨. 알았지?”

여정 내내 산적이나 마물을 만나지 않았다. 무장한 인원이 다수라 산적이 감히 덤비지 못했고, 마경이나 북부 산맥이 아니고서야 마물도 모르고 살다 죽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배웠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을 품고 달리는 내게 고요는 오히려 두려움이었다.

밤이 깊어질 즈음 운 좋게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농업이 주된 일인 마을이라 여관은 없었고, 여관도 겸하는 마을 회관에서 침낭을 풀었다. 그래도 지붕도 있고 새벽이슬로 머리 적실 일도 없었다.

먼지와 피로가 쌓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 끼어 우물가에서 몸을 씻었다. 출발까지 시간이 촉박해 몸에 묻은 먼지를 대충 씻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오전 중, 제후국에서 온 듯한 행상 무리를 만났다. 우리를 산적으로 착각한 그들은 겁먹었지만, 가문의 문양을 확인하고 곧 안도했다. 상인들의 옷차림은 멀쩡했고 조금 지친 것 말고 크게 다친 기색은 없었다.

“어제까지 블리스의 성문은 닫혀 있었습지요. 오늘 새벽부터 다시 성문을 개방해 이제 나오는 길입니다.”

“블리스는 어떤가?”

“본 적 없는 거대한 마물이 등장했다고 하더군요. 소문에 따르면 커다란 이종 와이번이라 하던데, 글로리와 블리스 두 분의 제후께서 그것을 상대하시는 중이라 합니다. 곧 제후께서 그놈을 처리하시겠지요.”

정보를 통제한 건지, 상인들은 암룡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제국 수도에서 출발해서 사흘 만에 나는 국경을 넘었다. 폐쇄된 국경이 다시 열려 출입국 사무실은 상인들로 들끓었지만 우리는 이름 걸린 명패와 창과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간단히 통과했다.

국경을 넘어서자 만년설 뒤덮인 거대한 산맥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산맥은 신이 땅을 비틀고 구겨 비약적으로 솟구치게 만든 비현실적인 크기였다. 왜 저걸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한 건지 의아할 정도다.

구불거리는 산맥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푸르르지만, 나무가 내내 울창한 건 아니다. 고개를 꺾을수록 산맥은 서서히 푸른 기가 사라지고 일정 높이부터 회색 땅이 마치 잘못 쌓인 퇴적물처럼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흰 눈이 수북하다.

북부 산맥이라더니 시야에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길다.

석회가 섞인 버석버석한 냄새가 바람 사이 섞여 들어왔다. 얼음처럼 맑은 물이 개천을 이뤄, 도시를 끼고 크게 휘돌아 흘렀다. 도시 곳곳에 가늘고 새파란 가로수가 울창했다.

산을 품고 있어 가는 길에 언덕과 급경사가 많았지만, 균일하게 타일 깔린 도로는 말을 타고 달리기 좋았다. 나와 테넨, 그리고 우리와 동행한 기사와 병사들은 곧장 계곡 사이 우뚝 선 푸른 지붕의 성에 도착했다.

“나는 다니엘 블리스의 적손이며 종자인 자허 블리스다! 제후께서 싸우는 전장으로 나를 안내하라!”

내 머리카락 색과 창을 보고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나는 성문 앞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반응은 즉각적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문의 문장을 가슴에 새긴 갑주를 입은 병사 둘이 튀어나왔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제후께 나를 안내하라.”

말을 탄 두 병사의 뒤를 따라 나와 테넨은 다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피로가 극에 달해야 정상이겠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맑다. 블리스 성에 도착한 게 아침인데, 말을 타고 국경에 닿을 즈음에는 벌써 해 질 녘이었다. 땅이 달리기 좋은 완만한 언덕이어서 망정이지,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야영을 할 뻔했다.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인데도 바람이 차다. 나는 눈이 녹지 않은 거대한 산맥을 고개 꺾고 올려다봤다.

코앞에 닿을 것처럼 보였지만, 앞으로 30분은 더 달려야 전장이란다. 나는 새삼 질려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높길래 원근감도 박살 내는 걸까.

해가 질 무렵 전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금속 골자로 만들어진 송전탑들이었다.

산맥과 제후국의 경계 사이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우뚝 선 10m 높이의 송전탑이 백여 미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맥을 에워싸듯 땅에 박혀 있다. 생김새는 지난 생에 봤던 송전탑과 흡사한데, 송전탑에 걸려 있어야 할 전선 대신 반투명하게 반짝거리는 줄이 이어져 있었다.

“저곳에서 마물의 침입을 막는 역장이 흐릅니다.”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강의 시간에 배운 적 있다. 들은 대로 탑의 가장 높은 자리에 빛의 신의 상징이 걸려 있었고, 길게 뻗은 사슬 같은 반투명한 역장은 송전탑에서 또 다른 송전탑으로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빛의 탑입니다. 총 개수는 총 1,500개 정도 됩니다. 모든 역장이 닿는 길이는 산맥 줄기를 따라 약 1,400km이며 혼부터 블리스를 지나쳐 글로리까지 수호합니다.”

“300여 년 전 마왕의 토벌 이후 신께서 내린 은총이었지요?”

“그야말로 기적이지요. 탑을 중심으로 원기둥 형태의 파장을 내뿜는데 그 범위는 밑면 반지름 500m, 기둥의 높이는 지상 8,000m로 하늘과 땅을 동시에 아우르며 마물이 싫어하는 파장을 내뿜고 있다고 하더군요.”

“탑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마물은 없다고 배웠습니다.”

“제가 배울 때도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이번에 이변이 벌어진 듯합니다.”

드로젠 역시 북부 산맥의 끝자락과 국경을 마주하지만, 그곳에는 탑이 없다. 마경이라 불리는 늪지는 인간을 포함해 마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오염지대다.

서열 싸움에서 낙오되거나 거주 영역을 빼앗긴 마수 정도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의탁하는 곳이니 직접 북부 산맥과 맞닿은 세 제후국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그리고 소설에서 마왕 놈은 마경의 마물을 거느리는 것부터 시작해 인류 학살을 자행하지. 『굴러라 용사님』을 떠올렸더니 위장이 뻐근하다 못해 욱신거렸다. 제기랄.

저 탑이 성벽을 대신해 마물의 침입을 막기 충분했기에 제후국들은 북부 산맥에 성벽도, 해자도 망루도 파거나 세우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제국 건국 당시, 빛의 신의 가호를 받은 대신관이 신의 힘을 빌려 저 송전탑 같은 것을 사흘 밤 만에 세웠다고 들었다.

강의 시간에 탑에 대한 설화를 읽으며 ‘아, 그래. 작가가 비형랑 설화를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결국 저 송전탑이 무너지면 제후국과 산맥 사이를 막는 마법적인 방호벽은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마물이 저 탑을 공격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본능적으로 탑에 접근하기를 꺼리고, 본능을 이기고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파장 때문에 내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멎는다고 했었지. 송전탑이 일종의 전선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송전탑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요새를 세웠다.

야트막한 언덕을 파헤친 제방마다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역장 너머 포진한 마물을 경계했다. 곳곳에 있는 공성 탑과 쇠뇌는 하늘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마물과 전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전 사령부는 700호 탑 아래입니다. 따라서 오십시오.”

앞서 블리스 성에서 만난 병사가 우리를 송전탑 아래 자리 잡은 거대한 막사로 안내했다.

“역시 분위기가 지난번 왔을 때와 전혀 다르군요.”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걸까. 하긴 테넨은 이미 서임을 받은 기사라고 했다. 테넨의 말을 듣고 그의 시야를 좇아 역장 범위 안에서 소대 단위로 방호진을 선 병사들을 바라봤다.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여섯 개의 뿔이 달린 거대한 검은 와이번들이 석양이 지기 시작한 붉은 하늘을 검게 물들일 정도로 많다.

수만 마리는 되어 보인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검은 하루살이 같은 게 우글거리는 걸 보고 있었더니 속이 좋지 않다. 빌어먹을 와이번들은 파장이 닿는 영역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재빠르게 몸을 꺾어 선회했다.

“키이익!”

쇠뇌의 사정거리 안에서 알짱거리고 있지만, 저 수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쇠뇌가 몇 개나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가죽을 찢는 것 같은 불쾌한 마물의 울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와이번의 수는 심각할 정도로 많았고 그보다 문제인 건 멀리, 전장 한구석 똬리를 말고 있는 검푸른 용이었다.

“미친, 진짜 용이네.”

용과 막사 사이의 거리가 제법 멀다. 날이 맑아 가시거리가 제법 멀 텐데도 어림잡아 용과의 거리가 1km 정도 되어 보였다.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용에게까지 닿을 리 없는데, 전장을 무던히 관조하던 용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서 공포 어린 앓는 신음이 들렸지만, 암룡 바슈키는 거구를 일으키는 대신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왠지 암룡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와, 씨. 뭐가 저렇게 크냐.

원근감을 무시하는 크기가 산맥과 다르지 않다. 병장기와 마물의 발톱이 부딪치고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불안해하며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 막사로 말을 몰았다.

“전갈을 무사히 받은 모양이구나. 잘 왔다.”

“종자 자허 블리스, 제국의 기사 다니엘 블리스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나와 테넨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미리 받은 건지, 영감님을 비롯한 글로리의 제후가 막사 밖으로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나와 테넨은 제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하자. 먼 길을 달려온 병사와 기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밤이 깊어진 건지, 아니면 피로에 시달린 탓인지 영감님 눈가에 그늘이 깊다.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작전 사령부를 떠났다.

막사 하나를 배정받고 짐과 말을 풀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운 병사와 기사들에게 오래 끓여 건더기가 뭉그러진 걸쭉한 수프가 한 컵씩 배급되었다. 재편성을 받았다고 해도 인원수에 맞춰 식량 등을 배급받은 건 아니라서 지금 당장은 공복을 간단히 채우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막사 안은 사용감이 있었다. 익숙한 냄새에 영감님이 쓰시는 막사라는 걸 깨달았다. 간이침대가 총 네 개였는데 모포가 깔린 곳은 두 군데뿐이라 빈 침대를 찾아 짐을 밀어넣었다.

막사 밖으로 나가기보다 일찌감치 잠을 청하기로 했다. 눕고 나니 노숙과 긴장감 탓에 며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새벽까지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잤다.

다음 날 아침 글로리의 제후이신 크림힐트 글로리가 곧 네 명의 천부장들을 불러 우리와 함께 온 병사와 기사를 부대 내에 재편성했다. 젠장, 원래 세상에서도 군대는 가본 적 없는데 여기 와서 전쟁하게 생겼네. 입 안이 쓰고 텁텁하다.

내가 사령부에 도착한 직후 테넨과 몇몇 기사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영감님 부대로, 그리고 테넨은 크림힐트 글로리의 부대에 부사관으로 편입했다. 편입이라 하나 주군께 기사서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봉토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백 부장의 권한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전투에 참여하겠지만 여기서 내 역할은 그게 아니다. 영감님은 만약의 사태에 당신께서 영면할 때를 대비해 나를 부른 거다. 제후의 자리가 전투 중 빌 때를 대비해 공석으로 인한 병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예상은 했지만, 각오는 하지 못했나 보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생각을 닫았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크림힐트 글로리는 전시 상황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전투는 바슈키가 모습을 드러낸 나흘 전, 단 10분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대치 중이야.”

격전을 치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암룡 바슈키는 모습을 드러낸 첫날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고도 계측을 한 바에 의하면 바슈키의 비행 고도가 탑의 역장 영향력 밖 해발 8,000m로 추정되었다. 고소 적응을 해야 하는 7,500m 높이에서 태연히 활동하는 생물이라니……. 하, 좆같은 뱀 새끼.”

크림힐트 글로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거대한 테이블을 가득 채운 북부 산맥 지도를 응시했다.

“보란 듯 역장 범위 밖에서 비행한 거야. 역장은 제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선언한 셈이지. 그보다 문제가 있다. 저 빌어먹을 암룡은 역장에 저항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

“역장에 저항하는 아티팩트라고요?”

“그래. 바슈키는 우리 앞에서 역장을 비틀고 추정 1,000마리의 와이번을 풀었다. 수도를 습격한 놈들이 바로 그놈들이야. 궁수와 마법사가 즉시 반격해서 놈들을 저지했지만, 제국의 국경을 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법을 생각하지 못했어. 역장이 열린 직후 바슈키는 제국 전역으로 와이번을 텔레포트시켰다. 다수의 개체를 정확하게 제국의 주요 거점 위로 떨어트린 거야.”

“고위 신관과 마법사가 역장을 연 마법을 역추적했다. 지속 유지가 가능한 마법사의 마법은 아니다. 고위 사제가 어둠의 신성을 감지했고, 어둠의 신성을 품은 아티팩트가 발동했음을 확인했지.”

“역장을 뒤튼 후 신성은 확연하게 줄었지만,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더 역장을 뒤틀 수 있을 정도의 어둠의 신성이 감지된다고 하더군.”

다수의 와이번을 제국 위에 떨어트리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 암룡은 직접 뒤틀린 역장 안으로 들어와 제후국 본진을 공격했다. 봄이 되어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역장을 따라 이동 중이었던 세 제후를 정확히 노린 습격이었다.

바슈키가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가 역장을 뒤튼 것은 10여 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라고 한다. 어둠의 신성으로도 역장을 제어하는 데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게 천운이었다. 뒤틀린 역장이 되돌아오기 직전 암룡은 역장이 닿는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고작 10여 분이다.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암룡을 상대한 대가로 영감님을 비롯한 세 제후의 사지는 박살이 났다. 내장이 찢어지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급 신관 셋이 실신 직전에 이르기 직전까지 치료한 덕에 제후들의 몸을 재생시킬 수 있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신관의 치료를 받을 틈도 없이 즉사한 기사와 병사가 속출했으며, 눈앞에서 최강의 창과 검이 찢기는 모습을 보고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난 이들 또한 있었다고 했다.

영감님 옆에서 묵묵하게 서 있던 두 기사를 본다. 한 명은 내가 알고 있는 이다. 토멀린과 함께 종종 내 창을 봐주던 기사다.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누군지 알 것 같다. 군인처럼 짧게 친 청자색 머리카락과 노란 눈. 외형 나이만 보자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다. 아마 내 방계 친척 중 한 명이겠지.

“에밀 블리스. 국경 수비대장이며, 네 6촌 형제다.”

“자허 블리스입니다. 뜻한 자리는 아니지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밀 블리스는 아무 말 없이 악수한 후, 나를 가늠하듯 우묵한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 데 익숙하긴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인 경우는 또 처음이다.

“나흘째 단순 대치 중이지만 국경에 집결한 와이번을 비롯한 마물의 수가 심상찮다.”

“라울 미스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담당 기사에게 보고가 있었으니 10분 내 도착할 겁니다.”

곧 부석부석하고 메마른 장신의 중년 사내가 품 안 가득 서류를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콧잔등까지 미끄러진 안경을 고쳐 쓴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다가 내게 허겁지겁 손을 내민다. 그 바람에 사내가 안고 있던 서류가 우수수 바닥에 쏟아졌다.

“라울, 반가운 건 알겠지만 서류부터 챙겼어야지.”

“아, 네. 아버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자허 블리스입니까? 예상보다 반나절 일찍 도착했군요.”

악수를 받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바닥에 쏟아진 서류를 줍는 걸 돕기로 했다. 영감님이 부른 이름 덕분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기도 했고.

라울 미스트. 그러니까 내 고모부 겸, 블리스가의 제후 대리이기도 한 실세다.

서류를 추린 라울 미스트는 지도가 펼쳐진 대형 테이블 위에 자신이 가지고 온 문서를 줄줄이 늘어놓고 펜을 꺼내 몇몇 페이지에 줄을 그었다.

“바슈키의 활동 기록을 찾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목격된 기록이 약 20여 년 전, 그리고 이건, 넘어가고. 이것도 필요 없고. 그래. 역장 저항, 역장 저항, 여기 있군요. 300여 년 전. 탑이 세워진 건국 초기 바슈키에 의한 역장 저항 기록 또한 발견했고요.”

“20여 년 전 목격된 기록이라고?”

“예. 20여 년 전 건기, 역장 근처 방목장에서 산양을 치던 양치기 다수가 북부 산맥 위를 나는 암룡을 목격. 잠깐, 따로 빼둔 문서가… 여기 있군요. 그러나 역장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고 목격한 시간도 약 5분여에 가까워 서면 보고로 끝났습니다. 이후 출몰이 없어 다른 대응은 없었고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

“아, 아아. 나는 기억 나는 것 같아. 이후 기록을 확인했지. 하지만 역장 저항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는데?”

“예. 크림힐트 님 말대로 남아 있는 기록이 신전에 남은 신학자가 작성한 제국 연대기뿐이라 찾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그 또한 고작 한 줄 적혀 있었을 뿐이죠. 여기, 여기 있습니다.”

“그렇군.”

“바슈키가 가진 아티팩트의 역장 저항에 대한 기록은 300여 년 전 탑이 세워진 해에만 있었던 일인 데다 기록이라고는 ‘암룡은 불길한 물건을 써서 빛의 신께서 내려주신 기적에 저항하려 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가 끝이어서요.”

답답한 듯 목을 옭아맨 투구 끈을 벗고 크림힐트 글로리는 라울 미스트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뭐야. 저 빌어먹을 뱀 새끼를 처리하는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빛의 신께서 함께하길. 젠장. 암룡을 죽이려면 빛의 신의 축복이 깃든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세대에서 보유한 축복받은 무기는 성검뿐이죠.”

“성검? 성검은 용사만 쓸 수 있잖나.”

“예.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용사의 강신 조건은 동화나 영웅시를 들으셨으니 알고 계시지요?”

“…마왕이 각성하면, 그의 대적자인 용사가 눈을 뜬다. …마왕이 각성한 건가?”

우르르 쏟은 문서 몇 장을 꺼내 대충 펼쳐둔 라울 미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아닙니다. 암룡 바슈키는 마왕의 충복이며, 마왕의 명령을 듣긴 합니다만, 마왕이 각성하지 않은 시기에도 종종 잠에서 깨어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마족이 개인주의 강한 군집생물이라는 건 다들 아실 테고, 단지 그전까지 바슈키의 기록은…….”

“…….”

“어디 보자, 여기 있네요. 이 기록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북부 산맥 안에서 암룡의 움직임을 목격했다.’ 정도였지 지금처럼 역장을 분쇄하고 인간을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왕이 강림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 건가?”

“우선 블리스의 신전에 머무는 대신관님을 직접 면담해 성검의 주인이 눈뜨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받았습니다. 좀 더 정확한 확인은 성검이 안치된 제국 내 대신전에서 인증을 받아야 하기에 마법사를 통해 연락을 보냈고요.”

“바슈키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를 상대할 무기와 전사가 없다는 거군.”

“예. 악순환인 겁니다. 성검이 아니더라도 축복을 받은 무기라면 뭐든 가능합니다만, 축복이 깃든 다른 무기는 이종족의 섬의 군주가 보유하고 있거나 혹은 실종 상태입니다.”

“흐음.”

“그렇다고 성검을 쓰자니 용사가 없고, 용사가 눈뜨려면 마왕이 각성해야 하고, 마왕이 각성하면 전쟁이 벌어지죠. 미치겠죠?”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라울 미스트는 막사 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검푸른 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기에 목표를 다시 잡아야 합니다. 바슈키를 사냥하는 건 불가능해요. 저건 어둠의 신이 빚은 마왕의 오른팔입니다. 가장 좋은 건 놈을 북부 산맥 안으로 돌려보내는 건데, 문제는 저 암룡이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저것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예. 아시다시피 용은 마법을 씁니다. 마수와 마물 중 선천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많습니다만, 아티팩트의 역장 저항은 차치하더라도 광범위 텔레포트는 바슈키 자신의 마법이라고 우리 쪽 마법사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자신의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마법사는 지성을 가지고 있죠.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위 중일 겁니다.”

나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미묘한 의심이 든 탓이다. 마법을 쓰는 마왕의 부하가 낯설지 않다. 이 세계관에서도 용이 폴리모프할 수 있나? 고민하다가 라울 미스트에게 물었다.

“암룡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까?”

라울 미스트는 새삼 내 존재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음.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들의 마법 중 변신이 있긴 하지만 고등 마법이지요. 바슈키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역장에 저항해 인간의 형태로 우리 진영을 침범하는 때도 상정하겠습니다.”

그렇구나. 근거 없는 가정이지만 나는 마왕의 유년기를 지켰다던 마법사 나인 드라코헤드가 바슈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법사? 퍼뜩 가정 하나가 머리를 치고 갔다. 나는 서둘러 손을 들고 의견을 물었다.

“잠깐, 바슈키가 마법사라면 이쪽의 마법사를 통해 통신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법 회로를 연결해 개인 주파수를 맞추면.”

마왕 놈과 마법사는 그렇게 대화했다고 들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우리와 함께 온 마법사도 그런 식으로 원거리 통신을 했고.

내 말에 영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우리 영감님부터 글로리의 제후님까지 나를 돌아봤다.

“마족과 통신을 한다고?”

“아, 그거 재미있는 가설이네요. 그렇지만 불가능할 겁니다. 제가 마법사면 한번 시도해 보고 싶긴 한데,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도 종족이 다르면 파형 또한 다릅니다. 주파수를 맞추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해야 할지.”

“아…….”

“더군다나 마족의 마법은 어둠의 신에게 가호를 받아 정신계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아, 맞아. 설혹 통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암룡이 파형을 맞춰 이쪽의 마법사에게 정신 오염 마법을 걸 수도 있고.”

“…그렇군요.”

“발상은 좋은데? 다소 위험을 감소하면 놈의 의중을 들을 수 있다는 소리 아냐?”

“마족의 마법을 얕봐서는 안 됩니다, 크림힐트 님. 사제의 치료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왕 놈에게 정신계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잊고 있었다. 정신 오염은 위험하지. 정말 저 암룡이 나인이라면 더더욱 문제가 된다.

물량 공세에 버틸 놈이 없으니 차라리 쓸어 버려야 한다는 의견부터 대신관을 모셔와야 한다는 말까지 오갔다.

“예. 대신관께서 오시면 굳이 빛의 신께서 축복하신 무기가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빌어먹을, 황제 폐하께서 이런 상황에서 대신관을 제국 밖으로 내보내실 것 같아?”

“말을 삼가게, 글로리. 황제 폐하의 안위가 최우선이니 당연한 걸세!”

빌어먹을과 황제 폐하를 연달아 외친 건 아마도 의도한 것이었을까. 누가 들을세라 단호하게 크림힐트 글로리 제후의 말을 자른 영감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납게 미간을 구긴 크림힐트가 손바닥으로 지도 위를 강하게 내려쳤다.

“아니, 시발 그러면 여기서 저 새끼 떠날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으라는 거요?”

분노한 크림힐트가 막사 쪽창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나도 모르게 쪽창 밖을 바라봤지만 여기서는 암룡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저어. 전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막사 구석에 앉아 있던 두꺼운 방한용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손을 들었다. 지도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두 제후를 포함해 막사 안의 모든 이가 마법사에게 집중했다.

해결할 방도라도 있는 걸까. 이 상황에서 입 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마법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아까보다 더 심하게 긴장한 듯했다.

“저어, 사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바슈키의 통신 신청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바슈키가 통신 연결을 요청했다고?”

“그것이, 그렇습니다. 북부 산맥 쪽에서 온 송신이며 마법 파장을 보면 바슈키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언제부터?”

“사흘 전부터입니다. 전하. 그러나 마족의 소행이다 보니 어떤 마법사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정신 지배나 정신 오염을 위한 밑 작업일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이유를 변명하며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언하듯 말을 더한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마법사라면 절대 마족과 마나 회로를 공유하지 않을 겁니다. 폐인이 될 것이 당연하고 최악의 경우 정신 지배에 당해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대의 판단은 논리적이다. 그러나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는 정도는 가능했을 텐데.”

“사실 그게, 마법사 중에서 바슈키와 통신 연결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미친, 아니 정신 나간… 급진적인 발상을 하는 마법사가 있기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법사는 시선을 피했다. 크림힐트는 탄성 같은 휘파람을 불었고, 영감님은 낮게 침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확실시되고 결단이 선 후에 보고하려 했다며 마법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 용감한 마법사는 어디 있지? 우선 만나 보고 싶군.”

크림힐트가 반색하며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그 뒤에서 테넨이 슬쩍 미간을 짚었다. 잠시 고민하던 영감님도 우선 그 마법사를 막사로 데리고 오라며 지시했다.

병사 둘과 함께 막사를 나간 방한 코트 마법사가 상당히 젊어 보이는 마법사를 한 명 데리고 돌아왔다. 짙은 송충이 눈썹에 장대한 체구가 마법사라기보다 전사처럼 보였다.

“마법사 식스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식스라, 드로젠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로열 졸업 후, 혼가의 녹봉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슈키와 대화하겠다고 한 마법사가 자네인가?”

통성명은 상관없다는 듯 크림힐트가 용건부터 물었다. 영감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크림힐트 글로리를 말렸다.

“설사 식스라는 저 청년이 하겠다 하더라도 우리는 허락해서는 안 되네. 마법사는 중요한 인재야. 저 친구가 정신 오염을 당하면 그를 잃게 되거니와 다행히 무사하더라도 평생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볼걸세. 마족에게 오염된 건 아닌가 하고.”

“그렇다면 다른 대응 있습니까? 역장 한계 거리에서 보란 듯 앉아서 시위하는 저 뱀 새끼 처리할 방법 말입니다.”

“놈이 역장에 저항할 수 있는 시간은 짧네. 다시 공격해 오면 놈을 역장이 작용하는 거리 안에서 묶어두기로 했잖나.”

“아. 예. 그 수가 성공할 때까지 우리 애들 다 뒈지게 생긴 것까지 이야기하다 말았죠.”

크림힐트는 짓씹듯 내뱉었다. 화를 내고 있지만 그게 우리 영감님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수백 년 만에 마물이 제국의 상공을 침공했음에도 이곳, 최전선에서 나는 제국 병사를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나는 슬쩍 영감님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국 측에서 마물 침공에 대한 공식 대응이 있었을 텐데요.”

“…공식적으로 제국은 마물의 침입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와이번은 그럼 땅에서 튀어나왔답니까?”

“신께서 내려주신 탑이 건재하니 마물 역시 침입하지 않았다. 그것이 제국의 공식 입장이야.”

그렇군. 그래서 고위 신관도 제국의 기사들도 지원을 오지 않은 거군. 황제 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뇌는 아닐 것이다.

이를 으득 갈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크림힐트 글로리 제후의 분노가 이해되면서, 따르는 황제에게 뒤통수 맞고도 따라야 하는 영감님이 측은해졌다.

“다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애들 다 죽고 나면 제국은 누가 지킵니까? 여기 무너지면 바로 제국이에요. 제국의 코앞에 저 뱀 새끼가 대가리를 들이밀면 그땐 다 죽는 겁니다.”

박력 있는 크림힐트의 말에 영감님은 그래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건 자네가 가장 싫어하는 일 아니었나?”

“지금 우리가 소수잖습니까. 다수는 제국이고요.”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언쟁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았다.

어느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역장을 잠시라도 무력화할 수 있는 적이 밖에 뻔히 있는데 그걸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쓸 수 없고, 암룡을 쫓을 힘을 가진 대신관도 제국에서 꽉 쥐고 놔주지 않는 상황이고, 첫 전투 이후 아무 소득 없이 대치가 계속되고 있으면 나라도 빡치겠다 싶은 순간.

갑자기 두 제후님이 동시에 창과 검을 들고 고개 숙이고 있던 식스라는 젊은 마법사를 향해 당장이라도 벨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상황을 알아차린 다른 기사들도 함께 검을 빼 들고, 방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만 경악한 채 뒷걸음치는 기묘한 고요 속에서 마법사 식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친애하는 인간 여러분.”

말투는 부드러웠고 목소리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영감님도, 글로리의 제후도 적수를 앞에 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지독한 살기로 마법사 식스를 압박했다.

“내가 보낸 안부 인사는 잘 받았나 모르겠군요. 그런 거로 죽을 인물들은 아니니 무사 무탈하리라 믿습니다.”

“암룡?”

“그렇습니다. 바슈키입니다. 당신네 측에 며칠 동안 꾸준히 링크를 연결해 달라 요청했는데 이제야 연결이 되었군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이번에는 만 마리 정도 더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지 뭡니까.”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크림힐트가 먼저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머리를 굴려 상황을 파악해 봤다. 두 제후의 미묘한 대치 중에 마법사 식스가 동의 없이 바슈키와 마법 회로를 연결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틈에 저 마법사의 의식을 바슈키가 지배했으리라.

‘이 빌어먹을 뱀 새끼야.’로 거친 육두문자를 쏟기 시작하는 크림힐트 글로리를 테넨이 만류했다. 창을 굳게 쥔 영감님이 서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상한 술수를 쓰면서 링크를 연결하려 했다면 뜻하는 바가 있겠지. 목적을 말하고 떠나라.”

“건방지게 지껄이지 못하게 잘 다지고 구워놨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 모양입니다. 하여튼 이래서 인간은 숨만 붙여둘 필요가 없다니까.”

미간을 좁히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식스 본인이 짓는 표정처럼 어색하지 않은 게 오히려 소름 끼쳤다. 바슈키는 인간의 얼굴로 표정을 짓는 게 익숙한 듯했다.

“그렇게 노려보면 내가 ‘아이쿠 무서워라’ 하며 꼬리 말고 도망갈 것 같습니까? 나도 바쁜 몸이에요. 이 번거로운 곳까지 오고 싶지도 않았고.”

밉살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던 마법사 식스, 아니 바슈키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좌중을 훑어봤다. 나 역시 놈과 눈이 마주쳤다. 긴가민가했던 가정이 반쯤 확실해졌다. 놈이 나를 알아본 것처럼 나도 놈을 알아차렸다. 그렇구나. 나인 드라코헤드가 바슈키였군.

마음이 복잡해졌다. 펠런의 연락도 받지 않고 뭘 하나 했더니 이런 일을 저지르냐. 심지어 저 자식은 펠런이 머무는 아카데미를 습격했다. 반역 같은 건가. 아직 마왕이 되지 않은 마왕의 싹을 일찌감치 잘라낼 생각인가.

아니면 이 모든 사달이 펠런이 꾸민 일일까.

“경고하러 온 겁니다. 오랜만에 우리 쪽에서 여러 종이 한 번에 번식기에 들어갔거든. 우리 애들 사나운 거 알잖아요. 네놈의 신이 세운 빌어먹을 탑이 있으니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슬금슬금 우리 영역을 침범하질 않나, 토벌이랍시고 죽이질 않나. 너무하잖습니까.”

“그래서 경고라도 하러 온 건가? 마물 토벌을 하지 말아 달라고?”

“이미 죽은 애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당신들을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건 경고입니다. 당신들은 선을 넘기 직전입니다. 다시 선 안으로 돌아가 얌전히 살 건지, 아니면 300년 만에 다시 전쟁을 벌일지 알아서 정하시길. 아, 이건 두 제후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통해 말을 전해 들을 당신들의 황제에게 하는 말이지.”

“그래서 어쩔 셈인가. 계속 탑 근처에서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반격할 것이다.”

“내가 여기 머무는 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나도 내 삶이 있는데 슬슬 산맥으로 돌아가야지요. 아, 한 가지 더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당분간 마경에 마물과 마수들이 들끓을 겁니다. 번식기에서 패배한 놈들이 갈 수 있는 장소가 다 그렇지 뭡니까.”

“목적만 말하라. 바슈키.”

“그 녀석들을 패배한 머저리라 부르는 건 우리 쪽 평가고, 그렇다고 다른 놈들에게 맞고 다니는 것까지 방치하고 싶진 않거든. 우리 애들 토벌한다고 마경 뒤집어엎으면 우리도 너희를 엎겠다는 말이지요.”

“우리 땅에 발을 들이미는 마물을 내버려 두라는 거냐!”

“걱정하지 마시지. 어차피 마경은 오염된 땅.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약한 놈들은 다 도태될 거요.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경쟁에서 탈락한 녀석들에게 당연한 순서니까. 그렇지만 말이야.”

창기사인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게 탁한 마력이 식스의 몸에서 흘러넘쳤다. 시커멓게 물든 흰자위와 검푸른 입술이 마치 시체 같다.

“드로젠의 일은 드로젠에서 끝내는 겁니다. 괜히 돕겠다고 제국이나 당신들 제국의 검이 마경에 끼어들면 나 역시 마경의 동족을 돕기 위해 네놈들을 쓸어버릴 수밖에.”

식스의 코와 입, 귀 등 모든 구멍에서 시커멓게 물든 검은 피가 줄줄 흘러넘쳤다. 방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양손을 펼친 후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하단 말이죠. 그럼 대화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죠.”

콧잔등과 턱이 시커멓게 물든 바슈키가 검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윽고 고개를 정확히 돌려 나를 바라봤다. 뭐야, 또 뭘 하려고.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데 놈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불길한 가정이 폐부를 짓눌러 숨이 막혔다. 신음이 나올 것 같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지 마.

‘유마, 사흘 후 690호 탑 역장 밖으로 오십시오.’

나는 멀거니 놈을 바라봤다. 칼에 급소를 찔린 것처럼 고통스럽다. 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지 않길 빌었다. 표정을 관리하고 싶어도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 표정을 본 마법사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어린다. 의아함은 곧 당황으로 변한다.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지만 말 대신 검은 핏물이 줄줄 쏟아진다.

다른 수를 쓰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실 끊어진 인형처럼 젊은 마법사 식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데리고 온 방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기겁하며 쓰러진 식스를 마법을 써서 빠르게 탐지했다.

“식스? 젠장. 죽었어!”

바닥에 널브러진 젊은 마법사의 시체는 처참했다. 시커먼 핏물이 막사 바닥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마족의 마법이니 오염되었을 거라며 시체에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다. 노련한 자들은 코와 입을 막고 시체에서 멀어졌다. 가장 라울 미스트가 먼저 가지고 온 자료를 끌어안고 구석으로 도망쳤고 그 앞을 에밀 블리스가 막았다.

“신관 불러서 시체 치워.”

크림힐트가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막사 문을 찢어발길 듯 누군가 거센 기세로 들어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이 발 빠르게 움직인 줄 알았는데 보초병이다.

“와이번과 용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참호에서 전방 경계 중인 병사들 뒤로 빼. 쇠뇌 장전하고, 우리가 직접 나간다. 지금부터 방어 준비 태세 1단계 시행한다.”

“명 받았습니다!”

크림힐트 글로리 제후와 창을 든 영감님이 막사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그 뒤를 에밀 블리스와 테넨이 재빠르게 뒤따랐다. 나 역시 막사 입구에 세워둔 창을 들고 뛰쳐나갔다.

나인 드라코헤드, 그러니까 바슈키는 정신 지배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명령하듯 나보고 역장 밖으로 나오라고 했겠지. 그때 나를 처리할 셈이었을까.

그러나 마법은 통하지 않았고 놈은 그걸 알아차렸다.

바슈키가 아티팩트를 이용해 다시 역장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다. 어쩌지? 만약 놈이 역장 안을 공격하면 달아나야 하나, 아니면 죽자 살자 덤벼야 할까.

다행히 병사의 말이 맞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창공을 뒤덮었던 와이번이 북부 산맥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참호에서 경계 대기 중인 병사들이 낮은 자세로 후퇴했고 그 자리를 대형 쇠뇌와 투석기가 자리 잡았다.

걸걸한 마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창을 쥔 손이 조금씩 뻣뻣해졌다. 역장을 따라 열을 지어 선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투석기가 마치 멀리 떠나는 와이번을 배웅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와이번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영감님과 글로리의 제후님은 마법사들에게 광역 탐지를 지시했다. 탑을 따라 대기 중인 부대에서 사방 수 킬로미터 내외에 어떠한 마물도 탐지되지 않았다는 연락이 왔다.

성급한 이가 입을 열었다. ‘놈들이 떠났어.’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지만 두 제후와 그 아래 기사들은 말리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곧 함성으로 뒤바뀌었다.

영감님은 잠시 바슈키가 떠난 북부 산맥을 노려봤다. 글로리의 제후가 영감님께 뭔가를 묻고 좌우 대기 중인 장교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용과 마물의 퇴각을 확인했다. 이제부터 방어 준비 태세를 3단계로 격하한다.”

머릿속에 제후들의 명령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생각만으로 꽉 찬 탓이다. 빌어먹을 저놈 탓이지. 창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산맥을 향해 떠난 바슈키를 노려봤다.

“단계적으로 경계를 늦출 생각입니다.”

멀거니 장대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이 영 보기 좋지 않은 모양인지, 내 옆에 다가온 테넨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 줬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놈들이 더 날뛰지 않는다면 며칠 내로 다시 아카데미로 귀환할 수 있을 겁니다. 올해 무투회는 아쉽게 되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를 위로하듯 하는 테넨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배정받은 부대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발 빠르게 움직이는 병사와 기사를 피해 나는 몸을 돌려 내 짐을 가져온 막사로 들어갔다. 심란하다. 처참하고, 아득하다.

나인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마왕 녀석에게 거짓말로 준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막사 밖이 소란스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짐을 열고 내가 가지고 온 물건을 확인했다.

침낭과 건량, 물과 부싯돌, 내 명패도 있고 가장 중요한 돈은 항상 가지고 다니니 괜찮다. 여기서 나가려면 말이 필요할 거다. 창을 챙겨야 하나. 아니다. 너무 눈에 띈다. 브로드 소드 한 자루로 만족하자.

이 세계에서 평민은 성이 없다. 그래서 나도 펠런에게 대충 둘러 말했다. 성이 없는 유마야. 그냥 유마.

대한민국에 대해 모르는 펠런은 자신이 알던 상식을 바탕으로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거다.

펠런은 말했다. 이방인은 정신계 마법이 잘 듣지 않더라고. 그래서 이름이 필요했던 걸까. 제대로 정신계 마법을 걸기 위해서?

배낭 안의 물건을 다 확인하고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펜과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 통은 영감님에게 보내는 내용이었다. ‘여기 와서 용과 마물을 보니 도저히 무서워서 제후가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구걸하며 살던 시절이 더 마음 편할 것 같다. 지금껏 키워주신 은혜는 감사지만 저는 제후의 그릇이 되지 못하니 제가 떠나더라도 찾지 말아주십시오.’

다른 한 통은 펠런에게 보내는 내용이었다. 놈이 마왕이라는 걸 공개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놈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각성한다. 괜히 들쑤실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러니 간단하게 썼다. 누가 봐도 오해하지 않도록.

‘이곳에 와서 내가 처한 상황과 내 그릇을 확인했다. 네 친구는 옹졸하고 이기적이다. 내 안위와 살길을 찾아 떠나니 이제 서로 관여하지 말고 살자. 추신, 선빵은 잘 맞았다. 받아칠 마음 없으니 그리 알라.’

편지를 쓰며 잠시 울었다.

다 쓴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품 안에 봉투째 배낭 깊은 곳에 숨겨뒀다.

예정 없이 움직이는 건 처음이다.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은 그대로 입기로 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니까. 그보다 문제는 머리카락 색이지만 그건 염색하고 머리카락도 짧게 자르면 괜찮을 거다.

때맞춰 병사가 나를 찾아왔다.

“제후께서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그래, 바로 출발하지.”

앞으로 내가 저지를 일을 생각하니 영감님 얼굴 보기가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만나긴 해야지. 표정을 숨기는 게 어색해서 자꾸 얼굴이 굳는다. 라울 미스트와 에밀 블리스가 영감님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 외 막사 안에 머무는 이가 없다.

“운 게냐?”

“그럴 리가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침도 아직이다. 밥 먹자고 부른 거니 긴장 풀고 앉아라. 너도 이제 앞으로 너를 도울 이들과 인사해야지.”

“그를 돕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주님.”

무뚝뚝한 표정으로 에밀 블리스가 대꾸했다. 그 말이 맞다. 얼굴 한 번 봤다고 나를 우두머리로 인정할 수 있겠나. 덤덤히 고개 끄덕여 수긍한 후 영감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들었다. 원더가의 흑각궁을 이기고 본선에 진출했다며.”

“할아버님께서 잘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올해 방학부터 블리스에 머물도록 해라. 슬슬 영지 실무도 배워야지.”

“…….”

말문이 막혔다. 뻔뻔하게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밀랍을 바른 것처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자꾸 머릿속을 짓눌러 평소처럼 태연하게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죽은 건 조카님 탓이 아닙니다.”

말끝이 늘어지는 듯 느린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라울 미스트는 따뜻한 차를 내게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바슈키와 마나 회로를 연결한 건 식스라는 마법사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식스를 죽인 건 암룡이죠. 조카님의 의견이 어찌 보면 시발점이 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음, 아닌가. 시발점이 맞나.”

“…….”

“아, 그렇지만 선택은 마법사 본인이 한 것이고, 그렇게 따지자면 그런 상황을 불러 일으킨 도의적 책임은 두 제후님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나. 그렇겠군요. 의견을 낸 것으로 책임이…….”

“라울 그만.”

물 흐르듯 내면세계로 자연스럽게 유턴하는 라울 미스트의 말을 영감님이 단번에 잘랐다. 이미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리는 라울 미스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는 영감님을 보며 설핏 웃었다.

내 기분이 가라앉은 걸 영감님이고 초면인 다른 두 사람까지 알아차린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은 마법사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팔이 길지 않은걸. 그렇다고 마법사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뭣해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앞으로 며칠 이곳에 머물며 상황을 살필 예정이다. 당분간 너도 여기 머물며 기사들의 면면을 익혔으면 싶구나.”

“아카데미 측에 연락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너도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하니 말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뒤이어 병사 둘이 둥근 빵과 수프를 가져와 간단히 배를 채웠다. 낯선 사람과 먹는 식사 자리가 불편해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더라.

식사가 끝난 후 내 6촌 형제라던 에밀 블리스가 대련을 요청했다. 속도 더부룩한데 소화도 시킬 겸 흔쾌히 대련을 받아들였다.

에밀 블리스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데다가 못해도 나보다 10년 이상 창을 다뤘으니 질 가능성이 크다. 뭐 어때. 질 때 지더라도 개처럼 물어뜯을 생각이다.

당연히 실력 차이는 있을 거다. 없으면 내가 펠런 같은 천재게? 내가 처맞을 게 걱정인 건지 영감님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당당히 창을 들었다. 적이 후퇴한 지 한나절도 되지 않은 최전선이라는 장소와 시간조차 에밀 블리스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제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겠지. 창을 들자 살기 등등한 기세가 전신을 찌르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찔러 죽이고 싶을 거다. 영감님이 옆에 있어서 망정이지.

“블리스의 이름을 등에 업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보겠다.”

“창으로 물어보시오. 나 역시 창으로 답하겠소.”

“기세는 좋군. 원하는 바다. 선공을 양보하마.”

에밀 블리스는 블리스가의 비전 창술을 쓰지 않았다. 직계가 아니니 배우지 못했을 거다.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쓰지 못하는 거겠지. 기세 좋게 급소를 노리는 창이 정직하게 느껴졌다. 지나친 살의는 창끝을 흔들었고, 그 덕분에 내가 단박에 고꾸라지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근력은 나보다 앞섰다. 자칫하면 중심이 무너질 것 같아서 상대의 창을 흘리며 기회를 엿봤다. 에밀 블리스의 힘이 워낙 강하니 놈의 창을 흘리면서도 사지가 긁혔지만 괜찮다. 아직 치명상은 없다.

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뜨거운 증오 속에 차가운 한 방을 숨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들불처럼 타올라 이성을 잃은 건지 알 수 없다.

도끼처럼 내려찍는 창대를 훑으며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겼다. 힘이 세니 도리어 내가 끌려가는 형상이다. 그대로 발을 헛디딘 것처럼 왼발 내딛기 무섭게 반 호흡 앞서 안으로 파고든다. 에밀 블리스가 창을 회수하기 전에 한 방 먹일 생각인데, 어라? 놈의 노란 눈이 차분하다.

일부러 틈을 보였구나. 생각하기 무섭게 놈의 창대가 허벅지를 꿰뚫었다. 얼마나 힘이 강한지, 뼈와 살을 부수고 파고든 창대가 바닥에 내려꽂혔다. 작살에 잡힌 생선처럼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창을 바닥에 짚어 중심을 잡는다.

“크윽!!”

에밀 블리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지독한 살의를 덤덤히 받으며, 지팡이처럼 바닥에 처박은 창대를 비틀어 꺾었다. 부러질 듯 낭창낭창하게 휜 창대가 탄성까지 더해져 에밀 블리스의 턱을 긁었다.

방심하고 한 걸음 내디딘 놈의 아래턱뼈에서 콧잔등을 지나쳐 눈두덩이까지 창날이 사선으로 긁혔다. 에밀 블리스가 피 흐르는 얼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친다.

“아아악!!”

창대를 옆구리 사이 끼우듯 끌어당긴 후 놈의 웅크린 배를 향해 내찌른다. 그러나 창대가 짧다. 한 걸음 더 내디디면 사정거리 안인데 허벅지에 박힌 놈의 창이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막았다.

“대련을 종료하도록.”

영감님이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를 중심으로 기사와 병사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나도 놈도 한 방씩 먹였다.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고위 사제 두 분이 달려와 나와 에밀 블리스의 상태를 살폈다. 창이 박힌 채로 치료할 수 없겠지. 나는 허벅지에 박힌 놈의 창을 쥐고 단번에 끌어당겨 창날을 빼냈다.

바닥이 핏물로 시커멓다. 피로와 현기증이 동시에 일었다. 오늘 안에 여기서 도망칠 생각인데 괜히 대련을 받아들였나 후회가 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조금 후련해졌다. 머리에 간신히 피가 돌고 있는 느낌이다. 역시 마음이 심란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사제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려 피와 살점 묻은 창을 쥐고 에밀 블리스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에 방심하셨구려. 나라면 발로 차, 쓰러트리고 내려찍었을 거요.”

“대련에서 죽일 수 있나. 방심한 건 맞지만 말이야. 네가 관통당했으니 움직이지 못하리라 판단했지.”

“대련 내내 내가 밀린 게 맞소. 마지막 한 방만이 유효했지.”

“전투는 그 마지막 한 방으로 결정이 나니 너나 나나 누가 이겼다고 볼 수 없어.”

마치 나를 인정하는 듯한 에밀 블리스의 발언에 나는 쓰게 웃었다. 당신의 인정은 이제 내게 필요하지 않다. 울화가 치밀어 창을 휘두른 것뿐이라는 걸 알면 내게 제후 자격이 없다고 욕을 할까.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내가 떠나고 남긴 편지를 보면 자연히 망가질 관계니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에밀 블리스의 기색을 못 본 척했다.

영감님은 내게 저녁을 먹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라고 권유 같은 명령을 내렸다. 허벅지가 관통하며 피를 많이 흘려 내가 봐도 얼굴에 핏기가 없더라.

피 묻고 찢어진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었다. 옷을 얻는 김에 병장기 관리 담당자에게 부탁해서 얇은 레더 아머를 구할 수 있었다. 내 옷이 아니라 조금 헐렁하긴 했지만 밸트로 조절하니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색을 가리고 싶어서 투구도 하나 얻었다. 암룡과 마물이 떠난 자리를 뒤처리하느라 영감님은 몹시 바쁜 것 같았다.

내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바슈키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다. 크림힐트 글로리 제후가 뭐라고 했었지. 암룡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는 많이 써봐야 한두 번이라고 했던가. 역장을 뒤틀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을 고작 나를 잡는 데 사용하진 않겠지.

아마도 마왕이 각성한 후, 제국 점령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왜 쓴 걸까. 잠시 손을 멈추고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봤다.

바슈키의 말대로 북부 산맥 근처에서 자행되는 마물 토벌을 막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마경에서 벌어질 일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인가. 둘 다일 수도 있지. 겸사겸사 나를 정신 지배할 생각도 한 것 같다.

역장을 따라 이동하고 싶지만 어려울 것이다. 탑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소대가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분명 수색 정찰대가 사주 경계 중일 것이다. 열에 아홉은 들킨다. 그리고 이동 경로가 곧바로 영감님에게 보고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역장에서 벗어나 한동안 말을 타고 달리다가 혼가의 국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될 거다. 내가 알고 있는 자유무역 도시로 갈 수 있는 가장 효율 좋은 노선이다.

영감님과 마왕 놈에게 쓴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걸 영감님이 읽으면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영감님도 볼 수 없고 그 빌어먹을 마왕 새끼도 마찬가지다. 처음 했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여야 할 정도로 내 감정이 약해진 모양이다.

‘키스도 했는데.’

불현듯 든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괜히 눈가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가죽 건틀릿의 거칠거칠한 감촉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괜찮다. 아직 마음 다 준 거 아니니까. 그래서 이름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거잖아.

더 미적거리고 머물다가 도망칠 때를 놓칠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처럼 혼란한 상황이 낫다. 내가 떠난 자리를 생각하지 말자. 앞으로 갈 길만 보자. 고개를 거칠게 털고 투구를 옆구리에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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